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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12.30 독일 일간 Frankfurter Rundschau에 실린 독일 교육학자 볼프강 카임(Wolfgang Keim)의 글이다.
부유하고 인종적으로 건강한 어린이로부터 출발한 운동
개혁교육학 100년 - 결산 시도
20세기 교육에 있어서 독일 개혁교육학처럼 지속적으로 거론되고, 동시에 그 의미에 있어서 그처럼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교육 주제는 없다. 독일 개혁교육학하면 많은 사람들이 곧바로 발도르프-학교, 몬테소리-학교, 페터-페터젠-학교, 혹은 전원기숙학사 등을 연상한다. 보다 엄밀한 과학적인 의미로서의 개혁교육학은 20세기 1/3분기에 발생하여 - 나치체제와 구동독시 부분적으로 중단되었다가 - 오늘날까지 맥을 이어오고 있는 이른바 “운동”의 양상을 띤 다양한 교육개혁노력을 통틀어 일컫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개혁교육학의 핵심적인 특징은 모든 권위적인, 교육자 혹은 교육내용으로부터 구상된 교육에 대립하는 것이었고, 그런 교육대신 어린이와 청소년의 요구에 방향이 잡혀진 교육이 들어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자발성, 자립성, 개성화가 교육목적으로 제시되었고, 뿐만 아니라 “공동체교육”에 대한 구상이 이야기되었고, 특히 총체성, 창의력 개발, 그리고 [직접적인 자기]경험을 지향하는 새로운 학습개념이 제시되었다. 이런 의미로서의 개혁교육학은 당시의 교육관련 토론에서뿐만 아니라 정규학교에서도, 오늘날까지 장기적인 효과를 보이는, 고무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독일 개혁교육학은 동시에 그 기원부터 문제투성이인 유산이다. 왜냐하면, 많은 경우에 진보적인 교육구상에 반계몽적인, 반민주적인, 그리고 부분적으로 심지어 인종차별적인 사유형식과 실천이 뚜렷하게 접목되어 있고 -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 비민주적인 학교구조는 그대로 두었기 때문에, 아니 대려 [독일교육제도의] 배타적인 요소를 더욱 심화시켰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일 개혁교육학 일부는, 최소한 일시적으로, 나치의 관용을 받을 수 있었고, 개혁교육학의 대표적인 인물들은 나치시대를 [별다른 어려움 없이] 지낼 수 있었다. 1945년 이후에는 그들 구상에 따른 학교모델들을 계속 운영하거나 새로 설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연명한 개혁교육학이 다가 아니다. 특히 바이마르 공화국 당시 리버럴하고 민주-사회주의적인 바탕에 기초한 개혁교육학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개혁교육학은 단지 1919년과 1933년 사이의 14년 동안에만 [활기차게] 진행될 수 있었다. 나치가 집권하자마자 거의 다 때려 부셔버렸기 때문이다. 그 결과 사회주의적 개혁교육학은 1945년 이후에도 대부분 독일에서 축출된 상황이었다. 서독의 경우 교육학과 아동교육학까지도 가만 놔두지 않은 복고적인 [사회]발전 때문이었고 동독의 경우 - 자유로운 토론이 가능했던 잠깐의 기간의 지나고 나서 - 모든 개혁교육학의 종말, 결국 “좌파적인” 개혁교육학까지의 종말로 이어지는 40년대 후반기부터 들어서는 스탈린화 때문이었다. 학생운동, 그리고 부분적으로 대안운동이 비로서 개혁교육학을 재발견했다. 70년대의 대안운동은 통틀어 일종의 (역사적인) 20세기 1/3분기 개혁교육학의 연속으로 간주될 수 있다. [...]
그러나 [까놓고 말하자면] 새롭게 일어난 개혁교육학에 대한 관심의 동기에 정말 의심이 갈 때가 종종 있다. 예컨대 자기 자식들을 보다 좋은 학교에 보내고자 하는 부모의 소원이 독일 기본법에 [확고하게] 자리하고 있는 기회균등이라는 원칙에 반하는 것처럼 말이다. 뿐만 아니라 앞에서 문제투성이라고 평했던 역사적인 개혁교육학의 과오를 [버리지 않고] 무비판적으로 떠맡고 있다. 그리하여 세기의 전환을 적절한 기회로 삼아 개혁교육학의 발생, 발전, 그리고 재개를 살펴보려고 한다. [...]
문제투성이의 발단
엘렌 케이의 “어린이의 세기”는 20세기 초 개혁교육학의 토론에 가장 지대한 영향을 행사한 책이었음이 틀림없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하게 100년 전에 스웨덴에서 발간되고 2년 후 독어번역판이 발간된 이 책은 1905년 2만 6천 본이 발간된 상황이었고 당시 가장 많이 읽혀진, 최소한 공공도서관에서 가장 많이 대출된 책으로 기록되고 있다. 책제목이 외치는 메시지에 대한 관심은 1890년대 이후 시민계급 내에서 이미 장기간 준비된 것이었다. 엘렌 케이의 저서와 유사한 기본경향을 갖는 광범위한 문헌을 통해서, 의학, 심리학, 그리고 복지후생사업 등의 분야에서 동기간에 진행된 어린이의 특수한 욕구와 사회적 지위에 대한, 여기에 추가적으로 어린이에게 적합한 것 주기와 다루기에 대한 집약적인 연구를 통해서, 그리고 특히 [노동자계급의 자녀들이 진학할 수 없었던] 바로 김나지움의 교육내용과 방식과 김나지움의 청소년에 대한 과대한 요구를 염두한 학교비판을 통해서 준비된 것이었다. 엘렌 케이의 자못 엄숙한 “어린이의 위엄”, “어린이적인 삶을 온통, 흠뻑 향유할 수 있는 인격체”로서의 권리 강조, 교육은 “어린이의 본성”을 따라야 하고 어린이 “특유의 본질”을 억압해서는 안 된다는 요구 등이 이런 경향을 하나로 묶어내고 수사학적으로 효력 있게 표현하고 있다.
엘렌 케이의 영향이 지배적이었지만 일정한 시간이 지나고 난 후에 비로소 “어린이로부터의 운동”으로 표기된 개혁교육학파는 논증패턴에 있어서 루소, 페스탈로치, 프뢰벨, 다시 말해서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의 교육학자에 기대고 있으나 그 요구에 있어서는 동시에 완전히 달라진 사회적인 콘텍스트, 즉 첨예한 대립을 빗는 계급구조와 그에 따른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사회적 불평등과 성적 불평등을 동반하는, 생성단계에 접어든, 현대적인 산업사회를 대향하고 있다. 사회의 주문이 학교를 통해서 어린이에게 가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식의 관점에서 어린이적인 욕구로 관점을 전환함으로써 이 개혁교육학파는 20세기에 들어서서도 시민계급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 가족에서 계속 지배적이었던 어린이, 어린이[적]존재, 그리고 어린이교육에 대한 생각뿐만 아니라 19세기 3/3분기에 진행된 학교제도의 현대화와 확충, 분화, 관료화, 그리고 법화에서 있어서도 급진적인 이의를 제기한다.
엘렌 케이는 교육학의 대부분에, 최소한 독일의 그것에, 결정적인 교육이념을 주조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런 교육이념에 기초한 “꿈꿔본” - 개혁교육학을 지향하는 - 학교의 윤곽을 개발했다. 학교는 종합학교가 되어야 하고, 자발성과 마음과 머리와 손을 통한 학습의 총체성 원칙에 기초해야 하고, 의무수업은 필수적인 범위로 줄이고, 대신 선택자유를 통해서 학습의 개별화 공간을 제공해야 하며, 특히 성적표와 상장수여을 없애야 한다는 것이었다.
엘렌 케이는 대부분의 당시 독일개혁교육학자에 비해서, 9세에서 15/16세 사이 모든 사회계급의 어린이들이 진학할 수 있는 남녀공학 종합학교를 지지했던 것이 보여주듯이, 사회정치적으로 명백하게 진보적인 여성이었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녀는 노동자운동뿐만 아니라 여성운동을 동조했고, 명백하게 평화주의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허나 그녀는 독일개혁교육학의 문헌에서도 널리 퍼진 어린의의 낭만화와 어린이를 모든 사회적 현실의 저편에 있는 일종의 뮈토스로 양식화하는 것에 묶여 있었다. 그리하여 그녀의 어린이의 세기란 변론은 잘나가는 시민계급의 어린이에나 어울리는 변론은 되었지만, 프롤레타리아트의 어린이를 위한 것이 되기엔 희박한 것이었다. 대부분의 개혁교육학자와 마찬가지로 시민계급 출신으로 그 환경을 누린 엘렌 케이는 프롤레타리아트 어린이의 실재적인 삶의 조건을 자기경험을 통한 직관으로 아는 것은 거의 없었다.
그 외에 그녀의 문헌에서 후에 대부분의 개혁교육학의 특징이 된 “자라게 나둠”("Wachsenlassen")과 “당겨주기”("Erziehung")를 성찰적 교육에1 비해 과다하게 강조하는 경향을 발견할 수 있다. 사회와 정치를 거의 다 배제하는 이런 경향을 하인쯔-요아힘 하이도른(Heinz-Joachim Heydorn)은 30년 전에 이미 그의 저서 “교육과 지배의 모순에 관하여”에서 강력하게 지적하고 있다: “어린이의 창의력적인 본성의 해방과 함께 인간이 해방되어야 한다고 한다. 이런 도전은 경직된 것, 책과 [모양새를 다듬는] 형식의 학교를 겨냥하고 있지만, 그 밑바닥을 보면 말라 비틀어 죽어 떨어져 나가는 것, 즉 가식적-야만적인 의식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모든 의식화 및 그 자체를, 모든 빛을 겨냥하고 있다. 어린이의 요술적인 세계, 인간이 자기역사로 들어가지 전의 상태를 보여주고, 그를 거기에 묵어두려는 어렴풋한 세계(vorbewusste Welt)를 생산적인 의식에 대립시킨다.
그러나 더욱 치명적인 것은 엘렌 케이가 선전하는 “치유 불가능하게 병들고 기형적인 어린이”의 안락사를 명시적으로 지지하는 인종위생학적인 바탕에 기반한 “새로운 윤리”다: “아직 - 사형과 전쟁을 고수하는 - 사회에서 [쓸모 있는] 생명에 대한 경외가 그다지 크지 않아서 [쓸모없는] 생명이 꺼지는 것을 위험 없이 허용할 수 없다. 오로지 자비만이 죽음을 갖다 줄때 비로소 미래의 인간성이, 의사가 통제와 책임 하에 아무런 고통 없이 이런 생명을 제거하는 상황에서 나타날 것이다.” 스웨덴 작가의 이런 변론은 당시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광범위하게 합의 가능한 것이었고 독일에서는 비교할 수 없이 비옥한 땅에 떨어졌고, 1933년 이후 처음엔 어린이안락사에서, 나중엔 성인안락사까지 무자비하게 현실화되었다. 그리고 죽이는 절차는 “고통 없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였고 심지어 심한 고통과 죽음의 고통을 동반하는 것이었다.
엘렌 케이의 [인간]사육 공상도 같은 선상에 놓여있다. 그녀의 “어린이의 세기”는 근본적인 접근에 있어서 인종위생학적인 담론, 즉 “우위적인 인간 타입”을 사육하는 사업으로 독해되어야 한다. 이런 사업을 현실화하는 일환으로 “남자와 여성”이 한 쌍이 되는데 있어서 [인종위생학적 차원의] 목적의식적인 분별을 권장하고 있다. 이것도 역시 당시 진보적으로 간주되었던 교육학계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받을 거라고 내다볼 수 있었다. 그리하여 개혁교육학의 과학적인 해석자로 분명 가장 많이 알려진 헤르만 놀(Herman Nohl)은 나치가 정권을 장악한 해에 이미 괴팅엔에서 “민족적인 교육의 바탕”이란 강의를 했다. 여기서 인종위생이, 광범위한 결론으로 이어지는 엘렌 케이에서 그러듯이, 핵심적인 바탕을 이루고 있다. 놀의 1933/34년 겨울학기 강의원고가 얼마 전에야 비로소 뮌스터대학의 교육학자 하스코 찜머(Hasko Zimmer)에 의해서 “캐내어”졌다는 것과 교육학과가 이제야 비로소, 진솔하게 말해서 홀로코스트가 지난 지 반세기가 넘은 오늘날에 이르러서, 오랫동안 신성불가침적인 위력을 자랑했던 개혁교육학이 얼마나 문제투성이인 혼합물인지 점차 이해하기 시작한다는 것이 개혁교육학의 사유가 많은 세대의 교육학자들의 의식에 얼마나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는지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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