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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살다가 가끔 생각나는 고향집같다

내 그대를 한 여름날에 비겨 볼까? (Shakespeare:Sonnet 18 Shall I compare thee to a Summer's day?)

 

 내 그대를 한 여름날에 비겨 볼까?   

                                             

                                                                       윌리엄 셰익스피어

                                                 

                                  내 그대를 한 여름날에 비겨 볼까?

                                  그대는 더 아름답고 더 화창하여라.

                                  거친 바람이 5월의 고운 꽃봉오리를 흔들고

                                  여름의 기한은 너무나 짧아라.

                                  때로 태양은 너무 뜨겁게 쬐고

                                  그의 금빛 얼굴은 흐려지기도 하여라.

                                  어떤 아름다운 것도 언젠가는 그 아름다움이 기울어지고

                                  우연이나 자연의 변화로 고운 치장 뺏기도다.

                                  그러나 그대의 영원한 여름은 퇴색하지 않고

                                  그대가 지닌 미는 잃어지지 않으리라.

                                  죽음도 뽐내진 못하리, 그대가 자기 그늘 속에 방황한다고

                                  불멸의 시편 속에서 그대 시간에 동화(동화)되나니.

                                     인간이 숨을 쉬고 볼 수 있는 눈이 있는 한

                                     이 시는 살고 그대에게 생명을 주리.

 

                                                                                        (피천득 역)

 

Sonnet 18 Shall I compare thee to a Summer's day?

 

 

 

Shall I compare thee to a summer's day?

Thou art more lovely and more temperate:

Rough winds do shake the darling buds of May,

And summer's lease hath all too short a date:

Sometime too hot the eye of heaven shines,

And often is his gold complexion dimm'd;

And every fair from fair sometime declines,

By chance or nature's changing course untrimm'd;

But thy eternal summer shall not fade

Nor lose possession of that fair thou owest;

Nor shall Death brag thou wander'st in his shade,

When in eternal lines to time thou growest:

So long as men can breathe or eyes can see,

So long lives this and this gives life to t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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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칼 나의 피 - 김남주의 시

 

 

 

                                                                                나의 칼 나의 피

 

                                                                                                                                  김남주 시인

 

만인의 머리위에서 빛나는 별과도 같은 것

만인의 입으로 들어오는 공기와도 같은 것

누구의 것도 아니면서

만인의 만인의 만인의 가슴 위에 내리는

눈과도 햇살과도 같은 것

 

토지여

나는 심는다 그대 살찐 가슴위에 언덕위에

골짜기의 평화 능선위에 나는 심는다

평등의 나무를

 

그러나 누가 키우랴 이 나무를

이 나무를 누가 누가 와서 지켜주랴

신이 와서 신의 입김으로 지켜주랴

바람이 와서 지켜주랴

누가 지키랴, 왕이와서 왕의 군대가 와서 지켜주랴

부자가 와서 부자들이 만들어 놓은 법이

법관이 와서 지켜주랴

 

천만에! 나는 놓는다

 

토지여, 토지위에 사는 농부여

나는 놓는다 그대가 밟고 가는 모든 길 위에 나는 놓는다

바위로 험한 산길위에

파도로 사나운 뱃길 위에

고개 너머 평지길 황톳길 위에

사래 긴 밭의 이랑 위에

가르마 같은 논둑길위에 나는 놓는다

나는 또한 놓는다 그대가 만지는 모든 사물위에

매일처럼 오르는 그대 밥상위에

모래위에 미끄러지는 입술 그대 입맞춤 위에

물결처럼 포개지는 그대 잠자리 위에

투석기의 돌 예사랑의 무기위에

파헤쳐 그대 가슴위에 심장위에 나는 놓는다

나의 칼 나의 피를

 

오 평등의 나무여 평등의 나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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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을 노래한다 - 김남주의 시

87년 민중항쟁을 기념하는 집회와 토론등이 이어지고 있다. 그들 집회나 토론에서 그동안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정작 시원하게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말은 안나오는 듯 하다. 이것이 내내 섭섭하다.

 

얼마전 헌책방 고구마 (인터넷사이트)를 들어가서 80년대 시집을 몇권 구입했다. 필요한 이들에게 주기위해서 였다. 이 밤에 나는 이 시인을 마주하면서 나를 부끄러워하고 있다.

 

 

 

 

 

                                                                              나 자신을 노래한다

 

                                                                                                                                       김 남 주 시인

 

신으로부터 불을 훔쳐 인류에게 선사했던 프로메테우스가 인류의 자랑이라면 부자들로부터 재산을 훔쳐 민중에게 선사하려 했던 나 또한 민중의 자랑이다.

 

나는 듣고 있다 감옥에서

옹기종기 참새들 모여 입방아 찧는 소리를

들쑥 날쑥 쥐새끼들 귀신 씨나락 까는 소리를

"왜 그런 짓을 했을까, 왜 그렇게 일을 했을까

좀더 잘할 수도 있었을텐데, 경박한 짓이었어

그 때문에 우리의 역사가 한 10년 후퇴되었어

한마디로 미친 놈들이었어 미친 짓이었어

이에 상당한 책임을 그들은 져야 할거야" 하는 소리를

 

나는 묻고 싶다 그들에게

굴욕처럼 흐르는 침묵의 거리에서

앉지도 일어서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똥누는 폼을 하고 있는 그들에게

그들은 척척박사이기에 무엇보다도 먼저 묻겠다

 

불을 달라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에게 무릎 꿇고 구걸했던가

바스티유 감옥은 어떻게 열렸으며

센트 피터폴 요새는 누구에 의해서 접수되었는가

 

그리고 쿠바 민중의 몬까타 습격은 웃음거리로 끝났던가

그리고 프로메테우스의 고통은 고통으로 끝났던가

루이가 짜르가 바티스타가 무자비한 발톱의 전제군주가

스스로 제 왕궁을 떠났던가

팔레비와 소모사와 이아무개와 박아무개가

제 스스로 물러났던가

 

묻노니 그들에게

어느시대 어느 역사에서 투쟁없이

자유가 쟁취된 적이 있었던가

도대체 자기 희생없이 어떻게 이웃에게

봉사할 수 있단 말인가

 

혁명은 전쟁이고

피를 흘림으로써만이 해결되는 것

나는 부르겠다 나의 노래를

죽어가는 내 손아귀에서 칼자루가 빠져나가는 그 순간까지

 

나는 혁명시인

나의 노래는 전투에의 나팔소리

전투적인 인간을 나는 찬양한다

 

나는 민중의 벗

나와 함께 가는 자 그는

무장이 잘 되어 있어야 한다

굶주림과 추위 사나운 적과 난마야 한다 싸워야 한다

 

나는 해방전사

나가 아는 것은 다만

하나도 용감 둘도 용감 셋도 용감해야 한다는 것

투쟁속에서 승리와 패배속에서 그 속에서

자유의 맛 빵의 맛을 보고 싶다는 것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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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장에 가던 엄마

물리적으로 떨어져있어서, 최근 많은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고 있다 (돌아가면 많이 만나보리라.. 모내기전에 돌아가리라.. 황새떼 오기전에 돌아가리라^^ 아, 벌써 모내기를 마쳤나??). 이런 적막한 시기에 밀려오는 것이 엄마생각이다. 내가 만약 글을 알기시작한 5살이나 10살때부터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써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엄마에 대한 기억으로 제일 처음 기억은 음성장에 나를 데리고 다녔을 때였다. 그때 나는 한 네살쯤 되었나보다.  충주에서 버스를 타고 한 1시간 (그때는 버스도 흙길을 가야했으니..) 남짓가면 음성이 나왔던것 같다. 엄마는 하루가 멀다고 음성장으로 나를 데리고 가셨다. 장보러가신것은 아니었다. 작은엄마네 가게를 도와주러 가시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바로 밑에 동생이었던 작은아버지는 술을 좋아하시다 일찍 돌아가셨다. 작은엄마는 딸린 5명의 자식들을 먹여살려야 했다. 작은엄마의 호탕한 웃음과 씩씩한 목소리와 억센 팔뚝은 5남매를 기르고 보호하기위해서 발달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엄마는 나를 집에두고 가실수 없으니, 나와 내동생을 데리고 음성장을 도와주러 가신것이다. 멀리가시면서 나와 내동생을 집에두고 가실수 없다고 생각하신 것인지, 우리 둘을 데리고 장을 도와주러 가신것이다. 엄마가 둘을 다 데리고 가시기 어려울때면, 나는 아버지학교 (아버지는 그때 국민학교 선생님이셨다. 담임은 주로 1학년을 맡으셨었다.)에 나를 맡겨놓고 가시곤 했다. 나는 아버지학교에 있을때보다 엄마를 따라 음성장에 가는게 더 좋았다.

 

시골장은 매우 시끌벅적했고, 작은엄마가 장사하시는 곳은 큰 기와집으로 된 집에 여러가지 물건들이 즐비하게 쌓여있는 그야말로 아주 시골장터의 한 귀퉁이에 있었다.

 

나는 음성장에 엄마가 나를 데려갈때가 매우 즐거웠던 것 같다. 거기가면 마름모꼴의 사카린도 볼 수 있었고, 작고 동그란 모양의 단것 (지금 이름이 기억이 안나는데, 인공감미료의 일종, 아마 감미정일것이다.)들이 많았다. 또 웬 빨간색, 파란색 등등 색색이 아롱진 과자들이 많았는지......

 

그러나 그때 무엇보다도 즐거웠던 것은 시골장터에서 사람들을 보는 것이었다. 그때 기억으로는 흰색와이셔츠같은 옷과 검은색이나 회색바지들 그리고는 검은고무신을 신은 모습이 바로 농부들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은 바로 몇년뒤에 아버지의 모습이었는데, 나의 아버지가 도저히 생업으로 교사직을 할수 없다며 (그당시 교사월급은 쌀한두가마니정도, 이것으로 8식구(막내동생은 아직 안태어났으니 아직은 8명이다)가 도저히 살수는 없었다고 했다), 그만두시고 충주 달천으로 들어가셨을 때 아버지가 입으셨던 옷도 바로 낡은 흰색와이셔츠에 검은바지였다.  

 

엄마의 일생동안의 노동은 끝이없었고, 나는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엄마의 노동을 보면서 자라온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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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무섭다고 느낄때1

일이 많은 날은 꼭 블로그를 열어보며 시간을 더 애태운다. 특히 아침에... 이 늦장피우는 습관이 언제나 없어질꼬..

 

최근.. 도대체 사랑이 무엇인가?를 나에게 답하기위해서 나는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았으니^^ 여러사람들의 행태를 관찰하여 정리해보기로 했다. 다른사람들로부터 들은 간접적인 경험이 아닌, 내가 직접 보고 느낀 그것들을 정리해보면, 아마... 정리가 될것이다^^

 

그것들의 한 시리즈로 [사랑이 무섭다고 느낄때]시리즈가 나간다. 오늘은 시간상 짧게^^

 

사랑이 무섭다고 느낄때1 : 봄이오고, 갑자기 더워지는 이 날씨에 부인이 사주었다며 모임때마다 검정색 가죽자켓을 줄구장창 입고 나오는 후배를 볼 때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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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데이소감

그전날 (4월 30일) 전야제에 참석을 못했었다. 지리적으로도 멀고 저녁에 잘곳도 없고.. 등등 여러가지 변명거리는 있다. 그런데, 한 동지로부터 왔냐?는 전화를 받고는 '갔어야 하는데' 하고 아쉬워하면서, 그 다음날 아침인 메이데이날 부랴부랴 대학로에 갔다.

 

수도권에서만 모였다는데도 많이 왔다.

 

올해는 아무생각없이 그냥 아는 이들을 보는것이 나의 최대의 목표였다.

 

오랫만에 아는 얼굴들을 만나보니 반갑다. 역시 다들 열심히 살고 있구나. 잊지않고......

 

매년 메이데이에 참석을 해왔지만, 올핸 유난히도 세월의 흔적을 본다. 여러 여성활동가들이 고운 아이와 함께 나타났을때, 그 대견하고 반가운 마음이 들었지만, 한편으로 얼굴에 하나씩 주름살이 늘어난 것을 보면서 세월의 무심함을 느낄수 있었다. 나 또한 세월을 비껴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얼굴들을 보니 정말 반가왔다. 보고싶은 사람들의 얼굴은 대개 보았다.

 

 이제 또 다시 힘을 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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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혁명은 불과 일주일만에 이루어진다.

지난주에 "상춘"을 한다고 들판을 뛰어다닐때, 마치, 낭만파의 그림처럼 점점이 아롱거렸던 나무에 붙은 이파리들이 이제 벌써 제법 자신의 모양새를 갖추고, 불과 일주일만에 산천을 푸르게 돋구어가고 있다. 봄의 혁명은 불과 일주일만에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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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와 부안에서-경치에 반하고 사람들에게 반하고

[변산반도여행기]


전주와 부안에서-경치에 반하고 사람들에게 반하고


 


1. 전주-현대자동차의 주야맞교대에 분노하다


전주와 부안을 3박 4일동안 다녀왔다. 3월 10일 전주현대자동차에서 노동조합집행부가 직권조인으로 주야맞교대제에 합의했다고 하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침울해있었는데, 마침 박병현동지가 몇몇동지들과 이야기좀 해보자고 하여 갔었다.


사실 그동안 전주현대자동차 투쟁소식을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동안 정세에 어두웠던 내가 참 부끄럽게 느껴졌다.. 전주를 내려가려면 진작에 갔어야지.. 그렇지만,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를때라는 옛속담도 있지않은가? 하면서 바로 내려가기로 결정했다.


마음이 급해서인지 3월 15일 목요일 오전 9시 20분 기차를 탔다. 기차는 익산까지 온후에 갈아타게 되었는데, 전주가 얼마나 남았냐고 물어보자, 한 남자분이 어디서왔냐고 묻는다. 하긴 그 근방에서 전주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내가 대답도 하기전에 그 남자는 "강원도에서 왔지요?" 하고 되묻는다. 깜짝놀라서 어떻게 알았냐고 하자 내가 강원도 사투리를 쓰고 있다고 했다.. 하~~ 벌써 나도 강원도 사람이 다 되었구나......


전주에 내려서 첫 느낌은 황산벌이 생각났다. 전주는 나즈막한 야산들로 둘러싸인 작은 분지라고 했다.


약속시간이 오후 7시였는데, 도착한 시간이 거의 오전12시정도였으니, 약 7시간 먼저 도착한 셈이다. 이렇게 약속시간을 미리 앞당겨서 지켜본적은 처음인것 같다. 나는 혹시나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에라도 한번 들어가보고 싶어서 일찍 도착했었다.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을 가보지는 못했다. 예정대로 저녁 7시에 일부 현대자동차 동지들과 모임을 시작했다. 발표와 토론이 같이 이루어져서 토론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것 같았다.


모임에 왔던 사람들은 정말 백제사람들같았다. 백제인들은 말투와 억양뿐 만아니라 생김새에서도 나타난다. 내가 본 백제인은 쌍가풀이 없는 약간 가느다란 눈매에 재치스런 입담이 쏟아지는 입술이 특징이다. 광주에 사는 내 후배인 송한수가 전형적인 백제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여기와보니, 다들 백제인이다. 여기에 있는 내후배, 공영옥의 남편인 김홍연도 전형적인 백제인이다. 툭툭뱉어내는 농담반 진담반의 이야기가 그러하다. 조금후에 들어온 그의 아들도 전형적인 백제인이다.


현대자동차 노동자분들이 매우 힘들어하고 있을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생각보다 그렇지는 않았다. 나는 현대자동차의 모든 분들을 다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일부 현장사람들을 만나보면서, 현장에서 투쟁을 지속될 것임이 예측되었다. 내겐 한시름 마음이 놓이는 부분이었다.


2. 전주비빔밥


전주라는 선입견이 아니더라도 음식맛이 너무 좋았다. 전주역세권에서 멋모르고 내맘대로 시켜서 먹어보았던 비빔밥은 서울맛 그대로여서 매우 실망스러웠어다. 저녁에 동지들이 간 집은 그다지 특색있는 집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뭘 내놓아도 맛있다. 동태찌게, 양푼양념고기, 하다못해 김부스러기까지.. 로마에 오면 로마법을 따라라고 전주에 왔으니, 전주동지들을 따랐어야하는 것을......


저녁에 후배네 집에 세명의 객이 묵게 되었다. 거의 새벽 3시가 초저녁처럼 밤을 다새우면서 할 이야기가 많았다.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털어놓지 않으면 안되는 우리의 삶이 정말 지난하구나... 후배네 집에서 내놓은 복분자한잔은 먼곳의 피로를 모두 가셔주었다.


3.반란의 고장 부안에 가다: 새만금, 핵폐기물설치반대투쟁의 현장


아침에 MBC해고노동자 지지투쟁에 지원을 갔다. 그 지역사회에서 열심히 주민들에게 일을 했던 한 여성 아나운서가 비정규직으로 계약되었다가 이번에 해고를 당했다. MBC가 국가기업은 아니지만, 지역사회주민의 신뢰를 받고 일을 하다가 갑자기 해고통지서를 받았을 때의 참담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무언가 위로의 말은 잘 못했지만, 나의 눈빛은 분명 그를 지지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을 게다.


지지투쟁이 끝나고, 아침에 유명한 전주콩나물해장국을 먹다가, 갑자기 부안에 사는 두 동지들에 이끌려 의기투합하여 부안으로 출발하기로 했다. 전주에서 평생을 운동밖에 몰랐던 내 후배, 부안이 집이어서 아무런 걱정도 없는 두 동지, 그리고 나 이렇게 4명이었다.나도 서해안은 강원도에서 꽤 먼거리여서 며칠에 걸려서 왔는데... 내가 언제 이런 일을 해보랴!! 하는 마음으로 동참했다. 사실은 현대자동차 동지들을 생각하면 미안하기 그지 없었지만 말이다..


이때부터 사람들의 마음이 바빴다. 내후배는 차량도 준비하고.. 부안사람들은 차를 기다리는동안 시골에 구입하려던 생필품을 구하기위해 큰 시장으로 향햐고..


부안으로 가는길: 낮은 산.. 익산, 논산.. 왜 익산인가? 낮은 산과 절들: 문화재.. 불교문화재만 문화재인가?부안으로 가는 길에는 산이 거의 없었다. 서해안이고 남쪽이라 산이 없고 너른 평야만 보였다. 지나가는 곳이 김제인데.. 그 유명한 김제평야... 낮은 들녁에 오고있는 봄을 맞으러 가다니 너무 가슴이 설레었다.


새만금, 핵폐기물설치반대투쟁의 현장에 가다. 새만금을 지나면서 부안동지가 밖에 보이는 것이 바다가 아니라고 한다. '이건 바다도 아니고 호수도 아니여!!!!' 방조제로 막아서 인공적인 호수화된 모습이라고 했다. 그 지난한 투쟁의 현장이었던 새만금에 온것이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인공호수와 새만금의 인공방조제......부안동지는 계속 설명한다. 여기는 바다가 아니라고..... 그 곳 어민들의 허탈감에 가슴에 저려온다.


부안주민들의 핵폐기물설치 반대투쟁때 나도 한번 간 적이 있다. 그 당시 부안주민들과 함께 살았던 고길섶동지의 제안으로 '핵물질이 건강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를 주민들에게 이야기하기위해서였는데, 그때 준비를 제대로 못하고 급하게 간 바람에 연단에 올라가자마자 주민들의 말똥말똥한 눈들만 빽빽하게 보이고, 나는 정작 할말이 생각나지않아 버벅대던 때가 떠오른다. 그때 초청을 해준 고길섶동지에게 매우 미안했는데, 그 동지가 바로 여기있다.


길을 가면서 먹거리를 줍다. 부안에 들어서자 부안동지들이 바빠졌다. 부안동지네 생태학교를 들려서 부엌식기를, 농협에 들러 간단한 야채등을 사고, 부안에 사는 또한 동지를 함께 데리고, 격포해수욕장쪽으로 향했다.


생태학교 마당에는 내가 다니던 국민학교(초등학교가 아님) 마당에 있었던 이순신장군상이 있었다. 시멘트가 아니고 주물로 만든것 같다. 그 당시 전국의 모든 학교에 주물로 만든 이 이순신장군상을 설치했던것 같다. 입구에는 새 한마리가 나무로 만들어져서 세워져있고, 화단에는 동백꽃이 활짝 피었다. 사진찍는 것을 좋아하는 허성호동지의 삶의 터이다. 우리는 서로 동백꽃을 제일 좋아한다고 한마디씩 하면서..학교 안을 들여다보니, 부안 핵폐기물설치 반대투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모습이 한쪽 벽면을 온통 차지하고 있다. 부안사람들은 이제 투쟁의 경험을 가지고 남은 일생을 살아갈 것이다.


격포 해수욕장은 아름다왔다. 서해바다는 푸른색이라기보다는 검은색에 가깝기는 하지만, 물은 언제나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준다. 그래서 우리는 바다를 보고, 그 바다의 넉넉함을 가지고 또다시 일터로 돌아가곤 하는 것이다.


살아있는 쭈꾸미를 처음 본것 같다. 정말 쭈꾸미에게는 미안했다. 쭈꾸미를 조금 사들고 이제 해안가로 향했다. 우리는 해안가를 오염시키기는 싫어서 해안가에서 한참 떨어진 들판에 쭈그리고 앉았고, 쭈꾸미요리를 시작하는 부안사람의 손이 바쁘다. 쭈꾸미 샤브샤브..쭈꾸미에게는 참으로 미안한 일이었지만, 우리는 요리사의 손이 바쁘게 쭈꾸미를 손으로 건져서 먹기 바빴다. 쭈꾸미를 통째로 먹어야한다는것도, 쭈꾸미 샤브샤브가 있다는 것도.... 이번에 알게 되었다. 정말 평생몰랐을 일이었구나.. 마찬가지로 부안사람들은 강원도에 오면 꿩고기를 넣은 막국수가 있고, 옥수수를 갈아서 일정한 틀에 눌러서 만든 올챙이국수를 본적도 없을 것이다.


어찌보면, 지금까지 자본주의사회에서의 인간은 이렇게 좁은 공간에서도 서로 격리되어 다른 문화를 형성하고 살다가 죽는 것이다. 교통이 많이 발달하였다고 하지만, 동쪽끝인 강원도에서 서쪽끝인 부안사람들이 서로 얼마나 자주 볼 수 있을까? 우리의 삶의 거의 99%는 어느 한 곳의 땅에 고착되어있다. 24시간이 부족하고 1년이 부족하다지만, 반복적인 삶을 제외하고는 평생동안에 얼마나 다른 경험들을 하고 살아갈 수 있는가? 나의 목표를 다른 사람과 맞추어보기나 했는가? 반복적인 삶(일생동안의 노동력재생산을 위한 필요노동시간일게다)을 줄일수만 있다면 인간은 정말 발전할텐데......아쉬움과 미련을 남기고, 우리는 또다시 반복적인 일상으로 돌아가는 차에 올랐다.


가는길에 부안동지가 해안가를 바라보며, 변산반도에도 하늘과 땅이 열리는 길이 있다고 했다. 바다가 갈라지는 길이 있다고 했다. 우리의 지난한 삶도 하늘과 땅이 열리듯이 마침내 열어제껴질때까지..... 우리는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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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와 부안에서-경치에 반하고 사람들에게 반하고

1. 전주-현대자동차의 주야맞교대에 분노하다

 

전주와 부안을 3박 4일동안 다녀왔다.  3월 10일 전주현대자동차에서 노동조합집행부가 직권조인으로 주야맞교대제에 합의했다고 하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침울해있었는데, 마침 박병현동지가 몇몇동지들과 이야기좀 해보자고 하여 갔었다.

 

사실 그동안 전주현대자동차 투쟁소식을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동안 정세에 어두웠던 내가 참 부끄럽게 느껴졌다.. 전주를 내려가려면 진작에 갔어야지.. 그렇지만,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를때라는 옛속담도 있지않은가? 하면서 바로 내려가기로 결정했다.

마음이 급해서인지 3월 15일 목요일 오전 9시 20분 기차를 탔다. 기차는 익산까지 온후에 갈아타게 되었는데, 전주가 얼마나 남았냐고 물어보자, 한 남자분이 어디서왔냐고 묻는다. 하긴 그 근방에서 전주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내가 대답도 하기전에 그 남자는 "강원도에서 왔지요?" 하고 되묻는다. 깜짝놀라서 어떻게 알았냐고 하자 내가 강원도 사투리를 쓰고 있다고 했다.. 하~~ 벌써 나도 강원도 사람이 다 되었구나......

전주에 내려서 첫 느낌은 황산벌이 생각났다. 전주는 나즈막한 야산들로 둘러싸인 작은 분지라고 했다.

약속시간이 오후 7시였는데, 도착한 시간이 거의 오전12시정도였으니, 약 7시간 먼저 도착한 셈이다. 이렇게 약속시간을 미리 앞당겨서 지켜본적은 처음인것 같다. 나는 혹시나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에라도 한번 들어가보고 싶어서 일찍 도착했었다.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을 가보지는 못했다. 예정대로 저녁 7시에 일부 현대자동차 동지들과 모임을 시작했다. 발표와 토론이 같이 이루어져서 토론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것 같았다.

모임에 왔던 사람들은 정말 백제사람들같았다. 백제인들은 말투와 억양뿐 만아니라 생김새에서도 나타난다. 내가 본 백제인은 쌍가풀이 없는 약간 가느다란 눈매에 재치스런 입담이 쏟아지는 입술이 특징이다. 광주에 사는 내 후배인 송한수가 전형적인 백제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여기와보니, 다들 백제인이다. 여기에 있는 내후배, 공영옥의 남편인 김홍연도 전형적인 백제인이다. 툭툭뱉어내는 농담반 진담반의 이야기가 그러하다. 조금후에 들어온 그의 아들도 전형적인 백제인이다.

현대자동차 노동자분들이 매우 힘들어하고 있을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생각보다 그렇지는 않았다. 나는 현대자동차의 모든 분들을 다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일부 현장사람들을 만나보면서, 현장에서 투쟁을 지속될 것임이 예측되었다. 내겐 한시름 마음이 놓이는 부분이었다.

 

2. 전주비빔밥

전주라는 선입견이 아니더라도 음식맛이 너무 좋았다. 전주역세권에서 멋모르고 내맘대로 시켜서 먹어보았던 비빔밥은 서울맛 그대로여서 매우 실망스러웠어다. 저녁에 동지들이 간 집은 그다지 특색있는 집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뭘 내놓아도 맛있다. 동태찌게, 양푼양념고기, 하다못해 김부스러기까지.. 로마에 오면 로마법을 따라라고 전주에 왔으니, 전주동지들을 따랐어야하는 것을......

저녁에 후배네 집에 세명의 객이 묵게 되었다. 거의 새벽 3시가 초저녁처럼 밤을 다새우면서 할이야기다 많았다.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털어놓지 않으면 안되는 우리의 삶이 정말 지난하구나... 후배네 집에서 내놓은 복분자한잔은 먼곳의 피로를 모두 가셔주었다.

3.반란의 고장 부안에 가다: 새만금, 핵폐기물설치반대투쟁의 현장

 아침에 MBC해고노동자 지지투쟁에 지원을 갔다. 그 지역사회에서 열심히 주민들에게 일을 했던 한 여성 아나운서가 비정규직으로 계약되었다가 이번에 해고를 당했다. MBC가 국가기업은 아니지만, 지역사회주민의 신뢰를 받고 일을 하다가 갑자기 해고통지서를 받았을 때의 참담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무언가 위로의 말은 잘 못했지만, 나의 눈빛은 분명 그를 지지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을 게다.

 

지지투쟁이 끝나고, 아침에 유명한 전주콩나물해장국을 먹다가, 갑자기 부안에 사는 두 동지들에 이끌려 의기투합하여 부안으로 출발하기로 했다. 전주에서 평생을 운동밖에 몰랐던 내 후배, 부안이 집이어서 아무런 걱정도 없는 두 동지, 그리고 나 이렇게 4명이었다.나도 서해안은 강원도에서 꽤 먼거리여서 며칠에 걸려서 왔는데... 내가 언제 이런 일을 해보랴!! 하는 마음으로 동참했다. 사실은 현대자동차 동지들을 생각하면 미안하기 그지 없었지만 말이다..

이때부터 사람들의 마음이 바빴다. 내후배는 차량도 준비하고..  부안사람들은 차를 기다리는동안 시골에 구입하려던 생필품을 구하기위해 큰 시장으로 향햐고..  

부안으로 가는길: 낮은 산.. 익산, 논산.. 왜 익산인가? 낮은 산과 절들: 문화재.. 불교문화재만 문화재인가? 부안으로 가는 길에는 산이 거의 없었다. 서해안이고 남쪽이라 산이 없고 너른 평야만 보였다. 지나가는 곳이 김제인데.. 그 유명한 김제평야... 낮은 들녁에 오고있는 봄을 맞으러 가다니 너무 가슴이 설레었다.

새만금, 핵폐기물설치반대투쟁의 현장에 가다. 새만금을 지나면서 부안동지가 밖에 보이는 것이 바다가 아니라고 한다. '이건 바다도 아니고 호수도 아니여!!!!' 방조제로 막아서 인공적인 호수화된 모습이라고 했다. 그 지난한 투쟁의 현장이었던 새만금에 온것이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인공호수와 새만금의 인공방조제......부안동지는 계속 설명한다. 여기는 바다가 아니라고..... 그 곳 어민들의 허탈감에 가슴에 저려온다.

부안주민들의 핵폐기물설치 반대투쟁때 나도 한번 간 적이 있다. 그 당시 부안주민들과 함께 살았던 고길섶동지의 제안으로 '핵물질이 건강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를 주민들에게 이야기하기위해서였는데, 그때 준비를 제대로 못하고 급하게 간 바람에 연단에 올라가자마자 주민들의 말똥말똥한 눈들만 빽빽하게 보이고, 나는 정작 할말이 생각나지않아 버벅대던 때가 떠오른다. 그때 초청을 해준 고길섶동지에게 매우 미안했는데, 그 동지가 바로 여기있다.

길을 가면서 먹거리를 줍다. 부안에 들어서자 부안동지들이 바빠졌다. 부안동지네 생태학교를 들려서 부엌식기를, 농협에 들러 간단한 야채등을 사고, 부안에 사는 또한 동지를 함께 데리고, 격포해수욕장쪽으로 향했다.

생태학교 마당에는 내가 다니던 국민학교(초등학교가 아님) 마당에 있었던 이순신장군상이 있었다. 시멘트가 아니고 주물로 만든것 같다. 그 당시 전국의 모든 학교에 주물로 만든 이 이순신장군상을 설치했던것 같다. 입구에는 새 한마리가 나무로 만들어져서 세워져있고, 화단에는 동백꽃이 활짝 피었다. 사진찍는 것을 좋아하는 허성호동지의 삶의 터이다. 우리는 서로 동백꽃을 제일 좋아한다고 한마디씩 하면서..학교 안을 들여다보니, 부안 핵폐기물설치 반대투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모습이 한쪽 벽면을 온통 차지하고 있다. 부안사람들은 이제 투쟁의 경험을 가지고 남은 일생을 살아갈 것이다.

격포 해수욕장은 아름다왔다. 서해바다는 푸른색이라기보다는 검은색에 가깝기는 하지만, 물은 언제나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준다. 그래서 우리는 바다를 보고, 그 바다의 넉넉함을 가지고 또다시 일터로 돌아가곤 하는 것이다.

살아있는 쭈꾸미를 처음 본것 같다. 정말 쭈꾸미에게는 미안했다. 쭈꾸미를 조금 사들고 이제 해안가로 향했다. 우리는 해안가를 오염시키기는 싫어서 해안가에서 한참 떨어진 들판에 쭈그리고 앉았고, 쭈꾸미요리를 시작하는 부안사람의 손이 바쁘다. 쭈꾸미 샤브샤브..쭈꾸미에게는 참으로 미안한 일이었지만, 우리는 요리사의 손이 바쁘게 쭈꾸미를 손으로 건져서 먹기 바빴다. 쭈꾸미를 통째로 먹어야한다는것도, 쭈꾸미 샤브샤브가 있다는 것도.... 이번에 알게 되었다. 말 평생몰랐을 일이었구나.. 마찬가지로 부안사람들은 강원도에 오면 꿩고기를 넣은 막국수가 있고, 옥수수를 갈아서 일정한 틀에 눌러서 만든 올챙이국수를 본적도 없을 것이다.

어찌보면, 지금까지 자본주의사회에서의 인간은 이렇게 좁은 공간에서도 서로 격리되어 다른 문화를 형성하고 살다가 죽는 것이다. 교통이 많이 발달하였다고 하지만, 동쪽끝인 강원도에서 서쪽끝인 부안사람들이 서로 얼마나 자주 볼 수 있을까? 우리의 삶의 거의 99%는 어느 한 곳의 땅에 고착되어있다. 24시간이 부족하고 1년이 부족하다지만, 반복적인 삶을 제외하고는 평생동안에 얼마나 다른 경험들을 하고 살아갈 수 있는가? 나의 목표를 다른 사람과 맞추어보기나 했는가? 반복적인 삶(일생동안의 노동력재생산을 위한 필요노동시간일게다)을 줄일수만 있다면 인간은 정말 발전할텐데......아쉬움과 미련을 남기고, 우리는 또다시 반복적인 일상으로 돌아가는 차에 올랐다.

가는길에 부안동지가 해안가를 바라보며, 변산반도에도 하늘과 땅이 열리는 길이 있다고 했다. 바다가 갈라지는 길이 있다고 했다. 우리의 지난한 삶도 하늘과 땅이 열리듯이 마침내 열어제껴질때까지..... 우리는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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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산을 가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이번 주말에는 한미 FTA 저지 투쟁이 서울에서 있다하니, 가서 오랜만에 사람들을 만나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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