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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방금 말한 것은 형식적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겠다. 판단이나 명제라는 것은 그 속성상 그 어떤 것이라도 그 안에 주어와 술어라는 차이를 내포하는데, 이 속성이 사변적인 명제에 의해서 파괴되고, 이렇게 주어와 술어가 갖는 관계가 반격을 받음으로써 처음에 등장하는[표상적 사유의] 명제가 동일성 명제가 된다는 것이다. — [말로 표현하려면 어쩔 수 없이 사용해야 하는 주어와 술어란 차이를 갖춘] 일반명제의 형식과 바로 이런 형식을 파괴하는 개념의 [운동]에 의한 통일 간의 대립은 운율에서 박자와 악센트사이에서 일어나는 대립과 비슷하다. 운율은 어느 한 쪽이 중심이 되는 통일이 아니라 그 중심이 부동(浮動)하는 양자의 통일에서[1]나타나는 결과다. 이와 마찬가지로 철학적 명제에서도 주어와 술어의 동일성은 일반명제의 형식이 표현하는 그들의 구별을 말소해서는 안 되다. 이와 반대로 이 통일은 어디까지나 조화의 결과로 나타나야 한다. 명제의 형식은 특정한 의미가 나타나는 모습으로서 그 의미가 [치우쳐] 규정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인바, 이런 명제의 형식은 의미의 완성도를 강약으로 가르는 악센트와 같은 것이다.술어가 실체를 표현하고 [주관으로 일관하는] 주어/주체가 스스로 보편자의 위치로 뛰어들어감으로써 통일이 이루어지는데, 이런 통일은 악센트가 운율 안으로 잠식해 들어가는 것과 같은 통일이다.
[1]원문<aus der schwebenden Mitte und Vereinigung beider>. 무슨 말인가? 헤겔이 피히테가 갈아논 밭에서 뭔가를 가져온 것 같다. 노발리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Fichtisiren>하고 있다.1 <Schwebende Mitte/부동하는 중심>은 피히테가 <구상력/Einbildungskraft>과 관련하여 사용한 표현이다. 1794/95년<전 학문론의 기초/Grundlage der gesamten Wissenschaftslehre>에서 피히테는 구상력에 의해서 <직관/Anschauung>이 형성된다고 한다. „종합하는 능력은 대립하는 것을 통일하는, 양자를 하나로 사유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수행할 수 없는 과제를 안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대립하는 양자를 통일시킬수 없는 무능력과 그렇게 하라는 요구 사이에 갈등이 불거진다. 이런 갈등 안에 정신은verweilen/[하염없이 머무르다]하면서 양자 사이에, 그 과제를 수행하라는 요구와 그것을 달성할 수 없는 무능력 사이에 부동한다. 중요한 것은 정신이 이런 상태에서, 오로지 이런 상태에서만, 양자를 동시에 굳게 움켜쥐고 있다는 것이다.“(„Das Vermögen der Synthesis hat die Aufgabe die entgegengesezten zu vereinigen, als Eins zu denken, .... Dies vermag sie nun nicht; dennoch aber ist die Aufgabe da; und es entsteht daher ein Streit zwischen dem Unvermögen, und der Forderung. In diesem Streite verweilt der Geist, schwebt zwischen beiden; schwebt zwischen der Forderung, und der Unmöglichkeit, sie zu erfüllen, und in diesem Zustande, aber nur in diesem, hält er beide zugleich fest.“ 강조역자) 1804년 <학문론/Die Wissenschaftslehre>에서는 확신이란 대립하는 a와 b라는 양자 사이에서 „a 에서 b로 그리고 다시b 에서 a 로 [왔다갔다하면서] 부동하고, 이렇게 부동하는 가운데 양자에게서 모든 것을 퍼가는 것으로서 이런 [왔다갔다하는] 이중적인 부상 사이에 다시 부상하는 것“("schwebend von a zu b, und wiederum von b zu a, und erschöpfend durchaus beides, also schwebend wiederum zwischen dem zwiefachen Schweben." 강조 역자)이라고 한다. 달리 표현하면<부상>이 매개프로세스와 매개의 형식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schwebedende Mitte/부상하는 중심>은<Vermittlung/매개>의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가 있다. (Christoph Asmuth, „Das Schweben ist der Quell aller Realität, http://www.jp.philo.at/texte/AsmuthC1.pdf 참조. 피히테 인용은 동 문서를 따름). <Vermittlung/매개>를 이렇게<부상하는 중심>으로 이해하면 우선 <중재/Mediation>와는 거리가 멀뿐만아니라 <중간> 등 어딘가에 자기자리를 갖는 것과도 거리가 먼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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