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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8%가 아닌 0.02%를 위하여

5월 9일 금요일날 서울로 새벽에 출발하여 몇개의 일을 해치우고, 7시 반쯤에 지하철을 타러 가는데, 중학생들이 보인다. 청계천이 어디로 가면 되냐고 했더니, 동대문운동장 1번출구로 나가라는 것이다. 그러더니 나보고 "촛불집회(학생들은 그것을 문화제가 아닌 집회로 불렀다)"에 가냐면서 주먹손을 어깨위로 올리며 "잘싸우라"고 한다.. 나 참... 이런 일도 있다니.. 학생들이 격려도 다 해주고... 어느 지하철을 막론하고, 어느 학생을 막론하고 거리에서 "청계천방향"을 물어보면 학생들은 눈빛을 마주치고, 시익 웃으면서 마치 "오랜 동지"를 대하듯 한다. 요즘 거리에서 만나는 학생들의 모습은 1987년 대투쟁이 있던 시청앞이나 서울역앞을 연상시키고, 95-96년도 종로 파고다공원을 연상시키지 않는가?

 

내가 중학교때를 비교하면, 학생들의 의식발전이 놀랍다......

 

나는 촌놈이라 할 수 없이 다시 동대문운동장 지하역 통로에서 3명의 대학생인듯한 학생들에게 "청계천광장"을 물었다. 학생들은 광화문으로 가면 빠르다며 자기들을 따르라고 한다. 그들은 5월 2일부터 매일 참가했는데, 매일 분위기가 다르다며 최근 매우 고조되고 있다고 한다.

 

광화문역사를 나와서 지상으로 나오자마자 또 한번 놀랐다. 중학교 쯤 될법한 어린 남학생들이 전지종이에 직접 쓴 플랭카드를 들고 나와 하나씩 들고 서 있다. 내용은 학교당국의 집회참가억제에 대한 항의와 학교에서 토론과 결사, 집회의 자유를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나도모르게 '얘들이 혹시 교장선생님이라도보면 어쩌려고 하나?'하는 보수적인 걱정을 했지만, 이것 역시 학생들의 의식을 따라잡지 못하는 구태의연한 걱정에 불과했다.

 

'난, 너희들이 참 자랑스럽구나'

 

나는 이렇게 그들을 자랑스러워하고 또 부러워하고 있었다.

 

매일 왔던 3명의 대학생들이 "오늘이 최고로 많이 모인날"이라고 한다. 무대를 중심으로 빽빽히 인파가 들어서서 발디딜 틈이 없는 곳을 한발짝 한발짝 밀려서 중앙으로 들어가는 중에도 무대앞에서는 등장인원이 쉴새 없이 바뀌면서 놀이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한 여학생의 연설에 이어, 몇개의 랩송을 부르는 팀이 등장하고, 그 뒤에 어떤 남학생이 등장했다. 이 남학생의 연설을 그야말로 짧았고, 매우 간단한 단어를 사용했지만, 거기에 참가한 모든 사람들에게 참가의 근거와 의의 등을 명쾌하게 말하고 있었다.

 

"우리는 99.8%가 아닌 0.02%때문에 온 것이 아닙니까? 99.8%가 안걸린다해도, 0.02%가 걸린다면 우리는 막아야 합니다!!!"

 

연설이 심각하고 비장함이 지속되려하면, 그 남학생은 마지막 단어에 후렴구를 넣어서 모든 사람을 선동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오 호... 오 호 호... 오 호 오....."  이렇게 하면서 말미에 후렴구를 넣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야말로 집회장에서 이렇게 "즐거운 후렴구와 노래가 어우러진 멋진 연설"을 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정말 기막힌 연설이었다...... 집회에서 이렇게 누구나가 나와서 발언을 하는 문화, 인간으로써 가장 멋진 문화가 아닌가?

 

앞으로는 모든 집회에서 이런 창조적 문화를 만들어 나가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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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날, 금병산은 김유정의 추억으로 가득하다^^

새해 첫날 금병산은 김유정의 추억으로 가득하다^^ 

 

새해 첫날 오른 금병산... 춘천의 원창고개를 시작으로 하여 잣나무가 빼곡하게 들어선 급경사진 산중턱을 아주 잠깐 숨이차게 올라가면, 이내 금병산 정상으로 향하는 능선이 시작된다. 원창고개에서 금병산까지의 길에는 쭉쭉 뻗은 잣나무, 소나무, 참나무(도토리나무)들이 하늘을 닿을듯하며, 구름도 무심히 지나치질 못하고, 기어코 나무가지에 걸쳐있다. 이 아름다운 능선길이 바로 김유정의 '봄봄'의 무대인 것이다.

 

금병산 정상에서 여러갈래의 내리막길이 있는데, 이들 길이 김유정의 '동백꽃' '산골나그네' 등등의 실제 장소였다. 651미터정도의 높이인 금병산은 흙산이다. 거친 바위돌 하나 보이지 않고, 내려오는 길이나 오르막길이 모두 능선길이다. 가장 짦은 능선이 '동백꽃길'이고, 이 아래에 유정마을 (김유정생가가 있는 곳)이 있다. 

 

나중에 김유정역사앞에 세워진 팻말을 보고서, 강원도에서 이 금병산을 문화유적지로 개발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나, 이것을 알지 못하였더라도, 설사, 문화유적지로 선정이 안되었다 하더라도, 금병산의 길은 거의 모두 완만하게 능선으로 되어있어.. 바로 주민들의 실제적인 통행로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산 아래로 내려와서 춘천까지의 길은 걸어서 가기엔 너무나 먼 길이다. 그러나, 나는 오늘 이 먼 길을 산길로 단 1시간도 안걸려서 가지 않았는가?

 

그러니, 옛날 산에 나무하던 이들이나 농사를 짓는 이들은 이 금병산의 흙길을 밟고 다녔을 것이고, 자연스럽게 길들이 산의 완만한 중턱을 둥글게 받아 안으면서 길들이 생겨났으리라. 예전에 금병산에는 화전민도 많이 살았다고 한다. 화전민들의 오고가던 길이 바로 이 능선들이었구나......

 

김유정역앞의 슈퍼아저씨는 지금은 김유정의 친척이나 그 당시에 살았던 후손들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 김유정의 가족은 그의 자전적 소설 '따라지'에 나오는 것처럼, 모두 흩어져 버렸을까? 김유정이 살았던 시대에 농촌은 지주와 마름과 소작인의 계급관계였고 화전민들은 당연히 소작인이었겠다. 물론 김유정의 글 어디에도 계급적 문제가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시대에 가산이 모두 탕진되고, 몸이 병들어가면서도 그가 금병산자락에 "금병의숙"이라는 야학을 창설했다는 것은 놀라울 따름이다.

 

금병산을 내려오는데, 부귀도 영화도 물질적 풍요도 없는 이 소박한 산골에서, 인간의 애정과 애환을 목도한 김유정이 저만치서 걸어가고 있다.

 

(점순이의 사랑을 얼떨결에 느끼는 나, 동백꽃의 말미이다).  

"... 뭣에 떠밀렸는지 나의 어깨를 짚은 채 그대로 퍽 쓰러진다. 그 바람에 나의 몸뚱이도 겹쳐 쓰러지며 한창 피어 퍼드러진 동백꽃속으로 폭 파묻혀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에 나는 땅이 꺼질 듯이 온 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 (동백꽃, 김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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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시아의 홍수: 내가 여름을 시원하게 보내는 사이 남아시아에서 2800만명이나 홍수를 겪었다니...

올여름에 게릴라비, 열대성비가 온다고 하지만, 이 땅에서 내가 올여름을 시원하게 보내고 있는 사이에, 남 아시아에서는 2800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홍수를 겪고 있다니.. 400명이 홍수로 죽었다니..
오늘 낮에 쏟아지는 폭우를 창밖으로 여유있게 바라보면서 나는 얼마나 즐거워했던가? 며칠전부터 남아시아의 홍수에 관한 보도를 들은 적이 있었지만, 결국 나의 일이 아니었던 것이었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내비춰졌던 나의 이기심을 어떻게 해야하나?. 또는 분명 나의 인식의 한계를 탓해야한다. 
Sickness spreads in S Asia floods
Relief being airdropped to flood affected people in Bihar, India
Air-drops of food and medicine try to ease suffering in Bihar
Thousands of people are falling sick as flood waters recede across South Asia, with health workers struggling to cope with inadequate medical stocks.

Ponds of stagnant water are creating breeding grounds for disease.

Thousands have been treated for diarrhoea in India's Uttar Pradesh and Bihar states and a doctor in Bangladesh called his medical centre a "war-zone".

About 28m people have been affected by the floods in India, Bangladesh and Nepal. More than 400 people have died.

Thousands of villages are still under water and although many countries have pledged aid, many areas are desperate for food and clean drinking water.

 

 

The Indian government has been given an initial cost estimate of the floods of $320m but the figure is expected to rise.

Leave cancelled

The rains have halted in most parts of South Asia but with the water receding after two weeks of floods, health workers are now faced with increasing cases of water-borne diseases.

At Bangladesh's biggest diarrhoea hospital in the capital, Dhaka, doctors said they were working round the clock to cope with the rush of flood victims.

Paramedics visiting affected villages don't have adequate supplies of medicines
Ramadan Ray,
doctor in Uttar Pradesh

"It's like a war-zone situation. Some patients are very ill but the treatment is extremely effective," Dr Alejandro Cravioto told the AFP news agency.

In Uttar Pradesh, LB Prasad, a senior health official told Associated Press that doctors had treated more than 1,500 people for diarrhoea in 22 flood-affected districts in the past 10 days.

However, a private group of doctors in the state says that around 20,000 people there are suffering from water-borne diseases.

"Paramedics visiting affected villages don't have adequate supplies of medicines," Dr Ramadan Ray said.

More than 2,000 villages in the state remain flooded, and an equal number of medical camps have been set up to cope with any outbreak of disease.

THE ASIAN MONSOON
Monsoon graphic
Monsoon winds blow north-easterly for one half of the year, and from the south-west for the other half
South-westerly winds bring the heavy rains from June to Sept
Winds arrive in southern India six weeks before the north west
Annual rainfall varies considerably

In neighbouring Bihar, the government has cancelled leave for doctors in 19 floor-affected districts, state minister Chandramohan Rai told AP.

Unicef has begun inoculation programmes in the state, particularly against measles.

The Indian government has announced initial emergency aid of $37m for flood victims in Bihar.

Heavy rains have also lashed the western state of Gujarat this week, killing at least 15 people and displacing more than 22,000.

Separately, at least 10 people were killed as a huge storm hit Pakistani's largest city, Karachi, on Friday.

They were killed in house collapses and by electrocution.

The UN has blamed the flooding on climate change and says such disasters are becoming increasingly common.

India is the worst-affected country, with some 20 million people in the states of Assam, Bihar and Uttar Pradesh hit by the floods, according to the UN.

Some eight million people are affected in Bangladesh.

About 127,000 people have been displaced in Nepal, with at least 26,500 houses damaged or destroyed, the Nepal Red Cross Society says.


 

m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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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꼬뮤날레를 다녀와서

이번처럼 한번도 안졸고 열심히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은 6월 장마비로 선선해진 날씨탓도 있었지만, 행사동안 내내 맑스이론과 맑스를 넘어선 이론의 경계가 무엇인지? 과연 맑스를 넘어섰는지 아니면 맑스를 말하기를 그만두었거나 잊어버린 것이 아닌지? 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고민하게 된 계기때문이기도 했다. 제 3회 꼬뮤날레의 제목대로 이번 꼬뮤날레는 과연 맑시즘과 관련된 논의들이 어디까지 진행되고 있는가?를  "상상력은 어디까지인가?"를 보여준 행사이었다. 행사장에 오신 어느 분의 말씀처럼 "우리가 지금 맑스를 상상할 때인가? 행동을 할 때인가?"에 대한 대답은 우리의 행동이 대답할 것이라고 믿으며, 이번행사에서 제기되었던 문제들에 대한 짧은 단상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전체주제발표>

 

1. 생명의 권리와 자본의 권리 -발표 이진경, 토론 홍성욱 사회 심광현

<나의 생각> 발표자는 생명과학을 인간사회에 적용하여 자본주의가 어떻게 인간의 공동체를 파괴하는가?에 대한 근거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 글에는 자본주의하에서 생산관계, 노자관계가 빠져있다. 또한 발표자는 생물학이라는 자연과학을 도입하여 세포-->생명체-->집합적 공동체--> 사람들의 공동체로 이야기하면서 사회를 읽어내고 있는데, 거꾸로 생명과 관련된 자연과학을 공부했던 나로서는 생명, 개체, 세포의 기능을 설명하기위해서 오히려 사회의 여러 인간적 관계들의 용어를 적용해서 이해하지 않았던가? 이렇게 볼 때, 우리의 인식은 자연과학의 틀에서 사회과학적 개념을 얻기라기 보다는 외부의 자극이나 조건을 인간의 의식속에서 이해하여 이것을 다시 적용하는 것이다. 자연과학에서 개체나 개개의 세포들의 집합적 공동체를 이야기한다면, 이는 아마도 우리의 사회속에서 인간들의 관계에 대한 인식이 오히려 자연과학에 투영된 것일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들면, AIDS의 기전은 HIV virus가 T-cell recepter에 붙어서  T-cell 의 면역기능을 억제하는데, 이 면역기능을 자연과학에서는 "외부에서 침입군이 쳐들어 왔을때, 군대처럼 나가서 싸우는 전초병"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즉 생물학의 기전을 설명하기위해서 사회의 관계들을 이용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 글은 구태여 자연과학, 또는 생명학에서 해답을 찾으려고 하는 가? 현실의 인간관계를 그대로 보면서 찾지않고? 

 

<논쟁점>

홍성태: 과학기술을 자본가가 사용하는 것이 문제이다.즉,  과학기술의 자본주의적 이용이 문제임.

이진경: 과학기술을 누가 만드는가? 이미 만드는 사람 자체가 이미 특정한 방식으로 생산하고, 그렇지 않은 것을 배제해야되지 않느냐?

 

 

2.반자본주의적 대항지구화운동의 쟁점 - 발표: 김창근, 토론: 조정환

<김창근> '맑스에 의하면 국가는 총체적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기구이며 상대적 자율성을 가진다. 국가가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측면에서 볼때, 자율성이 아니라 자본에 대한 철저한 의존성을 가진다.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이란 경제발전과 민주화의 문제이다. 노무현정부는 "삼성공화국"으로써 국가의 자본으로부터의 상대적 자율성이 거의 사라졌다.

<조정환> "노동의 자율성" "국가와 자본이 일치하므로 국가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네그리의 입장임.  

<논쟁점>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 국가의 역할에 대해서

 

3. 분자혁명론 - 발표: 윤수종, 토론: 이득재, 사회: 곽노완

<윤수종> 네그리, 가타리. 주체성영역에서의 출발이 중요하다. "주체적인 측면에서 시작하여 획일적인 것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선들을 찾아나가는것"  

<이득재> 한국사회에서 주체성을 타진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4.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와 탈자본주의의 전망 - 발표: 정남영, 토론: 강남훈

<나의 생각> 첫째: 비물질적 생산노동에서 노동시간이 가치척도가 되기 어렵다고 하면서 가치법칙을 폐기한 발표자(정남영)의 논지에 반대한다. 이 논지는 맑스의 가치법칙의 폐기를 주장하고 있어서 나는 이 의견이 이미 맑스주의를 벗어나있다고 생각한다.  노동시간이 더이상 가치측정의 척도가 되지 않는다면, 어떤 다른 것이 가치를 측정하는가? 비물질적 노동과 물질적 노동의 구분은 이미 맑스가 이야기한 육체적 노동과 정신적 노동의 또 다른 언어적 표현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미 맑스는 이 두 노동에 대해서 이미 이야기를 했었다.

둘째: 발표자는 비물질노동과 물질노동을 정의를 하고 있는데, 이것의 문제는 노동과 지식을 분리시키거나 혼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노동을 육체적 노동과 정신적노동으로 나눌 수 있고, 이 노동의 결과 만들어진 생산물이 비물질일 수 있고, 물질일 수 있다. 그러므로, 발표자는 노동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사회에서 생산되는 지식의 특징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강남훈> 지식을 노동과 대립시키는 견해는 잘못된 것이다. 가치법칙의 적용에 문제가 있다.

<논쟁점>

-정성진의 비판: 정남영의 논지는 가치법칙을 폐기했거나 잘못이해한 것이다. 가치법칙을 폐기했다면 이미 맑스주의가 아니다. 차라리 맑스를 버렸다고 해라.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가 자본주의적 경향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김세균의 비판: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를 통해서 노동자의 수평적 조건이 만들어진다는 이론에 반대한다. 자본주의하에서 지식노동-육체노동이 구상과 실현으로 분리되어 구상의 기능을 자본의 기능으로 가져가는 것에서 문제가 됨.지식노동과 육체노동의 재결합이 이루어져야만 노동자들의 수평적인 관계가 만들어질 것이다.

 

5. 코뮨주의적 생태문화사회구성체 요강 - 발표: 이득재, 토론: 김세균, 사회: 이성백

<이득재> 이행전략: 국가의 기능을 재정의하던지, 시장을 재정의하거나 변형시키는 방법, 국가와 자본에 대한 통제와 규제가 필요하다. 국가에 대한 규제, 자본, 사적소유에 대한 통제가 없으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상위체계(구조화, 계획경제)와 하위체계(association영역의 회복)의 선순환구조를 이루어내야한다.  국가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김세균> 코뮨사회로의 이행전략에 대한 이론적 한계를 보충하고 풍부화 했으면 좋겠다. 코뮨사회의 내용을 채웠으면 좋겠다. "노동사회에서 문화사회로" 가 아니라, "자본주의에서 꼬뮨사회로"라는 용어를 쓰면 안되는가?

<조정환> 이득재의 꼬뮌상이 기존의 국가사회의 이미지와 동일하다 (국가민주화론).

<논쟁점> 이행전략 (국가민주화론, 국가사멸론, PT독재론) 에서의 차이. 자율주의(조정환)는 자본주의를 코뮨사회로 직접 전환시킬 수 있다고 보는 것이고, 김세균은 자본주의를 노동자국가로 대체하지 않고서는 꼬뮨사회로 가기 어렵다는 것"이고, 이진경은 "어떻게 국가를 사멸시킬 것인가의 기획이 없이 국가를 어떻게 이행시킬 것인가 또는 변할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다르게 읽힐 수 있을 것이다. 국가사멸을 위한 이행과정에서 국가라는 물질적 장치(기존장치)를 어떻게 이용해서 사멸시키게 할 것인가? 생태문화적 자율구성체로부터 온다. 이진경은 문화연대가 참여연대와 다를게 없다고 주장하면서 공공성, 공공영역의 민주화, 국가민주화론으로 보이는 책임을 명확하게 이해시켜주지 않는다면 혼동의 책임을 우리에게 미루면 안된다.

정성진은 생태문화사회구성체를 굳이 사회구성체론으로 규정하면 과거의 사민주의 생산양식으로 가면서 공산주의를 끊임없이 미루게 되는게 아니냐?

 

 

<세부발표> Andreas Arndt  맑스의 철학

맑스철학에서 5가지 관점

1. 헤겔철학과의 만남

2. 헤겔철학의 비판

3. 유물론의 문제

4. 철학과 경제학의 관계

5. 변증볍과 모순의 문제 (맑스에게서의 변증법이 헤겔과 어떻게 다른가?)

 

<맑스에게서 철학이란 무엇인가?>

1. 헤겔철학과의 만남

 -맑스는 청년헤겔주의자가 아니라 항상 anti-Hegel주의자였다. 맑스는 헤겔리안인 적이 결코 없었다.

-맑스가 처음에 법체계자체를 꿰뚫으려고 했고, 그러다가 철학이 없이는 체계를 구성하지 못하겠다는 생각을 하게됨. 다시 헤겔로 돌아가는 가운데, 자신이 헤겔을 못벗어나고 있다고 생각함 (AMBIBALANCE). 이 당시 맑스는 헤겔로부터 벗어나려고 함에도 불구하고, 헤겔속에서 작업하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맑스가 박사학위를 쓰려고 할때, 헤겔의 논리학을 변형하려고 했다. 맑스의 박사학위논문은 트렌델렉의 논리적연구에서 헤겔의 모순론에 대해서 비판한 것에 대해서 헤겔의 논리학을 변형하려는 시도를 하게됨.

-맑스의 박사논문 "에피쿠로스와 데모크리토스의 자연철학의 차이": 헤겔의 역사철학부분을 다시 검토함. Epigonal 후계자: 고대의 아리스코텔레스이후의 배치되는 철학자와 헤겔이후의 자기시대를 대비시켜 보고자 함. 인간이 생각한것이 현실로 들어선다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을 질문하게 된다. 이념이 현실로 들어서야 된다고 하는게 무엇인가? 철학의 실현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맑스는 철학 자체를 다루고 있지는 않다. 철학을 현실에 대립해서 독자적인 힘을 갖는 것이 철학은 아니다라는 점! 언제나 현실에 뒤얽힘. 현실의 모순속에 들어가 있다. 철학은 현실과의 관계속에서만 철학이 존재하지 순수철학은 관계하지 않았다. 맑스의 철학연구부분이 헤겔과 다른 점은 헤겔자신이 역사철학을 다룰 때 논리, 자신의 논리학을 증명하려는 태도를 취하는 데 비해 맑스는 다른 것을 보려고 했다. 이것이 맑스의 연구업적일 것이다.

 

 

 

2. 헤겔의 법철학 비판

- 헤겔의 법철학의 비판: 더이상 로직의 문제가 아니다. 실제 현실과 연관된 로직을 다루게 된다. 이 헤겔의 법철학비판은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국가(Staat) <----> 시민사회(부르조아사회 Burgerl Besellsch) 와 이를 포함하고 있는 idee dess(국가자체)

 

1843년 법철학비판에서 끄집어내려고 한 것은 모순의 형식 (IDEA)에 대한 비판임. 헤겔은 부르조아사회가 사회 모든 부문에 삼켜버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나, 여기서 화해가 된다. 헤겔은 부르조아사회를 국가사회 그 자체로 보고 있는데, 맑스는 이를 비판함. 헤겔은 스스로를 구분해내지 못하게 됨. 국가와 부르조아사회의 대립은 스스로 국가가 조절한다고 하는게 논리적이지 않다는 게 맑스의 헤겔법철학 비판의 핵심이다.

 

맑스가 헤겔을 비판하는 핵심은 헤겔의 논리에서 국가와 부르조아사회의 진실한 대립이 가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것이고, 현실을 개념적 구성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맑스가 헤겔을 경험적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맑스는 헤겔이 경험가 사변을 왔다갔다 하고 있다는 점을 비판한다. 이것이 맑스의 헤겔비판의 출발점이다.

 

맑스는 제 2 인터내셔널에서 운동의 전략을 발전시키려고 하였다. 맑스는 끊임없이 묻는다. 우리는 우리의 일반적 이해를 관철시키기위해서 국가를 어떻게 이용할것인가?

 

-헤겔: 개별적인 과학으로 갈 때, 논리자체가 보장되고, 보존화되고, 확인되는 것이 헤겔의 특징이다. 즉, 논리가 자율적 운동을 한다는 것이다.

-맑스: 맑스는 논리적 자체가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고 봄. 맑스의 대안은 현실자체를 재구성하는 일이다.

           현실자체에서 특정의 추상적인 것을 추출해내고, 사변에서 추상적인 것을 추출해내는 일. 사유의 00에서 재구성하는 일임. 사물자체, 사태 논리적 관계가 등장하므로 문제가 되고, 현실일 수 없으며, 현실을 파괴함.

 

<질문1> 헤겔적 사변과 맑스적 사변이 다르냐? 아니면 맑스에게는 사변자체가 없는가?

Arndt 의 답==> Theory: 경험적 직관, 그럼에도 경험자체의 내재적 연관을 재구성하는 일이다. 맑스의 Theory는 이러한 내적연관이고, 경험 자체를 내적으로 재구성하는 일이다. 바로 이를 위해서 과학이 필요하고, 과학은 경험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추상을 가지고 작용함. 현실의 내적 연관은 경험만이 아니라 추상을 가지고 작용한다면, 이런 의미에서 바로 맑스에도 사변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질문2> 헤겔은 부르조아사회와 국가를 통합시켰고, 맑스는 국가와 부르조아사회를 분리시켰다. 국가내 시민사회를 반영할것인가? 아니면 파괴할것인가? 국가의 시민사회적 역할을 헤겔에서 찾아야되지 않을까? Arndt 의 답

 

Familie--BB---Staat

 

Staat

 

 

==> 헤겔은 국가를 강하게 하려고 했고,  이런 점에서 맞기도 하다. 맑스가 국가 전체를 보편적으로 끌어올리려는 주장을 하기엔 자신이 없었다. family등 정치이전의 사회, 직업단체등은 국가이전의 사회이다. 헤겔에서 부르조아사회의 국가수단은 FAMILY--> bg사회--> 국가 이다. 국가가 항상 존재하면서 가족이 작동하는데에도 국가가 작동이 안된다고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봄. 국가는 본질적인 관계인데, 이 Bg국가 자체는 통제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맑스와 헤겔은 동일했다.

 

1802-1804년도 헤겔의 자연변증법 논문에서 Bg국가와 국가이야기가 나오는 데, 헤겔자신도 자신이 없었다. 부정성의 부정으로 그 자체를 지향해 낼 수 있을 지는 자신이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헤겔의 태도는 불분명했다. 법철학은 이점에서 불안정했다.

그러나 이성의 자연성의 문제를 보면, 이들은 지양되어야 할 것으로 보는 것은 사실이다. 이것을 어떻게 해야할지는 정리하지 못함. 자연법철학: 자연법관계논문에서 한 것을 잘 진행못했다. 헤겔이 국가를 강력히 키웠던 것은 사실이고, 국가를 이용했더 것은 사실이다. 헤겔은 이것에 대해서 확실하게 개념정의를 하지 못했다.

 

맑스의 문제의식: 현실에서 제대로 돌아가느냐? 개별적 파편적 존재를 억제하느냐? 맑스가 보기엔 아니라는 것. 현실에서 이성국가를 보장하는 메카니즘이 존재하지 않길래 이를 보면서 맑스는 다른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 맑스의 작업이었다. 

헤겔의 이성국가는 문제가 있었다. 부르조아사회는 파편적, 국가는 정치적 차이가 있다는 점을 다시 강조함.

 

ㅌ    A

        S

bb

 

 

 

E     E

bb    S

 

 

id

S

 

 

              id

              s

E--------------------> B

bg                            S (국가)

 

 

맑스의 법철학비판은 헤겔의 논리학의 비판이다. 헤겔의 로직으로 재구성하는 문제: 맑스의 자본론에 중요한 형태로 남음. 국가의 보편성으로 지양될 수 있는가? 현실적 대립자체는 지양되어서 고차원적인 것으로 고양되지 않는다는 것이 기본적인 맑스의 논리의 모습이다.

 

대립적 모순: 구조적 모순으로 나오는 대립적 모순에서 구체적인 것으로 제 3의 것이 산출된다는 것은 예견되어 있지 않다. 대립이 매개되지 않는다.

 

 

3. 유물론의 문제

 

1844-45년 정신주의와 유물론의 대립이 제어되고, 헤겔과 포이에르바하에 의해서 사변적 사고와 형이상학으로 되는 것에서  중요테제: 헤겔: 낡은 형이상학과 사변적 형아상학과의 대별속에서 새로운 유물론이 탄생하고 새로운 유물론을 정립한 사람이 헤겔이다. 낡은 유물론과의 대립속에서 나온 것. 헤겔 자신을 새로운 유물론의 창시자로서 도발적으로 이야기함.

 

헤겔 사변의 완성: 17세기 형이상학을 지금까지의 형이상학과 일치시킨 것에 있다. 독일 관념론과 실제유물론 (형이상학적으로 해석된 자연이 지금까지의 유물론이었고, 형이상학적으로 해석된 관념이 독일관념론이었음)과의 양자의 통일로 이해를 하게 됨. 이들의 귀결은 실제형이상학과 의식 자체를 지금까지 유물론과 정신주의 대립을 무로 돌려놓는 쾌거였다. 이것이 맑스가 헤겔에서 따 놓은 부분이다.

==> 이 부분을 맑스를 쫒아서 개념화해보면, 맑스의 철학을 동일성의 철학으로 이해하고 재구성하고 있다. 이것은 자연과 정신의 동일성에서 이야기해야한다는 점. 정신과 자연의 통일속에서 자연과 정신의 통일을 꾀하는 것이 새로운 유물론이다. 지금가지 거론된 유물론과 다른 개념이다. 자여과 정신의 동일성 기반하의 동일성의 철학임.

맑스: 꺼꾸로 선 문제: 이데올로기적 문제와 비슷하다. 전도된 의식/이데올로기적 의식이란 이야기를 하고 있다.

 

                                Bestinensetim idealismus 

인간(Mensch)        ----------------------------------------> 자연(Nature) (정립되는 주체)

(정립되는 주체)    <---------------------------------------

                                Bestism Gesetatsesaltm

 

 

 

idealismus : 관념론과 대립되는 것으로써의 새로운 유물론==> 맑스 자신의 것

 

<인간과 자연의 관계>

관념론에서는 인간이 자연을 정립한다.

맑스의 유믈론은 이런 일방적인 것이 아니다. 자연에 의해서 인간이 규정(정립)되는 것, 이런 쌍방의 관계 (대상적 관계)이것이 새로운 관념론의 문제이고, 정립된 것의 통일, 정립한 것과 정립된 것을 자기관계속에서 통일시키는 것. 이것이 다른 것으로 지양될 수 있는 구조는 아니다. 자연은 절대 지양되지 않는다. 이것이 모순적인 관계이다. 이런점에서 옛날 유물론(물질형이상학)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질문1> 유물론과 관련된 부분에 관한 질문: 신진대사, 대상적 관계, 노동의 발전

--> 신진대사이상으로 의미를 끌어내는게 중요하다.

 

 

 

4. 철학과 정치경제학의 관계

자본론 1,2,3, 기획의 내용이 변함.

내용: 사회구성체의 일반적 규정들 bg사회 내적인 규정(자본론) 국가형태에서 bg사회생산의 국제적 관계. 셰계시장과 공황.

헤겔의 객관정신을 토대로 놓고 경제저작의 reader로 자본구성이 만들어 짐.

헤겔과의 비판적 관계: 맑스가 헤겔을 거꾸로 선 것을 비판하면서 system을 가지고 이야기 함.

헤겔과의 비판적 단절: 대상적 관계: 대립되는 것은 현실적으로 해소(지양)되지 않는다는 것, 구룬드리세: 방법은 주어진 현실에서 내적 연관성을 창출하고 총체성으로 설명함.

총체성을 하나의 subject로 규정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역사적으로 규정된 총체성의 주장으로 이야기해야함. 역사적으로 규정된 총체성에 대한 것을 규정해야함. 자기관계성으로 빠지지 않는  것이 되고, 역사적 조건성으로서의 총체성이다. 그래서 헤겔과의 구별된다.

헤겔에서의 총체성을 system 으로 구성하는데 (철학체계, 논리학, 자연..) 맑스는 이렇게 하지 않는다. 타자와의 관계속에서 총체성을 이야기 함. 우연적인 역사적 조건하에서의 총체성을 이야기 함.

 

2장 자본의 원시적 축적에서 개념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 담화적 서술인데, 역사의 우연적인 것을 총체성을 읽어내는 것, 구체적 현실을 읽어내는 면에서의 총체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규정된 총체성이 (1)노예제 사회의 고대와 근대를 비교하면서 (2) 생산관계, 생산량이 어느정도 있어야한다.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잘 이루어져야하고, 이것이 안되면 붕괴된다.

 

헤겔은 systrm이 역사적으로 조건지워진것을 부정하는 것이고, 맑스는 이를 부정하지 않는것, 이 차이이

 

 

5. 변증볍과 모순의 문제 (맑스에게서의 변증법이 헤겔과 어떻게 다른가?)

 

구룬드리세비판: 헤겔의 변증법의 관계를 이해해야한다. 헤겔의 논리학적 구성: 자기가 자기를 관계하는 논리학적 구조.  

맑스는 역사적으로 규정된 총체성을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자기논리학적인 것이 아니라 우연적이고 피상적이며 element한 것이다.

 

맑스의 totality: 유한한 총체성이지 무한한 총체성이 아니다. 헤겔에서 체계까지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규정된 현실내부에서 유한한 총체성이다. 이것이 맑스 총체성개념의 근본적인 것이다.

totality: 역사적으로 규정된 총체성. 과학이론, 대상을 규정한 이론에 적용된다.

헤겔방식: 근본적으로 존재한 관계규정을 재구성함.

헤겔: 추상----> 구체: 사유의 방법이다. 추상에서 구체로 상승한다.

맑스-----> 현실 자체의 산출이요 현실자체의 전체 현실자체를 재생산하는 일이다.

 

헤겔의 매개시키는 것: 맑스식의 이해. 구성적이고 본질적인 밖으로 지향적인 것이야말로 헤겔과 구별되는 맑스의 근본적인 출발점임.

 

변증법에선 현실의 차이를 규정하지 않는다.

 

헤겔의 이론: 이데아에서 끊임없이 재구성됨.

 

 

identity

 

 

ID     UNTEP

 

 

 

맑스: 이데아로 끊임없이 지향되는 점은 맑스에서 찾아볼 수 없다.

맑스는 헤겔을 수용하는데, 모순은 모든 변증법의 원천이다.

 

헤겔: 모순을 전제함

맑스: 실제적 모순임.

 

맑스: 적대적 비적대적 모순

이론적 모순들도 있다 (추상적 유물론, 영혼주의, 정신주의). 현실적 모순이 있다. 개념적으로 지향되지 않는다. 현실적 모순의 지양이 무엇이냐? 현실적 모순은 높은 차원에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실제 모순이 파괴된다는 것, 이것은 새로운 것이 나오는 것을 전제하지만 약속된 것은 아니다. 모순의 토대가 파괴되니까 새로운 것이 생겨나지만 싹이 어디로 가는 지는 모른다.

 

맑스: 자본주의에서 어떤 조건하에서 현실의 조건이 해소되느냐? 토대가 무너지느냐?

 

 

<결론> 부정적 변증법: 현재조건을 생각하고 조건분석을 하는것. 생산적 fantagy와 맑스를 진지하게 결합시키는 것. 헤겔과 맑스와의 관계: 헤겔: 외부의 관점으로 밖에서 보는 사람이 보고 이행하는 것. 내재적 이행은 없다. 절대적 관찰자가 있다. 모순: 헤겔의 논리학은 형식논리학과 틀리다. 헤겔의 논리학은 잘못됨. 헤겔의 작업은 논리적으로는 논리로 모순을 지적하고 알려주는 것인데, 헤겔은 진리를 끄집어내기위해 비진리를 갖다댐. 그런면에서 비난받을 수 있다.

헤겔주의: 헤겔에 비판적인 헤겔주의는 없었다.

헤겔은 맑스에 대립하지만, 맑스는 많은 것을 헤겔로부터 받아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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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꼬뮤날레를 다녀와서

이번처럼 한번도 안졸고 열심히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은 6월 장마비로 선선해진 날씨탓도 있었지만, 행사동안 내내 맑스이론과 맑스를 넘어선 이론의 경계가 무엇인지? 과연 맑스를 넘어섰는지 아니면 맑스를 말하기를 그만두었거나 잊어버린 것이 아닌지? 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고민하게 된 계기때문이기도 했다. 제 3회 꼬뮤날레의 제목대로 이번 꼬뮤날레는 과연 맑시즘과 관련된 논의들이 어디까지 진행되고 있는가?를  "상상력은 어디까지인가?"를 보여준 행사이었다. 행사장에 오신 어느 분의 말씀처럼 "우리가 지금 맑스를 상상할 때인가? 행동을 할 때인가?"에 대한 대답은 우리의 행동이 대답할 것이라고 믿으며, 이번행사에서 제기되었던 문제들에 대한 짧은 단상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전체주제발표>

 

1. 생명의 권리와 자본의 권리 -발표 이진경, 토론 홍성욱 사회 심광현

<나의 생각> 발표자는 생명과학을 인간사회에 적용하여 자본주의가 어떻게 인간의 공동체를 파괴하는가?에 대한 근거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 글에는 자본주의하에서 생산관계, 노자관계가 빠져있다. 또한 발표자는 생물학이라는 자연과학을 도입하여 세포-->생명체-->집합적 공동체--> 사람들의 공동체로 이야기하면서 사회를 읽어내고 있는데, 거꾸로 생명과 관련된 자연과학을 공부했던 나로서는 생명, 개체, 세포의 기능을 설명하기위해서 오히려 사회의 여러 인간적 관계들의 용어를 적용해서 이해하지 않았던가? 이렇게 볼 때, 우리의 인식은 자연과학의 틀에서 사회과학적 개념을 얻기라기 보다는 외부의 자극이나 조건을 인간의 의식속에서 이해하여 이것을 다시 적용하는 것이다. 자연과학에서 개체나 개개의 세포들의 집합적 공동체를 이야기한다면, 이는 아마도 우리의 사회속에서 인간들의 관계에 대한 인식이 오히려 자연과학에 투영된 것일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들면, AIDS의 기전은 HIV virus가 T-cell recepter에 붙어서  T-cell 의 면역기능을 억제하는데, 이 면역기능을 자연과학에서는 "외부에서 침입군이 쳐들어 왔을때, 군대처럼 나가서 싸우는 전초병"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즉 생물학의 기전을 설명하기위해서 사회의 관계들을 이용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 글은 구태여 자연과학, 또는 생명학에서 해답을 찾으려고 하는 가? 현실의 인간관계를 그대로 보면서 찾지않고? 

 

<논쟁점>

홍성태: 과학기술을 자본가가 사용하는 것이 문제이다.즉,  과학기술의 자본주의적 이용이 문제임.

이진경: 과학기술을 누가 만드는가? 이미 만드는 사람 자체가 이미 특정한 방식으로 생산하고, 그렇지 않은 것을 배제해야되지 않느냐?

 

 

2.반자본주의적 대항지구화운동의 쟁점 - 발표: 김창근, 토론: 조정환

<김창근> '맑스에 의하면 국가는 총체적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기구이며 상대적 자율성을 가진다. 국가가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측면에서 볼때, 자율성이 아니라 자본에 대한 철저한 의존성을 가진다.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이란 경제발전과 민주화의 문제이다. 노무현정부는 "삼성공화국"으로써 국가의 자본으로부터의 상대적 자율성이 거의 사라졌다.

<조정환> "노동의 자율성" "국가와 자본이 일치하므로 국가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네그리의 입장임.  

<논쟁점>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 국가의 역할에 대해서

 

3. 분자혁명론 - 발표: 윤수종, 토론: 이득재, 사회: 곽노완

<윤수종> 네그리, 가타리. 주체성영역에서의 출발이 중요하다. "주체적인 측면에서 시작하여 획일적인 것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선들을 찾아나가는것"  

<이득재> 한국사회에서 주체성을 타진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4.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와 탈자본주의의 전망 - 발표: 정남영, 토론: 강남훈

<나의 생각> 첫째: 비물질적 생산노동에서 노동시간이 가치척도가 되기 어렵다고 하면서 가치법칙을 폐기한 발표자(정남영)의 논지에 반대한다. 이 논지는 맑스의 가치법칙의 폐기를 주장하고 있어서 나는 이 의견이 이미 맑스주의를 벗어나있다고 생각한다.  노동시간이 더이상 가치측정의 척도가 되지 않는다면, 어떤 다른 것이 가치를 측정하는가? 비물질적 노동과 물질적 노동의 구분은 이미 맑스가 이야기한 육체적 노동과 정신적 노동의 또 다른 언어적 표현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미 맑스는 이 두 노동에 대해서 이미 이야기를 했었다.

둘째: 발표자는 비물질노동과 물질노동을 정의를 하고 있는데, 이것의 문제는 노동과 지식을 분리시키거나 혼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노동을 육체적 노동과 정신적노동으로 나눌 수 있고, 이 노동의 결과 만들어진 생산물이 비물질일 수 있고, 물질일 수 있다. 그러므로, 발표자는 노동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사회에서 생산되는 지식의 특징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강남훈> 지식을 노동과 대립시키는 견해는 잘못된 것이다. 가치법칙의 적용에 문제가 있다.

<논쟁점>

-정성진의 비판: 정남영의 논지는 가치법칙을 폐기했거나 잘못이해한 것이다. 가치법칙을 폐기했다면 이미 맑스주의가 아니다. 차라리 맑스를 버렸다고 해라.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가 자본주의적 경향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김세균의 비판: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를 통해서 노동자의 수평적 조건이 만들어진다는 이론에 반대한다. 자본주의하에서 지식노동-육체노동이 구상과 실현으로 분리되어 구상의 기능을 자본의 기능으로 가져가는 것에서 문제가 됨.지식노동과 육체노동의 재결합이 이루어져야만 노동자들의 수평적인 관계가 만들어질 것이다.

 

5. 코뮨주의적 생태문화사회구성체 요강 - 발표: 이득재, 토론: 김세균, 사회: 이성백

<이득재> 이행전략: 국가의 기능을 재정의하던지, 시장을 재정의하거나 변형시키는 방법, 국가와 자본에 대한 통제와 규제가 필요하다. 국가에 대한 규제, 자본, 사적소유에 대한 통제가 없으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상위체계(구조화, 계획경제)와 하위체계(association영역의 회복)의 선순환구조를 이루어내야한다.  국가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김세균> 코뮨사회로의 이행전략에 대한 이론적 한계를 보충하고 풍부화 했으면 좋겠다. 코뮨사회의 내용을 채웠으면 좋겠다. "노동사회에서 문화사회로" 가 아니라, "자본주의에서 꼬뮨사회로"라는 용어를 쓰면 안되는가?

<조정환> 이득재의 꼬뮌상이 기존의 국가사회의 이미지와 동일하다 (국가민주화론).

<논쟁점> 이행전략 (국가민주화론, 국가사멸론, PT독재론) 에서의 차이. 자율주의(조정환)는 자본주의를 코뮨사회로 직접 전환시킬 수 있다고 보는 것이고, 김세균은 자본주의를 노동자국가로 대체하지 않고서는 꼬뮨사회로 가기 어렵다는 것"이고, 이진경은 "어떻게 국가를 사멸시킬 것인가의 기획이 없이 국가를 어떻게 이행시킬 것인가 또는 변할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다르게 읽힐 수 있을 것이다. 국가사멸을 위한 이행과정에서 국가라는 물질적 장치(기존장치)를 어떻게 이용해서 사멸시키게 할 것인가? 생태문화적 자율구성체로부터 온다. 이진경은 문화연대가 참여연대와 다를게 없다고 주장하면서 공공성, 공공영역의 민주화, 국가민주화론으로 보이는 책임을 명확하게 이해시켜주지 않는다면 혼동의 책임을 우리에게 미루면 안된다.

정성진은 생태문화사회구성체를 굳이 사회구성체론으로 규정하면 과거의 사민주의 생산양식으로 가면서 공산주의를 끊임없이 미루게 되는게 아니냐?

 

 

<세부발표> Andreas Arndt  맑스의 철학

맑스철학에서 5가지 관점

1. 헤겔철학과의 만남

2. 헤겔철학의 비판

3. 유물론의 문제

4. 철학과 경제학의 관계

5. 변증볍과 모순의 문제 (맑스에게서의 변증법이 헤겔과 어떻게 다른가?)

 

<맑스에게서 철학이란 무엇인가?>

1. 헤겔철학과의 만남

 -맑스는 청년헤겔주의자가 아니라 항상 anti-Hegel주의자였다. 맑스는 헤겔리안인 적이 결코 없었다.

-맑스가 처음에 법체계자체를 꿰뚫으려고 했고, 그러다가 철학이 없이는 체계를 구성하지 못하겠다는 생각을 하게됨. 다시 헤겔로 돌아가는 가운데, 자신이 헤겔을 못벗어나고 있다고 생각함 (AMBIBALANCE). 이 당시 맑스는 헤겔로부터 벗어나려고 함에도 불구하고, 헤겔속에서 작업하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맑스가 박사학위를 쓰려고 할때, 헤겔의 논리학을 변형하려고 했다. 맑스의 박사학위논문은 트렌델렉의 논리적연구에서 헤겔의 모순론에 대해서 비판한 것에 대해서 헤겔의 논리학을 변형하려는 시도를 하게됨.

-맑스의 박사논문 "에피쿠로스와 데모크리토스의 자연철학의 차이": 헤겔의 역사철학부분을 다시 검토함. Epigonal 후계자: 고대의 아리스코텔레스이후의 배치되는 철학자와 헤겔이후의 자기시대를 대비시켜 보고자 함. 인간이 생각한것이 현실로 들어선다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을 질문하게 된다. 이념이 현실로 들어서야 된다고 하는게 무엇인가? 철학의 실현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맑스는 철학 자체를 다루고 있지는 않다. 철학을 현실에 대립해서 독자적인 힘을 갖는 것이 철학은 아니다라는 점! 언제나 현실에 뒤얽힘. 현실의 모순속에 들어가 있다. 철학은 현실과의 관계속에서만 철학이 존재하지 순수철학은 관계하지 않았다. 맑스의 철학연구부분이 헤겔과 다른 점은 헤겔자신이 역사철학을 다룰 때 논리, 자신의 논리학을 증명하려는 태도를 취하는 데 비해 맑스는 다른 것을 보려고 했다. 이것이 맑스의 연구업적일 것이다.

 

 

 

2. 헤겔의 법철학 비판

- 헤겔의 법철학의 비판: 더이상 로직의 문제가 아니다. 실제 현실과 연관된 로직을 다루게 된다. 이 헤겔의 법철학비판은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국가(Staat) <----> 시민사회(부르조아사회 Burgerl Besellsch) 와 이를 포함하고 있는 idee dess(국가자체)

 

1843년 법철학비판에서 끄집어내려고 한 것은 모순의 형식 (IDEA)에 대한 비판임. 헤겔은 부르조아사회가 사회 모든 부문에 삼켜버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나, 여기서 화해가 된다. 헤겔은 부르조아사회를 국가사회 그 자체로 보고 있는데, 맑스는 이를 비판함. 헤겔은 스스로를 구분해내지 못하게 됨. 국가와 부르조아사회의 대립은 스스로 국가가 조절한다고 하는게 논리적이지 않다는 게 맑스의 헤겔법철학 비판의 핵심이다.

 

맑스가 헤겔을 비판하는 핵심은 헤겔의 논리에서 국가와 부르조아사회의 진실한 대립이 가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것이고, 현실을 개념적 구성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맑스가 헤겔을 경험적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맑스는 헤겔이 경험가 사변을 왔다갔다 하고 있다는 점을 비판한다. 이것이 맑스의 헤겔비판의 출발점이다.

 

맑스는 제 2 인터내셔널에서 운동의 전략을 발전시키려고 하였다. 맑스는 끊임없이 묻는다. 우리는 우리의 일반적 이해를 관철시키기위해서 국가를 어떻게 이용할것인가?

 

-헤겔: 개별적인 과학으로 갈 때, 논리자체가 보장되고, 보존화되고, 확인되는 것이 헤겔의 특징이다. 즉, 논리가 자율적 운동을 한다는 것이다.

-맑스: 맑스는 논리적 자체가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고 봄. 맑스의 대안은 현실자체를 재구성하는 일이다.

           현실자체에서 특정의 추상적인 것을 추출해내고, 사변에서 추상적인 것을 추출해내는 일. 사유의 00에서 재구성하는 일임. 사물자체, 사태 논리적 관계가 등장하므로 문제가 되고, 현실일 수 없으며, 현실을 파괴함.

 

<질문1> 헤겔적 사변과 맑스적 사변이 다르냐? 아니면 맑스에게는 사변자체가 없는가?

Arndt 의 답==> Theory: 경험적 직관, 그럼에도 경험자체의 내재적 연관을 재구성하는 일이다. 맑스의 Theory는 이러한 내적연관이고, 경험 자체를 내적으로 재구성하는 일이다. 바로 이를 위해서 과학이 필요하고, 과학은 경험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추상을 가지고 작용함. 현실의 내적 연관은 경험만이 아니라 추상을 가지고 작용한다면, 이런 의미에서 바로 맑스에도 사변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질문2> 헤겔은 부르조아사회와 국가를 통합시켰고, 맑스는 국가와 부르조아사회를 분리시켰다. 국가내 시민사회를 반영할것인가? 아니면 파괴할것인가? 국가의 시민사회적 역할을 헤겔에서 찾아야되지 않을까? Arndt 의 답

 

Familie--BB---Staat

 

Staat

 

 

==> 헤겔은 국가를 강하게 하려고 했고,  이런 점에서 맞기도 하다. 맑스가 국가 전체를 보편적으로 끌어올리려는 주장을 하기엔 자신이 없었다. family등 정치이전의 사회, 직업단체등은 국가이전의 사회이다. 헤겔에서 부르조아사회의 국가수단은 FAMILY--> bg사회--> 국가 이다. 국가가 항상 존재하면서 가족이 작동하는데에도 국가가 작동이 안된다고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봄. 국가는 본질적인 관계인데, 이 Bg국가 자체는 통제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맑스와 헤겔은 동일했다.

 

1802-1804년도 헤겔의 자연변증법 논문에서 Bg국가와 국가이야기가 나오는 데, 헤겔자신도 자신이 없었다. 부정성의 부정으로 그 자체를 지향해 낼 수 있을 지는 자신이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헤겔의 태도는 불분명했다. 법철학은 이점에서 불안정했다.

그러나 이성의 자연성의 문제를 보면, 이들은 지양되어야 할 것으로 보는 것은 사실이다. 이것을 어떻게 해야할지는 정리하지 못함. 자연법철학: 자연법관계논문에서 한 것을 잘 진행못했다. 헤겔이 국가를 강력히 키웠던 것은 사실이고, 국가를 이용했더 것은 사실이다. 헤겔은 이것에 대해서 확실하게 개념정의를 하지 못했다.

 

맑스의 문제의식: 현실에서 제대로 돌아가느냐? 개별적 파편적 존재를 억제하느냐? 맑스가 보기엔 아니라는 것. 현실에서 이성국가를 보장하는 메카니즘이 존재하지 않길래 이를 보면서 맑스는 다른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 맑스의 작업이었다. 

헤겔의 이성국가는 문제가 있었다. 부르조아사회는 파편적, 국가는 정치적 차이가 있다는 점을 다시 강조함.

 

ㅌ    A

        S

bb

 

 

 

E     E

bb    S

 

 

id

S

 

 

              id

              s

E--------------------> B

bg                            S (국가)

 

 

맑스의 법철학비판은 헤겔의 논리학의 비판이다. 헤겔의 로직으로 재구성하는 문제: 맑스의 자본론에 중요한 형태로 남음. 국가의 보편성으로 지양될 수 있는가? 현실적 대립자체는 지양되어서 고차원적인 것으로 고양되지 않는다는 것이 기본적인 맑스의 논리의 모습이다.

 

대립적 모순: 구조적 모순으로 나오는 대립적 모순에서 구체적인 것으로 제 3의 것이 산출된다는 것은 예견되어 있지 않다. 대립이 매개되지 않는다.

 

 

3. 유물론의 문제

 

1844-45년 정신주의와 유물론의 대립이 제어되고, 헤겔과 포이에르바하에 의해서 사변적 사고와 형이상학으로 되는 것에서  중요테제: 헤겔: 낡은 형이상학과 사변적 형아상학과의 대별속에서 새로운 유물론이 탄생하고 새로운 유물론을 정립한 사람이 헤겔이다. 낡은 유물론과의 대립속에서 나온 것. 헤겔 자신을 새로운 유물론의 창시자로서 도발적으로 이야기함.

 

헤겔 사변의 완성: 17세기 형이상학을 지금까지의 형이상학과 일치시킨 것에 있다. 독일 관념론과 실제유물론 (형이상학적으로 해석된 자연이 지금까지의 유물론이었고, 형이상학적으로 해석된 관념이 독일관념론이었음)과의 양자의 통일로 이해를 하게 됨. 이들의 귀결은 실제형이상학과 의식 자체를 지금까지 유물론과 정신주의 대립을 무로 돌려놓는 쾌거였다. 이것이 맑스가 헤겔에서 따 놓은 부분이다.

==> 이 부분을 맑스를 쫒아서 개념화해보면, 맑스의 철학을 동일성의 철학으로 이해하고 재구성하고 있다. 이것은 자연과 정신의 동일성에서 이야기해야한다는 점. 정신과 자연의 통일속에서 자연과 정신의 통일을 꾀하는 것이 새로운 유물론이다. 지금가지 거론된 유물론과 다른 개념이다. 자여과 정신의 동일성 기반하의 동일성의 철학임.

맑스: 꺼꾸로 선 문제: 이데올로기적 문제와 비슷하다. 전도된 의식/이데올로기적 의식이란 이야기를 하고 있다.

 

                                Bestinensetim idealismus 

인간(Mensch)        ----------------------------------------> 자연(Nature) (정립되는 주체)

(정립되는 주체)    <---------------------------------------

                                Bestism Gesetatsesaltm

 

 

 

idealismus : 관념론과 대립되는 것으로써의 새로운 유물론==> 맑스 자신의 것

 

<인간과 자연의 관계>

관념론에서는 인간이 자연을 정립한다.

맑스의 유믈론은 이런 일방적인 것이 아니다. 자연에 의해서 인간이 규정(정립)되는 것, 이런 쌍방의 관계 (대상적 관계)이것이 새로운 관념론의 문제이고, 정립된 것의 통일, 정립한 것과 정립된 것을 자기관계속에서 통일시키는 것. 이것이 다른 것으로 지양될 수 있는 구조는 아니다. 자연은 절대 지양되지 않는다. 이것이 모순적인 관계이다. 이런점에서 옛날 유물론(물질형이상학)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질문1> 유물론과 관련된 부분에 관한 질문: 신진대사, 대상적 관계, 노동의 발전

--> 신진대사이상으로 의미를 끌어내는게 중요하다.

 

 

 

4. 철학과 정치경제학의 관계

자본론 1,2,3, 기획의 내용이 변함.

내용: 사회구성체의 일반적 규정들 bg사회 내적인 규정(자본론) 국가형태에서 bg사회생산의 국제적 관계. 셰계시장과 공황.

헤겔의 객관정신을 토대로 놓고 경제저작의 reader로 자본구성이 만들어 짐.

헤겔과의 비판적 관계: 맑스가 헤겔을 거꾸로 선 것을 비판하면서 system을 가지고 이야기 함.

헤겔과의 비판적 단절: 대상적 관계: 대립되는 것은 현실적으로 해소(지양)되지 않는다는 것, 구룬드리세: 방법은 주어진 현실에서 내적 연관성을 창출하고 총체성으로 설명함.

총체성을 하나의 subject로 규정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역사적으로 규정된 총체성의 주장으로 이야기해야함. 역사적으로 규정된 총체성에 대한 것을 규정해야함. 자기관계성으로 빠지지 않는  것이 되고, 역사적 조건성으로서의 총체성이다. 그래서 헤겔과의 구별된다.

헤겔에서의 총체성을 system 으로 구성하는데 (철학체계, 논리학, 자연..) 맑스는 이렇게 하지 않는다. 타자와의 관계속에서 총체성을 이야기 함. 우연적인 역사적 조건하에서의 총체성을 이야기 함.

 

2장 자본의 원시적 축적에서 개념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 담화적 서술인데, 역사의 우연적인 것을 총체성을 읽어내는 것, 구체적 현실을 읽어내는 면에서의 총체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규정된 총체성이 (1)노예제 사회의 고대와 근대를 비교하면서 (2) 생산관계, 생산량이 어느정도 있어야한다.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잘 이루어져야하고, 이것이 안되면 붕괴된다.

 

헤겔은 systrm이 역사적으로 조건지워진것을 부정하는 것이고, 맑스는 이를 부정하지 않는것, 이 차이이

 

 

5. 변증볍과 모순의 문제 (맑스에게서의 변증법이 헤겔과 어떻게 다른가?)

 

구룬드리세비판: 헤겔의 변증법의 관계를 이해해야한다. 헤겔의 논리학적 구성: 자기가 자기를 관계하는 논리학적 구조.  

맑스는 역사적으로 규정된 총체성을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자기논리학적인 것이 아니라 우연적이고 피상적이며 element한 것이다.

 

맑스의 totality: 유한한 총체성이지 무한한 총체성이 아니다. 헤겔에서 체계까지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규정된 현실내부에서 유한한 총체성이다. 이것이 맑스 총체성개념의 근본적인 것이다.

totality: 역사적으로 규정된 총체성. 과학이론, 대상을 규정한 이론에 적용된다.

헤겔방식: 근본적으로 존재한 관계규정을 재구성함.

헤겔: 추상----> 구체: 사유의 방법이다. 추상에서 구체로 상승한다.

맑스-----> 현실 자체의 산출이요 현실자체의 전체 현실자체를 재생산하는 일이다.

 

헤겔의 매개시키는 것: 맑스식의 이해. 구성적이고 본질적인 밖으로 지향적인 것이야말로 헤겔과 구별되는 맑스의 근본적인 출발점임.

 

변증법에선 현실의 차이를 규정하지 않는다.

 

헤겔의 이론: 이데아에서 끊임없이 재구성됨.

 

 

identity

 

 

ID     UNTEP

 

 

 

맑스: 이데아로 끊임없이 지향되는 점은 맑스에서 찾아볼 수 없다.

맑스는 헤겔을 수용하는데, 모순은 모든 변증법의 원천이다.

 

헤겔: 모순을 전제함

맑스: 실제적 모순임.

 

맑스: 적대적 비적대적 모순

이론적 모순들도 있다 (추상적 유물론, 영혼주의, 정신주의). 현실적 모순이 있다. 개념적으로 지향되지 않는다. 현실적 모순의 지양이 무엇이냐? 현실적 모순은 높은 차원에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실제 모순이 파괴된다는 것, 이것은 새로운 것이 나오는 것을 전제하지만 약속된 것은 아니다. 모순의 토대가 파괴되니까 새로운 것이 생겨나지만 싹이 어디로 가는 지는 모른다.

 

맑스: 자본주의에서 어떤 조건하에서 현실의 조건이 해소되느냐? 토대가 무너지느냐?

 

 

<결론> 부정적 변증법: 현재조건을 생각하고 조건분석을 하는것. 생산적 fantagy와 맑스를 진지하게 결합시키는 것. 헤겔과 맑스와의 관계: 헤겔: 외부의 관점으로 밖에서 보는 사람이 보고 이행하는 것. 내재적 이행은 없다. 절대적 관찰자가 있다. 모순: 헤겔의 논리학은 형식논리학과 틀리다. 헤겔의 논리학은 잘못됨. 헤겔의 작업은 논리적으로는 논리로 모순을 지적하고 알려주는 것인데, 헤겔은 진리를 끄집어내기위해 비진리를 갖다댐. 그런면에서 비난받을 수 있다.

헤겔주의: 헤겔에 비판적인 헤겔주의는 없었다.

헤겔은 맑스에 대립하지만, 맑스는 많은 것을 헤겔로부터 받아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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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t;정치파업&quot;의 역설: 정부와 보수언론은 어떻게 방해를 했는가? 그 결과는 무엇인가?

 "정치파업"의 역설: 정부와 보수언론은 어떻게 방해를 했는가? 그 결과는 무엇인가?


이번 6월 29일 파업은 정부가 이례적인 "정치파업"이라고 선전하면서 파업을 막으려고 쳐 놓은 온갖 바리케이트를 허물고 노동자들이 라인을 세우고, 공장을 세우고 거리로 나왔다는 것 자체가 의의가 있었다. 노동자들이 공장내의 비밀스러운 곳에서 자본의 탄압을 뚫고 공장을 세우고 거리로 나왔다는 것 자체가 자본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승리였다. 노동자들은 거리로 나온 순간 해방되었고, 거리는 노동자들의 정치학교가 되었다.


이번 투쟁의 또 하나의 의의는 정부와 보수언론은 이번 파업을 "정치파업"이라고 부름으로써 노동자와 민중의 계급투쟁을 인정하였다는 것이다. 정부와 보수언론의 이러한 부추김 때문에 오히려 노동자계급의식이 한층 고양되었다는 것이다. 정부와 보수언론이 이번 파업을 최초의 정치파업이라고 규정했지만, 어디 이것이 최초의 정치파업이란 말인가? 87년 6월 항쟁에 이은 7,8,9 노동자 대투쟁, 96-97 노동법개악저지투쟁, 2002-2006년동안 지속된 비정규직 악법저지투쟁 등도 정치파업이며, 모든 경제투쟁은 바로 정치투쟁이다. 대중파업은 경제적인 영역에서 정치적인 영역으로 느끼지 못할만큼 슬그머니 옯겨갈 뿐 아니라, 경제적인 영역과 정치적인 영역사이의 분리선을 거의 그을 수 없다 (로자 룩셈부르크. 대중파업론. 1995). '즉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은 하나인 것이다. 바로 자본주의사회에서 자본가적 착취를 제한하면서 동시에 자본주의사회 그 자체와 함께 착취를 폐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계급투쟁인 것이다 (로자 룩셈부르크. 대중파업론. 1995).  


한미 FTA체결하려는 노무현정권의 태도는 과히 광분적이어서 지난 2007년 4월 1일 허세욱동지가 '한미 FTA폐기하라'며 분신을 하던 바로 그 시각에, 노무현정권은 한미 FTA 1차협상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이번 6월 29일 한미FTA저지 투쟁을 저지하려는 정부의 억압과 각 보수언론의 방해공작은 가장 비열했다.


“현대차는 정치파업… 도요타는 미래차 기념회 (www.chosun.com), “현대차 이틀파업 700억원 손해, 현대차 이틀 파업에 일인당 16만원의 임금손해 ([YTN] 2007년06월 30일(토) 오후 05:40)…"


이렇듯 자본은 노동자가 겨우 이틀 파업을 했는데, 700억-800억의 손해를 보았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거꾸로 뒤집어 보면, 노동자가 없이는 어떠한 생산도 할 수 없다는 자본가의 무기력함을 보여주는 꼴이 되고 말았다.


어디 이뿐인가? 공장의 라인을 중단하려는 노동자와 회사측의 관리자편에 선 노동자를 가르면서 노동자들을 분리시키고 교란시켰다.


이러한 정부와 보수언론의 방해노력은 오히려 노동자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고 있다.


또한 정부와 보수언론의 방해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까지도 집회에 참가하고자 하는 의욕을 고취시켜주기에 충분했다. 나는 이번 투쟁에서 온갖 보수언론과 정부의 방해공작에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운 노동자들을 만나기 위해서 거리로 나섰던 것이다. 이번 정부의 이데올로기 협박과 언론을 이용한 노동자계급과 민중에 대한 방해에 분노한 나는 이 투쟁에 기어코 끝까지 참여하고 말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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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꼭대기에 오르는 사람은

요새 산에 가는 사람들이 제일 부러운데^^...

 

기봉이짝꿍님의 [노고단에 오르다~~!!] 에 관련된 글.

산꼭대기에 오르는 사람은   

                                               

                                                                       조지 고든 바이런

              

                                    산꼭대기에 오르는 사람은 보리라

                                    구름과 눈에 가리어진 제일 높은 봉우리들을

                                    인간을 넘어서거나 압도하는 자는

                                    아래 있는 자들의 증오를 멸시하리라

                                    저 높은 곳에 태양의 영광 빛나고

                                    저 낮은 곳에 대지와 대양 펼쳐 있지만

                                    그의 주위엔 얼음 바위, 앞을 다투는 폭풍들이

                                    맨 이마를 시끄럽게 때리며

                                    그 정상들로 이끌었던 노고에 보답한다.


                                       (“해롤드 공자의 편력” 중에서, 손현숙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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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꼬뮤날레 일정 안내

"21세기 자본주의와 대안적 세계화"

<제3회 맑스코뮤날레 학술문화제 전체 주제 설명>

올해는 6.10민주항쟁 20돌을 맞이하는 해이다. 그러나 20년 동안 세계는 급속한 변화를 겪었다. 이런 변화는 단지 세계적 차원 또는 정치-경제의 거시적 구조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 이런 거시적 차원의 변화는 미시적 차원에서의 일상적 삶의 변화로 내재화되고 있으며 역으로 미시적인 일상의 변화들이 거시적인 자본의 지배를 만들어내고 있다. 아울러 변화의 층위도 정치-경제적 구조들뿐만 아니라 사회문화적이면서 일상적인 욕망의 차원들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80년대 '맑스'의 이름으로 행해졌던 자본의 지배를 넘어서기 위한 시도는 이제 더 이상 그대로 지속될 수 없다는 점이 점점 명확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맑스의 정신, 자본주의와 다른 세계를 모색하는 비판적 사유의 정신은 '맑스' 코뮤날레를 통한 자본과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시대정신을 매개하는 끈이다.    
국가권력을 필두로 하여 시민사회 내부에서는 87년 6.10민주항쟁 20돌을 기념하는 대대적인 경축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이들은 지배의 시간을 단절시키기 위해 분연히 떨쳐 일어났던 6.10민주항쟁을 몇몇 정치명망가들의 업적으로 왜곡하고 있다. 여기에는 87년 6월의 대지를 흔들었던, 작열하는 태양빛에 달구어진 딱딱한 아스팔트를 누볐던 '존재의 함성'이 없다. 그것은 오히려 그 당시 혁명적 열정들과 '존재의 심연에서 터져 나오는 함성'을 추억으로, 과거로 만들며 오늘날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유발하는 대중의 역동성을 외면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포획된 비루한 일상과 현실을 은폐하는 '무화과 잎사귀'에 불과하다.
바로 그들이 오늘날 진보를 이야기하면서 전지구적 자본의 지배 욕망을 끊임없이 일상적 차원으로 이전시키고 자본의 지배로 바꾸어 놓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전지구적 자본화는 더 이상의 외부를 용납하지 않는다. 세계는 자본의 이윤 증식을 위한 전쟁터가 되어 가고 있으며 지상의 모든 생명들은 그 전쟁의 포화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 자본은 더 이상 지키고자 하는 가치나 규범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인간의 욕망에 달라붙어 생명을 분절하고 이윤증식의 기계로 바꾸어 놓고 있다. 그들은 자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한다는 국민국가의 외피조차 벗어던지고 있다. 한-미 FTA가 보여주듯이 국가는 초국적 자본의 대행자가 되어가고 있으며 자본의 이윤 증식의 욕망에 존재의 모든 가치와 생명력을 팔아넘기고 있다.
인류의 사회화된 노동이 성취한 물질적 풍요는 단지 10%를 위한 부의 증식 욕구가 되고 있으며 그들의 권력이 되고 있다. 청년들은 더 이상 자신의 잠재적인 능력과 가치를 위한 삶을 꿈꾸지 않는다. 그들이 대학에서 배우는 지식은 '지성'이 아니라 '자본의 이윤증식을 위한 도구'들이며 자신의 몸을 자본의 기계로 바꾸어가는 '자본의 지식'이다. 대학은 자본의 증식을 위한 신자유주의적 기제가 되어가고 있으며 사회는 온통 생산 기지가 되고 있다. 높은 청년실업률과 불안정노동층의 확산은 존재 가치의 상실과 생존의 위협을 낳고 있다. 여기에는 오직 하나의 명령만이 있다. "자본의 기계가 되라."
오늘날 우리 사회의 보수화는 이와 같은 생존의 위협과 목숨을 건 무한 경쟁이 유발하는 '죽음의 충동'일 뿐이다. 박정희 신드롬이 그렇고 이주노동자에 대한 인종적 편견과 착취, 그리고 (여)성과 소수자들에 대한 적대성이 그렇다. 자본의 지배는 경제적 층위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자연적인 생명과 인종, 성, 그리고 욕망을 포획하며 잉여가치 창출을 위한 수단으로 전화시킨다. 그들은 모든 삶의 지평을 자본의 이기적 경쟁과 탐욕스런 욕망의 전쟁으로 바꾸어 놓는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자본이냐 생명이냐', '자본이냐 인간이냐', '자본이냐 존재냐', '자본이냐 삶이냐'의 선택에 직면하고 있다.
'맑스 코뮤날레'가 3회 대회의 주제를 "21세기 자본주의와 대안적 세계화"로 잡은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지배의 코드화와 그것에 포획되는 욕망과 일상을 벗어나 새로운 혁명적 역동성을 새로운 삶과 세계의 가능성을 탐색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가능성은 더 이상 '맑스'에 대한 교조적 읽기를 의미하지 않는다. 맑스의 현재성은 '맑스의 과거'가 아니라 '현재'라야 하기 때문이다. 맑스에게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는 것은 과거의 맑스가 아니라 오늘의 맑스이다. 오늘날의 현실적 변화들에 근거하지 않은 맑스는 이미 죽은 맑스일 뿐이다. 맑스코뮤날레는 '맑스의 현재성'을 모색하며 이런 차원에서 새로운 현실의 변화를 탐색한다. 오늘날 자본의 지구화는 정보-자동화, 소비사회와 같은 새로운 사회변동과 더불어 다양한 갈등을 유발하고 있다. 따라서 새로운 대안적 세계화를 위한 모색 또한 '자본주의와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비판적 사유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맑스주의의 역사를 내재적으로 비판하거나 징후적으로 읽음을 통해서, 또 어떤 사람들은 들뢰즈-가타리, 네그리를 경유해서 다시 맑스에게로, 아니면 맑스와의 비판적 대결을 통해서 맑스를 비판적으로 해체하는 방식으로 '코뮤니즘'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여기에는 다양한 관점과 시각들, 새로운 세계에 대한 우리의 봄을 확장시키는 새로운 열림이 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 상이한 관점과 시각들 위에서 상호 충돌하는 부딪힘이 있다. 이것은 단지 '현실사회주의권의 해체와 맑스주의의 위기'의 사후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오늘날 21세기 자본주의가 이전의 세계와 다른 지평을 창출하고 있으며 그 지평 위에서 다른 갈등과 가능성들을 낳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필요로 되는 것은 아마도 맑스의 텍스트가 아니라 맑스의 텍스트 안에서 살아있는 비판적 사유의 정신과 지배의 평면 위에서 다른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하는 새로운 시대정신의 모색일 것이다. 텍스트는 자본의 지배와 다른 세계를 찾는 우리의 비판적 정신에 활력과 영감을 주는 소재에 불과할 것이다. 따라서 상이한 관점과 다기한 시각들의 충돌은 죽은 말들이 아니라 현실을 호흡하는 정신의 살아있음, 정신의 활력과 생명력을 오히려 표현할 뿐이다.
오늘날 이 절박한 시대정신의 울림이 이번 제 3회 맑스 코뮤날레에서 가장 집약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전통적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여겨져 왔던 '정통' 맑스주의의 '공산주의론'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과 탐색이다. 현실사회주의권의 몰락 이후 더 이상 기존의 맑스주의로 21세기의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없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각 단체별로 각기 자신의 연구 공간에서 연구자 나름대로의 대안 사회에 대한 상과 전략을 모색해 왔다. 이번 대회에서는 이런 성과들이 보다 구체화되었다. 대표적으로 문화과학의 '코뮌적 생태문화사회'와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코뮨주의', '21세기 사회주의를 위한 대안적 경제전략'을 모색하는 마르크스주의연구/경상대사회과학연구원,  '21세기 사회주의'를 탐색하는 노동자의 힘/진보평론 등이 그러하다.
이득재는 「코뮌주의적 생태문화사회구성체 요강」에서 대안사회의 전략으로 생태적 문화사회구성체를 제안하고 있다. 그는 상위체계에서 자본·국가의 연합에 균열을 내며 사회공공성을 재구성해가는 지역적·전국적·세계적인 연대를 촉진하며, 하위체계에서 생태문화코뮌네트워크와 지역평의회 및 협동조합을 중심축으로 하는 자립적 능력과 직접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새로운 사회운동을 제안한다. 이와 더불어 문화과학은 '대안세계를 위한 문화사회운동'이라는 주제로 코뮌적 생태문화사회의 전략을 탐색한다.
「19-20세기 서구 코뮌주의 운동에서 문화적 관점의 동요」를 발표하는 강내희는 맑스와 엥겔스가 문화혁명을 변혁운동에 필수적 요소로 인식했다고 하면서 자본 축적 메커니즘의 근본적 지양과 함께 새로운 삶의 방식 즉 문화의 창조를 동시에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심광현은「코뮌적 생태문화사회의 필요조건: 생산양식 주체양식의 공시적 변화」에서 '역사적 공산주의'가 주체양식의 변화를 간과한 반면 무정부주의 혹은 공동체주의는 생산양식을 간과했다고 평가하면서 산 노동이 자본의 도구가 되는 노동사회 대신 죽은 노동이 주체적 역능(지적·정서적·윤리적·신체적 역능) 향상의 수단이 되며 자연과 공생가능한 생태문화사회로의 이행을 모색한다. 아울러 이동연은 「'역사적 문화운동'에서 배우기: 문화사회로의 이행을 위한 인식적 지도 그리기」에서 '아래로부터의 개인들의 자율성의 확대'와 '사회 공공성의 민주적 네트워크'를 화학적으로 절합하고자 했던 역사적 문화운동들을 비판적으로 탐색하고 있다.  
연구공간 '수유+너머'는 "공산주의에서 코뮌주의로"라는 주제하에 새로운 '코뮌주의'를 모색하고 있다.「대중이란 무엇인가: 코뮌주의 신체론」을 발표하는 고병권은 코뮌주의 역사에서 대중은 대체로 대상화된 실체로 간주되어 왔다고 비판하면서 실체가 아닌 '흐름(flux)'으로서 대중 개념을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박정수는 「코뮌의 욕망, 욕망의 코뮌주의」에서 욕망을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 물질적 생산의 능력이자 형식으로 파악하고 자본주의 하부구조로서의 욕망의 체제를 해체하고 코뮨적 욕망의 체제를 구성하는 전망을 모색한다. 또한 정정훈은 「코뮌주의에서 능력의 개념」에서 맑스의 능력 개념을 잠재력과 협력으로 파악하고 이런 능력을 구현하는 코뮌이라는 새로운 사회의 구축 운동을 '코뮌주의'라고 규정한다.
반면 "21세기 사회주의를 위한 대안적 경제전략"을 모색하는 마르크스주의연구/경상대사회과학연구원은 「재생산위기와 진보적 재정정책」을 발표하는 장상환을 필두로 하여 '기본소득' 담론에 대한 재검토를 통해 기존의 자본소득과 지대소득을 폐기하고 모든 사회 성원에게 연령별로 균등 분배하는 '사회연대소득'을 주장하는 곽노완의 「기본소득-이행전략으로서의 가능성과 한계」, 그리고 신자유주의 시장경제 모델에 대한 대안적 경제 모델로서 시대착오적인 케인스주의적 사회적 시장경제나 그 자체 형용모순인 시장사회주의가 아니라 시장경제 자체의 지양으로서의 맑스적 의미의 계획경제, 즉 참여계획경제를 주장하는 정성진의 「참여계획 경제의 가능성과 쟁점」을 발표한다.
노동자의 힘/진보평론의 연합 섹션은 "신자유주의와 21세기 사회주의"라는 주제로 오늘날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새로운 맑스주의의 사상과 전략을 탐색한다. 여기서의 화두는 21세기 사회주의이다. 남구현은 「신자유주의와 노동자정치」에서 신자유주의가 계급투쟁의 지평을 넓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사회주의가 유효하며 노동자정치를 통해 이를 돌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성백은 「네오모더니즘과 21세기 사회주의」에서 탈현대주의의 문제설정의 한계를 지적하여 네오모더니즘을 새로운 문제설정으로 제시하면서, 이 문제설정의 기초로 하여 21세기 사회주의를 사유할 새로운 관점을 모색하고 있다. 박영균은 「이행의 아포리아와 21세기 사회주의」에서 사회주의의 이행 문제에서 '이행의 아포리아'에 빠지는 것은 경제학적 문제 설정에 있다고 비판하면서 사회주의 이행 문제를 대체권력을 형성하는 정치적 문제 설정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개별적인 연구자들 간의 소소한 차이를 무시하고 본다면 문화과학, 연구공간 수유+너머, 마르크스주의연구/경상대사회과학연구원, 노동자의 힘/진보평론의 연합 섹션은 각기 다른 관점과 입장에서 '대안 사회'의 상과 전략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오늘날 맑스의 공산주의를 읽는 현실을 보는 방식의 차이들과 존재에 대한 관점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논의는 80년대식의 '정통' 맑스주의적 관점, 또는 획일적으로 규정되어왔던 대안사회에 대한 논의들을 해체하면서 다른 관점과 시각들을 열어가고 있다. 여기서의 쟁점은 맑스의 공산주의에 대한 논의가 지닌 현실적 유효성과 적합성, 그리고 대안사회의 핵심적 구성 원리이다.
그러나 이런 대안사회의 모색은 자본지배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사유라는 텍스트와 현실의 대결을 함축하며 존재에 대한 우리의 사유를 함축한다. 따라서 오늘날 21세기 자본주의에 대안전략을 마련하는데 있어서 보다 근본적인 탐색은 철학적 사유 없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존의 사고들과 개념들을 전복하거나 해체하는 작업이 될 것이며 여기서 들뢰즈-가타리, 네그리는 1, 2회 맑스 코뮤날레와 마찬가지로 3회 대회의 주제인 21세기 자본주의와 대안적 세계화를 다루는 데에서도 여전히 주요한 안내자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들의 텍스트는 맑스주의의 텍스트, 맑스의 텍스트와 일정한 긴장관계를 가지면서 기존의 관념들을 전복하고 해체한다. 그러나 이런 관념들의 전복과 해체는 현학적인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날 자본주의가 '생산'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인간의 욕망과 일상의 삶을 지배하는 내재적인 틀이 되어가면서 존재의 지평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오늘날 자본주의를 사유한다는 것은 이전과 다른 존재에 대한 다각도의 사유 변환과 읽기를 함축하고 있다.
정남영은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와 탈자본주의의 전망」에서 맑스의 자본주의 분석을 통해서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를 재해석하고 오늘날 자본의 부를 생산하는 방식은 이전과 다르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자율평론은 '들뢰즈의 철학'을 통해서 전통적 맑스를 해체하고 새롭게 맑스를 읽고자 한다. "들뢰즈의 유물론적 존재론"이라는 주제하에 조정환은 '오늘날의 노동은 직접적으로 사회적인 노동'으로, 노동의 지속시간으로 공간화된 시간 개념과 가치 개념은 더 이상 사회적 결합노동을 규율하는 척도가 될 수 없다고 하면서 들뢰즈의 시간론을 재검토한다. 마찬가지로 승준 또한 「들뢰즈의 표현주의」에서 들뢰즈의 표현주의를 통해서 맑스주의의 3가지 체계를 해체하고 스피노자의 표현, 역능, 덕과 같은 개념으로 새롭게 재해석하고 있다. 여기에 자율평론이 아니지만 함께 발표하는 이정우는 「들뢰즈의 잠재성」이라는 논문을 통해 들뢰즈를 단순한 생성존재자로서만 아니라 생성의 바탕 위에서 어떻게 동일성들이 생성․소멸하는가를 밝히고자 한 철학으로 읽는다. 그리고 이를 중심으로 하여 맑스-엥겔스의 생산양식론을 들뢰즈․가타리의 추상기계론으로 세련화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 외에도 다양한 각도에서 기존의 인식 틀을 바꾸고 새로운 관점에서 새로운 실천적 행위를 제안하는 글도 발표되고 있다. 이번 대회에 특별히 초청된 독일 철학자 아른트는 「시간의 경제」에서 노동시간과 비노동시간을 구분하고 자본주의가 구조화하는 노동이 무엇보다도 비노동시간에 대한 평가절하와 노동시간에의 종속, 그리고 생산성 향상이라는 노동시간의 지배라는 점을 제시하면서 시간의 경제는 가치증식요구라는 자본의 시간으로부터 해방되어 '사회적 통제' 아래서 최대의 비노동시간을 확보하고 그것을 사용하는 법을 익히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생명의 권리와 자본의 권리」를 발표하는 이진경은 '인권'을 대신할 '생명권'을 제안하면서 생명을 분할 불가능한 개체가 아니라 항상 이미 복수의 요소들이 모여서 구성된, '중-생적 공동체'로서 선물의 체계로 파악하고자 한다. 따라서 그는 이 선물의 체계인 순환계를 잉여가치 형태로 착취하는 자본에 대항하는 생명권은 투쟁의 지대라고 주장한다. 윤수종은 「분자혁명론」에서 레닌주의(집중제)와 무정부주의(무지배주의)라는 양자의 조직 모델을 비판하고 가타리를 통해서 새로운 조직 모델을 모색한다. 그는 가타리가 집중제를 일방적으로 폐기하지 않고 이해관계에 근거한 기존의 계급투쟁(몰적 투쟁)을 다양한 사회투쟁(분자적 투쟁)과 결합해 가면서 장기적이고 복합적이며 누적적 혁명과정(분자혁명)을 제안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20세기 좌파사상 비판 그리고 그 너머"라는 주제 하에 조직된 사회비판아카데미의 다섯 개의 논문들 (김치수의 「『자본』이후의『자본』- 최초의 범주들에 대하여」, 금민의 「화폐와 시간 -『자본』의 관점에서 본 20세기 좌파철학」, 차문석의 「현실사회주의와 화폐」, 임운택의 「20세기 사민주의, 그 가능성과 한계 - 서유럽 사례를 중심으로」, 강정석의 「68혁명과 맑스주의」)은 맑스주의와 좌파운동을 그 내부에서 비판적으로 다시 읽어가고 있다. 김치수는 『자본』서술 상의 최초 범주인 상품에 대한 해석론을 중심으로 하여 20세기의 『자본』연구사를 비판적으로 조망한다. 금민은 맑스의 화폐 개념을 일반성의 문제와 시간철학의 관점에서 재구성하고, 이로부터 20세기 좌파철학의 비판적 분석을 위한 개념용구들을 끌어낸다. 아울러 사회비판아카데미는 20세기 좌파의 세 가지 주요한 조류인 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 68혁명기의 좌파 사상에 대한 역사적이고 구체적인 분석을 제공한다. 이는 현실사회주의와 화폐에 관한 차문석의 발표, 20세기 사회민주주의의 역사를 개관하며 1990년대 이후의 신사민주의의 가능성과 한계를 평가하는 임운택의 발표, 그리고 68혁명과 맑스주의에 관한 강정석의 발표를 통해 이루어진다.  
뿐만 아니라  단체 섹션에 들어가 있지 않지만 오늘날 매우 의미 있는 제안과 사유의 변환을 담고 있는 글들이 발표된다. 68혁명운동 이후의 전통적 좌파와 탈물질주의의 대립을 비판하고 21세기 신자유주의가 이 두 입장을 한 점으로 수렴시키고 있다고 주장하는 정병기의 「68혁명」을 비롯해 혁명은 진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역사의 파국적 발전을 중단시키는 '블랑키'적 행동이라고 보는 벤야민의 혁명론을 1)중단의 정치학, 2)의식보다 감성에 정향하는 정치학(도취와 구성), 3)부르주아적 개인의 자율적 주체를 벗어나는 집단의 신체적 '신경감응'(Innervation) 등으로 조망하는 최성만의 「벤야민에서 혁명과 인간학적 유물론」, 그리고 부르주아 체제를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동일하게 이해하는 관점을 비판하고 민족감정과 자본주의 경제 간의 관계를 고찰하고, 이를 통해 부르주아적 욕망이 무엇인지, 그 욕망을 통해 시간성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탐색하는 고태경의 「맑스주의 유물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논문들이 발표된다.  
  이번 대회에 새롭게 참여하게 된 에스페란토-레토(준)는 "에스페란토와 맑스주의"라는 주제로 만국 공통어인 에스페란토를 통해서 영어제국주의에 대항하고 인류공통의 공동체를 건설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정현수는 「맑스주의와 에스페란토 운동의 역사」에서 오늘날의 영어가 사실상의 제국어로 기능하고 있는 상황에서 언어 소통의 민족적, 국민국가적 한계를 뛰어넘을 공통어의 출현 없이 사회적 인류의 발전과 개인의 발전이 서로의 조건으로 되는 관계를 실현하고자 하는 인류인주의는 실현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최만원은 항일민족해방투쟁 과정에서 에스페란토가 수행한 역할을 역사적으로 규명하는 「일제하 공산주의운동과 에스페란토운동」을 발표하고 산도르 호르바스는 「영어만의 세상?」이라는 논문에서 에스페란토가 전지구적 의사소통을 공정하고 효율적이면서 정당하게 조직하는 방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다양한 영역에서 다양한 방식들의 전복적 읽기와 해체, 그리고 새로운 사유 양식의 모색과 제안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물론 이 또한 단일한 하나의 목소리가 아니다. 그것은 소재의 다양성을 넘어서 그 소재들을 다루는 연구자들의 다양한 존재론적 관점과 사유의 방식들을 함축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정통' 맑스주의 안에서 '맑스'의 이름으로 봉쇄되거나 봉합되어 왔던 '사유의 불임'을 넘어서 새로운 관점에서 '사유를 개방'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런 사유의 개방은 오늘날 지구화된 자본, 그리고 존재의 가치와 욕망을 자본의 내재적인 지배의 평면으로 바꾸어 놓고 있는 현실에 대한 진지한 탐구와 이를 넘어서기 위한 다양한 모색들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우리는 보다 깊이 있게 존재를 사유하고 세계를 볼 수 있는 시야를 가지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전지구적 자본화는 다양한 갈등과 투쟁의 양상들을 낳고 있다. 이것은 전통적인 산업노동자를 중심으로 하는 계급모순과 다른 투쟁의 지평을 창출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다양한 영역에서 전개되는 투쟁의 양상들과 접근들, 그리고 그 운동들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탐색이 필요하다. 이번 3회 맑스 코뮤날레에서는 여성주의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문제의식을 담은 논문들이 제출되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는 "21세기 여성과 미래 여성주의"라는 주제로 이재유가 「코뮨형성과 가사노동의 가치의 문제에 관하여」를, 연효숙이 「들뢰즈 가타리의 소수적 여성주의」를 발표한다. 이재유는 자신의 논문에서 여성해방 없이 노동해방도, 생산력의 발전도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구체노동이 사용가치만을 생산하는 노동이 아니라 사용가치를 소비하는 노동이기도 한데, 성별분업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사노동은 대부분이 여성에 의해 수행되기 때문에 노동자계급이 대자적 계급이 되는 것을 가로막는다고 주장한다. 반면 연효숙은 여성운동을 소수자운동의 관점에서 접근한다. 그는 21세기의 운동이 소수자 운동이라고 주장하면서 거대한 집합적 연대의 운동으로서 여성운동이 아니라 소수적 여성주의 운동의 정체성을 탐색하고 있다. 여기에 제시된 다양한 쟁점과 입장들은 여성주의 운동이 발전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논의이자 운동의 활성화와 전망을 위한 논의에 새로운 활력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는 "한국 기독교의 반민주세력화, 그 역사적 뿌리에 대하여-1907년 평양대부흥운동과 성령의 정치"라는 주제로 초점을 맞추어 오늘날 한국에서 보수적 기독교운동의 뿌리와 역사적 기원을 추적 비판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보수주의적 정치행태와 보수세력에 대한 향도적 역할이 어떤 변화와 조건에 기인하는지를 분석하고 있는 최형묵의 「한국기독교 보수주의의 기원과 성격」을 필두로 하여 한국기독교의 성령 해석이 작위적이라고 비판하라고 비판하면서 성서 속의 지배적인 성령은 질서 해체적이며 탈권력적인 비합리적 동력과 관련되어 있다는 김진호의 「성서 속의 성령과 한국교회의 성령의 도구화」, 그리고 이숙진의 「성령운동의 젠더정치」가 발표된다. 이것은 한국사회에 거대 권력으로 성장한 한국기독교의 정신적 기원과 사고방식을 비판적으로 검토함으로써 오늘날 보수기독교의 '권력화'와 '자기확장의 지배욕'을 근원적으로 비판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오늘날 우리의 비판적 사유가 최종적으로 향하고자 하는 것은 자본 지배의 현실 그 자체를 실질적으로 바꾸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자본 지배와 전혀 다른 세계를 직접적으로 현실화하는 것은 아니며 그와 같은 거대한 변혁을 총론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당장 현실적으로 주어진 삶을 바꾸어갈 수 없다면 그것은 죽은 사상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존재의 결단을 통해서 개인의 일상과 삶을 바꿀 수 있다. 사유는 분명 여기에 커다란 역할을 한다. 그러나 아울러 우리는 또한 그 사유가 정치사회적 구조를 바꾸는 작업과 병행해 가야하며 사유는 이 과정에서 이 존재의 결단과 걸음을 안내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이번 맑스 코뮤날레에서는 1, 2회 대회와 마찬가지로 당장의 현실에서 쟁점으로 부각되었거나 부각되어야 할 정치-경제-사회적 쟁점들에 대한 비판적이고 대안적인 탐구들을 진행하고 있다.
김창근은 「반자본주의적 대항지구화운동의 쟁점」에서 1980년대 초반 이후 한국 자본주의 발전과 국가의 성격이 바뀌었다고 진단한다. 그러나 그는 시장개혁론과 발전국가론이 모두 다 1960년대와 1970년대 경제발전의 주요한 원인을 발전 '국가'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네오 맑스주의의 국가 이론에서 나오는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 개념을 재검토하고 있다. 또한, 서강대사회과학연구소는 "세계화시대 한국민주주의: 검토와 모색"이라는 주제 하에 「'경찰국가'와 한국 민주주의」를 발표하는 김세균을 비롯하여 지방정부의 기업주의화가 오히려 경쟁적인 도시 및 지역 개발과정을 통해 지역불균등발전, 지역주민의 양극화, 지방정부 재정의 부실화를 낳고 있다고 비판하는 최병두의 「'세계화'와 지방정부의 기업주의화」, 그리고 한국 시민사회의 참여 민주화의 방향과 과제를 모색하는 유팔무의 「한국시민사회의 민주화와 참여민주화의 대안」, '노동운동 위기론'이라는 담론을 실제 노동운동의 위기가 아니라 연구자, 활동가에 의해 (재)구성되는 메타 히스토리(meta-history)라고 규정하고 이를 분석하는 김원의 「신자유주의 시기 '노동운동 위기론': 지속 혹은 변주?」가 발표된다. 이외에도 "대안을 찾아서"에서는 불로소득을 근절시키고 주거비를 절반 이하로 낮추기 위해서는 보유세 강화보다 택지 국유화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강남훈의 「택지국유화 강령」을 비롯해서 박거용의 「영어의 전지구적 확산과 대안적 영어교육 정책의 모색」, 송유나의 「반자본 공공성쟁취투쟁과 에너지」 등이 발표된다.
특히 이번 대회는 미래의 시대정신을 만들어갈 새로운 신진 연구자들인 대학원의 석․박사과정생들이 함께 하는 <영 코뮤날레>가 처음으로 개최된다. 이들은 오늘날의 자본 지배를 거부하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진지한 열정으로 만나 학문과 현실에 대한 열정을 토해내는 자리를 만들었다. 이들은 최근 한국 사회에서 국가 권력에 의해 폭력적으로 다루어지고 시민사회 내부에서 일면적으로 다루어졌던 '성매매/성노동'과 '대학에서 맑스주의자로 살아남기'라는 자유포럼을 진행한다. 아울러 '2007, 2030세대의 맑스'라는 개인 자유발표세션에서 자본 지배의 현실에 대한 대결을 포함하는 비판적 사유를 담은 10여개의 참신한 논문도 발표한다.
오늘날 우리의 삶과 현실, 일상을 생산하고 조직하는 것은 자본처럼 보인다. 21세기 자본주의에는 외부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노예적 삶을 강요하는 자본의 포획과 지배로부터 벗어난 다른 세계, 다른 삶, 다른 가치들을 모색한다. 그것은 자본의 전일적 지배가 우리의 근원적 열망과 생명력을 영원히 잠재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야만'을 강요하는 자본으로부터 단절된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는 것은 시대정신을 만드는 '힘'이자 비판적 사유를 이끄는 '파토스'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 '대회'를 다름 아닌 '맑스'의 이름으로 불린 '코뮤날레'라고 정의했다. '코뮤날레communale'는 '코뮌commune'과 '날레nale'('축제의 해'라는 뜻)를 합성한 조어로서, 맑스의 희망과 좌표인 코뮌의 해, 코뮌의 이상을 담은 축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맑스 코뮤날레는 오늘날의 '야만'적 세계상의 혼란을 극복할 수 있는 지향적 좌표로서의 '코뮌' 안에서 '맑스'를 다시 불러내고 이 안에서 현실의 모순과 극복의 방향을 모색하고자 한다.
여기서 정답을 알고 있는 선지자도 예언자도 없다. 맑스의 정신 안에서 맑스의 비판적 사유와 혁명적 열정을 부여받았지만 맑스 또한 정답은 아니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세계에 대한 그 현실적 전망을 모색하는 작업은 그 현실의 짐을 떠맡을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주어져 있을 뿐이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해석들과 다양한 철학적 관점들, 그리고 다양한 해법들이 제시되고 있다. 비록 이와 같은 접근과 해석들이 연구자 개인들의 관심사와 열정, 감성, 가치에 따라 상호 충돌하고 심지어 서로 직접적인 갈등을 유발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오늘날 '자본의 지구화'와 다른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는 지평 위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공통의 문제의식과 그 문제의식을 생산하는 공통의 현실에 근거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일어나는 소소한 분란과 충돌은 '대안적 세계화'를 위한 우리의 실천적 관심을 더욱 고조시키고 활성화하는 '생성의 힘'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비록 다양한 정치적 입장들과 해석들이 공존하지만 그것은 오늘날 자본이 전일적으로 관철시키고 있는 이 지배의 평면을 벗어나기 위한 함성이라는 데에서 맑스 코뮤날레는 '코뮌'의 현재이자 미래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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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과 경악으로 하루를 보내다

허세욱열사가 망월동에 묻히는 슬픈아침에, 엊그제 미국 버지니아 공대에서 32명을 권총으로 사살한 살인마가 한국인 조승희라는 한국학생이라는 사실에 경악하지 않을수 없었다.

 

오늘 하루가 슬픔과 경악으로 범벅이 되어 너무나도 정신이 없었다.

 

오후에는 중국에서 또 광산이 폭발하여 32명의 노동자들이 사망했다고 한다.

 

미국에서의 폭력적인 총격사고의 근본적인 원인이 육체와 정신을 쇠약하게 만드는 사회라고 이해하더라도 그 사회가 주는 절망감이 인간에게 어떻게 이런 잔인성을 드러내게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이해할 수 없다......

 

중국에서의 자본주의는 노동자의 죽음과 함께 발전해온 역사이다. bbc뉴스에서는 1년에도 몇차례 광산폭발 등으로 죽어가는 중국의 노동자들이 보도된다.

 

결국, 인간의 생명을 단축하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자본주의하에서의 폭력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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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오리님의 목련시과 관련되어 내가 생각해본 목련시

산오리님의 [[산오리] 목련] 에 관련된 글.

 

목련

                                                                                                              지은이 : 봄

왜 귀부인의 자태라고 생각했을까?


너의 아름다움은 부르조아적 아름다움이란 말인가?


목련은 정작 아무 말이 없는 데,


나의 편견을 씌우고야 말았고나.


아름다움조차 그들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자본주의에 찌든 나의 멍에를 벗기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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