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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3

(§3) 이와 같이 판가름에 용이한 설명을 요구하고 또 그런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이젠 잡화상에서나 볼 수 있는 동전으로 쉽게 사고팔기하는 것이 되었는데[1] 이런 것이 본질적인 것을 다루는 것으로 지금 통용되는 현실이다. 이런 자세는 철학 저술의 숭고한 내면이[2] 목적과 결론이 아니면 어디에서 더 밝혀질 수 있으며, 또 동시대가 같은 영역에서 산출한 것과의 차이가 아니면 어떻게 그 목적과 결론이 더욱 분명하게 인식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따위의 질문에 대한 답이라고 그들은 자긍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행위가 인식의 출발점 그 이상의 것으로, 즉 현실을 안고 거기에 몰두하여 싸우는 실재적인 인식으로[3] 간주된다면 이것은 사실 진정해야 할 일은 옆으로 비껴나가면서 이와 같은 행위를 은폐하기 위해서 착안한 잔꾀라고 해야만 할 것인데, 무슨 말인고 하면 겉으론[4] 마치 사태 자체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듯한 열정과[5] 사태 자체와 씨름 하는 척하는 노력은 [6] 보란 듯이 내놓지만 막상 그런 열정과 노력은 멀리하고 실지로 면해보려는 짓이라는 것이다. — 왜냐하면, 철학이 안고 해야 하는 일은[7] 그가 붙들어 안은 사태의 목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전개과정을[8] 통해서 하나도 빠짐없이 속속들이 다룸으로서 완성되고, 또한 결론이 아니라 결론과 그의 생성과정을 합쳐놓은 것이 참다운[9] 전체를 이루기 때문이다. 목적 그 자체는, 즉 뭔가가 그것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 사상(捨象)되어 있는 한[10] 아무런 생명이 없는 것이고, 경향이란 것은 현실에 발 돋음 하지 않는 한낱 요동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앙상한 결론이란 경향이 떠나버린 요동 없는 시체일 뿐이다. — 차이를[11] 이야기하는 것은 위와 같은 시체를 알아보는 것과 같은데[12] 차이는 사태의 외피일[13] 뿐이다. 차이는 사태가 끝난 곳에서 나타난다. 달리 표현하면 차이가 아닌 것이 사태다. 그래서 이런저런 철학체계의 목적과 결론, 차이와 판정을 빌미로[14] 한 이와 같은 노력은 겉으로 보기에는 어쩜 굉장히 어렵게 보이지만 사실 그리 어려운 작업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철학/행위는 사태를 붙들고 고심하기 보다는 사태는 아예[15] 뒤로 제쳐 놓거나 그 위에 붕 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지는 사태 안에 머물면서[16] 사태에 푹 빠져 들어가 자신을 망각하기보다는 자기 손아귀에 들어 있는 것에 만족하지 못해 계속해서[17] 남의 것을 힐긋힐긋 쳐다보면서 자기 것보다 좀 나은 다른 무언가가[18] 있으면 움켜쥐려고 팔을 뻗기 일쑤다[19]. 그래서 이러 지는 사태와 함께 하고 거기에 몰입하기 보다는 자가자신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아집일 뿐이다. 아무튼[20], 내용이 충실하고 건실한 것을 평가하는 것이 가장 쉬운 일이고, 더 어려운 것은 그것을 파악하는 일이고, 가장 어려운 것은 평가와 파악을 통일하는 서술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1] 본문에 등장하는 , , 그리고 이란 낱말이 역자에게 잡화상주인이 하는 행위를 연상시킨다.

[2] 원문 . 낭만주의적인 내면을 엄청 까 내리는 말투다. 

[3] 원문 을 <현실을 안고 … 실재적인 인식>이라고 옮겨 보았다. 은 아직 끝나지 않은 숙고의 대상이다. 정신현상학 서론 §1에서 잠깐 언급하였다.

[4] 원문

[5] 원문 이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미하엘 토이니센(Michael Theunissen)의 철학을 다 읽어봐야 할 것이다. 우선 중세 기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생사를 놓고 일대일 대결에 임하는 그런 정신자세라고 하고 넘어가자. 그냥 <진지한>이라고 하면 뭔가 아닌 것 같다. 이것은 정신현상학 서설 §4에서도 언급되는 내용이다.

[6] 원문 [Bemühen um die Sache]. 이란 전치사가 갖는 <둘러싸다>라는 의미에 주목했다. 물론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 영향을 받은 번역이기도 하다.

[7] 원문 . 여기서부터 철학이 해야 하는 일이 두 갈래로 나눠지는 것 같다. 즉 철학이 하는 서술운동(Darstellung)이 사물자체의 운동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점이 부각되는 것 같다. 이 착안되는 대목이다.

[8] 원문 ührung>

[9] 원문 . 번역하기 힘들다. <현실>로 번역하면 <참다운>이란 의미가 결여되는데…. 법철학에서와 같이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이고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이다>라고 해버리기엔 현실과 참다운 것간에는, 적어도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에는 말이 되지 않는다. 이런 현실과 참다운 것 간의 긴장과 모순이 헤겔이 프랑크푸르트에 있을 때 거의 획 돌아버릴 지경까지 몰고 간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횔더린은 확 돌아버렸지만… 그러나 그렇게 확 돌아버린 상태에서 솟아오르는 횔더린의 말보다 더 깨끗하고 자기모습 그대로 나타나는 말은 보지 못했다.

[10] 원문 ür sich>를 이렇게 옮겼다.

[11] 원문 . 원문은 이탤릭체로 강조되었다. 이 낱말에 <죽었다>(“Er ist verschieden.”)라는 소리가 들린다.

[12] 원문 . §2에서 역자주에서 언급한 와 같은 역할을 하는데 거기서는 사유에서 존재의 장으로, 여기서는 존재의 장에서 사유로 전환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13] 원문 . 이런 인식이 껍데기만 보는 천박한 인식이라는 것이다.

[14] 원문 . 보통 과 함께 쓰이는 이 여기에선 와 함께 사용되었다. 이 갖는 수단적이라는 의미를 이렇게 <빌미>로 옮겨보았다.

[15] 원문 <immer>. 여기엔 <항상>이라는 의미보다 on> (아예 처음부터)라는 의미가 더 강하게 있다.

[16] 원문 . 이 갖는 의미의 폭(Bedeutungshof)을 보자면, 우선 동작을 멈춰 산만한 마음을 가다듬고, 부동자세로 눈을 대상에 맞춰 거기에 고정시키고 바라보는 것이다. (클레멘스 브렌타노, 고드비) 그리고 이렇게 하염없이 머물면서 대상에 푹 빠져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접하는 사물에 대한 애착이다. (괴테, 파우스트 1).    

[17] 원문 . 여기서도 위와 비슷하게 라는 의미가 강하다.

[18] 원문 einem Anderen>. 여기서 ‘다른 것’이란  사태와 다른 것보다는 할 줄 모르는 지의 행위를 이해하는 연장선에서 그리고 부정관사와 함께 쓰여졌다는 점에서 어린 아기가 새로운 것이 나타나면 매번 지금 자기 손에 쥔 것을 내팽개치고 이 새 것을 향해 팔을 내 뻗치는 행위와 비교해서 이해한 것이다.

[19] 원문 . 시제는 현재인데 버릇이 굳어져 습성이 되어버린 상태를 표현하는 현재형이다.

[20] <아무튼>으로 본문의 삽입구와 연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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