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영화 ‘송환’을 봤다. 대전국제문화센터영화관 첫 상영작이라고 우리 노조 홈피에 올라왔는데, 사실은 여기서 섭자영이 근무하고 있어서 꼭 영화보러 오라는 선전도 있었다.

시간은 수욜 저녁에만 남았는데, 그마저도 다른 모임이 잡혀서 영화보기는 포기해야 할 형편이었는데, 다른 곳에서 상이 나는 바람에 모임에 참석할 사람들이 그 상가집으로 가는 바람에 다시 시간이 생겼다. 가는 김에 좀 일찍 가자고 해서 아예 5시 영화를 보기로 하고 가문비, 나무와 셋이서 영화를 보러 갔다.



 

가는 동안에 가문비가 섭자영에게 영화보러 간다고 전화를 했는데, ‘셋이서 봐야 할거 같다’고 하더란다. 도착해 보니 정말 아무도 없는 넓은 영화관(400석은 되지 싶더라) 제일 뒷자리 가운데 셋이서 앉아서 영화를 봤다.

영화를 볼때 마다 잠드는 산오리는 당연히(?) 이날도 초반에 잠들었다. 나무가 “셋이서 영화 보는데 한사람은 코골고, 한사람은 침흘릴 것처럼 잠자더라” 고 해서 누가 코를 골았냐고 했더니 나를 가리킨 걸 보니 코를 골면서 잠잤나 보다.

영화를 보기 전에 주위로부터 주워 들은 영화평도 다양했다. 눈물을 펑펑 쏟았다는 것에서부터 그저 조용하고 차분해서 지루했다는 것까지...

큰 소동이나 놀랄만한, 또는 큰 긴장도 없이 조용하고 차분하게 장기수 선생님들의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었다. 그 당시 언론에서 크게 다루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가족들의 반대로 어머니를 만나게 하지도 못하게 한 김선명 선생의 얘기는 눈물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더군더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직도 가족들이 묘지가 어디 있는지조차 알려주지 않는다는 데서 우리가 얼마나 ‘빨갱이’피해의식에 젖어 있는지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송환을 앞두고 친지들이 모인데서 조촐한 환송자리를 하던 친지들 가운데 한 친지는 감독의 여관방까지 찾아와 각서를 써 달라고 해서 이걸 써 주는 모습이 나온다. 이 장면도 아직까지 깊고 치유되지 않는 상처로 남아 있는 분단의 모습이라 서글픔이 넘쳐났다.

30년, 40년을 전향하지 않고, 자신들의 소신과 신념을 지키고, 다시 사회로 돌아와서도 그 신념을 굳히지 않고 친척과 주위사람들에게 설파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우리는 과연 무엇에 대해, 어떤 것을 하기 위해 저런 신념과 소신을 가지고 있는지 물어보았다. 평소의 삶에서 생활에서 그저 흔들리는 대로, 이리저리 몰리는 대로, ‘시대의 흐름’을 핑계삼아 중심추 없이 살아가고 있는 내 모습이 또 서글프게 느껴졌다.

전향하지 않은 장기수들은 송환되고, 전향했다는 이유로 남아 있는 장기수들을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 주었는데, 전향을 하라고 그 숫한 공작과 폭력이 난무했을 텐데, 그걸 다시 이용해서 보내주지 않는 걸 보면서 언제쯤 우리들에게는 사상의 자유가, 또는 거주의 자유가 주어질수 있을지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가끔씩 보는 다큐멘터리는 볼때 마다 다시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볼때 마다 눈물이 나고 가슴 아픈데, 내가 할수 있는 일은 없고, 그저 마음의 답답증만 더해 가기 때문이다. 또 며칠간의 가슴 아픔이 이어지겠지만, 또 쉽게 이 아픔은 잊어 버리기도 할 것이다.

아직도 감옥에 있는 사람들도 빨리 자유를 얻기를 빌어본다.

 

 

그림 하나 뜯어와 붙이려 하니까 영화관 광고가 되고 말았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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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07 09:52 2004/10/07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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