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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3/10
    2021/03/10(1)
    ou_topia
  2. 2021/03/09
    2021/03/09
    ou_topia

2021/03/10

[이어서]

철학은 축시대 Achsenzeit발생 당시 손가락 다섯 개로 셀 수 있는 형이상학적 또는 종교적 세계관에 속했다. 이것이 철학에겐 운명이 되었다. 왜냐하면,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 플라톤주의가 발생함으로써 믿음과 지식에 대한 담론은 그 이후 그리스 철학 유산의 발전에 구성적인 역할을 맡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게 이  담론은 철학이 어떻게  – 철학 개념을 사용하는 기독교 교리의 형성과 맞물려 – 종교적 유산의 핵심적인 내용들을 취하고 근거를 제시할 수 있는 지식으로 변환했는지 보여주는 후기형이상학 사유의 계보를 정립하는데 있어서 지침 역할을 한다. 바로 이런 의미론적인 삼투에 칸트와 헤겔을 추종하는 세속적인 사유의 주제인 이성적인 자유 및 실천철학의 기본개념들이 그 근거를 두고 있다. 그리스 우주론은 다시 뿌리를 내리지 못했지만, 성서에서 기원하는 의미론적 내용들은 후기형이상학의 기본개념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철학이 아직 감히 감당할 수 있고 또 감당해야 하는 게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은, 철학이 세속적인 성격을 과시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앞에서 언급한 종교적 기원의 유산과 밀착되어 결정된다. 그러나 이 유산은 단지 오늘날 서로 경쟁하는 두가지 형태의 후기형이상학 사유 중 그 하나만 물려받았다. 이 상황을 후기형이상학 사유의 경험주의적 혹은 자연주의적 줄기만이 종교적 유산에서 철저히 벗어나는데 성공했다는 식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런 가정에 대한 반박은 역사적이고 동시에 유물론적인 청년헤겔학파의 사유가, 어쨌든 헤겔을 이어받고 있다고 하지만, 헤겔에 등을 돌리는 급진적 종교비판의 골이 깊는 단절이 말해주고 있다. 그들이 물론 역사 안에 있는 이성의 흔적에 대한 관심과 보편적으로 철학의 노고는 이성적 생활관계의 증진을 지향하는데 있다는 철학에 대한 이해는 포기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이와 같은 철학의 직무에 대한 자기이해는, 철학사를 나락으로 떨어질 위험을 뛰어넘어 불규칙한 학습과정의 연속으로 꿰맬 수 있는 경우, 철학사에 대한 이런 수긍 가능한 해석으로 뒷받침된다. 이런 의미에서의 >>계보학적<< 서술의 진행과정에서 학습과정을 야기한 우발적인 상황뿐만 아니라 포괄적인 이성개념 및 이에 상응하는 철학사유에 대한 중차대한 자기이해의 견지를 뒷받침하는 원인들이 분명하게 될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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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09

[이어서]

 

그렇지만 그때그때마다 처하게 되는 도전적인 상항에서 나아갈 길을 찾으려는 인간 욕구에 대한 철학 사유의 실천적인 관계에 나타나는 계몽지향적인 박동Impuls은 전혀 자명한 게 아니다. 이 박동이야말로 우리에게 있는 이성적인 자유를 사용하게끔 하는 미지의 결단력에서 rätselhafte Initiative zum Gebrauch unserer vernünftigen Freiheit 그 힘을 공급받기 때문이다. 이 대주제가 칸트에서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철학으로 하여금 열심을 다하게 했다. 아니 사로잡아 부역하게 했다. 이 대주제가 또한 내 연구 전체를 꿰뚫고 있다. 반면, 오늘날에 이르러 과학주의적인 형태를 띤 고대 필연주의의 망령을 다시 만나게 된다. 필연주의와 수행적인 행위의식간의 모순을, 자유의지를 [이것과 결정론이] 양립할 수 있다는 식으로 개념화하는 반창고로 눈가림 하지만 결코 해소하지는 못한 채 말이다. 인류가 스스로 생산한 경제적, 기술적 성장역동성에 따르는, 해결하지 못한 부차적인 결과의 복잡성에 휩쓸려 들어가면 갈수록 점점 더 만연하는 숙명론이 여기서 투영되어 있다. 그러나, 철학이 자신의 생성콘텍스트를 재차 확인하는 순간, 이성적인 자유의 사용이란 주제는 전혀 감소되지 않은 막중한 의미로 되돌아온다. 절대적인 시작에서 출발할 수 없고, 이어서 view from nowhere 라는 가설의 유혹을 단호하게 거절할 수 밖에 없다고 인식하는 순간, 철학은 자신이 내리는 판단의 자주성을 단지 역사적인 자기관계로만 담보할 수 있다. 이 자기관계는 물론 그때그때마다의 숙고가, 그가 처해있는 사회적 관계 및 정치적 도전이란 역사적인 자리에 묶여있다는 성찰 따위로 숨가쁘게 헐떡거려서는 안된다. 역사적인 자기확인은 보폭을 더 넓혀 철학 유산의 두 줄기를 재구성할 수 있어야 한다. 철학이 후기형이상학 형태를 띠고 내버린 유산에 비추어볼 때 비로소 철학이 이어받은 유산을 균형을 제대로 갖추고 인식할 수 있다. 이성적인 자유의 사용으로의 자치(自治)Emanzipation는 해방과 동시에 규범적인 속박을 의미한다. 종교개혁이후 주체철학이 인간중심적으로 시선을 돌리고, 특히 회복하는 혹은 구원하는정의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작별할 수밖에 없도록 한 원인들에 대한 이해가 비로소 우리의 눈을 열어 의사소통적으로 사회화된 주체들이 이성적인 자유를 사용하는데 있어서 얼마나 협력할 자세/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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