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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연대전략, 노동계급에게 약인가 독인가?

[계급운동과 사회복지투쟁]

 

자본의 신자유주의 전략으로 노동계급은 다층화되는 동시에 양극화되었고,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은 상당히 축소되어 자본의 이해 증진을 위해 국가가 적극적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많은 나라들처럼 한국에서도 자본과 노동의 권력균형은 심각하게 불균등해졌다. 즉, 노동 권력의 축소로 국가는 형식적 수준의 민주주의조차 무시할 만큼 부르주아적 성격이 강화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전체 노동자계급을 위축시켰다. 더욱이 빈민, 실업자, 비정규직, 여성 및 이주노동자와 같은 계층들은 사회적 위험에 더 심각하게 노출될 수밖에 없다. 이들에 대한 보호와 연대는 신자유주의에 대항하고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노동자계급운동의 핵심과제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러한 과제가 지극히 계급적인 과제임에도, 비계급적 관점으로 접근할 때 더 현실 가능한 대안인 양 이해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사회정책에 대한 계급적 관점의 결여는 자본이 사회복지를 시행하는 목적으로 귀결될 수 있다. ‘사회연대’가 사회정책의 몰계급적 관점만으로 대변된다면 사회적 위험에 대한 계급 내 부조가 정당화되는 것이고, 또한 노동계급에 의해 자본주의 체제가 더욱 완고하게 지탱시켜주게 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노동운동의 전략으로 노동자계급 내 부조와 협조가 과연 합의될 수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 의문이 제기된다. 이 글의 목적은 ‘사회연대전략’의 비계급적 관점이 노동운동에 미칠 위험 요소를 제기하고 사회복지에 대한 계급적 관점의 중요성을 밝히는 데 있다.
 


 


 

사회연대전략의 내용과 비계급성
지난 2006년 말부터 민노당 부설연구소의‘소득-임금 측면에서 노동계급 연대전략 보고서’가 제출되면서 ‘사회연대전략’논쟁이 촉발되었다. 사회연대전략의 주요 지지층으로는 (전)민노당 정책자문위원이었던 오건호(사회공공연구소 연구실장), 금속노조 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인 이상호, 진보신당, 그리고 민주노총이다. 
사회연대전략을 둘러싼 미묘한 입장의 차이가 있지만 공통점은 노동을 통해 확보되는 시장임금(market wage)과 사회복지급여(cash transfer, social benefit)로 확보되는 사회임금(social wage) 중 사회임금을 확대해가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회임금이란 국가가 전체국민에게 제공하는 현금급여(연금, 실업급여, 공공부조의 생계급여 등)와 현물복지급여(노인, 아동, 장애인 등에 대한 사회서비스, 의료서비스 등)를 통칭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임금의 재원은 조세, 사회보험료, 기업복지기금 등으로 충당된다. 그러므로 직접세의(소득세, 법인세, 상속세, 증여세) 비중을 높여 누진세율을 적용하고, 사회보험료의 자본 및 국가의 책임부분을 강화할 때, 사회임금을 통한 수직적 재분배 기능을 높일 수 있다. 그러나 사회연대전략에서는 사회안전망의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우선적으로 조직된 노동자들의 기여(갹출)를 요구하고 있다.
복지국가 번창시기(2차 대전 이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이전)의 사회임금은 노동자계급이 생산관계에서 가졌던 근본적인 모순이 지속적으로 반영된 것으로 이미 분석됐다. 사회임금이 자본의 이윤으로부터 임금소득으로 재분배이거나 상류 및 중상류계층으로부터 저소득계층에게로의 재분배였다기보다는 임금과 소득을 얻는 광의의 노동계급 내부의 재분배였기 때문이다. 즉 생산관계에서 자본이 전유하고 있는 잉여가치를 사회임금으로 가져올 수 없다면, 사회임금은 노동자계급 내부의 상호부조 수준에 머무르게 된다. 더욱이 자본은 그들의 잉여가치를 축소하여 비용을 지불하지 않아도 사회‘임금’이란 용어로 인해 임금이외 추가적으로 노동력에 대한 보상을 제공하는 것처럼 비춰지기까지 한다. 노동력 재생산과 사회 안정화를 위해 자본의 잉여가치총량에 별다른 타격을 주지 않으면서 복지가 유지되었다. 자본은 오히려 이러한 임금외비용 확대를 빌미로 시장임금을 축소시키려는 계급적 이해까지 표출하기도 했다.
신자유주의 체제 구축과 함께 자본은 생산입지 경쟁논리를 내세워 시장임금과 사회임금 모두를 축소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해왔다. 그 결과 사회임금을 형성했던 재원구조에서 각각의 시민과 노동자 개인의 책임은 강화된 반면 국가의 ‘자본유치 경쟁’에 힘입어 자본의 책임은 더욱더 약화되었다. 결국 사회임금의 증가가 피지배계급의 복지 및 소득의 실질적인 향상으로 이해되기는 어렵다. 다만 사회임금의 증가는 사회적 위험에 대해 시장적 메커니즘에서 각각의 개인이 대응하는 대신 계급 내 자원을 통해 위험에 대한 탈상품화 정도를 높일 수 있는 장점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역시도 신자유주의로 전환이후 연금 및 의료부분을 중심으로 민영화가 심화되면서 서서히 약화되었다.
이처럼 서구에서 경험했던 한계가 한국에서 독이 아닌 약이 되기 위해서는 결국 총자본의 잉여가치를 사회임금으로 가져와야 하는 투쟁이 중요하게 요구된다. 그러나 사회연대전략에서 우선적으로 고려했던 것은‘정규직’노동자의 연대에 대한 호소였다. 이러한 연대가 총자본의 잉여가치를 투쟁으로 가져오는 것보다 훨씬 실현가능해 보이는 것처럼 논의되기도 하였다. 임금생활자의 시장임금에서 매달 일정 부분을 사각지대의 사회적 안전망 구축 및 확대를 위한 재원으로 징수하는 것이 연대를 위한 양보로 전제되었다.

사회연대전략은 계급적 접근보다 우수한가?
연대는 피지배계급 간의 공동의 이해를 달성하기 위해 어느 한쪽의 희생을 통해 다른 한쪽의 고통을 축소하여 사회공동체의 가치를 높이는 데에 있다. 그러나 비정규직을 포함한 사각지대의 문제는 노동계급 내부의 양보와 원조로 해결하기 어려운 자본의 노동유연화로 빚어진 하나의 결과다. 이 문제를 연대적 가치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당장의 계급 내부적 원조보다는 근본적인 노동관계에 대한 해법이 우선되어야 한다. 사회적 연대는 계급연대를 기반에 두지 않을 때 그 위력을 발휘하기 힘들다. 노동의 계급적 투쟁이 전제되지 않았을 때 자본과 국가는 그 어떤 것도 쉬 내줄 이유도 필요도 없다. 20세기 사민주의가 자본과 대항하는 투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신자유주의 동조세력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 명확히 환기되어져야만 한다.
진보정당들은 정규직 노동자들을 귀족노동자로 적대시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하여 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이를 가져다가 서민들에게 나눠주자는 전략을 통해 중산층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다. 일면 진보적이면서 일면 현실정치의 장악력까지 겸비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서민들과 사각지대의 노동자들에게 돌려줘야 하는 것은 애초 그들이 시장임금으로 보존 받지 못한 정당한 그들의 몫의 환수여야 한다. 많은 노동빈곤층과 서민들의 삶이 팍팍해진 원인은 정규직 노동자의 고임금 때문이 아니라, 노동시장유연화를 통해 이윤율 저하를 최소화하려고 했던 자본과 이에 협조한 국가로부터 기인한다.
대중정치 노선은 언젠가부터 신자유주의에 대항하거나 반자본투쟁을 지지하기보다는 신자유주의적 외적강제를 우선 수용하고 그 수준에서 현재 적용 가능한 대안들을 모색하였다. 이에 계급적 관점은 불편한 대상이 되었고 노사정 모두에게 고통분담이라는 규범화를 제시하면서 실제로 노동의 양보를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얼핏 보기에 누구나 찬성하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회연대전략이란 의제는 실제로 노동계급으로부터 동의를 끌어내기 힘들다. 왜냐하면 정규직의 경제적 양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양보를 설득하기 힘든 논리구조 때문이다. 또한 정규직 노동자 중에도 시장임금을 통해 보장되는 소득보장의 수준이 낮은 노동자들, 즉 고용형태만 정규직이지 여전히 불안정한 소득의 노동자들이 상당하다. 그런데 자본이 의도적으로 유발시켰던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노노갈등 요소가 연대전략의 중요한 두 축으로 수용되면서 매우 위험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그대로 작동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노동계층이 불안정한 노동계층을 위해 재원을 형성하자는 것은 근본적으로 자본과 국가의 책임에 대해 근본적인 대립 전선을 세우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오히려 대자본 투쟁에 대한 노동운동 내부의 동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최근 파업 사업장을 중심으로 국가와 자본이 형성하고 있는 ‘정규직 이기주의’이데올로기는 임노동자의 계급투쟁에 대한 입지를 더욱 좁히고 있다. 이러한 국면에서 사회연대전략이 가지는 이데올로기적 한계는 노동자계급 연대가 아니라 자본과 국가의 연대에 더 많은 공헌을 할 공산이 너무나 크다.

제갈현숙(사회공공연구소 연구위원, 한신대 사회복지학과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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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연대전략으로써 사회복지

복지에 대한 사회권은 노동자들을 시민으로서 사회에 통합시키고 노동자들이 국가공동체에 소속되어 있음을 상징한다. 복지국가는 이러한 노동자들을 사회적으로 통합하고, 이를 통해 연대감을 증진시켜온 여러 방법 중 하나다. 이러한 연대감은 노동계급운동에는 치명적이다. 왜냐하면 풀란차스(Poulantzas)의 분석처럼 기본적으로 사회복지는 지배세력의 경제적 양보를 요한다는 점에서 경제에 대한 국가의 자율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지만, 자본의 정치권력에 위협을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복지국가 역시도 장기적으로 자본에 유리하거나 자본의 확대재생산과 양립하는 전략으로 가능성과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노동자들의 투쟁의 성과로 제도화된 복지투쟁의 사회성과 역사성 역시도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독일의 사회학자 하이만(Heimann)은 사회정책에 대해 자본소유와 상품질서에 반하는 원칙으로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사회적 이상의 실재로 설명하였다. 피지배계급의 자본주의 메커니즘에 반대하는 사회적 이상은 사회운동을 통해 현실에서 구체화되고 사회운동의 정도에 따라 사회정책의 성격이 시장질서에 반하는 정도가 결정된다. 사회정책의 이러한 혁명적 성격은 체제를 유지, 통합하려는 자본 및 보수주의자들과 항상 갈등하고 대립하게 된다. 이러한 혁명성과 보수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이 사회정책이고 이로 인해 사회정책은 야누스의 얼굴과 같은 양면성을 띤다. 그러므로 사회정책은 매우 유기적이며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의 사회적 이상과 투쟁의 정도에 따라 이 양면성의 색채는 결정된다. 노동운동의 사회복지 투쟁은 반자본주의에 대한 지향성을 가져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사회복지 투쟁이라 할지라도 자본의 심장부를 공격할 수 있어야 한다.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노동자들에 대한 사회적 안전망은 시급하다. 이들은 가처분소득인 낮기 때문에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해서도 예비할 수 있는 자원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미래소득이자 노후소득의 기능을 하는 연금제도에서 배제되고 있다. 사회보험은 사회적 위험이 더 높은 계층에게 더욱더 예방적인 기능을 제공해야 한다. 하지만 오히려 사회적 위험이 더 큰 집단일수록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사각지대 해소를 위해 사회연대전략에서처럼 시장임금 소득이 상대적으로 높은 노동자들로부터 갹출 받은 기금을 바탕으로 시급하게 지원할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계와 같은 공동체간의 상호부조관습 등은 이미 존재해왔다. 또한 실업과 비정규직의 문제에 대해 자본과 국가가 현재처럼 그 어떤 개선의 조짐을 보이지 않는다면, 노동계급의 경제적 양보가 자본의 양보보다 수월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절대 노동운동의 새로운 출구 전략으로 유용하지 못하다. ‘경제적 양보’로 표현되는 연대는 노동계급 내부의 정치적 동의를 끌어내기 힘들고, 경제적 양보가 가져올 효과가 불명확하기 때문이다.
사회연대를 통해 계급연대가 형성될 것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예상일뿐이다. 사회임금으로 보다 나은 소득보전을 받은 노동자들은 여전히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많은 시간 일을 할 수밖에 없다. 물론 보다 향상된 사회임금으로 그들의 가계소득은 다소 향상될 수 있으나 삶의 질을 변화시킬 수준만큼은 되지 못한다. 이들을 정치적으로 세력화하거나 노동환경을 변화시키는 것은 사회임금으로 얻게 되는 결과와는 전혀 다른 메커니즘을 가지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것이 미래소득인 연금제도라면 현재를 변화시킬 정치세력화로 연결되기 힘들다. 또한 사회임금이 향상되었다고 계급 간 연대가 향상되었다는 증거는 서구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이것은 사민주의자들의 주장이었지 실제 현실에서 사회임금 확대를 통한 노동계급의 정치가 비례적으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노동자의 시장임금 재분배를 통한 사회임금 증액은 결국 총노동비용에 대한 계급 내적 재분배라는 한계와 이렇게 향상된 사회임금이 역으로 시장임금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도 고려되어야 한다.
신자유주의이후 사회복지 개혁은 시민과 노동자의 책임강화로 수렴되어져 왔다. 이에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좌파세력들은 오랫동안 개인의 책임강화로 전환되는 사회정책에 대해 반대해 왔다. 그런데 사회연대전략은 다른 이름의 노동책임 강화론이 될 수 있다. 이것이 가장 근본적인 태생의 비밀이자 계급연대로 가기 힘든 요소가 된다.
노동자들의 투쟁을 통해 자본과 국가에게 임금 및 사회적 비용의 책임을 부과하는 것이 왜 실현하기 어려운 것이라고만 여겨지는 것일까? 예를 들면 현재 노동과 자본이 5:5로 분담하고 있는 사회보험요율을 5:6과 같은 방식으로, 자본의 비율만 총액 대비 10%만 증가시켜 이 재원을 사각지대의 사회보험료로 활용하는 방안은 비현실적인가?
이것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이제까지 노동운동이 이와 같은 혁명적 성격을 담지한 사회정책 투쟁에 적극적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좌파진영 역시 이와 같은 투쟁을 중심의 과제로 수용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역으로 노조가 임금투쟁이나 고용안정을 위해 파업하지만 연금보장성 강화를 위해서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비판이 가능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비판 오히려 임금, 고용, 그리고 복지의 문제를 분리시키는데 일조하였고 각각의 투쟁 과제를 선후의 문제나 선택의 문제로 개별화시켰다. 임금 및 고용투쟁의 중요성은 신자유주의 전환이후 더욱 부각되었다. 그러나 임금이나 고용을 위한 투쟁은 매우 이기적인 해당 사업장의 노동자만을 위한 투쟁으로 폄하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노동자 스스로 그리고 노동자들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분리된 임금, 고용, 복지의 연관성을 노동자계급 스스로가 찾아갈 수 있는 전략이 요청된다.
노동현장과 직결되어 있는 노동조건 및 임금의 문제는 명료하게 계급문제로 인식하지만 작업장을 벗어난 문제와 당장의 경제적 이해관계와 벗어나는 문제에 대해서 계급적으로 이해하는 시각이 필요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산별운동이 진행되어 왔으나 아직은 넘어야할 산이 더 많아 보인다. 그 넘어야 할 산마다 계급적 연대를 강화할 수 있는 관점에서 사회정책이 제출되어져야 한다.
사회연대가 정치적 힘을 발휘하기 위한 전제조건은 계급연대로부터 출발한다. 노동운동이 발전하지 않은 곳에서 사회권은 발전되기 어렵거나 매우 형식적인 수준에서 머문다. 노동이 자본과 국가에 대항하지 않고 먼저 타협한 사회복지제도로는 보편적인 인민의 삶의 질 향상은 기대하기 힘들다. 그러므로 노동자의 사회복지투쟁은 계급연대를 도모하는 동시에 자본주의 메커니즘을 반대하는 전략이 되어야 한다.
 

제갈현숙(사회공공연구소 연구위원, 한신대 사회복지학과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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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플루사태, 공공의료의 부실이 가져온 예견된 재난

신종플루사태를 통해 본 한국보건의료체계의 문제점

 

신종플루에 대한 국가재난대책이 지난 11월 3일 ‘경계’에서 ‘심각’단계로 격상되었다. 이에 따라 범정부 대책기구인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가 설치되어 운영중이다. ‘심각’단계로 격상되었다고 해서 정부차원의 대책이 눈에 띌 정도로 크게 달라지는 점은 그리 많지 않다. △정부대응체계 강화 △중증환자 진료체계 강화 △학교예방접종 조기 완료 △항바이러스제 적극 투약 등의 대책을 발표했는데, 사실 중앙차원의 대책본부가 부처별 업무를 조정하고 상황을 통합, 관리한다는 것과 지역차원의 대책본부가 꾸려지는 게 달라지는 점일 뿐이다.
신종플루의 감염속도에 비해 치사율이 일반 계절독감과 차이가 없을 정도로 높지 않은 것에 오히려 감사해야 할 정도로 그동안 정부의 대책은 한심한 수준이었다. 인플루엔자의 대유행이 예견된 2005년에 정부는 이를 인지했음에도 4년간 제대로 준비하지 않았다. 정부는 올해 들어 신종플루가 대유행하고 있음에도 우왕좌왕하고, 국민들에게 너무 동요하지 말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 결과 감염확산을 막기 위한 백신 공급이 지연되거나 부족을 초래하였고, 치료제인 항바이러스제의 비축이 필요한 만큼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부는 치료거점병원만 지정한 채 나몰라라 하여 병원현장의 혼란만 야기하여 국민의 불신과 의료인에 대한 불만만 키웠다. 이러한 정부대책의 문제점에 의해 생긴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이 지게 되는 결과를 낳고 있다.
 


신종플루를 통해 드러난 의료체계의 문제점
정부대책의 미비함에 더하여 더욱 중요한 점은 신종플루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한국의 보건의료시스템의 문제점이 고스란히 표출되었다는 점이다.

첫째, 보건소를 비롯한 공공의료기관이 일찌감치 신종플루에 대처할 수 없을 정도로 그 비중이 부족하고 역할이 부실했다는 점이다. 격리병상과 음압시설을 갖춘 병원은 몇 개 지나지 않았고, 병실도 환자를 수용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였다. 영남과 강원, 충남북에는 국가지정 격리병상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더욱 심각한 것은 신종플루 중환자가 크게 발생했을 시 국가가 강제로 대책을 실행할 수 있는 공공의료기관이 10%에도 못 미친다는 점이다. 전염병 같은 질병에 대한 대책에는 일정부분 국가의 행정력이 힘을 발휘해야 하는 데, 민간의료기관에는 이를 강제할 힘이 재정지원같은 인센티브 말고는 없다. 정부가 아무리 대책을 마련하더라도 현재 한국의 공공의료 비중은 이를 실행할 인프라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둘째, 거점병원 및 1차의료기관의 혼란으로 인해 신종플루의 확산을 방지하기는커녕, 병원에서의 감염마저 낳고 있다는 점이다. “일반 환자와 신종플루 의심 환자가 섞이는 걸 막아야 하는데, 도무지 방법이 없다” “오늘 신종플루 진료를 봤던 의료진이 그 다음날 일반 병동 환자를 진료하기도 한다. 상황이 어쩔 수 없다. 환자는 폭증했고 의료진은 그대로이니 방법이 없지 않나” 등이 직접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의 하소연이다.
또한 1차의료기관인 동네의원은 신종플루환자를 보건소로 보내고, 보건소에서는 병원으로 보내고, 병원에서는 다시 보건소로 보내는 등의 혼란이 발생하는 등 의료전달체계는 전혀 기능을 하지 못하였다.

셋째, 지역사회에서 1차의료기관의 혼란뿐만 아니라 집단적으로 사람이 모여있는 학교와 직장에서의 보건시스템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임이 드러났다. 학교에서는 기껏해야 교문앞에서 효과가 의심스러운 발열검사를 하거나 휴교조치를 취할까 말까 갈팡질팡하는 등 체계적인 감염 및 위생관리, 발생환자에 대한 보호조치, 감염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한 대책 등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
사업장 노동보건도 마찬가지이다. 신종플루 대책마련을 위한 산업안전보건위원회는 제대로 가동되지 못했다. 심지어 병원에 근무하는 노동자 중에서 비정규직은 예방백신접종 대상에서 제외시키는 등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차별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넷째, 치료 및 검사, 예방접종에 드는 비용의 상당부분을 국민이 부담한다는 점이다. 이러다 보니 다음과 같은 일이 벌어진다.

“국가 의료기관이다 보니, 신종플루 검사비가 다른 병원에 비해 싸다. 그러다보니 전화로 검사비가 얼마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그렇게 묻는 사람들은 거의 검사비도 댈 수 없는 어려운 사람들이다. 우리는 목소리만 들어도 ‘아, 이 사람은 돈이 없어서 못 오겠구나’하는 느낌이 든다. 결국 진짜 검사를 받아야 하고 치료를 받아야 할 사람들은 병원에 오지 못한다.”(“밖에서 떠는 환자들... <대장금> 방불 인력 태부족... 공익이라도 배치해 달라”, 오마이뉴스, 2009.11.3)

즉 돈이 없어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하거나, 백신을 접종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인해 더욱 더 전염을 확산시킬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정부는 거점병원지정을 하고, ‘동요하지 말라’는 립서비스와 상황관리만 하고, 병원은 병원대로 불만을 표출하고, 의료인은 아무것도 안하고 책임을 넘기는 정부를 욕하고, 건강보험체계에 대한 불만을 터뜨리고, 언론은 스포츠 중계하듯 늘어나는 사망자수를 보도한다. 무책임한 정부의 대응 속에 국민은 불안해하면서 각자 나름대로의 대처법을 마련하는 지혜를 짜내느라 골몰하고 등의 모습이 신종플루를 통해서 드러난 한국보건의료시스템의 모습이다. 

강동진(포럼 [사회복지와 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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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적 의료재난, 우리의 해법은?

의료의 공공성과 노동자민중의 건강은 정비례

 
국가적 재난 수준의 신종플루사태는 한국사회의 의료체계의 문제점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과연 대안은 없는 것일까. 무엇보다 전염병이나 신종플루같은 감염성질환의 경우는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방, 치료, 건강증진 같은 서비스를 수행하기 위한 의료시스템이 갖추어져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공공의료 비중을 높여라
우선 무엇보다 공공의료의 비중을 높이고, 공공의료기관의 규모에 따라 걸맞는 역할을 수행하도록 해야 한다. 현재 공공의료의 비중은 10%가 채 안된다. 이런 비중으로는 신종플루같은 대유행을 하는 전염성 질환에 대한 대책이나 관리가 이루어지기 힘들다.
최소한 30%정도는 되어야 한다. 1차 의료를 담당할 도시보건지소를 확충하고, 지역별로 거점 공공병원을 확대하고, 국립대학교병원같은 경우는 광역단위 거점중심병원으로 육성하는 것이다. 그래서 보건지소에서는 환자상담 및 일차적 수준에서의 검사와 치료, 정보제공 등을 수행하고 거점병원에서는 격리병실 등의 운영을 통해 입원치료를 담당하고, 대학병원에서는 광역차원에서 치료기술지원 등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면 될 것이다.

주치의제도를 도입하자
둘째, 1차의료시스템이 구축되고, 강화되어야 한다. 1차의료는 ‘동네의원’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환자들이 질병을 치료하거나 건강에 대해 의뢰할 시 제일 먼저 만나면서도 가장 근본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의료체계의 ‘첨병’이다. 이를 위해 지역사회수준에서는 주치의제도가 도입되어야 한다.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평소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편하게 만날 수 있는 의사가 필요하고, 자신에게 걸맞는 진료를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중요하다. 의사의 입장에서도 일회적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진료의 책임성을 지닐 수 있어야 한다. 진료의 지속성, 책임성, 포괄성을 담보할 수 있는 방안의 하나가 주치의제도이다.
아울러 집단적으로 건강을 책임지고 관리하는 데에 학교나 사업장 수준의 학교보건, 노동안전보건 시스템이 확충되고 체계화되어야 한다. 지금은 양호실에 보건교사를 갖춘 정도이거나, 정기적인 건강검진과 발생한 사업장에서의 재해와 질환을 관리하는 차원에 머물고 있는데 예방, 치료, 재활 등 건강증진 및 관리의 제 단계에 필요한 인프라를 구축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1차의료체계가 잘 갖추어져 있는 나라가 쿠바이다. 쿠바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1차의료시스템이 잘 구축된 결과 국민들의 건강수준이 미국보다 더 높아서 1차의료의 나라라고 알려져 있으며, 1차의료인력은 베네수엘라, 콩고 등 의료체계가 열악한 나라에까지 파견되고 있기도 하다. 신종플루에 대한 대책에서도 많은 사망자가 발생한 미국과 멕시코와 비교되기도 한다.

정부와 사회가 비용을 부담해야
셋째, 전염병의 예방 및 치료에 드는 비용은 개인이 아니라 정부와 사회가 부담해야 한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항바이러스제의 투약 및 백신접종에는 개인이 부담하는 비용을 두고 있다. 비록 몇만원이라 할지라도 이마저도 부담이 되어 접종과 치료를 꺼려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더군다나 검사비용에는 수십만원이 소요되어, 확진이 안될 경우 신종플루환자에 대한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수가 있다.
이와 더불어 전염병질환의 예방과 치료에 필요한 의약품은 민간제약회사가 아니라 공공적으로 개발되고 생산이 이루어져야 한다. 최소한 지금의 신종플루대유행처럼 질병의 확산과 환자의 비용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는 제약자본의 배만 살찌우는 현재의 특허제도를 일시 중지시키고 의약품을 생산할 수 있도록 강제실시의 요건이 대폭 완화되어야 한다. 제약자본의 돈벌이에 국민의 건강이 좌우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의료민영화의 가속화는 더 큰 재앙을 부를 것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윤추구 중심의 민간의료체계가 변화해야 한다는 인식이 사회적으로 확산되어야 한다. 신종플루사태를 겪으면서 공공의료에 대한 인식이 제고되고 있긴 하지만 일회적인 수준에 그쳐서는 안될 것이다.
더군다나 현재 정부는 이윤추구를 더욱 확대하는 의료민영화를 ‘선진화’란 이름으로 포장하여 추진하고 있다. 신종플루사태가 국민들의 불안과 공포를 확산시키는 것이 아니라 의료민영화추진에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되길 바라지만 정부는 눈과 귀뿐만 아니라 머리마저 사고하기를 멈춘 듯하다.
 
강동진(포럼 [사회복지와 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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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 쿠바, 공공의료시스템으로 신종플루를 잡다

전 세계가 신종플루의 공포에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다시 한 번 쿠바의 의료시스템이 주목을 받고 있다. 신종플루의 진원지였던 멕시코, 미국 등과 인접해 있지만 피해 수준은 어떤 나라보다 크지 않다. 마거릿 찬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은 “쿠바의 뛰어난 공공의료 시스템을 배우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 현재 쿠바는 1,100만 명 인구 중 신종플루 확진환자가 800여명에 사망환자는 7명이라는 집계가 나오고 있다.
쿠바가 신종플루에 잘 대처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 지역의 1차의료체계가 잘 갖춰져 있는 것과 의료혜택의 평등성에 있다. 무상의료체계가 신종플루 환자의 조기 발견을 가능케 했고, 바이러스의 2차 확산을 막았다는 것이다.
쿠바는 의사 1인당 국민 수는 160여명으로 한국의 630여명, 미국의 390여명보다 훨씬 앞선 다. 특히 1차의료 중심으로 가정의사들이 전체 국민들의 대다수를 담당하고 있다. 쿠바에서는 아프고 나서 병원을 찾는 치료 중심의 의료가 아니라, 몸이 건강할 때부터 가정 의사에 의한 관리가 이뤄지는 예방중심의 의료가 이루어진다.
무상의료는 쿠바의 가장 큰 강점이다. 모든 병원에서 이뤄지는 진료와 처치는 무료다. 미국의 경제봉쇄조치 이후 약을 구입할 때는 일정의 금액을 지불하지만, 이것도 노인이나 장애인, 만성질환자, 중증질환자에게는 무료다. 돈이 없어 고통 받고, 죽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쿠바 유전공학생물기술센터는 전염병 치료 의약품 30여종을 비롯해 모두 100여건의 백신을 만들었다. 또 쿠바정부는 이번 신종플루 대유행에 대해서도 지역의 1차 의료 기관들로부터 날마다 의료정보를 수집해 관리하는 정교한 공공모니터시스템으로 위력을 발휘했다. 도움이 필요한 환자들을 직접 찾아가고 관리하는 방식의 의료시스템이 신종플루 대처에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가장 많은 의료비를 지출하고, 가장 의료기술이 뛰어나다는 미국의 신종플루 사망자는 4천명에 육박하고 있다. 반면 공공의료시스템으로 적은 돈을 들여도 모든 사람들이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길이 가능하다는 것을 쿠바는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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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위기와 녹색사회주의

사노준은 사회주의 운동속에서 생태운동을 재구성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고백컨대 생태운동에 대한 경험은 일천하다. 그러나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생태운동에 대한 사회주의 가치를 외면할 수 없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실천에 옮기기 위한 노력을 시작해야 한다. 이번 기획은 그런 출발점으로 생태주의와 사회주의 운동의 결합을 고민하는 서영표님의 글을 소개한다.




생태주의와 정치적 입장의 결합

생태주의담론은 다양한 정치적 입장과 결합할 수 있다. 생태주의담론을 둘러싼 논란은 녹색의 가치와 이러한 다양한 정치적 입장의 결합으로부터 발생한다. 논란의 쟁점은 크게 네 가지다. 각각의 쟁점을 통해 녹색사회주의가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하는지 제시하도록 하겠다.
첫째,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서로 상이한 입장이다. 자연을 인간의 노동과 소비의 대상으로 파악할 것인가 아니면 그 자체로 내재적 가치 또는 영성을 가진 존재로 볼 것인지가 쟁점이 된다. 여기서 녹색사회주의의 입장은 자연의 영성과 내재적 가치를 주장하는 근본생태주의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지만 인간을 자연적 존재로 파악하는 것이어야 한다. 인간을 동물적 존재로서 파악하고 인간종과 비인간종 사이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입장은 인간사회의 문제를 자연에 종속시키는 입장을 비판하는 동시에, 인간의 특수한 위치를 일방적으로 부각시키는 입장에도 반대한다. “자연은, 인간이 죽지 않기 위해서는 그것과의 지속적인 [교호] 과정 속에 있지 않으면 안 되는 인간의 몸이다.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 생활이 연계되어 있다는 것은 자연이 자기 자신과 연계되어 있다는 것 이외에 어떠한 의미도 없는데, 왜냐하면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자연을 인간의 ‘비유기체적 신체’로 개념화하고 있는 마르크스는 인간과 자연의 연속성을 잘 설명하고 있다.   

둘째, 다양한 녹색사상은 자본주의적 시장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두고 서로 경쟁적인 입장을 제시한다. 주류적(우파적) 녹색담론은 자연자원에 가격을 부여하고 환경정책 수립과정에 시장원리(비용-편익분석)를 적극 도입하는 것을 제시한다. 종종 이러한 입장에 선 사람들에게 생태위기는 경제적 가치로 환원되고 성장과 자본축적이 또 다른 계기로 전락한다. 탄소배출권 시장의 활성화와 대체에너지 연구개발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다른 한편으로 심층생태주의자들은 이윤추구적이며 경쟁적인 시장원리에 반대하지만 이에 대한 구체적 분석을 하지 않은 채 개인적인 의식변화와 윤리적 소비로 곧장 넘어가는 경향이 있다.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시장의 힘에 대해서 과소평가하거나 무시함으로써 이에 대한 대안제시에 실패한다. 녹색사회주의는 생태위기가 가지는 상대적 자율성을 수용하면서도 그것이 어떻게 자본주의적 생산/소비, 그리고 계급투쟁과 연결되어 있는가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자본주의적 시장의 극복이 생태사회건설의 가장 중요한 고리임을 부각시켜야 한다.

셋째, 생태친화적인 사회를 만드는 과정에서 국가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가도 논란의 대상이다. 주류적(우파적) 입장도 국가(정부개입)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문제는 이러한 국가의 역할이 전문가들과 관료중심의 분석과 정책 수립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심층생태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적 생태주의자들은 이러한 기존 국가와 민주주의 한계를 인식하면서 소규모 공동체를 통한 평등과 자율성 회복을 추구한다. 그러나 시장과 마찬가지로 국가가 가지고 있는 물질성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지에 대해 답하지 못한다. 이에 반해 녹색사회주의는 국가의 변혁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넷째, 과학과 기술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도 논쟁거리다.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우파적 녹색담론은 과학기술에 대해 맹신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러한 입장은 생태위기의 문제를 전체로서 파악하지 않고 개별적인 문제, 즉 기후변화, 대기오염, 수질 오염 등 서로 분리된 사안으로 이해하며 각각에 대해 기술적으로 대응한다. 당연히 이들에게 생태문제는 비정치적인 문제로 전문가적 연구와 정책 수립을 통해 해결될 수 있는 문제로 낙관한다. 이에 반해 심층 생태주의자들은 근대적인 과학기술주의 자체에 대해 혐오한다. 동양적 종교와 전통사상에 기대는 경향이 강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과학기술주의에 반대해서 영성주의적 입장을 제시하기도 한다. 사회주의는 종종 과학기술주의에 대한 맹신에서 우파적 담론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과학기술은 자본주의를 넘어 자본주의 이후 사회를 건설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야만 한다고 본다. 전통적으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견지해온 입장이다. 하지만 21세기의 사회주의자들이 추구해야할 녹색사회주의는 과학과 기술에 대해 좀 더 신중한 태도를 보여야만 한다. 과학적, 그리고 기술적 혁신을 신성한 힘으로 맹신하거나 악마적으로 혐오하는 관점 모두를 거부해야 한다. 과학과 기술은 인간 사회의 일부이며 신중한 활용을 통해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이익의 제공해 줄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생태위기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대중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기상학, 지질학, 대양학 등의 과학기술의 발전 덕분이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21세기 녹색사회주의, 자율적인 공동체

녹색사회주의의 대안은 다양한 자율적 결사와 공동체, 그리고 이들 사이의 네트워크를 번성하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전략에서 사회주의적으로 민주화된 국가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국가는 이러한 네트워크들을 시장의 힘으로부터 보호해야하기 때문이다. 또한 국가를 매개로 결사들과 공동체들의 네트워크는 시장의 힘을 통제하고 사회화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동시에 자율적인 결사들과 공동체 안에서 해결될 수 없는 경제활동 즉 거시경제적인 사안들과 국제 무역 등을 담당할 계획의 필요성을 부정할 수없다. 문제는 이러한 계획을 최대한 민주적인 참여를 통해 달성하는 것이다. 여기서 계획은 민주주의와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결합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근본 녹색주의와 녹색 사회주의가 공유화고 있는 미래상, 즉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는 자율적인 공동체들이 번성하고 이들 사이의 자유로운 네트워크가 구성되며 거시적인 사회·경제적 정책은 민주적 정치과정을 통해 실현되는 사회일 것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문제는 성장인가/분배인가라는 좌우파 사이의 쟁점과 생태계중심인가/인간중심인가라는 산업주의와 녹색사상 사이의 쟁점은 극복될 것이다. 자율적인 공동체들과 민주적 참여를 통해 운영되는 경제는 이윤과 그릇된 욕망이 아닌 필요(needs)충족 원리를 기초로 할 것이며, 이러한 사회는 지금보다 덜 생산하고 덜 소비하면서도 더 높은 필요충족의 정도와 사회적 평등을 가능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성장은 인간의 필요충족을 자연생태계와 조화시킬 수 있는 과학과 기술에 기초하는 질적인 성장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양적인 성장을 추구하지만 자연생태계의 보호는 고사하고 인간의 필요조차 제대로 충족시키지 못하는 자본주의적 사회와는 완전히 다른 성격이 사회가 될 것이다. 물론 우파는 이것을 공상적이라고 비판할 것이다. 녹색좌파에게 이러한 발전은 인간의 이성과 능력을 발전을 통해 가능한 미래로 제시된다. 불과 100년 전 인류는 민주주의에 기초한 정치체를 유토피아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제 민주주의는 상식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우리의 주변에는 이미 반자본주의적이고 공동체적이며 민주적인 다양한 대안적 삶의 양식들이 실험되고 있다. 이러한 실험들은 자본주의이후 사회의 가능성을 지금 여기에서 보여주고 있다. 21세기 녹색사회주의는 이러한 가능성들을 사회주의적 전략으로 포괄하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다르게 살기를 원한다. 그리고 다르게 살 수 있으며, 다르게 살아야 한다.   
 

서영표(성공회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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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삶을 바꾸는 정치] 삶, 정치, 문화의 당연한 만남을 희망한다

문화는 우리의 삶
습관대로 지하도 왼편으로 걷다보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맞은편으로 걸어온다. “아! 우측통행으로 바뀌었지” 마침 안내 방송이 흘러나온다. 안전하고 효율적인 ‘보행문화’를 위해 우축통행을 하자는 계도 방송이다. 그렇지! 보행도 문화인 것을. 문화라고 하면 보통 미술, 음악, 공연 등등을 생각하지만 이런 것은 문화를 상징화하고, 극대화하는 표현양식일 뿐 문화를 아우를 수는 없다.
문화는 삶의 (집단적 혹은 개별적) 방식이며, 표현이다. 때문에 관광문화, 노사문화, 음식문화, 음주문화, 정치문화, 운전문화, 주거문화, 사교문화 등등 우리의 삶의 곳곳에 문화라는 단어를 갖다 붙여도 어색하지 않다. 문화는 먼 거리에는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 우리 삶 자체다. 그래서 “문화적이다”라는 표현은 엄밀히 따지자면 그릇 된 표현이다. 삶 자체가 문화인데 무엇이 문화적이고, 비문화적이란 말인가? “문화적이다”란 표현이 기실 뜻하는 바는 “문화에 깊이가 있다”거나, “해당 문화가 진실하고 진지하다”라는 정도일 것이다.
만약 자신과 다른 문화에 대해 “문화적이지 않다”라고 판단한다면 이야 말로 반문화적이인 발상이다. 마치 근대 서양인이 동양인의 삶을 그렇게 폄하했던 것처럼 말이다. 어떠한 문화가 형성되기에는 그만한 환경과 역사가 있는 것이기에 무엇이 옳고, 그르고, 높고 낮음을 경솔하게 판단할 수 없다.
그러나 모든 문화는 존중되어야 한다는 명제가 문화 정체를 용인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지양과 지향할 문화를 선별하는 것은 현재의 문화를 존중하는 것과 구별되어야 한다. 문화의 변화에는 분명 선호와 갈등 그리고 이해 관계자들 간의 정치적 대립을 수반한다. 무엇이 옳은 문화라는 할 수 없지만, 무엇이 누군가에게 필요한 문화라고는 할 수는 있다.

문화적이다?
그렇다면 어떤 문화가 문화의 깊이가 있고, 진지하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즉 통상 ‘문화적이다’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또한 어떻게 인간은 ‘문화적’일 수 있을까? 좁게 보자면 어떤 면에서는 문화적이라는 것은 해당 사회가 요구하는 명분과 이를 기초로 하는 충실한 사고 및 발전의 행동양식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가 속한 사회는 어떠한 사고 및 행동양식을 요구하고 지향하는 것일까?
우리 속한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이다. 체제는 사회성원의 욕망과 욕구를 규정하고 욕망과 욕구는 다시금 문화를 형성하고, 문화는 사회를 견고하게 하거나, 분열시키기도 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규범적 덕목은 표면적으로 교육받은 바에 의하면 ‘개인의 자유, 공정한 경쟁, 약자에 대한 동정’이다. 이러한 규범적 덕목은 ‘문화적이다’의 기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명시적 규범조차 현실적으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은 문화적 혼란을 늘 겪게 된다. 이러한 기준에 의하면 삶은 전혀 문화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삶은 항상 명시적 가치에 대한 배반의 연속이다. 대중은 ‘문화적’에 지쳐가고, ‘문화적’이란 단어는 결국 고상함의 다른 표현으로 전락한다.
생산수단의 배타적 사적 소유 및 상품노동을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개인의 자유는 자본주의를 위협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인정되고, 이를 거부할 경우 힘에 의해서 개인의 자유는 언제나 위협받는다. 공정한 경쟁은 이미 독점과 빈부에 의해서 제약되고, 약자에 대한 동정은 약자가 발호하지 않을 정도에서 작동한다. 자본주의 체제는 명분상의 규범도 지킬 수 없는 근본적 취약성과 모순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대중에게 필요한 문화라고 인정해야 하는 것일까?
자본주의의 규범은 실상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이다. 이것이 자본주의 문화의 근간이다. 따라서 대중은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규범을 자신의 삶으로 구현하고 있음에도, 앞서 언급한 사기에 가까운 규범에 조응해야 하는 모순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지배 권력은 한 치도 실현하지 않는 거짓 규범으로 인해 더욱 더 회의를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 발전은 양육강식과 적자생존의 법칙에 도전 하는 것이었고, 이러한 경험과 철학은 삶의 밑바닥에서 자본주의 문화를 기꺼워 할 수 없게 하고, 실제 삶을 버티기도 힘들게 한다.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상황은 인간의 소외를 낳고, 종종 사기성 종말론과 같은 문화적 병리 현상을 만든다. 결국 대중은 현재 사회에서 요구하는 ‘문화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헛갈리고, ‘문화적’이라는 것 자체가 버겁다.

삶, 문화, 정치는 모든 이의 일상이다
문제는 대중에게 필요한 문화는 무엇이고, 그에 기인한 ‘문화적’ 삶이 무엇인가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문화는 총체적인 삶이다. ‘문화적’ 삶은 삶의 깊이 있게 바라보고, 진솔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욕망과 욕구를 정당하게 하고, 삶의 질과 양을 풍요롭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주의가 진정 바라는 문화에 대해 저항하는 것은 어찌 보면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바라는 양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삶의 양식에 대해, ‘이건 아니다’고 주장하고 행동하는 것이 진정 대중의 문화적인 삶의 시작인 것이다. 생산과 일상의 모든 공간에서 자본주의적인 지향을 극복하고 조직하는 것은 대안문화의 시작이요, 정치다. 정치는 정당하다고 판단되는 생각을 조직하여 행하는 것으로 특정한 직업군만이 행사하는 것이 아니다. 문화적이기 위해서는 더욱 더 정치적 이여야 하고, 더욱 더 정치적 이여야  삶이 풍요로워 지는 것이다. 일상은 모든 것이 정치이고, 문화이고, 삶이다.
지배 권력은 언제나 대중으로 하여금 문화와 정치와 삶을 분리시키려 하였다. 인간의 삶은 총체적이고 다면적인 것인데 어떻게 이것이 분리될 수 있단 말인가? 정작 지배 권력은 항상 문화와 정치 그리고 삶을 종합적으로 사고하고 지배의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예컨대 70년대 새마을 운동, 7~80년대의 군사독재, 90년대의 신자유주의 재편은 국한된 경제적 또는 정치적 상황이 아니라 대중의 정치, 문화. 삶에 대한 재편이었다.

삶과 문화, 정치가 합일되기를
삶의 태도를 변화시키지 않고는 문화의 변화도 없는 것이고, 문화가 변화지 않고는 삶 역시 변화 할 수 없다. 또한 문화와 삶이 정치적이지 않고는 문화와 삶은 정체와 지배권력에 의해 조작되고 유린된다. 지배권력은 일상을 통해 문화와 정치와 삶을 통제하고 지배한다.
어제까지 왼쪽으로 통행하다 오늘부터 오른쪽으로 통행하는 것이 과연 문화시민이 되는 것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했고, 그러하듯이 삶의 욕망을 억누르고 자본주의 사회가 요구하는 무한 경쟁에 기꺼이 동참하는 것이 문화시민인가? 경쟁에서 뒤쳐질까 노심초사하는 것이 타당한 문화현상인가? 국회의 격투를 시청하면서 폭력을 나무라며 정치 혐오를 키우는 것이 문화시민의 태도인가? 아이의 안전을 걱정하여 우리 동네 골목길에도 CCTV를 달자고 하는 것이 선진문화인가? 이게 대중이 원하는 삶인가?
삶과 정치와 문화가 총체적인 인간적 삶으로 합일되기를 희망한다. 문화가 우리의 일상임을 기꺼이 하기를 희망한다. 정치가 문화이고 삶이라는 것이 승인되기를 희망한다. 그래야 변화하고 그래야 새로운 세상이 가능하다.
 
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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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정부의 교육정책!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재산에 비례하는 맞춤형 교육 시대가 도래했다

 

2009. 7. 2 서울시교육청앞. 서울시교육청의 자사고 지정심의를 반대하는 기자회견



한국사회에서 신자유주의 교육시장화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며 이미 김영삼정부 시절 ‘5.31교육개혁방안’을 시작으로 김대중, 노무현정부를 거쳐 이명박정부까지 중단 없이 확장 심화되고 있다. 그럼에도 이명박정부의 교육정책은 이전 정권과는 다른 특징을 갖는데 그것은 바로 노골적인 계급편향이다. 즉 이명박정부의 교육정책은 부자감세와 기업프렌들리 정책과 같이 자신의 계급적 성격을 드러내듯이, 교육을 통한 계급불평등 구조를 고착화하는 것을 전면화하고 있다.

누구를 위한 대입자율화인가?
한국은 고등학생의 84%가 대학에 진학하는 사회이다. 80년대 이후 역대정권은 대학설립요건을 완화해주었고 이는 대학의 수와 입학정원수의 증가로 나타났다. 이렇게 대학이 늘어난 것은 등록금을 가지고 돈벌이를 할 수 있기 때문이며, 이는 대학 등 교육기관을 사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사립학교의 비율과도 연동된다. 한국은 고등학교 44%가 대학의 80%가 사립으로 그 어느 사회보다 사립 즉 교육기관에 대한 사적소유가 높다. 그리고 최근에는 서울대 법인화 등으로 얼마 되지 않는 국공립대조차도 민영화하고자 한다.
이렇게 웬만하면 대학은 다 가는 세상인데도 매년 입시경쟁은 그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두말할 나위 없이 위계서열화된 대학구조에 있으며, 이는 학력에 따른 임금과 사회적 지위의 차이가 결정되는 사회구조에 있다. 대학을 나오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느 대학을 나왔는가가 중요한 사회이다. 실제로 서울대를 정점으로 서울소재 4년제, 지방 국공립, 지방 사립 순으로 위계서열화가 고착화되어 있다. 그리고 이 가운데 상위권대학은 이른바 고학력 -고수입을 가진 부모의 자녀들에게 유리하다. 이는 각종 통계로도 수없이 확인되고 있다. 최근 2005-2009학년도 수능 성적 자료 분석결과 서울의 강남, 서초, 송파와 특목고, 자사고 등이 있는 지역이 수능 1-2등급 학생비율이 2배 이상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자녀의 성적이 부모의 지불능력 심지어 집값과 비례하는 세상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대입자율화를 추진하고 있다. 그리고 그 핵심에 ‘입학사정관제’가 있다. 입학사정관제란 한마디로 대학별 전형에서 성적 외에 다른 요인을 가지고 ‘입학사정관’이 합격여부를 판단한다는 것이다. 겉으로 보면 마치 성적위주의 선발을 벗어나서 학생의 창의력 등 잠재력을 판단하려는 창의적인 제도인 것 같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이미 고려대 수시 논란에서 드러났듯이 돈벌이에 혈안이 된 대학들은 안정적으로 등록금을 지불할 수 있고, 이후 기여입학제가 허용되면 뭉칫돈을 낼 가능성이 높은 일정이상의 재력을 갖는 학생(학부모)들을 선발하고 싶어 한다. 농담처럼 도는 말로 대학 면접에서 첫 질문이 “어떤 교통편을 이용해 왔는가?”라고 한다. 버스 등 대중교통을 이용했다고 답하면 낙방이고 어머니(전업주부)와 함께 자가용으로 왔다면 답하면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현실이 이러한데도 학생선발을 대학당국 마음대로 하라는 것은 결국 없는 사람들에게는 고등교육의 기회를 박탈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렇게 대입자율화는 학교를 가지고 돈벌이 하는 사학자본과 학벌을 가지고 부를 대물림하려는 가진 자들의 욕망이 만들어낸 산물인 것이다. 

자사고-일제고사- 미래형교육과정! 학원으로 바뀐 학교!
위계서열화는 단지 대학에서 그치지 않는다. 초중등교육과정 조차도 철저히 부모의 지불능력에 따라 학교를 위계서열화고 있다. 그동안 외국어고, 과학고 등의 특목고와 자립형사립고 출신이 상위권 대학진학을 독점해왔다. 그리고 이들 학교를 다니는 학생 대부분이 부유층 자녀들이다. 그런데 이명박정부는 등록금, 교육과정을 사립재단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율형사립고 100개를 신설을 밀어붙이고 있다. 대표적인 자립형사립고인 민족사관고 2008년 등록금 1992여만 원이었으며, 신설될 자사고 또한 최소 천만 원대로 예상되고 있다.
신설될 자사고 100개와 기존의 특목고 55개, 자립형사립고 6개를 합치면 이 숫자는 일반계고등학교의 20%에 이른다. 이는 2008년 기준 서울소재 4년제 대학입학정원수를 상회하는 숫자인데 이대로 가면 결국 이들 학교를 졸업하지 못하면 서울소재 4년제 대학에도 못가는 상황이 도래할 것이다. 결국 형식적으로 유지되어온 고교평준화는 해체되고 고등학교들은 자사고 등 1부리그와 나머지 2부리그로 분할될 수밖에 없다. 당연히 1부 리그 고등학교에 가기 위해 고교입시가 부활하고, 사교육비는 더욱 폭등할 전망이다. 그리고 높은 등록금을 비롯한 사교육비용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은 대학 등 고등교육 기회를 처음부터 박탈당할  것이다.
위계서열화는 고등학교에 그치지 않는다. 이제 중학생은 물론 초등학생마저도 성적으로 줄 세우기가 자행되고 있다. 일제고사가 그것이다. 한날한시에 똑 같은 시험문제로 시험을 봐서 성적을 공개하여 학교와 학생 그리고 교사들에 대한 줄 세우기를 강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명박정부가 이미 기존의 평가로도 지역별 계층별로 성적차이가 확인된 상황임에도 이를  밀어붙이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바로 그 결과를 가지고 교사들을 압박하고 통제하기 수월하기 때문이다. 최근 정부는 내년부터 교원평가를 전면화할 것을 선언하였듯이, 일제고사 등 평가를 통한 통제시스템의 일상화를 이루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학생들은 초중등 학교에서부터 경쟁을 내면화하게 될 것이며, 이를 견디지 못한 아이들은 죽음으로 내몰리게 될 것이다. 이미 작년 일제고사 이후 성적미달학생에 대한 강제적인 방과 후 수업 등으로 초등학교 학생들마저도 스트레스로 자살을 고민한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는 지경이다.
이제 학교는 최소한 공적기능도 상실한 채 학원화하고 있는 상태인데 이를 아예 돌이킬 수 없이 지경으로 만들려 한다. 바로 미래형교육과정의 도입이 그러하다. 국민공통교육과정을 현행 10년에서 9년으로 줄여서 고등학교과정은 아예 제외시켰다. 이제 고등학교들은 학교별로 알아서 입시교육을 시켜도 된다는 것인데, 이는 자사고 등을 위한 보완장치이자 공교육에 대한 포기에 다름 아니다. 더욱이 현행 대학입시에서 중요한 교과 외의 과목은 통합운영을 가능하게 하여 해당과목 교사들에게 대한 구조조정을 예고하고 있다. 이는 교원의 양성체계, 대학의 학과체계 등 교원의 수급전체에 대한 지각변동으로 나아갈 것이다. 더욱 황당한 것은 초등학교 1-2학년에게 6교시를 실시하려 한다. 명분은 저소득 맞벌이 자녀를 위한 것이지만 실상은 아이들을 학교에 묶어 놓는 것으로, 그야말로 반교육적이고 반인권적인 발상이며, 아동학대이자 인권유린이 아닐 수 없다.

학교가 입시학원으로 바뀌고 학생들은 경쟁을 내면화하는 체제순응적인 수동적 존재로 길들여지고 있다. 이처럼 이명박정부의 교육정책은 대학에서 초중등분야까지 교육을 통한 이윤창출과 교육을 통한 부의 세습이라는 소수 자산계급의 이해를 위해 철저히 노동자민중의 교육권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일관되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구남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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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육강식의 ‘정글교육’, 내 자녀의 성공은 정말 가능한가?

교육문제에 있어서는 노동자는 하나가 아니다


작업장 안에서는 민주투사일지는 몰라도 집에서는 가부장적인 남편으로 살아가는데 익숙한 것이 노동자계급의 현실이다! 마찬가지로 정부의 교육시장화 정책에 대한 비판에 대해 동의하면서도 막상 자신의 자녀교육 문제에서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다. 거리낌 없이 사교육을 시키고 심지어는 성적으로 아이를 꾸짖기도 한다. 왜 한국의 노동자계급은 자녀교육에 목숨을 거는가?
바로 학력에 따른 임금격차와 사회적 지위의 차이가 그 어느 사회보다도 심각하기 때문이다. 비록 출혈과도 같은 사교육비 지출이 자녀의 고학력과 안정된 직장을 즉각적으로 보장하지 않음에도, 현재의 삶의 처지를 개선하는 유력한 매개로 학력이 기능할 수 있다는 사회적 통념이 강력히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자본가들처럼 특별히 물려줄 생산수단이 없는 노동자민중이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유산이 교육을 통한 신분상승의 기회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노동자들은 유독 교육문제에서 만큼은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다. 같은 노동자이면서 교육노동자의 구조조정인 교원평가에 명시적으로 반대하지 않거나, 올바른 것이 아니라는 판단을 하면서도 사교육에 열을 올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현실은 노동자계급을 어김없이 배신한다! 노동자대중들의 이러한 바람과 엄청난 사교육비 지출에도 불과하고 이미 트랙은 처음부터 나뉘어져있으며, 소수의 특권계층의 부의 대물림 도구가 된 대학서열체제하에서 들러리를 서고 있을 뿐이다. 이는 이른바 명문대 진학을 특목고, 자립형사립고 출신들, 강남 등 특정지역, 특정계층이 독점하고 있는 현실로 이미 확인되고 있다. 만일 노동자계급이 “내 자녀만은 성공할 것”이라는 환상을 고집하며, 교육문제를 지금처럼 개별적인 문제로 치부하는 한 돌아오는 것은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신세를 면치 못하는 자녀세대의 비참한 미래일 뿐이다.

상품이 아닌 교육을 상품화하는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특히 신자유주의는 교육을 상품화시키고 있으며 학교 또한 시장화하고 있다. 교육을 상품화하는 과정은 교사의 노동을 산노동이 아니라 죽은노동으로 만들며 소외시킨다. 학교는 사회구성원으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식과 공동체적인 문화를 습득하며 인간의 자기발달을 실현하는 교육이 이루어지는 곳이 아니라 입시를 위한 단편적 정보와 시험을 보는 기술을 연마하며, 이 과정에서 경쟁을 내면화하는 공간으로 변질되어 왔다. 교사의 노동 또한 오직 입시진학률을 높이기 위한 수단일 뿐이며 얼마나 효과적으로 정보를 전달하고 학생에 대한 노동(수업은 강제된 노동이다)통제를 잘하는가로만 평가된다.
또한 교육이 상품이 되기 위해서는 시장에서 다른 상품처럼 매매되어야 하는데, 교육은 다른 상품과는 달리 그 사용가치가 구매와 함께 즉각적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즉 구매비용은 선지불되는 구조이지만 그 구매효과 즉 사용가치는 피교육자가 노동시장에서 자신의 노동력을 어떤 가격에 팔게 되는가(어떤 직장을 구하는가)로 사후적으로만 확인된다. 때문에 교육이 상품으로 매매되기 위해서는 그것의 교환가치(가격)를 둘러싼 일정한 합의지점이 형성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학력과 각종의 라이센스 제도이다.

교육문제는 계급문제이며, 계급투쟁의 영역이다!
교육을 상품화하는 과정은 필연적으로 대립되는 계급간의 충돌을 일으킨다. 교육과 학교를 상품화 시장화하여 이윤을 획득하는 소수와 이 과정에서 자신의 생계비(임금)의 상당부분을 교육비용으로 반강제적으로 지출당해야 하는 노동자 민중과의 이해가 충돌하게 된다. 또 이 과정에서 교육노동이 산노동이 아니라 죽은노동으로 변질되고 스스로의 노동으로부터도 소외되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벗어나고자 하는 교육노동자들의 저항과 이를 억누르고 권력과 자본의 시종으로 길들이고자 하는 국가권력과 충돌하게 된다.
한편 교육과정에서도 충돌이 일어난다. 자본과 국가권력은 끊임없이 교육과정을 체제순응적인 기능인력을 양성하는데 적합하도록 통제하고 싶어 하며, 노동자 민중의 입장에 서고자하는 교육노동자들은 그리고 독립된 인격체인 학생들은 이러한 일방향적인 교육과정에 저항하게 된다. 또 노동내부에서는 지배권력과 자본에 굴종하거나 타협하려는 경향과 그렇지 않는 경향이 충돌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결국 학교가 가치중립적인 공간이 아니라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이해가 충돌하는 지점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학교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적인 국가장치로서 자본의 의도대로 일방향으로만 작동하지 않고, 그 안에서 치열한 계급간의 전투가 일상적으로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미래세대의 구성원들에게 교육노동자들이 어떤 교육을 시키는가는 자본과 노동 모두에게 중차대한 사안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노동자계급은 교육문제를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실천하지 않으면 안된다.

전도된 교육현실을 전복하는 운동을 전개하자!
수천억 원의 적립금을 쌓아두고 있는 사립대학들. 설립자와 친인척들의 사유물처럼 운영되는 사립 초중고들 그리고 어느 나라 어느 사회보다는 높은 사립학교의 비율은 무엇을 말하는가? 학교가 이윤축적의 도구로 기능하는 것을 멈추지 않고, 어찌 사교육문제의 해결을 말할 수 있겠는가? 국민들의 혈세로 학교가 운영되는데 어찌 학교가 재단소유물이 될 수 있는가? 이제 우리는 “학교는 돈벌이 수단이나 사유물이 될 수 없다”는 지극히 당연한 논리를 대중의 지배적인 상식으로 만들어야 한다. 학교는 만인의 것이라는 것, 사회적 공공적인 필요를 위해 만들어졌으니 그 존재방식도 그래야 함을 주장해야 한다.
교육은 상품이 아니다. 교육은 노동자 민중이 정당하게 누릴 권리이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학력에 따른 임금과 사회적 지위가 달라지는 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문제제기 해야 한다. 대학을 나온 자와 그렇지 않은 자가 서울대를 나온 자와 그렇지 않은 자 사이에 임금과 사회적 지위에 차이가 미미하다면 누가 굳이 대학에 가려 돈을 쏟아 붓겠는가? 결국 교육이 상품화 된 현실을 전복하기 위한 핵심은 바로 대학서열체제를 타파하고 대학을 평준화하는 것에 있다.
나아가 교육이 보편적 권리가 된다는 것은 대학을 포한 모든 교육이 무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우리는 교육비용을 국가와 사회가 책임져야 한다는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그러나 이는 청원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의회제도안에서의 정당간의 정책협의로 이루어질 성격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노동자대중의 자기요구와 행동으로만 획득될 수 있는 것이다.
 

2009. 3. 30 일제고사견를 반대하는 전국학부모 선언 기자회견


왜 노동자계급은 교육문제에서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는가?

김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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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자본·반계급 교육운동이 필요하다”

교육의 시장화와 그 대응 

 


1. 자본제 국가의 교육

교육은 인간의 본질을 실현해 가는 과정이다. 이를 위해서는 교육의 기회나 과정과 결과에서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한다. 또한 국가와 학교의 관계, 교사들 간의 관계, 교사와 학생의 관계가 지배적이거나 일방적인 강제가 아니어야 한다.
그러나 자본과 국가가 주도하는 교육은 자본주의 체제의 구조, 지배 이데올로기, 그리고 인간 소외를 확대 재생산한다. 또한 교육을 이윤 축적의 수단으로 전락시켜 교육을 상품으로 취급하고 교육을 통하여 차별과 배제를 정당화한다. 학교는 철저히 자본주의 체제 유지에 기여하거나 순응하는 노동력을 생산하고, 그 운영은 효율을 우선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한국 교육은 이런 보편적인 문제와 더불어 학벌사회라는 문제를 안고 있다. 대학서열체제로 인한 학벌사회, 초중등 교육과정을 왜곡하는 대학입시, 공정성을 가장한 서열 평가로 전국의 학생을 서열화하고 있다. 대학의 교육능력이나 학문과 무관하게 입학생들의 성적에 의해 서열이 결정된다.
학벌에 의해 부와 권력이 분배되는 현실에서, 학생과 학부모는 오로지 학벌 획득을 목표로 하게 된다. 교육은 공공성을 상실했으며 지식은 수단으로만 기능하고 있다. 따라서 사회적 차원에서는 비합리적인 사교육비용이 교육 문제의 핵심으로 등장한다.

2. 한국 교육 시장화

학벌사회로 인한 문제를 외면하면서 사교육비만이 정책적인 과제로 등장한 결과는 교육의 시장화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공공재로서의 교육의 특수성 때문에 교육의 시장화는 민영화나 자율화, 규제완화 등의 형태로 모습을 바꾸어 나타났다. 이는 시장주체들의 자유선택과 경쟁관계로 변화시킴으로써 교육제도가 효율적으로 운영될 수 있다는 믿음에 바탕을 두고 있다.
통상적으로 교육의 시장화는 선택의 확대나 경쟁의 강화, 수월성의 보장, 효율성의 제고 등의 기준을 가지고 적용되고 있다. 주체의 측면에서는 정부와 교사, 학생과 학부모 등 전통적인 교육주체들의 관계를 수요자와 공급자로 표현되는 시장주체로 전환하고 있다. 운영원리 면에서는 교육기관 운영의 사영화를 통한 공급자의 다변화, 교육서비스의 상품화, 소비 선호에 따른 선택권의 보장, 상품의 소비 효용에 따른 가격체제 등을 확립하기 위한 정책이 시행되었다.
시장화는 일정정도 대중의 동의를 얻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 하나는 시장과 대비되는 국가나 정부의 실패에 모든 책임을 돌리는 것이었다. 공공부문의 민영화는 국가의 효율성을 높이는 가장 적절한 개혁(?)과제가 되었다. 그리고 교육에 대한 학부모들의 불만은 시장화에 대한 저항을 개혁에 대한 저항으로 매도하였다.
그러나 학벌사회에서 교육의 시장화는 한국교육에서 시장이나 상품화의 경향은 늘려 나갈 수 있으나 주류경제학적인 의미에서의 시장이 될 수 없다. 그것은 교육이 본래 가지는 공공재나 외부효과 등으로부터 기인하기도 하지만 소수의 학벌이 독점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교육정책의 전개 과정에서 교육의 시장화는 교육의 실패에 따른 위기를 전가시키기 위해 정부주도에 의해 전개되었다. 교육의 시장화는 단지 정책적인 수단으로 사용되며, 시장화 정책의 결과는 교육의 계급화로 나타난다. 이 과정에서 교육이나 그 활동의 결과 얻게 되는 지식은 상품으로서의 기능보다는 출신 배경에 따른 지위를 계승하는 역할을 선발이나 서열기제를 통해 수행한다.
이명박 정부 들어 교육의 시장화 정책을 통한 교육의 계급화는 더욱 강하게 진행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입학사정관제는 개별 대학이 학생 선벌 과정에서 ‘원하는 학생유형’을 주관적으로 선발하는 제도이다. 그나마 대입제도의 공공성을 유지하기 위한 마지막 장치가 교교등급제, 지필형 본고사, 그리고 기부금 입학제를 금지하는 3불 정책이었다. 그런데 이를 폐지하자는 것이 대학입시 완전 자율화임에 비추어 볼 때, 기부금 입학제나 고교등급제를 실시하는 통로가 될 우려가 크다.
자율형 사립학교 100개 확대, 기숙형 공립학교, 자율형 공립학교 등 다양한 학교를 확대하고 있다. 이들 학교들은 교육과정이나 학생선발, 교육비의 책정 등에서 성공한 소수에게 더 나은 교육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학교로서의 위상을 가지고 있다. 다양한 학교의 성공을 위해 경영형 교장의 자율권이 확대되고 있다. 그리고 교장의 자율권은 입시경쟁을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또한 교장에 의해 임용되고 해고되는 비정규 교육노동자 증가되고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에 영어는 의사소통의 수단이나 유용한 도구가 아니라 획득하고 소유해야 할 그 자체이다. 학교에서 영어는 교육이 아니라 점수와 등급으로만 남는다. 그리고 영어는 학교를 넘어 취업이나 진급 등 삶의 전 단계에서 차별 기제로 작동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 들어 학교의 교육과정이 영어를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공간 배치역시 영어를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그리고 교원 구성역시 영어를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으며, 이들 대부분은 교육전문가가 아니라 단기 비정규 노동자들이다.
그리고 핵심에 일제고사가 자리잡고 있다. 일제고사는 공교육 실패에 관한 책무를 지역과 학교에 묻는 수단으로 국가는 평가를 장악하고 경쟁은 개별학교와 지역이 담당한다. 학교가 제공하는 교육상품의 가치를 계량화하고 소비자들에게 학교라는 상품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공급하기 위해, 일제고사 결과는 전국의 학교를 서열화시키기에 충분한 변별력을 가져야 하고, 그 결과인 정보는 공개되고 있다.
서열을 평가하는 일제고사로 인해 학교의 서열을 위해 학생들이 학교에서 쫓겨난다. 그것을 잘하는 학교와 교사일수록 시장에서 선호하는 학교와 교사가 될 것이다. 더 들여다 볼 필요도 없이 쫓겨나는 학생들은 더 많은 보살핌이 필요한 학생들이다.

 


3. 교육의 시장화·계급화를 넘어서기 위하여

현재보다 더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있기에 인간은 고통스러운 현재를 살아갈 수 있다. 교육은 그 과정을 통해 이전보다 더 나은 상태를 향해 나아가게 하는 힘을 북돋울 수 있기에 모두에게 소중한 의미를 가진다. 만약 교육이 그러한 역할 자체를 포기하거나 소수를 위해서만 그러한 역할을 하고 있다면, 그 교육은 반(反)교육이며 바로 잡아야 한다. 일자리를 얻기 위한 경쟁이 치열할수록 적절한 수준의 교육보다는 학력인플레가 나타나고, 교육에 투자하는 비용은 소모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사교육비 지출을 둘러싼 계층, 지역 간 격차는 심화되고, 학교 간 서열체제는 강화되고 있다. 그리고 시장화를 정책수단으로 하여 교육을 통해 계급이 재생산되는 구조가 강화되고 있다. 그러므로 교육(운동)의 주체는 교육은 반자본·반계급적이라는 지향을 분명하게 해야 한다.
 

느림보 | 교육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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