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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 일반지성 (general intellect) -1

진보평론 28호에 볼프강 하우크(Wolfgang Haug)의 Argument에 발표된 논문 "일반지성"이 곽노완의 번역으로 소개되고 있다. 근데 볼프강 하우크가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적-비판적 사전"(Historisch-kritisches Wörterbuch des Marxismus)에 똑 같은 제목의 article을 썼다. (곽노완 번역문 바로 가기)

 

사전에 실린 글과 곽노완이 번역한 글은 대동소이하다. 차이가 있다면 인지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이 사전에 실린 글에서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공부겸, 번역 연습겸 사전에 실린 글을 번역해 본다. 사전에 실린 글이 Argument에 실린 글과 같은 경우 곽노완의 번역을 거의 그대로 인용했다. 안 그런 경우, 주를 달아 그 이유를 설명했다.

 

 

 

일반지성(general intellect)

마르크스는 ‘general intellect’(allgemeiner Verstand/일반지성)란 영어 표현을 딱 한번 사용하지만, 이 표현이 첨단기술적인 생산양식과 이것이 자본주의에서 취하는 위기적인 형식에 대한 조망으로 해석될 수 있는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이와 관련하여 ‘일반지성’은 경향적으로 일반적인 접근이 가능한 지식이란 의미로 사용되는데, 이런 ‘일반지성’이 사회적 생산의 결정적인 기반이 되고 노동가치Arbeitswert를 통해서 조절되는 자본주의적 시장경제가 그 역사적인 한계에 다다를 만큼 생산력향상을 촉진한다는 것이다. - 특히 이태리의 후기자율주의에서 '일반지성‘이란 표현은 정치적 동원에 쓰이는 구호가 되었는데, 이것은 이론의 임의화란 대가를 치르고 얻은 것이다.

1. 마르크스는 ‘일반지성’이란 [용어를]  『그룬트리쎄』(MEW 42, 602)에서 -  수고에는 이 대목의 가장자리에 두 줄이 그어져 있다 (MEGA II.1.2, 582쪽 이하) - 과학이 주요생산력이 되도록 하는 경향을 담아내기 위해서 도입한다. 도입맥락은 고정자본과 생산력발전을 다루는 절이다 (MEW 42, 590-609). 후기자율주의 주변에서는 이 절을 판찌에리(1961)의 뒤를 이어 [그 의미를] 일방적으로 단축하여 “Maschinenfragment/기계단편”(예컨대 비르노Virno, 1990, 9) 혹은 “capitole sulle machine/기계에 관한 장”(네그리, 1978, 169)이라고 부른다. 이와 달리[=일반지성의 의미를 일방적으로 단축하지 않고] 마르크스에 있어서는 생산자들, 축적된 문화적-인지적-기술적 잠재력(일반지성), 그리고 자본이라는 [삼대요소간의] 관계들이 생산력발전의 해방적이고 역사이론적인 차원들의 향방을 가늠하기 위한 분석이 전개되는 전략적인 삼각형을 이룬다.
마르크스에 있어서 ‘일반지성’이라는 말은1 특히 노동일반allgemeine Arbeit 개념에 사태(事態)적-이론적으로 가깝다. 마르크스가 이 관계에서 선취한 자리옮김과Verschiebung2 모순을 둘러싸고 [현재] 앞으로 올 사회를 예견하는 상상이 점화되었는데, 바로 이점이 그룬트리쎄의 이 작은 절에 탁월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일반지성’이란 말에서 테마가 되는 것은 “일반적 사회적 노동”(595쪽) 혹은 “일반적 과학적 노동”(596쪽)의 산출과 기능의 전체로서 “지식과 숙련, 사회적 두뇌의 일반적 생산력의 축적”(594쪽), “일반적 진보”(595쪽), “인간 두뇌의 일반적인 역능의 발전”(601쪽), “일반적 사회적 지식, knowledge”(602쪽) 등이다. 여기서 관심은 “자연의 힘이 사회적 지성에 종속”(605쪽)됨에 따라 “[기존] 생산과정의 [...] [어느 한] 과학적 과정으로의 전화”(596쪽)에 놓여있다. 한편으로 노동의 생산성은 점점 더 “과학의 일반적 상태와 테크놀로지의 진보, 또는 이러한 과학의 생산에의 적용”(600쪽)에 달려있고, 다른 한편으로 “발명”이 “사업”(600쪽)으로 전화되는 가운데 자본에 의한 [특정] 과학의 가치증식을 통해서 [여러 과학 가운데 특정] 과학의 발전이 선택적으로 “강행된다”(595쪽).

1.1 마르크스는 이러한 과정과 그 잠재력의 자본주의적 형태규정성을 분석하고, 뿐만 아니라 거꾸로 과학화가 자본관계에, 그리고 교환가치를 통한 사회적 생산의 규제에, 특히 노동하는 주체가 일반적 지식역능에 대해 갖는 위상에 미치는 반작용을 분석한다. 마르크스가 내다본 것은 “생산과 부를 담보하는 대지주(大砥柱)”가 시간으로 측정되는 “인간이 몸을 놀려 작업하는 직접적 노동에 묶여있지” 않고, 오히려 인간이 “자신의 일반적 생산력을 [갈고 닦아] 자기 것으로 만들고Aneignung, 자연을 이해하고, 그리고 [그런 맥락에서] 그의 현존형태인 사회신체에 의한 자연 다스리기3”(601쪽)가 [미래를 여는] 핵심적인 문제가 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축적된 잠재력들이란 매체 안에서 지금까지의 그 어느 현재화Artikulation4 형태에서 보다 더 무한하게 자기를 전개하는 가운데 개인화되는 “사회적 개인”에 관한 전망으로도 이어진다.  인간의 본질은 역사적인 “사회적 관계의 총체”속에서[만] 그 현실성을 갖는다는 6번째 포이어바흐 테제의 생각이 떠오르는 대목이다(MEW 3, 7쪽 참조). 이러한 총체에는 언어와 문화, 뿐만 아니라 ‘기기환경'과 [그런 기기를 다룰 줄 아는] 능숙한praktisch 조작지식으로 요약되는, 일반적인 인간화매체처럼 기능하는 복합적인 사회적 유산이 속한다. 과학이 주요생산력이 됨으로써 전통적으로 계급[소속]에 따라 [경계선이 그어진] 접근과 전유기회가 경향적으로 탈경계화 된다.
자본주의적 형태규정성은 막대하게 성장하는 과학적-기술적 잠재력이 노동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들] 인식의 첫 단계에서5 설비자본(고정자본)이 되어 대립하고 “노동의 증가된 생산성이 오히려 ... 노동자들 자신의6 쓸모없음을 [관철하는 것으로] 정립되는 것”(그룬트리쎄, 598쪽)을 야기한다. “과학은 ... 노동자의 의식 속에서 존재하지 않고, 기계를 통한 낯선 역능으로서, 기계 자체의 역능으로서 노동자에게 작동한다”(593쪽). 그 결과 사회적 지식과 일반지성allgemeiner Verstand은 “고정자본의 ...  속성(594쪽)”으로 작동하고, [그래서] 사회적 노동의 일반현상은 “노동자가 아니라” 사회적 노동의 성과를 공짜로 거둬들이는 “자본 안에” 있게 된다.
“직접적인 노동”은 “질적으로는 없어서는 안 될 요소지만 일반적 과학적 노동, 자연과학의 테크놀로지적인 적용에 비해 하위 요소로 전락한다.” “개별적” 노동으로서의 직접적인 노동은 이제 단지 “자연의 힘Gewalt을 부리는 공동의 노동” 속에서만 생산적이 되고, 그 결과 “직접적 노동의 사회적 노동으로의 승격이 [개별노동에게는] 자본 속에 대표되고 집중된 공동성에 견주어볼 때 자기를 무기력으로 떨어뜨리는 것으로 현상화된다”(596쪽).
여기까지 마르크스의 분석은, [그룬트리쎄의] 이 부분 수용에서 자주 간과되는 점인데, 19세기 중엽 영국에서 볼 수 있는 발전들에 관한 것으로서, 마르크스에 앞서서 이미 전형적으로 서술되어 고전으로 정립될 만큼 진전된 발전들에 관한 것이었다. 그룬트리쎄의 해당 절은, 마르크스가 1845년 브뤼셀에서 발췌한 앤드류 유어 저작의 프랑스어 번역판(1836)에서의 한 인용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마르크스가 [기존관계를 이론적으로 분석하다가] 이론적 분석이 기존관계를 넘어서도록 내버려둔 건, 일반적 사회적 지식과 지성의 해방적 잠재력의 향방을 예견적으로 가늠하기 위해서였던 게 분명하다.
여기서 노동의 임노동으로부터의 해방에 [필요한] 필수적인(충분조건이 아닌) 전제조건과 함께 자본주의의 역사적 한계가 시야에 들어온다. 이때 자본은 한편으로는 “노동시간을” - 노동자의 시간이 아니라 “특정 대상 생산에 필요한 할당량”(597쪽)으로서의 시간을7 - 최소화하려고 노력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동시에 노동시간을 부의 유일한 척도와 원천”, 간단히 말해서 “사용가치의 교환가치”로 설정하는 가운데 “모순 집행자”로서의 기능을 수행한다(601쪽). 자본은 “그리하여 생산을 지배하는 [일반적] 형식으로서의 자신이 해체되도록 박차를 가한다”(596쪽). 순전히 양적으로 측정되는 노동과 더불어 사회적 부의 생산을 위한 임금노동자들의 잉여노동이 부수적인 것이 될 때 비로소 교환가치에 기반한 조절은 “붕괴된다”(601쪽).
첨언Bemerkung - 1930년대 모스크바 편집자들은 노동시간을 “사용가치의 교환가치”로 파악하는, 실질적으로 압축된 마르크스의 공식에서 아무것도 관념하지 못하고 해당 대목을 “교환가치 = 사용가치의 {척도}”(그룬트리쎄, 1953년, 593쪽 참조)로 보충하였다. 그러나 시간으로 측정된 추상노동이 실지로 재화(‘사용가치’)의 교환가치의 ‘실체’를 형성하는 반면 교환가치는 절대 사용가치의 척도가 될 수 없다. - MEGA 2판 발행인들과 이들을 따르는 MEW (42권) 발행인들은 그 첨가를 그대로 유지하고, MEGA (II.1.2, 581쪽)은, 납득이 안가지만, 한술 더 떠 [Mass(척도)의] 기교적-고풍적 서체인 “Maaß"를 유지하고 있는데, 이것이 후기자율주의자들로 하여금 이상야릇하기 짝이 없는 이론을 내놓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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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고스’란 의미로서의 ‘Rede’를 ‘말’로 번역함.텍스트로 돌아가기
  2. 곽노완은 ‘전위’로 번역. 이건 심리학적으로 정의된 표현 같아서 ‘Rearragement’란 의미를 담은 ‘자리옮김’으로 번역함.텍스트로 돌아가기
  3. 'Beherrschung'의 긍정적인 함의 - 예컨대 ‘Sie beherrscht mehrere Sprachen.(그녀는 여러 언어에 능통하다)’ 혹은 ‘Sie beherrscht die Regel.(그녀는 그 법칙의 이치를 알고 적용할 줄 안다.)’ - 를 살려 ‘다스리기’로 번역함.텍스트로 돌아가기
  4. Artikulation에 적합한 말을 찾지 못했다. 주어진 문장을 어떻게 읽냐에 따라, Artikulation에 따라, 해당 문장의 의미가 현재화Aktualisierung 된다. 확률론적 개념을 사용하자면 모든 Artikulation이 ‘표본공간’을 이루겠다. Artikulation은 전유Aneignung과 관련해서 읽어야겠다. 잠재적인 것을 전유해서 자기의 에너지로 만드는 것이 Artikulation이 아닌가 한다. 여기서 에너지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로서 .현재화/실재화‘에 가깝다. Artikulation의 형식을 보자면 모범이 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이젠 제도적인 일반교육이라고 할 수 있겠다. 텍스트로 돌아가기
  5. zunächst. 헤겔에 기댄 번역이다. 텍스트로 돌아가기
  6. 이 부분 곽노완 번역은 오역인 것 같다. “die vermehrte Arbeitsproduktivität der Arbeit vielmehr als [...] ihre eigene Entkräftung gesetzt ist." 여기서 ‘ihre’는 ‘노동’을 지시하지 않고 ‘노동자’를 지시한다. ‘노동’을 지시하려면 문법적으로 ‘deren’을 사용해야 한다. 전반적으로 Argument의 글은 노동자와 노동 간의 구별이 좀 부족하다.텍스트로 돌아가기
  7. 곽노완의 번역에는 이 부분이 누락되어 있다. 노동시간과 노동자가 일해야 하는 시간 사이의 구별이 없으면 사실 노동시간제한, 혹을 노동일 제한으로 요약될 수 있는 노동운동을 설명할 수 없다. 독일 금속노조와 자본가 간 가장 첨예한 대립을 빚었던게 80년대 주 35시간을 놓고 진행된 파업이었다.텍스트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