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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11/30
    잃어버린 편지, 잊혀져갈 기억
    무화과
  2. 2005/11/28
    저는 약하고 부족한 ‘인간’입니다. (병역거부소견서)(2)
    무화과
  3. 2005/11/26
    무화과
  4. 2005/11/25
    대한민국의 국시는 국익(1)
    무화과
  5. 2005/11/23
    용서받지못한자(스포일러있음)(2)
    무화과
  6. 2005/11/13
    업보
    무화과
  7. 2005/11/13
    집회에 가기 싫은 이유(4)
    무화과
  8. 2005/11/08
    11월
    무화과
  9. 2005/11/05
    사이
    무화과
  10. 2005/11/02
    즐겁지 아니한 기다림
    무화과

잃어버린 편지, 잊혀져갈 기억

그동안의 편지들을 정리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내게 가장 소중한 편지 하나가 없어진걸.

지난달엔가 그 편지를 읽었었는데

그리고 어디다 두었는지 모르겠다.

있을만한 곳을 찾아봤지만 나오지는 않는다.

 

어쩌면 청소하는 도중에 종이 쓰레기 틈에 버려졌을지도 모른다...모른다.. 모른다.

 

아...

이렇게 예전의 기억들은 닳고 애달픈 모습으로 잊혀져 가는구나

편지가 사라지듯이

편지를 통해 기억되었던 사람들과 사람들과 추억들도

아마 편지가 사라졌듯이

어느순간엔가 잊혀져 있을 것이고

난 잊혀진 기억이 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관계 속에서

새로운 기억들을 만들고 그 새로운것들도 언젠가는 잊혀져 갈것이다.

 

슬픈 기억들...

 

편지를 찾게되었으면 좋겠다.

내 마음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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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약하고 부족한 ‘인간’입니다. (병역거부소견서)

 

저는 약하고 부족한 ‘인간’입니다. 


 

 그러니까 평화가 나에게 왔습니다. 아주 조용조용하게. 아주 사뿐사뿐하게. 그것은 겨울날 얼굴을 에는 찬바람처럼 무서운 표정으로 빠르게 다가오지도 않았고, 한 여름 푹푹찌는 더위 속에 쏟아져 내리는 소나기처럼 갑작스레 오지도 않았습니다. 평화는 한 겨울 이겨낸 새싹이 돋아나듯이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시간으로 나에게 다가왔습니다. 평화는 빨갛게 봉숭아물 든 손톱이 자라나 붉은 반달을 이루듯, 아주 익숙한 속도로 나와 만났습니다. 내가 평화는 만나는 과정이 바로 ‘평화’ 였습니다.


 평화를 알게 되고 병역거부를 결심한 것이 아니라, 병역거부를 결심하면서부터 평화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병역거부는 저에게 있어서 어떤 커다란 사건이라기보다는 일상적인 삶의 방식입니다. 저마다 삶에서 중요시하는 가치가 다르고 그 가치를 지켜가는 방식이 다를 것입니다. 저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물음에 답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저의 대답은 항상 정리된 논리라기보다는 현재를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미래에 무엇이 되느냐는 그것이 추구해야할 대상이 아니고, 현재의 나의 삶을 가꾸어 나가면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저의 신념은 미래의 모습을 그려나가기 위해 것이라기보다는 현재를 아름답게 만들어 가기 위한 것입니다. 제 삶의 중요한 가치들을 바로 지금 이 곳에서 ‘살아가는 것’ 그 자체로 가꾸어가고 증명하는 것이 바로 저의 병역거부입니다.


 물론 저에게 있어서 이런 의미를 가지는 병역거부지만, 저의 병역거부가 사회와 만났을 때, 더 많은 의미들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의미는 마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꽃이 되는 것처럼, 우리가 의미를 부여했을 때, 이 세상에 다가서는 몸부림이 될 것입니다. 저는 이 세상과 사람들이 저의 양심과 삶의 방식을 존중해주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저의 병역거부를 특별한 것으로 기억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평화의 신념들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논리정연한 이론으로 기억되는 것보다는 사람들의 몸과 삶의 태도 속에 습관으로 각인되어야 진정한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병역거부를 통해서 사람들이 가졌으면 하는 삶의 태도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강하다고 착각을 하고 살아갑니다. 자신이 강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강함을 항상 과시하고 증명해야 합니다. 그것은 때로는 자신보다 약한 존재를 보호해주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조차도 배려는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강한 자가 되기 위해서 다른 이를 약한 자로 만들어야 하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온갖 폭력들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는 단순한 인간관계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와 개인, 국가와 국가, 그리고 인간이 만드는 모든 형태의 공동체에 해당하는 문제입니다. 인간이 형성한 가장 거대한 조직인 국가가 자신의 강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강한 군대를 과시하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속성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가장 거대한 만큼, 가장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국가가 합법적인 폭력의 권한을 군대에 부여함으로써 인류의 많은 비극들은 발생했습니다. 스스로 강하다고 믿는 오만함을 계속 유지시키기 위해서 강하지 않은 수많은 인류는 희생당해오고 있습니다.


 저는 병역거부는 우리 인간이 약하고 미흡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지배자가 아니라 구성원일 따름입니다. 우리는 파괴의 신이 아니라 생명과 창조의 질서 속에서 살아가는 구성원일 뿐입니다. 우리는 약하고 미흡한 존재이기 때문에 서로를 억누를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서로의 약함을 서로 보완해주기 위해서 함께 모여서 서로를 보듬어 안아야 합니다. 강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면 강함을 증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애써 남을 위협하거나 과시하지 않아도 됩니다. 오히려 그런 곳에 들어갈 힘을 돌려 서로의부족한 점을 메울 수 있을 것입니다.


 부족하기에, 저는 저의 삶이 다른 생명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의 삶은 물론 제 스스로 일궈온 것이지만, 제가 만나온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저의 보잘것없는 양심이라는 것이 형성될 수 있었습니다. 부모님과 여동생의 삶이 저의 삶과 완벽하게 분리되어있다면 지금과 같은 삶을 살 수 없을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저는 이 지구생명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의 피와 살로부터 내가 움직일 수 있는 에너지를 얻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희생을 전제로 살아온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저 또한 다른 생명들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고, 제 삶을 위한 희생을 최대한 줄이는 것입니다.


 제가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것만을 요구하고 제가 생존하는데 꼭 필요한 것이 아닌 최대한의 것을 다시 돌려주는 것입니다. 이미 많은 시간이 지났고, 너무 많은 것을 받았으며, 앞으로 갚아야 할 것들에 비해 인생은 짧게만 느껴집니다. 낭비할 시간도 없는 마당에 제 것을 내놓기는커녕 내가 살기위해 남을 희생시킬 수는 없는 일입니다. 군대라는 것은 제가 살기위해서 남을 죽이는 곳입니다. 저는 제 인생의 소중한 시간들을 그 곳에 할애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군대에 가는 것은 갚아야 할 빚은 늘어나고, 갚을 시간은 줄어드는 것입니다. 아니 그보다 무서운 것은, 내 마음 속에 겸손한 보은의 감정대신에 뻔뻔한 자기 합리화의 배은망덕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병역거부는 저의 삶을 지켜가는 최소한의 방어이자, 사회와 소통하며 평화를 퍼뜨릴 수 있는 최대한의 실천입니다. 저는 입영영장을 받고 비로소 병역거부자가 된 것이 아니라, 제 부족함을 깨닫고 사람들과 부족함을 나누어 평화를 만들면서 이미 병역거부자가 되었고, 또 출소한 이후에도 계속 병역거부자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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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잔의 술병의 알코올이

내몸에 흡수되면서

나른한 기분과 함께

다시 떠올릴 수 있는 옛 상처의 기억들

그래도 가지말라고 가지말라고

내가 붙잡았던 기억들 속에서

문득문득 떠오르는 사람들, 얼굴들

 

취한 밤 꿈속에서 만나고 싶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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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국시는 국익

한 때 대한민국의 국시가 반공이었다고 한다.

그런 암울한 세상에서 아직 태어나지 않았음을

부모님께 감사할 따름이다.

그렇다면 21세기 대한민국의 국시는 무엇일까?

아마도 '국익'이 아닐까 싶다.

 

대체 이 놈의 '국익'앞에서는 모든것의 판단 기준은 하나로 통일된다.

국익에 부합하는 것은 선이고 국익을 헤치는 것은 악이다.

순수한 과학영역의 연구도(이런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국제법을 어겨가며 벌이는 전쟁도

운동선수 개개인의 영달을 위한 플레이도

모든 가치는 국익의 잣대로 평가되기 마련이다.

 

그곳에서는 언론은 국익을 위해서는 때로는 진실을 외면해야하고

국익을 위해서는 잘못된 전쟁인줄 알면서도 참여해야 한다.

그곳에서는 국가의 이익보다 앞서는 가치는 있을 수 없다.

민주주의도, 인권도, 진실도 국익을 고려해야만 한다.

 

대체 국가의 이익은 무엇인가?

대한민국의 이익이 나의 이익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누군가가 명확히 설명해주면 좋겠다.

이라크파병으로 내가 어떤 이익을 본건지, 황우석의 연구성과로 내가 어떤 이익을 본건지.

그나마 한국 사람이 스포츠경기에서 잘하면 잘 아는 얼굴이니 반갑기는 하더라만...

 

국가의 이익이 종교처럼 번지는 이세상에 한마디만 해주고 싶다.

우리는 국민이기 이전에 인간이고, 국가의 이익에 대한 고려보다는 지구공동체의 이익을

고려해야한다고. '나'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보다, 그리고 그 어떤 나라보다 소중하고 고귀한 존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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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받지못한자(스포일러있음)

경험해보지 못한, 그러나 너무 익숙한 풍경

 

난 군대를 직접적으로 경험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또한 내 주변에도 군대를 경험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게다가 군대를

경험한 사람들조차도 군대에 대한 비판적인 의식이 대부분이니

사회속의 나의 인간관계에서 난 군대를 경험하지 못했다.

하지만 영화는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었고, 난 전혀 어색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순간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어색하지 않은 이유.

그것은 이미 내가 살고 있는 공간도 군대와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군대보다 물리적 폭력은 덜 할 수 있고, 그 외의 여러 문제점들도

군대보다는 덜 하겠지만 말이다. 더더욱 무서운 것은 사회는 군대처럼

무식하게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도 훨씬 더 효과적으로 군대적인 시스템

속에서 우리가 무감각하게 살아가게 만든다는데 있다.

이미 무감각하게 우리에게 습득되어있는 삶의 방식과 모양새들이

군대와 관련없는 그 누군가도 군대의 모습이 낯설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의 삶의 관계도 그랬다. 신병을 가지고 장난치는 고참들

그리고 그 고참들보다는 낮은 계급이지만 이른바 짬밥좀 먹은 중간고참들.

예비역 선배들이 새내기하나를 가지고 장난치는 모습과 신병하나 가지고

고참들이 "누가 더 잘생겼냐"며 장난치는 모습은 군대와 대학이

거울처럼 서로를 확인하는 슬픈 장면이다.

그리고 나는 아마도 중간정도의 짬밥을 먹은 학번으로 소극적인 비판자이자

가해자로서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때로는 선배들에게 편승하고

때로는 선배들을 비판하면서... 

 

이제 군대를 거부하는 평화운동을 하고 있지만,

군대도 다녀오지 않은 나에게도 분명 군대의 모습은 새겨져 있는 것이다.

너무도 익숙한 군대의 모습은 예비역들이 술자리에서 군대얘기를 하도 많이해서

만은 아닌 것이다.

 

참을수 없는 모욕감, 그리고 인정할 수 없는 나의 인내심과 무너지는 인격

 

어리버리한 '지훈'을 가지고 놀면서 지훈의 성기를 만지는 고참.

'나에게 반말을 해대면서 내 성기를 만지려는 고참 앞에서는, 헌법도 군법도

유엔의 인권선언서도 사문화되고 만다'는 책의 한구절이 비로소 영화의 한 장면을

통해서 절실한 설득력을 가지게 된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는 병장이

편지를 빼앗가 사람들 앞에서 읽어내려가며 비아냥거리는 장면에서 참을 수 없는

모욕감을 주인공 승영과 공유했다. 하지만 어쩌면, 정말 외람된 말일지로 모르겠지만

그런 모욕감은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모욕감이 견딜만한 것이어서가 아니라

그보다 견딜 수 없는 것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군대에 적응하지 못하던 승영이 서서히 그 질서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적응시켜

가는 모습. 스스로 인정할 수 없는 것에 굴복하고 순응하고, 적극적 가담자가 되어

가는 것만큼은 그 어떤 육체적 정신적 모욕감보다 힘들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참을 수 없는 것들을 참아내는 자신의 인내심이 수치러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결국 자신이 그 질서의 적극적 행위자가 되었을 때, 과연 그 인격이 입은 상처와

남들에게 입힌 상처는 누가 치유할 수 있을까...

 

피해자가 가해자로, 폭력이 재생산되는 구조의 무서움

 

승영은 군대의 폭력적인 질서에 의해 상처받는 피해자였다. 사실 그러한 폭력의 구조 속에서

누구나 피해자 혹은 가해자가 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중간은 없다. 피해자로써 저항하지 않는 사람은, 그 사람이 적극적인 가해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스스로 피해받지 않기 때문에 저항의 필요성이 없는 사람이며, 가해자들을 폭력을 침묵으로서 방관하고 혹은 동조하는

다른 방식의 가해자일 뿐이다. 이 끔찍한 이분법은 비극의 시작일 뿐이다. 사람들은 스스로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구조의 문제를 눈감고 그 구조에 가담할 수 밖에 없다.

한 번 그 구조에 가담한 후에는 이왕 가담한 바에야 그 안에서 잘먹고 잘사는 것을 고민하게 되고 그러던 한 순간 적극적 가해자가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 비극적인 구조를 더욱 피비린내 나게 하는 것은 '폭력'이다. 군대라는 공간은 그 거대한 구조의 폭력과 비겁한 개인들이 행사하는 물리적인 폭력이 동시에 재생산되는 곳이다. 승영은 결국 살아남기 위해서 폭력의 가해자가 될 수 밖에 없었고, 자신이 어쩔수 없었다고 누군가 말해주길 바란다.

이 영화가 군대이야기이자 한국사회의 단면이고 어쩌면 세상의 거울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이유이다. 폭력의 최대치인 국가폭력이 합법적으로 용인된 군대가 '폭력의 재생산'에 있어서 가장 상징적인 존재라는 것은 지당하다. 하지만 너무도 흡사하게 폭력의 재생산이 우리사회에서 기능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있다.

가정폭력의 피해자가 폭력의 가해자인 아버지를 죽이는 세상, 이스라엘의 분리장벽에 맞선 팔레스타인의 자살테러(용어가 맘에 들진 않지만), 김일병의 총기난사사건...

거대한 폭력의 구조에서 한 개인은 너무 미약하다...

 

아마도 병역거부는, 그리고 세상의 너무 당연한 것들을 자신의 신념으로 거부하는 일은

미약한 개인이 거대한 폭력의 구조에 맞서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행동이자 최소한의 방어라고 생각한다. 거대한 폭력의 구조는 때로는 개인들의 신념과 인격을 무참히 뭉게버리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가 복무하지 않는 어떠한 권력과 구조도 완전할 수 없다는 것을...

더 많은 폭력을 거부하고 더 많은 비폭력행동이 늘어날 때, 폭력의 구조가 우리에게 강요한 모든것을 거부할 수 있을 때, 아마도 혁명은 가능할 것이다.

나약한 모든 개인들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그 어떠한 권력도 권위도, 심지어 신도 없다는 것이 내가 가지는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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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보

예전에 썼던 글들을 보면서 속으로 조용히 울고있다.

그 당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준 상처로 나조차도 아파하고 힘들어했던

기억들과 느낌들이 글을 읽고 있으니 다시 생각이 났다.

지금 좋은 사람들과 더불어 내 마음도 치유하고

그 글속에서 내가 상처를 준 사람들과도 잘지내고 있지만

아마도 그 아픈 기억은 내 평생동안 잊을 수 없는

깊은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남겼고

내 인생은 그로부터 그 때의 업보와 그때를 계기로 깨닫게 된

이전의 업보들을 갚아나가게 되었다.

아마도 앞으로도 계속 난 그 업보를 짊어지고 갈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상처가 더이상 남아있지 않게 되더라도

그 짐은 벗을 수 없을거 같다.

업보를 벗게 될 때는... 나의 사랑이 이루어질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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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회에 가기 싫은 이유

물론 집회가기 싫은 이유만 있는것은 아니다.

가고싶은 이유도 있고 가야하는 이유도 있다.

그래서 난 가는 집회도 있고 안가는 집회도 있다.

때문에 오늘 노동자대회에 다녀와서 적는 이 글은

오늘 느낀점들, 사실은 항상 느낀점을 적는 것이지만

이 글에 적지 않는 이유들로 인해 결국에는

집회에 참여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의 집회는 꽤 규모가 큰 집회들이다.

 

대학교에 입학하고나서 호기심과 설레임과 놀라움으로

경험했던 몇번의 집회 참가이후 사실 거의 대부분의 집회는

가야하지만 그다지 가고 싶지 않았다.

 

첫번째로 집회는 너무 시끄럽다.

거대한 엠프소리는 나처럼 목이 약한 사람에게는

굉장한 부담이다. 집회에서는 애써 목청껏 구호를 외치거나

노래를 부르지 않아도 옆사람과 이야기만 해도 난 목이 아프다.

지하철 5호선보다 집회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더 힘들다.

물론 때와 사안에 따라서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목소리를

내야할 필요도 있다. 하지만 거대한 엠프소리가 때와 사안에

따라서 준비되는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혹 그럴 필요가 있는

집회라 할지라도 엠프 소리 조금 덜 크다고 해서 집중도가 떨어지거나

집회에 모인사람들의 힘이 덜 모이는 것은 아닐텐데.

 

두번째로 아무곳에서나 피워대는 담배연기와

아무곳에나 버려지는 담배꽁초

사실 운동권만큼 비흡연자들을 배려하고 생각하지 않는 집단은 드물다.

하다못해 프로야구장에 가더라도 하늘이 훤히 보이는 공간이라도

공적인 장소는 금연구역으로 정해져있다. 물론 그런 법적 규제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쨋든 집회장에서는 평소에 길을 걸을때에

비해 담배연기를 맡게되는 가능성이 엄청 높다.

비흡연자들은 금연석과 흡연석이 나누어진 피씨방보다 집회장에서

보다 많은 원치않는 간접흡연에 노출된다. 그리고 아무렇게나 버려진

담배꽁초는 때로는 내 바지의 엉덩이를 무참히 공격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재미없다.

이 이유때문에 집회의 참석은 해야할 일이 되고 하고싶은 일과는 점점 멀어진다.

매번 똑같은 아저씨들이 똑같은 말투로 똑같은 말을 하기 때문에 정말이지

재미가 없다. 오히려 규모가 작고 확실하고 구체적인 목표가 있는 집회는

즐거운 분위기는 아닐 수 있어도, 집회에 집중할 수 있지만.

거대한 규모의 집회는 정말이지 무언가 집회를 즐길수가 없다.

 

거대한 소리는 사라지고 작고 아기자기한 각각의 목소리들의 합주와

담배연기 사방에서 뿜어져나와 바람의 방향이 어느쪽을 향하더라도

간접흡연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은 언제쯤이면 겪지 않을 수 있을까.

재미없더라도 위의 두 가지 만이라도 해결된다면 정말이지

집회에 참여하는 부담감이 절반을 줄어들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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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지하철을 타고 집에 오는 길에 예전에 학생회선거때의 생각이 갑자기 났었는데

집에 돌아와 친구와 채팅을 하던중 지금이 바로 그 학생회 선거철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고, 갑자기 2002년의 기억들이 차분하게 밀려들어온다.

 

참 열심히였고, 열정적이었고, 행복한 시절이었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돌아가고 싶은 일순위.

하지만 돌아가고 싶은 이유는 좋았던 기억이 아니라

아쉬움의 기억이다. 물론 선거자체에 대한 아쉬움은 아니지만...

 

어쨋든 날이 그렇게 춥다고 느껴지지 않았는데,

어느덧 따뜻함에 신경을 써야하는(디자인에도 신경을 써야하는)

선본옷을 입고 다녔던 기억들.

지난 상처들이 아물어 가는 과정속에서 아마도 상처와 더불어

학생운동의 기억들은 차츰 닫혀진 상처속에서 희미해져 갔나보다.

 

23살의 그때와 이제 곧 27살이 되고 다시 세상과 만나는 28살

고등학교 졸업 후 그때까지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의 세월이 더 많아지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나는 너무 어렸고, 너무 가시투성이어서

나와 내 주변사람들이 가시에 다치기도 했었고,

지나친 확신으로 나를 아프게 하고 있었다.

 

갑자기 생각난 11월의 추억들이

길거리를 뒤덮은 은행잎들과 바람에 날리는 낙엽들 사이로

불쑥 불쑥 아픈 사랑의 기억을 한껏 후비고 지나간다.

오늘밤에도 잠은 오지만, 눕지를 못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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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

무엇과 무엇사이에서 적절한 긴장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사랑과 우정사이라는 노래가사도 있듯이 사랑과 우정의 사이에서

서로 상처받지 않고도 최선의 관계를 맺어가는 방법은 무엇일까?

 

비단 사랑과 우정사이뿐만이 아니다.

어쩌면 모든 인간관계가 이러한 끌고 당김의 긴장관계 속에서

이루어 진다고 할 수 있다.

누군가와 친해진다는 것은 무작정 가까워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브레이크 없는 관계의 밀착화는 때로는 사고가 나기 때문이다.

모두가 개인적으로 여유로울 수 있는 혼자만의 시공간을 확보하고 싶어하고

또 모두가 외로움을 견디기 위해 사람들과의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싶어한다.

이 둘은 항상 시소처럼 감정의 엇갈린 굴곡을 그리면서도

각 각의 한 쪽이 너무 쳐지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적절한 거리와 긴장을 유지하는 것은 결코 쉽지않다.

 

감옥을 앞둔 요새 내 모습이 이 적절한 거리를 찾아 방황하고 있는 형상이다.

때로는 수감기간을 홀로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생각도 깊게 해 볼수 있는

소중한 시간으로 생각하고 보다 정신적으로 독립적인 인간이 되어야겠다

다짐도 하면서 주위사람들을 대할때도 보다 나에 집중함으로써 사람들과의

관계에 신경쓰지 않기도 하지만,

또 한 편으로는 두려운 수감생활에서 사람들의 관심과 후원을 기대하며

사람들에게 의지하고 싶어하고, 이런 생각들이 그대로 행동에 반영이 되어

요새들어 괜히 사람들을 괴롭히기도 하고, 더 심하게 놀리기도 하고,

삐뚤어진 방법으로 나타나고 있기도 하다.

 

이 두 가지 마음의 적절한 거리와 긴장관계의 함수는 어떻게 형성이 되는지.

그 사이에는 무엇이 들어가야하는지.

생각하는 사이에 시간은 흐르고

사이에... 무엇이 필요한지...

사이를. 무엇으로 채워야 하는지.

생각보다 세상살기가 쉽지만은 않다.

고 생각하는 사이와 세상과 나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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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지 아니한 기다림

모든 기다림은 즐겁다.

오랫만에 만나게 되는 친구를 기다리는 시간은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만남을 준비하고 상상하며 여러가지 계획들을

세우고 다시 세우다 보면 대체 달력이나 시계따위가 눈에 들어올 일이 없다.

 

계획된 만남과 기다림보다 더 재미있는 것은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고 기다리는 것이다.

옛 애인을 길을 가다 우연히 만난다.

예정에 없던 일이라 우리는 그 만남을 기다리고 있지는 못했지만,

그리고 헤어져 돌아오는 발걸음과 아련한 마음은

우리가 그러한 만남을 은연중에 기다리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이렇듯 삶은 기다리는 재미로 이어진다.

오히려 '헤어짐'을 예약하는 '만남'보다

'만남'을 준비하는 '기다림'이 더 즐거운 법이다.

 

그런데 지금 난 그다지 즐겁지 아니한 것을 기다리고 있다.

어제 집에 들어오니 등기가 와있었다.

사람이 없어서 오늘 12시에서 2시사이에 다시 온다는 메모...

나에게 집으로 올 등기는 '입영영장'

 

처음받아보는 입영영장도 아니고,

갑작스레 날라온것은 더더욱 아니다.

또한 이미 병역거부를 하기로 마음먹은지도 오래,

여러 병역거부자들을 감옥에 보내면서

나름대로의 준비도 오랫동안 해왔다.

그리고 난 나의 병역거부가 그다지 슬픈일이거나

안타까운일이 아니라 기쁘고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 뜻대로 살아가는 일만큼 즐거운 것은 없고,

그럴 수 있는 사람만큼 축복받은 사람은 없다)

 

그런데도 기분이 나쁘다.

사무실에 일찍 나가려고 했는데 그걸 기다리느라고 못나간것도 싫고,

내 삶의 즐거움인 기다림이 이럴수도 있다는 것도 싫고

무엇보다도

 

국가가 나에게 강제적인 어떤 것을 강요하는 것이 마음에 안든다.

 

물론 국가라는 것이 내 삶에 강요하는 것이 징병뿐이겠냐만은

이렇게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강요를 기다리는 것이 어찌 즐겁겠는가.

 

그래도 난 즐겁게 살아갈거다.

어떠한 거대한 권력집단이 아무리 나에게 즐겁지 아니한 기다림을 강요하여도

난 나름대로 즐거운 기다림들을 상상하고 만끽하며 살거다.

 

친구들과의 만남을 기다리며,

눈과 목도리와 호빵(이미 나와버렸지만), 그리고 겨울을 기다리며,

옛 연인과의 우연한 만남을 기다리며,

그리고 앞으로의 새롭고 향긋한 만남들을 기다리며,

 

살다보면,

달력넘어가는 소리도 시계바늘 소리도,

무엇보다도 즐겁지 아니한 기다림따위는

신경쓸 겨를이 없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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