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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사태?
"[도시/polis라 할 수 없는, 아무런 질서/결속력이 없는] 먹고자는 집만이 종양처럼 무성하게 자란" (apoikia oikias,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1252b) 곳에서 자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거란 결국 "같은 젖꼭지에서 젖을 빨던 자와 자기 새끼와 그 새끼를" (homogalaktas, paidas te kai paidon paidas, 같은 곳) 위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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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12권 1972b 18-30을 인용하며서 「엔치클로페디아」를 마친다. 자신이 논리학이 위에서 인용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좀(?) 장황한 ‘번역’이란 말인가?
어쩜, 헤겔을 얼른, 한큐에 이해하고 싶은 욕심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저 한 부분의 ‘번역’이 헤겔의 논리학이라고 하고픈지 모르겠다. 암튼, 번역에 덤벼본다.
근데 좀 까깝하다. 중.고의 초보실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 문장구조와 어휘는 그렇다치고, 첫 문장부터 뭔 말이지 도무지 이해가 안된다. 과연, 그리스사람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저 말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뒤적거려보니까, 저런 말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의를 위해서 끄적거려논 거란다. 그럼 그렇지, 누가 저런 말을 이해할 수 있어?
‘헤 노에시스 카트[ㅎ]아우텐’ - 보니쯔(Bonitz)는 ‘das Denken an sich’로 번역한다. 우리말로는 아마 ‘사유 자체’ 정도로 번역될거다. 근데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란 말인가? ‘물자체’(Ding an sich)와 같은 용법인가? 수박 겉핥기의 사유가 있고 진짜 사유가 있단 말인가? 첫 문장은 동사도 없다. ‘이다’가 주로 생략되기 때문에 ‘이다’를 첨가해서 읽어본다. 사유는 자체는 ‘투 카트 아우토 아리스투’, 뭐지? 2격의 기본 의미인 소유의 의미로, 사유 자체는 좋은 것 자체에 속한다? 그리고 [그 자체] 최고의 사유는 [그 자체] 최고로 좋은 것에 속한다? 그게 왜 그래?
로스(Ross)는 “The thought which is independent of lower faculties must be thought of the best object.”(Ross, Vol 2, 373 쪽)라고 주해한다. 입의 욕구, 눈의 욕구, 머리의 욕구를 구별한 아리스토텔레스의 3층 심리학에 입각하여 ‘사유 자체’란 먹고싶은 욕심, 지각하고 싶은 욕심 등과는 거리가 먼 무슨 고귀한 거란 말인가? 이런 건 우선 자연과의 신진대사를, 어려운 말이 아니라 먹고싸는 일을, 인간이해의 중심에 바로 세운 마르크스를 따르는 사람으로서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무슨 상점의 디스플레이를 깔끔하게 잘하는 상점주인 정도인가?
그리고 ‘노에시스’가 명사의 형식으로 등장한다고해서 과연 명사로 취급할 수 있을까? 사랑이 사랑하는 행위외 다른 게 될 수 있을까? 사랑 자체? 너나 먹어.
What we talk about when we talk about ‘Noesis’?
1.독일에 음악하러 온 유학생: (2년동안 계속 시험에서 떨어지다가 마지막 시험에 붙은 후) “엄마, 나 오늘 시험 붙었어.”
엄마: “정말! 잘 했다, 내 딸. 조타아~~!!”
2.베를린 시장 보베라이트: “Ich bin schwul und das ist gut so.”(나는 게이다. [니들이 뭐래도] 좋다.
‘헤 노에시스 카트[ㅎ]아우텐’은 앞의 사례와 같이 말주고받기(Redepraxis/말실천)에서 드러나는 두 개의 차원을 전제하는게 아닌가 한다. 즉, 대상 차원(Objektbezug) – 시험에 붙음, 게이라는 사실 – 과 그 대상차원을 놓고 행해지는 이런저런 말하기다. 후자의 ‘메타차원’이 ‘헤 노에시스 카트[ㅎ]아우텐’이 아닌가 한다. [전문]용어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메타차원’의 말주고받기에서는 ‘좋다/안좋다/나쁘다’가 기본범주다. 식욕의 현실이든 눈욕의 현실이든 머리욕의 현실이든 그렇다. 그리고 집단을 이루고 사는 인간은 그가 속하는 집단의 짜임(Verfassung, Constitution/헌법현실)과 관련해서 가장 강도 높게 ‘좋다/안좋다/나쁘다’고 하는 것이다.
이 해석이 맞는지는 모르겠으나, 암튼 하나하나의 요소들이 ‘의미의 복합체’(Sinngefüge)를 이룬다. 멍청한 내 머리로도 뭔가 이해된다는 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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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s ti]
아리스토텔레스는 <범주론> 7장에서 pros ti를 두 번 정의한다.
첫 번째 정의는 말을 주고받을 때 필요한 논리적인 것과 존재론적인 것이 혼합된 포괄적인 정의다. 근데 pros ti를 고유한 카테고리로 정립하고자 하는 아리스토텔레스는 문제에 부딪힌다. 논리적인 차원에서의 pros ti와 존재론적 차원에서의 pros ti가 딱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pros ti를 존재론적으로 제한해서 두 번째 정의를 내린다.
첫 번째 정의는 다음과 같다.
[사유에 의해서 파악되는 보편적인 것을 보편자(Allgemeines)라고 일컫는 것에 기대여 사물들 간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pros ti’(무엇에 대하여)를 "관계자'(=Relatives)로 번역한다. - 역자]
“관계자(pros ti)는 다음과 같이 생겨먹은 것을 두고 사용하는 말인데, [어떤 말인가 하면], 그렇게 생겨먹은 것이 그렇게 생겨먹은 것으로 존재함이 다른 것에 귀속되는(다른 것에 의해서 각인되는) 식으로 존재한다고(heterōn einai) 말하거나 또는 그 외의 어떤 식으로든 다른 것에 대하여(pros heteron/다른 것과의 관계에서) 그렇다고 말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예컨대, <더 큼>이란 [성질]은 [하나로서의 그것에 대하여 그것이 그렇게 생겨먹었다는 식으로 사용되는 말이 아니라] [한 쌍을 이루는] 다른 것에 의해 각인되는 식으로 그렇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저것보다 더 크다고 말하는 식이다. 마찬가지로 <두 배됨>이란 [성질] 역시 다른 것에 의해서 각인되는 식으로 그렇게 생겨먹은 것이다. 이것은 저것의 두 배다고 말하는 식이다.”
두 번째 정의는 이렇다.
“관계자(ta pros ti)의 [존재양식은] 그에게 존재함(to einai)이란 어떤 식으로든 무엇을 대하는(tōi pros ti pōs echein=무엇과 어떤 식으로든 관계하는) 것과 일치하는 것이다(=존재가 다름 아닌 오직 관계함일 뿐이다).
(ἔστι τὰ πρός τι οἷς τὸ εἶναι ταὐτόν ἐστι τῷ πρός τί πως ἔχει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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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심장병전문의의 담론일까? 레이먼드 카버의 "WHAT WE TALK ABOUT WHEN WE TALK ABOUT LOVE"는 이렇게 시작한다. "My friend Mel McGinnis was talking. Mel McGinnis is a cardiologist, and sometimes that gives him the right."노에시스(사유)가 논리학자의 담론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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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페도클레스:"심장은, 세간에서 사유력이라 불리는 것이 우선적으로 자리하는 심장은, 관류하는 피에서 자양분을 섭취한다. 왜냐하면 심장을 맴도는 피가 인간에게는 사유력이기 때문이다." (B 108)
"천인공노할 살육을 그만두지 않을 건가? 너희들이 서로, 사유의 부주의로, 갈기갈기 찢고 있는걸 못 본단 말이냐?" (B 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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