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친구들 송년회가 성황리에 끝났다. 예상보다 훨씬 많은 250여명의 손님들이 찾아주셨다. 전날 음식을 더 장만하지 않았다면 큰 문제가 발생할 뻔했다. 송년회가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함박눈이 쏟아졌다. 마치 하늘도 아름다운 오늘 이 밤을 축복해주는 것 같았다.

송년회에서 우리 결혼이주여성들은 정말 별처럼 모두 빛났다. 세상에 이들처럼 아름다운 여성들이 또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웠다. 무엇보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당당히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자신감이 이들의 아름다움을 더 빛나게 하였다.

이제 더이상 '나 못해요'라는 기죽은 말투 대신 '나 해요(할 수 있어요)'라는 당당한 말들만 하게 될 것이다. 이주여성들 화이팅!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6/12/17 00:20 2006/12/17 00:20

2006 세계이주민의 날

from migrant 2006/12/11 17:24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6/12/11 17:24 2006/12/11 17:24
극적인 전쟁 장면을 그리기 위해 실제로 참전한 화가
2006/06/20 오후 1:52 | 충격의 현대미술

 오토 틱스(Otto Dix. 1891~1969)라는 독일 화가는 전쟁을 직접 알고, 가능한 한 가장  사실적
방법으로 이를 전달하기 위해 전쟁에 자원 참전하여 벨기에와 프랑스 전선에서 포병으로
근무했다.
그러나 이후 그 경험은 이 화가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고 오히려 강박관념이 되었다.
이리하여 신객관주의파에 대표되는 당시 40대의 오토 딕스의 창조적 상상력은 전쟁이 몽땅
차지해 버리고 말았다.

 * 신객관주의- 실제의 사실, 당시의 사회학적 현상을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로
                     1923년부터 독일에서 미술, 문학 방면에 나타난 새로운 현상

 그는 군인과 학살 장면의 모습을 번갈아 다루었는데 전장에서 그렸던 생생한 생생한 스케치의 뒤를 이어 오랜 시간에 걸쳐 고심하고 공들인 작품들이 제작되었다.

 

 1920~1923년에 그렸던 작품 <참호>에서는 군인들이 진흙탕 속에 틀어박혀 있는 두더지처럼 묘사되었다.
이 그림은 큰 논란을 불러 일으켜 작품을 구입했던 쾰른의 박물관장은 이를 팔았던 화상에게
도로 돌려주기까지 했다.
이후 그는 반전 운동의 일환으로 군인의 인상을 자세히 묘사한 작품집을 출판하기도 했다.
그 후 몇년간은 자신의 아이들 초상화를 주로 그리며 평화로운 시기를 보냈다.

 그러던 그는 다시 전쟁의 악몽에 사로잡혀 뒤러와 중세미술의 영향을 받은 3부작 <전쟁>을
발표했다.



 <전쟁>
 2년 동안 작업해 온 이 작품은 성당의 제대를 장식하는 중세 성화의 형태를 모방하고 있다.
 이 대규모 3부작은 실제로 3부분이 아니고 4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왼편에는 이른 아침 안개 속에서 군인들이 출발하는 장면이 자리잡고 있고,
 가운데는 참호 속에서 벌어진 학살 장면이,
 오른쪽엔 오토 딕스 자신이 군인으로서 부상당한전우를 구하기 위해 부축하고 있는 모습이
 재현되어 있다.
 이 그림은 각각 크기가 2m가 넘는 대규모이다.
 마지막 가운데 그림 밑부분에 길이 2m에 높이는 60cm밖에 안되는 그림이 위치하고 있는데
 이것은 군인이 보내는 하루의 마지막 단계인 전투를 치른 사람들이 기운회복을 위해 수면을
 취하고 있는 장면을 담고 있다.

 이 대작이 완성되기까지는 많은 데생과 수채화가 그려졌다.
그는 모든 것을 세밀하게 작업하였고 여기에 묘사된 것은 군인의 수난기와도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전쟁은 한 군인이 체험한 그대로 내부로부터 보여져 미치광이와 같은 폭력과 파괴의 세계로
표현되고 있다.

   


   

   
 1930년대 독일에서 민족주의가 세력을 만회하고 나치군이 길거리를 점령하고 있던 시점에
오토 딕스는 전쟁의 실체 그대로를 그려내어 전쟁이란 본질적으로 잔인한 것이며 인간에게
미치는 결과는 어리석은 것임을 작품으로 보여주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6/12/08 15:26 2006/12/08 15:26

깜짝 선물

from 아무그리나 2006/12/08 14:30

그동안 세녹스 찌거기가 노즐부위를 막아 덜덜덜 거리던 차가 오늘 아침 갑자기 멀쩡히 달렸다. 너무 감격해 마구 소리를 질렀다. 정비소에서 말한대로 정품 기름을 꾸준히 너어준 덕분인 것 같다. 생각지도 못했던 선물을 받아 든 기분이다. 매일 이런 깜짝 선물이 있었으면 좋겠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6/12/08 14:30 2006/12/08 14:30

중환자실의 사만타씨

from migrant 2006/12/07 00:32
오랜만에 면회를 다녀왔다. 며칠새 팔다리가 눈에 띄게 야위었다. 오늘은 스리랑카 친구들이 많이 왔다. 특히 스리랑카에서 같은 동네에 사는 이웃이 부모님의 부탁을 받고 직접 면회를 왔다.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어서 가져가시도록 했다. 코와 입에 호스를 꼽고 눈을 감은 모습이지만 그래도 가족들에게 보여주어야만 할 것 같았다. 나도 사진을 찍어왔지만 인터넷에 올릴지는 망설여진다. 적어도 가족이 한국에 오면 가족에게라도 물어보아야할 것 같다. 의사는 별다른 변화가 없다는 것 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6/12/07 00:32 2006/12/07 00:32
올해 4월에 입국한 36세의 스리랑카 이주노동자 사만타씨는 지금 백병원 중환자실에 눈을 감고 누워있다. 지난10월28일 밤10시경, 근무를 마치고 옆공장에 있는 친구를 만나다가 옹벽공사를 위해 파놓은 구덩이를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떨어져 머리를 크게 다쳤다.

다음날 스리랑카 스님의 연락을 받고 백병원으로 달려갔다. 사만타씨는 이미 의식이 없는 상태로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뇌출혈과 뇌부종(뇌가 붓는 증상)이 심했다.
사만타씨가 일하던 공장에서는 직원 한 명이 와 있었고 도의적인 차원에서 최대한 책임지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다음날 뇌부종이 더욱 심해져서 급한 수술을 받게 되었을때 회사는 수술동의서 사인을 거부하였다. 언제까지 치료를 계속해야 할 지 모르는 상태에서 회사가 모든 것을 떠안기는 힘들다고 했다. 몇 시간을 쓸모없는 논쟁을 하다가 결국 아친이 보증을 서고 수술동의서에 서명하기로 하였다. 새벽에 끝난 수술은 무사히 끝났고 뇌부종으로 인한 압력을 낮추기 위해 사만타씨의 두개골이 떼어내졌다.

그리고 지난 토요일에 다시 수술을 받았다. 이번에는 1차 수술때 머릿속에 넣어두었던 거즈를 제거하기 위한 수술이었다. 다행히 지난 1차 수술 이후 뇌부종이 조금씩 가라앉고 있어서 생명을 살릴 수 있는 가능성이 훨씬 높아졌다고 의사는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의식이 회복될지, 회복된다면 얼마나 회복될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경험상으로는 이 정도 뇌가 부은 환자가 의식을 회복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했다. 의사는 언제나 부정적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조금씩이나마 나아지고 있기때문에 희망을 완전히 버리기에는 너무 이르다.

오전7시에 한다던 2차 수술은 담당과장이 주말이라 늦게 출근하는 바람에 11시반에야 시작했다. 보호자에게는 10분도 늦어선 안될 것처럼 이야기하더니 정작 의사는 마음대로 늦어도 되는건가? 화가 치밀었지만 수술이 잘 되는 것이 우선이라 참을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 2차 수술도 무사히 끝났다. 수술시간이 예정보다 길어지고 중간에 수혈용 혈액이 들어가는 걸 보고 무척 불안했었는데 다행이었다.

하지만 사만타씨에게는 앞으로 넘어야할 산이 너무나 많다. 두개골을 떼어냈지만 앞으로 뇌부종이 더 가라앉지 않는다면 뇌의 일부를 떼어낼 수도 있다. 지금 매우 독한 약을 계속 투약하고 있어서 간과 신장 등이 허약해지고 있다. 만약 다른 합병증이 발생하면 다시 몇번이고 수술을 해야 한다. 그리고 이번 수술까지는 사회복지기금 등을 통해서 어찌어찌 해결하였지만 앞으로 계속 발생할 추가비용에 대해서는 확실한 대책이 없는 상태이다. 만약 사만타씨가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채 장기입원을 해야한다면 병원측도 그냥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렇게 자국민이 어려운 상황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음에도 스리랑카 대사관측은 너무나 한심스러운 태도를 보이고 있다. 대사관 임대료도 밀려있다며 공장사업주에게 '잘 부탁한다'고 말했단다. 그리고 스리랑카에 있는 가족이 한국에 들어롤 수 있도록 협조하는 것도 늑장대응이다. 이들이 뭐하러 한국에 와 있는지 궁금할 지경이다.
한국정부의 사정도 그리 나아보이진 않는다. 어쨌든 한국에 들어와서 일을 하던 노동자인데 의료보험 적용 외에는 별다른 대책이 없다. 노동자를 위한 장기요양시설 하나 변변한 것이 없는게 한국의 현실이다. 가족중에 한명이라도 장기요양환자가 발생하면 가족 전체가 붕괴되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의료보험은 의료할인제도에 불과하고 보험 본래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 사보험들은 주판알 튕기기에 바빠 이리저리 빠져나가서 결국은 별 도움이 안된다. 입국시 들었다는 삼성생명은 모든 치료가 종료된 후에야 심사 후 보험금을 지급하겠다고 한다.

안전시설 없이 공사를 하는 공장사업주와 건설업자들 그리고 자국국민보호에 관심이 없는 대사관, 변변한 사회복지시스템도 없으면서 '복지병'을 걱정하는 한국정부와 사회때문에 오늘도 건장한 청년 하나가 자신의 운명을 오로지 힘없는 시민단체에게 맡긴 채 저렇게 누워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6/12/04 13:47 2006/12/04 13:47
+ 종합
"가난해도 행복, 바보라서 행복"
방글라데시 독립 미디어활동가 그룹의 '한국에서 희망찾기'
텍스트만보기   김정훈(bielsko) 기자   
만든이 : 김정훈 기자
방송일 : 2006.11.27
방송시간 : 9분 14초
대역폭 :

이른바 방글라데시의 '행복론'은 행복을 간절히 바라는 역설이 녹아있다는 것이 사이드씨의 주장이다. 최빈국 방글라데시의 행복찾기는 최저임금의 인상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이슬람 국가, 높은 인구밀도, 빈곤한 형편, 국내에 들어와있는 방글라데시 이주 노동자.

한국인들의 방글라데시에 대한 일반적 이해는 이 정도다.

선거철이면 수도 다카의 대학 캠퍼스에서 학생 조직간에 총격전이 벌어지는 나라. 거의 모든 방송국 사장은 여당 국회의원들이 꿰차고 있는 나라. 국가 경제를 살찌우는 의류 노동자들의 월급이 2만원을 넘지 못하는 가난한 나라. '남성의 발밑이 여성의 천국'이라는 문화관습이 지배하는 나라. 그럼에도 전 세계적으로 행복지수가 가장 높게 나오는 신기한 나라.

방글라데시의 행복지수는 초현실주의를 공부해도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이런 의문에 고개를 갸우뚱거릴 즈음, 방글라데시에서 온 사이드 무나(32세)씨가 궁금증을 풀어준다.

"바보니까 행복하다고 하는 거예요. 밤새 남편에게 두들겨맞은 여자에게 아침에 행복하냐고 물어보세요. 분명 행복하다고 얘기할 꺼예요. 그게 무슨 행복인지 잘 모르겠지만, 결국엔 행복하고 싶어서 행복하다고 하는 겁니다."

"행복하고 싶어서 행복하다고 하는 거죠"

▲ 다큐멘터리 영화 <21세기>의 한 장면. 11년전 최저임금이 오늘날까지 변함이 없다는 점을 성토하고 있다.
ⓒ Break Through
한국에서 약 10년 간의 이주노동자 생활을 마치고 재작년 고국인 방글라데시로 돌아간 사이드씨가 지난 10월. 그는 석달 일정으로 다시 한국 땅을 밟았다.

이번 방문에서 그의 손에는 쥐어진 것은 산업연수생 비자가 아닌 16분짜리 비디오 필름. 방글라데시 의류 노동자들의 열악한 생활과 악랄한 노동착취 및 임금갈취를 일삼는 의류 공장들의 만행을 고발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21세기>가 그것. 그는 지난 가을 '제1회 이주노동자영화제'와 '제10회 국제노동영화제'를 통해 관객들과 만났다.

"한국에서 노동착취·임금갈취에 맞서 싸웠는데 방글라데시는 착취가 더 심합니다. 마침 아는 누나가 의류공장에서 일하고 있어 그 누나를 통해 노동자들을 만나면서 방글라데시 의류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게 됐죠."

한국에 오기 전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그는 평소 방글라데시의 노동현실에 대해서도 고민이 많았다. 결국 한국 생활을 통해 온 몸으로 터득한 노동운동을 불모지인 방글라데시에서도 실천해가기 위해 그가 접목시킨 방법이 바로 비디오 카메라였고 다큐멘터리 영화 <21세기>는 그 결과물인 셈이다.

그가 중심이 되서 이끌고 있는 독립미디어활동가 그룹 'Break Through'는 이처럼 방글라데시의 의류노동자를 비롯한 여성, 빈곤층 등 정부와 언론이 방치하고 가는 사람들에게 카메라 앵글을 맞추고 있다. 그에게 "왜 카메라냐"고 물었다.

"한국에 있을 땐 '뭐 하러 사람들이 카메라로 찍으러 다니나' 했어요. 근데 방글라데시로 돌아가서 보니까, 사람들이 연대를 해야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사실을 알려야 하고 그래야 사람들이 문제 해결에 나설 수 있다는 걸 알았죠. 카메라의 힘이 정말 크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카메라에는 힘이 있다, 그러나 그들에겐 카메라가 없다

▲ <21세기>를 감독한 사이드 무나
ⓒ 김정훈
국내에선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독립미디어활동가나 그룹을 방글라데시에선 거의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Break Through'의 활동은 80년 대의 꽁꽁 얼어붙은 시국에도 불구하고 독립미디어의 푸른 싹을 힘겹게 틔어낸 '푸른영상'을 연상시킨다.

"방글라데시에서도 영상을 만드는 집단들은 있는데 그들은 주로 예술영화를 만듭니다. 이들 자신도 영화를 통해 사회를 바꾼다고 얘길 하죠. 그러나 우리보다 1천배 가까운 제작비를 쓰는 그들이 정작 만드는 영화는 많이 배운 엘리트들을 위한 영화일 뿐입니다. 그들은 노동자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직접 카메라를 갖다 대지는 않습니다"

영상을 통한 사회 변혁의 가능성을 발견해 낸 이들의 희망과 의지는 확고하다. 그러나 사이드씨와 'Break Through'에게는 큰 고민이 하나 있다. 어이없게도 이들에겐 카메라와 편집 컴퓨터가 없다. 사이드씨의 말이다.

"한국의 활동가들이 조금씩만 도와주면 구할 수 있는게 아닐까…. 정말 창피한 얘긴데…. 그렇게라도 활동을 위해서 구했으면 좋겠고…."

흐려진 말끝에선 염치와 절박함이 뒤섞여 묻어났다.

"창피하지만... 한국 활동가들이 도와주세요"

방글라데시에 카메라를!

기금모음:
국민은행
이미영(이주노동자합법화모임)
응원메일 :
Break_Through@yahoo.com
도움문의 :
016-270-9811

사이드씨의 이번 한국 방문의 마지막 숙제는 한국의 시민단체 및 활동가들과의 연대망을 구축해가는 일이다. 현재의 방글라데시 사회 분위기에서 자신들의 활동은 곧 반정부 활동으로 몰릴 수 있고 그 최악의 결말은 지난 2년간 37명의 기자들이 목숨을 잃은 현실이 보여준다.

"만약 우리에게 무슨 일이 생길 때 (한국에서 보내는) 이메일 한 통이 우리에겐 큰 힘이 됩니다. 서명이나 항의메일을 보내주면 사장이나 정부가 큰 압박을 받거든요. 그럼 함부로 우리를 건드리지 못할 겁니다. 앞으로 우리를 지켜봐 주시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바로바로 연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현재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방글라데시 노동자는 약 1만4천 명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리고 언젠간 이들도 다시 방글라데시로 돌아갈 것이다. 사이드씨는 귀국한 이들의 높아진 눈높이가 낙후된 방글라데시의 노동 현실을 끌어올리는 견인차가 될 수 있도록 지금부터 준비할 것이 많다고 한다.

사이드씨는 그 여정에 한국인들의 작은 동참을 호소하고 있다.
2006-11-27 17:12
ⓒ 2006 OhmyNews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6/12/03 08:40 2006/12/03 08:40

수술을 하지 않는 것이 차라리 낫다던 병원의 입장이 어제 갑자기 바뀌었다.

사만타의 뇌부종(부어오름)이 계속 진행되어 두개골을 열어주지 않으면 안된단다.

물론 수술 후에도 의식이 회복되거나 하는 결과를 기대할 수는 없다. 다만 더 악화되는 것을 막자는 차원이다. 그리고 수술 중이나 또는 그 후에 사망할 확률도 무시못한다.

문제는 협조적이던 회사의 태도가 갑자기 바뀌었다는 것이다.

앞으로 비용이 어디까지 나올 지 예상할 수 없는 상태에서 무조건 회사가 모두 떠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별 권한이 없는 회사 직원을 상대로 오랜 시간 결론없는 논쟁만 하다 결국 우리가 떠안기로 하였다. 일단 수술동의가 필요한 상태라 수술동의서에 싸인을 하고 우리를 미더워하지 않는 의사를 설득해 수술에 들어갔다.

다행히 수술은 별 문제 없이 끝났다. 수술 중에 뇌가 흘러내려 더 악화될 수도 있다는 의사의 설명을 들은 지라 괜히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쩌나 많이 걱정했었다.

수술을 모두 마치고 중환자실 면회까지 마친 후 병원을 나오니 새벽4시경이었다. 오후7시에 병원에 와서 9시간이나 있었더니 몸도 마음도 우울해진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6/11/29 12:06 2006/11/29 12:06

아침에 들렸다온 백병원에 누워있는 그 친구는

지금도 그대로 누워있을 것이다.

머나먼 한국땅까지 돈벌러 온지 채 1년도 안되었는데

일산 어느 대학병원 중환자실에 코마상태로 누워있구나.

뇌가 안으로 부어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

두개골을 절제하고

스리랑카의 더운 바람 대신

차가운 한국의 겨울을

맨살로 맞이하고 있겠구나.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6/11/26 17:42 2006/11/26 17:42

이라크관련주요뉴스

from No!WAR 2006/11/25 15:20

[MBN뉴스]국정원 "방글라데시서 이라크 파병국 테러 첩보" 
[프레시안] 이라크 최대 종파간 유혈사태 사망자 200명 넘어  

 

 

[MBN뉴스]국정원 "방글라데시서 이라크 파병국 테러 첩보" 
 

국가정보원은 24일 방글라데시의 테러조직이 이 라크 파병국을 대상으로 테러를 기도한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방글라데시 교민과 여 행객에게 신변안전을 당부했다.
국정원은 "방글라데시의 `자마툴 무자헤딘 방글라데시'(JMB)가 테러를 기도중이 라는 첩보가 입수됐다"며 "첩보상 한국이 거명되지는 않았지만 이라크 파병국이 대 상인 만큼 우리나라를 겨냥한 테러 발생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JMB는 1990년대 후반 이슬람 신정국가 건설을 목표로 결성된 과격단체로, 현지 언론은 JMB가 2천명의 자살테러범을 육성 중이며 테러를 위해 전국을 정탐 중이라고 보도했다고 국정원은 전했다.

국정원 관계자는 "방글라데시에서 내년 1월 대선을 앞두고 유혈충돌이 지속되고 있어 우리 기업과 교민의 피해 가능성도 있다"며 "우리나라에서 불법체류하다 강제 퇴거되거나 현지 교민들과 갈등을 빚어 반한감정을 품은 자에 의한 피해도 우려된다 "고 말했다.

국정원은 또 최근 파키스탄에서 알카에다나 탈레반과 연계된 테러범들이 정부청 사, 외국공관, 기업가 등을 대상으로 자살폭탄테러를 기도하고 있다며 우리 교민과 여행객의 주의를 당부했다.

prince@yna.co.kr
(서울=연합뉴스) 정준영 기자

 

 

[프레시안] 이라크 최대 종파간 유혈사태 사망자 200명 넘어  
[속보] 이라크 정부 "사망 202명, 부상 252명" 발표 
 
  2006-11-24 오후 6:01:07     
 
  이라크 시아파 무장단체의 근거지인 사드르 시티에서 23일 수니파 무장세력의 폭탄 공격으로 빚어진 유혈사태의 사상자 수가 하룻밤 사이에 크게 늘었다.
 
  이라크 정부는 24일 "사드르 시티 폭력사태로 202명이 사망하고, 252명이 부상당했다"고 밝혔다. 미국의 통신는 "이같은 사상자 수는 23일 밤 이라크 당국이 발표한 '161명 사망, 257명 부상'보다 훨씬 많은 것"이라고 전했다.
 
  이번 사태는 이라크 전쟁 이후 지속된 종파간 분쟁이 점점 상호 주요 근거지를 직접 공격하는 내전 양상으로 격화되는 가운데 발생한 것이며, 단일 사건으로는 최대 사상자를 냈다. 수니파 무장조직원들은 23일 시아파 무장단체 메흐디 민병대의 근거지인 사드르 시티에서 차량 5대를 폭파하고 5발의 박격포를 발사해 수많은 인명피해를 냈다.
 
  시아파 무장조직도 곧바로 보복공격에 들어가 바그다드 최고의 수니파 사원 아부 하니파에 10발의 폭탄을 발사해 건물 대부분이 파괴되고 1명이 사망했다. 수니파의 이번 공격은 지난 14일 수니파가 장악하고 있는 고등교육부 청사에 메흐디 민병대가 들이닥쳐 수십 명의 수니파 직원들을 납치한 사건에 대한 보복이었다.
 
  시아파와 수니파의 유혈분쟁은 지난 2월 수니파가 시아파 사원에 폭격을 가한 사건 이후 메흐디 민병대가 수니파 주민들을 보복 살해하면서 상호 보복전으로 격화되어 왔다.
 
  메흐디 민병대를 이끄는 시아파 성직자 무크타다 알 사드르는 측근들에게 "이번 사드르 시티 폭격 사건으로 중무장한 조직원들이 보복공격에 나서더라도 말리기 힘든 사태가 올지 모른다"고 우려를 표명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승선/기자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6/11/25 15:20 2006/11/25 1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