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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A. 의식 I. 감각적 확신; <바로 이것>과 사념, §1에 대한 이런 저런 생각 3-아도르노 <최소한의 도덕> 54번 뒷부분

정신분석자들이야 타쏘가[1]파괴적인 성격의 소유자라고 진단하고 말겠지만, 그가 바로 그렇게 공주 앞에 서기만 하면 부들부들 떨고, 결국 목전에 있는 것을 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문명의 희생양으로 희생되기 때문에, [남성들이 이렇게 희생되기 때문에 괴테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 아델하이드, 클레르헨, 그리고 그레첸의 입은 [음악과 같은/내용과 형식으로 구별되지 않는/그래서 거짓이 있을 수 없는/역사적으로 왜곡되지 않은??] 직관한[2], 억눌림을 당하지 않는 말을[3]한다. 이런 말은 하는 여성은 에던 동산과 같은 패러다이스의 여성처럼 우리 곁에 있게 된다.[4] 괴테가[묘사한] 여성들에게 볼 수 있는 그 눈부신 생기 발랄함은[5]한 발짝 뒤로 물러섬과 [그 눈부심에 휩싸여 그것을 취하거나 거기에 빠지지 않고 대려 그것을] 피함이라는 대가를 치르고 얻은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대가를 치르는 것은 단지 [종이 주인의 딸을 욕망할 수 없다는] 현실질서의 승리 앞에서 굴복하고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거기에 보다 더 많은 것이 담겨져 있다. 돈 후안은 [타쏘에] 완전 대비되는 남성으로서 감각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의 통일의 상징이다. 돈 후안을 보자면 거기엔 감각성이 원리로 파악되어있다고 말한 키에르케고르는 감각성의 비밀에 근접하게 다가서서 그것을 알아보고[6]있다. 감각성의 거센 눈길에는, 그런 눈길에 자성이[7]솟아오르지 않는 한, 바로 위에서 이야기된 이름을 상실한 것[8], 즉 불행을 동반하는 보편성이 찰싹 붙어있고 이런 [불행을 갖다 주고 자초하는] 보편성은 그 것의 음화상[9], 즉 제멋대로 다루고 처리하고 지배하고 행동하는1 사상의 통치권[10] 내부에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하는] 숙명으로 재생산된다.



[1]괴테의<토르콰토 타쏘>에 등장하는 주인공.

[2]원문<angeschaut>. 무슨 말인지 알아먹기 힘들다. 아도르노의<철학자가[사용해야 할] 말에 대한 테제>를 소화해야 할 것 같다. 소화하기 힘들다. 우선8번 테제의 원문을 소개한다. „Das sprachliche Verfahren des Philosophen, abstrakt heute kaum zu benennen, ist jedenfalls einzig dialektisch zu denken. Seiner eigenen Intention sind im gesellschaftlichen Zustande heute keine Worte vorgegeben, und die objektiv vorhandenen Worte der Philosophie sind seinsentleert, für ihn unverbindlich. Der Versuch, neue Gehalte in der alten Sprache verdeutlichend mitzuteilen, krankt an der idealistischen Voraussetzung der Abtrennbarkeit von Form und Inhalt und ist darum sachlich illegitim; verfälscht die Gehalte. Es bleibt ihm keine Hoffnung als die, die Worte so um die neue Wahrheit zu stellen, daß deren bloße Konfiguration die neue Wahrheit ergibt. Dies Verfahren ist nicht zu identifizieren mit der Absicht, neue Wahrheit durch herkömmliche Worte zu »erklären«; die konfigurative Sprache wird vielmehr das explizite Verfahren, das die ungebrochene Dignität von Worten voraussetzt, durchaus zu meiden haben. Gegenüber den herkömmlichen Worten und der sprachlosen subjektiven Intention ist die Konfiguration ein Drittes. Ein Drittes nicht durch Vermittlung. Denn es wird nicht etwa die Intention durch das Mittel der Sprache objektiviert. Sondern es bedeutet konfigurative Sprache ein Drittes als dialektisch verschränkte und explikativ unauflösliche Einheit von Begriff und Sache. Die explikative Unauflöslichkeit solcher Einheit, die sich umfangslogischen Kategorien entzieht, bedingt heute zwingend die radikale Schwierigkeit aller ernsthaften philosophischen Sprache 8. Das sprachliche Verfahren des Philosophen, abstrakt heute kaum zu benennen, ist jedenfalls einzig dialektisch zu denken. Seiner eigenen Intention sind im gesellschaftlichen Zustande heute keine Worte vorgegeben, und die objektiv vorhandenen Worte der Philosophie sind seinsentleert, für ihn unverbindlich. Der Versuch, neue Gehalte in der alten Sprache verdeutlichend mitzuteilen, krankt an der idealistischen Voraussetzung der Abtrennbarkeit von Form und Inhalt und ist darum sachlich illegitim; verfälscht die Gehalte. Es bleibt ihm keine Hoffnung als die, die Worte so um die neue Wahrheit zu stellen, daß deren bloße Konfiguration die neue Wahrheit ergibt. Dies Verfahren ist nicht zu identifizieren mit der Absicht, neue Wahrheit durch herkömmliche Worte zu »erklären«; die konfigurative Sprache wird vielmehr das explizite Verfahren, das die ungebrochene Dignität von Worten voraussetzt, durchaus zu meiden haben. Gegenüber den herkömmlichen Worten und der sprachlosen subjektiven Intention ist die Konfiguration ein Drittes. Ein Drittes nicht durch Vermittlung. Denn es wird nicht etwa die Intention durch das Mittel der Sprache objektiviert. Sondern es bedeutet konfigurative Sprache ein Drittes als dialektisch verschränkte und explikativ unauflösliche Einheit von Begriff und Sache. Die explikative Unauflöslichkeit solcher Einheit, die sich umfangslogischen Kategorien entzieht, bedingt heute zwingend die radikale Schwierigkeit aller ernsthaften philosophischen Sprache.>

[3]<Sprache/언어>를<입이 말하다>로 번역하였다.2

[4]원문<die zum Gleichnis von Urgeschichte sie macht.> 여기서<Gleichnis von Urgeschichte>를<원역사의 비유>라고 하면 뭔가 아닌 것 같다. <Gleichnis>는 신약 복음서에서 예수가 그랬던 것처럼 뭔가를 직관할 수 있게 우리 곁에 갖다 놓는 것이 아닌가 한다.

[5]원문<Schein des Lebendigen>. 여기서<Schein>은 거짓의 의미로서의 가상이 아니다. 내부로부터 나오는 뭔가 눈부시게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인을 대할 때 그 여인에게서 느끼는 감정이라고 할까? 여기 진보블로그에 <생기 발랄한 민중신학>이라는 제목의 블로거가 떠오른다.

[6]원문<rühren>

[7]원문<Selbstbesinnung>

[8]원문<Anonyme>

[9]원문<Negativ>

[10]원문<Souveränitä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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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원문 "schalten" 불을 껐다 켰다 한다는 말인데, 유대인 수용소에서 쓸모있는 육신과 쓸모없는 육신을 가르는 "Selektionsrampe"에 서서 생과 사를 가르는 짓을 생각하게 만드는 낱말이다. 텍스트로 돌아가기
  2. "der Mund redet wahr" "입이 진실을 말한다". 파울 첼란의 시 "corona"에서 인용.텍스트로 돌아가기

정신현상학 A. 의식 I. 감각적 확신; <바로 이것>과 사념, §1에 대한 이런 저런 생각 3-아도르노 <최소한의 도덕> 54번

[...] 쉴러는[사물을 바라볼 때 일정한 거리를 두고 관찰하는] 괴테와 비교해 볼 때 [사물에 완전히 밀착해 있는] 감각과 동시에 [사물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는] 무감각을 보이기도 한다. 성욕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처럼 추상적이다. 직접적인 욕망으로서의 성욕은 모든 것을 행위의 대상으로 삼고 그럼으로써 모든 것을 같은 것으로 만든다. [...] 카사노바의 여인들은 이름대신 알파벳으로 지명되고 서로 아무런 구별이 없는데 이것은 뜻밖의 일이 아니다. [이 여인들은] [사람을 육체의 기능과 뚫린 구멍 외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드는] 사드의 오르겔에 의해서 복잡한 피라미드를 구성하는데 기계적으로 배치되는 육신들과 같다. 이와 같이 그대로 박아대는 성욕1, 즉 구별에 무능력한 유의 것이 관념주의의 거대 사변시스템들 안에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요구에도 불구하고, 생동하고 있다. 이렇게 독일 정신과 독일의 잔인한 야만성이 서로 발목을 쥐고 있다. 목사란 자들이 설교강단에서 내리치는 위협으로 겨우 제어되는 촌부의 탐욕이 형이상학에서는 자율로 등장하여 용병들이 점령한 도시의 여성을 마구 다루듯이 세상에서 마주하는 모든 것을 아무런 형편도 보살피지 않고 그대로 [그저 구멍이라는] 본질로 절감하는 권리를 고집한다. 순수한 사행(reine Tathandlung)이란 별 가득한 하늘에 투영된 겁탈이다. 이와 달리 하염없이 그저 바라보는 눈길은, 사람과 사물이 그 안에서 비로서 자신을 전개하는 눈길은 언제나 객체에 돌진하는 충동이 꺾인, 반성된 눈길이다. 아무런 폭력이 없는 관조, 진리가 주는 모든 행복의 근원이 되는 이런 관조는 관조하는 자가 객체를 먹어 삼키지 않는 것에 달려있다. 떨어져 가까이 있는 것이다(Nähe an Distan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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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원문 Roheit/조야텍스트로 돌아가기

자료

정신현상학 A. 의식 I. 감각적 확신; <바로 이것>과 사념, §1에 대한 이런 저런 생각 2

이 문단에서 <unmittelbar>가 뭘 의미하는지 보다 정확하게 살펴보자. <unmittelbar>가 이 문단에서 네 번 사용된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같은 선상에서 사용되므로 세 가지로 사용된다고 할 수 있다. 처음엔 <zuerst>란 의미로, 다음엔 <seiend>란 의미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aufnehmend>란 의미로 사용된다. 이 세 가지 낱말들이 모두 <의식>이 주인공이 되는 <정신현상학>이라는 드라마의 1막 1장에 등장하는 <지>를 설명하는데 사용되고 있다.

 

1막 1장에 의식이 <지>로 등장한다. 의식은 본질적으로  <무엇에 대한 의식/Bewusstsein von etwas>이므로 <나는 무엇을 안다/Wissen von etwas>라는 행위로 나타난다는 말일까? 아무튼 <정신현상학> 드라마에 의식이 취하는 첫 모습은 <지>다. 헤겔은 이 <지>를 <직접지>라고 하고 위의 세 가지 낱말로 설명한다. <나는 무엇을 안다>라는 <지>의 구조를 살펴보면 세 가지 축이[Momente] 구별된다. 지의 주체와 객체, 그리고 이 둘 간의 관계다. <zuerst>는 <맨 처음>이라는 의미로 시간적인 의미이지만 <지>에 위의 세 가지 축이 스며있다는 맥락에서 보면 지의 주체를 설명하고, <seiend>는 지의 대상을, 그리고 <aufnehmend>는 지의 주체와 객체 간의 관계를 설명한다고 할 수 있다. <zuerst>란 의미의 영어 <first>와 독어 <Fürst/영주>의 어원은 같은데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고, 헤겔의 표현을 빌리자면 어떠한 매개에 의하지 않고 [홀로 직접]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seiend>도 역시 아무런 매개에 의하지 않는 <그저 있다>라는  의미다. <aufnehmend>도 이런 주체와 객체간 아무것도 끼어 들 수 없는 그런 관계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이렇게 해서 보면 이 문단에서 이야기되는 <unmittelbar>는 <직접적인 것이 직접적인 것을 직접적으로 안다>라는 말을 하고 있다. 뭔가 완전히 옹그려져 아무런 구별이 없는 상태다. 꿈꾸는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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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A. 의식 I. 감각적 확신; <바로 이것>과 사념, §1에 대한 이런 저런 생각

정말 그런가? 뭔가를 대상으로 삼는 지가 정말 첫 대상인가? 뭔가를 대상으로 삼는 지의 힘을 빌려 우리가[철학이] 지를 대상으로 삼는다고 하는데, 이렇게 철학이 대상으로 삼는 지는 이미 <실체적인 삶/substantielles Leben>에서 벗어나온 것이 아닌가? 그래서 원초적이라고 할 수 없지 않는가? 무의지적 기억(mémoire involontaire)이 가능한 것은 감각의 대상이라는 것이 달리 표현할 수가 없어서 감각의 대상이라고 불려질 뿐이지 감각에게 대상으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역자는 서설에서 <실체적인 삶>과 거기서 벗어나오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도 생생한 초등학교 입학식에 대한 기억을 예를 들어 설명했다. 덧붙이자면 독일에 온후 한동안 자주 똑 같은 꿈을 꾸었다. 따스하고 밝은 햇살에 기타소리가 맴도는, 어떻게 말로 표현하기 힘든 꿈이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대상이 아니라 대상 안에 있는 그런 느낌이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사촌 형이 따사로운 봄날 자주 갓난애기를 데리고 뒷동산에 올라가 기타 연습을 했단다. 알고 나선 두 번 다시 그 꿈을 꾸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Mémoire involontaire>에 나타나는 것은 목전에 있는  <das Diese/바로 이것>이 아니다. 그 동기야 마르셀 푸르스트에서 볼 수 있듯이 <das Diese/바로 이것>이 되겠지만, 차 한잔에 곁들어 먹는 <마들렌>이라는 과자에 의해서 솟아오르는 것은 <das Diese/바로 이것>이 아니라 <한 세계/eine ganze Welt>다. 여기에 <직접지>가 <가장 풍부한 인식>으로 보이는 이유가 있다.

 

헤겔은 이 문단에서 이런 <무의지적 기억>이 가지고 있는 구조를 전개하는 것 같다. 그러나 문제는 왜 의식에 <무의지적 기억>이 등장하는가 아닌가? 여기서 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는가? <의식>이 능동적인 원리라면, 완전 수동적인 <무의지적 기억>은 의식의 터전에서 자리잡을 수 없지 않는가. 훗셀의 현상학과 함께 프로이드의 심리학에 가서 알아봐야 할 내용인 것 같다.

 

그래서 철학이 등장하는 지를 향해서 취하는 태도도 문제가 있다. 철학은 <직접지>가 취하는 태도를 취한다고 한다. 그런데 <직접지>가 <태도를 취한다>고 할 수 있을까. <태도>의 의미에는 대상화한다는 의미가 있지 않는가? 역자가 이해한 것과 같이 <직접지>가 대상화 이전의 의식상태라면 <직접지>에게 능동적인 태도는 없는 것 같다. 비교하자면 유아가 태 속에서와 같이 <보살핌>과 <돌봄> 안에 있듯이 <직접지>란 대상 안에 있는 것 같다. 이런 것을 꼭 <지>라고 할 필요도 없겠다.

 

그리고 철학이 이런 의식을 대상화할 수 있을까? “How can we know the dancer from the dance?”  대상화한다면 대상화된 의식이 취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발전된 의식이, 아니면 온전히 능동적인 원리가 되는 의식이 취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무의지적 기억>이 취하는 “태도”는 아니다. 이런 선상에서 보면 철학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관조/Zusehen>라는 것에 억지와 폭력이 스며있는 것 같다. 이런 요소[Moment]는 <Zusehen>이라는 개념 자체에도 있다. “Sieh zu, dass du das schaffst!” „주변을 잘 보살펴 그것을 달성해라!“ 정도로 번역될 수 있지만 „달성 못하기만 해봐라“란 위협도 스며있다. 철학의 <Zusehen>에는 이런 위협이 스며있는 것 같다. 의식의 형성에 <눈총>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사르트르가 보여주었다.

 

다듬고 방향을 주는, zurichten하는 <Zusehen/눈총>아래 의식이 형성되어 간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눈총>은  철학의 대상이 아니라 인류학이 아니면 문학이 다루는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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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A. 의식 I. 감각적 확신; <바로 이것>과 사념

(§1) 우리가 탐구를 시작할 때 맨 처음, 달리 표현하면 곧바로 우리 앞에 나타나 우리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다른 것이 될 수 없고 오직 <뭔가를 안다>는 지(知)일 수 밖에 없는데[1], 이 지는 <뭔가>를 바로 알아보는, 달리 표현하면 <있는 것>을 아는 직접적인 지일 수 밖에 없다. 여기서 우리가 취하는 태도는 직접적인 지의 태도와 다름없고 또 그래야만 하는 것으로서 직접적인 지가 그 대상과의 직접적인 관계 안에서 그 대상을 받아들이듯이 우리도 지에 대하여 그렇게 하면 된다. 즉 우리가 직접 관계하는 가운데 우리 앞에 나타난 직접적인 지에 어떠한 변경도 가하지 않고, 또 그것을 받아들이는데 개념의 운동이[2]개입하지 못하도록 붙잡아두는 것이다.



[1]정말 그런가? 뭔가를 대상으로 삼는 지가 정말 첫 대상인가? 뭔가를 대상으로 삼는 지의 힘을 빌려 우리가[철학이] 지를 대상으로 삼는다고 하는데, 이렇게 철학이 대상으로 삼는 지는 이미 <실체적인 삶/substantielles Leben>에서 벗어나온 것이 아닌가? 그래서 원초적이라고 할 수 없지 않는가? 무의지적 기억(mémoire involontaire)이 가능한 것은 감각의 대상이라는 것이 달리 표현할 수가 없어서 감각의 대상이라고 불려질 뿐이지 감각에게 대상으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역자는 서설에서 <실체적인 삶>과 거기서 벗어나오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도 생생한 초등학교 입학식에 대한 기억을 예를 들어 설명했다. 덧붙이자면 독일에 온후 한동안 자주 똑 같은 꿈을 꾸었다. 따스하고 밝은 햇살에 기타소리가 맴도는, 어떻게 말로 표현하기 힘든 꿈이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대상이 아니라 대상 안에 있는 그런 느낌이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사촌 형이 따사로운 봄날 자주 갓난애기를 데리고 뒷동산에 올라가 기타 연습을 했단다. 알고 나선 두 번 다시 그 꿈을 꾸지 않게 되었다.           

[2]원문 <das Begreif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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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번역 초안을 마치면서

<정신현상학> 서설 번역 초안을 마쳤다. 일을 보고 나면 개운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정신현상학> 번역을 시작한 이유는 번역을 하면 좀 꼼꼼히 읽어 내려갈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였다.  <정신현상학>의 <사유발자취/Gedankengang>를 <내 힘을 보태 따라가/mitvollziehen> 보겠다는 의지였다.

 

근데 일이 이상하게 되어버렸다. 많은 부분 <mitvollziehen>을 하지 않고 헤겔 흉내를 내버린 것 같다. 특히 이해가 안된 부분들은 그렇게 넘어간 것 같다. 물론 <mitvollziehen>이 잘 안되어서 헤겔 흉내를 내려고 했겠지만. 그리고 억대 수표를 보고 기가 죽어 동전을 요구하지 못하고 경건한 자세로 취하는 면도 있었겠지만.

 

그러나 헤겔 흉내를 내는 나의 행위를 살펴보니 그 근간에는 번역에 대한 오해가 무의식적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번역을 저자가 만들어 놓은 항아리를 다른 재료로 다시 똑같이 만들어 저자가 말하는 내용을 고스란히 담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번역이란 것이 무슨 일을 하는 것인지 아직 긍정적으로 정확하게 말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이건 아닌 것 같다. 저자가 무슨 항아리를 만들었다는 것조차 틀린 것 같다. 기호, 낱말, 언어에 대한 숙고가 부족해서 이런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 사유가 언어라는 매체에서 진행되는 것이라면 언어도 변증법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을 것이고, 그럼 번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변증법적 번역? 이건 어떻게 하는 것일까? 노발리스가 말한 <뮈토스적인 번역/mythische Übersetzung>과 같은 것일까?

 

 “번역에는 세가지 종류가 있는데, 말을 그대로 옮겨 놓은(grammatisch/문법적) 방식, 변형을 주는(verändernd) 방식, 그리고 뮈토스적인(mythisch) 방식이다. 뮈토스적인 번역이 최상스타일의 번역이다. 이런 번역은 개별 예술작품의 순수하고 완성된 성격을 서술한다. 현존하는 예술작품이 아니라 그 이상을 우리 곁에 갖다 논다는 말이다.” (노발리스, 꽃가루 68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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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 68, 69, 70, 71, 72 -끝

§68) 철학 고유의 터전에 들어와서도 우리는 위와 유사한 작태를 볼 수 있다. 정신이란 원래 장구한 도정을 거치면서 풍부하고 심오하게 운동하는 가운데[1]지에 도달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신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았다고 내세우는 자가 있는가 하면 일반상식을 내세울 뿐 본래적인 의미로서의 철학하기는 고사하고 철학 외의 지를 놓고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자신을 연마하지도 않은 자가 자기자신을 그대로 정신의 장구한 도정과 운동의 완벽한 등가물로, 아니면 아주 우수한 대체물로 간주하는 작태를 보이고 있는데, 이것은 마치 도사리를 인삼의 대용품으로 치켜세워는 것과 같다. 여러 명제간의 연관성은 고사하고 추상적인 명제 하나에도 집중하지 못하는 무지하고 형식도 품위도 갖추지 못한 저속한 자가 자신의 이런 사유야말로 사상의 자유로움과 관용이라고 떠버리는가 하면 형식에 구애 받지 않는 천재성이라고 장담하는 장관은 눈뜨고 보기에 참 딱한 사정이다. 요즘 들어 이런 천재성이 철학계를 휩쓸고 다니는데, 주지하는 바와 같이 그것이 한때 시의 세계에서도 그런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천재성이[간혹] 정신을 차려 산출한 것은 시라기보다는 삼척동자 수준의 시시한[2]산문 수준이었고, 그 수준을 넘어서는 횡설수설일 뿐이었다. 지금에 와서는 자연스럽게 철학하기라는 풍조가 이와 같은 기승을 부리고 있는데, 이런 풍조에 젖어있는 자는 자기가 개념을 넘어선 수준에 와 있고 그런 자질로 개념따위만을 다루기는 아깝다고 자만하면서 이런 개념 결핍증이야말로 바로 직관적이고 시적인 사유가 되는 길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실 그가 사유의 힘이라고 주장하는 상상력은 사상의 힘에 의해 오직 해체될 뿐이므로, 자연스럽게 철학하기 풍조란 이런 해체된 상상력이 여기저기서 갖다 붙인 합성물을, 생선도 아니고 육류도 아닌, 시도 아니고 철학도 아닌 이상 야릇한 조작물을 가지고 장터에 나와 떠벌리는 격이다.

§69) 그런가 하면 이와 대조적으로 또 다른 자연스럽게 철학하기 풍조에 젖어있는 자도 있는데, 이 자는 일반상식이라는 안락침대에 누워 두둥실 떠가듯 여유만만하게 삼척동자도 알만한 시시한 진리를[3]이리저리 꾸며 최상의 것으로 내놓는다. 이때 그러한 진리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전혀 없다고 추궁하면 그는 참다운 의미와 그 완성된 모습은 자기 마음속에 있다고 대꾸하고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타인의 마음속에도 있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이런 장담은 어쨌든 심정의 순결함, 양심의 순수함 등에 호소함으로써 할말을 다한 것처럼 행세하는 것인데, 사태가 이렇게 되면 항변할 수도 없고 더 이상을 것을 요구할 수도 없게 된다. 그러나 철학에서 문제로 삼고 돌진했던 것은 최상의 것을 내면에 방치해 두지 않고 지하 갱에서 파내어 백일하에 드러나게 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위와 같은 유의 최후의 진리를 내놓는 일은 오래 전에 이미 행해진 일로서 이젠 그만두어도 된다. 왜냐하면, 그런 따위의 진리는 이미 교리문답서나 민속속담 같은 데에서 찾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 이와 같은 진리의 정체를 밝혀내는데 있어서 그의  모호성이나 편견성을 꼬집어 반박하고, 그런 진리를 말하는 의식이 뒷면에는[4]흔히 그와 정반대 되는 진리가 있다고 보여주는 것은 어렵지 않는 일이다. 이런 의식은 이같이 자기 안에서 발생하는 혼란을 들춰 보여주면[5]여기서 자기를 건져내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지만 결국 또 다른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런 와중에 그는 더 이상 여유만만한 자세를 유지하지 못하고[6]뭔가를 밖으로 불쑥 내뱉는데, 이것은 모두가 그렇듯이[7]이렇고, 그렇지 않다고 하는 저것은 궤변이다라고 발작하는 것이다. — 궤변이라는 말은 일반상식이 자신을 연마한 이성에게 상투적으로 내던지는 말로서 철학에 무지한 자가 어디서 주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철학을 일컬을 때 어김없이 사용하는 표현, 즉 몽상이라는 말과 유사하게 사용되는 것이다. — 일반상식은 감정이 자기 내면에 잠식해 있는 신탁이나 되듯 거기에만 의존하기 때문에 이에 호응하지 않는 사람과는 나눌 말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일반상식은 자기 내면에서 똑 같은 것을 보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할말이 없단다. — 달리 표현하면, 이것은 일반상식이 인간성을 뿌리째 짓밟는 것과 다름없다. 왜냐하면, 인간성의 속성은 타인과의 합의를 이루어내라고 집요하게 요구하는 것으로서, 인간성이 존재하는 양식은 오로지 의식들이 서로간의 공통성을 달성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反인간적인것, 짐승적인 것이 존속하는 터전은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거기에 둥우리를 틀고 오로지 감정에 의해서만 타자와 교제할 줄만 아는 것이다.

 §70) 학문에 이르는 왕도를 원하는 이가 있다면, 그에게 일반상식에 의존하고 철학저서에 관한 논평을 읽는 것보다 더 편안한 길을 제시할 수 없을 것이다. 덧붙여 말하자면, 논평을 읽으면 시대와 철학에도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고, 혹자에게는,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지만[8], 해당 서적의 서설이나 첫 몇 단락 정도는 함께 읽으라고 권장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첫 몇 단락은 전체의 바탕이 되는 일반적인 원칙을 제시하고, 서설은 주제에 관한 역사적인 고찰은 물론이고 나아가 평가까지 제시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평가라는 것은 평가함으로써 그 대상을 뛰어넘는 것이 아닌가. 집안에서나 입는 편안한 옷차림으로 이런 통상적인 길을 걸으면서 영원, 신성, 무한 등을 운운하는 들뜬 감정은 대제상의 의복을 걸친 마냥 가슴을 내밀고 자신을 곧추세우고 걸어갈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아무런 여정이 없는[9]것으로서 곧바로 존재의 중심에 서는 것이며, 심오하고 독창적인 이념과 번뜩이는 사상으로 가득한 천재성이 아닌들 갈 수 없는 길이다. 이런 식으로 아무리 깊이 들어간들 본질의 원천은 여전히 드러나지 않고, 마찬가지로 천재성의 로켓이라고 해서 천상 세계에 이미 와 있는 것도 아니다. 참다운 사상과 학문적인 통찰은 오직 개념이 노동하는[10]가운데서만 획득될 수 있다. 오직 개념만이 지의 보편성이 싹트고 자라게 할 수 있다. 이렇게 생성된 지의 보편성은 일반상식의 천박한[11]모호성과 빈약성이 아니라 교양으로 다듬어져 뚜렷한 윤곽을 갖고 내용이 충만하게 완성된 인식이다. 이 보편성은 또한, 천재성을 자처하면서 그 나태와 아집으로 자신의 맹아를 짓밟아 버리기만 하는 이성이 불쑥 내놓는 비범한[12]보편성이 아니라, 자기 고유의 형식으로 힘껏 뻗어나가 무성하게 자라난 진리이다. 지의 보편성이 이런 진리가 되어야 마침내 자기의식을 갖는 모든 이성의 재산이[13]될 수 있다.

§71) 학문이 실존하는 터전은 개념의 자기 운동이다라고 정립하고 여기게 모든 것을 내걸고 이런 터전에 뿌리를 내리고 선 체로[14]진리의 속성과 형태에 대한, 여기서 거론되고 다른 곳에서 드러난, 현대인의 견해를 살펴보면 이 입장과는 맥을 달리하고 엄밀하게 따지자면 정반대다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생각 때문에 학문의 체계를 개념의 자기운동으로 서술하려는 시도가 온건히 수용될 것이라고는  장담할 수는 없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자신 있어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점에 유의하기 때문이다. 즉, [학문을 높인 받들던 시대라고 자처하던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플라톤 철학의 탁월성이 학문적으로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신화에 있다고 여겼던 시대가 있었는가 하면, 이와 반대로 열광의 시대라고까지 불렸던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그 사변적인 깊이에 심취하여 높이 받들고, 그리고 고대 변증법이 만들어낸 진정 최대의 예술작품이라고 해야 할 플라톤의<파르메니데스>를 베일에 싸인 신적인 삶을 참으로 밝혀내고 그 모습이[온전히] 드러나게[15]표현한 것으로 간주하고, 더욱이 몰아지경을 잘못 이해하여 그 상태에서 산출된 것의 다수가 불투명하기는 했지만 그 몰아지경 자체는 순수개념이 되어야 한다고 했던 시대가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가 하면 우리 시대에 들어와 철학 중에서 가장 탁월한 철학이[16]자기가치를 학문성에 두고, 이에 관한 다른 이의 이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실지로 오직 학문성만을 통용가치로 인정한다는 점이 또한 나를 자신 있게 하는 점이다. 이런 점을 바탕으로 하여 내가 또한 감히 희망하는 것은 학문에 다시 개념의 고삐를 채우고[17]학문을 이 같은 개념이라는 학문고유의 터전에서 서술하려는 나의 이 시도가 사태 내면의 진리에 의해서 독자들의 마음을 열고 들어가는 힘을 발휘할 것이라는 점이다. 참다운 것은 때가 오면 반드시 뚫고 나오는 속성을 갖고 있다고 굳게 믿어야 한다. 또한 믿는바, 진리는 그래서 때가 무르익어야만 비로소 발현하고, 그렇기 때문에 때 이르게 나타나거나 그 진리를 접하기에 아직 미숙한 독자를 만나는 법이 없고, 그리고 이런 무르익음은[18]개인에게도 역시 필요한 과정으로서, 이런 과정을 통해서 개인이 홀로 안고 버둥대는 문제가 공론에[19]선보이게 되고 거기서 입증됨으로써 처음에는 따로 노는 것에[20]속한 확신에 불과했던 것이 보편적인 것으로 경험된다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종종 공론/일반대중/독자와[21]이를 대표하거나 대변한다고 자처하고 행세하는 평론가를 구별해 낼 수가 있다. 일반대중은 여러 관점에서 후자와 다른 태도를 취할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 이와 대립되는 태도까지 보인다. 공론/일반대중은 어떤 철학저서에서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못하면 그 책에서 받아들일 것이 없다고 하지 않고 순수한 마음으로[22]자신이 그 수준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그 책임을 먼저 자기에게 돌리는데 반하여 자신의[해독]능력에 대한 확신에 젖어있는 후자는 모든 책임을 저자에게 전가해버린다. 철학저서의 영향력이 공론/일반대중에게는 조용하고 은근하게 일어나는 법이다. [그러나 후자에게는 그렇지 않다.] 후자는[썩어 문드러지는 것에 파리 떼가  날아들듯이] 죽은 것만 다루는 죽어있는 자로서 바로 이런 자들을 두고<죽은 자가 죽은 자의 장례를 치르게/마태복음8.22> 내버려 두라고 했던 것이다.일반적인 통찰력이 전반적으로 보다 높은 교양을 갖추고 호기심은 점점 고조되어 판단 또한 더욱 민첩해진 지금에 와서는 후자의 반응은 더욱 빨라져<[남편을 묻고] 너를 메고 나갈 사람들의 발이 막 문에 다다랐다/사도행전5.9>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발 빠르게 반응한다. 말 떨어지기 무섭게 일어나는 평론가의 반응과 공론/일반대중에게서 천천히 이루어지고 영향은 구별되어야 한다. 이런 장기적인 영향력에 의해서 평론가의 위압적인 장담에 눌려 어쩔 수 없이 거기에 쏠리게 된 이목이[23]바로잡히고 쓸모없다고 내팽개치기만 하는 비난이 교정되는 것이다. 그래서[진정한 철학저서에게는] 일정한 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그를 받아들이고 그와 함께하는 세계가[24]주어지는 반면 평론가들의 평론은 그 시대가 지나면[죽은 자가 죽은 자의 장례를 치름과 동시에 자신의 장례를 치르듯이] 맥이 끊어져 더 이상 후세가 없게 된다.

§72) [천재성으로 번득이는 평론가들에게] 한마디 더 덧붙이자면, 정신의 보편성이 더없이 고무된 결과 이젠 어떤 개별적인 것을 다루나 피차 마찬가지가 되어 버리고, 또 개별적인 것을 다루는데 있어서도 그 테두리와 그 안에 차곡차곡 쌓아올린[25]풍부함이 보편성에 육박하고[26]또 그런 풍부함을 요구하는 상황이 되어버린 지금에 와서는 정신의 산출물 전체에서 개인의 몫으로 떨어지는 것이 미미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개인은, 학문의 속성상 이미 그럴 수밖에 없지만, 더욱 더[주어진] 자신을 망각하고 온 힘을 다해 할 수 있는 일을 해 나가는 가운데 새롭게 되어야 하지만, 그러나 개인 자신이 자기에 대한 기대와 요구를 낮출 수 밖에 없는 만큼 그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1]원문<so breit wie tief/넓고 깊게>. 서설 §10에서 이야기된<Die Kraft des Geistes ist nur so groß als ihre Äußerung, seine Tiefe nur so tief, als er in seiner Auslegung sich auszubreiten und sich zu verlieren getraut./ 정신이 발휘하는 힘은 그 크기가 자신을 밖으로 내치는 힘 이상이 될 수 없다. 그 깊이 또한 마찬가지로 자신을 전개하는 가운데 자신의 중심에서 벗어나 무한히 뻗어나가 자기중심과 완전히 동떨어진 상태가 되어 자신을 상실하고 헤매는 상태에 도전하는 것 이상이 될 수가 없다.>가 연상되는 대목이다.

[2]원문<trivial>. 일곱 가지로 구성된 중세초기의 교육과정에서 초보적인3가지 학문(Trivium)을 가리킨다. 

[3]원문<trivial>

[4]원문<ihrem Bewusstsein an ihm selbst>

[5]원문<anrichten>. <Es ist angerichtet>하면<식탁을 차리다>란 의미가 있다. 의식이 지가 차린 식탁에 무슨 먹거리가 있는지 모른다는 이야기다.

[6]원문<wohl>을 이렇게 풀어 번역했다.

[7]원문<ausgemachtermassen>

[8]원문<gar>

[9]원문<unmittelbar>

[10]원문<Arbeit des Begriffs>

[11]원문<gemein>

[12]원문<ungemein>

[13]원문<Eigentum aller selbstbewussten Vernunft>

[14]원문<setzen>을 이렇게 좀 장황하게 번역하였다.

[15]원문<positiv>

[16]칸트 철학을 이야기하고 있다.

[17]원문<die Wissenschaft dem Begriffe vindizieren>

[18]원문<Effekt>. 어원<efficere/ausbauen, ausbilden/ 완성해 나가다.>란 의미를 살려 번역했다.

[19]Publikum

[20]원문<Besonderheit/특수성>

[21]원문<Publikum>

[22]원문<gutmuetigerweise>

[23]원문<Aufmerksamkeit>

[24]원문<Mitwelt>

[25]원문<gebildet>

[26]원문<auch jene an ihrem Umfang und gebildeteten Reichtum hält>. 이 문장의 주어는 보편성이 아니라<Einzelheit/개별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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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 67

§67) 이렇게 이리저리 따져보는 형식적인 사유 못지않게 철학에 열중하는 것을 방해하는 태도는 자질구레한 것들을 들고 와서 그것들이 무슨 어렵게 발견한 [보배나 되는 양] 진리라고[1]내놓는 환상이다. 이런 환상에 젖어 진리를 손아귀에 쥐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진리문제가 해결된바] 이젠 더 이상 [계속해서] 진리문제로 되돌아가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그러기 때문에 이젠 아무런 논변도 필요 없다는 식이다. 그들은 오히려 그런 환상적인 진리들을 발판으로 삼고 [2][또 그런 진리들의 대변인인이나 되는 양] 그런 진리들의 속내용을 다 떠버릴 수 있다고 믿고, 또 그런 진리들의 힘을 빌어먹는[진리왕국의] 법정관이 되어 최종판결을 내리거나[3][진리왕국의 시민권을] 박탈하는[4][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특히 [철학을 이런 귀족의 자리에서 끌어내려 다시 평민이 되게 하여] [석공 소크라테스가 그랬던 것처럼] [평민이 직업을 연마해서 삶을 진지하게 살아가듯] 진지한 사업(事業)으로[5]만드는 일이 시급하다. 학문, 예술, 재주, 수공업 그 무엇을 보더라도 그 어느 한가지를 몸소 읽혀 터득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학습하고 훈련하는데 노력에 노력을 기우려야 한다고 모두가 확신한다. 그런데 철학에 대해서는 이상한 편견이 현재 팽배한데, 눈과 손이 있고 가죽과 공구가 있다고 해서 누구나 구두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철학에 있어서는 아무나 아무런 준비 없이 곧장 철학하고 철학을 논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견이다. 누구나 타고난 이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척도로 삼아 그럴 수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마치 모두가 발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척도로 삼아 구두장이가 될 수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 [더 안타까운 것은] 철학이란 것을 무슨 소유물로 간주하고 지식과 [탐구하는] 노력과는 거리가 먼 [횡성수설 쯤으로] 생각하는 것이고 [진정한] 지식과 연구가 시작되는 지점에서는 철학따위가 더 이상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다. 이렇게 철학은 흔히 형식적이고 내용이 텅 비어있는 지로 여겨진다. 그러나 가장 아쉬운 것은 지식이나 학문이 내용상의 진리라고 내놓을 것이 진리란 그 이름을 적법하게 걸치기 위해서는 그것이 철학에 의해서 산출되어야만 한다는 통찰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여타 학문이 철학을 제쳐놓고 이리저리 따져보는 사유를 가지고 갖은 노력을 다한다고 해도 철학 없이는 그 안에 어떠한 생명도 정신도 진리도[6]획득할 수가 없다는 통찰이다.



[1]원문<ausgemachte Wahrheiten>. 복수형<Wahrheiten/진리들>을<자질구레한 것들>로 번역하였다.

[2]원문<zugrunde legen>. <Hypokeimenon/Substrat/바탕>이 엿 들리는 표현이다.

[3]원문<richten>. 법정관이 하는 행위를 연상시키는 낱말이다.

[4]원문<absprechen>.

[5]원문<ernsthaftes Geschäft/진지한 일>. 역자는<정신현상학> 서론 §1에서 <Sache>를 소크라테스의<pragma/소크라테스가 염두에 두고 계속 추진했던 일>란 의미로 번역했다. 슐라이어마허는<pragma>를 <Geschäft>로 번역하고 역자는<Geschäft>를 <사업(事業)>으로 번역했다. 맑스 베버의<Beruf/직업/Calling/소명>이란 의미도 엿 들린다. 소크라테스가 직접 거론되지 않지만 헤겔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과 특히 <Ernst>와 함께 사용된 <Geschäft>란 낱말을 보면 소크라테스가 간접적으로 등장하는 것 같다. <ernsthaftes Geschäft>를 그냥 <진지한 사업>으로 번역하고 지나가면 뭔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귀족, 평민 등을 운운하면서 좀 장황하게 번역했다. <Ernst>란 낱말은 이미 여러 번 등장했다. <정신현상학>이 인간이 교양을 - 역자는 교양이란 말을 들으면 [전문과목 외에  별로 중요하지 않는] 교양과목이란 말이 연상되어 별로 사용하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그냥 <Bildung>의 번역으로 쓰고있다 – 쌓아가는 과정을 서술하는 것이라면 <Ernst>를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Ernst>가 서설 §4에서 동식물과 같은 무의식적인 일상생활에서 빠져 나오는 교양과정을 이야기하는 내용의 핵심에 서있다. 거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사태의 심층까지 들어가는 <Ernst des Begriffs/개념의 Ernst> 수준에 도달하기 이전에 사태를 경험하게 하는 <Ernst des erfüllten Lebens/충만한 삶을 향유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혹은 생계를 이어가려고 발버둥 하는] 직업/사회생활>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Ernst des Begriffs>란 테마는 서설 §58에서 <Anstrenung des Begriffs>로 변형되어 재개되어 이 문단에서<ernsthaftes Geschäft>로 이어지고 서론 §1에서 다시 <철학이 해야하는일>로 언급되는 것 같다. 이렇게 <Ernst>란 개념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서 유출된 개념인 것 같다. 서설 §19에는 삶이란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부정적인 것을 대하고 그것을 안고 싸우는 진지, 고통, 인내, 그리고 노고/Ernst, der Schmerz, die Geduld und Arbeit des Negativen>와 <타자존재가 되어서 소외[경험]을 하고 또 그 소외를 극복하기 위한 진지한 대결/Ernst mit dem Anderssein und der Entfremdung, so wie mit dem Überwinden dieser Entfremdung>이라고 한다. 이런 의미로 학문에, 그리고 [실천이성으로서의] 변증법적 운동에 빠질 수 없는 개념이다. 그럼, 삶을 아무런 유머 없이 <tierisch ernst>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인가? 생각해 볼 문제다. 삶이 칼데론 델 라 바르카(Calderón de la Barca)의 <El Gran Theatro del Mundo/세상이라는 거대한 극장>에서 연기하는 것이라면 삶에는 분명 <놀이>라는 면도 있는 것 같다. 신들이 구경하는 가운데 노는 것이기 때문에 잘 놀아야 한다. 생사를 걸고 싸우는 글라디아토 같이… <Ernst>와 <Spiel>의 변증법은 뭔지 궁금하다.

[6]원문<Leben, Geist, Wahrheit>. 이 세가지가 무슨 상관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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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 66

§66) 혹자는 변증법적 운동 역시 명제[형식]으로 구성되어 있거나, 또는 명제라는 터전에서 전개된다고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앞서 들춰본 난점이 거듭 대두하고, 사태 자체에 스며있는 난점인 것처럼 보인다. — 이런 상황은 일상적인 증명에서 바탕으로 사용되는 것이 다시 다른 바탕에 세워져야 하고 이렇게 끝없이 소급해 올라가야 하는 상황과 유사하다. 그러나 이와 같이 근거를 제공하고 찾아 나서는 형식은 변증법적 운동과 [유]를 달리하는 증명에 속하는 것으로서 외피적인 인식의 산출물일 뿐이다. 이와 달리 변증법적 운동은 유일한/순수한 개념을[1] 그 터전으로 삼기 때문에, 이때 내용은 [언명의 대상이 되는 주어와 술어 간의 관계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주체가 태동하고/맴돌고[2]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선 내용이 [형식적 사유에서와 달리] 바탕[Hypokeimenon/Substrat]에 깔린 [무의미한] 그 무엇이란 것으로서의 주어로 행세하고, [단지] 거기에 따라붙는 술어를 통해서만 의미를 부여 받는 그런 내용과는 다른 것이다. 그래서 형식적인 사유가 [내용을 갖춘] 명제라고 내놓는 것은 [호주머니에서 뭔가를] 불쑥 꺼내놓는[3] 것과 같은 공허한 형식일 뿐이다. — [이런 반박이 무서워] 감각적으로 직관하거나 표상적으로 마주했다는/한다는 [그 자체란 의미로서의] 자기(自己)란[4]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내놓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것은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명제형식을 직관한 내용으로 대체하는 것일 뿐이지 사변적인 명제형식으로 지양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 자체로서의 자기는 [지가 무슨 월등한 것이라는 되는 양 행세하지만] 순수한 주체, 즉 공허하고 개념이란 찾아볼 수 없는 [하나라는] 일체를 표기하는 이름과 같은 고유명사[5] 그 이상의 것이 아니다. [직관으로 영특한 자가 이런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예를 들어 이라는 이름과 같은 낱말이 그대로 [무슨 거창한] 개념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토대 구실을 하는 주어로서 견고한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이름이란 고유명사의 본래적인 의미 그 이상의 것이 아니란 것을 알기 때문에 신이란 이름대신 존재 혹은 일자, 개별성, 주체 등을 운운하는 것이 더 좋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이런 낱말들을 이름과 같은 고유명사로 사용하는데, 왜냐하면 이런 낱말에는 달리 덧붙일 필요 없이[6] 그 자체에 개념이 스며있음이 보이기 때문이다. — 위와 같이 이름을 높이 불러 마주하는 주체에 관하여 사변적인 진리를 진술한다고 해도 그 진리의 내용은 [주체에] 내재하는 개념으로 전개되는 법이 없다. 왜냐하면, 그런 주체는 단지 부동의 주체로서 허섭스레기와[7]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주변상황아래 사변적인 진리란 쉽게 뭔가 장엄한 것[을 소리 높여 불러] 그 앞에서 경건한 자세를 취하는 형식을[8] 갖게 된다. —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사변적인 술어를 명제의 형식에 따라서만 파악하고, 개념이나 본질로 파악하는 것을 방해하는 일상적인 사유의 폐습은 철학을 강연하는 방식에 따라 커질 수도 있고 감소될 수도 있는바 거기에는 분명 철학의 잘못이 있다. 그래서 철학적 서술은 사변적 사유의 속성을 통찰한 결과에 충실하게 변증법적인 형식을 견지하면서 개념적으로 파악되어 개념이 되는 것 외 다른 것을 취급하지 않는데 있다.



[1]역자가 사용하는 마이너 판에는 <der eine Begriff/유일한 개념>이라고 되어 있다. 잘못된 인쇄인지 아니면 내용의 흐름상 더 적절해서 <rein> 대신 <ein>을 삽입했는지 모르겠다. 앞의 산만한 근거와 대비해 보면 <ein>이 더 적절한 것 같기도 하다.

[2]원문 <Subjekt an ihm selbst>

[3]원문 <unmittelbar>

[4]원문 <das Selbst>

[5]원문 <Name als Name>

[6]원문<unmittelbar>

[7]원문<vorhanden>. 죽어있어서 찍어올릴 수 있는 허섭스레기

[8]원문<Form der Erbaulichkeit>. <신에게 예배 드리는 것이 곧 신을 인식하는 것이다.>란 말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서론  §19 역자주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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