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글 목록
-
- 왜 ‘퍼플’인가? 왜 또 ‘여성...
- PP
- 2010
-
- 낙태는 범죄가 아니다
- PP
- 2010
-
- 사회주의 정치세력이 쟁취해...
- PP
- 2010
-
- 나는 분노한다!
- PP
- 2010
-
- [서평] 잊지 말아야 할 노동...
- PP
- 2010
22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여성부의 칼라정책에 따른 보라색 논쟁이 대단하다. 경력 단절여성의 경제활동을 촉진시키겠다는 여성부의‘퍼플(purple)잡’이 발표된 이후 여성인권의 상징이자, 고난 극복과 의지의 표현이던 보라색은 여성이 일과 가정을 조화롭게 책임져야 한다는 의미로 덧씌워지는 기막힌 일이 벌어지고 있다.
왜 ‘여성’인가?
2008년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여성노동자 70%는 전 생애에 걸쳐 비정규직으로 살아야 한다. 45~49세 여성의 비정규직 비율은 73.6%로 남성과 그 격차가 40%p이상 차이가 나고, 임금은 남성 비정규직의 과반에도 못 미치는 36.7%에 해당하는 임금을 받고 있으며, 여성 비정규직 중 최저임금에 미달하는 월 평균 임금을 받는 사람은 4명중 1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이뿐이 아니다. 여성부 자료에 따르면 2008년 보육시설 현황 중, 국공립 보육시설은 5.5%에 해당하고, 대다수 비정규직 여성노동자가 근무하는 중소기업 내 보육시설은 전체 35만개소중 140개소, 0.04%에만 설치되어 있다.
임신, 출산, 육아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떠맡아야하는 여성노동자는 공보육시설이 현격하게 부족한 한국현실 에서 자연스럽게 ‘사회적 해고’ 위협에 놓인다. 이 모든 것을 감수하면서 일하는 여성으로 살아남기,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왜‘퍼플’인가?
이런 현실을 두고 마련된 정부대책은 유연근무제, 이른바 ‘퍼플잡’이다. 이명박 정권이 보기에 일하는 여성은 출산율을 높일 생각을 하지 않고, 결혼, 임신, 출산을 한 여성은 경제활동에 다시 편입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저출산 문제와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을 높이는 방안으로 여성노동을 더욱 탄력적으로 유연하게 사용하겠다는 것이다.
‘퍼플잡’은 더 이상 퇴직 압력 때문에 출산을 꺼려한다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여성의 일자리는 원래 탄력적이고 유연한 일자리였음을, 여성은 단시간, 파트타임직에 근무하는 것이 ‘정상’인 것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동시에 출산과 육아 문제를 여성이 오롯이 떠맡아도 일할 수 있는 유연한 근무제도가 있음을 확산시켜 육아의 책임을 여성의 몫으로 고착화시킨다. 결국 ‘퍼플잡’은 상대적으로 이미 저임금-불안정 노동 상태에 놓인 여성노동자의 위치를 더욱 악화시키고, 동시에 공보육의 요구는 저만치 달아난다. OECD에 속한 국가 중 최장시간을 일한다는 한국사회의 노동시간 단축과 동일노동 동일임금이라는 요구도 허공으로 흩어진다. 최저임금은 쓰잘머리가 없어지고, 결혼과 임신, 육아를 선택할 권리는 여성에게 남겨지지 않는다.‘퍼플잡’에는 여성의 몸을 사회적으로 통제하고 재생산을 관리하겠다는 발상이 자연스레 스며들어있는 셈이다.
단언하되, 여성노동자가 출산, 육아의 책임과 일을 동시병행 할 수 있다는 ‘퍼플’ 전망은 여성노동자의 저임금-불안정 노동을 더욱 심화시키고 단시간노동을 여성화한다. 출산 육아로 경력이 단절된 여성이 단시간노동에 재취업할 수 있도록 한다는 ‘퍼플’계획은 출산과 육아를 여성의 몫으로 고착화하는 성역할구조를 더욱 탄탄하게 한다. 여성차별의 사회구조적 모순 원인을 비켜나간 ‘퍼플잡’이 진짜 보라색이 될 수 없는 이유다.
최란
권리를 넘어 여성의 선택이 가능하도록 사회적 구조와 조건을 만들자
2009년 10월 의사들이 불법 낙태 근절을 선언했다. 그러더니 2010년 2월 낙태시술을 하는 동료의사들을 고발하면서 ‘낙태논 쟁’에 불을 붙였다. 여기에 이명박 정권이 저출산 고령화대책의 일환으로 낙태 문제 해결을 표명하고, 낙태 단속 입장을 발표하면서 낙태논쟁에 기름을 부었다.
낙태 뒤에 숨은 불편한 진실
정부가 낙태를 사실상 용인하다가 최근 단속을 강화하는 것은 60년대부터 시작된 인구조절정책을 출산억제에서 출산장려로 기조전환한 것과 연관된다. 여성의 재생산을 인구조절 정책 대상이자 도구로 보는 시각은 여성의 임신과 출산에 대한 결정권을 국가발전이라는 미명하에 국가정책 속에 배치해 온 것이다. 이 과정에서 낙태 문제 뒤에 숨은 불편한 진실 중 하나는 여성의 몸과 성을 재생산의 도구로 이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사회에서 여남의 몸은 성별로 다른 정체 성을 부여받고 성역할 분리 고착화로 이어졌다. 남성의 몸은 생산적 노동과 성적 욕망의 주체로, 여성의 몸은 임신, 출산, 육아, 양육,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여성의 가장 큰 임무는 출산이며, 성적 권리 없이 가족 내에서 육아 와 양육은 여성의 몫으로 전가되었다. 또 하나의 불편한 진실은 사회경제적 요인들이 낙태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폭행과 원치 않는 임신, 비혼모·부에 대한 사회적 낙인과 경제적 어려움, 성적 권리보다는 윤리교육에 그치는 성교육, 여성 비정규직의 확산과 출산·육아로 인한 경력단절, 사교육비의 증가 등. 이 모든 것이 낙태와 무관하지 않다. 여성의 성적 권리와 여성의 노동권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 성역할 분담이 고착화된 사회가 바로 낙태 만연의 핵심적 근원이다.
낙태권을 넘어 재생산 정의(Justice) 운동으로 나아 가야 한다
불법 낙태를 범죄로 몰고 가는 주장은 여성의 몸과 성에 대한 권리를 국가가 빼앗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모든 여성이 안전하고, 합법적인 낙태를 할 수 있는 접근권이다. 그러나 협소하게 법적 문제로만 접근해서는 안된다. 여성의 권리는 안전한 낙태를 선택할 권리이자 하지 않을 권리 모두를 포괄한다. 또한 낙태 문제가 다른 사회적 문제를 배제한 상태에서 논의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만약 다른 사회문제로부터 분리되어 낙태권만을 별도로 보면 이주민, 장애인, 성정체성 문제 등을 배제하기 때문에 오류가 생긴다. 따라서 낙태권에서 나아가 재생산 억압에 대해 이야기 하고 여성들의 재생산 권리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가지 사회문제들을 고려해야한다.
여성의 몸과 재생산에 대해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요구해야 한다. 여성의 삶은 몸의 경험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자신의 몸에 대한 결정권 없이 여성은 스스로의 삶에 대해 결정할 수 없다. 여기서 여성의 실질적인 선택권은 출산을 하지 않을 권리이자 출산을 할 권리 모두를 포괄해야 한다. 더 나아가 이 과정에서 여성이 선택권을 행사하기 위한 필요와 사회경제문화적 조건들을 갖추기 위한 재생산의 정의(Justice) 운동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러한 운동은 여성의 재생산 억압을 발생시키는 가부장적 사회구조와 자본주의에 맞선 투쟁의 결합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리고 이 투쟁에 사회주의자들이 함께 나서야 한다.
유현경
[3.8여성의 날] 여성의 권리를 말한다
3.8여성의 날이 다가온다. 1년의 한번, 여성의 권리를 말하는 운동사회 현실이 아프다. 하지만 이 기회를 잡아 맘껏 여성의 권리를 말하고, 사회주의 정치운동은 어떻게 여성의 권리투쟁에 함께 할 것인지 말하려고 한다. 물론, 우리는 부족하다. 그러나 1년의 한번이, 매일 치열하게 투쟁하고 있는 우리의 삶 전체로 확대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3.8여성의 날, 우리는 여성의 권리를 말한다.
“만약 우리가 남성과 같은 일을 하고 같은 임금을 받을 수 있다면, 노동조합을 만들고 가입할 수 있다면, 산전산후 휴가를 받고 아이를 탁아소에 맡길 수 있다면, 모든 투표에 참여할 수 있다면, 우리의 성과 수태를 조정할 권리가 있다면 이것은 모두 바로 우리 할머니와 어머니의 피나는 투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02년 전 코펜하겐에서 열렸던 3.8 여성의 날 투쟁에서의 연설을 우린 기억한다. 여성노동자들의 투쟁 물결은 이후 전 세계적인 노동자계급의 투쟁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투쟁을 통해 우리는 여성의 권리를 쟁취해 나갔으며, 노동자계급의 힘을 확인했다.
우리는 역사로부터 계급착취로부터의 해방과 성적 불평등 및 여성억압에 맞선이 투쟁이 상호 연관돼 있지만 계급착취로부터의 해방이 곧바로 성적 불평등과 가부장적 억압의 극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배웠다. 우리가 건설하고자 하는 21c사회주의는 성적 불평등과 가부장제의 극복 없이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21c 사회주의’는 임노동제의 폐지만이 아니라, 여성을 억압하고 배제하고 소외시켜 왔던 가부 장제도를 철폐하는 투쟁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 땅 여성들의 삶은 어떠한가? 심화된 자본의 위기는 특히 노동, 가족, 몸에 있어서 여성의 권리를 짓밟고 착취를 강화하고 있다. 여성은 인력활용의 대상으로, 출산의 대상으로, 성적 대상으로 도구화되고 있다. 자본의 위기 전가는 여성들에게 우선해고와 비정규직화, 일·가정의 양립을 위한 단시간 노동, 저임금·불안정한 일자리 창출과 빈곤의 심화, 출산강요와 낙태단속, 여성이라는 이유로 가해지는 온갖 폭력 등. 너무나 많은 고통 속으로 몰아 넣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외면하고서 자본주의 극복, 사회주의 실현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102주년 3.8 국제여성의날을 맞이해 새로운 대안사회를 실현하는 투쟁 속에서 다음과 같은 정치적 입장을 갖고 성적 불평등과 여성억압에 맞선 투쟁을 조직해나갈 것이다.
1. 우리는 성별에 기반한 모든 차별에 반대한다. 여성을 억압하고 차별하는 모든 정치, 경제, 법제도, 관습, 사회문화 규제들은 폐지되어야 하며, 인류에 의해 쟁취되었던 모든 민주적 권리는 동등하게 보장되어야 한다.
2. 여성들은 임금, 고용, 승진, 직업훈련 등에서 차별받지 않아야 하고, 여성의 노동권이 성차에 의해 제약받지 않아야 한다. 또한 여성의 노동권은 출산여부와 상관없이 여성의 노동권 그 자체로 보장되고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여성을 노동시장에서 배제되거나 저임금·불안정노동자로 전락시키는 성역할 고정관념에 따른 성별노동분업, 남성생계부양자 모델을 극복되어야 한다.
3. 가사, 출산, 육아, 간병 등 재생산노동은 여성만의 영역으로 한정 되어서는 안된다. 성역할 고정관념에 의해 여성의 노동가치가 평가절하고, 저임금 불안정노동으로 양산되지 않도록 적극적인 가치평가가 필요하다. 따라서 재생산노동은 여남간의 개인적 분담을 넘어 시장화 방식이 아닌 형태로 최대한 사회화되어야 한다.
또한 기존의 생산노동 중심·남성중심적 노동시간모델은 재생산노동과 같은 여성의 일상적 경험을 배제하지 않는 방식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
4. 가부장적 가족 중심주의를 넘어 가족 형태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개개인의 가족구성의 권리는 보장되어야 한다.
이성애중심 남성중심적 가족제도는 자본주의의 발전과 함께 강화되었고, 여성억압의 중요한 기제로 작용해왔다. 최근 혼인율감소, 출산율 감소, 이혼율 증가 등 정상가족의 형태가 위기에 처하자 신자유주의 국가는 가부장적 가족의 가치를 강조하며, 결국 가족을 통해서 자본의 재생산 위기를 해결하고자 한다. 결국 가족 내 여성억압을 더욱 더 강화·재생산하고 있다. 이에 우리는 가족이 더 이상 여성억압을 재생산하는 공간이 되지 않도록 할 것이다. 또한 이미 다양 한 가족의 형태가 등장하고 있고 변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는 사라져야 한다.
5. 여성은 스스로 자신의 몸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가진다. 따라서 여성에 대한 모든 형태의 폭력, 언어적, 물리적 폭력, 상징적 폭력 등은 금지되고, 여성들은 자유롭게 자신의 몸, 출산, 섹슈얼리티에 대해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여성은 낙태를 할 권리와 하지 않을 권리, 출산을 할 권리와 출산을 하 지 않을 권리를 가진다. 우리는 여성이 이러한 선택권을 행사하기 위한 사회·경제·문화적 조건들을 만들어 낼 것이다.
또한 여성의 신체에 대한 국가통제와 여성배제적 의학· 과학기술을 극복하고, 여성의 몸을 대상으로 한 모든 의료, 의약실험은 완전한 정보제공과 동의를 기반하지 않고서는 금지되어야 한다.
6. 성매매는 계급사회의 일반적인 사회 경제적 조건의 결과 이며, 특히 여성들의 빈곤화과 노동을 위한 기술과 접근도가 제약받기 때문에 발생한다. 따라서 성매매는 근본적으로 폐절되어야 한다. 그러나 당장 현 사회에 엄연히 존재하는 성매매 여성을 범죄자로 대하고 처벌해서는 안 되며, 성매매에 종사할 때에나 다른 직업으로 전환 시 인권과 존엄성, 주체적 자기결정권을 온전히 보장해야 한다.
7. 고용, 주거, 출산, 양육, 결혼 등에 있어 성소수자에 대한 모든 차별은 폐지되어야 하며, 동성애자의 모든 요구는 이성애자의 권리와 동등하게 대우해야 한다. 성적 지향은 타인에 대한 억압이 발생하지 않는 한 개인의 결정이며, 민주적 권리이다.
동성애자에 대한 억압과 탄압은 여성억압의 결과이자 가족제도를 유지하려는 지배계급의 이해가 반영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레즈비언/게이 억압 반대 투쟁을 자본주의에 맞선 계급투쟁과 결합시켜 나갈 것이다.
8. 차이에 근거한 인간관계의 전화가 필요하다. 남성과 여성, 장애인과 비장애인,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성인과 구별되는 아동과 청소년 등 모두가 권리의 주체이며, 권리는 사회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또한 제 인간관계에 있어서 차이에 근거한 인간관계의 재구성이 필요하다. 그 간 인간관계는 차이가 아닌 차별, 억압과 피억압, 또 많은 경우 폭력으로 점철된 채 자본주의와 가부장제를 재생산해왔다. 이런 착취의 자본주의와 가부장제를 종식하고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데 있어 우리는 기존의 억압에 의거한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 간의 관계 또한 종식하고 차이와 권리가 온전히 보장되는 새로운 관계를 형성해나가야 할 것이다.
우리는 여성억압에 맞선 투쟁을 하기 위해 우리 내부에서부터 치열한 투쟁을 할 것이며, 이 과정에서 여성 스스로의 주체화와 조직화를 매우 중요한 과제로 인식하고 있다. 여성의 주체화와 조직화를 위해 우리는 기존의 사회적, 조직적 질서의 구성과 결정, 관리에 있어 여성이 자신을 스스로 대표하고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표현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할당제를 활용하되 형식적인 할당제를 넘어 여성이 사회주의노동자정당의 실질적 주체가 되도록 할 것이다.
‘사회주의노동자정당 건설 공동실천위원회(‘사노위’)’ 결성에 함께 나아갈 것을 제안합니다!
‘정파는 노선투쟁의 역사적 산물
‘정파’에 대한 융단 폭격이 끊이지 않고 있다. 민주노조운동이 직면한 ‘총체적 위기’의 원인이 민주노조 내 ‘정파’때문이라는 비판들이 그것이다. 물론 민주노조 위기의 원인을 다 ‘정파’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고, 모든 정파가 다 똑같은 수준에서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도매금으로 평가할 문제도 아니다. 그러나 피할 수는 없다. 또 그래서도 안된다. 지난 20여 년간 민주노조운동의 역사에서 ‘정파’의 역할은 중요했기 때문이다. 중요했기 때문에 “민주노조운동의 위기는 곧 지난 20여 년간의 ‘정파운동의 위기’이며, 바로 ‘정파운동의 위기’가 민주노총을 총체적으로 무력한 상황으로 몰아넣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정파’ 자체에 대한 진단과 평가가 마녀사냥식으로 이루어져서는 곤란하다. 마치 자신은 정파적 질서와 책임으로부터 무관한 듯이 초월해서 양비론적으로 훈계하는 방식으로 진단과 평가를 하는 것은 더 더욱 곤란하다. 자칫 ‘정파’가 노동운동 내 노선투쟁의 역사적인 산물이고, 노동운동이 합법칙적으로 발전하는 과정의 일부라는 점을 은폐하거나 왜곡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정치적 허무주의를 조장함으로써 노동운동을 탈정치화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먼저 이루어져야 할 것은 정파의 ‘폐해’에 대한 진단과 평가가 아니다. 정파의 ‘실체’, 정파의 ‘노선과 입장’, 정파의 ‘실력’을 더욱 분명하게 대중적으로 드러내 놓고 공론화하고 실천적으로 검증하는 것이다. 민주노조운동의 위기가 ‘정파운동의 위기’로부터 비롯되고 있다는 진단은 민주노조운동이 정파의 ‘발전’때문이 아니라 정파의 ‘미발전’ 때문에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는 진단이기도 하다. 목욕물을 버리려다 그 안에 있는 아이까지 버리는 우는 범하지 말아야 한다.
‘정파’는 어떻게 ‘정파’가 됐나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민주노조운동의 발전은 정파의 탄생과 발전, 그리고 그 분화 과정과 분리할 수 없다. 물론 1987년 이전에도 반독재 민주화투쟁과정에서 “통일과 민족 문제 중심으로 변혁운동을 전개해 나갈 것인가”, “남한 내 계급 문제를 중심에 둘 것인가”를 둘러싸고 ‘민족해방파(NL)’와 ‘민중민주파(PD)’ 등의 정파가 형성됐고, 여전히 이 두 흐름이 지금까지 노동운동 내에서 커다란 정파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민주노조운동 내에서 ‘정파’가 ‘정파’로서 형성·발전·분화되어 온 것은 1990년대 초반 이후였다.
1990년 전노협이 출범한 이후 ‘전노협 사수’를 둘러 싼 두 차례의 총파업을 거치면서, ‘노동운동 위기론’이 전면적으로 제기됐다. ‘전투적 조합주의’를 둘러싼 노동운동 위기 논쟁 과정에서 주로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사회발전적 노동운동론’, ‘진보적 노사관계론’ 등이 제기됐다. 노동운동의 목표를 둘러싸서 변혁적인 ‘노동해방’의 기치를 계속 내세울 것인지, 변혁노선을 포기하고 체제내적 노동운동을 해나갈 것인지가 핵심적인 쟁점이었다. 그리고 이 때 형성된 노동운동의 목표에 대한 두 가지 노선적 경향은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어 민주노조운동 내에서 ‘노선’의 문제가 본격화된 것은 민주노총의 출범 직후 1기 집행부가 내건 ‘국민과 함께하는 노동운동’을 둘러싼 논쟁을 통해서였다. ‘사회개혁적 요구’를 전면에 내걸어 ‘사회적 합의’를 통해 국민적 지지를 획득해야 한다는 ‘국민과 함께하는 노동운동’노선에 반대하며, 노동자의 ‘계급적 요구’와 ‘계급적 단결’을 통해 사회를 변혁시켜 나가야 한다는 ‘계급적 노동운동’노선이 제기됐다.
이러한 노선적 대립은 1996년~97년 노동법개악 저지총파업 이후 총파업에 대한 평가와 노동자정치세력화를 둘러싼 입장의 차이로 분화되었다. 노동법개악저지 총파업의 패배가 노동자출신 국회의원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평가한 세력들은 이후 ‘국민승리21’을 거쳐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 건설로 나아갔다. 이에 대해 노동자민중의 전면적인 투쟁으로 진전시키지 못한 지도부의 ‘국민주의적 노선’과 ‘유연한 전술’이 패배의 원인이었다고 평가한 세력들은 변혁적인 계급정당 건설로 나아갔다. 민주노조운동 내 노선의 차이와 분화가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둘러 싼 차이로까지 확장된 것이다.
민주노조운동 내에서 ‘정파’간 분화와 갈등이 본격적으로 가장 첨예하게 드러난 과정은 1998년 1월 정리해고제 직권조인 이후 거세져가는 정권과 자본의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구조조정 공세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둘러싸서였다. 특히 당시 김대중 정권의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할 지 여부를 둘러싸서 정파간 입장의 차이와 대립은 첨예해졌다. 물론 겉으로는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할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의 차이로 드러났다. 그러나 그 근저에는 크게 자본의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구조조정을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대세라고 보고, 자본의 틀 내에서 사회적 합의를 통해 가능한 방안을 모색해보자는 입장과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구조조정 그 자체에 맞서 비타협적인 투쟁을 해 나가야 한다는 입장으로 대별되었다. 현실에서는 이 두 가지 모두 현실화되지 못했고, 그 결과 ‘민주노조운동의 위기’는 더욱 깊어지고 확장됐다.
이와 더불어 민주노조운동의 전략적 과제의 하나인 ‘산별노조’ 건설을 둘러싸서도 산별교섭과 조직형식 전환 중심으로 산별노조를 건설해 나간 입장과 아래로부터의 계급적 산별투쟁을 통해 산별노조를 건설해 나가자는 입장이 대별되었는데, 이 역시 두 주장이 현실화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에는 민주노총의 ‘사회연대전략’을 둘러싸서, 사회연대전략을 통해 위기를 극복해 나가야 한다는 입장과 ‘정규직 노동자 양보론’으로는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는 입장이 팽팽하게 맞서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이명박 정권 아래서 민주당까지 포괄하는 반MB연합을 결성하자는 주장과 반MB연합은 민주당에 대한 비판적 지지론의 연장이며 반신자유주의 진보대연합을 결성해야 한다는 주장 등이 서로 논란을 벌이고 있다.
민주노조운동 전체가 ‘반자본’ 정파로 서나가야
이렇게 민주노조운동 내 정파는 우파-중앙파-좌파의 3분립 구도로 형성·분화되어 왔다. 정파의 역량과 실력의 한계 때문에, 또 정파운동에서 필연적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는 정파적 이기주의나 종파주의적 활동방식 때문에, 정파 운동이 때론 대중조직운동에 폐해를 끼치고 질곡에 빠뜨리기도 하지만, ‘정파’의 형성과 발전과 분화는 민주노조운동의 질적 발전을 위해 피할 수 없는 길이다. 정파냐 아니냐가 아니라 ‘어떤 전망과 주장을 하는 정파냐’, ‘어떻게 활동하는 정파냐’, ‘어떻게 정치적 책임을 지는 정파냐’로 논의 지형을 구체화시켜야 한다. 그래서 정파‘다운’ 정파로 서나가야 한다. 무엇보다도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한 민주노조운동 전체가 한국사회에서 ‘반자본’ 정파로 굳건하게 서나가야 한다.
사진출처 노동과 세계
제도나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운동은 혼자 힘으로는 안된다. 그래서 조직을 만들고 함께 실천해 왔다. 그리고 운동노선과 실천방식의 차이에 따라 정파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정파운동이 제 역할을 하고 있다면 부패, 무기력으로 실패한 민주노총 집행책임을 전가하기 위한 ‘마녀사냥’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파운동을 하고 있다면, 이제 무엇을 극복할 것인지 진지하게 검토할 때가 됐다.
노선과 정책을 분명히 하자
지금 노동운동은 ‘차이도 없는데 분열되어 있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차이는 있다. 민족모순의 해결을 우위에 놓는가, 계급모순의 해결을 최우선시 하는가? 사민주의인가, 혁명주의인가? 등등 노선상의 근본적 차이가 분명 있다. 이는 정당운동 수준에서는 물론이고 민주노조운동 내의 제 활동가조직들 간에도 노선상의 차이가 있다. 그런데도 차이가 드러나지 않는 것은 자신들의 노선을 대중 앞에 있는 그대로 표방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노선과 정책을 대중 앞에 책임 있게 제출해야 한다. 제출할 내용이 없다면 그것은 한낱 ‘패거리’에 불과하므로 해체하는 것이 마땅하다.
대중들의 선두에서 일상적으로 실천하자
정파조직에 대한 비판 중 가장 많은 비판이 ‘선거조직’이라는 것이다. 선거 때만 나타나서 대중조직의 집행 권력을 장악하는 데만 골몰하는 조직을 말한다. 그동안 민주노총 임원선거에 후보를 낸 정파조직들 중 투쟁의 현장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조직들이 많다. 노동조합 질서에 안주할 뿐 대중조직이 어려울 때 선도적으로 나서지 않는다.
자본과 정권의 공격으로 대중조직이 위기에 처해있을 때, 대중조직이 미처 태세를 갖추고 있지 못할 때 활동가들이 결집한 정파조직이 기민하게 그리고 헌신적으로 나서야 한다. 자본과 정권의 책략을 폭로하고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해 대중에게 호소하는 선전선동에서부터 현장에서 투쟁을 조직하고 투쟁의 선두에 서야 한다.
일상의 실천도 제대로 하자. 배후에서 선전선동만 일삼는 ‘신문조직’으로 전락하지 말자. 대중을 함께 움직이려는 노력 없이 맹동하는 ‘가두분자’도 정답이 아니다. 대중과 함께 때로는 대중의 한 발 앞에서 헌신적으로 일상 활동을 전개하는 정파운동으로 거듭나자.
대적투쟁전선으로 힘을 모으자
내부 대립전선으로 대적전선을 약화시키지 말아야 한다. 견해가 다른 정파가 집행할 때 자본과 정권에 맞서는 투쟁을 외면하거나 구경하는 조직은 운동하는 정파가 아니라 한낱 종파에 지나지 않는다. 심지어 방해까지 한다면 척결되어 마땅하다. 대중적 논의 끝에 투쟁이 결정되면 책임 있게 공동실천에 나서야 한다. 만약 전술적으로 투쟁방식이 동의되지 않으면 다른 방식으로라도 대적투쟁에 나서야 한다.
스스로에 대해 원칙을 잃지 말자
‘자기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다’는 정파를 비난하는 말 중에 하나다. 조직보존 논리를 앞세워 책임을 회피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심지어 핵심지도부가 뇌물수수로 구속되었을 때 지도부 총사퇴를 주장하자 이를 정파적 공격이라고 몰아붙이는 경우까지 있었다. 자기 조직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당연히 해야 할 대중적 책임을 지지 않고 정당한 비판을 공격하는 것은 전형적인 종파주의다. 조직이나 조직원의 오류와 과오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한다. 그래야 정파운동은 변화 발전할 수 있다.
잠복된 공황
지금 세계정세를 형성하는 데에서 세계공황이 압도적인 우위와 규정력을 발휘하고 있다. 작년 전 세계 지배계급은 발 빠르게 국제 공조와 협력 체계를 가동시켰다. 저금리정책, 유동성공급, 보호무역차단을 국제규범으로 성사시켰다. 그러나 그 이면을 보면 지금 세계 각국은 엄청난 규모의 국가 부채를 떠안고 있으며, 소비 위축이 심각한 수준이고, 대량실업이 넘쳐나고 있으며, 극단적인 양극화가 벌어지고 있다.
즉 지금 공황이 잠시 진정 기미를 보이고 있는 것은 단지 지배계급 사이의 공조 때문만이 아니라 노동자 민중에게 일방적으로 위기를 전가한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배계급 사이의 공조와 협력이 마냥 계속되기는 어렵다. 또한 노동자 민중의 불만과 분노는 갈수록 쌓이고 있다. 따라서 위기는 진정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잠복되어 있을 뿐이다.
지금 지배계급 내에서 한편에서는 출구 전략을 말하는, 또 한편에서는 이중침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동시에 나오는 것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세계정세는 대단히 유동적이며 불투명하다. 다만 공조와 전가가 아직은 이어지고 있고 비록 공급(거품)에 따른 효과이기는 하지만 일부 성장이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한다고 할 때, 2010년에 공황이 세계적 차원에서 급격히 폭발할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그렇지만 세계 도처에서 크고 작은 정치 위기가 발생할 가능성은 충분하다.
한편 이번 공황은 미국 경제가 처한 취약성이 반영된 것이며 이번 공황을 통해 그 취약성은 더욱 커질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미국의 패권 역시 더욱 약화될 전망이다. 가까운 시일 안에 힘의 저울추가 급격히 기울지는 않겠지만 머지않아 미국의 패권이 약화된 장소에 힘의 공백이 발생할 것이라는 예상은 충분히 할 수 있다. 이 공백을 차지하려는 자본간, 국가 간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질 것이며 그 만큼 새로운 대립과 갈등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특히 그 중심에 중국이 서게 될 것이라는 것이 진작부터 공공연한 사실로 떠올라 있다. 얼마 전 코펜하겐 기후협약회의에서 미국과 중국이 부딪침으로써 벌써 현실화 되고 있다. 이와 함께 신자유주의 지구화 역시 지금까지와 같은 질주를 계속하기는 쉽지 많은 않을 것이다. 이번 공황 자체가 바로 신자유주의 지구화가 불러온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축적 전략을 찾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신자유주의 지구화 자체가 이미 위기에 빠진 자본의 상태를 반영한 것으로 새로운 시도가 오히려 위기를 부추겨 더 큰 위기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랬을 때 2010년은 이제까지 미국의 패권과 신자유주의 지구화라는 두 축에 의해 움직이던 세계에 어떤 변화가 이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요지부동 이명박 정권
2010년은 이명박 정권이 집권 반환점을 도는 해이자, 지자체 선거를 치르는 해이다. 부르주아 정치세력 사이에서 사활을 건 쟁투가 벌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민주당은 촛불투쟁, 용산투쟁, 쌍용차투쟁에서는 사실상 객에 불과했지만, 미디어법 투쟁을 계기로 반이명박의 대표 주자로 나섰다. 두 전직 대통령의 연 이은 죽음이 이를 더욱 가능케 했다.
지금 정세는 이명박 대 반이명박으로 형성되어 있다. 이는 한편으로는 노동자 민중이 투쟁을 일으키고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는 배경이 될 수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민주당이 정치적 헤게모니를 행사하는 근거가 될 수도 있다. 현실은 훨씬 후자 쪽으로 기울어 있다. 진보정당이 반이명박 투쟁전선에서 노동자 민중투쟁의 한 주체로 서지 않고, 반대로 제도 정치 공간에서의 정치적 입지를 확보하려는 태도를 취한 것이 이를 더욱 부채질 했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한 조직노동자의 투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2010년에도 이런 상황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지금 정국은 세종시 문제로 뜨겁게 달구어져 있다. 민주당은 이를 활용해 반이명박의 정치적 대표성을 더욱 강화하고 나아가 지자체 선거에서 민주대연합을 주도하려 하고 있다. 진보정당은 여전히 민주당과 정치적으로 분명한 선을 긋지 않고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이해다툼을 벌이는 것에 몰두하고 있다.
민주노총 집행부는 진보정당 통합 타령만 되뇌고 있다. 그건 민주노총이 제기할 수 있는 하나의 사안일 수는 있어도 전력투구해야 할 일은 아니다. 오히려 민주당과 분명히 결별할 것을 주장하고, 노동자 민중투쟁을 같이 조직하고 책임질 것을 요구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노동자 민중도 이명박 정권과 자본가계급에 대한 분노를 켜켜이 쌓고 있으면서도 선뜻 저항과 투쟁으로 떨쳐나서지 못하고 있다.
민주노총과 진보정당이 지금과 같은 행태를 벗지 않는다면 설령 통합이 돼도 그것이 계기가 되서 노동자 민중이 자신감을 회복할 것으로는 보지 않는다. 이명박 정권은 설사 지자체에서 패한다 해도 의회를 무기로 지금까지의 정책 기조와 국정 운영 방식을 그대로 가져갈 것이 분명하다.
이명박 정권을 대체할 수 있는 정치세력이 형성되지 않는 한 그건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다. 노동자 민중의 아래로부터의 투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2010년에도, 지자체 선거 결과에 따른 일부의 영향은 있겠지만, 정세의 급격한 변동이나 변화를 크게 기대하기 어려울 전망이다.
변화하는 동북아
한편 지금 세계정세에서 동북아 정세가 차지하는 위상과 비중이 매우 빠르게 커지고 있다. 중국이 이미 미국과 함께 G2로 불릴 정도로 급격히 부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존 경제 대국 일본이 지금까지 미국과 맺어온 일방적인 관계를 되돌아보며 아시아 중시를 말하고 있는 데에서 그 현실성이 뒷받침되고 있다. 그에 따라 중국과 일본이 전후 최초로 우호적 관계를 맺기 위한 여건을 만들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올 예정되어 있는 일본 선거에서 하토야마 정권이 승리할 경우 그 속도는 더욱 빨라질 것이 분명하다.
물론 동북아가 EU와 같은 정도로 되는 것은 결코 쉽지 않겠지만 역내 경제 협력이 높아질수록 정치적 관계가 밀접해 질 것은 자명한 일이다. 2010년은 중국, 일본, 한국, 아세안이 공동보조를 취하는 모습이 더 활발하게 일어날 가능성이 있으며, 그럴 경우 동북아가 세계정세의 한 축을 담당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동북아 정세를 규정하는 또 다른 요인이 ‘북핵 문제’라고 할 때, 2010년은 오바마 정권의 ‘북핵 문제’ 해법이 비로소 가시화되는 해가 될 전망이다.
오바마가 내세운 ‘핵 없는 세계’ 정책, ‘NPT 체제’ 복원 등과 맞물려,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이란 문제 해결, 중간 선거 대비 등을 앞두고 최소한 북을 6자회담으로 끌어내기 위한 조치를 취할 가능성은 높다. 그러나 북은 ‘비핵화’를 지렛대 삼아 미국과의 평화협정체결을 요구하고 있다. 북은 지금 체제(정권) 보장과 경제 봉쇄가 풀리지 않고는 생존 자체가 심각한 위협에 빠질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6자회담을 성사시키려는 미국의 의도와 미국의 대북적대정책을 철회시켜야 하는 북의 의도가 일정한 접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인지, 아니면 평행선을 그릴 것인지 아직은 확실치 않지만 어떤 형태, 어떤 수준에서든 2010년은 대화국면이 형성될 것으로 보인다. 그와 함께 남북관계에도 일정한 변화가 예상된다. 남북정상회담 성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명박 정권도 북의 대 중국 의존도가 더 이상 진전되는 것은 원치 않고 있으며, 북의 입장에서도 남북관계가 개선되어야 할 이유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반자본을 더욱 구체화, 대중화 하자
사회주의 진영은 반MB투쟁과 반자본 투쟁과의 관계를 재설정해야 한다. 지금까지 전체 반MB전선은 민주당을 비롯한 자유주의 세력이 헤게모니를 행사하고 있다. 올 6월 지자체 선거 때까지 반MB전선은 민주대연합(민주 대 반민주)과 진보대연합(보수 대 진보)이라는 틀(프레임)에 갇힐 가능성이 여전히 높다. 그럴 경우 반MB투쟁은 정권 심판론/선거 심판론으로 협소/왜곡될 수밖에 없다.
사회주의 진영은 지금까지 반MB투쟁을 정권 퇴진 투쟁과 반자본 투쟁으로 가져가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반MB와 반자본 사이의 관계를 부지불식간에 반MB를 통한 반자본, 즉 ‘선 반MB, 후 반자본’과 같은 매개론 또는 단계론적으로 사고했거나 아니면 상호 관계성을 해명하지 못한 채 병렬시켰다.
2009년에 대표적으로 결합했던 용산투쟁과 쌍용차투쟁의 경험을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비록 전력을 다했으며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지만 위와 같은 태도를 보인 것은 아닌지 냉철하게 살펴봐야 한다. 현실에서 사회주의 진영의 반MB 역시 민주당 헤게모니와 진보정당의 담론에 갇혀 있고, 반자본은 꼬리말 이상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이제라도 반자본을 전면에 내걸어야 한다. 그래야만 반MB 투쟁도 지속성을 가질 수 있으며 정치적 의의를 극대화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자본의 내용을 더욱 구체화하고 더욱 대중적으로 표출할 수 있어야 한다. 반자본을 단지 정치적 구호나 선전으로 생각해서는 그를 진전시키기 어렵다.
자신부터 반자본이 대중의 정서나 정세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봐야 한다. 반자본은 오늘의 세계가 처한 현실을 볼 때 미래에 도달할 어떤 이데아가 아니다. 작은 일상 속에서도 이미 반자본은 충분한 설명력을 가질 수 있다. 반자본을 지금의 현실에서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로 만들어가야 한다.
동북아·한반도 문제 해결의 주체로 나서자
2010년 동북아를 포함한 한반도 정세는 이명박 정권 등장 이후 상당한 변화가 일 것이 충분히 예상되고 있다. 기존 경색 국면에서 대화 국면으로 전환될 전망이다. 물론 그 과정은 결코 순탄하거나 안정적으로 진행되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해 당사국 사이의 또는 지배계급 사이에서 공동의 이해관계를 끌어내기가 여전히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서 최소한의 공통분모를 찾아야 하는 것이 또한 피할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에 우여곡절을 겪더라도 대화 테이블은 어떤 식으로든 복원하려 할 것만은 분명하다. 사회주의 진영은 지금부터 미국과 이명박 정권에게 대북적대정책 철회, 한반도 비핵화 동참,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 평화 체제를 실현할 것을 정치적 요구로 내걸고 최대한 개입할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
지배계급은 오히려 그것들을 실천할 분명한 의사나 의도를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 개입을 통해 저들의 본질을 폭로하고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압력을 행사해야 한다. 그것들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그것이 노동자 민중의 이해와 자동적으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그것만으로 문제가 완전히 해결될 수 없지만 이 문제를 저들에게 맡겨버리고 노동자 민중의 이해와는 무관한 것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요구와 개입이 노동자 민중을 정치적 수동 상태에 머물게 한다거나 민족주의의 덫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야말로 아무런 근거가 없다.
지금 원칙적 차원에서 반대해야 할 것은 자본 중심의 동북아 경제권을 형성하려는 지배계급의 움직임이다. 아직은 이 문제가 가시권에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역내 국가 사이의 FTA 체결이 이루어지면 수면 위로 떠오를 수 있다. 그 때서야 대응하려면 이미 늦다. 또한 지배세력과 또 다르게 그것이 마치 노동자 민중의 정치적 대안인 것처럼 호도하고 있는 개량주의 세력의 입장과 태도에 대해 단호히 비판하고 신속히 대처해야 한다. 사회주의 진영은 동북아, 한반도 문제에 대해 문제 제기의 당사자로, 대안 세력으로 과감하게 나서야 한다.
전국적·전계급적 활동, 민주노조운동을 방어하자
2010년 사회주의 진영은 노동 현안에 대한 개입과 대응을 비상하게 할 준비와 각오를 다져야 한다. 지난 철도노조 투쟁에서 그대로 드러난 바와 같이 이명박 정권은 이제 아주 노골적으로 노동조합에 대해 적대감을 표출하고 있다. 노동관계법 개악, 공공부문 선진화, 금속노조에서 예상되는 임단협 후퇴, 비정규법 개정 등을 동원하여 민주노조의 의의와 역할을 아예 없애려 작정하고 있다.
지금 닥치고 있는 현실은 이제까지 일종의 습관처럼 말하던 위기와는 차원이 다르다. 현재 처한 위기에 겹쳐 거센 풍랑이 일면 정말 배가 파산날 수도 있다. 그럴 경우 노동자 민중이 겪어야 할 어려움은 훨씬 커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회주의 진영의 대응도 이제까지와는 크게 두 가지 점에서 달라져야 한다. 하나는 사회주의 세력의 정체성과 존재성을 분명히 드러내는 방식을 취해야 한다. 노동자를 주체화하는 문제와 이를 대립시켜서는 안 된다. 그 반대다. 노동자를 주체화하기 위해서도 이는 반드시 필요하다.
사회주의 세력은 운동진영 전반에 만연된 대기주의와 경제주의에 맞서기 위한 일대 정치적 결단을 내려야 한다. 또 하나는 노동 현안에 개입한다고 해서 거기서 만의 활동으로 제한하거나 제약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는 민주노조(운동)을 방어하는 것조차 성공하기 어렵다. 사회주의 진영도 그동안 보여 온 노동자주의적 태도와 실천을 하루빨리 극복해야 한다.
전국(세계)적 시야와 전계급적 안목을 갖추려는 노력을 의식적으로 해야 한다. 대중투쟁이 일어나기를 막연히 기다릴 것이 아니라 대중이 투쟁에 떨쳐나설 수 있는 정치 환경을 조성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역량의 문제가 아니라 방향의 문제다.
지방선거, 자본가 정당과 결별해야
노동자 민중의 입장에서 볼 때 올 지자체 선거에서 이루어야 할 최소한의 정치적 목표는 적어도 진보정당까지를 포함한 노동자 민중운동 진영이 자본가 정당과 분명히 결별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유주의 세력에 대한 정치적 의존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정치를 해 나갈 수 있는 최소한의 공통분모를 형성해야 한다. 그럴 수 있어야만 비로소 본격적인 정치 논쟁이 가능해지고 정치를 꽃피울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두 진보정당은 지금 중심을 잡지 못하고 오락가락하는 모습만을 보여주고 있다. 노동자 민중이 처한 현실을 어떻게든 돌파하려는 태도와는 거리가 한참 먼 행보를 걷고 있을 뿐이다. 한참 동안을 민주대연합과 진보대연합 사이에서 헤매다가 결국 도달한 결론이라는 것이 자신의 생존과 이해를 지키기 위한 수준으로 돌아왔다. 진보대연합이든 통합이든 그것들은 정치적 명분, 수사에 지나지 않는다. 만천하가 다 아는 사실을 그들만 모르쇠하고 있다.
정파가 자신의 정치를 해 나가는 것은 당연하다. 그를 탓할 필요나 이유는 없다. 자신의 정치를 관철하기 위한 노력을 다하는 속에서 그것이 노동자 민중 전체의 이해와 어떻게 연결되는 것인가를 설명하고 납득시키면 된다. 진보신당이 전면적 진보대연합을 말한 바 있고 민주노동당이 통합을 전제로 한 선거연합을 결의했지만 이를 듣는 노동자 민중의 가슴은 아무런 감흥도 느낄 수 없다.
이제 사회주의 세력이 나서서 노동자 민중진영을 묶어 세워야 한다. 노동자 민중진영이 취해야 할 선거 목표와 그를 위한 방안을 제출하고 흩어진 대중을 결집시키기 위한 활동을 적극 펼쳐 나가자.
[과학기술과 사회주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과학기술 발전은 어렵다
뉴턴, 다윈, 아인슈타인에 이어, 사람을 달에 보낸 지도 벌써 40년이 지났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아직도 세계 인구의 1/7이 만성적 영양실조로 고통을 격고 있으며, 기아로 고통 받는 사람은 60만이 넘고 있다. 식량 문제를 해결한다고 내놓은 유전자 변형작물은 오히려 농민을 더욱 가난하게 만들고 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약 420억 평(경작지의 약 54%)에서 3천 4백5십만 톤의 유전자 변형 콩(전체 곡류의 50%)을 생산하고 있다. 유전자 변형 작물의 위험성은 논외로 하더라도 여전히 3천8백만의 인구 중에서 2천만의 사람들이 최저생계 이하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6백만 명의 사람들이 가난에 의해 극단적 기아에 고통 받고 있으며, 매일 55명의 아이들, 35명의 성인과 15명의 노인들이 기아관련 원인으로 죽어가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전 세계 식량 생산량은 소비량보다 1.5배나 많다
제약 산업
신종플루나 AIDS 치료제의 부족에서 보듯이, 자본주의 사회는 필요한 의약품 배분의 무능함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제약 회사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약을 개발 하지 않거나 비싼 가격을 요구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AIDS 환자들이 생명 유지에 필요한 퓨제온을 먹기 위해서 연간 2200만원~3000만원이 필요하다. 제약 회사는 신약을 개발에 투자된 연구비가 많고 생산과정이 매우 복잡해서 어쩔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근거들을 전혀 공개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AIDS 환자는 소비자일 뿐이다. 연구 방향도 이익이 발생하는 방향으로 왜곡시킨다. 자본가 입장에서는 환자들이 건강을 되찾는 것보다 지속적으로 약을 먹는 상태로 유지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치료제보다는 환자들이 항시 복용해야 하는 항레트로바이러스(ARV)라는 약품 연구에 치중하고 있다.
2007년에는 암분야에서 획기적인 연구 성과가 발표되었다. 지금까지 의학계에서 손상된 미토콘드리아는 회복이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는데, 디클로로아세테이트(DCA) 분자가 암 세포 증식과정에서 손상된 미토콘드리아를 회복시킨다는 획기적인 연구 결과였다. 그런데 DCA는 특허가 되어있지도 또 특허로 독점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래서 제약회사는 DCA연구를 무시하고 있다. 연구자들은 현재(2009년 8월)까지 어떤 기업으로 부터도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
기타 사업들
자본주의는 전자/기계/소프트웨어 분야에서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 분야에서 발전은 그리 길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주도권이 산업자본가에서 금융자본가로 넘어 갔다는 이유도 있고, 비용 및 비효율성 또한 만만치 않게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들은 금융자본가들 구미에 맞게 단기 이익에 집착하게 되고, 개발 보다는 시간과 비용이 적게 드는 특허권이나 M&A로 수익을 내려고 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는 특허나 기업비밀 보호에 더욱 열을 올리게 한다. 개별 기업들은 이미 개발된 기술이 있고, 쉽게 구현할 수 있어도 다시 엄청난 연구 자금을 투입해서 기존 특허를 회피하는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
또 ‘기업 비밀’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기술을 개발한 노동자는 물론이고 전체 노동자를 산업스파이로 간주하면서,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 각 노동자들의 컴퓨터 마다 보안프로그램이 깔리고, CCTV나 RFID, 엑티브 벳지 등 이중 삼중으로 감시 기술이 적용되고 있다. 심지어 출근 퇴근시 마치 비행기 탑승장과 같은 x-ray 투신기를 통과하기도 한다. 그것도 모자로 같은 업종끼리 이직을 금하는 법까지 만들어 놓았다
지금까지는 자본주의 사회가 눈부신 과학기술의 성과를 이루어 냈을 지도 모른다.(물론 그 성과를 논할 때 환경문제까지 포함해야한다) 그렇지만 현재는 중복투자가 증가하고 노동자 통재하기 위한 비용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그들의 비용에는 경쟁에서 밀려 실업자, 비정규직으로 전락한 노동자들의 기회비용과 그동안 노동자들이 받아온 각종 교육과 생활비는 물론이고 경쟁에서 패한 기업들의 비용들은 빠져있다. 아무튼 점점 더 자본주의 사회에서, 과학기술 발전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리눅스 공동체를 창시한 스톨만은 특허를 피해가며 개발하는 엔지니어를 지뢰밭을 통과하는 일반인으로 묘사하며 기술개발 시 답답함을 표현한 바 있다. 과학기술은 진보를 원한다.
상상하라~
과학기술은 진보를 원한다
해결책을 상상하기란 그리 어렵지가 않다. 전체 노동자민중의 협업체제의 부활이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과학기술의 발전은 결과물을 서로 공유하고, ‘동료심사’를 통해 검증하는 문화에서 찾을 수 있다. 마이크로 소프트를 공포에 떨게 한 리눅스 공동체 역시 좋은 사례를 제공한다. 지역과 시간차에 대한 걸림돌은 이미 정보통신기술로써 사라져 버렸다. 혹자는 무임승차와 보상(동기부여) 문제(공유지의 비극)를 제기할 지도 모른다. 아직도 특허 독점과 경쟁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에 여전히 효율적이라 주장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시각은 모든 문제의 해결책을 “분배”로만 보는 좁은 시각에서 비롯된다.
분배의 문제만 보면 어떻게 또 무엇을 생산할 것인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생산된 것을 어떻게 나눌지 만을 생각한다. 여기에다 개별 민족(국가), 개별 기업 혹은 개개인을 파편화시켜 놓으면, 그들이 볼 수 있는 것은 한정된 파이와 이 파이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만이 보인다. 눈앞에는 ‘야만’만이 존재한다.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도 정규직과 정규직, 정규직과 비정규직(내국인과 외국인), 여성과 남성, 모두 투쟁의 대상으로 보인다. 경찰과 군대가 필요하고 국가 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무임승차하는 자는 더 꼴 보기 싫어진다. 해결책은 공유지를 사유화하고 무임승차를 법적, 물리적으로 차단하고, 전체 파이를 키우는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노동자들에게는 자본가들 혹은 공장 관료들(혹은 국가 관료들)의 지시에 따라 열심히 일만하는 것이 유일한 대안일 뿐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노동자들이 무엇을 어떻게 생산할 것인가를 참여하고 결정할 수 있다면 보상 문제와 관료주의 문제는 논의의 대상이지 내재된 문제가 아니게 된다. 또 동기 부여는 보상으로만 해결되지 않는다. 교환을 목적으로 생산하는 사회가 아닌, “필요에 의한 생산”이 주가 되는 사회에서는 “필요” 충족, 그 자체로서 훌륭한 동기가 된다. 물론 개인이 필요한 것을 각자 생산하자는 것은 아니다. 이때 개인과 전체(집단)간의 문제가 발생 수 있는데, 이때 민주적 논의과정은 개인과 집단을 변증법적으로 묶어줄 수 있을 것이다.
공유지는 무조건 황폐해 진다는 ‘공유지의 비극’의 문제는 사실 조작된 것이다. 완전히 격리된 ‘이기적인’ 개인들에게 공유지를 맡긴다면 공유지의 비극이 있을 것이지만, 공동으로 참여하고 계획하는 그런 공유지라면 공유지의 비극이 생길 여지가 없다. 사실 공유지의 문제는 자본주의사회에서 무임승차를 일삼는 부동산 부자들과 금융 자본가, 더 나아가 자본가 전체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일 뿐이다.
이제 상상하자. 그리고 행동하자. 지금! 우리들이 상상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공장과 연구소에서 생산의 계획단계부터 참여하는 민주화 투쟁이 필요하다.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굶어 죽지 않을 권리가 있는 사회(사회적 임금)”를 위한 투쟁 역시 강조하고 싶다. 이는 공유지를 더욱 살찌우는 원천이 될 것이다.
[과학기술과 사회주의]
“억압을 정당화하는 모든 과학 이론은 잘못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지구중심설
2000년 전 사람들에게 평평한 바다와 땅에 살면서 지구가 둥글다고 생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뛰어난 수학자이자 종교 교주이기도 한 피타고라스는 물체의 가장 완전한 형태를 ‘구’라고 믿었기 때문에, 지구와 모든 천체가 둥글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주장은 200년 후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증명되었다. 그가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지구 외부로 나갈 필요까지 없었다. 수평선을 넘어 배가 돛대부터 보인다는 점, 북극성 고도가 지역마다 차이가 난다는 점, 그리고 월식 때 달에 비친 둥근 지구 그림자는 좋은 자료가 되었다. 그는 하지 때 두 도시 사이에 비친 태양의 그림자 길이로 지구 반경까지 계산했는데 이 값은 요즘 계산한 값에 비해 오차가 15% 정도 밖에 나지 않는다. (당시 한국은 청동기 시대였다).
물론 그의 우주론은 당시 시대를 넘어서지는 못했다. 인간은 존엄한 존재이기에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 되며, 달 위 하늘나라는 영원하며 완벽한 아름다운 신의 영역이었다. 당시에도 아리스타르코스라는 천문학자는 태양중심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구 중심설은 기원후 2세기, 위대한 수학자 프톨레마이오스에 의해 수학적 토대를 마련하면서 더욱 견고한 이론으로 정립되었다. 지구중심설은 ‘과학과 수학’에 힘입어 2000년이나 지속되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전환
14-15세기부터 유럽은 봉건적 착취로 인해 농민의 봉기가 만연했고, 역병까지 겹치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지배세력은 농민층에 대한 수탈을 더욱 강화했고, 경제 위기는 심화되었다. 이에 일부 귀족들은 생산자의 잉여를 직접 빼앗는 이전의 방식대신 해외 시장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은 해상무역을 원활하게 진행하기에 너무나 부정확했다.
16세기, 코페르니쿠스는 태양과 지구의 위치를 바꿈으로써(이것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부른다) 프톨레마이오스의 복잡한 수식을 간단하면서도 정확한 수식으로 바꿀 수 있었다. 평생을 로마 교황청의 사제로 살다간 코페르니쿠스는 부활절이나 성모승천절 등과 같은 교회 제례 날짜를 정확하게 맞추기 위해 연구 했다. 그러나 그 연구는 귀족들이 더욱 필요했고, 그들의 이익에 잘 복무했다.
코페르니쿠스도 천체 운동이 원이어야 한다는 옛 그리스 사고방식을 벗어나지 못했다. 17세기 케플러는 티코 브라헤의 방대한 측정 결과를 바탕으로 원운동을 타원으로 바꾸었고, 질서 정연한 3가지 법칙을 이끌어 내었다. 뒤이은 뉴턴의 등장으로 2000년간 이어온 아리스토텔레스 우주론은 종말을 고하게 된다.
뉴턴과학의 최대 수혜자-자본가계급
1664년, 뉴턴이 가장 몰두했던 연구는 달이나 행성을 원 또는 타원궤도로 움직이게 하는 힘이 무엇인가라는 것이었다. 뉴턴은 달의 운동을 지상의 높은 산에서 수평으로 발사한 포탄의 운동에 비유했다. 포탄을 수평으로 발사하면 포물선을 그리면서 땅에 떨어진다. 더 큰 속력으로 포탄을 발사한다면 곡선은 완만해 지면서 더 먼 거리에 떨어질 것이고, 만약 충분히 큰 속력으로 포탄을 발사하면 지구 위를 도는 달과 같이 무한히 지구 위를 돌게 될 것이다. 결국 뉴턴은 이러한 생각을 확장해서 사과를 떨어지게 하는 원리와 달(지구)이(가) 지구(태양) 주위를 도는 원리가 다르지 않다는 사실(만류인력)을 발견했다.
당시는 상업 자본과 제조업이 발달하면서 해상 수송 증가했다. 뉴턴이전에는 먼 바다에서 배의 위치를 확인할 수 없었기에 연안을 따라서 운행하였다. 뉴턴의 성과에 가장 많은 혜택을 받은 사람은 자본가 계급이었다. 상업자본은 배의 속도의 증가, 적재능력 및 항해능력 그리고 운하와 수문의 건설의 문제를, 군수자본은 화기의 최소중량, 안정성 그리고 탄환궤도에 관한 기술적 문제, 광산 자본은 광석인양, 갱도의 환기, 배수 및 펌프, 송풍 그리고 광석선별에 관한 기술적 문제를 뉴턴의 이론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뉴턴의 이론으로 지구와 우주에서 신이 개입할 틈이 없어져 버렸다. 그러나 독실한 신자인 뉴턴은 달이 지구를 돌게 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처음에는 에너지(최초 충격)를 줘야 하는데, 이때 신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아무튼 뉴턴이후 신은 모든 민중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부지런한 신’에서 최초 충격만 주는 ‘게으른 신’으로 바뀌었다.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과학에서 신이 빠지면서 ‘감정(성)’도 빠져 버린 것이다.
감정(성)이 빠져 버린 과학의 결과가 가장극명하게 드러난 사건은 바로 1926년 미국에서 발생했다. 당시 미국에서는 우생학을 기초로 단종 법안이 제정되었는데, 이는 정신박약아, 불구자, 유전적 질병을 가진 사람들에게 강제 불임수술을 시행하는 법이었다. 이 법이 시행되는 동안(1926-1935) 캘리포니아 주에서만 유전병, 신체부자유인, 정신박약아들 9931명을 강제로 단종 시켰다. 또 1941년 원자폭탄 개발을 목적으로 시작한 맨해튼 프로젝트로 자본주의 전쟁은 종식되었지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어 60만 명이 희생되었다.
이렇듯 과학기술도 사회관계가 깊숙이 관여하고 있고, 과학자 자신도 그 관계 속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말하자만 현대 과학이론도 지식 성장의 역사에서 한 단계로 결코 완벽하지 않으며, 동시에 서구 자본가 계급에 속박된 창조물인 것이다. 자본가는 과학 기술이 그들의 이익과 권력 추구에 필요한지를 묻고, 지금까지 발전된 과학 기술을 적절하게 활용하고, 필요한 것을 요청하기도 한다. 때로는 그들의 사상에 순응할 수 있는 적절한 이데올로기도 찾아낸다.
과학기술에서 골렘 찾기
지금까지만 보더라도 혁명을 생각하는 사회주의자들이 과학(기술)에 대한 프로그램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우선 자본주의 하에서 과학(기술)이 이데올로기적, 제도적 속박에서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밝혀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여기에 과학적 ‘이성’에 감정(성)을 종합한다면 더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좌파 과학자 리차드레빈스는 그 구별법으로 다음과 같은 간단한 작업가설(역주- 여러 가지 얻은 실험결과를 기초로 하여 다음의 실험계획을 세우기 위한 잠정적인 가설)을 제안하고 있다. “억압에 관대하고, 정당화하며 그 억압을 증진시키는 모든 과학 이론은 잘못되었다”
그리고 과학기술에는 영원한 ‘객관적’ 법칙은 없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뉴턴의 법칙도 엄밀하게 말하면 인간적인 개념 즉 역사적으로 한계가 있으며, 현재까지의 구체적인 결과들을 종합해서 일반적인 개념으로 추상화한 경향성일 뿐이라는 것이다. 더 확장해서 사회와 자연, 사람들의 사고방식 모두에 적용된다는 변증법에도 “객관적”인 법칙은 없으며, 단지 대립물의 상호 침투에서 발생되는 일반적인 경향성(잠재성)들을 단순화(추상화) 한 것을 “법칙”으로 부르는 것이다. 역시 영원불멸의 ‘과학적’ 사회주의는 존재하지 않는 관념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과학기술에서 괴물을 찾아야 한다. 맑스는 과학의 기원에 자본주의 사회 관계, 특히 노동과정이 깊숙이 관여해 있음을 인정했지만, 과학 기술은 이들 관계의 발현, 그 이상일 수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자본이 생산 과정 내에 과학 기술적 진보를 도입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괴물 골렘(GOLEM)을 창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골렘은 특정한 상황에서 주인을 공격할 수 있는 괴물이다. 주인이란 자본가일 수도 있고 인간 전체일 수도 있다. 코페르니쿠스의 과학과 뉴턴의 과학은 중세적 귀족들을 공격하는 괴물 골렘이겠지만 자본가들에게는 수호신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분명 자본주의 속에서 나왔지만 자본가들에게 괴물 골렘이 되는(되게 하는) 과학기술은 존재할 것이다.
최근 댓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