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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살다가 가끔 생각나는 고향집같다

102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05/08
    대추리에 못가서 정말 죄송합니다.
    봄-1
  2. 2006/03/30
    춘삼월 춘천에 내린 서설^^
    봄-1
  3. 2006/01/24
    동백꽃(1)
    봄-1
  4. 2005/11/15
    노동자대회날 소회(1)
    봄-1
  5. 2005/06/27
    춘촌에 단풍드는 날
    봄-1
  6. 2005/06/27
    산-백석시인의 글
    봄-1
  7. 2005/06/27
    단풍-백석시인의 글
    봄-1
  8. 2005/06/27
    입춘-백석시인의 글
    봄-1
  9. 2005/06/27
    그림-송만규의 재첩을 잡는 여인
    봄-1
  10. 2005/06/27
    사다리를 타는 대우조선 노동자
    봄-1

겨울나무가지마다 핀 안개꽃

며칠동안 겨울날씨같지 않게 따뜻하다. 마침 이렇게 따뜻한 겨울에 후배가 멀리서 놀러오니 반갑다.

 

어제저녁에 내려온 후배에게, 춘천에서 보여줄게 무엇이 있을까.. 하고 열심히 고민하고 있던차에... 아침에 창문을 여니 겨울나무 가지마다 흰꽃송이들이 눈꽃보다도 섬세하고 부드럽고, 가녀린 모습을 하고 서있다. 흰눈속에 푹빠지지는 않았을지라도 아직 채 걷히지 않은 안개, 그속에서 은빛꽃을 피우고 있는 겨울나무들이 너무 아름답지 않은가?

 

소양강쪽으로 달리던 중에 택시 아저씨께서 밤안개가 새벽녁에 만들어낸 꽃이라고 "안개꽃"이라고 명명하시는 바람에 나도 "안개꽃"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나무이파리 하나 없는 활엽수 가지위에 핀 안개꽃은 그야말로 은빛 찬란한 가지들로 변했고, 억새풀에 핀 안개꽃은 메마른 가지가 다시 살아난 듯 아름답다. 소나무가지에 핀 안개꽃은 청렴한 소나무의 기개를 그대로 살려주는 조명과도 같다.  

 

아름다운 겨울아침.. 이 아침이 질세라 우리는 부지런히 또 청평사를 다녀왔다.

 

청평사의 독경소리를 들으면서 독서삼매에 빠진 후배..

 

역시나 돌아오는 길에 안개꽃은 없었다. 겨울에 모처럼 따스하게 내려쬐던 햇빛이 다 가져가 버렸다..

 

이 아름다운 꽃은 한적한 물가에 사는 사람들만이 볼 수 있는 혜택이던가?

 

오랜만에 즐거운 겨울소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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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노정연을 역사속에 남기며

나는 어제 한노정연을 역사속에 남기고 돌아왔다. 춘천으로 오는 막차에서 그간 여러 동지들의 모습이 다시금 생각나서 방금 보고온 여러동지들에게 참을수 없이 또다시 전화질을 해대었었다. 그 이튿날인 지금, 나는 밀린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서 숨을 못쉬고 있는 상황에서도 나와 한노정연에 대한 생각에 일을 손에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은 도대체 왠 망령인지.....그래서 할수없이 나는 오늘 다 쓰고 정리하지 못할 지언정, 이 글을 시작하기로 했다.

 

우선, 내가 이렇게 가슴저리게 섭섭해하고 있는 것은 그놈의 '정때문에'라고 생각하고 싶다. '정'을 제외하고, 그러고도 남는 무언가가 있다면, 김세균선생님의 말씀처럼, 그간 운동의 발전에 따라 생명체들의 그릇인 하나의 조직도 생성, 발전, 소멸해 나가는 것이 당연한 일이거늘.. 내가 이렇게 아쉬워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그것을 해명하고 싶었다. 무언가 잡을 수 없는 것같은 그것, 그것이 무엇인가?

 

잠깐 그놈의 '정'을 떼지못해 미련을 떨고싶다. 좀 사설을 늘어놓으려 한다. 한노정연에 소속되어서 내게 가장 인상에 남았던 일은 기아 소하리 동지들을 만났을 때였다. 안양유원지 근처의 어느 장소에서 거의 며칠밤을 새워가면서 내가 맡은 부분이랍시고 준비를 해가면, 50-100여명의 초롱초롱했던 눈망울들과의 만남속에서 며칠동안 밤을 새고 축쳐져서 간 나는 새롭게 살아나는 느낌을 받곤 했다. 그때 소하리 역근처에 바람이 유난히 쎘는데....매번 추운 겨울에 우리는 갔었다. 나는 한노정연 보고서들을 너무나 잘하려고 내 딴에는 마음을 먹다가 예정된 마감일을 매번 훨씬 넘기기 일쑤여서 벌써 오랫동안 그런애라고 찍혀버린지 오래였다. 그래도 나는 나의 최선을 다했기에 사실 나 자신은 그런말에도 아랑곳하지 않았었다. 나는 노동자의 연구보고서는 최상으로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의 것을 만들어야한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신념은 그이후로도 2005년 현대자동차 노동강도프로젝트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다. 이 나의 엉터리였을지 모르는 신념 (왜 엉터리냐하면, 모든 사물에 완성의 지점이 있다면 또다시 새로운 시작지점이 있고, 해서 발전을 해 나가는 것을 그땐 모르고 너무 욕심을 부렸을지도 모르므로.....)을 그래도 받아주고 믿어주었던 한노정연 동지들이 너무 고마울 뿐이다. 기아 마지막 보고서 마감 몇시간전에 그 보고서를 들고 한노정연 사무실로 들어갔을 때 언니들의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미안하다. 나때문에 이마에 주름살이 한개 더 늘지는 않았는지......

 

1996년인가 1997년인가? 안양 어느 작은 병원에서 산업보건전문의로 근무하던 나는 병원의 책상위에 기아자동차 소하리동지들의 설문지를 온통 펴놓고 틈만나면 작업을 해대다가 어느날 나도 모르게 짤린적도 있다. 그리고 갑자기 갈곳도없이 몇개월을 헤매다가 결국 영국에 유학이랍시고 다녀왔다. 2001년 다녀왔노라고 인사를 하러 사무실로 가자마자 나는 이**언니로부터 대우조선 노동강도평가를 하자는 명(?)을 받고 대우조선을 내집처럼 드나들때, 그때 나는 인생의 최고였고, 인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속에 있었던 것을 이제야 깨닫게 된다. 그때 후배들인 건형, 원진, 승연이가 나때문에 너무 고생을 했다. 그들은 겨우 본과 2학년, 아무것도 모르는 본과 2학년 학생들이었다. 나는 그들과 함께 대우조선, 철도노동자의 건강문제를 해결한다고 한겨울에 녹음기와 귤박스를 들고 구로동, 독산동 철로를 건너던 때가 생각난다.

 

물론 그 이후로도 박**동지와 한노정연과 함께 한 여러개의 프로젝트가 있다. 교대제도 있고, 노동강도도 있고...... 기아화성동지들과 현대자동차동지들...... 모두들 고생이 많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숱한 날들을 화성과 울산을 오르내리지 않고 차라리 그곳에서 머물면서 살았으면 더 좋았을것을.. 그러면 더 많은 동지들과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 것을 하는 생각도 든다. 지금도 5월 메이데이와 11월 노동자대회때 항상 만나는 이들은 그때 만난 이들이다.

 

이렇게 같이 고생하며 그당시에 최선을 다했고, 나의 모든 에너지를 100%소모하면서 기뻐했던 그 곳, 그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정'이란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정'에 대해서 한마디만 더 고백하고 싶다. 이것은 개인적인 문제인데...... 사람들은 나보고 고집이 세다하고 소통을 잘 못한다고 한다. 나라고 왜 고민이 없겠는가? 그런말을 듣고나서...... 하지만 나는 물론 앞서서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은 있을 지언정, 동지들의 말을 다 들을 때까지 나의 의견을 내놓는 것을 매우 조심스럽게 생각했을 지언정, 일부러 소통을 안한것은 아니다. 지금 고백하자면 소통을 어떻게 하는지 몰랐다는 것이다. 내 의견을 어떻게, 언제 꺼내야할지 몰랐다는 것이다. 이 지면을 빌어서 그동안 같이 했던 여러 동지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하며, 당장 내일부터는 그러지 않을 것임을 약속한다.)

 

나 개인적으로는 어찌보면 나도 모르게 '한노정연'이라는 울타리속에서 안주하려고 했던 (나는 어느 모임에 가서나 한노정연회원입니다. 라고 하면 마치 면죄부를 부여받듯이), 그러한 안식처를 과감하게 벗어나야한다.

 

'민들레처럼.....' 우리는 떠나야한다.

 

여기까지는 '정'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제부터는 일이야기이다.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객관적 상황도 변화되었지만, 나도 많이 변화되었다. 그때 그런 현장노동자(아니 정확히 말하면 노동조합이다)에서 요구되는 연구들을 제안받고 연구를 할때는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때 그것이 최선이라고 알고 있었던 인식의 한계도 있다. 그 인식의 한계를 깨치고 다시한번 발전을 해야할 시기이다.

 

이제 다시 생각해보니, 어제 한노정연의 마지막 회를 마감하면서도 우리의 역사적 사명과 한계가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논의가 아직도 부족한것이 아쉽다. 이제는 우리가 역사에 남긴것은 무엇이었고, 또한 우리의 한계가 무엇이었는가?를 이야기해야한다. 앞으로도 이런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을까? 싶지만, 나는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마침 한노정연 백서가 나온다고 하니, 거기에 아마도 동지들의 많은 이야기가 실리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생각은 '현장성'에 대한 접근을 좀 더 구체적이고, 발전적으로 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나의 경우를 보면, 주로 노동조합과의 프로젝트속에서 안주했고, 건강이라는 주제속에 안주했고, 그것이 전부인양 생각했을것이다. 그래서 그 관계를 넘어서는 관계가 형성되지 못했고, 프로젝트가 끝나고 나면 물론 개인적인 친분이 남긴 했지만, 그것이 조직적으로 남지는 못했던 것..... 그리고, 항상 운동을 기술적이고 기능적인 측면에서만 기여하게 된것들...... 그것이 내가 이제 발전해야할 부분이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현장성은 중요하고 유효하다고 본다. 오히려 이전에 한노정연이 했던 방식에서 더욱 발전적으로 현장의 노동자를 만나고 소통해야할 것이다. 그동안 그렇게도 소통을 못했던 내가 이제 진정으로 소통을 시작하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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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밖에서 강해지는 난초

작년가을에 춘란을 하나 집안에 들여와 키우기시작했는데, 이파리가 축축 느러지는게 꼭 여느 잡초와도 비슷해지고 있었다. 왠일일까? 춘란이라고 했는데 왜 이렇게 멋이 없을까?

 

그러나가 올 여름에 바깥일도 많고 하여 난초를 부득이 바깥에 두었다. 온실밖 야외에 두고 니멋대로 살아봐라! 하고 옥상건물에 내다 놓았다.

 

한참 집을 비우고 돌아와보니, 난초는 씩씩하게 자라고 있었다. 이파리가 단단해지고, 멋있어지고 있었다^^

 

자유란 이렇게 좋은것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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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추리에 못가서 정말 죄송합니다.

5월 5일 저녁부터 아니, 사실은 5월 6일 토요일아침부터 대추리에서 전해오는 상황을 보게되었다. 전시의 상황과 다를바없이 보였다. 지난해 늦은겨울부터 대추리를 한번 가야지... 대추리에 한번 오라는 00동지의 검은안경을 매번 떠올리면서 생각해왔는데, 미처 가보지도 못하고 대추리에 계신 그동안 꿋꿋하게 버티고 계서서 어르신들께 감사하다는 말씀도 드리지 못했는데, 그곳이 이미 전시사황이 되어버리다니......

 

어쩌면 대추리에 계신 어르신들은 미제국주의의 무자비한 폭력에 완강하게 저항하고 있는 이땅의 최전선에 계신 분들이 아니던가? 미제국주의는 마치 자본주의의 시초축적당시에 농민들을 농토에서 몰아내던것 처럼, 철사줄로 땅에 금을 그어가면서 주민들을 내쫒았다. 자국의 국민들을 이다지도 헌신짝처럼 내팽겨치면서 미국에 무한한 아부와 충성을 다하려는 정부의 폭력을 보면서 심한 구역질이 나오는 것을 참을수가 없다. 얼마전 인터넷을 통해 크게 알려졌던 50년동안 노예생활을 했다던 할아버지의 모습..... 바로 이땅의 국가독점자본이 행하고 있는 작금의 폭력이 이땅의 주민들을 노예처럼 취급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땅에 철사망으로 금을긋고, 내쫒고, 폭력경찰을 이용해서 저항하는 집단을 모두 감옥에 가두고 이것이 바로 국가독점자본이 국민들을 노예로 취급하는데서 온 것이 아닌가? 정말 분하고 분하다.

 

강원도 끝자락도 아닌 춘천에 있으면서, 거리가 멀어서 못가네, 차가 없어서 못가네, 멀미때문에 차타기가 힘드네...... 하고 핑계를 대고 가지 못했던 내가 너무 부끄럽다. 죄송함을 추스리고, 곧 달려가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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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삼월 춘천에 내린 서설^^

3월에 내리는 눈을 서설이라고 부르고 싶다.

 

어제 아침부터 날씨가 꾸물꾸물하더니 저녁에 드디어 눈보라가 날렸다.

 

3월이라 그래도 견딜만한 날씨에 눈이 내려버리면 정말 어디론가 날아올라가고 싶을 정도의 환희와 행복감을 느낀다. 일상이 흐르다가 갑자기 그냥 눈이 왔는데 이렇게 기쁘다면 이것이 바로 서설이 아니겠는가?

 

어제는 깜깜한 밤하늘을 은하수뿌리듯 눈발이 날리더니 오늘 아침에는 맑고 파아란 하늘아래 먼산 가까운 산위에 소나무가지마다 눈꽃이 피었다. 아, 산수유 노오란 꽃봉우리에도 눈꽃이 또 피었다.

 

한미 FTA, 비정규직법안, 덤프트럭의 파업등으로 정세가 급박한 이 상황에서 눈꽃은 우리의 가슴속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자연의 아름다움이 인간들에게 이렇게 힘을 주고 있구나^^

 

앞으로 지난하게 투쟁해야할 4월이 오고 있는 이때, 때아닌 눈꽃을 보면서 그 아름다움에 취해 왠지모를 힘이 솟아오르니 바로 서설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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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꽃

며칠전 양지볕 화분에서 자라던 작은 동백나무 가지에서도 붉은색 꽃잎이 나오는 것을 보았다. 설마 저 꽃봉우리가 다 필까? 하고 의심했던 내가 부끄럽다. 자연을 아직도 모르는구나 하고!

 

무리를 떠나서 외롭게 자라는 동백꽃이 안쓰러워서 차라리 피지말지.. 하고 생각했는데...... 꽃이피면 더 안쓰러울것이라 생각했었다. 이제 어엿한 붉은색 꽃잎이 한장한장 벌어지는 것을 보니, 그 붉은 정열이 부럽기만 하다.

 

여기는 강원도 추운곳이라 원래 동백꽃이 자라지 않는다. 소설가 김유정 생가가 있는 이곳 춘천에서 김유정이 동백꽃이라고 말할 때는 동박꽃, 즉 생강나무를 뜻한 것이었다. 노란 생강나무...... 산수유나무와 비슷하게 생긴 이른 봄에 노오란 꽃을 피우는 생강나무말이다. 강원도사람들은 생강나무를 동박꽃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 이유는 추운 강원도에서는 동백나무에서 기름을 얻지못하고, 생강나무에서 기름을 얻었기때문에, 동백나무처럼 기름을 얻는다하여, 생강나무이름을 동백나무로 불렀다고 한다. 참으로 강원도 사람들의 형식을 따지지 않고 내용에 충실한 모습이 아닌가?

 

동백꽃이 유난히 아름답다고 생각했을 때에는 2001년경 거제도 대우조선을 방문했을 때 였다. 그 남도 섬에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무리와 함께 바다의 바람을 당당하게 맞서고 서있는 붉은 꽃잎이 어찌나 아름답던지......꽃잎이 한장한장 떨어지지 않고 차라리 꽃받침째 떨어지는 그 모습이 어찌나 고결하고, 자존심 센 여인 같던지......

 

동백꽃이 떨어질때 떨어지는 눈물처럼 느꼈을 때는 울산 현대자동차 공장에서였다. 어느 한 비정규직 노동자의 고된 하루와 눈물을 보고 공장을 나올때, 공장 곳곳에 서있는 동백꽃도 눈물을 흘리면서 서 있었다.

 

이제 곧 동백꽃이 한창 피었다가는, 어느 비정규직 노동자의 눈물처럼 뚝뚝 떨어지는 계절이다.

 

올해는 비정규직노동자의 대투쟁으로 동백눈물을 말끔히 닦아버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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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대회날 소회

노동자대회날 소회

저도 오랫만에 못뵈던 동지들을 만나서 나름대로 즐거웠습니다. 11월 12일 오후 3-4시경, 춘천에서 막 출발하려고 하는데, 기아자동차 화성의 한 동지로부터 문자 메시지가 날라왔습니다. 수원을 출발한다고...... 음! 나보다 먼저 도착하겠군^^ 역시 그 동지가 약간 먼저 도착했습니다. 저도 부랴부랴 가는 와중에 기차를 노치는 바람에, 한시간을 밖에서 떨다가 가까스로 기차에 몸을 싣고 달렸습니다. 여의나루에서 내려서 걷는동안, 대전에서 올라온 한 학생동지의 한자쓰기에 대해서 한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젊은 친구가 참 대단하구나!! 싶었습니다. 그친구왈 "한자를 쓰면 깊어지고, 글쓰기에 도움이 된답니다^^ 한번 실행해보시죠^^"

10시쯤 전야제장소에 도착해보니,일단 한구석에 예술무대가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달빛아래 강가에서 예술무대를 차려놓고 노동자의 문화가 꽃피고 있는 모습을 보니 흐믓했습니다.^^ 사실은 저는 11월 13일이 전태일동지의 분신한 날이란 것도 잊은 채 그냥 달려왔기 때문에 와서 조금 부끄러웠습니다.

본대회에서는 무슨 토막극이나, 연극을 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 반대편에 구속노동자 겨울나기 주점에 들어가서 화성에서 올라온 동지들과 결합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앞쪽에는 강원도 춘천에서 올라온 학생들도 또한 있었습니다.. 동지들과 즐겁게 이야기를 하다고, 근처의 여수건설, GS 칼텍스, 광주 동지들을 만났습니다. 삼호중공업의 동지들도 만났습니다. 2003년도에 현장프로젝트를 했다고, 저를 보고 반가와하시니 저도 또한 매우 즐거웠습니다. 

한강강변을 걷는데, 왜 그렇게 분위기가 있는지? 달을 아스라이 떠있고, 강물이 흐르는 호젓한 한강변을 걷고 있다니...... 강변이 넓어서인지, 무대장치를 조금만 벗어나도 달빛에 취해 마치 속세를 떠나도 될 것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정말 달밝은 달밤에 한강변, 조심해야합니다^^"

광주동지와 만나서 다시 예술무대장소로 가서, 한노정연동지들을 만나보고... 곧이어 "전국활동가대회"도 참여했습니다. 많은 연사의 이구동성: "민주노총의 복원과 혁신, 그리고 아래로부터의 혁신!!" 결의문낭독을 보고, 또 주점으로 향했죠... 강대 학생들이랑 풀무원동지들이 하는 주점을 가보려고요......

풀무원주점에서 기아 자동차 화성동지 (다른 동지)를 만나, 회포를 풀었습니다.

잠시 잠자리를 걱정하는 사이, 수원에서 전화했던 동지의 동료네 집이 바로 근처란 이야기를 듣고 너무 좋았습니다. 드디어 따뜻한 곳으로 가는구나!! 그 집에 가서는 그 동지들이 술을 마셔대건, 떠들어대건 상관없이 저는 그냥 쿨쿨 꿈나라로 향했답니다...... 디자인을 전공한다는 그 여성동지, 우리나라 고대역사이야기를 재미있게 했습니다. 역시 예술가와 역사가는 통하는구나......

다음날 그 여성동지가 맛있게 해주는 밥 (고추초저림, 깻잎, 마늘초처림, 2004년도김장김치,칼치,황태국,계란부침등 럭셔리아침상)을 먹고, 오후 1시, 딱 시간을 맞추어서 종묘에 [비정규직노동자사전집회]에 참석을 했습니다. "비정규직철폐"를 외치는 동지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여러사람이 함께하면 시간약속을 잘 지키겠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시간약속을 잘 못지키걸랑요...... 아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래도 요새 많이 좋아졌습니다..

본대회는 4시가 넘어서야 시작했습니다. 본대회는 빨리 끝날 것이라고 예상되었죠. 너무 늦게 시작했으니까요...... 정재환비대위위원장에 이어 한국노총대표의 발언을 들었습니다. 사실은 본대회에 오면서 좀 갑갑한 면이 있었습니다. 전야제에서의 그 많은 사람들, 민주노총의 혁신과 아래로부터의 혁신을 주장하던 동지들, 전태일열사의 뜻을 이어받자는 맹세들... 이어 비정규직 노동자대회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힘들지만 꿋꿋하게 싸워나가겠다는 각오들... 이들에 비하면, 본대회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노동자들이 이렇게 많이 모였는데, 도대체 뭐하는 것입니까?" 주최측에게 이렇게 묻고 싶었습니다. 비대위위원장 발언의 핵심은 민주노총의 복원이며, 전태일열사의 계승을 주장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아쉬웠던 것은 향후 어떻게 싸울 것인지? 결연하게 싸울 것임을 좀 더 당당하게 이야기했으면 좋았을 텐데......도대체 "어떻게 복원하겠다는 것인가?"

뒤를 이은 한국노총대표의 발언은 가히 저에게 충격적이었습니다. 앞으로 국회에서 비정규법안및 노동법 논의가 이루어질 것이고, 이 때 "때를 놓치지말고" 산별노조, 노조전임자임금문제등을 제기해서 해결해야한다는 것입니다. "한국노총의 대표의 발언은 노동자계급의 자존심을 한순간에 꺽는 발언이군, 노동자계급의 끓어오르는 혁명성을 개량성으로 저렇게도 천연덕스럽게 바꾸어놓다니......"

이 문제를 가지고 또 노대가 끝나고 저녁 8시까지 기아화성의 또 다른 동지들과 토론을 했습니다.

(이번 노대에서는 기아 화성동지들을 주로 뵈었네요^^)

오늘, 11월 14일, 아니나 다를까, 이 동향과 전망을 보니, 한국노총은 이미, 비정규직 법안에 대한 노사합의를 제안했고, 다시금 노사합의가 시작되고 있다고 합니다......

민주노총의 비대위가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다시한번 우려가 되는 지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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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촌에 단풍드는 날

 

제목: 춘촌에 단풍드는 날


손미아글

 


산촌(춘촌)에 살다보니 정말 신기한 자연의 현상을 많이 보게 됩니다.


오늘 새벽 먹구름이 일더니, 갑자기 산꼭대기가 붉어져오는 모습이 점차 확연해져서 마치 눈으로도 보이는 것 같습니다.


(먹구름은 단풍을 들게하는데 원인요소일까요? 아니면 진짜 원인을 가리게 하는 혼란변수일까요?) 어쨋든...


나뭇잎이 막 변하고 있는 찰나입니다. 단풍이 든다고 하는 것이겠지요.



겨울나무에서 단풍은 우리가 보기엔 아름다움이지만, 겨울을 나기위한 나무들의 처절한 전투의 결과라고 하더군요.


내 살붙이를 하나씩 떨구어내면서 몸체를 온전히 지탱하면서 겨울을 버티기 위한 처절한 몸무림!


나의 한 여름의 우아한 가지들을 모두 버리고 이제는 앙상하게 남아야 할 자신의 모습을 알면서도 전부 벗어 던지기 위한 준비를 합니다. 나무들은,


내 비록 앙상한 가지로 남을지라도 나로 부터 떨어진 나뭇잎들이 긴긴 추운 겨울을 지나 새봄에 새싹들을 키울수만 있다면...


나는 좋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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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백석시인의 글

 

산(山)

 

                                                              백석


머리 빗기가 싫다면

이가 들구 나서

머리채를 끄을구 오른다는

산(山)이 있었다

산(山) 너머는

겨드랑이에 깃이 돋아서 장수가 된다는

더꺼머리 총각들이 살아서

색씨 처녀들을 잘도 업어간다고 했다

산(山)마루에 서면

머리 언제나 늘 그물그물

그늘만 친 건넌산(山)에서

벼락을 맞아 바윗돌이 되었다는

큰 땅쾡이 한 말

수염을 뻗치고 건너다보는 것이 무서웠다

그래도 그 쉬영꽃 진달래 빨가니 핀 꽃바위 너머

산(山) 잔등에는 가지취 뻐국채 게루기 고사리 산나물판

산(山)나물 냄새 물씬물씬 나는데

나는 복장노루를 따라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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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백석시인의 글

 

단 풍 (丹 楓)

 

백석

 


빨간 물 짙게 든 얼굴이 아름답지 않느뇨.

빨간 정(情) 무르녹는 마음이 아름답지 않으뇨.

단풍든 시절은 새빨간 웃음을 웃고 새빨간 말을 지즐댄다.

어데 청춘(靑春)을 보낸 서러움이 있느뇨.

어데 노사(老死)를 앞둘 두려움이 있느뇨.

재화가 한끝 풍성하야 시월(十月)햇살이 무색하다.

사랑에 한창 익어서 살찐 띠몸이 불탄다.

영화의 자랑이 한창 현란해서 청청한울이 눈부셔 한다.

시월(十月)시절은 단풍이 얼굴이요, 또 마음인데 시월단풍도

높다란 낭떨어지에 두서너 나무 개웃듬이 외로히 서서 한들거리

는 것이 기로다.

시월 단풍은 아름다우나 사랑하기를 삼갈 것이니 울어서도 다

하지 못한 독한 원한이 빨간 자주로 지지우리지 않느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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