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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4/11/13
    void(3)
    레니
  2. 2004/11/12
    잠깐 휴식(6)
    레니
  3. 2004/11/11
    마이페이스
    레니
  4. 2004/11/10
    갑자기 끊어진(17)
    레니
  5. 2004/11/08
    Anger Is A Gift(4)
    레니
  6. 2004/11/07
    반가운 관계(5)
    레니
  7. 2004/11/04
    Today(6)
    레니
  8. 2004/11/03
    디스코디아(7)
    레니
  9. 2004/11/01
    개발자를 위한 그림 강의(6)
    레니
  10. 2004/11/01
    반말의 가치란(4)
    레니

void

 

 

가면 속의 얼굴

위장된 친절함

걱정하는 척하기

습관적인 사과와 반성

returns nothing

 

근데 이런 말들은 너무 진부하잖아? :)

 

요즘 이런 글쓰기 방식에 아주 재미를 붙였군.ㅡㅡ;;
♪ RadioHead - Paranoid Android ♪

 

 

ps. 스트라이프에 대해서 변명을 하자면

     잠을 4시간밖에 못 잔데다

     토요일 오전부터 회사에 불려나가

     20대나 되는 서버를 돌면서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반복작업을 하다보니

     일종의 환각상태에서 글을 쓴 듯.

     지금보니 너무너무 진부하다.ㅡㅡ;;; 부끄러울 정도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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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휴식




여유로움
편안함
안락함
그리고 권태로움



뭐 그렇다고 놀겠단 얘긴 아니고. :)
♪ Blur - Coffee And T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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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페이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난 상당한 마이페이스형 인간이다.
이게 좋다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딱히 나쁘다고 할 수도 없지만
확실하게 말한 수 있는 건
마이페이스란 매우 "편리"하다.는 사실이다.

회사에서 일할 때 이 편리함은 매우 두드러진다.
아마 이런 경향을 띠게 된 것도
회사라는 조직에 있으면서 배운 것일 수도 있겠는데.
기본적으로 업무량을 자신이 잡거나 조절하게 되고
이것이 실패하면 뒷감당 역시 자신이 해야 하기 때문에.
그리고 이 과정에서 그 누군가가 도와주거나
짐을 덜어주기를 기대하기 힘들기 때문에
마이페이스를 유지하는 것이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

하지만 하고 싶어하는, 또는 해야 하는 일을 할 때
마이페이스는 결코 좋은 역할을 하지 않는다.
같은 공동 작업을 하더라도
공동 작업자의 과부하를 나몰라라 할 수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되기 때문에
적절한 페이스 조절이 필요해진다.

게다가 회사에서 매일 있는 일일업무회의 때
무슨 구라를 쳐서 일을 많이 하는 것처럼 보일까.하며
오전 내내 고민하는 나에 비해
공동 작업자들은 평균적으로 훨씬 바쁘기 때문에
마이페이스로 일을 끌고 간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시간이 매우 많이 주어지거나 더 많은 인원이 참여하거나
이건 불가능한 가정이지만 차라리 돈이 매우 많거나 하면
여유를 가지고 나름대로 즐겁게 뭔가를 할 수 있을 텐데.
이런 상황은 길가다가 램프라도 줍지 않으면 발생하지 않을테니.

일단 가장 필요한 것은
집나간 여유라도 어떻게든 귀가시키는 게 아닐지. 하는 생각이 든다.


"아즈망가대왕"의 오사카. 이 표정을 보라.

 

비 온 뒤의 테크노는 좀 안어울리지만
♪ Crystal Method - Busy Chil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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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끊어진

 

마음 속의 무엇인가가

한순간 끊어졌음을 느낄 때

기타를 치다가

갑자기 끊어진 줄에 맞은 듯한

그런 아픔

 

사슴벌레님이 포스트를 안쓰시니. 짝퉁이라도. :)

 

 


♪ RadioHead - No Surpris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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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ger Is A Gift

논쟁이나 토론을 할 때 어떤 사람들은
냉정을 유지해야 한다고 믿는다.
어느 시점에서 감정을 드러내거나 하면
불필요한 것을 논의에 개입시킨다고 비난받기 일쑤고
심지어는 감정을 가라앉히지 않으면
논의를 계속할 수 없다고 하기도 한다.

갑작스러운 감정의 분출이 논쟁의 지속을 막는 경우는
분명 존재한다.
술자리에서 벌어진 뜨거운 논쟁이
결국은 뒤집어진 탁자와 나뒹구는 의자들, 날아다니는 술잔과 함께
비극적인 종말을 맞게 될 때. 이건 물론 극단적인 경우지만.
또한 분노 게이지가 높아지면서 상대의 말을 잘 듣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리하여 "감정은 이성을 마비시킨다"고 믿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게 별로 이상하진 않다.

하지만 이런 근대적인 이분법이 언제나 적용되긴 힘들다.
매우 흥분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논리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며
차분함 속에서도 분노를 드러내며 설명이 가능하다.
이들이 드러내는 감정은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공감대를 불러일으킬 수 있으며
언어로서 드러나는 말 이면의 진실을 설명해 준다.
왜 이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어떤 지점에서 차이가 생성되고 차이를 넘어설 수 있을지.
논리로는 평행선을 달릴 운명이지만. 감정을 이해하면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하여 "감정을 드러낼 때 보다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보다 중요한 것은 말하는 사람와 말하는 바가 분리될 수 없단 것이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똑같은 결론을 똑같은 논리로 똑같은 설명방식을 빌려 이야기 할 때
두 이야기가 받아들여지는 바는 서로 다를 가능성이 높은 것처럼.
논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감정은 논리와 마찬가지로 말하는 그 사람의 일부이고
그 사람의 논리 전개 과정과 논리를 이해하는 것만큼이나
감정에 공감하거나 만약 공감할 수 없다면 감정을 이해하려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건 내가 함부로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분명 아니지만)
성매매특별법 등의 논쟁에서 여성들이 보여주는 분노에 대해
"이성적으로 접근하자"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완전한" 제3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말이다.
큐브 밖에서
관망하며 예측하고 나름대로 상상하여 결론을 내릴 수는 있겠지만
큐브 안의 현실 속에서
얽히고 섥힌 문제들에 대해 분노하는 사람들과 공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짧은 문장을 쓰는 것이 너무나 힘든 게 사실이다. 언젠가 스트라이프를 그을지 모르겠군.)

오히려 제대로 분노할 수 없다는 사실이 부끄럽기도 하고
제대로 분노해 본 적이 있던가라는 의심이 들기도 하고
어쩐지 내가 서 있는 현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누구나 분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전에 "Freedom"을 올려버려서.ㅡㅡ;;; 
♪ Nirvana - You Know You're Right ♪

ps. 역시나 조금 지쳐 있는건지
      요즘 쓰는 포스트들은 하나같이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군.
      내가 봐도 재미없다. ㅡㅡ;;

      하긴. 언제는 또 재미있었냐만은. :)

 

ps2. 글을 쓰고 다시 보니까

      빽빽한 글자의 압박이 장난아니다.

      아 어쩐지 토할 것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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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운 관계

대화를 하면 할수록

서로에게 힘을 주는 사람을 만나면

너무나 반갑다.

 

자기 할 얘기 외에는 도통 관심없는 사람들은

이미 지겹게 만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럴지도 모른다.

 

전부터 얼굴은 알았지만

첨으로 얘기를 제대로 나눠본

한 영상기자가 이런 반가운 케이스다.

 

현실과 비전에 대한 지식과

공감할 수 있는 능력과

가장하지 않는 솔직함과(이것은 상대적일 수도 있지만. 내가 느끼기에)

서로의 얘기를 들을 수 있는 참을성.

 

단잠을 깨운 드릴 소리와 쓰잘데기 없는 트랙백으로 시작한

정말 지지리도 운없는 하루였지만

거의 유일하게 즐거웠던 한 때였다는 점에서

하루동안 지켜봐준 악마에게 감사할 따름이다.ㅡㅡ;;

 

알엠님의 방문자 이벤트에 당첨된 것도

너무나 큰 행운이지.

축하해요! 레니. (자축모드)

 


♪ Blur - End Of A Centur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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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day


The Mysteries of the Horizon, Rene Magritte, 1955

하루종일 뭔가 바쁘게 움직인 것 같은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없는 날.
오늘의 기억은 전부
피곤함과 나른함으로 컨버팅되었나 보다.
뭐 그런 날.


지구가 멸망하면 다 미국인들 탓이다. :)

 

근데 뭐 이런 쓰잘데기없는 포스트가 다 있냐.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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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코디아


캐나다의 자유주의적 전통이 어떤 것인지 보인다.
XP나 위키위키만 봐도 알 수 있겠지만
캐나다에는 자유주의자들이 넘쳐난다.
초반부터 논쟁의 화두가 되었던 "자유로운 연설의 권리"부터 시작하여
(아론은 이 권리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
건물 로비 곳곳에서 얼굴을 들이밀며 논쟁하는 학생들과
자유롭게 부스를 설치하고 정치활동을 펼치는 자치조직들을 보면
개인의 의견을 존중하고 이를 쉽게 드러내는 자유주의적 전통이
전부는 아니지만 중요한 부분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들의 정치는 비전을 보여주지 못한다.
학생회는 임원 회의로 보여지는 회의를 소집하여
단 한번의 표결을 거쳐 "힐렐"을 "활동정지"시키고 "자금동결"을 의결한다.
이 처사가 대내외에서 비판을 받자 학생회는 기자회견을 열었지만
내부의 의견 대립을 드러내는 결과만을 낳았다.
"팔레스타인인권연대"의 사미르는 TV 출연을 결심하지만 결국 이용당한다.
"힐렐"은 매우 "어른스러운" 방식의 대중정치를 수행한다.
활동정지가 결의된 이후. 우호적인 여론을 등에 업게 된다.
유대교 축일 등을 이용해 유대인들의 단합의 계기를 만들고
학생회를 고소하여 법정으로 싸움을 몰고 간다.

그리고 탈정치화된 대중은 어디나 마찬가지다.
엄청난 빅이벤트를 맞아 격렬한 논쟁과 대립이 있었지만
대다수의 학생들이 우려한 것은 "대학의 이미지 실추"로 인한 피해였다.
학생회를 이끌던 "좌파"("lefty"라 나오는데. 사회주의자는 아니다)가 선거에서 패배한 이유도
결국 이런 학내 분위기에 있었다.
콩코디아 대학 역사상 "가장 뜨거웠던" 학생회 선거에 참여한 투표자 수는
30,000명이 넘는 학생 가운데 불과 5,000명이다.

또한 정치는 여전히 남성들의 몫이다.
학생회의 회장은 사빈느라는 여성인데.(이 이름을 찾느라 한참 뒤졌다)
당연히 화면에 많이 잡히고 중요한 위치의 인물로 그려져야 정상이다.
하지만 실제 카메라의 초점은 세 주인공에 맞춰져 있고
사빈느의 생각과 의견과 행동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모든 자치조직은 남성들에 의해 활동이 이루어지고
정치에 무관심한 학생들을 인터뷰할 땐 의례 여성이 등장한다.

인종주의는 당사자가 아니고서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다.
유대인들의 자긍심. 팔레스타인인들의 증오.
텔아비브에서 터지는 폭탄과 가자 지구 상공에 뜬 헬기는
서로 바라보는 거울과 같다.

서로가 서로의 상을 만들어내고 이 상은 무한히 반복된다.
왜 그들은 다른 민족을 증오하는지. 왜 서로를 용서할 수 없는지.
당사자가 아니라면 정말 이해하기 힘들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참 그러고 보니

노암 촘스키가 다큐 중간에 등장한다.

근데 무지하게 뻔한 말을 느릿느릿하는 바람에

약간 실망(뭘 기대한거야)

덧붙여.
Buck 65라는 힙합 뮤지션이 참여한 사운드트랙을 링크하려고 찾아봤지만
도저히 찾을 수가 없다.
오피셜 사이트로 보이는 http://www.nfb.ca/discordia/index3.html
이 곳에서 음악을 들을 수 있다.
단 전부 플래시로 된 사이트라는 점을 주의하시라. :)


* 덩야핑님의 텔아비브 폭발로 5인 사망 30인 부상에 뒤늦게 트랙백~

* 시와님의 {[sidof2004] 이스라엘을 '느낀' 두편의 영화}에도 아주 늦게 트랙백~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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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자를 위한 그림 강의

제길

오후 3시에 일어나는 바람에

새벽 4시인 지금까지 잠이 오질 않는다.

한 번 누웠다가 결국 잠자는 데 실패.

내일...이 아니라 오늘이군

아~주 기대가 된다.

 

회사 노트에 낙서한 것들인데

주로 회의나 세미나 시간에 낙서를 많이 해서 그런지

지금 생각해 봐도 왜 이런 게 연상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 ㅡㅡㅋ

 


Document Object Model(DOM)과 플래시

 

데이터베이스란 무엇인가




내 팔 그림과 난데없는 물고기 :)

 

 



♪ Green Day - Miser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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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말의 가치란

한국어는 우수한 언어라고 어릴 적부터 들어왔는데

다른 건 잘 모르겠지만 존대말/반말은 그다지 좋은 체계라 생각되지 않는다.

물론 양키들의 언어도 나름대로 복잡하겠지만

그래도 나이에 따라 존대하는 것만큼 복잡하진 않을 것 같다.

 

존대말이 일상 속의 권력 관계를 확인시키는 장치 중 하나란 것은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나이 뿐만 아니라 지위, 성별 등에 따라 존대말과 반말을 쓰는 사람이 정해지고

가족 안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TV 속에서, 온갖 관계 속에서

재생산되고 굳어진다.

 

뭐 여기까진 누구나 동의할 만한 말이겠지만

문제는 반말이 과연 "해방적"ㅡㅡ;;이냐 하는 건데

난 반말을 하는 관계를 만드는 것에 대해 일단 긍정적이라 평가하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을 때엔 "경우에 따라 다르다"고 생각한다.

 

많은 여성주의자들이 해 왔던 노력처럼

호칭 대신 별명을 부르고 서로 반말을 사용하며

학교와 학번을 묻지않는 내부적인 룰을 만드는 것

당장 무엇인가가 변하지는 않겠지만

일상 속의 권력관계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데에

충분한 기여를 한다고 생각한다.

 

반면 반말을 사용함으로써 생기는 오해들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고

서로 존대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 역시 존중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로 존대말을 쓰는 관계 역시 평등할 수 있으며

일상의 권력관계를 벗어날 가능성 역시 존재한다.

"반말을 하는 관계" 자체가 더 긍정적이고 평등한 관계라고 볼 수 없듯이 말이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복학생들의 역습처럼 권력관계를 용인하고 강화시키게 되는

권력관계의 재확인 작업을 거부할 수 있는 "확신".

그리고 일상 속의 자잘한 권력관계에 대해

논의를 통해 끊임없이 확인하려는 "귀차니즘의 극복" ㅡㅡ;;;

 

난 아무래도 반말이 좋지만

분명히 그것도 관계 속에서 확인받아야 할 문제가 아닐지.

 

덧붙임 - 여기에 서술한 의견은 기본적으로 내 생각이지만,

           달군논의하면서 수다를 떨면서 받아들인 부분들(이탤릭)이 있음을 밝힙니다.

 

* 현근님의 어랏....저 개념없는 놈....

* 꼬리님의 저 자식은 왜 나에게 반말을 할까?

* 덩야핑님의 반말 (와 pid가 300이어요!!!)

...에 트랙백 합니다.

 


시끄러워요 ㅡㅡ;; play 누르기 전에 조심하시길 :)
♪ Metallica - So Wha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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