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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 63, 64, 65

§63) <철학서적은 도통 알아먹을 수가 없다>라는 불평은 대부분, 당사자가 철학서적을 이해할 만한 여타 조건을 교육을 통해서 갖춘 상태인 경우, 위와 같은[다른 학과의 서적에서는] 당해보지 못한 장애물 앞에서의 망설임에서 기인한다. 특히, [한두 문장도 아니고] 다수의 문장들을 [줄줄이] 반복해서 읽어야만 비로소 이해된다는 식의 철학 저서에 자주 가해지는 고질적인 비판은 지금 이야기된 내용에서 그 근거를 찾아 볼 수 있다. — 이런 비난은[이젠 아무리 권해도 더 이상 듣지 않고 아예 책을 내 팽개쳐버리겠다는 식의] 무례한 행동과도 같은데, 이런 생각이 한번 곧추세워지면 달리 달랠 방법이 없다고 들 한다. — 이 비난의 정황은 위에서 거론한 것에 비춰보면 훤해진다. 철학적 명제도 역시 명제이기 때문에 이를 대하는 일반인은 일반명제에서와 같은 상투적인 주어와 술어의 관계를 떠올리고 이에 익숙해진 지의 태도를 취한다. 그러나 이런 지의 태도와 사념은 철학적 내용에 의해서 파괴된다. 여기서 사념, 즉 독자는 주어와 술어의 관계가 의미하는 것이 자기가 사념한 것과 다르다는 것을 경험한다. 이에 따라 사념을 정정해야 함은 지로 하여금 명제로 되돌아가 그것을 다시 읽으면서 달리 파악하도록 강제한다.

 

§64) 이때 꼭 피해야 할 일은 이해를 어렵게 하는데 장본인 역할을 하는 사변적인 방식과 논변위주 방식을 혼합하는 일이다. 사변적인 방식에서는 [문장형식에서] 주어에 관하여 이야기된 것이 주체의 개념이 되는 의미를 갖는데, 논변위주의 방식에서는 주체에 대하여 단지 이야기 할 수 있는 것[1], 즉 주체에 따라붙는 것[2]이라는 의미밖에 없다. — 양쪽 그 어느 방식이든지 다른 방식을 방해하는 것이다. 명제에서 주어와 술어가 갖는 일상적인 관계를 철저히 배제하고 [사변적인] 관계만을 밝혀낼[3] 때 비로서 입체적인 철학적 [내용이] 드러날 것이다.

 

§65) [그렇다고, 철학왕국의 시민권이 없다고 해서 논변위주의 사유를 그냥 내쫓을 수는 없다. 이점이 어렵다.] 사실 사변적이지 않는 사유도 그 나름대로의 정당한 [존재]권리가 있다. 다만 사변적인 명제의 방식이 거들떠보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주어와 술어를 따지는] 일반명제의 형식이 지양되어야[4] 한다. 이것은 단지 직접적인 방식으로, 즉 위에서와 같이 단도직입적으로 명제의 형식이 그 내용에 어긋난다는 이유를 대들고 그 형식을 파기해서만은 안 된다는 말이다. 그보다는 아래와 같은 엇갈리는 운동이 속속들이 표현되어야[5] 한다. 다시 말해서 위에서 언급한 형식적 사유의 내적 망설임만을 지적해서는 안 된다.  이 내적 망설임을 개념이 자기 안으로 복귀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이렇게 이해할 뿐만 아니라 개념이 자기 안으로 복귀하는 운동을 남김없이 완벽하게 서술해야 한다. [이런 서술이 완성될 때 비로서[6] 명제의 형식이 지양되는 것이다.] 이 운동이야말로 흔히 이야기되는 증명이라는 것이 진정 해야 할 일을 감당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명제가 스스로 행하는 변증법적 운동이다. 오직 이 운동만이 실재적으로 사변적인 것이며 또한 오직 이 운동을 속속들이 표명하는 것만이 사변적인 서술이다. 명제에 그치는 사변적인 것은 단지 내적 망설임일 뿐이고 아직 본질이 자기 안으로 복귀하는 운동으로 등장하여 서술되지 않은[7] 그런 복귀일 뿐이다.그래서 우리는 어떤 철학서적을 들어다 보면 첫 장에[8] 이와 같은 내적 직관을 보란 듯이 내놓고 그것을 따르고 있고 또 그것을 따라야 한다고 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요구하는 명제의 변증법적 운동을 서술하는 [정작 걸머져야 할] 짐을 덜어보려는 작태다. — 그들은 진리가 무엇인지 표현하는 것이 명제라고 한다. 그러나 진리란 본질적으로 주체다. 그리고 이런 주체로서의 진리는 오로지 변증법적 운동으로서 자기자신을 산출하고, 이끌어 나가고, 그리고 자기 안으로 돌아가는 발자취[9]다. — 여타 인식에서는 증명을 떠맡는 장본인이 이와 같이 내면성을 [내적 직관을 통해서]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사태는 진정 그렇지 않다. 증명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변증법과 증명이 서로 분리되어버린 지금에 와서는 사실 증명의 개념조차 상실된 상황이다.



[1]원문 <Prädikat/술어>

[2]원문 <Akzidens>. 따라붙는 것으로서 필연적으로 따라붙을 수 있고, 우연이 따라붙을 수도 있다. 그래서 속성이란 의미와 우연이란 의미가 동시에 있다.

[3]원문 <Exposition>. 어원의 의미를 살려 <밝혀내다>와 <드러나다>로 번역하였다.

[4]원문 <aufheben>. <주어올리다>의 의미에서 <파기하다=주어올려 버리다>, <보존하다=주어올려 선반 등에 놓다>, 그리고 <발전하여 한단계 위로 올라가다=한층 북돋은 지위(aufgehobene Stellung)에서와 같이>란 의미가 있다. 사변적인 개념이다.

[5]원문 <aussprechen>. 여기선 <속 시원하게 내놓고 전부 말하다>란 의미인 것 같다.

[6]원문 <dargestellt sein>의 현재완료를 <비로소>로 받았다.

[7]원문 <nichtdaseiend>

[8]원문 <Exposition> 소나타의 첫 장을 <Exposition>이라고 하는 것에 기대여 번역했다.

[9]원문 <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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