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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와 마찬가지로 어느 한 철학작품을 다루는데 있어서 그것이 동일한 대상을 다루고 있는 다른 연구결과와[1]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규정하는 가운데 이렇다라고 확신하는 것도[2] 철학 외적인 관심을 끌고 들어와 진리를 인식하는데 있어서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오히려 어둡게 된다. 사람들은 보통 참다운 것과 그릇된 것은 서로 대립한다는 천박한 생각에 젖어있는데[3], 이와 같은 대립이 사람들의 생각에 뿌리를 내려 견고해지면 철학에 대한 기대는 이원논리로 전락하여 기존의 철학체계를 놓고 찬반으로 갈라지고 기존 철학체계에 관한 설명에서도 찬이냐 반이야 둘 중에 한쪽만을 보려는 자세로 굳어지게 된다. 이렇게 차이를 단지 모순으로 생각하는 한 다양한 철학 체계간의 차이를 결코 진리의 점진적인 발전으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꽃이 피어남으로써 꽃봉오리는 사라진다. 이것을 보고 위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아마 꽃봉오리가 꽃에 의해서 반증되었다고[4] 이야기할 것이다. 이런 식이라면[5] 열매는 꽃을 식물의 거짓된 존재로[6] 선언하고 스스로 꽃이 차지하던 진리의 자리를 차지한다. 여기서 나열된 형태는 서로 다르다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들 간에는 결코 어떠한 타협과 화해가 있을 수 없으므로 공존하지 못하고 완전한 상호배척을 이룬다. 그러나 자연의 흐름을 속성으로 하는 식물은 위의 형태들 간의 상호배척에 연연하지 않고 그들을 다 유기적인 통일로 이끌어 내어 거기서 한자리[7] 하게 만든다. 이런 통일 안에서는 각 형태들이 서로 다투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도 빠져서는 안 되는 필연적인 것이 된다. 이렇게 모든 형태가 똑 같이 누리는 필연성이 완성되어야 비로서 삶이 완성되고 전체가 숨쉬고 살아있는 것이[8] 된다. 그러나 어떤 철학체계를 반박하면서 자신의 체계를 제시하는 철학자 자신이 모순을 위에서 이야기된 것과 같이 이해하지 않는 자세로 굳어져 있는가 하면 뭔가를 좀 안다고 하면서 그런 철학작품을 읽는 사람조차[9] 천박하게 사유하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는데[10] 그들 역시 모순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모순을 자신의 편협성에 구속시켜 이해하지 절대 모순을 자기의 편협성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여 자유롭게 [운동하는 것으로] 보존할 줄 모르고, 결국 갈등과 대립의 구도로 나타나는 외형에서[11] 서로가 서로에게 필연적인 계기가[12] 된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다.
[1] 원문
[2] 원문
[3] 원문
[4] 원문
[5] 원문
[6] 원문
[7] 원문
[8] 원문
[9] 원문
[10] 원문
[11] 원문
[12]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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