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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앞의 경제내적으로 논증된 붕괴론 외에 마르크스는 보다 정치적-해방적 행위조건들로 이어지는 두 가지 선들을 더 추적한다. 첫 번째 선은 노동시간단축의 양적인 측면을, 두 번째 선은 노동하는 사람들이 사회적 지식 잠재력들과 생산과정통제와 맺는 관계 안에서 그들의 재배치란 전략적 측면으로 이어진다.
양적으로 - 자본이, 개별생산물을 놓고 볼 때, “힘의 지출[로서의] ... 인간노동”을 최소화시킨다는 것은 “해방된 노동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고 노동해방을 위한 조건이다”(MEW 42, 598쪽). 이제 잠재적으로 “노동력밖에 없는 노동자”로의 개인의 “강등”, 즉 개인의 “노동에의 종속”이 종말에 이른다“(604쪽).
질적으로 - “인간이 생산과정 자체를 [대상화하고] 그와 관계하는 가운데 감시자와 규제자로 등장하는 만큼 노동은 더 이상 그렇게 [=생산과정에 픅 삽입되어 헤어 나오지 못할 만큼] 생산과정 안에 갇힌 것이 아닌 것으로 현상화된다. (...) 인간은 자연과정을 산업과정으로 전환시키는 가운데 [비유기적인 자연과 직접 관계하지 않고] 그와 그가 다루는 법을 습득한 비유기적인 자연 사이에 [산업과정으로서의 제 2의?] 자연과정을 중재자로 삽입한다. [결과] 인간은 생산과정의 주요중재인이 되기보다는, 그 옆에 등장한다”(601쪽). - 마르크스의 눈앞에는 기계화만 있지만 그의 서술은 결정적인 관점에서 사실을 앞서고 있다. 왜냐하면, 노동하는 사람들이 직접적인 생산과정에서 밖으로 나와 “감시자와 규제자”의 위치로 들어서는 것은 피드백을 겸한 복합적인 제어테크놀로지의 발전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아직, 프로세스테크놀로지적인 설비가 됐든 공구기계가 됐든, 그런 것들을 측정기술과 제어기술과의 결합을 통해서 그리고 다른 기계복합체와 ‘체인을 이루게’ 함으로써 더 이상 살아있는 노동이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는 거대한 [자존적인] 물리적 폐쇄시스템을 가능케 하는 구체적인 형태로서의 컴퓨터화에 대한 표상을 갖고 있지 않다. 기계화의 기반위에서 진행된 마르크스의 분석은, “더 이상 그렇게”라는 표현이 보여주듯이 당시의 주어진 상황으로부터의 [새로운 상황의] 부각을 [섣불리 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자제하면서 하지만, 사후적으로 예견적-[현실]서술적인 내용을 함유하는 분석으로서의 의미가 점점 더 부여되고 있다.
1.3 [마르크스 분석은] 직접적으로 아직 증기기관으로 각인된 19세기의 산업화 첫 단계의 테크놀로지를 다루고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가들이 인간을 “부차적이고 종속적인 기계로 다루고” 노동하는 사람들에게 투자하기보다는 “영혼이 없는 메커니즘”에만 투자한다고 비판한 개량주의적 기업가 로버트 오웬의 1840년 저작을 인용하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보기에, 생산의 과학화 프로세스에는 [그게 이루어지고 또 이루어지려면] 생산자의 과학화가, 아니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적으로 처분가능하게 되는 시간이 실질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최대의 생산력으로서의 ... 개인의 전면적 발전”이 요청된다. “현실적인 경제가 노동시간의 절약”에 있다면, 이건 “결코 향유의 단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파워(power)의 발전, 즉 생산을 위한 능력의 발전을 의미하고 그에 따른 향유능력뿐만 아니라 향유수단의 발전을 의미한다“(607). 마르크스는 오웬의 사고과정과 연계해서 그러한 인간발전의 자본주의 내재적인 범주화를 성찰한다. 한 세기가 지난 후 인간발전의 자본주의적 범주화는 ‘인간자본’에 대한 투자라고 불린다. “이 투자는 직접적인 생산과정의 관점에서 고정자본의 생산으로 고찰될 수 있다. 이때 고정자본은 인간 자신이다”(607쪽).
정치경제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기계적 설비들은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인간 뇌의 기관, 대상화된 지식의 힘이다”(602). 고정자본이 필연적으로 사물적인 설비들로 현상화된다고 해도, ‘지식의 힘’이 필연적으로 고정자본인 것은 아니다. 비록 자본이 인간의 노동력을 섭취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해도, 인간들은 결코 자본이 아니다. - 푸리에와 연계해서, 노동의 놀이됨이란 그의 사상을 비판하면서, 마르크스는 자유시간과 노동시간의 변증법을 스케치하고 노동하는 주체를 강조한다. “여가시간이자 좀 더 고도의 활동을 위한 시간인 자유시간은 그 소유자를 당연히 다른 주체로 전화시켰다. 바로 이렇게 다른 주체로서 그는 다시 직접적인 생산과정에 들어간다. 직접적 생산과정은 동시에, 형성되는 인간과 관련해서 고찰할 때, 실행과Ausuebung 실험과학처럼 훈련Disziplin이며,1 사회의 축적된 지식이 존재하는 머리의 [주인인] 형성된 인간과 관련해서는 물질적으로 창조하고 대상[물]로 재현되는 과학이다.”(607쪽)
1.4 이상 ‘일반지성’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프레임의 윤곽이 그려졌다. “고정자본의 발전은 일반적 사회적 지식 - knowledge - 이 어는 정도로 직접적인 생산력이 되었는가를 보여주고 따라서 사회적 생활과정의 조건들 자체가 일반지성의 통제아래 들어왔으며 또 그에 상응하게 변형되었는가를 보여준다.”(602쪽)
이 문장에는 세기적인 긴장이 응축되어 있다. 사회적인 생활조건들이 “일반지성의 통제 아래 들어왔으며 또 일반지성에 상응하게 변형되었다”라는 말은 이중적인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통제와 변형이 사회적인 생활조건들에 관련되는 만큼이나 물질적인natural 생활조건들에도 관련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사회적 생활과정의 조건들”을 말할 때 단지 물질적-기술적 조건들, 즉 사회적인 기계총체Maschinenpark만을 생각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이러한 파악은 1857/8년 수고를 촉촉이 적셔주고 있는 변증법적-실험적 사고방식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룬트리쎄의 마르크스는 경향들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잠복적인latent 가능성들을 읽어 낼 수 있는 경험적인 징후들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마르크스는 비록 자연과정의 과학적-기술적인 채용이Indienstnahme 계급대립적이고 지식의 비밀유지와 그때그때의 타인에 의한 사용을 배제하기 위한 체제를 동반하는, 시장에서의 사적 전략들 안에 갇혀 있는 것을 보지만, 그는 동시에, 바로 거기서, ‘일반지성’이 지향하는 의미로서의 [사회적인] 통제의 객관적인 가능성을 본다. 고정자본에서 읽어 낼 수 있는 “정도”, 즉 얼마만큼 생산력들이 “사회적 실천의 직접적인 기관들”(같은 곳)로서 생산되는 게 진척되었는가의 정도가 잠복을Latenz 의미한다. 물론 이처럼 잠복해서 붙어 자라난angewachsen 가능성은 유적존재로서의 인간의 자연적인 생활조건들의 기반을 사회적인 생활조건들의 기반과 마찬가지로 점점 더 빠르게 파괴하는 [가치증식 외 어떤 것에도 개의치 않는] 자족적인selbstreferentiell 가치증식과정 안에 사로잡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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