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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놀이, 단상

공지영의 <의자놀이>를 놓고 의자놀이가 진행 중인가?

모르것다.

아는 것은 단지 의자놀이는 계급의식이 없는 집단에 먹히는, 그리고 계급의식으로 무장된 노동자연대를 해체시키는데 사용되는 도구라는 점이다. 먹고 뱉어내는 자본의 행패를, 비 피해 가듯이 피해 갈 수 있는 찬스가 있다는 <룸펜 자유주의자>들에게 어울리는 놀이다. 우산을 준비할 수 있다고도 한다. 아니, 우산 몇 개를 만들어 나눠주기도 한다.


공지영이 재능기부 했다?

왠지 모르게 속이 메스껍다.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의식의 발현인가, 아니면 룸펜자유주의자의 의식이 깔려있는 발언인가?

계급, 계급의식? 고리타분한 말과 분석틀?

레닌의 계급정의를 다시 한 번 살펴보자.

“역사적으로 규정된 사회적인 생산시스템에서 차지하는 자리에 따라, (대부분 법규로 고착되고 문서화된) 생산수단과의 관계에 따라,  노동의 사회적 조직에서의 역할에 따라, 그리고 그 결과 [사회 전체가 임의적으로] 처분할 수 있는 사회적 부의 [마르크스가 말한 잉여가치의 다른 표현] 취득양식과 그 몫의 크기에 따라 서로 구별되는 인간의 대집단들을 계급들이라고 칭한다. 계급들은  규정된 사회적 경제 시스템에서 차지하는 자리의 차이의 결과로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의 노동을 자기 것으로  할 수 있는 인간집단들이다.” (레닌, 위대한 대안, 1920.4.11 신문  “공산주의적인 수보트닉”에 게재, http://www.erich-koehler-ddr.de/dokumente/initiative.html, 2012.8.16)  


계급의식?

레닌이 계급정의에서 말한 자리는 체화될 것이다. 뭉크의 그림 <길가는 노동자들>을 사유하는 페터 바이스의 <저항의 미학>은 노동자계급의 체화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왜냐하면, 내가 스스로 체험한 것이 모두 다 이 그림 안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침잠이 덜 깬 다리를 터벅터벅 힘겹게 옮기면서 공장을 향하는 길, 교대작업시간을 마치고 나서 혼이 사라진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작업장에 꽉 묶인 상황, 그리고 이런 예속과 주는 일자리를 취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강제에 대한 증오, 다른 사람 좋은 일을 위해서 노동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노여움과 그 노여움을 참아 삼키는 일, 일자리 상실에 대한 불안 등 내가 몸으로 느낀 것들이 다 포함되어 있었다. 그 그림에는 끝없는 반복으로 마비된 정신과 몸의 고립이 있었다. 그 그림에는 쓰러뜨려진 자의 낙심이, 무능력하고 쓸데없이 에너지를 소모했다는 느낌이, 더없이 좋은 기회를 활용하지 못하고 썩혔다는 느낌이 있었다. 그러나 이 그림은 동시에 의미 있고 지속 가능한 것을 또한 모색하고 있었다. 이젠 말문이 막히고 기계의 단조로운 동작 안에서 분리된 개인들이지만 그들이 가는 길은 함께 하고 사용하지 못한 힘에 대한 기억을 공유하는 길이었다. 그 힘은 아직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잠재하고 있었고 높은 담으로 장식된 쭉 뻗은 길을 가는 노동자대중의 대열을 걷잡을 수 없게 하는 힘이었다.”  (ou-topia)


계급의식은 계급이 자기 자리를 떠날 때 생기는 의식이다. 민족의식은 민족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의식이다. 생물학적인 것과 개별 인간의 카테고리에 근거한 의식은 자기의 존속을 주장하는 의식이다. 그러나 계급의식은 완전히 다르다. 계급의식은 계급을 부정한다. 자기 자리를 떠나면서 자기부정을 하는 운동이며, 그리하여 인간의 유적존재를 실현하는 유일무이한 휴머니스트 의식이다. 계급의식의 노동자는 “공지영으로서” 뭘 기부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로서 뭔가를 요구한다. 사회를 다 먹여 살릴 수 있는 능력과 자부심에 근거한 요구다. 노동자는 기부금 수혜자가 아니다. 인간의 유적존재를 물질적으로 담보하는 계급이며, 만인을 위한 부를 요구하면서 “계급사회는 아니다”라는 부정운동을 하는, 계급투쟁을 하는 계급이다.

공산당선언에서 마르크스는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했다.

근데 계급투쟁으로 이해가 안 되는 사건들이 많다. 아마 능력이 부족해서 계급투쟁의 서브텍스트를 읽지 못해서 그럴 것이다. 근데 가끔, 계급투쟁이 고리타분한 것이 된 현재 다시 민족, 종교, 개별 인간 등의 카테고리가 난무하는 것을 보면서 야만의 역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계급투쟁의 인간역사가 개시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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