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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 64 -수정

      {가면 갈수록 태산이다. 첩첩산중이다. 웬만큼 헤매고 나면 밝은 곳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착각한 것 같다. 헤겔이 독일 사람이라 그를 따라 들어간 숲도 당연히 독일식 숲이라고 생각해서 그랬던 것 같다. 독일식 숲이라면 뉘른베르크 나치당 전국당대회 광장에 당원들이 질서정연하게 “위대한 존재자”가 지나갈 수 있게 길을 뚫어놓고 서 있듯이 반듯이 “Lichtung”이란 것이 있다. 나무를 다 베어 만든 툭 터진 길이다. 하이데거의 <존재>가 즐겨 걷던 길이다.

     헤겔이 인도한 숲은 원시적인 밀림인 것 같다. 그리고 밖으로 인도할 생각을 안 하는 것 같다. 아니 밖으로 나가서도 안되고 밀림에 있는 나무 하나하나를, 그 속에 살고있는 생명체 하나하나를 다 보기 전에는 빠져 나갈 수도 없단다. <상한 갈대도, 꺼져가는 등불>(이사야 42.3)도 함부로 하지 않는다는 야훼와 같이 되란 말인가?

      §66을 번역하다가 뭔가에 꽉 막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이리저리 망설이다가 후진하게 되었다. 뭔가 알 것 같아서 죽죽 번역하고 앞으로 나아갔는데 그게 아니다. 한번 본 것 같은 지형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그렇지 않았고, 결국 엉뚱한 데로 가게 되었다. 돌아가는 길이 없는 헤겔의 정신에게야 엉뚱한 곳이란 없겠지만...

      §64의 번역을 다시 올린다. 여기서 이야기된 내용이 어떤 지형에서 이야기되었는지 이것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 번역하였다. 이것이 나중에 문제가 되었다.

      §64 논쟁구도를 보자면 <사변적인 방식>, <논변위주 방식>, 그리고 <입체적인 방식> 등 3자가 등장한다. 역자는 처음에 2인으로 생각하고 <사변적인 방식>과 <입체적인 방식>을 같은 선상에 놓았다. <사변적인 방식>은 아마 쉘링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입체적인 방식>은 헤겔 자신, 즉 <변증법적 방식>을 가리킨다. <변증법적 방식> 차원에서 <논변위주의 방식>과 함께 쉘링유의 <사변적인 방식>이 비판의 대상이 된다. 논점은 쉘링유의 <사변적인 방식>도 <논변위주의 방식>을 비판하는데, <변증법적 방식> 차원에서 보자면 둘 다 같은 선상에 있다는 것이다.}

 

§64) 이때 이해를 어렵게 하는 것은 [쉘링유의] 사변적인 방식과 논변위주 방식이 [하는 짓이 둘 다 비슷해서] 둘을 명확하게 구별해 내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 점을 간과해서는 안되고] 둘을 혼합하는 것을 반드시 피해야 한다. 사변적인 방식에서는 [문장형식에서] 주어에 관하여 이야기된 것이 주체의 개념이 되는 의미를 갖는데, 논변위주의 방식에서는 주체에 대하여 단지 이야기 할 수 있는 것[1], 즉 주체에 따라붙는 것[2]이라는 의미밖에 없다. — 양쪽 그 어느 방식이든지 다른 방식을 방해하는 것이다. 그런데 둘 다 명제의 부분인 [주어와 술어가 갖는] 일상적인 관계에 기대고 있는바 이를 엄격하게 배제하는 철학적 드러냄만이[3] 비로서 입체적인 철학이 될 것이다.



[1]원문 <Prädikat/술어>

[2]원문 <Akzidens>. 따라붙는 것으로서 필연적으로 따라붙을 수 있고, 우연이 따라붙을 수도 있다. 그래서 속성이란 의미와 우연이란 의미가 동시에 있다.

[3]원문 <Exposition>. 어원의 의미를 살려 <드러내다>로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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