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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론 §1

(§1) 철학에 입문하는 마당에서[1] 철학이 진정 해야 하는 일[2], 즉 존재하는 것의 실상이 무엇인지[3] 실지로 알아보는[4] 길목으로 곧바로 들어서기 이전에 먼저 이런 인식작용에[5] 관하여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있다는 생각은 인식작용을 인식과 동떨어져있는 그 무엇을[6] 수중에 넣는데 꼭 필요한[7] 도구나 아니면 그런 절대자를 가려내는데[8] 꼭 필요한[9] 수단으로 보는 한 아주[10] 자연스러운 발상이다. 이런 발상아래 적절한 사전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근심걱정이[11] 그럴듯한데 그 근심걱정이 우려하는 것은 인식에는 어쩌면 여러 종류가 있고 그 중에는 앞서 말한 철학의 최종목적을 달성하는데 좀더 쓸모 있는 것과 그렇지 않는 것이 있어서 애당초 잘못된 선택을 하거나, 선택을 제대로 했다 하더라도 구체적인 인식작용은 일정한 양식과 적용범위를 지니는 능력이라는 점에서 그 속성과 한계를 꼼꼼하게 규정하지 않고서는 진리의 천상대신 오류의 뜬구름만 붙잡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우려하다 보면 근심걱정이 변질되어 끝내 인식작용의 힘을 빌려 존재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12] 의식이 소유하도록 한다는 발상 그 자체가 애당초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며, 인식과 절대적인 것 사이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장벽이 내려져 있다는 확신이 들어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인식이 절대존재를 장악하는데 쓰이는 도구라고 하다면, 도구란 적용대상을 타자에 의해서 구애 받지 않는[13] 형태로 가만히 놔두지 않고 그것의 형태를 다듬고 변화시킨다는 것이 너무나 빤히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을 고쳐 인식이란 철학하는 우리가 하는 일을[14] 돕는 도구가 아니라 진리의 빛이 우리에게 다다르는 통로 정도인 수동적인 매체라고 한다고 해도 우리에게 주어지는 진리는 위와 마찬가지로 진리 그 자체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 매체에 의존하고 그 안에서 존재하는 양식으로서의 진리인 것이다. 어찌 되었던 간에 우리는 두 경우 다 철학이 추구하는 것을 달성하기 위해서 수단이라는 것을 사용하는 셈인데, 문제는 수단을 사용한다는 것 그 자체가 개념상[15] 이미 목적에 반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우리가 이토록 수단이라는 것에 매달려 있다는 것 자체가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사태라는 것이다. 이런 곤경에서 벗어나려면 도구의 작동방식을 습득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얼른 떠오를 수도 있겠다. 말하자면, 도구의 작동방식을 알면 절대적인 것에 관하여 우리가 도구를 통해서 얻어낸 생각에서 도구에 속한 부분을 인식결과에서 거슬러 내고 참다운 것을 순수하게 획득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수정해본들 나아진 것은 없고, 그 결과란 오로지 우리가 인식작용을 하기 이전의 원래 상태에 다시 처하게 될 뿐이다. 다듬어진 사물에서 도구의 몫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을 회수하면 사물은  – 여기서는 절대적인 것은 – 다시 인식이전의 상태와 전혀 다름없는 것이 되는데, 그렇다면 이런 인식작용이란 허나마나한 짓일 뿐이다. 이에 맞서 이번에는 도구를 통해서, 마치 아교를 가지고 새를 통째로 잡는 것처럼, 절대적인 것에 아무런 변화가 가해지지 않고 단지 우리 곁으로 당겨져 오는 것뿐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절대자가 우리 곁에 와 있는 이유는 절대자가 애초부터[16] 우리 곁에 와 있고 또 그러기를 원하기 때문인데[17], 절대자가 이와 같은 잔꾀에 넘어가 우리 곁으로 당겨질 수 있다고 한다면 절대자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일로서  비웃음을 받을 만한 일이다. 이런 식의 인식이 잔꾀에 불과한 이유는 인식이 내심으로 목적하는 바는 오로지 절대자와 직접적인[18] 관계, 다시 말해서 아무런 노고가 필요 없는 관계를 만들어 내는 것인데, 겉으로는 매우 힘겹게만 달성할 수 있는 뭔가를 분주하게 추구하는 척하기 때문이다. 이런 비판을 피하기 위해서 이젠 인식을 매체로 생각하고 인식에 대한 실험을 통해서 이런 매체 안에서 광선이 어떻게 굴절되는지 그 법칙을 알게 되어 인식결과에서 광선굴절을 삭제할 수 있게 된다 하더라도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인식이란 광선굴절이 아니라 진리가 우리에게 다다르는 광선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식인 광선 자체를 거슬러내고 나면 남는 것은 오로지 허허한 공간에 그려진 수학적인 순수한 방향[19] 혹은 텅 빈 공간일 뿐이다.



[1] 원어 . 여기서 이야기 되는 철학이 어떤 철학인지 물어볼 수 있겠다. 정신현상학이 비판하는 철학이 이야기하는 철학은 모든 철학일 것이다. 정신현상학이 비판하는 철학은 구체적으로 보통 칸트와 쉘링의 철학이라고 하는데, 인식론과 방법론을 중요시한 데카르트 이후 근대 철학이라고 하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다.

[2] 소크라테스의 첫째 고소에 대한 반증(소크라테스의 변론), 19a-20c)을 보면 다음과 같은 표현이 나온다. <소크라테스여, 네가 추구하는 일/사업(事業)은 도대체 무엇이냐?> 정도로 번역될 수 있겠다. Schleiermacher 로 번역하고 E. Martens 라는 표현을 쓴다 (E. Martens, Die Sache des Sokrates, Stuttgart 1992, 5-6쪽 참조). 여기 서론에서의 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를 문자 그대로 <사태 자체>로 번역하기 보다는 <철학이 진정 해야 하는 일> 또는 <철학의 본업> 정도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합한 것 같다. 그리고 가 내포하는 의미의 일부분은 <곧바로>로 해결된 것 같다.

[3] 원어 . 처음엔 <진리 안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번역했다가 그 의미가 좀 두리뭉실해서 고민하다가 기 문장을 라는 질문의 종속절로 다루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소크라테스가 즐겨 했던 질문 < ti esti?>와 똑 같은 질문이다.  소크라테스가 라는 질문으로 추구했던 것은 항상 어떤 것의 실상이었기 때문에 라는 질문에서 는 중복된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진리잉여이론이 지적하고 주장하는 내용이다 (E. Tugenthat/U. Wolf, Logisch-semantische Propädeutik, Stuttgart 1983, 217-241쪽 참조.)

[4] 원어 . 를 옮기면서 많은 고민을 했다. 라는 명사에 기대어 <현실적인 인식>으로 옮겨보았지만 뭔가 썩 시원하지 않다. 우리말 <현실>에는 ät/reality>, 즉 주관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객관세계라는 의미가 지배적이어서 그런 것 같다. 그러나 ät>는 독어에서 엄연히 구분되고 헤겔을 영어나 라틴계 언어로 번역하는데 애로사항이 되고 있다고 Historisches Wörterbuch der Philosophie는 지적하고 있다 (Historisches Wörterbuch der Philosophie, Bd. 12, 828쪽 참조). 반복해서 읽다 보니 여기서 는 인식에 대한 고찰과 실질적인 인식활용을 대조하는데 쓰여졌다는 것이 눈에 뜨인다. 예를 들자면 모의시험과 진짜시험을 대조하는 식이다. 이런 차원에서 는 여기서 쉘링의 과 유사한 것이 아닌가 한다 (Ibid., 834쪽 참조). 물론, 를 적절하게 옮기는 과제가 남아있지만 영어 이 갖는 의미와 유사하기 때문에 이해하는데 그리 어렵지 않는 것 같다. 그리고 을 이런 동사적인 actual Moment를 보존하기 위해서 <알아보다>로 번역하였다.

[5] 원어 . 동사적인 성질을 보존하기 위해서 <인식작용>으로 옮겼다.

[6] 원어 . 어원인 absolvere(떼어내다)의 의미를 강조했다.

[7] 문장의 흐름상 에 종류를 나타나는 부정관사가 기대되나, 기대에 어긋나게 정관사가 사용되었고 강조된 것 같다. dás Mittel gegen die Grippe.>(이보다 더 좋은 독감기약은 없다.)과 같은 문장에서 사용된 정관사와 같은 용법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여기서 사용되는 정관사는 인식이 절대자를 가려내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도구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석함이 문맥상 올바른 것 같다. 왜냐하면, 절대자를 가려내는데 인식 외 다른 도구가 있다면 인식에 관한 사전고찰이 필수라고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인식 외 다른 도구가 있다면, 인식을 버리고 다른 도구를 취하면 그만이다. 그래서 정관사 <꼭 필요한>이란 표현으로 옮겨 보았다.

[8] 원어 . 접두어 가 갖는 프로세스적 의미를 강조해서 <가려내다>로 옮겼다.

[9] 역자 주 5번 참조

[10] <아주>에 상응하는 단어는 원본에 없다. 그러나 ürliche Vorstellung>에서 쓰여진 부정관사는 종류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인식을 도구나 수단으로 보는 생각이 완전히 자연스러운 것에 속한다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래서 여기서 사용된 부정관사를 <아주>로 옮겨 보았다.

[11] 원어 < Besorgnis>. 라는 낱말에는 라는 낱말이 근간을 이루고 있는데, <근심, 불안, 번민>이라는 기본의미에 추가적으로 <구제책을 강구하기 위한 노력>이라는 의미가 있다 (Duden >>Etymologie<<: Herkunftswörterbuch der deutschen Sprache. Mannheim, Wien, Zürich 1989, 682쪽 참조). 그래서 를 장황하게 <이런 발상아래 .... 근심걱정>으로 옮겨 보았다.

[12] 원어 .

[13] 원어 ür sich>.

[14] 역자주석 2 참조. 특히 pragma에 스며있는 prattein(행하다)의 의미에 주목했다.  

[15] 원어 .

[16] 원어 . 여기서 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17] 원본에는 라는 표현이 있는데 역자는 이 부분을 번역하지 않고 삭제했다. 그 이유는 절대자가 애초부터(an sich) 우리 곁에 와 있고 그리고 스스로 그리기를 원한다(für sich)라는 내용에 이미 ür sich>라는 의미가 담겨있고 중복되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덧붙이자면, 절대자가 우리 곁에 와 있는 Modus ür sich>가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간에 마태복음 28 20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는 구절이 생각나는 부분이다.

[18] 원어 .

[19] 원어 . <순수한 방향>은 함수에서 이야기하는 방향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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