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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인권위원회 평가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 제48호, 2011)

 

너무 멀리 가버린 국가인권위원회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 48호 | 2011년 1월 3일, 배여진 | 국가인권위 제자리찾기 공동행동, 천주교인권위원회 활동가)
인권에 대해 무지하고, 반인권적이고 반민주적이므로 위원장으로서 자격이 없다 혹은 있다 논란을 뒤로 하고서라도 현병철 위원장은 자신이 수장으로 있는 기구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자신이 몸담고 있는 그 조직에 대한 애정이 없다. 인터넷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국가인권위원회’라고만 쳐도 실시간 소식들이 정리되어 나오는 이 친절한 세상에서 현병철 위원장은 그런 것조차도 하지 않는 사람인 것이다. 애정이 없고 권력만 있는 그는 국가인권위원회와 나아가 인권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은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이런 사람에게 인권적인 인권위원장이 되어주길 기대하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당선되자마자 독립성이 생명인 국가인권위원회를 대통령 직속기구화 하려한 대통령이 위원회의 독립성은커녕 인권에 관심이 없는 사람을 위원장직에 앉히는 것이 그네들의 상식인 모양이니 이런 결과는 오히려 당연할 성 싶다. 그래서 이 정권에게는 상식이 없다고 하는 것 아니겠는가. ‘인권 없는 인권위’를 만들기 위한 이명박 정권의 의도는 정확히 명중했다. 별다른 어명이 없어도 알아서 척척하는 현병철이라는 사람을 인권위원장으로 임명함으로써 이명박 정권은 손 안 대고 코도 풀고, 어쩌다 코 밑에 묻은 콧물은 현병철이 닦아주고 있으니 어디 이만한 인물이 있겠는가.
현병철 위원장은 크나큰 착각 속에 빠져 살고 있다. 또한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을 보좌진으로 둔 덕에 그 착각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얼마 전 현병철 위원장은 자신을 둘러싼 사퇴요구에 대해 “자신을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위원장 본인이 다니는 교회에서 자신을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면서 든든한 지원군이 있다는 것에 흡족해 했다는 것인데, 이것을 여론으로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현 위원장의 말마따나 그의 행보를 지지해주고 지원해주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여론’은 아닌 것이다. 여론은 현병철 위원장이라는 사람이 문제가 많고, 이로 인해 국가인권위원회가 계속해서 위기 속에 봉착되고 있으므로 하루라도 빨리 위원장이 사퇴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대로만 믿는다. 고집과 독선과 아집의 정점이다.
여기서 또 하나 짚고 넘어가야할 것이 있다. 무엇보다도 현 위원장을 지지해주고 있는 그 세력들이 누구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차별을 조장하고 반인권적인 망발들을 일삼는 사람들을 든든한 지원군으로 두고 있다. 바로 동성애를 혐오하고 차별해야 한다는 단체들과 북한 인권 단체들이다. 그들은 군형법 92조와 관련하여 헌법재판소에 국가인권위원회가 의견을 제출하라고 한 장향숙 상임위원더러 사퇴하라고 외치고, 지금까지 북한 인권에 신경 쓴 위원장은 현병철 위원장밖에 없다며 그를 지지하고 있다. 그런데 이 두 세력 모두에게는 큰 모순이 있다. 먼저 동성애를 반대한다는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현병철 위원장의 사퇴를 주장하는 게 맞다. 그 안건을 통과시킨 국가인권위원회 최고 의결기구의 수장이 누구인가. 바로 현병철 위원장이다. 그 회의에 대한 최종적인 책임을 물어야 한다면 현병철 위원장에게 물어야 하는 것이다.
또 북한 인권 단체들은 어떠한가. 북한 인권 단체들뿐만 아니라 고엽제 전우회, 대한민국 어버이 연합회 등 여러 보수단체들은 지금 무언가 잘못 알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북한 인권과 관련된 활동과 입장을 내놓기 시작한 것은 안경환 전 위원장 시절부터다. 북한 인권 특별위원회도 그때부터 꾸려졌다. 국가인권위원회의 북한 인권과 관련된 활동이 적절한 것인지에 대한 논란은 일단 논외로 하더라도 국가인권위원회는 북한인권위원회가 아니지 않던가. 백번 양보해서 국가인권위원회가 북한 인권과 관련된 활동을 해야 한다고 해도 남한의 인권상황에 대해서는 입도 열지 못하는 현병철 위원장의 행태에 대해서는 왜 꼬집지 않는가.
과연 현병철 위원장은 자진 사퇴할 것인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답하자면 ‘아니오’다. 윗선의 지시가 있기 전까지는 절대 사퇴할 의사가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벽에 대고 구호만 외친 격인가? 그렇지는 않다. 현병철 위원장에게 굳이 한 가지 감사의 인사를 해야 한다면 덕분에 국가인권위원회의 존재를 전국적으로 알릴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인터넷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에도 오르고(문경란, 유남영 두 상임위원이 동반사퇴를 했을 때에는 문경란 위원의 이름이 실시간 검색어 1위까지도 차지했다) 각종 신문과 방송에서도 국가인권위원회 문제를 주의 깊게 다뤘다. 국가인권위원회와 현병철 위원장이 갖고 있는 문제가 어떤 내용인지까지는 잘 모르더라도 ‘큰 문제가 있다’는 것에 대중들의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어쩌면 이것이 이번 현병철 위원장 사퇴 운동이 남긴 최대의 성과가 아닐까 싶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일반 인권시민단체들과 성격이 전혀 다르다. NGO와는 다르게 국가인권위원회는 국가기구만이 할 수 있는 역할, 그리고 해야만 하는 의무와 그에 대한 많은 권한을 갖고 있다. 이러한 권한은 국민의 대중적인 지지로서 유지되고 뒷받침된다. 그렇다고 현병철 위원장 덕분에 국민들에게 국가인권위원회의 존재 이유가 확실하게 알려지고 있으므로 감사의 인사를 넙죽 하자는 것은 아니다. 이 상태대로라면 이제부터는 대중들이 국가인권위원회에 등을 돌리는 순서만 남았으니 말이다.
대중들의 정서와 의식이 이러하다면 국가인권위원회 설립 초창기부터 힘을 모았던 우리 인권단체들은 어떠할까. 비단 위원장의 문제만이 아니라 전혀 인권적이지 않은 인권위원들도 합세하여 국가인권위원회를 ‘말아먹고’ 있는 작금의 현실을 보며 “이제 국가인권위원회를 버려야 하지 않나”라는 의견들이 우세해지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버려지고 있는 중이다. 인권단체들 뿐만 아니라 국가인권위원회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있었던 인권위원회 전문, 자문, 상담위원들 중 상당수가 사퇴를 하였고, 국가인권위원회가 준비하던 토론회와 심포지엄 등이 참가자들의 참가 거부로 무산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다고 하여 국가인권위원회가 큰 타격을 받을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이렇게 비워진 자리들은 언뜻 보면 인권분야의 전문가처럼 보이는 사람들로 채우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기간이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국가인권위원회는 ‘속 빈 강정’이 될 것이다. 말 그대로 ‘인권 없는 인권위’로 변질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인권 없는 국가인권위원회는 이제 인권의 탈을 쓴 그 무엇이 그 자리를 채울 것이다. 대표적으로 지난해 12월 6일 국가인권위원회 전원위원회에서 통과된 ‘북한인권법 제정촉구 및 북한주민에 대한 정보접근권 부여 권고’ 안건을 보면 알 수 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이것이 북한 주민의 인권을 위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것이 준비되지 않았음은 물론 그릇되고 왜곡된 인권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국가인권위원회의 최고의결기구인 전원위원회 구성원이 된 결과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입에서 ‘가짜 인권’이 만들어지고, 앞으로 이런 가짜 인권의 정의가 구체적인 정책으로 실행되는 것 또한 시간문제일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 관련 투쟁을 벌이면서 스스로에게 주변 사람들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질문을 던지곤 한다. 그 질문인즉슨 “도대체 국가인권위원회 누가 만들었어? 그 사람들은 지금 다 어디 갔어!”이다. 좀 멀리 가서는 시설 장애인에게 낙태를 종용했던 김양원 목사의 국가인권위원회 비상임위원 임명 반대 투쟁부터 국가인권위원회 조직 축소 저지 투쟁, 현병철 인권위원장 임명 반대 투쟁, 그리고 지금 현병철 위원장 사퇴 투쟁까지 실무를 맡고 있는 나의 가장 큰 고민은 바로 ‘동력’의 문제였다. 현병철 위원장 사퇴에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지만 그만큼 사람들이 모이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 크나큰 고민거리였다. 왜 모이지 않을까에 대한 답은 아직 찾지 못했다.
국가인권위원회를 제자리로 돌려놓기에는 너무 멀리 온 것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 이 시점에서 인권운동진영은 매우 중요한 기로에 서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인권의 정의가 변질되고 있는 지금 시대에 우리의 역할은 무엇일까? 우리가 싸워야 하는 대상은 누구인가? 만일 인권운동진영이 국가인권위원회가 더 이상 국가인권기구로서의 역할과 기능을 하기 힘들다고 판단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국가인권위원회가 하지 못하는 기능을 다시 인권운동진영이 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일까? 이 모든 것에 대한 답은 인권운동진영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이명박 대통령 임기 3년 동안 오랜 시간 축적되어 왔던 민주주의와 인권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또 현병철 인권위원장 임기 1년 반 동안 국가인권위원회 9년의 역사가 무너지고 있다. 공들여 쌓은 탑이 생각보다 쉽게 무너지고 있다. 남아있는 기둥마저 뽑아버리고 새로 지을 것인가, 아니면 지금이라도 다시 보수공사를 할 것인가? 인권운동진영의 결정이 시급하다. 
 
인권위의 타락과 남겨진 숙제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 48호 | 2011년 1-2월호, 김형완 | 전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정책과장)
양날의 인권전선-공권력 감시와 시민사회의 내면화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현재 사회 곳곳에서 재현되고 있는 온갖 퇴행적인 모습들을 보면 아직도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가 우리 사회의 기본질서로 자리 잡기까지는 갈 길이 멀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최근 국가인권위원회의 파경도 본질적으로는 불완전한 민주주의, 미성숙한 인권운동 역량의 반사경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퇴행적인 이명박 정권이나, ‘조중동’ 등 일부 정치언론, 개념 없는 인권위원장 따위에게 책임을 묻고 이들을 패퇴시키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단지 그것만으로는 호락호락 사태가 극복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자신의 기본적 책무라고 할 수 있는 민주주의와 인권의 사회적 내면화를 제일의 사명으로 삼는 한 국가인권기구를 둘러싼 외부환경은 언제나 적대적이기 마련이다. 법과 제도뿐만 아니라 관행까지도 뜯어 고치자는데 기득권 입장에서 ‘예뻐라’할 까닭이 없다. 이 점은 국가인권기구의 숙명적 딜레마이기도 하다. 당대의 제도와 법이 다중의 동의에 의한 사회적 합의라고 한다면, 제도와 법을 넘어서려는 시도는 때때로 다중의 뜻, 또는 사회적 합의와의 충돌이나 갈등을 불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국가인권기구는 한 걸음 앞선다”는 말의 의미는 정치적으로, 이념적으로 진보적이어서가 아니라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입장에 서기 때문인 것이다. 또 비주류의 헤게모니가 확장되는 것을 주류는 자신들의 이해에 반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주류와의 갈등은 불가피하다.
이렇듯 국가인권기구의 숙명적 자기 딜레마는 기존 제도 안에서 기존 제도를 넘어서려고 노력하고, 국가 안에서 국가 밖의 요구를 관철시키려 애쓰며, 비주류를 주류화 하려는 본연의 기능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국가인권기구는 이중전선을 동시에 감당하여야 한다. 국가공권력에 대한 대응이 제1전선이라면, 사회 곳곳에 뿌리박은 관행이나 관습과의 대치가 제2전선이 되는 것이다. 현실의 살아 있는 국가권력을 상대하기만도 간단치 않은 일인데, 여기에 권력이 조장하고 이식한 시민사회의 악습, 폐습과의 씨름까지도 짊어진 셈이니 국가인권위원회는 그야말로 고립무원의 양상일 수밖에 없다. 바로 이러한 곤경을 돌파해내기 위해 국가인권기구는 태생적으로 인권시민사회와의 협치를 필수불가결한 전제로 한다.
국가인권위원회 위기 극복을 위한 방법론
사실상 파산지경에 이른 오늘의 국가인권위원회를 어떻게든 회생시키기 위한 노력들이 실로 눈물겹게 전개되고 있다. 상임위원과 자문, 전문위원 등 안팎의 관계자들의 줄사퇴와 인권상 수상 거부, 점거와 농성, 촛불시위와 집회 등이 잇따르며 이명박 정부의 반인권정책을 성토하고 현병철 위원장의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이명박의 시대와 현병철 체제의 국가인권위원회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역사 가운데 반드시 오욕의 역사로 기록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헌신적이고 값진 노력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이제야말로 보다 근본적인 통찰과 대응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 글은 반인권적인 이명박 정부와 그의 꼭두각시 현병철로 야기되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위기를 다루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상황요인으로서 국가인권위원회가 제대로 기능하는 한 상시적으로 부딪힐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모든 국가권력은, 그리고 주류사회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편을 드는 인권기구를 그리 달가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인을 상수로 놓고 보면 결국 남는 문제는 주체역량의 문제로 귀결된다. 이런 맥락에서 이 글의 목적은 일단 상황요인을 괄호로 묶고 그 이면에 드리워진 국가인권위원회의 위기극복을 위한 내재적(주체적) 요인을 찾아 올바른 실천전략을 강구(여기에는 전면 퇴각을 배제하지 않는다)하는데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상황요인에 대한 대응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 글이 다루고자 하는 범주의 한계를 먼저 밝히려는 것이다.
거칠기는 하지만 오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대략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할 수 있겠다. 인권시민사회의 주체역량의 측면에서 과연 이제 국가인권위원회의 정상화는 가능이나 한 것인가, 가능하다면 어떤 방안이 있는가. 또 어떤 방법이 바람직한가. 이 근본적인 되물음에 대략 세 개의 시각이 제시될 수 있다.
첫 번째, 바로 세우기 위해서라도 지금의 인권위는 버려야
오늘의 국가인권위원회의 파국은 이미 예견된 일이다. 우리 사회에서의 민주주의와 인권의 공간은 지극히 협소하며, 자유주의에조차 이르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인권의 가치는 본래 자유주의와 함께 탄생하여 그 상상력이 확장되어왔는데, 우리에게는 그 경험을 가능하게 할 이념적, 사회 구성적 토대 자체가 부실하다. 오늘날 만성적이고 가속화되는 양극화구조 속에 합리적 중간계층이 참여하고 형성하는 정치공간이 절대적으로 협애할 뿐만 아니라, 이마저도 갈수록 허약해지고 있는 형편을 고려하면 국가인권위원회의 존립여건은 매우 취약하다. 게다가 자산계급의 정직성에 기반을 둔 건강한 계급의식마저도, 만연한 전근대적인 독점과 부패, 권력유착의 구조 속에서 그 자취를 찾을 수 없다. 이런 가운데서는 자유주의조차 발붙일 데가 없는 것이다. 아직도 우리 사회 곳곳에 전근대성이 광범위하게 온전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서구에서 온건보수로 분류되는 자유주의조차 우리에게는 진보적 이념으로 둔갑된다. 진보정당의 입지와 정당정치구조가 취약한 것도, 그리고 자유권에 중점을 둔 채 사회권 확장에는 괄목할 만한 성과와 기여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인권위원회가 마치 진보, 심지어 좌파의 화신인 양 비춰지고 있는 현실도 모두 이러한 사정에 기인한다. 우리에게 애초부터 국가인권위원회는 과잉 평가된 시민사회를 토대로 위로부터 ‘하사’된 불안한 민주적 리더십의 선물이었던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시민사회의 요구와 지향을 담아 그 반걸음 뒤에서 인권의 제도화라는 안정적인 자기전개를 펼칠 여유가 허락되지 않은 채 때때로 인권 진영의 전위로서 선도적 이슈파이팅을 요구받았던 상황도 따지고 보면 인권시민사회 진영의 허약함을 반증하는 사례이다.
오늘 국가인권위원회의 위기는 본질적으로 인권시민사회 진영의 위기이며, 더 추상적으로 보자면 우리 사회 자유주의 진영이 처한 현실의 반증이기도 하다. 따라서 국가인권위원회의 정상화를 위한 전제로서 시민사회의 성장 또는 내실화가 먼저 요구된다. 아직도 우리 사회 곳곳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전근대성을 극복하고 민주주의와 인권의 활동공간을 더 확장하려는 다양한 노력들이 시민사회의 주도로, 주류화 되는 가운데 비로소 국가인권기구와 같은 거버넌스의 자리가 마련될 것이다. 다시 말해 인권시민사회 진영의 토대가 굳건할 때 국가인권기구와 같은 제도권 내의 거버넌스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 토대가 부실한 제도권 내 기구는 잘 해야 거품이거나, 필경 관료화되기 마련이다. 오늘의 국가인권위원회 위기는 직접적으로는 이명박과 현병철로부터 기인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데서 비롯된 것이다. 부실한 토대를 놔둔 채 국가인권위원회라는 기구만 정상화시키기 위해 노력한다면, 그것이 아무리 제도적으로 보완된다 하더라도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기 십상이다. 따라서 오늘의 국가인권위원회를 냉정하게 직시할 필요가 있다.
오늘의 국가인권위원회는 그동안의 거품이 빠지면서 급격한 관료화의 국면으로 접어 든 셈이다. 인권시민사회라는 자기토대도 부실하고, 사회구성적 이해기반도 허약하며, 스스로 자기부정의 치부를 드러내는데 망설임이 없는 상태인 국가인권위원회가 더 이상 누굴 위해, 무엇을 위해 존재하여야 하는가. 그리고 앞으로 어떤 비전과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겠는가. 과거 ‘영광스런 태생의 족보(올바른 국가인권기구 설립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를 포함하여 무려 7년여에 걸친 인권시민사회 운동의 산물로 출범한 국가인권위원회가 아닌가)’가 오늘의 치명적 흠결을 대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제 국가인권위원회의 파국은, 어느 한 제도기구의 명멸 차원을 넘어 인권시민사회 진영의 대중적 신뢰성과 헤게모니의 위기로 번지지 않도록 이즈음에서 그 애증의 고리를 과감히 끊어야 한다. 인권시민사회 진영은 물론, 지각 있는 인권위원들을 포함한 내부구성원들은 전술공간으로서 의미 외에 국가인권위원회를 통하여 무엇을 어떻게 해보려는 미련을 과감히 떨쳐 버리는 결단이 필요하다. 더 이상 국가인권위원회로 인해 인권의 표상이 조롱되고 희화되는 사태를 막고 인권시민사회의 권위와 신뢰에까지 도전이 확산되는 상황을 불식시켜야 한다.
두 번째, 알리바이기구라도 없는 것보단 낫다?
국가인권위원회는 본래 정치상황이라는 변수에 취약한 기구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정권교체나 정변 등에 의해 종종 국가인권기구는 부침(浮沈)을 겪는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선진국에서나 후진국에서나 그 양상이 크게 다르지는 않다. 호주에서 집권당이 노동당에서 보수당으로 교체되었을 때를 보라. 인권기구는 운명적으로 ‘경계인(境界人)’이다. 인권기구의 독립성이 강화될수록 그 경계성이 강화되는 것은 숙명적 자기 딜레마이다. 제도권과 비제도권, 정부와 비정부, 국내와 국제, 진보와 보수,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경계에 위치한다. 경계인의 운명이 그렇듯 누구 하나 지지하고 응원하는 세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도전변수가 상존하기 때문에 그만큼 스스로 유연하고 긴 호흡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명박 정부 들어 국가인권위원회가 겪는 도전은 사실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유난 떨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지난 민주정부 10년 동안 온실 속의 화초처럼 커온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국가인권기구의 운명치고는 비정상이라고 할 만큼 편안한 길을 걸어왔다. 당대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했는지, 지금은 제대로 하고 있는지 여부에 지나치게 강박적으로 연연할 필요는 없다. 국가인권기구의 존재 자체가 갖는 의미가 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알리바이 인권기구라 할지라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는 것이다. 더구나 명분상 인권보호와 신장을 본래 사명으로 하고 있는 국가기구의 속성에 의해 그 정도와 내용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인권업무를 아예 안 할 수는 없다. 민주주의와 인권의 측면에서 보자면 아예 안 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하는 시늉이라도 하는 게 낫지 않은가. 따라서 부침이 있다 해도 기존 국가인권기구의 존재를 수호하고, 그 활동의 연속성을 확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현재의 국가인권위원회가 어찌됐든 우리 인권시민사회(운동)의 귀중한 자산임을 인정하고 지속적인 관심과 애정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돌이켜볼 때 우리 현대 헌정사는 군사독재와 민주주의의의 나선형적인 발전을 이뤄왔다. 민주정부 10년의 역사를 부정하고 이명박 정권의 출범에 지지를 보낸 다중의 선택을 상기해보라. 국가인권위원회의 오늘의 치욕 역시 국가인권위원회의 큰 역사를 구성하는 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 일희일비할 것이 아니라 주어진 한계 속에서라도 할 일을 찾고, 그것이 인권의 가치에 역진하지 않는 내용인 한 자긍심과 사명감을 갖고 임하도록 유인하여야 한다.
세 번째, 인권위 밖에 진지를 구축해야
공동체보다는 개인의 성취와 가치가 앞서고 배타적인 사적 욕망을 드러내는 데 부끄럼이 없는 이 시대에 공공의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일한다는 것은 영광이기 이전에 천형(天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자신의 소명으로 여겨 충직하게 일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그나마 우리의 희망적인 미래를 그려 볼 수 있다. 비단 국가기구로서의 국가인권위원회 구성원뿐만 아니라 시민사회에 종사하는 많은 전문가, 활동가 역시 그런 의미에서 존중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이러한 존중은 공공영역이 요구하는 사명을 ‘제대로’ 수행할 때 비로소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존재 자체로서 정당화 될 수는 없다. 최소한 ‘밥벌이의 숭고함’을 내세운다 하더라도 그것은 사적 영역에 국한된 것이지, 공공영역에서는 개인이든, 집단이든, 조직이든, 부여된 소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채 자기(또는 자리)보존에 급급해한다면 이미 그 존재근거가 소멸되고 만다. 누구나 인정하듯이 오늘 국가인권위원회는 우리 사회가 요구하고 있는 인권의제들에 제대로 대응을 못하고 있다. 부여된 소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 원인은, 외부요인으로서 인권이라는 가치에 대해 도대체 개념 없는 이명박 정권과 그 청부업자 역을 자처하는 국가인권위원회의 현 위원장을 비롯한 일군의 인권위원 등 지도부 탓일 수 있으나, 그 못지않게 내부요인, 즉 현 상황을 타개하고자 하는 인권시민사회 진영의 총체적 전략부재 역시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이다.
필자가 주목하고자 하는 부분은 바로 이 내재적 요인이다. 오늘의 위기를 초래한 내재적 요인이 무엇인지 분석하고, 이에 대한 해답을 찾는데 있어서 문제영역을 단지 국가인권위원회라는 단위에 국한하지 말고 인권시민사회 진영 차원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본다면 국가인권위원회의 위기극복은 인권시민사회 진영의 역량을 전략적으로 재배치하고, 자력적인 실천을 도모하는 가운데 찾을 수 있다. 눈앞의 전투에만 급급할 것이 아니라 구덩이를 파서 안정적이고 일상적인 애드버커시(advocacy 생각, 노선, 신념 등에 대한 공개적 지지 또는 변호)로서의 역할을 찾자는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에 버리고 가자는 것이 아니라, 또한 국가인권위원회가 형해화 되어가는 국면에서 무기력하게 그저 바라볼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국가인권위원회의 내부구성원을 포함한 인권시민사회 진영 내부의 효율적인 전략배치를 새로이 재구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추락은 이미 밑바닥까지 다다라서 이제 새로운 단계의 대응을 요구하고 있다. 더군다나 이 국면이 가까운 시일 안에 해소될 조짐이 없는 상황에서 인권시민사회의 역량의 집중 정도를 적절히 재조정할 필요가 있다. 보다 긴 호흡으로 중장기적인 비전을 실제화 시키기 위해 국가인권위원회 밖에 안정적인 정책참호를 구축하는 일이 필요하다. 민간차원의 인권전문 싱크탱크와 같은 연구기관을 설립하자는 것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인권시민사회의 토대를 튼실히 하는 것이자, 설혹 훗날 국가인권위원회가 정상화된다 해도 정책과 의제경쟁을 통해 더욱 진취적인 방향으로 국가인권위원회를 견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인권시민사회의 위기, 혹은 기회
혹자는 개헌을 통해, 또는 국가인권위원회법의 개정과 같은 제도적 보완을 통해 독립성을 구가할 수 있다고 주장할지 모르겠으나, 현재의 입법 환경을 감안할 때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도 아니고, 또 만에 하나 요행히 제도보완이 이뤄진다 해도 여전히 내부로부터 무너진 독립성(역시 주체 역량의 문제다)을 복원하는 문제는 또 다른 차원에서 별개의 숙제로 남는다. 따라서 이 위기를 단순히 국가인권위원회를 둘러싼 정치상황의 변화, 요컨대 이명박 정권과 현병철 체제 때문에 초래된 것만으로 보는 관점을 넘어서야 한다. 여기에 현재 국가인권위원회 사태에 대한 분석과 평가의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다.
위기타개를 위한 올바른 실천전략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주체요인에 대한 엄격하고 냉정한 시선을 거둬서는 안 된다. 인권시민사회 진영은 실천을 위한 단단한 연대의 틀을 갖추었는지, 국가인권기구에 대한 종합적인 마스터플랜을 가졌는지, 인권기구 운영에 대한 모니터링과 분석, 평가 등은 치밀하게 이뤄졌는지, 그 경험과 시행착오에 대하여 환류 시스템을 구축하였는지, 인권담론과 의제의 생산과 관리에 이론적 지도력을 발휘하였는지, 인권기구의 토대를 튼실히 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꾀하였는지 등에 대한 가혹한 평가와 분석이 이번 기회에 종합적으로 이뤄져야 할 것이다. 이와 별개로 지금 당장 해야 할 일도 있다. 예컨대 “독재라도 할 수 없다”는 저질스런 현병철 위원장의 발언도 속칭 ‘마사지’를 통해 전원위원회 속기록에서 삭제된 사례가 잘 말해주고 있듯이 저들은 오늘의 행태가 정확하게 일일이 기록되는 것을 꺼려한다. 기록마저 왜곡되고 마사지되는 사태가 재연되지 않도록 국가인권위원회 모니터링을 더욱 면밀히 하는 것은 역사적 기록물을 축적한다는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한편 인권시민사회가 국가인권위원회 활동에 참여하여 그 운영의 주도성을 발휘할 수 있는 방안을 제도적으로 강구해야 한다. 지난 시기 국가인권위원회 활동을 돌이켜보면 인권시민사회와의 소통이 원활하기는커녕 형식적인 소통이나 불통이 다반사였으며 이는 곧 인권기구의 자기기반을 스스로 허물어뜨리게 만드는 요인으로 귀결되었다. 협치란, 명실공히 기획, 집행, 분석, 평가 등의 전 과정에 인권시민사회가 참여함으로써 그 의미가 완성된다. 해마다 개최되는 국가인권위원회 사업계획 간담회만 보더라도, 일방적으로 설명을 듣고 이에 대한 파편적인 코멘트로 진행할 것이 아니라, 사업 분석과 평가를 기반으로 도출된 차기년도 전략적 집중과제에 대해 인권시민사회 진영과 밀도 높은 교호를 통해 전반적인 사업계획의 틀을 잡는 방향으로 전환시켜야 한다. 이것은 단지 사업영역, 요컨대 정책, 교육, 조사, 홍보, 협력 등의 업무에 국한되어서는 안 되며, 인사와 조직, 예산 및 결산, 위원회의 운영 등을 망라하여 관철되어야 한다.
더 구체적으로 보자면 사무처 직원의 인사 및 직제의 변경, 업무영역의 조정에도 인권시민사회의 개입이 필요하며, 예산계획의 합리성 및 결산의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도 수시로 설명회를 개최하도록 할 것과, 청문회나 후보추천위원회와 같은 위원장/인권위원 선임절차의 보완과 함께 속기록 작성과 같은 위원회 운영의 투명성 확보방안 등이 마련되어야 한다. 그 가운데 특히 대통령 특별보고의 권한행사는 인권시민사회와의 밀접한 조율 가운데 진행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와 같은 과정이 원활히 진행되어야만 비로소 국가인권위원회가 진정한 의미에서 인권 거버넌스로서의 자기 역할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위기는 곧 기회라는 말이 있다. 오늘의 위기를 국가인권위원회 출범 10년 동안의 엇나간 관행을 바로잡는 계기로 삼는다면 향후 최소한 시행착오는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이제 판을 새로 짤 필요가 있다. 국가인권위원회를 살리기 위해서 국가인권위원회 밖에서 인권시민사회의 노력이 필요한 때이다. 
  
국가인권위원회, 죽거나 나쁘거나 (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 48호 | 2011년 1-2월호, 한상희 |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1.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해 12월 27일 ‘국무총리실의 민간인 사찰 진정사건 조사결과 보고’라는 제목의 안건을 각하했다. 2010년 7월 7일 국무총리실의 불법적인 사찰로 인해 전 인생이 파탄 난 김종익 씨 측의 호소를 6개월이 넘게 유기하고 있다가 종국에는 심리조차 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했다. 정국을 뒤흔들었던 민간인 사찰 사건은 역사의 뒤안길로 떠밀리게 된 것이다.
민간인 사찰은 국가폭력의 위력을 극대화시키는 최고의 장치다. 일반추상성을 지향하는 법과는 달리 폭력은 개별적이고 구체적으로 행사된다. 그래서 법과 폭력, 이 두 개가 결합할 때 엄청난 시너지효과가 발생된다. 여기에다 잔혹한 폭력이 언제 어디서든 그리고 누구에게나 현실화될 수도 있다는 위협이 모든 사람에게 인식될 때 그 폭력은 만능의 위력을 갖게 된다. 민간인 사찰은 그 밀행성·잠행성으로 인해 마치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이 말하는 판옵티콘(Panopticon)처럼 공포를 일상화시키고 폭력을 절대적인 것으로 만든다. 자기가 감시의 대상인지 여부조차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감시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일상 모두를 폭력의 주체에 종속시켜 버린다.
이런 민간인 사찰을 국가인권위원회는 시간이 경과되었다는, 그리고 수사가 진행 중이라는 형식상의 이유로 방기해버렸다. 진정인 뿐 아니라 전 국민을 잠재적 피해자로 만들고 그들의 모든 일상생활을 권력의 의지에 굴종하게 하는 민간인 사찰의 폐해를 오불관언(吾不關焉)의 태도로 내팽개친 것이다. 그리고 이 각하결정으로 국가인권위원회는 그 존재의미를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전체주의에서의 인간성 말살이나 권위주의 정권의 압제가 하나같이 이런 밀행적 사찰에 기반을 둔 것이었음을 인지한다면, 그래서 이 사찰이 모든 인권 억압의 출발점임을 인식한다면 국가인권위원회의 이 결정은 그 자체로 국가인권위원회가 ‘인권’의 기구로 존재하기를 포기하였다는 의사표시에 다름이 아니다.
1993년 비엔나에서 개최되었던 유엔 세계인권대회에서 ‘국가인권기구의 설립과 운영에 관한 원칙’을 선언하고 우리나라 민간단체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가 인권법을 제정하고 국가인권위원회의 설립을 요구하기 시작한 때로부터는 17년, 그리고 2001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우여곡절 끝에 그 존재를 드러낸 때로부터는 10년이 채 되지 못하여 시나브로 그 존재가 지워지고 있는 중이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래 국가인권위원회를 형해화하기 위해 시도되었던 수구세력들의 이런저런 계책과 음모들이 이제 그 위력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길게는 국가인권위원회 설립 자체에 딴지를 걸던 법무부로부터, 여전히 시민사회의 탈정치화를 주류전략으로 삼고 있는 보수적 정치집단들, 그리고 국가인권위원회의 존재로부터 직접적인 위협을 느껴왔던 수구적 정치세력의 합작이 아직 신생의 상태를 벗어나지도 못한 국가인권위원회를 식물기구로 만들어놓은 것이다.
2.
애당초 1993년부터 공대위를 중심으로 한 시민사회가 국가인권위원회 설립을 종용한 이유는 다름 아니다. 권위주의체제로부터 어렵게 이루어낸 민주화의 성과를 더욱 공고히 하자는 것, 즉 절차적 혹은 선거제 민주주의의 성취에 불과했던 1987년의 성취에 그 실질을 불어넣자는 것일 따름이었다. 국순옥 선생의 말처럼 수직적 권력의 문제인 주권을 수평적 인권개념으로 통제하지 못하면 그것은 더 이상 민주주의일 수 없음을 우리 시민사회는 직관적으로 포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1987년의 지향이 민주화라고 한다면, 그 민주화는 인권으로 충만된 절차, 인권으로 향도(嚮導)된 정치, 인권으로 통제된 권력을 이루어낼 수 있을 때 비로소 의미 있는 것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이 그 바탕을 이루었다.
설립운동 초기부터 국가인권위원회의 독립성과 실효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하는 것이 초미의 관심사가 된 까닭은 이 때문이다. 인권의 집행기구로서 국가인권위원회는 정치와 권력으로부터 독립할 뿐 아니라 그것을 유효적절하게 통제할 수 있는 기구여야 했다. 국가인권기구의 설립에 관한 UN 핸드북에서 국가인권기구의 성격을 ‘사법적’이거나 ‘입법적’인 것이 아니라 좁은 의미에 있어서 모두 ‘행정적’이라고 규정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국가인권기구는 국가권력이나 국가주권에 의해 창조되거나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인권을 국가에 대하여 ‘집행’하는, 국가 내에 존재하는 국가외적 기구인 것이다.
사실 87년 체제가 직면하는 권력의 문제는 복합적이다. 해방 이후 과도하게 성장한 우리나라 국가체제에서 국민의 전 생활을 억압했던 권위주의적 권력이 물러나간 그 빈자리를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의 문제는 민주화의 실체를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였다. 이론적으로야 시민사회의 위상이 제대로 확립되어 진정으로 민주적인 국가공동체를 구성해내는 것이 옳다. 그렇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그렇게 되지 못했다.
우선 시민사회는 여전히 정치로부터 경원의 대상이었다. 87년 체제 자체가 기존 정치권력과 시민사회의 타협의 산물이었던 터에, 게다가 3당 합당의 형태로 진행된 보수 세력의 야합은 권위주의적 통치의 잔재를 온전히 보전하게 만들었고, 그에 이은 정권교체 역시 48년 체제로 특징 지워지는 반공체제의 편향된 정치구조를 혁파하는데 필요한 동력을 충분히 확보할 수 없었다. 건국 당시부터 시민사회를 부정하며 오히려 시민사회 위에서 군림하는 우리의 정치체제가 한두 번의 정권교체만으로 불식될 수는 없었다.
또한 이런 판국에 불균형하게 급성장한 경제력은 정치권력에 의한 억압에다 경제권력, 자본권력에 의한 억압을 가중시켰다. 당연히 권력의 공백은 재벌과 투기세력 그리고 토건세력들로 채워졌다. 제5공화국 당시 국제그룹이라는 재벌도 대통령 말 한 마디로 해체되던 것이 민주화 이후에는 재벌의 총수와 그 아들까지도 대통령에 출마하는 상황으로 바뀐 것이다. 더불어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는 금권통치를 정당화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주택 200만호 건축→세계화→IMF 극복 및 구제금융→FTA→4대강 공사 등으로 흘러가는 일련의 이벤트들은 자본이 우리의 일상을 억압하는 공적 권력으로 전이하는 통로가 되었다.
하지만 권위주의적 권력이 남긴 공백은 관료제의 약진 없이는 온전히 충전되지 못한다. 정치권력의 약화는 그를 숙주이자 숙적으로 삼았던 관료들에게 무엇보다 좋은 기회가 되었다. 중앙정보부나 안전기획부의 쇠퇴와 더불어 최대의 권력기관으로 급성장한 검찰이 그 대표적인 예다. 또한 무슨 무슨 마피아로 불리며 장관 길들이기까지도 서슴지 않는 정부부서의 행태들 또한 마찬가지다. 권력이 법으로 포장되어야 하는 것이 선거제 민주주의가 표방하는 법치의 외연이라고 한다면, 관료들은 이 법의 이름을 어떤 때에는 정치권력에게 또 다른 때에는 자본권력에게 빌려주고 그럴듯 하게 포장하면서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해온 것이다.
3.
우리 사회에서 인권을 향한 요청은 바로 이런 상황으로 인해 더욱 절실하다.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권위주의체제가 물러났다고 해서 인권이 덜 침해되거나 혹은 그 침해 정도가 더 연성화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권침해의 주체가 더욱 다양해지고 그 침해 양상이 더욱 정교해질 따름이다. 대법원에서 확정판결이 내려졌음에도 작업장에서 내몰리는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의 문제가 그렇고, 기존의 생활가치를 보전하고자 노력하던 용산 철거민들의 처지가 그러하다. 식량과 위생의 주권을 외치던 촛불집회는 군인들의 동성애처벌조항 철폐를 외치는 주장과 맥을 같이 한다. 다양한 삶의 요청이 안보와 질서라는 이름으로 혹은 개발과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억압당하고 왜곡당하며 질곡에 머물기를 강요당하는 것이다. 그리고 관료들은 법의 이름으로 이런 억압과 왜곡을 정당화한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존재는 여기서 당위가 된다. UN인권위원회의 「파리원칙」(1991)은 국가인권기구의 기능으로 인권에 관한 법제도와 정부정책에 관한 자문기능, 일반 대중에 대한 교육기능, 그리고 인권침해에 대한 조사기능을 든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기능은 국가공동체의 모든 가치지향들이 인권이라는 최우선적 가치를 향해 끊임없이 조정되고 그 안에서 통제될 수 있도록 만들어가는 것에 있다. 혹은 인권의 핵심가치로 규정되는 인간 또는 인간됨 그 자체가 궁극의 가치로 작동해나갈 수 있는 체제를 구성하는 것이 인권기구의 중심기능이 된다.
2001년 출범한 국가인권위원회는 그 불완전성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국가인권위원회가 직면하고 있던 숱한 장애에도 불구하고 이 점을 우리 역사상 최초로 공식화하였다는 데 큰 의미를 가진다. 안보나 성장이 아니라 인권이 최우선적 가치이며, 국가도 민족도 아닌 개개의 인간 그 자체가 최고로 존엄한 존재임을 모든 국민들에게 각인시킨 것이다.
그래서 1987년의 변화가 선거제 민주주의의 확립을, 1989년의 헌법재판소 설치가 입헌주의의 확립을 의미한다면, 2001년의 국가인권원회 설치는 우리나라가 인권국가로 자리매김하는 중요한 전기를 이룬다. 위헌성 논란에도 불구하고 소속 없는 국가기구가 됨으로써 국가 밖에서 국가를 통제하는 국가 안의 진지를 확보하고, 국회와 대통령, 대법원이 골고루 참여함으로써 불완전하나마 정파적 분할을 완화할 수 있는 인선방식을 채택하고, 경색된 사법절차를 버린 채 누구나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자유로운 진정체제와 공개적인 심의구조를 둠으로써 접근성과 탄력성, 공개성과 책무성 등 인권의 필수요소로 거론되는 절차적 특징들을 비교적 온전히 구성해냈다.
더러는 대통령에 대한 국정보고의 문제라든가 상임위원회와 사무처의 관계 등과 같은 몇몇 지엽적인 문제의 시시비비가 나오기는 했지만 그런대로 국가인권위원회의 구성이나 작동, 그리고 접근성이나 유연성 등의 측면에서는 별다른 하자 없이 나름의 효과를 발휘해왔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사립여자대학교의 독신조항을 폐지하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는 것을 출발점으로 사형제와 국가보안법의 폐지를 권고하고 테러방지법의 제정 움직임에 제동을 거는 한편,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하고 대체복무제의 도입을 촉구하거나 사생활 침해의 우려가 많은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의 개선을 권고하는 등 우리 사회 가장 민감한 부분에 대해 인권이라는 척도가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지를 실천적으로 제시해왔다.
뿐만 아니라 공무원이나 사원을 채용할 때 키나 몸무게, 용모, 연령, 학력 등을 조건으로 내세우는 것은 차별에 해당한다고 판단하고, 학생의 두발을 통제하고 일기검사를 실시하는 것, 학교 안에 우열반을 두는 것은 인권침해라고 결정하는 등 일상생활에서 발생하는 인권침해의 양상들을 지적하고 인권침해는 국가뿐 아니라 우리 자신에 의해서도 가능함을 공표하는 역할 또한 수행해왔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국가인권위원회의 역할은 그 담론 형성의 기능이다. 상당히 많은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들은 국가기관이나 기업체들에 의해 묵살되고 간과된 것도 사실이다. ‘권고권’이라는 것이 실제로는 아무런 권력일 수 없는, 무의미성의 권한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인권위의 존재는 많은 권력들에게 견제와 경원의 대상이 되어왔다. 인권의 담론이 권력의 대항담론으로 유효하게 기능할 수 있음을 시민사회에 널리 공표하는 기능을 수행해왔기 때문이다. 국가인권위원회의 결정 하나 하나는 대중매체를 통해 모든 시민들에게 전달되며 권력이 내세웠던 그 모든 판단기준의 상위에 인권이 존재하고 있음을 모든 사람들에게 주지시키는 귀한 역할을 수행해왔던 것이다.
이런 역할은 정치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의제설정 투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안보나 성장과 같이 지금까지의 권력들이 의존해왔던 토대 자체의 정당성을 심각하게 훼손시키는 동시에, 보다 가치정합적인 대안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확인하며 그 대안이 유효한 정치의제로 다루어질 수 있는 또 다른 장을 구성함으로써 인권정치의 가능성을 크게 열어놓게 된다. 국가보안법에 관한 논의만 하더라도 국가 내 기관으로서는 최초로 그 위헌성을 공식화함으로써 시민들의 의식 확장에 기여했다. 진보적인 사람들마저도 연평도 포격사건이 일어나자 정치수뇌부에 병역미필자가 많아서 제대로 된 대응을 못한다고 비판할 만큼 군사문화가 내면화된 우리 사회에서, 양심적 병역거부 행위도 인권의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있음을 선언한 것은 모두가 ‘예견하고 기다리던 충격’에 다름 아니다. 살색에 관한 차별결정은 인권은 우리 상식조차도 의심하여야 한다는 점을 재확인시켰고, 학생인권에 관한 결정들은 이 사회에 무의식으로 편재하는 숱한 억압들을 다시 끄집어내어 재 정치화하는 중대한 계기들을 마련했다.
이런 과정들을 통해 국가인권위원회는 민주주의의 공고화를 촉진한다. 수직적 권력의 담론들을 수평적 인권의 담론으로 여과해 냄으로써 진정한 민주주의를 일구어내며 그 민주주의의 일상화, 편재화를 도모하는 것이다. 물론 국가인권위원회의 본래 목표는 의당 인권 그 자체의 실천이겠지만, 권위주의체제로부터의 이행과 더불어 48년 체제가 가지고 있던 반공과 보수라는 이념적 편향성마저도 털어내며 다양한 삶이 다양한 모습으로 정치화되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실현 또한 국가인권위원회의 존재이유로 구동되고 있는 것이다.
4.
너무도 미약한, 그래서 무시하면 그뿐인 국가인권위원회가 오늘과 같은 지경에 처하게 된 것은 이런 정치역학에 기인한다. 수직적인 권력담론에 틈을 내고 그 결을 거슬러 새로운 대항담론을 구성해내는 능력, 그것이 인권의 힘이며 또 국가인권위원회의 역할이다. 그리고 보수적인 정치세력들이 국가인권위원회가 가지고 있던 태생적 한계들을 암세포처럼 증식시켜 국가인권위원회를 무너뜨리는 트로이 목마로 활용하게 되는 이유도 이런 국가인권위원회의 사실상의 권력이 못 마땅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국가인권위원회는 출범 당시부터 정치권의 이해부족과 법무부를 중심으로 하는 법관료들의 조직이기주의 그리고 대중적 무관심이라는 커다란 장벽에 부딪혀 어쩔 수 없는 타협 속에서 법제화와 조직화의 과정을 거쳐야 했다. 그 중에 가장 크게 나타나는 한계가 국가인권위원회의 조직구성 방식이다. 원래 국가인권기구의 구성은 민주성과 책무성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에 관한 파리원칙은 “인권을 위해, 인종차별에 맞서 활동하는 비정부단체, 노동조합, 관련 사회 및 직능단체, 사상 및 종교단체, 대학, 전문가들, 의회, 정부부처의 참여를 보장하는 절차에 따라” 국가인권기구를 구성하라고 요구했다. 인권의 보장과 증진에 관여하는 다양한 시민사회들의 참여가 국가인권기구를 조직하는데 기반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국가인권위원회법은 이런 권고를 일언지하에 배척해버린다. 대통령, 국회, 대법원이라는 인권의 대척점에 존재하는 국가기관만이 국가인권위원회 구성에 관여할 수 있을 따름이다.
여기서 권력분립의 틀에 따라 다양한 국가기관이 참여하고 또 국회의 추천에서는 여당과 야당이 분점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으니 나름 민주적이지 않느냐는 주장은 아무런 실체도 없는 반론에 불과하다. 애당초 우리의 헌정체제는 1948년 출범 당시부터 좌익척결을 기치로 진보진영을 소탕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졌으며, 가뜩이나 활성화되지 못한 시민사회는 철저하게 국회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과정에서 배제된 채 과대 성장한 국가에 의해 획일적으로 통제되어왔다. 그 결과의 하나로 아직도 국회의원의 당선여부는 시민사회와의 연계성이 아니라 계파보스와의 관계 혹은 중앙당의 공천여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3권 분립이라는 형식에 맞춘 국가인권위원회의 구성은 그 자체 형식적일 수밖에 없다. 시민사회와는 완전히 단절된 채, 저들에 의해서 저들만의 의지와 전략을 가지고 지명되거나 임명되는 사람으로 국가인권위원회가 구성될 뿐이다.
이 점은 대통령이 바뀌었다고 국가인권위원회의 성격 자체가 바뀌게 되는 현재의 상황만 보더라도 잘 알 수 있다. 인권위원의 인선과정은 시민사회의 철저히 분리되어 손쉽게 임명권자 혹은 지명권자의 입맛에 부합하는 사람으로 인권위원을 만들 수 있으며, 따라서 현실정치에서의 세력분포는 그대로 국가인권위원회에서의 세력분포로 이어지고 그 결과 정치로부터의 독립은 요원한 환상에 불과하게 된다. 오히려 국가인권위원회 그 자체가 현실정치의 복제판으로 그들의 투쟁을 대신하는 또 다른 정치판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또 다른 한계는 국가인권위원회가 그 존재목적에 어울리는 독자적인 인권규범을 구축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통상적으로 인권의 요청은 헌법의 기본권 요청과 상당부분 중첩된다. 그러다 보니 국가인권위원회가 다루는 사안들을 인권의 논리가 아니라 헌법의 논리로 접근하기 쉽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국가 밖에서 혹은 국가를 넘어서는 지위에서 인권을 보장하고자 설립한 기구가 국가의 헌법논리에 함몰되어 오히려 국가 안으로 끌려들어가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서울시가 추진하였던 은평 뉴타운 개발 사업에 관한 주민들의 진정을 법과 절차를 준수했다는 이유로 기각한 국가인권위원회의 태도가 그 전형적인 예다. 기각결정에서 이 사업이 열악한 주거환경을 개선하고자 하는 공익에 봉사하며 광범위한 주민 의견수렴과 동의절차를 거쳤기 때문에 인권침해가 아니라고 한 것은 헌법판단에 불과할 뿐 인권판단에는 전혀 미치지 못한다. 해당지역 주민들의 주거권이나 생활권, 환경권, 나아가 생활가치의 복원에 대한 권리와 같은 인권사항들이 이 조치들에 의해 어떻게 변경되었으며 어떻게 침해되었는지를 국가인권위원회는 우선 판단했어야 했다. 이러다보니 국가인권위원회가 경우에 따라서는 헌법재판소의 선례들을 학습하는 사례연습기구라는 비아냥도 나온다. 법률뿐 아니라 헌법 혹은 헌법해석까지도 그 판단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 국가인권위원회가 오히려 헌법 해석의 틀에 스스로를 묶어둠으로써 인권의 해방성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는 한계를 자초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상황 또한 예견되었던 것이다. 인권위원의 자격을 법률가 특히 변호사에게 개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오히려 법률가 집단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국가인권위원회를 구성하고 또 운영해 왔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법률가의 양성체제를 미루어보면 잘 알 수 있듯이 법률가는 실정법의 해석과 적용에 대한 관료적 훈련만 받아왔을 뿐, 인권에 관한 체계적이고 집중적인 교육과 인권감수성의 함양은 오로지 개인의 열정에만 의존하여왔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인권위원회의 구성과 운영이 상당부분 법률가에 의해 이뤄진다는 것 그 자체가 실정법해석의 수준으로 국가인권위원회의 활동을 한정하겠다는 의지에 다름이 아니었다.
이 점은 다시 오늘날 국가인권위원회 폐해를 극단에까지 치닫게 한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출범한지 10년이 다가옴에도 독자적인 인권판단의 기준을 정립하지 못하고 헌법의 해석론이나 헌법재판소 결정기준들에 의존하는 한편 인권과 인권법의 구분 혹은 인권과 기본권의 구분조차도 명확히 하지 못함으로써 우리나라 인권레짐 자체의 안정화를 도모하는데 상당한 한계를 보여왔다는 것이다. 만일 그동안 국가인권위원회가 독자적인 인권기준을 확립하고 이로써 헌법과 헌법재판소 결정 그리고 입법행위까지 유효적절하게 통제할 수 있었다면, 오늘날의 경우처럼 그렇게 쉽사리 국가인권위원회가 장악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가 없다.
5.
최근 많은 사람들이 국가인권위원회를 떠나갔다. 두 명의 상임위원이 사퇴했고 한 명의 비상임인권위원도 그 뒤를 따랐다. 전문위원이나 자문위원 등 국가인권위원회를 보좌하고 협력하던 많은 사람들도 또 그러했다. 현 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 기구축소 운운 하며 흔들어대던 바람에 이제 퀭한 간판만이 겨우 남아있는 국가인권위원회는 자신의 존재이유조차 스스로 부정한 채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양자택일 수순으로 접어들고 있다.
그리고 이런 판국에 국가인권위원회의 사망선고를 하기도 전에 그의 재활용 여부를 논하는 것은 너무도 성급한 일이다. 물론 재활용의 방법이야 다양하게 열려 있다. 대대적인 수리가 선행되어야 하며 이에 대한 정치권은 물론 경제 권력의 각성까지도 이루어져야 한다. 인권이 무엇이며 그것이 다른 어떠한 국가가치보다도 우선하는 것이라는 전 국가적 합의 또한 도출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새로운 각오로 대한국민 인권선언 정도를 선포하는 것도 좋은 방안이 될 것이다. 혹은 헌법을 개정해서 국가인권위원회를 헌법기관으로 만들고 그 인권선언을 헌법의 전문에서 끌어들여 국가인권위원회의 행위준거로 삼도록 규정하는 한편, 형식적인 권고권뿐 아니라 시정명령권과 같은 실질적 권한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참 좋은 희망사항이다.
기왕에 꿈을 꾸는 김에 조금 더 나아가보자. 국가인권위원회 구성은 국가인권위원회가 제대로 자리 잡게 하는 키워드다. 하지만 지금처럼 3대 국가기관이 나누어 먹기 식으로 쪼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오히려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가 선출하거나 아예 국민들이 선거로 선출하는 방식을 취하는 것이 좋다. 물론 후자의 방식은 이러저러한 난점들이 존재할 수 있으므로 제외한다면 현재로서 최선의 방식은 국회선출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다수결의 원칙을 고수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인권은 다수자의 의사에 대한 소수자의 자기주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권위원의 선출은 2차에 걸쳐서 이루어지도록 할 필요가 있다. 1차는 인권위원의 절반에 대하여 국회 본회의가 일반의결정족수에 따라 선출한다. 나머지 절반에 대해서는 2차의 선출절차를 따르되 여기서는 ①원내 제1당은 배제되며 ②나머지 의원들은 원내교섭단체(제1당의 원내교섭단체는 제외) 또는 이 목적을 위해 일정수 이상의 의원들이 연합한 의원단체가 동일한 의결권을 가지고 합의한 명부를 대상으로 투표하고 그 결과에 의해 인권위원으로 선출한다.
예컨대 현재의 의석분포로 보면, 인권위원의 절반은 국회 본회의에서 일반의결정족수에 따라 선출한다. 나머지 절반의 인권위원 선출과정에서는 원내 제1당인 한나라당 의원들은 전혀 관여할 수 없다. 그 의원들을 제외한 원내교섭단체들(현재는 민주당 1개뿐) 또는 의원연합(가령 그 연합에 필요한 의원수를 5명 이상으로 한다면 자유선진당이나 미래희망연대등은 독자적인 구성이 가능할 것이며,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 등은 연합하여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등이 각각 1단체 1표의 의결권을 가지고 인권위원 후보자 명부를 구성하고 이를 한나라당 의원들을 뺀 나머지 의원들의 투표에 의해 그 선임을 확정한다(물론 이렇게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원내 다수당 특히 제1당과 제2당간의 야합을 막기 위함이다).
또 다른 희망사항으로는 이런 국회의 선출과정에 시민사회의 항시적인 참여가 열려있어야 한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는 두말할 나위도 없으며 인권위원의 추천 혹은 검증을 위한 시민추천위원회나 시민검증위원회의 구성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런 희망사항들은 지금으로서는 너무나 멀리 있다. 고사하고 있는 국가인권위원회를 바라보아야 하는 현재 상황에서 그냥 하나의 꿈이거나 아니면 또 다시 수많은 땀과 눈물을 흘려야 하는 지난한 과정일 따름이다. 그래서 지금은 꿈꾸기보다는 꿈을 깨는 것이 더 절실해 보일지도 모른다. 더 나빠지기 전에 국가인권위원회에 사망 선고를 내리는 일, 국민고충처리위원회와 권한다툼을 벌이기 전에 국가인권위원회를 국민의 기억에서 지워버리는 일, 인권이라는 숭고한 이름이 그들의 탐욕으로 더 이상 오염되기 전에 국가인권위원회를 ‘살처분’하는 일, 그것이야말로 먼 미래에 그 나마의 국가인권위원회를 재활용할 수 있게끔 하는 유일한 방법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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