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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포스트구조주의.사회.비판 (3)

1.1 선택적인 가족관계를 이루는 이론적인 제스처

 

모든 이질성에도 불구하고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이론들에게서는 Stäheli가 “선택적인 가족관계를 이루는 이론적인 제스처”(Stäheli 2000:7)라고 명했던 [통일적인] 것을 진단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 아래서 보게 되겠지만 -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사유의 보다 가장자리에서 왔다 갔다 하는 일련의 정치이론들도 포함된다.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이론들의] 핵심적인 제스처는 차이이론적인 사유, 즉 사회현실의 그 어떤 요소도 동일논리에 따라 그 자체에 의해서 규정될 수 없고, 어디까지나 그것이 아닌 것과의 차이를 통해서 비로소 규정된다는 사유에 있다.1) 포스트구조주의의 핵심 요점은 다수를 이루는 개별적인 차이들이 [그저 다수에 머물지] 일정한 근거 혹은 [그것들을 하나의 총체로] 조직하는 원리(예컨대 생산관계, 현대, 혹은 가부장제)로 귀속되거나 그런 근거․원리에 의해서 안정화되지 않고, 어디까지나 상대적이고 유동적으로 - 그럼으로써 우연으로 - 머문다는 사정에 있다. 이와 같은 최종근거를 포기한 대목에 주목하면 대부분의 포스트구주주의적인 접근들은 “포스트-근본주의(post-foundationalist)”(Stäheli 2000: 9)라고 특징지을 수 있다. 이런 포스트근본주의적인 관점은 [예컨대 어떤 형식적인 가치의 실현과 관련된 자원/재원분배, 법규, 기구 등 총체적인 사회현실로서의] 구체성(Materialität)과 제도화의 저편에서 [놀아나는] 담론­이상주의 혹은 언어놀이와 동등한 의미가 아니다.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접근들은 제도화된 형태들, 신체들, 그리고 실천들의 구체적인 실존(materiale Existenz)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생성에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데 있다. 현실이 담론으로 구성된다는 것과 관련해서는 담론 저편의 세계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것의 경험불가능성에 주목하고 문제화할 뿐이다. “사유 밖에 있는 대상들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것들이 대상으로 부상(浮上)하는데 있어서 그 어떠한 담론적인 조건과도 무관하게 대상으로 구성될 수 있다는 전혀 다른 주장을 부정하는 것이다(Laclau/Mouffe 1991: 158; 담론­이상주의와 거리를 두는 것과 관련해서는 또한 Butler 1997: 30f. 참조).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접근들은 기독교적-서유럽 서양의 역사에서 그 중심의 중심을 차지했던 관념들, 즉  “진리” 혹은 “이성”이 객관적으로 주어진, 인식주체와 구별된, 역사 혹은 자연에 의해서 증명된 것이라는 관념들의 이론적으로 뒷받침된 탈정당화를 제공한다. 철학적으로 인식해야 하고 또 그럴 수 있다는 “대질서”와 목적론이 차지한 자리에 중심을 해체하는 (dezentrisch), [모든 것을 지배하는] 원리를 부정하는(anarchisch) 세계관과 함께 “유기체론적인 사회개념”(Moebius 2010: 269)과 선을 긋는 단념이 들어선다. [포스트구조주의가 밀착하여 애쓰는/Anliegen] 핵심사안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이 항상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이성이 자신의 필연성으로 경험하는 것은, 보다 더 엄밀하게 표현해서 이성이 합리성의 다양한 형태들을 자신의 필연적인 현존[양식](“étant”)으로 내놓는 것은 역사를 갖는 것으로서, 우리는 [그 특수한 형태의 이성이 출현한 조건들로서의] 역사를 하나도 빠짐없이 다 나열하고 [그 특수한 이성형태로서의] 역사를 그런 우연성들의 [재]조직(Geflecht)으로 다시 획득[재현]할 수 있다.”(Foucault 1996: 179). 이런 - 단지 푸코로만 제한되지 않는 - 계보학적으로 다듬어진 관점은 보편개념들을 판독(判讀)하고 익숙해진 사유도식들을 의문시하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는 위와 같은 자명함들을 배출한 역관계들의 특수한 짜임새를 파헤치는 일을 목표로 삼는다. Heinz Bude가 시대에 적합한 사회학을 요구하면서 사회학이 해야 할 일은 “어디서 좌우명들이 발신되고, 어디서 규율들이 정립되는지”를(Bude 2011: 13) 알아내는 일이라고 한 간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 일을 수행하는데 있어서는 [포스트구조주의] 이론이 제공하는 관점보다 더 적합한 이론적인 관점을 찾기는 거의 불가능한 것 같다. 그리고 어떻게 허위적인 대안부재[론]이 조작되는지 질문하는 일이2) 포스트구조주의의 다른 핵심 사안이다. 다만, [푸코의] 권력과 주체 그리고 권력과 주체화를 함께 다루는 분석기법이 [바로] 그런 복잡한 프로세스를 [사회적으로 분배된] 역량에 기반하여 [그 범위 내에서] 자율적(souverän)으로 움직이는 개별 주체들이 서로 속이고 기만하는 일로 파악하는 걸 방해한다.

 

 


1) 동일논리적인 사유에 대한 비판이 포스트구조주의로 한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Harald Wolf가 (이 잡지에 실린) Castoriadis에 관한 논문에서 보여준다. 역으로,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이론가 모두가 같은 비중으로 차이이론적인 사유를 중심에 두지 않는다는 사실은 푸고의 사례가 보여준다.


2)Bude는 “누가 거짓말을 하면서 세상이 처한 상황이 [이렇다는 걸 잘 알면서도 저렇다고] 자신을 속이는지, 누가 대안이 없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면서 거짓말을 받아들이고 기만당하는지” 들춰 보여줘야 한다고 표현한다(Bude 201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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