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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연대전략, 노동계급에게 약인가 독인가?

[계급운동과 사회복지투쟁]

 

자본의 신자유주의 전략으로 노동계급은 다층화되는 동시에 양극화되었고,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은 상당히 축소되어 자본의 이해 증진을 위해 국가가 적극적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많은 나라들처럼 한국에서도 자본과 노동의 권력균형은 심각하게 불균등해졌다. 즉, 노동 권력의 축소로 국가는 형식적 수준의 민주주의조차 무시할 만큼 부르주아적 성격이 강화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전체 노동자계급을 위축시켰다. 더욱이 빈민, 실업자, 비정규직, 여성 및 이주노동자와 같은 계층들은 사회적 위험에 더 심각하게 노출될 수밖에 없다. 이들에 대한 보호와 연대는 신자유주의에 대항하고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노동자계급운동의 핵심과제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러한 과제가 지극히 계급적인 과제임에도, 비계급적 관점으로 접근할 때 더 현실 가능한 대안인 양 이해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사회정책에 대한 계급적 관점의 결여는 자본이 사회복지를 시행하는 목적으로 귀결될 수 있다. ‘사회연대’가 사회정책의 몰계급적 관점만으로 대변된다면 사회적 위험에 대한 계급 내 부조가 정당화되는 것이고, 또한 노동계급에 의해 자본주의 체제가 더욱 완고하게 지탱시켜주게 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노동운동의 전략으로 노동자계급 내 부조와 협조가 과연 합의될 수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 의문이 제기된다. 이 글의 목적은 ‘사회연대전략’의 비계급적 관점이 노동운동에 미칠 위험 요소를 제기하고 사회복지에 대한 계급적 관점의 중요성을 밝히는 데 있다.
 


 


 

사회연대전략의 내용과 비계급성
지난 2006년 말부터 민노당 부설연구소의‘소득-임금 측면에서 노동계급 연대전략 보고서’가 제출되면서 ‘사회연대전략’논쟁이 촉발되었다. 사회연대전략의 주요 지지층으로는 (전)민노당 정책자문위원이었던 오건호(사회공공연구소 연구실장), 금속노조 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인 이상호, 진보신당, 그리고 민주노총이다. 
사회연대전략을 둘러싼 미묘한 입장의 차이가 있지만 공통점은 노동을 통해 확보되는 시장임금(market wage)과 사회복지급여(cash transfer, social benefit)로 확보되는 사회임금(social wage) 중 사회임금을 확대해가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회임금이란 국가가 전체국민에게 제공하는 현금급여(연금, 실업급여, 공공부조의 생계급여 등)와 현물복지급여(노인, 아동, 장애인 등에 대한 사회서비스, 의료서비스 등)를 통칭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임금의 재원은 조세, 사회보험료, 기업복지기금 등으로 충당된다. 그러므로 직접세의(소득세, 법인세, 상속세, 증여세) 비중을 높여 누진세율을 적용하고, 사회보험료의 자본 및 국가의 책임부분을 강화할 때, 사회임금을 통한 수직적 재분배 기능을 높일 수 있다. 그러나 사회연대전략에서는 사회안전망의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우선적으로 조직된 노동자들의 기여(갹출)를 요구하고 있다.
복지국가 번창시기(2차 대전 이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이전)의 사회임금은 노동자계급이 생산관계에서 가졌던 근본적인 모순이 지속적으로 반영된 것으로 이미 분석됐다. 사회임금이 자본의 이윤으로부터 임금소득으로 재분배이거나 상류 및 중상류계층으로부터 저소득계층에게로의 재분배였다기보다는 임금과 소득을 얻는 광의의 노동계급 내부의 재분배였기 때문이다. 즉 생산관계에서 자본이 전유하고 있는 잉여가치를 사회임금으로 가져올 수 없다면, 사회임금은 노동자계급 내부의 상호부조 수준에 머무르게 된다. 더욱이 자본은 그들의 잉여가치를 축소하여 비용을 지불하지 않아도 사회‘임금’이란 용어로 인해 임금이외 추가적으로 노동력에 대한 보상을 제공하는 것처럼 비춰지기까지 한다. 노동력 재생산과 사회 안정화를 위해 자본의 잉여가치총량에 별다른 타격을 주지 않으면서 복지가 유지되었다. 자본은 오히려 이러한 임금외비용 확대를 빌미로 시장임금을 축소시키려는 계급적 이해까지 표출하기도 했다.
신자유주의 체제 구축과 함께 자본은 생산입지 경쟁논리를 내세워 시장임금과 사회임금 모두를 축소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해왔다. 그 결과 사회임금을 형성했던 재원구조에서 각각의 시민과 노동자 개인의 책임은 강화된 반면 국가의 ‘자본유치 경쟁’에 힘입어 자본의 책임은 더욱더 약화되었다. 결국 사회임금의 증가가 피지배계급의 복지 및 소득의 실질적인 향상으로 이해되기는 어렵다. 다만 사회임금의 증가는 사회적 위험에 대해 시장적 메커니즘에서 각각의 개인이 대응하는 대신 계급 내 자원을 통해 위험에 대한 탈상품화 정도를 높일 수 있는 장점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역시도 신자유주의로 전환이후 연금 및 의료부분을 중심으로 민영화가 심화되면서 서서히 약화되었다.
이처럼 서구에서 경험했던 한계가 한국에서 독이 아닌 약이 되기 위해서는 결국 총자본의 잉여가치를 사회임금으로 가져와야 하는 투쟁이 중요하게 요구된다. 그러나 사회연대전략에서 우선적으로 고려했던 것은‘정규직’노동자의 연대에 대한 호소였다. 이러한 연대가 총자본의 잉여가치를 투쟁으로 가져오는 것보다 훨씬 실현가능해 보이는 것처럼 논의되기도 하였다. 임금생활자의 시장임금에서 매달 일정 부분을 사각지대의 사회적 안전망 구축 및 확대를 위한 재원으로 징수하는 것이 연대를 위한 양보로 전제되었다.

사회연대전략은 계급적 접근보다 우수한가?
연대는 피지배계급 간의 공동의 이해를 달성하기 위해 어느 한쪽의 희생을 통해 다른 한쪽의 고통을 축소하여 사회공동체의 가치를 높이는 데에 있다. 그러나 비정규직을 포함한 사각지대의 문제는 노동계급 내부의 양보와 원조로 해결하기 어려운 자본의 노동유연화로 빚어진 하나의 결과다. 이 문제를 연대적 가치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당장의 계급 내부적 원조보다는 근본적인 노동관계에 대한 해법이 우선되어야 한다. 사회적 연대는 계급연대를 기반에 두지 않을 때 그 위력을 발휘하기 힘들다. 노동의 계급적 투쟁이 전제되지 않았을 때 자본과 국가는 그 어떤 것도 쉬 내줄 이유도 필요도 없다. 20세기 사민주의가 자본과 대항하는 투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신자유주의 동조세력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 명확히 환기되어져야만 한다.
진보정당들은 정규직 노동자들을 귀족노동자로 적대시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하여 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이를 가져다가 서민들에게 나눠주자는 전략을 통해 중산층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다. 일면 진보적이면서 일면 현실정치의 장악력까지 겸비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서민들과 사각지대의 노동자들에게 돌려줘야 하는 것은 애초 그들이 시장임금으로 보존 받지 못한 정당한 그들의 몫의 환수여야 한다. 많은 노동빈곤층과 서민들의 삶이 팍팍해진 원인은 정규직 노동자의 고임금 때문이 아니라, 노동시장유연화를 통해 이윤율 저하를 최소화하려고 했던 자본과 이에 협조한 국가로부터 기인한다.
대중정치 노선은 언젠가부터 신자유주의에 대항하거나 반자본투쟁을 지지하기보다는 신자유주의적 외적강제를 우선 수용하고 그 수준에서 현재 적용 가능한 대안들을 모색하였다. 이에 계급적 관점은 불편한 대상이 되었고 노사정 모두에게 고통분담이라는 규범화를 제시하면서 실제로 노동의 양보를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얼핏 보기에 누구나 찬성하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회연대전략이란 의제는 실제로 노동계급으로부터 동의를 끌어내기 힘들다. 왜냐하면 정규직의 경제적 양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양보를 설득하기 힘든 논리구조 때문이다. 또한 정규직 노동자 중에도 시장임금을 통해 보장되는 소득보장의 수준이 낮은 노동자들, 즉 고용형태만 정규직이지 여전히 불안정한 소득의 노동자들이 상당하다. 그런데 자본이 의도적으로 유발시켰던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노노갈등 요소가 연대전략의 중요한 두 축으로 수용되면서 매우 위험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그대로 작동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노동계층이 불안정한 노동계층을 위해 재원을 형성하자는 것은 근본적으로 자본과 국가의 책임에 대해 근본적인 대립 전선을 세우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오히려 대자본 투쟁에 대한 노동운동 내부의 동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최근 파업 사업장을 중심으로 국가와 자본이 형성하고 있는 ‘정규직 이기주의’이데올로기는 임노동자의 계급투쟁에 대한 입지를 더욱 좁히고 있다. 이러한 국면에서 사회연대전략이 가지는 이데올로기적 한계는 노동자계급 연대가 아니라 자본과 국가의 연대에 더 많은 공헌을 할 공산이 너무나 크다.

제갈현숙(사회공공연구소 연구위원, 한신대 사회복지학과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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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연대전략으로써 사회복지

복지에 대한 사회권은 노동자들을 시민으로서 사회에 통합시키고 노동자들이 국가공동체에 소속되어 있음을 상징한다. 복지국가는 이러한 노동자들을 사회적으로 통합하고, 이를 통해 연대감을 증진시켜온 여러 방법 중 하나다. 이러한 연대감은 노동계급운동에는 치명적이다. 왜냐하면 풀란차스(Poulantzas)의 분석처럼 기본적으로 사회복지는 지배세력의 경제적 양보를 요한다는 점에서 경제에 대한 국가의 자율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지만, 자본의 정치권력에 위협을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복지국가 역시도 장기적으로 자본에 유리하거나 자본의 확대재생산과 양립하는 전략으로 가능성과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노동자들의 투쟁의 성과로 제도화된 복지투쟁의 사회성과 역사성 역시도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독일의 사회학자 하이만(Heimann)은 사회정책에 대해 자본소유와 상품질서에 반하는 원칙으로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사회적 이상의 실재로 설명하였다. 피지배계급의 자본주의 메커니즘에 반대하는 사회적 이상은 사회운동을 통해 현실에서 구체화되고 사회운동의 정도에 따라 사회정책의 성격이 시장질서에 반하는 정도가 결정된다. 사회정책의 이러한 혁명적 성격은 체제를 유지, 통합하려는 자본 및 보수주의자들과 항상 갈등하고 대립하게 된다. 이러한 혁명성과 보수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이 사회정책이고 이로 인해 사회정책은 야누스의 얼굴과 같은 양면성을 띤다. 그러므로 사회정책은 매우 유기적이며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의 사회적 이상과 투쟁의 정도에 따라 이 양면성의 색채는 결정된다. 노동운동의 사회복지 투쟁은 반자본주의에 대한 지향성을 가져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사회복지 투쟁이라 할지라도 자본의 심장부를 공격할 수 있어야 한다.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노동자들에 대한 사회적 안전망은 시급하다. 이들은 가처분소득인 낮기 때문에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해서도 예비할 수 있는 자원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미래소득이자 노후소득의 기능을 하는 연금제도에서 배제되고 있다. 사회보험은 사회적 위험이 더 높은 계층에게 더욱더 예방적인 기능을 제공해야 한다. 하지만 오히려 사회적 위험이 더 큰 집단일수록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사각지대 해소를 위해 사회연대전략에서처럼 시장임금 소득이 상대적으로 높은 노동자들로부터 갹출 받은 기금을 바탕으로 시급하게 지원할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계와 같은 공동체간의 상호부조관습 등은 이미 존재해왔다. 또한 실업과 비정규직의 문제에 대해 자본과 국가가 현재처럼 그 어떤 개선의 조짐을 보이지 않는다면, 노동계급의 경제적 양보가 자본의 양보보다 수월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절대 노동운동의 새로운 출구 전략으로 유용하지 못하다. ‘경제적 양보’로 표현되는 연대는 노동계급 내부의 정치적 동의를 끌어내기 힘들고, 경제적 양보가 가져올 효과가 불명확하기 때문이다.
사회연대를 통해 계급연대가 형성될 것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예상일뿐이다. 사회임금으로 보다 나은 소득보전을 받은 노동자들은 여전히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많은 시간 일을 할 수밖에 없다. 물론 보다 향상된 사회임금으로 그들의 가계소득은 다소 향상될 수 있으나 삶의 질을 변화시킬 수준만큼은 되지 못한다. 이들을 정치적으로 세력화하거나 노동환경을 변화시키는 것은 사회임금으로 얻게 되는 결과와는 전혀 다른 메커니즘을 가지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것이 미래소득인 연금제도라면 현재를 변화시킬 정치세력화로 연결되기 힘들다. 또한 사회임금이 향상되었다고 계급 간 연대가 향상되었다는 증거는 서구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이것은 사민주의자들의 주장이었지 실제 현실에서 사회임금 확대를 통한 노동계급의 정치가 비례적으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노동자의 시장임금 재분배를 통한 사회임금 증액은 결국 총노동비용에 대한 계급 내적 재분배라는 한계와 이렇게 향상된 사회임금이 역으로 시장임금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도 고려되어야 한다.
신자유주의이후 사회복지 개혁은 시민과 노동자의 책임강화로 수렴되어져 왔다. 이에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좌파세력들은 오랫동안 개인의 책임강화로 전환되는 사회정책에 대해 반대해 왔다. 그런데 사회연대전략은 다른 이름의 노동책임 강화론이 될 수 있다. 이것이 가장 근본적인 태생의 비밀이자 계급연대로 가기 힘든 요소가 된다.
노동자들의 투쟁을 통해 자본과 국가에게 임금 및 사회적 비용의 책임을 부과하는 것이 왜 실현하기 어려운 것이라고만 여겨지는 것일까? 예를 들면 현재 노동과 자본이 5:5로 분담하고 있는 사회보험요율을 5:6과 같은 방식으로, 자본의 비율만 총액 대비 10%만 증가시켜 이 재원을 사각지대의 사회보험료로 활용하는 방안은 비현실적인가?
이것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이제까지 노동운동이 이와 같은 혁명적 성격을 담지한 사회정책 투쟁에 적극적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좌파진영 역시 이와 같은 투쟁을 중심의 과제로 수용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역으로 노조가 임금투쟁이나 고용안정을 위해 파업하지만 연금보장성 강화를 위해서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비판이 가능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비판 오히려 임금, 고용, 그리고 복지의 문제를 분리시키는데 일조하였고 각각의 투쟁 과제를 선후의 문제나 선택의 문제로 개별화시켰다. 임금 및 고용투쟁의 중요성은 신자유주의 전환이후 더욱 부각되었다. 그러나 임금이나 고용을 위한 투쟁은 매우 이기적인 해당 사업장의 노동자만을 위한 투쟁으로 폄하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노동자 스스로 그리고 노동자들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분리된 임금, 고용, 복지의 연관성을 노동자계급 스스로가 찾아갈 수 있는 전략이 요청된다.
노동현장과 직결되어 있는 노동조건 및 임금의 문제는 명료하게 계급문제로 인식하지만 작업장을 벗어난 문제와 당장의 경제적 이해관계와 벗어나는 문제에 대해서 계급적으로 이해하는 시각이 필요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산별운동이 진행되어 왔으나 아직은 넘어야할 산이 더 많아 보인다. 그 넘어야 할 산마다 계급적 연대를 강화할 수 있는 관점에서 사회정책이 제출되어져야 한다.
사회연대가 정치적 힘을 발휘하기 위한 전제조건은 계급연대로부터 출발한다. 노동운동이 발전하지 않은 곳에서 사회권은 발전되기 어렵거나 매우 형식적인 수준에서 머문다. 노동이 자본과 국가에 대항하지 않고 먼저 타협한 사회복지제도로는 보편적인 인민의 삶의 질 향상은 기대하기 힘들다. 그러므로 노동자의 사회복지투쟁은 계급연대를 도모하는 동시에 자본주의 메커니즘을 반대하는 전략이 되어야 한다.
 

제갈현숙(사회공공연구소 연구위원, 한신대 사회복지학과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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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논리와 너무나 닮은 ‘사회연대노총론’, 실현가능성도 글쎄?


민주노총의 지도부의 혁신 선언, 사회연대노총론

임성규 민주노총 신임 지도부가 민주노총 혁신을 위한 운동방향을 제출했다. 이른바 “사회적 약자 곁으로 다가가 자세를 낮추고, 사회연대노조운동으로 거듭나겠다”는 것이다. 사회연대노총론은 언뜻 보면 올바른 내용을 담은 듯하다. 민주노총이 정규직 중심주의에 벗어나 전체 노동자민중의 이해와 요구를 위해 선도적으로 투쟁하는 조직으로 서나가겠다는 선언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꼼꼼히 들여다보면 문제가 심각하다.

사회연대노총론, “정규직=귀족 노동자”론의 노동자 버전
사회연대노총론은 정규직 중심의 민주노총 조합원은 ‘사회적 약자’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민주노총은 노동자계급 내의 단결(통일)과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새로운 운동노선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정규직 조합원은 비정규조합원/미조직 노동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자는 아니다. 그러나 정규직을 포함해 한국사회의 모든 노동자는 사회적 약자다. 상시적인 구조조정 압력에 시달리고, 정권의 심기를 거스르는 집회만 해도 탄압받고 구속되는 이 땅의 노동자는 모두 사회적 약자다. 정규직의 상대적 고용안정성과 고임금(?)이 근거라면? 그러나 이 알량한 상대적 안정성조차 현 공황 국면에서 정권과 자본의 공세로 위협받고 공격받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사회연대노총론의 이런 주장은 “정규직=귀족 노동자”라는 정권의 주장과 과연 무엇이 다른가?

사회연대의 실체, “정규직 밥 몇 술 더는 것”
임성규 위원장은 ‘정규직이 밥 몇 술 덜어야 민주노총에 희망 생긴다’고 한다. 또 ‘기업의 직접지불 부담을 줄여주는 것, 즉 노동자들이 직접임금 요구를 줄이거나 적게 요구하는’ 사회임금노선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정규직이 양보하는 것’이 정규/비정규연대의 핵심이고, 양보교섭이나 임금인상 자제가 사회임금(=사회복지책)을 확대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규직이 양보하면 비정규 문제가 해결된다는 발상은 정규/비정규라는 노동자계급 내의 분할을 노동자에게 떠넘기는 자본의 논리와 다를 바 없다. 또 정규직 양보를 통해 비정규문제 해결한다는 것이나 임금인상 투쟁 자제를 통해 사회임금을 확보할 수 있다는 발상은 순진하기 이를 데 없다.
민주노총이 ‘자본과 정권이 책임지고 모든 노동자민중의 기본생활을 보장하라’며 총력을 다 해 싸워도 자본과 정권의 공세를 막을 수 있을까 말까한 정세에서 ‘민주노총이 기득권을 버렸어요. 그러니 정부와 자본도 한 발 양보하세요’라는 구걸이 먹힐 것이라 생각하는 것 자체가 너무도 비현실적이라는 것이다.

즉각 폐기되어야 할 사회연대노총론
이미 2007년 좌초된 사회연대전략의 확대개정판인 사회연대노총론은 즉각 폐기되어야 한다. 지금 민주노총이 해야 할 역할은 (민주노총이 강조하는)사회적 약자들의 투쟁인 용산철거민 학살투쟁, 박종태열사투쟁, 쌍용차투쟁을 자신의 투쟁과제로 받아안아 이 투쟁들을 반자본/반이명박투쟁전선으로 모아내고. 이 투쟁의 중심에 서는 것이다. 그럴 때만이 전체노동자의 대표체로서, 노동자민중연대투쟁의 선도체로서 민주노총은 혁신될 수 있다. 노동운동이 자본의 논리에 포획되는 한, 노동자계급의 연대를 노동자 내부의 파이나누기로 접근하는 한, 노동운동의 미래는 암담할 뿐이다.    
장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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