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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0

  • 등록일
    2010/08/10 12:36
  • 수정일
    2010/08/10 12:36

어쨌든 현실은존재하는 것들의 조우과 교전이며, 나는 그 틈새에서 실존할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간격을 나의 것으로 올곧게 전유하는 것. 사실상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일어나는 고민들은 완전히 해결되지 못할 것이라는 것도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회피할 것인가? 습관성의 도피. 이것은 가볍게 뛰어 넘을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매순간 그러한 극복의 과정을 반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 이러한 간격에 대한 습성이 교정되고 나면, 이제 권태가 찾아올지도 모른다.

 

사물들, 사람들, 그리고 그 관계성의 총체들. 나는 이 모든 것들을 다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지식이란, 또는 나아가 지혜란 무용지물이다. 무용지물에 대한 사랑. 그것이 철학이고, 철학을 하는 삶이기 때문에 인식 안에는 필연적으로 '덧없는 것들에 대한 회한'이 존재한다. 하긴 스피노자도 이러한 덧없음으로부터 철학을 시작했지 않은가? 간격(또는 괴리), 권태, 그리고 덧없음. 철학을 한다는 것은 이 세 가지 복합적인 삶의 범주들을 똑바로 마주 대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땅에 발을 디디고 하늘을 가리킬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그 반대로 땅에 발을 디디고 심층을 가리킬 수 있을 것인가? 

 

내가 겨냥하는 것들은 매우 높거나, 아니면 매우 낮다. 높을수록 가 닿을 수 없고, 낮을수록 팽팽한 긴장이 느껴진다. 현실성, 그리고 하나의 관념. 실천과 페시미즘. 돌연 내가 하는 모든 행위들이 돌이킬 수 없는 어떤 지점에 있다고 느껴질때 그리고  그것이 시간의 순환 과정에서 임계지점, 나선의 출발지점에 와 있다고 느껴질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내가 나를 가르치는 도제기간은 영원히 도래하는 것이지 한 점 안에 응축되거나, 중심에서 발산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생성의 과정이기에 한 번도 나를 만족시키지 못할 것이다. 한 번도 내 것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내 것이 아닌 사랑들아'(기형도). 그렇기 때문에  회피가 아니라 뒤로 물러 나는 것 이 필요하다. 물러나는 것, 매 순간 이러한 은둔을 적극적으로 행하는 것, 그것이 교전의 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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