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정신현상학 서설 §24


(§24) 이렇게 이야기된 바에서 이런저런 귀결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 중 가장 중차대한 것은 지는 오직 학문 또는 체계로서만 실재적이고 서술될 수 있다는 점이다.[1] 여기서 한발 짝 더 나아가면 철학의 원칙이나[2] 원리라고[3] 불리는 것은, 그것이 참다운 것이라고 하더라도, 원칙이나 원리 이상의 것이 되지 않는 한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미 잘못된 것이라는 귀결이다. — 그래서 원칙을 반박하기는 쉽다. 여기서 반박은 원칙의 부족함/모자람을[4] 드러내 보여주는 데 있다. 원칙이 [모자란 놈이라는 의미의] 모자란 이유는 그것이 단지 보편적인 것, 달리 표현하면 시초가 되는 원리만이라는 데에 있다. 근본적인 반박은 원칙 자체에서 반박의 논거를 취하고 전개해야지 반박대상이 되는 원칙과 대립되는 단언이나 착상을 외부로부터 끌어들여와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근본적인 반박의 실상을 따져보면[5] 원칙을 발전시켜 원칙의 모자란 점을 보안해 나가는 것이다. 반박이란 이렇게 [전개를 통한 보안]이란 것인데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반박의 부정적인 행위만을 골라잡고, 이런 부정적인 행위 안에서의 진행과 결론이라는 긍정적인 면은 의식하지 못한다. 그래서 시초를 긍정적으로 전개해 나가는 일은 따져보면 역설적으로 시초를 부정하는 태도다. 이 태도는 원칙의 일면적인 형식, 바로 코앞에 떨어져 있는 것, 혹은 목적이라고 하는 것만이 되는 형식을 부정하는 태도다. 행위다. 그래서 [원칙을 긍정적으로 전개해 나가는 것은] 체계의 바탕을 이루는 것에 대한 반박으로 간주될 수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반박이란 체계의 근본이니 원리니 하는 것이 사실 시초 이상의 것이 아님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1] 원문 <wirklich ist und dargestellt werden kann.> 여기서 를 설명하는(explikativ) 그리고로 이해하면 wirklich/실재와 Darstellung/서술간에는 필연적인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정신현상학> 서론 §1 역자주 4에서 잠깐 언급하기만 하고 줄곧 <실재적>, <실재성>으로 번역한 , 는 사실 그 개념이 정확히 잡히지 않는다. 다시 한번 살펴보자. 어원사전에 따르면 <현실적인, 사실적인/real, wahr, tatsächlich>라는 의미와 <활동하는, 작용하는/tätig, wirksam, wirkend>이라는 두 갈래의 의미가 있다. 그리고 과 어원을 같이 하고, erk>는 그리스어 <ergon>, <노동>과 노동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결과, 예컨대 <작품>이라는 것과 어원을 같이 한다. , <ergon> 등은 다시 엮어 짜다/새끼를 꼬다(flechten)란 의미의 인도게르만어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이런 의미로서 는 또 지렁이>와 어원을 같이 한다. 지렁이>자기 몸을 비트는 자라는 의미가 있고 생성되다>와 어원을 같이 한다. 이란 원래 <돌리다/drehen><뒤집다/wenden>라는 의미의 연장선에서 <상황이 뒤집혀 전개되다/sich zu etwas wenden>란 의미로 발전하고 <무엇이 되다>란 의미가 되었다 [Duden, das Herkunftswoerterbuch 참조]. 를 이렇게 설명하고 보니 헤겔이 <철학사 강의> 서론에서 한 말이 생각난다. „Der Weg des Geistes ist die Vermittlung, der Umweg. Zeit, Mühe, Aufwand – solche Bestimmungen aus dem endlichen Leben gehören nicht hierher.“(„정신이 걸어가는 길은 갈라진 것을 하나로 엮어내는 실천이며, [지렁이와 같이] 구불구불 두루 돌아가는 길이다. 시간, 노고, 들어가는 비용 등과 같은 짧은 기간동안 이세상에 와서 사는 개별자의 삶에 적용되는 규정들을 정신에 적용하여 정신보다 지름길을 가라고 할 수는 없다.“ 이와 함께 진보넷 블로거 <공돌>님의 블로그 소개 글도 떠오른다. „아마도 우린 300년을 떠 싸워야 할 지도 모른다. 그래서 절망할 것도 없다.“(http://blog.jinbo.net/laborman) 의 개념이 이렇게 <현실/Realität> <생성/werden>사이에서 흔들리기 때문에 이것을 , 등 라틴계 언어로 번역하면 의 의미가 정확하게 잡히지 않고 대려 혼동을 야기한다고 T. Trappe G. Baptist. Zur Uebersetzungsproblematik in den romanischen Sprachen. Hegel-Studien 34 (1999)“을 참조하여 지적한다. [Historisches Woerterbuch der Philosophie/철학 [개념]사 사전, 12, 829쪽 참조.] 라이브니츠가 일찍이 지적하고 또 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듯이 영미철학에서는 <실존/Existenz>, <현존/Dasein>으로 이해되고, 유명론의 연장선에서 의식과 무관하게, 의식 밖에 존재하는 대상, 혹은 대상적인 존재라는 의미를 갖게 된다. 이런 지평에서는 의식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객관적 대상의 인식가능성여부가 문제가 되는데 이것을 명쾌하게 설명한 사람이 <순수이성비판>의 칸트다.

어원사전에 기대어 마련된 위와 같은 에 대한 개요(exposition)를 아리스토텔레스가 해석에 관하여, 혹은 명제론>에서 구별한 <가능/dynaton/possibile> <불가능/adynaton/impossibile>, 그리고 <우연/endechomenon/contingens> <필연/anagkaion/necessarium>이란 이분법에 기대어 설명해 볼 수도 있겠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우연>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우연> <필연>, 그리고 <우연> <가능>의 관계가 어떤 것인가라는 문제다. <명제론> 9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미] 생성되어 현존하는 것과 보편적인 것에 관한 명제에서는 그 명제와 부정 둘 중 하나는 항상 참이라는 배중율의 원칙이 관철된다고 확인하고 나서, 그렇지만 미래에 일어나는 개별적인 것에는“(„kath hekasta kai mellonton“) 이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한다. 미래에 일어나는 사건에도 배중률의 원칙이 유효하면 미래는 이미 정해진 필연적인 것이 되는데 이것은 앞으로 있을 일의 바탕(arche) [어떤 합의를 도출해내기 위한] 숙고 및 상의와 [이를 바탕으로 하는] 특정한 실천적인 행위(praxis)에 종속“(„arche ton esomenon kai apo tou bouleuesthai kai apo praxai ti“)되는 사실에 반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힘을 발하지 않는 것들의 안에서는“(„en tois me aei energousi“) 미래에 일어날 일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이 대칭적인 5050이 된다 („to dynaton einai kai me hoios“).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기 때문에 일어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런 <가능>으로서의 <우연> <불가능>을 제외한 모든 것 - <필연>까지 포함한 - 앞으로 일어날 일을 다 포함하는 것이 된다 (같은 책 13장 참조). <우연>의 논리적인 개념보다 자연과 존재의 [존재론/인식론적이 아닌] 존재적 생성에 관심이 있는 아리스토텔레스는 같은 책 13장에서 가능태> 란 의미의 현실태>란 개념을 도입하여 <우연>을 살펴보고 존재하는 것을 3가지로 구분한다. 첫째,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것“(„to ex anagkes on“)은 항상 현실태 모양“(„kat’ energeian“)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시간의 구애를 받는 가능태 모습을 전혀 갖지 않는다. 이것을 원초적인 본질“(„protoi ousiai“)이라고 한다. 둘째 존재자는 현실태와 가능태를 동시에 갖는 것이다. 이 존재자에서는 속성적으로는 현실태가 앞서가지만 시간의 전개 속에서는 현실태가 가능태의 뒤를 따른다. 셋째 존재자는 현실태가 전혀 없는 그저 가능태로만 있는(„dynameis monon“) 것이다. 첫번째 존재자는 중세 스콜라학이 이야기하는 신의 다른 이름인 순수행동>과 유사한 것 같은데 이것이 헤겔이 이야기하는 인지 아니면 둘째 존재자의 존재양식이 그것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아리스토텔레스의 구별으로는 어원사전에 기대어 살펴본 의 개념에 스며있는 <프로세스>가 명쾌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가 있어야 <가능태>가 있을 수 있고, 그리고 이런 가능태를 실현한 것이 다시 라면, 이것은 <형상/eidos>이 동시에 <동력인/causa efficiens> <목적인/causa finalis>이 된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시작과 끝을 이어주는 지름길이 있을 법한데 이것은 정신의 행보는 <구불구불 두루 돌아가는 Umweg>일 수밖에 없다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리고 <가능태> <현실태>라는 맥락으로는 <서술/Darstellung>간의 관계가 명쾌하게 설명되지 않는 것 같다. 정신의 행보가 <구불구불 두루 돌아가는> 길이기 때문에 서술이라는 표현이 쓰여지지 않나 싶다.  아무튼 이런 문제를 염두에 두고 헤겔을 따라 가보자. 어쩌면 헤겔이 이야기하는 <체계>가 문제해소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 같다. <체계>에 대하여 이렇다 할 만한 것을 이야기할 때 까지 기다려보자.

[2] 원문

[3] 원문

[4] 원문 . 고대그리스에서는 <부족한 놈> 라고 했다. 는 영어 바보>의 어원이다. <자기 것 밖에 모르는 놈>이다. <공동체/polis>에서 존재하고 공동체를 실현하는 존재, 즉 맑스가 이야기한 <유적존재/Gattungswesen>가 되어야 하는 것인데 이런 것이 빠져있는 부족한 놈이라는 것이다. 가 바로 개인>이다. 그래서 아주 스마트한 개인들이 사실 바보다. 여기서 는 라틴어 약탈된 상태, 부족함>에서 유래하고, 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를 라틴어로 번역한 것이다.

<형이상학> 1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의 테마가 무엇인지 살펴보는데, 철학(sophia)은 특정한 원리/바탕들과 원인들에 대한 학문이다 (he sophia peri tinas archas kai aitias estin.)라고 결론 짖고 첫째 원인과 원리(prota aitia kai archai)에 대하여 앞서간 철학자들이 어떻게 이야기 했는지 살펴보고 비판한다. 이 맥락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 <여럿>의 문제인데, 개념(logos)세계에서의 동일성과 지각(aitsthesis)세계에서의 다양성이 바로 그 문제다. 관련 플라톤은 두 가지 원인을 적용한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적한다. 하나는 개념세계, 즉 정의(horismos)에 적용되는 본질에 관한 원인(he tou ti esti aitia/무엇인가(ti esti)에 대한 원인)이고 다른 하나는 질적인 차원에서의 원인(he kata ten hylen aitia) (형이상학, 988a)이 된다. 질의 차원에서는 (hos hylen) 크고 작음 (to mega kai to mikron)이 원칙이 되고, 본질의 차원에서는 (hos ousian) 하나(monos)가 원인이라고 한다 (형이상학, 987b). 크고 작음이 두개/여럿이 되는 원칙이 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부재(apousia)약탈/부족(steresis)이라는 개념으로 발전시킨다.

 

철학개념을 정리해 논 <형이상학> 5(Δ)에서 도 설명되는데,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뭔가를 display하고 perform할 수 있는 능력이 넘쳐흐르는 개인의 심적.정신적 상태>와 연계하여 3가지 경우를 구별한다. 첫째, 어떤 것이든지 간에 취해야 한다고 할만한 것이 있는데 그렇지 않는 경우 (이 경우 식물도 눈을 <약탈>당한 상태다), 둘째, 무엇인가가 개별 혹은 유적본질(e auto e to genos)상 취해야 합당한 것이 있는데 그렇지 않는 경우 (사람이 맹인인 경우 개별적으로 맹인이고, 두더지는 유적으로 그렇다), 셋째, 때에 따라 뭔가를 취할 수 있는 능력을 (pephykein) 갖췄는데, 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않는 경우다 (형이상학, 1022b). 는 소위 부정하는 <α>, 우리말에서는 </>라는 접두어로 표현된다. 이런 차원에서 와 대립(antikeimenon)을 이루는 관계다. <>라는 것은 <아니다>라는 부정인데 이와 같은 맥락에서 는 또 <부정>과 일정한 관계를 갖는다.의 대립관계에서 steresis는 유적존재로서의 완성과 그 비완성간의 대립을 표현해 주는 것이다. (철학개념사 사전, 7, 1378 f. 참조)  

[5] 원문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