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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 67

§67) 이렇게 이리저리 따져보는 형식적인 사유 못지않게 철학에 열중하는 것을 방해하는 태도는 자질구레한 것들을 들고 와서 그것들이 무슨 어렵게 발견한 [보배나 되는 양] 진리라고[1]내놓는 환상이다. 이런 환상에 젖어 진리를 손아귀에 쥐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진리문제가 해결된바] 이젠 더 이상 [계속해서] 진리문제로 되돌아가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그러기 때문에 이젠 아무런 논변도 필요 없다는 식이다. 그들은 오히려 그런 환상적인 진리들을 발판으로 삼고 [2][또 그런 진리들의 대변인인이나 되는 양] 그런 진리들의 속내용을 다 떠버릴 수 있다고 믿고, 또 그런 진리들의 힘을 빌어먹는[진리왕국의] 법정관이 되어 최종판결을 내리거나[3][진리왕국의 시민권을] 박탈하는[4][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특히 [철학을 이런 귀족의 자리에서 끌어내려 다시 평민이 되게 하여] [석공 소크라테스가 그랬던 것처럼] [평민이 직업을 연마해서 삶을 진지하게 살아가듯] 진지한 사업(事業)으로[5]만드는 일이 시급하다. 학문, 예술, 재주, 수공업 그 무엇을 보더라도 그 어느 한가지를 몸소 읽혀 터득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학습하고 훈련하는데 노력에 노력을 기우려야 한다고 모두가 확신한다. 그런데 철학에 대해서는 이상한 편견이 현재 팽배한데, 눈과 손이 있고 가죽과 공구가 있다고 해서 누구나 구두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철학에 있어서는 아무나 아무런 준비 없이 곧장 철학하고 철학을 논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견이다. 누구나 타고난 이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척도로 삼아 그럴 수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마치 모두가 발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척도로 삼아 구두장이가 될 수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 [더 안타까운 것은] 철학이란 것을 무슨 소유물로 간주하고 지식과 [탐구하는] 노력과는 거리가 먼 [횡성수설 쯤으로] 생각하는 것이고 [진정한] 지식과 연구가 시작되는 지점에서는 철학따위가 더 이상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다. 이렇게 철학은 흔히 형식적이고 내용이 텅 비어있는 지로 여겨진다. 그러나 가장 아쉬운 것은 지식이나 학문이 내용상의 진리라고 내놓을 것이 진리란 그 이름을 적법하게 걸치기 위해서는 그것이 철학에 의해서 산출되어야만 한다는 통찰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여타 학문이 철학을 제쳐놓고 이리저리 따져보는 사유를 가지고 갖은 노력을 다한다고 해도 철학 없이는 그 안에 어떠한 생명도 정신도 진리도[6]획득할 수가 없다는 통찰이다.



[1]원문<ausgemachte Wahrheiten>. 복수형<Wahrheiten/진리들>을<자질구레한 것들>로 번역하였다.

[2]원문<zugrunde legen>. <Hypokeimenon/Substrat/바탕>이 엿 들리는 표현이다.

[3]원문<richten>. 법정관이 하는 행위를 연상시키는 낱말이다.

[4]원문<absprechen>.

[5]원문<ernsthaftes Geschäft/진지한 일>. 역자는<정신현상학> 서론 §1에서 <Sache>를 소크라테스의<pragma/소크라테스가 염두에 두고 계속 추진했던 일>란 의미로 번역했다. 슐라이어마허는<pragma>를 <Geschäft>로 번역하고 역자는<Geschäft>를 <사업(事業)>으로 번역했다. 맑스 베버의<Beruf/직업/Calling/소명>이란 의미도 엿 들린다. 소크라테스가 직접 거론되지 않지만 헤겔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과 특히 <Ernst>와 함께 사용된 <Geschäft>란 낱말을 보면 소크라테스가 간접적으로 등장하는 것 같다. <ernsthaftes Geschäft>를 그냥 <진지한 사업>으로 번역하고 지나가면 뭔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귀족, 평민 등을 운운하면서 좀 장황하게 번역했다. <Ernst>란 낱말은 이미 여러 번 등장했다. <정신현상학>이 인간이 교양을 - 역자는 교양이란 말을 들으면 [전문과목 외에  별로 중요하지 않는] 교양과목이란 말이 연상되어 별로 사용하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그냥 <Bildung>의 번역으로 쓰고있다 – 쌓아가는 과정을 서술하는 것이라면 <Ernst>를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Ernst>가 서설 §4에서 동식물과 같은 무의식적인 일상생활에서 빠져 나오는 교양과정을 이야기하는 내용의 핵심에 서있다. 거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사태의 심층까지 들어가는 <Ernst des Begriffs/개념의 Ernst> 수준에 도달하기 이전에 사태를 경험하게 하는 <Ernst des erfüllten Lebens/충만한 삶을 향유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혹은 생계를 이어가려고 발버둥 하는] 직업/사회생활>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Ernst des Begriffs>란 테마는 서설 §58에서 <Anstrenung des Begriffs>로 변형되어 재개되어 이 문단에서<ernsthaftes Geschäft>로 이어지고 서론 §1에서 다시 <철학이 해야하는일>로 언급되는 것 같다. 이렇게 <Ernst>란 개념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서 유출된 개념인 것 같다. 서설 §19에는 삶이란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부정적인 것을 대하고 그것을 안고 싸우는 진지, 고통, 인내, 그리고 노고/Ernst, der Schmerz, die Geduld und Arbeit des Negativen>와 <타자존재가 되어서 소외[경험]을 하고 또 그 소외를 극복하기 위한 진지한 대결/Ernst mit dem Anderssein und der Entfremdung, so wie mit dem Überwinden dieser Entfremdung>이라고 한다. 이런 의미로 학문에, 그리고 [실천이성으로서의] 변증법적 운동에 빠질 수 없는 개념이다. 그럼, 삶을 아무런 유머 없이 <tierisch ernst>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인가? 생각해 볼 문제다. 삶이 칼데론 델 라 바르카(Calderón de la Barca)의 <El Gran Theatro del Mundo/세상이라는 거대한 극장>에서 연기하는 것이라면 삶에는 분명 <놀이>라는 면도 있는 것 같다. 신들이 구경하는 가운데 노는 것이기 때문에 잘 놀아야 한다. 생사를 걸고 싸우는 글라디아토 같이… <Ernst>와 <Spiel>의 변증법은 뭔지 궁금하다.

[6]원문<Leben, Geist, Wahrheit>. 이 세가지가 무슨 상관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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