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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0/15
    [일상의 삶을 바꾸는 정치] 삶, 정치, 문화의 당연한 만남을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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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삶을 바꾸는 정치] 삶, 정치, 문화의 당연한 만남을 희망한다

문화는 우리의 삶
습관대로 지하도 왼편으로 걷다보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맞은편으로 걸어온다. “아! 우측통행으로 바뀌었지” 마침 안내 방송이 흘러나온다. 안전하고 효율적인 ‘보행문화’를 위해 우축통행을 하자는 계도 방송이다. 그렇지! 보행도 문화인 것을. 문화라고 하면 보통 미술, 음악, 공연 등등을 생각하지만 이런 것은 문화를 상징화하고, 극대화하는 표현양식일 뿐 문화를 아우를 수는 없다.
문화는 삶의 (집단적 혹은 개별적) 방식이며, 표현이다. 때문에 관광문화, 노사문화, 음식문화, 음주문화, 정치문화, 운전문화, 주거문화, 사교문화 등등 우리의 삶의 곳곳에 문화라는 단어를 갖다 붙여도 어색하지 않다. 문화는 먼 거리에는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 우리 삶 자체다. 그래서 “문화적이다”라는 표현은 엄밀히 따지자면 그릇 된 표현이다. 삶 자체가 문화인데 무엇이 문화적이고, 비문화적이란 말인가? “문화적이다”란 표현이 기실 뜻하는 바는 “문화에 깊이가 있다”거나, “해당 문화가 진실하고 진지하다”라는 정도일 것이다.
만약 자신과 다른 문화에 대해 “문화적이지 않다”라고 판단한다면 이야 말로 반문화적이인 발상이다. 마치 근대 서양인이 동양인의 삶을 그렇게 폄하했던 것처럼 말이다. 어떠한 문화가 형성되기에는 그만한 환경과 역사가 있는 것이기에 무엇이 옳고, 그르고, 높고 낮음을 경솔하게 판단할 수 없다.
그러나 모든 문화는 존중되어야 한다는 명제가 문화 정체를 용인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지양과 지향할 문화를 선별하는 것은 현재의 문화를 존중하는 것과 구별되어야 한다. 문화의 변화에는 분명 선호와 갈등 그리고 이해 관계자들 간의 정치적 대립을 수반한다. 무엇이 옳은 문화라는 할 수 없지만, 무엇이 누군가에게 필요한 문화라고는 할 수는 있다.

문화적이다?
그렇다면 어떤 문화가 문화의 깊이가 있고, 진지하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즉 통상 ‘문화적이다’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또한 어떻게 인간은 ‘문화적’일 수 있을까? 좁게 보자면 어떤 면에서는 문화적이라는 것은 해당 사회가 요구하는 명분과 이를 기초로 하는 충실한 사고 및 발전의 행동양식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가 속한 사회는 어떠한 사고 및 행동양식을 요구하고 지향하는 것일까?
우리 속한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이다. 체제는 사회성원의 욕망과 욕구를 규정하고 욕망과 욕구는 다시금 문화를 형성하고, 문화는 사회를 견고하게 하거나, 분열시키기도 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규범적 덕목은 표면적으로 교육받은 바에 의하면 ‘개인의 자유, 공정한 경쟁, 약자에 대한 동정’이다. 이러한 규범적 덕목은 ‘문화적이다’의 기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명시적 규범조차 현실적으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은 문화적 혼란을 늘 겪게 된다. 이러한 기준에 의하면 삶은 전혀 문화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삶은 항상 명시적 가치에 대한 배반의 연속이다. 대중은 ‘문화적’에 지쳐가고, ‘문화적’이란 단어는 결국 고상함의 다른 표현으로 전락한다.
생산수단의 배타적 사적 소유 및 상품노동을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개인의 자유는 자본주의를 위협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인정되고, 이를 거부할 경우 힘에 의해서 개인의 자유는 언제나 위협받는다. 공정한 경쟁은 이미 독점과 빈부에 의해서 제약되고, 약자에 대한 동정은 약자가 발호하지 않을 정도에서 작동한다. 자본주의 체제는 명분상의 규범도 지킬 수 없는 근본적 취약성과 모순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대중에게 필요한 문화라고 인정해야 하는 것일까?
자본주의의 규범은 실상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이다. 이것이 자본주의 문화의 근간이다. 따라서 대중은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규범을 자신의 삶으로 구현하고 있음에도, 앞서 언급한 사기에 가까운 규범에 조응해야 하는 모순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지배 권력은 한 치도 실현하지 않는 거짓 규범으로 인해 더욱 더 회의를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 발전은 양육강식과 적자생존의 법칙에 도전 하는 것이었고, 이러한 경험과 철학은 삶의 밑바닥에서 자본주의 문화를 기꺼워 할 수 없게 하고, 실제 삶을 버티기도 힘들게 한다.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상황은 인간의 소외를 낳고, 종종 사기성 종말론과 같은 문화적 병리 현상을 만든다. 결국 대중은 현재 사회에서 요구하는 ‘문화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헛갈리고, ‘문화적’이라는 것 자체가 버겁다.

삶, 문화, 정치는 모든 이의 일상이다
문제는 대중에게 필요한 문화는 무엇이고, 그에 기인한 ‘문화적’ 삶이 무엇인가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문화는 총체적인 삶이다. ‘문화적’ 삶은 삶의 깊이 있게 바라보고, 진솔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욕망과 욕구를 정당하게 하고, 삶의 질과 양을 풍요롭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주의가 진정 바라는 문화에 대해 저항하는 것은 어찌 보면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바라는 양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삶의 양식에 대해, ‘이건 아니다’고 주장하고 행동하는 것이 진정 대중의 문화적인 삶의 시작인 것이다. 생산과 일상의 모든 공간에서 자본주의적인 지향을 극복하고 조직하는 것은 대안문화의 시작이요, 정치다. 정치는 정당하다고 판단되는 생각을 조직하여 행하는 것으로 특정한 직업군만이 행사하는 것이 아니다. 문화적이기 위해서는 더욱 더 정치적 이여야 하고, 더욱 더 정치적 이여야  삶이 풍요로워 지는 것이다. 일상은 모든 것이 정치이고, 문화이고, 삶이다.
지배 권력은 언제나 대중으로 하여금 문화와 정치와 삶을 분리시키려 하였다. 인간의 삶은 총체적이고 다면적인 것인데 어떻게 이것이 분리될 수 있단 말인가? 정작 지배 권력은 항상 문화와 정치 그리고 삶을 종합적으로 사고하고 지배의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예컨대 70년대 새마을 운동, 7~80년대의 군사독재, 90년대의 신자유주의 재편은 국한된 경제적 또는 정치적 상황이 아니라 대중의 정치, 문화. 삶에 대한 재편이었다.

삶과 문화, 정치가 합일되기를
삶의 태도를 변화시키지 않고는 문화의 변화도 없는 것이고, 문화가 변화지 않고는 삶 역시 변화 할 수 없다. 또한 문화와 삶이 정치적이지 않고는 문화와 삶은 정체와 지배권력에 의해 조작되고 유린된다. 지배권력은 일상을 통해 문화와 정치와 삶을 통제하고 지배한다.
어제까지 왼쪽으로 통행하다 오늘부터 오른쪽으로 통행하는 것이 과연 문화시민이 되는 것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했고, 그러하듯이 삶의 욕망을 억누르고 자본주의 사회가 요구하는 무한 경쟁에 기꺼이 동참하는 것이 문화시민인가? 경쟁에서 뒤쳐질까 노심초사하는 것이 타당한 문화현상인가? 국회의 격투를 시청하면서 폭력을 나무라며 정치 혐오를 키우는 것이 문화시민의 태도인가? 아이의 안전을 걱정하여 우리 동네 골목길에도 CCTV를 달자고 하는 것이 선진문화인가? 이게 대중이 원하는 삶인가?
삶과 정치와 문화가 총체적인 인간적 삶으로 합일되기를 희망한다. 문화가 우리의 일상임을 기꺼이 하기를 희망한다. 정치가 문화이고 삶이라는 것이 승인되기를 희망한다. 그래야 변화하고 그래야 새로운 세상이 가능하다.
 
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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