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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살다가 가끔 생각나는 고향집같다

자연의 지혜

 

이것은 마치 내 이야기같아서 보면서 두고 두고 반성할 일이다.

자연의 지혜

 

                   

                                                             And strange it is

                                  That nature must compel us to lament

                                  Our most persisted deeds.

                                                (Antony and Cleopatra 5.1.28-30)

 

 

                                  자연은 기묘하게도

                                  우리의 매우 고집스러운 행위에 대해선

                                  반드시 후회하게 만들어 버린다.

                                          (『앤토니와 클레오파트라』 5막1장 28-30행)

                                                                                         셰익스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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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onnets 116 -셰익스피어의 사랑

 

 

 사랑은                   

                                               

셰익스피어 

                                                       

                              Love's not Time's fool, though rosy lips and cheeks

                              Within his bending sickle's compass come;

                              Love alters not with his brief hours and weeks,

                              But bears it out even to the edge of doom.

                                                                       (The Sonnets 116)

 

                              사랑은 세월의 놀림감이 아니라서

                              장밋빛 입술과 뺨은 세월의 굽은 칼날에 희생되더라도,

                              사랑은 짧은 시일에 변치 않고

                              심판의 날까지 견디어 나가노라.

                                                                    (『소네트집』116, 신영수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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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onnets 112 -셰익스피어시

 그대는

You are so strongly in my purpose bred

That all the world besides methinks th'are dead.

 (The Sonnets 112)

그대는 너무도 강하게 내 마음속에 자리 잡았기에


그 밖의 온 세상은 죽은 것같이 생각되노라.


 (『소네트집』112, 신영수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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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앞에 통곡하다

숭례문앞에 통곡하다

 

 

고요한 적막에 덮인 산골, 설이 조용히 지나가던 날, 숭례문이 타고 있다는 인터넷소식이 장난기사이길 바랬다. 그리고, 또 11시경 불길이 잡혔다고 해서 이제는 안심해도 될 줄 알았다. 하루밤사이에 몇 번을 놀라면서 가슴에는 깊은 못이 박힌듯이 아프다.

 

아직 서울을 못가봤다. 아니 가보지 못할 것이다. 아마도 한참동안은 남대문시장근처를 쳐다보지 못할 것 같다. 폐허더미 숭례문앞에서 나는 왜 이렇게 통곡하는가? 왜 사람들은 가슴에 깊은 상처를 받았는가?

 

 

서울을 처음 본 것은 초등학교 6학년 겨울이었다. 언니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비정규직 여사원으로 서울로 일하러 갔고, 동생에게 서울을 보여주겠다고 데려간 것이었다. 70-80년대 서울모습 중에서 내가 가장 인상깊게 기억하는 것은 길바닥에 쌓여있는 연탄재였다. 왜 그렇게 연탄재가 길바닥에 너부러져있었는지... 서울역근처가 언니의 단칸방이 있는 곳이어서 역의 시커멓고 쾌쾌한 먼지와 길바닥의 연탄재가 어우러져 먼지속의 서울만 보았고, 나는 급기야 서울에서 살수 없을 것 같는 느낌만 받았었다. 내가 그당시 본 것은 순전히 이런 풍경들이었다. 그것이 서울의 다가 아니었다는 것은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말이다. 언니는 주말이면 동생을 데리고 그 삭막했던 서울거리를 쏘다니곤 했는데, 언니를 따라다니면서 유독 기억나는 것이 바로 숭례문이었다. 그 당시 굉장히 높고 웅장하게 보였던 기억이 지금도 난다.

 

 

그 다음에 숭례문을 기억하는 것은 87-88 민주화 대투쟁때이다. 그 당시 거의 매일 데모대열에 합류하면서 매번 서울역까지 갔던 것 같다. 그러면서 대모대열이 거대하게 형성되면,우리는 서울역에서 숭례문까지 마구 뛰어갔다. 그 때 숭례문을 지나쳐 뛰면서 나의 발걸음이 빨라질수록 나의 심장의 고동소리는 점점 커졌던 것을 기억한다. 아! 그 곳을 그렇게 마음대로 뛰어봤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이었던가?

 

시골내기였고, 인생에서 숭례문에 대한 기억이 한 두 장면 밖에 나지 않는 나도 이럴진대, 숭례문을 평생동안 보고 살아온 서울의 평범한 사람들은 오죽하겠는가? 70-80년대 자본주의의 쓰레기로 뒤덮인 그 추잡한 거리, 추악한 삶의 세파속에서 살면서도, 우연하게도 숭례문을 한번 쳐다보노라면, 그 아름다움과 기개와 웅장함에 마음이 정화되는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찌든 삶속에서, 어머니의 품처럼 다가갈 수 있는, 숭례문이 그런 역할을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숭례문이 과거 권위의 상징이었고, 왕권의 소유물이었으며, 현재는 자본주의에 의해 희생되었지만, 그것은 우리가 숭례문에게 애써서 어떤 상징과 명함을 달아주는 것일게다. 숭례문에겐 그러한 권위적인 상징조차 부담스러웠을지도 모른다. 그 아름다움은 결국 그 당시에 가장 평범했던 민초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던가?

 

 

내가 오늘 숭례문앞에서 통곡하는 이유는 바로 600년을 이어주는 민초과 민초의 만남, 그들의 역사가 사라졌기 때문일것이다. 숭례문을 만들면서 몇 명의 민초들이 얼마나 심한 노동강도속에서 일을 했는지, 그들이 어떻게 일하다가 죽어갔는지.. 나는 이러한 정황을 정확하게는 모른다. 그러나, 눈을 감으면 아련히 떠오르지 않는가? 600년을 거슬러가면서 민초들의 삶이 어떠했는가를 그들이 만든 역사가 어떠했는가를.....

 

 

우리가 지금 가장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역사를 상실했기때문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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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정호승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정호승

 

 

                                            이 세상 사람들 모두 잠들고

                                            어둠 속에 갇혀서 꿈조차 잠이 들 때

                                            홀로 일어난 새벽을 두려워 말고

                                            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이 되라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겨울밤은 깊어서 눈만 내리어

                                            돌아갈 길 없는 오늘 눈 오는 밤도

                                            하루의 일을 끝낸 작업장 부근

                                            촛불도 꺼져가는 어둔 방에서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라.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절망도 없는 이 절망의 세상

                                            슬픔도 없는 이 슬픔의 세상

                                            사랑하며 살아가면 봄눈이 온다.

                                            눈 맞으며 기다리던 기다림 만나

                                            눈 맞으며 그리웁던 그리움 만나

                                            얼씨구나 부둥켜안고 웃어보아라.

                                            절씨구나 뺨 부비며 울어보아라.

                                            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이 되어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

                                            봄눈 내리는 보리밭길 걷는 자들은

                                            누구든지 달려와서 가슴 가득히

                                            꿈을 받아라.

                                            꿈을 받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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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인간

                                                                           셰익스피어

But man, proud man,

Dressed in a little brief authority,

 Most ignorant of what he's most assured,

 His glassy essence, like an angry ape,

 Plays such fantastic tricks before high heaven

 As makes the angels weep.

  (Measure for Measure 2.2.118-123)


 인간, 그 오만한 인간은

 아주 작은 잠시 동안의 권위에 몸을 싸고

 자신만만한 그 자신의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허세를 부리며, 야한 모습으로, 성난 원숭이처럼,

 드높은 하늘 아래서 꼴불견 재주를 피우니,

 천사들이 가엽게 생각해서 눈물을 흘린다.

  (『자에는 자로』2막2장 118-123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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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날 금병산은 김유정의 추억으로 가득하다^^

새해 첫날 금병산은 김유정의 추억으로 가득하다^^ 

 

새해 첫날 오른 금병산... 춘천의 원창고개를 시작으로 하여 잣나무가 빼곡하게 들어선 급경사진 산중턱을 아주 잠깐 숨이차게 올라가면, 이내 금병산 정상으로 향하는 능선이 시작된다. 원창고개에서 금병산까지의 길에는 쭉쭉 뻗은 잣나무, 소나무, 참나무(도토리나무)들이 하늘을 닿을듯하며, 구름도 무심히 지나치질 못하고, 기어코 나무가지에 걸쳐있다. 이 아름다운 능선길이 바로 김유정의 '봄봄'의 무대인 것이다.

 

금병산 정상에서 여러갈래의 내리막길이 있는데, 이들 길이 김유정의 '동백꽃' '산골나그네' 등등의 실제 장소였다. 651미터정도의 높이인 금병산은 흙산이다. 거친 바위돌 하나 보이지 않고, 내려오는 길이나 오르막길이 모두 능선길이다. 가장 짦은 능선이 '동백꽃길'이고, 이 아래에 유정마을 (김유정생가가 있는 곳)이 있다. 

 

나중에 김유정역사앞에 세워진 팻말을 보고서, 강원도에서 이 금병산을 문화유적지로 개발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나, 이것을 알지 못하였더라도, 설사, 문화유적지로 선정이 안되었다 하더라도, 금병산의 길은 거의 모두 완만하게 능선으로 되어있어.. 바로 주민들의 실제적인 통행로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산 아래로 내려와서 춘천까지의 길은 걸어서 가기엔 너무나 먼 길이다. 그러나, 나는 오늘 이 먼 길을 산길로 단 1시간도 안걸려서 가지 않았는가?

 

그러니, 옛날 산에 나무하던 이들이나 농사를 짓는 이들은 이 금병산의 흙길을 밟고 다녔을 것이고, 자연스럽게 길들이 산의 완만한 중턱을 둥글게 받아 안으면서 길들이 생겨났으리라. 예전에 금병산에는 화전민도 많이 살았다고 한다. 화전민들의 오고가던 길이 바로 이 능선들이었구나......

 

김유정역앞의 슈퍼아저씨는 지금은 김유정의 친척이나 그 당시에 살았던 후손들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 김유정의 가족은 그의 자전적 소설 '따라지'에 나오는 것처럼, 모두 흩어져 버렸을까? 김유정이 살았던 시대에 농촌은 지주와 마름과 소작인의 계급관계였고 화전민들은 당연히 소작인이었겠다. 물론 김유정의 글 어디에도 계급적 문제가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일제시대에 가산이 모두 탕진되고, 몸이 병들어가면서도 그가 금병산자락에 "금병의숙"이라는 야학을 창설했다는 것은 놀라울 따름이다.

 

금병산을 내려오는데, 부귀도 영화도 물질적 풍요도 없는 이 소박한 산골에서, 인간의 애정과 애환을 목도한 김유정이 저만치서 걸어가고 있다.

 

(점순이의 사랑을 얼떨결에 느끼는 나, 동백꽃의 말미이다).  

"... 뭣에 떠밀렸는지 나의 어깨를 짚은 채 그대로 퍽 쓰러진다. 그 바람에 나의 몸뚱이도 겹쳐 쓰러지며 한창 피어 퍼드러진 동백꽃속으로 폭 파묻혀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에 나는 땅이 꺼질 듯이 온 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 (동백꽃, 김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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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꽃 피거든 홍도로 오라 -이생진 시-

 

동백꽃 피거든 홍도로 오라

 이생진


 나뭇잎은 시달려야 윤이 난다

 비 바람 눈 안개 파도 우박 서리 햇볕

 그 중에 제일 성가시게 구는 것은 바람

 그러나 동백꽃 나무는

 그렇게 시달려야 고독이 풀린다

 이파리에 윤기 도는 살찐 빛은

 바람이 만져 준 자국이다

 동백꽃은 그래서 아름답다

 오늘 같이 바람 부는 날 동백꽃은

 혼자서 희희낙락하다

 시달리며 살아남은 것들은

 눈부시게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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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네트29] 제왕과도 바꾸려 아니하노라

 

소네트 29



 윌리엄 셰익스피어


 운명과 세인의 눈에 천시되어,

 혼자 나는 버림받은 신세를 슬퍼하고,

 소용없는 울음으로 귀머거리 하늘을 괴롭히고,

 내 몸을 돌아보고 나의 형편을 저주하도다.

 희망 많기는 저 사람,

 용모가 수려하기는 저사람, 친구 많기는 그 사람 같기를.

 이 사람의 재주를, 저 사람의 권세를 부러워하며

 내가 가진 것에는 만족을 못 느낄 때,

 그러나 이런 생각으로 나를 거의 경멸하다가도

 문득 그대를 생각하면, 나는

 첫 새벽 적막한 대지로부터 날아올라

 천국의 문전에서 노래 부르는 종달새,

  그대의 [고운] 사랑을 떠올리면 난 부귀에 넘쳐

  [지금의 내 처지를] 제왕과도 바꾸려 아니하노라.

  (피천득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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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대회소회] 20년동안 8시간을 달려서 온 서울이던가?

이번 노동자대회처럼 고생스런 하루가 있을까? 8시간을 버스속에서 갖혀있다시피 하고 도착한 서울의 밤은 쓸쓸하였고, 상암동의 칼바람 추위는 우리 노동자들의 가슴을 더욱 쓰리게 했던가!

 

전날 울산에 내려갔다가 몇몇 동지들과 교대제관련 토의를 하고는 바로 올라오기 어려워서 기어코 하루밤을 보냈다. 그 다음날, 바로 전야제날.. 울산 자동차 동지들이 버스를 대절하여 올라간다기에.. 버스 맨 앞자리에 조그마한 자리를 하나 빌어서 올라탔다. 버스속에서는 고속도로에서 경찰이 막으면 어떻게 할까? 라는 이야기가 한창이고 ... 경상남도의 독특한 억양과 짧고 절제있는 언어표현 등을 재미있게 귀담아 들으면서 설레임속에 나는 버스가 출발하기만을 기다렸다.

 

드디어 1시에 출발..  1시에 출발했느니 6시쯤이면 도착하겠거니.. 하고 버스속에서 새우등을 하고, 한참을 자고 일어났는데도 이천.. 벌써 6시가 넘었다. 칠곡에서 한번 쉬고, 이천에서 밥을 먹고 다시 출발하는데 왜 이렇게 버스가 느림보걸음인지.. 서울에 도착하고 나서 올림픽 도로인가 뭐신가 위에서 버스는 마냥 서있었다. 20년동안 노동자대회에 참석했다는 뒤에 앉은 동지들은 오히려 느긋한데.. 나만 발을 동동 굴렀다.

 

"누구도 만나보아야하고.. 멀리서 온 동지도 보아야 하고......" "5시간정도 걸릴줄 알았지.. 이렇게 걸릴줄 정말 몰랐다" "서울을 가로지르지 왜 하필이면 꽉 막혀있는 올림픽도로냐?"  라면서 투덜거리는 것은 나 혼자였다. 이런, 이 양반들은 이미 모든 것을 통달하고, 도를 닦은 분들이란 말인가?

 

9시가 넘어서 상암동 언저리에 도착한 우리들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노래소리가 나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벌써 집회는 끝나고... 전야제 문화제행사장으로 이동하고 있는 대오들... 춥고, 배고픈 가운데. 몇몇 아는 얼굴을 만나니 조금 살것 같았다.

 

상암동 운동장을 질러서 들어가보지 못하고, 주변을 둘러싼 우리들이 조금은 가련하고 측은하기도 하고.. 매서운 칼바람에 몸은 점점 오그라들고.. 매서운 추위속에 아는 동지들의 얼굴이 왜 그렇게 반갑던지......

 

노동자노래 95곡이 실린 cd도 있고.. 비정규직 철폐라고 쓰여진 방한용 마스크도 있고.... 마우스 받침대도 있다... 주머니에 단돈 10000원뿐이란 것을 확인한 나는 그 가판대앞을 그냥 지나치면서 어찌나 미안했던지...... 집에 갈 차비도 없는데.. 어쩌란 말이냐?

 

올해는 만나고 싶은 동지들을 못보았다. 말은 하지 않았어도 몇몇 동지들을 해마다 보기는 하지만.. 조금 더 욕심을 냈었는데.. 추위와 좁은 장소로 인해 돌아다니는 것을 이내 포기하였다. 남쪽에서 올라온 여자후배를 만나 반가왔지만. 너무 바쁜 그녀...... 

 

작년엔 여의도 강바람에 울더니, 올핸 상암동 운동장 칼바람에 울다니......

 

나는 거의 죽다시피하면서 간신히 집으로 가서 쓰러졌다.

 

다음날..... 노동자대회...... 이미 전날부터 봉쇄를 한다고 자본은 엄포를 놓고 있고.. 그래도 가야한다는 생각에 전철을 집어탔다. 전철을 타고 시청까지 오는 동안은 어찌나 평온하던지.. 예전에는 지하철 곳곳에도 노동자대회 전날이면 붙여지는 플랭카드와 전단지들이 하나 둘은 보일 법도 한데.... 올해는 눈을 씻고 봐도 없다. 철도가 파업을 한다는데.. 지하철은 왜 이렇게 조용한가 요새?

 

시청에 가까이 오니, 그제서야 동지들의 면면이 보인다.. 한 동지를 만나서 시청 앞 원형 잔디밭을 건너는데, 역시나 대오는 잔디밭에 없다. 그곳에는 올겨울에 무슨 스케이트장을 만든다나 어쩐다나.. 올해 푹 날씨가 더워서 얼음이나 얼지 말아라..

 

시청에서 조금 더 나가 신작로에 대오가 모여있다. 역시, 집회를 불허했더니, 투쟁대오가 자연히 만들어졌구만... 이래서 불법집회가 좋은거여...  나는 속으로 불법집회를 환영했고, 대오 앞쪽에서 얼쩡거렸다. 87년, 90년, 96-97... 치열하고 처절했던 투쟁에 비하면 지금은 매우 양호한 편... 그래서 내가 맨 앞을 얼쩡거려도 아무렇지도 않은지도 모른다. 싸움의 수위가 너무 약해졌지 않은가?

 

그래도 올 노동자대회에서는 상암동 홈에버 앞에서 비정규직 철폐투쟁을 상징적으로 했고, 청와대진격투쟁을 했다. 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전체 대오를 이끌 지도력이 부족했고, 상징적인 구호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아마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나의 조급함에서 온느 조바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8시간을 버스속에 있으면서도 20년동안을 해마다 8시간씩, 왕복 16시간을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도 도착해서는 인상한번 찌푸리지않고 반갑게 인사했던 울산 동지들...... 작년이고 제작년이고 그들이 올라올때, 그렇게 힘들게 올라오는 것인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들은 서울로 올라오는 자체가 투쟁이요, 전투였던 것이다.

 

나는 어떠한 어려움속에서도 씩씩하고 의연한,

 

그들의 낙천적인 투쟁관을 또 오늘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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