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생태운동

1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9/11/04
    생태위기와 녹색사회주의
    PP

생태위기와 녹색사회주의

사노준은 사회주의 운동속에서 생태운동을 재구성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고백컨대 생태운동에 대한 경험은 일천하다. 그러나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생태운동에 대한 사회주의 가치를 외면할 수 없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실천에 옮기기 위한 노력을 시작해야 한다. 이번 기획은 그런 출발점으로 생태주의와 사회주의 운동의 결합을 고민하는 서영표님의 글을 소개한다.




생태주의와 정치적 입장의 결합

생태주의담론은 다양한 정치적 입장과 결합할 수 있다. 생태주의담론을 둘러싼 논란은 녹색의 가치와 이러한 다양한 정치적 입장의 결합으로부터 발생한다. 논란의 쟁점은 크게 네 가지다. 각각의 쟁점을 통해 녹색사회주의가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하는지 제시하도록 하겠다.
첫째,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서로 상이한 입장이다. 자연을 인간의 노동과 소비의 대상으로 파악할 것인가 아니면 그 자체로 내재적 가치 또는 영성을 가진 존재로 볼 것인지가 쟁점이 된다. 여기서 녹색사회주의의 입장은 자연의 영성과 내재적 가치를 주장하는 근본생태주의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지만 인간을 자연적 존재로 파악하는 것이어야 한다. 인간을 동물적 존재로서 파악하고 인간종과 비인간종 사이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입장은 인간사회의 문제를 자연에 종속시키는 입장을 비판하는 동시에, 인간의 특수한 위치를 일방적으로 부각시키는 입장에도 반대한다. “자연은, 인간이 죽지 않기 위해서는 그것과의 지속적인 [교호] 과정 속에 있지 않으면 안 되는 인간의 몸이다.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 생활이 연계되어 있다는 것은 자연이 자기 자신과 연계되어 있다는 것 이외에 어떠한 의미도 없는데, 왜냐하면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자연을 인간의 ‘비유기체적 신체’로 개념화하고 있는 마르크스는 인간과 자연의 연속성을 잘 설명하고 있다.   

둘째, 다양한 녹색사상은 자본주의적 시장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두고 서로 경쟁적인 입장을 제시한다. 주류적(우파적) 녹색담론은 자연자원에 가격을 부여하고 환경정책 수립과정에 시장원리(비용-편익분석)를 적극 도입하는 것을 제시한다. 종종 이러한 입장에 선 사람들에게 생태위기는 경제적 가치로 환원되고 성장과 자본축적이 또 다른 계기로 전락한다. 탄소배출권 시장의 활성화와 대체에너지 연구개발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다른 한편으로 심층생태주의자들은 이윤추구적이며 경쟁적인 시장원리에 반대하지만 이에 대한 구체적 분석을 하지 않은 채 개인적인 의식변화와 윤리적 소비로 곧장 넘어가는 경향이 있다.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시장의 힘에 대해서 과소평가하거나 무시함으로써 이에 대한 대안제시에 실패한다. 녹색사회주의는 생태위기가 가지는 상대적 자율성을 수용하면서도 그것이 어떻게 자본주의적 생산/소비, 그리고 계급투쟁과 연결되어 있는가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자본주의적 시장의 극복이 생태사회건설의 가장 중요한 고리임을 부각시켜야 한다.

셋째, 생태친화적인 사회를 만드는 과정에서 국가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가도 논란의 대상이다. 주류적(우파적) 입장도 국가(정부개입)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문제는 이러한 국가의 역할이 전문가들과 관료중심의 분석과 정책 수립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심층생태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적 생태주의자들은 이러한 기존 국가와 민주주의 한계를 인식하면서 소규모 공동체를 통한 평등과 자율성 회복을 추구한다. 그러나 시장과 마찬가지로 국가가 가지고 있는 물질성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지에 대해 답하지 못한다. 이에 반해 녹색사회주의는 국가의 변혁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넷째, 과학과 기술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도 논쟁거리다.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우파적 녹색담론은 과학기술에 대해 맹신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러한 입장은 생태위기의 문제를 전체로서 파악하지 않고 개별적인 문제, 즉 기후변화, 대기오염, 수질 오염 등 서로 분리된 사안으로 이해하며 각각에 대해 기술적으로 대응한다. 당연히 이들에게 생태문제는 비정치적인 문제로 전문가적 연구와 정책 수립을 통해 해결될 수 있는 문제로 낙관한다. 이에 반해 심층 생태주의자들은 근대적인 과학기술주의 자체에 대해 혐오한다. 동양적 종교와 전통사상에 기대는 경향이 강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과학기술주의에 반대해서 영성주의적 입장을 제시하기도 한다. 사회주의는 종종 과학기술주의에 대한 맹신에서 우파적 담론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과학기술은 자본주의를 넘어 자본주의 이후 사회를 건설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야만 한다고 본다. 전통적으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견지해온 입장이다. 하지만 21세기의 사회주의자들이 추구해야할 녹색사회주의는 과학과 기술에 대해 좀 더 신중한 태도를 보여야만 한다. 과학적, 그리고 기술적 혁신을 신성한 힘으로 맹신하거나 악마적으로 혐오하는 관점 모두를 거부해야 한다. 과학과 기술은 인간 사회의 일부이며 신중한 활용을 통해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이익의 제공해 줄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생태위기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대중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기상학, 지질학, 대양학 등의 과학기술의 발전 덕분이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21세기 녹색사회주의, 자율적인 공동체

녹색사회주의의 대안은 다양한 자율적 결사와 공동체, 그리고 이들 사이의 네트워크를 번성하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전략에서 사회주의적으로 민주화된 국가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국가는 이러한 네트워크들을 시장의 힘으로부터 보호해야하기 때문이다. 또한 국가를 매개로 결사들과 공동체들의 네트워크는 시장의 힘을 통제하고 사회화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동시에 자율적인 결사들과 공동체 안에서 해결될 수 없는 경제활동 즉 거시경제적인 사안들과 국제 무역 등을 담당할 계획의 필요성을 부정할 수없다. 문제는 이러한 계획을 최대한 민주적인 참여를 통해 달성하는 것이다. 여기서 계획은 민주주의와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결합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근본 녹색주의와 녹색 사회주의가 공유화고 있는 미래상, 즉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는 자율적인 공동체들이 번성하고 이들 사이의 자유로운 네트워크가 구성되며 거시적인 사회·경제적 정책은 민주적 정치과정을 통해 실현되는 사회일 것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문제는 성장인가/분배인가라는 좌우파 사이의 쟁점과 생태계중심인가/인간중심인가라는 산업주의와 녹색사상 사이의 쟁점은 극복될 것이다. 자율적인 공동체들과 민주적 참여를 통해 운영되는 경제는 이윤과 그릇된 욕망이 아닌 필요(needs)충족 원리를 기초로 할 것이며, 이러한 사회는 지금보다 덜 생산하고 덜 소비하면서도 더 높은 필요충족의 정도와 사회적 평등을 가능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성장은 인간의 필요충족을 자연생태계와 조화시킬 수 있는 과학과 기술에 기초하는 질적인 성장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양적인 성장을 추구하지만 자연생태계의 보호는 고사하고 인간의 필요조차 제대로 충족시키지 못하는 자본주의적 사회와는 완전히 다른 성격이 사회가 될 것이다. 물론 우파는 이것을 공상적이라고 비판할 것이다. 녹색좌파에게 이러한 발전은 인간의 이성과 능력을 발전을 통해 가능한 미래로 제시된다. 불과 100년 전 인류는 민주주의에 기초한 정치체를 유토피아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제 민주주의는 상식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우리의 주변에는 이미 반자본주의적이고 공동체적이며 민주적인 다양한 대안적 삶의 양식들이 실험되고 있다. 이러한 실험들은 자본주의이후 사회의 가능성을 지금 여기에서 보여주고 있다. 21세기 녹색사회주의는 이러한 가능성들을 사회주의적 전략으로 포괄하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다르게 살기를 원한다. 그리고 다르게 살 수 있으며, 다르게 살아야 한다.   
 

서영표(성공회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