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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이성과 신성의 직접성을 고집하는] 후자는 내용을 별일 아닌 아주 손쉬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때그때 내용을 대뜸 크게 확장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들은 때마다 이미 알려져 있고 또 정돈되어 있는 소재를 한 보따리 자기 지반으로 싸들고와서 죽 펼쳐놓고 그 중에서 나름대로 완성된 지 형태를 갖춘 것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특수하고 진기한 것만 자기들의 격에 어울린다는 식으로[1] 취급한다. 이런 격식의 이면에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것까지 다스릴 줄 아는데 그까짓 이미 완성된 지 형태를 소유하는 것쯤이야 문제가 되겠느냐라는 우쭐거림이 도사리고 있다. 이렇게 모든 것을 절대이념에게 승복하게 만듦으로써 그 이념이 모든 것에서 인식되고 완전히 전개된 학문으로 번성한 것같이 보이게 한다. 그러나 그 전개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의 동일한 이념이 스스로[2] 자기 자신을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게 한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동일한 이념을 다양한 소재에 외부로부터 갖다 대는 것으로서 동일한 이념이 자기형태를 갖추지 못하고[3] 그저 반복하는 운동일 뿐이다. 이와 같은 반복은 전개와 차이의 외관만 갖춘 것으로서 금방 권태로 이어진다. 이 이념은 뚝 떼어놓고 보면[4] 틀림없이[5] 참다운 이념인데, 전개라고[6] 내놓고 하는 짓을[7] 보면 고작 위와 같이 동일한 공식을 반복하는 것으로서 시작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단지 거기에 쳐 박혀 있을 뿐이다. 다 알고있다고 [자긍하는] 주체가 [모든 것의 근원이라는]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움직인다는][8] 부동의 동일한 형식을 앞에 늘어져있는 것들[9] 사이로 데리고 돌아다니면서 [뭔가 괜찮은 것이 있으면] 그것의 주의를 그 부동의 형식으로 둘러싸[10] 소재가 외부로부터 부동의 요소 속으로 그대로 들어가게 하는데[11], 이와 같은 것은 내용에 대한 독단적인 착상과 같이 볼품없는 것이다. 학문의 내용이란 자신의 터전에서 움터 나오는 풍요로움과 그 속에서 스스로 차이를 두어 갖가지 형태를 이루어야 한다는 요구를 충족하는 것인데 말이다. [이렇게 산보의 여유를 즐기고 이성과 신성의 직접성을 고집하는 자들의] 행위는 단조로운 형식주의로서, 그들이 이야기하는 차이란 단지 소재[12]상의 차이일 뿐이고, 그나마도 소재가 이미 다듬어져 알려져 있기 때문에 그 차이를 알아차릴 뿐이다.
[1] 원문
[2] 원문
[3] 원문
[4] 원문
[5] 원문
[6] 원문
[7] in der tat
[8]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론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9] 원문
[10] 원문
[11] 개가 죽은 쥐새끼를 꿀꺽 삼키듯
[12] 원문
(§14) 이제 겨우 시작하는 학문으로서의 학문은 어쩔 수 없이[1] 아직 [내용적으로] 빠져서는 안될 세부적인 면까지 모두 갖춘 상태가 아닐 뿐만 아니라 형식적으로도 완벽하게 다듬어져 있을 수가 없는데, 바로 이점이 [비학문적인 의식이] 질책하는 것이다. 이 질책이 등장하는 학문의 본질에 일격을 가한다고 하는데 뭔가 앞뒤가 맞지 않다. 왜냐하면, 이것이 정당한 질책이 되려면 앞서 언급한 형태의 연마에 대한 요구를 받아들여야 하는데, 이것은 인정/수용하지 않으면서 다만 등장하는 학문을 비난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자기모순에[2] 빠져있는 비학문적인 의식의 꽉 막혀있는 상태를 풀어내는 것이 오늘날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가 아닌가 한다. 이 매듭을 풀기위해서 학문으로 연마해 나가야 하는 의식은[3] 이리저리 갈라져 서로 다투고 있지만 다들 아직 충분한 이해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다. [이렇게 갈라져 있는 비학문적인 의식의 오늘날의 현상을 크게 둘로 나누어 보자면] 한편은 소재의 풍부함과 이해가능성을 고집하는 반면, 다른 편은 둘 다 업신여기거나 아니면 적어도 이해가능성을 업신여기면서 이성과 신성의 직접성을 고집한다. 현재 전자는 침묵하고 있는 상태다. 그의 침묵이 순전히 진리의 힘에 의해서 그렇든 아니면 상대방의 격렬성이 여기에 한몫 하여 그렇든 아무튼 그가 사태의 근원 앞에서 달리 어찌할 수가 없다는 것을 느낀 나머지 굴복하고 침묵하게 되었다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소재의 풍부함과 이해가능성을 고집하는] 전자의 침묵이 위에서 이야기한 학문의 요구와 관련해서 만족을 느낀다고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 정당한 요구가 충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자가 침묵하고 가만히 있다고 해서 후자가 완전히 승리한 것이 아니다. 승리의 반쪽은 [일정한 진리에 기반한][4] 후자의 것이고 다른 반쪽은 [골 때리는 것을 뭔가 엄청나게 참다운 것을제시하여] 기대를 격양 시키고 또 격양된 기대가 가라앉지 않게 기대한 것을 갖다 주겠다고 약속은 계속하지만 약속 이행은 하지 않는 데서 보통 빚어지는 [오늘날의] 권태와 무관심에 항복한 것이다.
[1] 원문
[2] 원문
[3] 원문
[4] 헤겔도 “직접성”에서 출발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이성과 신성의 직접성을 주장하는, 예를 들어 피히테의 “Intelletuelle Anschauung”(지적직관)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서론 §8 역자주 참조)
(§13) 이렇게 새로운 세계가 갓 등장하는 단계에서는 전체가 단순함 속으로 침강하여 아직 그 안에 갇혀 있는 상태로만, 달리 표현하면 일반적인 토대로만 나타날 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의식의 기억 속에는 지나간 삶에서 영위했던 다채로움이[1] 아직 그대로 살아 남아 있다는 것이다.[2] 그래서 의식은 새로 등장한 형태에서 전개된 내용과 내용이 전개되는 가운데 [보편이 자기 안의 구별을 통해서] 특수한 내용으로 [망울망울] 어우러지는 것을 그리워한다. 그러나 의식이 이보다 더 그리워하는 것은 [개별적으로] 완벽하게 다듬어진 형식인데, 이런 형식에 의해서 비로서 내용적인 차이들이 엄밀하고 구별되고 그들 간의 관계가 [전체 안에서] 확고하게 정립된다.[3] 이와 같은 형식의 연마가[4] 없는 학문에는 보편적인 이해가능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5] 단지 소수의 몇 명이 그들만 소유하고 그들에게만 전수되고 그들만 알아볼 수 있는 소유물이라는[6] 우쭐거림이[7]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 우쭐거림에 아무런 실체가 없는 것은 아니다. 밖에서는 알아볼 수 없는 소유물이라는 주장의 실체는 학문이 이제 겨우 [유/껍데기]개념으로, 달리 표현하면 개념 속에 깃들여 있는 내면으로만 존재할 뿐이기 때문에 밖에서는 알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고, 소수의 몇 명만의 소유라는 주장의 실체는 등장하는 단계에서 확산되지 않는 학문이 존재하는 양식은 개인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학문은 완벽하고 명료하게 구별된 상태가 되어야만 비로서 공교(公敎)적이고 이해될 수가 있으며, 이렇게 되어야만 또한 학습이 가능하고 모든 사람의 소유물이 될 수가 있다. 학문의 이해 가능한 형식이란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고 모든 사람이 똑같이 거쳐야 하는 학문을 향하는 공평한 길이다. 그래서 오성을 통해서 이성적인 지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요구는 학문으로 나아가는 [학문의 편으로 들어오는] 의식이 내세우는 합당한 요구다. 왜냐하면, 오성이란 사유로서, 순수한 자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해가 가능한 것이란 이미 알려져 있는 것이고 학문과 비학문적인 의식이 공유하는 것이다. 이 공유를 통해서 비학문적인 의식은 바로 학문에 들어갈 수가 있다.
[1] 원문
[2]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가 말하는 의식의 “현재와 발맞추지 못하는 동시성”(Ungleichzeitigkeit)이 착안되는 부분이다. 이 문제는 고리타분한 수구보수의 성격, 나아가서는 파시즘과도 깊은 관계를 갖고 있다.
[3] 헤겔의 보편에서 특수를 거쳐 개별로 나가는 운동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성급한 사람들을 위한 지적이고, 이것은 다음에 자세히 이야기 될 것이다.
[4] 원문
[5] 원문
[6] 원문
[7] 원문
(§12) 그러나 이렇게 새롭게 나타난 세계는 갓난아기와 마찬가지로 완성된 자기모습을[1] 갖춘 상태가 아니다. 이 점을 놓치지 않아야 [생성운동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 갓 등장하는 것은 다만 그것의 직접적인 존재양식, 달리 표현하면 개념만을[2] 갖춘 것이다. 건물의 기초가 다져졌다고 해서 건물 전체가 완성되었다고 할 수 없듯이 전체의 개념을[3] 얻었다고 해서 전체가 다 되었다고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보기 원하는 것은 떡 버티고 서있는 줄기에 활짝 펼쳐진 나뭇가지와 잎사귀가 무성한 참나무인데, 이렇게 완성된 나무 대신 도토리만 불쑥 내놓고 <참나무 봐라> 하면 누가 만족할 것인가[4]. 이와 마찬가지로 정신세계의 정상인 학문이 등장단계에선 완성된 자기모습을 갖추고 있지 않다. 새로운 정신이 싹트는 터전은 다양한 교양형식이 지속적으로 변하여 폭 넓은 변혁을 이룸으로써 생산된 것이고 정신이 미로와 같은 도정에서 [막다른 골목에 다다를 때마다] 이것을 뚫고 나가기 위해서 이리저리 도전하고[5] 노력한 대가로 얻은 것이다. 새로운 정신의 싹은 정신이 [그전 단계에서] 차례차례 자기모습을 펼쳐나가는 가운데 확장을 거듭하여 마침내 전체를 이룩하고 나서 다시 그 전체를 자신 안으로 움켜쥐어 복귀시킨 것으로서, 말하자면 전체가 다시 단순한 개념으로 생성된 것이다. 이 단순한 개념에 깃들여 있는 전체가 다시 완성된 자기모습으로서의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개념 속의 마디마디로[6] 응집되었던 정신의 갖가지 형태들이 새로운 지평 위에서 [이전 단계에서] 생성된 방향성에 맞춰 발전하면서 새로운 형태를 갖추어 나가야 한다.
[1] 원문
[2] 원문
[3] 원문
[4]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다윗상과 관련하여 한 말은 여기에 대조되겠다. “동상은 내가 끌을 갖다 대기 전에 이미 대리석 블록 내부에 들어있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하는 일이란 단지 불필요한 돌을 쳐내는 일이다.” 관련 재미있는 사실은 부오나로티가 카톨릭이 이단으로 규정한 “정신의 무리”(“Sprituali”)의 일원이었고, 이 이단은 청교도적 영향을 받았다는 점이다. 또 재미있는 사실은 부오나로티가 다윗상 조각을 밀폐된 공간에서 진행하고 그 진행작업에 관한 것들을 거의 다 파괴함으로써 그의 노고가 얼마나 컸는가 숨겨버린 사실이다.
[5] 원문
[6] 원문
(§11) 덧붙이자면, 우리 시대가 새로운 시대의 탄생을 맞이한 과도기임은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다. 정신은 그가 현존하고 또 현존하는 그 정신을 상상하는[1] 지금까지의 세계와 결별하고 이를 과거의 것으로 침강시키는 사업을 세우고 자신의 모습을 때려 고치는[2] 일에 몰두해 있다. 정신은 절대 쉬는 법이 없이 운동하면서 전진과 전진을 거듭하지만 이것은 잘 감지되지 않는 법이다. 이것은 마치 태아가 조용히 영양소를 섭취하면서 오랫동안 양적인 성장만을 거듭하는 유유자적함을 최초의 숨결로 단숨에 중단하고 질적 도약을 이루어 보란 듯이 신생아로 태어나듯이[3], 교양을 쌓아나가는 정신도[4] 천천히 그리고 소리 없이 새로운 형태로 무르익어 가면서 앞서간 세계가 만들어 거주한 집의 이 부분 저 부분에서 미세한 것들을 하나씩 쉬지 않고 빼낸다. 그러나 집의 흔들림은 직접 감지되지 않고, 단지 그 조짐이 우발적인[5] 징후로 감지될 뿐이다. 가벼운 것만 추구하고 그러기 때문에 모든 것을 가볍게 여기는 행동[6], 그러기에 또한 [진지함이 없는] 권태로만 가득찬 마음이[7] 기존세계에 틈틈이 끼어 들어가 뿌리를 내리고, 알 수 없는 뭔가에 대한 종잡을 수 없는 느낌이 만연하게 되는데, 이런 것들은 뭔가 다른 것이 문 앞에 와 있다는 것을 미리 알리는 전조다. 전체의 외관은 그대로 놔두지만 그 속은 점진적으로 산산조각 내는 이 프로세스는 번쩍하는 출현으로[8] 중단되고 단숨에 새로운 세계의 상을 우리 앞에 세워놓는다.
[1] 원문
[2] 원문
[3] <양의 질로의 전환>(„Umschlagen der Quantität in Qualität“)이 이야기되는 대목이다.
[4] 원문
[5] 원문
[6] 원문
[7] 원문
[8] 원문
(§10) 이와 같이 학문은 포기하고, 학문대신 시시콜콜한 것에 만족하고 옹졸하고 인색한 사람이 뭔가 드높은 것에 취하여 휘황찬란해진[1] 상태를 학문보다 더 차원 높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일은 제발 그만두었으면 한다. 이렇게 마치 신의 계시를 받은 예언자나 되는 양 그런 말투를 일삼는 사람은 자기가 정말 중심을 지키고 심층까지 파고 들은 상태라고 착각하고[2] 명석함을[3] 경멸하고 意圖적으로 개념과 필연성을 멀리한다. 이런 것들은 단지 보잘 것 없는 무의미한 이승에서[4] 겨우 연명하는[5] 반성일 뿐이란다. 그러나 넓다고 자못 자랑하지만 텅 빈 것이 있듯이 깊다고 엄숙해 하는 것이 텅 빈 경우도 있다. 무의미하게[6] 이리저리 갈라지고 또 갈라지기만[7] 하는 힘만[8] 있지 그 갈라진 가지들을 다시 하나로 뭉치게 하는 힘은 없는 실체가 [9] 있듯이 역으로 제자리 걸음하면서 방방 뛰기만 하지[10] 밖으로 뻗어나가 내용을 갖추지 못하고 그저 안으로만 뻗어나가는, 그러기 때문에 껍데기일 뿐인 힘도[11] 있다. 정신이 발휘하는 힘은 그 크기가 자신을 밖으로 내치는[12] 힘 그 이상이 될 수 없다. 그 깊이 또한 마찬가지로 자신을 전개하는 가운데[13] 중심에서 벗어나 무한히 뻗어나가 자기중심과 완전히 동떨어진 상태가 되어 자신을 상실하고 헤매는 상태에 도전하는 것 이상이 될 수가 없다. 여기에다 몰개념적이고 [침강한 신적] 실체에 기대어 있는 지가, 신들려, 자기의 특성은[14] 두루 계신다는 신적 존재에[15] 침강시키고 그 안에서 참답고 성스럽게 철학하고 있다고 내세우지만 그것은 사실 지가 신 앞에 부복(仆伏)해 있다기보다는 절도와[16] 자기가 나아가야 할 길은[17] 모두 상실한 나머지 우왕좌왕하여 자기 안에 우발적인 내용이 난무하게 내버려 두는가 하면 내용 속에서도 독단만 난무하게 내버려 둔다는 이면을 은폐하기 위한 짓이다. 아무렇게나 부글거리는 실체에[18] 자신을 내맡기는 사람들은 이렇게 자기의식을 뭔가에 휩싸이게 하고 오성을 버림으로써 이젠 잠을 자는 가운데 신의 지혜를 받기에 마땅한 신의 무리에 속하게 되었다고 착각한다[19]. 그들은 정말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잠자는 동안[20] 뭔가를 받는 모양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이 줄줄이 토해내는 것은 꿈 같은 이야기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1] 원문 <Trübheit>. 서론 §3 역자주 28 비교. [2] 원문 [3] 원문 [4] 원문 [5] 원문 [6] 원문 [7] 원문 [8] 원문 [9] 원문 [10] 원문 [11] 원문 [12] 원문 <Äußerung>. [13] 원문 [14] 원문 [15] 원문 [16] 원문 [17] 원문 [18] 원문 [19] 원문 [20] 원문 (§9) 이와 같이 [속이 텅 비어있어] 구할 줄도 모르고 [시시콜콜한 것만 받아도 만족하는] 태도의 이면에는 줄줄 모르는 인색하기 그지없는 옹졸한 태도가 도사리고 있는데 이런 태도는 학문에 어울리지 않는다. 단지 자세나 가다듬는 일에만[1] 몰두하는 사람은, 이리저리 갈라지는 자신의 삶과 사상은 신성이라는 두루뭉실한 안개로 덮어놓고 그런 불분명한 신성이나 어떻게 든 향유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그런 것을 찾아 나서라고 내버려 둘 수밖에 없을 것이다[2]. 아무튼 그는 쉽게 뭔가 고무적인 것을 찾아낼 것이고, 이것을 수단으로 하여 가슴에 바람을 불어넣고 자기가 무엇이나 되는 양 으쓱거릴 것이다. 그러나 철학은 자신을 지켜 경건한 자세나 가다듬는 일에[3] 빠져서는 안된다. (§8) 이런 요구의 이면에는 억지에 가까운, 다른 이에 뒤질까 봐 앞을 다투듯이 하는, 그리고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과민한 반응을 보이는 노력이 있다. 아무튼 이런 노력으로 관능적이고 비속하고 개별적인 것에 뿌리를 내리고 기생하는 사람들을 뽑아내어 그들의 눈길을 하늘높이 떠 있는 별들로 향하게 하자는 것이다. 이런 노력의 배후에는 사람들이 신적인 것은 모두 망각하고, 흙과 물만으로 모든 욕구를, 발생하는 그 자리에서 즉시 충족시키는 지렁이와 같은 존재로 떨어졌다는 생각이 도사리고 있다. 물론, 예전에는 하늘은 온갖 사상과 형상으로 충만하게 꾸며진 상태였다.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의미를, 그것을 하늘과 연결시키는 빛의 줄기를 통해서 부여 받았다. 사람들의 시선은 이승의 지금 이 자리에[1] 머무르는 대신 늘 하늘에 머물렀고, 이승을 넘어서 신적인 존재들로,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면 저승의 영원한 현재로[2] 늘 흘러 올라갔다. 이러한 정신의 눈을 하늘에서 떼어내 이승을 바라보게 하고 거기에 머무르게 하기 위해서는 강제력이 행사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천상계에서만 가능했던 명료함을[3] 몽롱하고 어지러운 것[4] 외 아무런 다른 의미가 없었던 이 세상에도 스며들게 노력하여[5] 현재적인 것 자체에 주목하게 하는 것, 즉 경험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이 중요하고 유효한 것으로 수용되도록 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이젠 다시 그와 정반대 되는 빈곤을[6] 운운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이[7] 지상계에 너무 강하게 뿌리를 내린 상태여서 이를 다시 위로 치켜 올리려면 예전과 같은 강제력이 필요해 졌다는 것이다. 정신의 빈곤함은 사막을 헤매는 자가 한 모금의 물 외 다른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것과 같이 극심한 상황이 되어서 신적인 것을 한번 느껴보기만 하자고, 이런 보잘 것 없는 것으로 갈증을 축여보자고 애타게 추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정신이 이따위 것에 만족하는 데에서 그의 상실이 얼마나 큰가를 가름할 수가 있다. (§7) 철학에서 이와 같은 요구가 등장하는 것을 보다 더 보편적인 맥락에서 파악하고 자기자신을 자각하는 정신이 현재 처해 있는 단계와 관련하여 살펴보면, 자각적인 정신은 주어진 삶에 온전히 순응하는 삶에서 교양에 의해서 벗어났지만 그래도 사상의 터전에서는 바탕이 견고한 삶을 영위해 왔었는데[1] 이제 와선 사상의 터전에서도 그런 견고한 바탕을 상실하고 거기서 벗어나 떠도는 상황에[2] 처해있다. 다시 말해서 [루터와 같은] 믿음의 직접성[3], 또는 [데카르트와 같은] 확신이 주는 안정과 안심[4], 즉 [신의 존재까지 의심하면서 뭔가 확실하고 견고한 것을 찾아 나섰던] 의식이 다시 신과의 화해를[5] 통해서 신이 대내외적으로 두루 존재하기 때문에 사물과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안심할 수 있다는 만족에서 벗어나 있다. 자각적인 정신은 위와 같은 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나 이젠 아무런 바탕도 없고 아무것에도 기대지 못하는[6] 자기 안에서 자기만을 붙들어 쥐는 반성이라는[7] 반대의 극으로 흘러 갔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반성에서도 머무르지 못하고 뛰쳐나간 상태다. 자각적인 정신은 본질적인 삶을 상실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 상실과 더불어 자신의 내용이 되는 것은 이젠 단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고 남은 것이라고는 죽는 일밖에[8] 없다는 점도 의식하게 되었다. 이렇게 죽음에 맞선 정신은 공포에 질린 나머지 갈 곳을 모두 상실하고 부랑하는 찌꺼기와 함께 방황하는 일은 그만두고 이젠 덜덜 떨고만[9] 있다고 자인한다. 그리고 이러한 굴욕적인 자기 모습을 한탄하면서 철학에게 요구하기를 현존하는 자신이 무엇인가를 알아차리게 하는 일은 이제 그만두고 예전과 같이 알차고 견고한 삶의 터전이[10] 먼저 철학을 통해서 다시 재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욕구를 받아들여 철학은 이제 침강한 실체성을[11] 열어 젖혀 다시 자각으로 끌어 올리고 어지러운 의식이 사유된 질서와 개념의 단순성으로[12] 다시 입도하도록 하는 일은 그만두고, 사상의 배설물을 모두 한데 쏟아 부어 잘 흔들어서 구별을 두는 개념은 제어하고 위대한 존재자에 대한 어렴풋한 느낌만을[13] 만들어 내어, 심층적인 자기통찰보다는 뭔가 위대한 존재 앞에 고개를 숙여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무너진 마음을 다시 수습하는데[14] 전념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것, 성스러운 것, 영원한 것, 종교, 그리고 사랑은 모두 위와 같은 것을 덥석 물게 하는 충동을 주는데 요구되는 미끼일 뿐이다. 개념이 아니라 망아의 경지가, 냉정하게 전진하는 사태의 필연성이 아니라 부글부글하는 영감이 알찬 삶의[15] 풍요함을 영위하는 태도이며 그 풍요함의 지속적인 확대를 주도한다는 것이다. [1] 원문 [2] 서론 §8와 비교해 볼만 하다. [3] 원문 [4] 원문 [5] 원문 [6] 원문 [7] 원문 [8] 원문 [9] 원문 [10] 원문 [11] 원문 [12] 원문 [13] 원문 [14] 원문 [15] 원문 (§6) 진리가 취하는 참다운 형태는 이와 같은 학문성이라고 명제화할 때, 똑 같은 의미이지만 달리 표현하면, 진리가 현존하는 터전은 오직 개념이라고 주장할 때, 나의 이런 주장이 우쭐거리는[1] 것 외 기준으로 삼을 만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현시대에 확신으로 폭 넓게 퍼져 있는 생각과 그런 생각이 가져오는 결과와 정면 대립하는 것으로 고개를 든다는[2] 것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래서 이 모순을 좀 설명하고 지나가야 할 것 같다. 이것이 결코 쓸데없는 짓만은 아닌 것 같다. 물론 이 설명이 지금 이 자리에선 우리의 비판대상이 일삼는 것과 마찬가지로 단정 이상의 것이 될 수는 없지만 말이다. 우리시대가 진리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살펴보면[3] 이랬다 저랬다 횡행하는 사조인데, 이런 사조는 진리가 현존하는 터전이란, 아니 현존진리 자체란 <절대자에 대한 직관이다[4]>, <아니다 직접적인 지다[5]>라고 다투기 일쑤고, 한발 짝 나아가서 <진리는 종교다>, <아니다 존재 자체다>라고 윽박지르기 일쑨데, 여기서 존재라고 떠드는 것도 신이 참으로 사랑하는 참다운 존재가 아니라[6] 단지 있다는 것 그 자체로서의 존재일 뿐이다. 이런 생각아래 철학을 서술하는데 있어서도 개념의 형식보다는 오히려 그것과 반대되는 것을 우리시대는 요구하고 있다. 즉 절대적인 것을 개념적으로 파악해서는 안되고 대려 감지하고 직관해야만 하고, 절대자가 갖는 개념이 아니라 그에 대한 느낌과 직관의 주도아래 그에 상응하는 것들만 허용하는[7] 철학서술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1] 원문 [2] 원문 [3] 원문 [4] 원문 [5] 원문 [6] 원문 [7] 원문 의 의미는 <혼탁>이지만 괴테의 색채론에 따르면 이런 <혼탁>을 매개로 하여 다사로운 색채가 나타난다. 이 색채론에 기대어 <Τrübheit>를 <휘황찬란>으로 옮겨보았다. 적나라하게 표현하자면 히로뽕먹고 홍콩간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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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7/이 "Schein"은 속이 텅 빈 것이 그대로 밖으로 드러난다는 차원에서는 사이비가 아니지만, 속이 텅 빈 것에 우쭐한다는 차원에서 다시 결국 사이비가 된다.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