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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시와 노래...

77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9/12/23
    서울의 인사법(2)
    무화과
  2. 2009/12/15
    루시드폴 - '평범한 사람' 가사를 보면 용산이 떠오른다(8)
    무화과
  3. 2009/11/01
    상수리나무 아래
    무화과
  4. 2009/10/17
    연두에 울다
    무화과
  5. 2009/08/25
    기억상실
    무화과
  6. 2009/07/31
    내게 농사는(1)
    무화과
  7. 2009/04/27
    무화과
  8. 2009/04/26
    한 삽의 흙 -나희덕
    무화과
  9. 2009/02/12
    세상의 끝(2)
    무화과
  10. 2009/02/11
    요쉬카
    무화과

서울의 인사법

아침 7시 신도림역

소요산행 열차가 플랫폼에 멈춰선다

스르륵 문이 열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튀어 나오는 사람들, 사람들

 

근엄한 듯 지친 표정으로

한조각 웃음기도 없이 다정한 눈맞춤도 없이

우두두두두, 다다다다다, 또각또각

저마다 발자국 소리만이 지하철역을 외롭게 떠돈다

 

죽음을 직감하며 출병하는 군대마냥

 

--------

 

서울에 정나미가 뚝 떨어지게 된 것은 출근지하철을 타고 나서부터였다.

전쟁없는세상 활동할 때는 출근시간대에 지하철을 탈 일이 없어서 몰랐었다.

이토록 삭막하고 황량하고, 그러면서도 정신없이 빡빡한 풍경을

 

이 많은 사람들이 한마디 말도 없이 눈인사도 없이

오로지 발자국 소리만이 이들의 아침인사인 마냥 사방을 울린다.

 

이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리지 않고자 싱긋 웃어보기도 하지만 혼자 미친사람 같다.

 

내 어릴적 뛰놀던 골목과 소꿉친구들을 아직 기억하고 있다.

그때 그 도시도 분명 '서울'이라는 이름이었는데,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서울'은 지하철역의 무미건조한 발자국 인사로만 인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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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드폴 - '평범한 사람' 가사를 보면 용산이 떠오른다

오르고 또 올라가면
모두들 얘기하는 것처럼
정말 행복한 세상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나는 갈 곳이 없었네
그래서 오르고 또 올랐네
어둠을 죽이던 불빛
자꾸만 나를 오르게 했네

알다시피 나는 참 평범한 사람
조금만 더 살고 싶어 올라갔던 길
이제 나의 이름은 사라지지만
난 어차피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었으니
울고 있는 내 친구여
아직까지도 슬퍼하진 말아주게
어차피 우리는 사라진다
나는 너무나 평범한
평범하게 죽어간 사람
평범한 사람
 

-평범한 사람(루시드폴 4집)중에서

 

이 노래 가사를 처음 듣는 순간부터 나는 용산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조윤석이 용산을 생각하면서 만든 노래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갈 곳이 없었네/그래서 오르고 또 올랐네.'를 들으면서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쫓겨나 골리앗에 올랐을 철거민들을 떠올렸고

'조금만 더 살고 싶어 올라갔던 길/이제 나의 이름은 사라지지만'을 들으면서

그렇게 올라간 용산 남일당 옥상 망루에서 죽어간 다섯 분이 떠올랐다.

'평범하게 죽어간 사람'이라는 가사는 그래서 지독한 반어법으로 들린다.

세상에 불에 타 죽은, 그것도 저들의 주장대로라면 아들이 지른 불에 타 죽은 사람이

어떻게 평범하게 죽은 것일 수 있단 말인가. 평범하게 살아온 사람들이

일평생 남들보다 잘난 것도 못난 것도 없이 평범하게 살아갈 사람들이 맞이한

평범하지 않은 죽음에 대한 지독한 반어법이다.

 

아직 한 참 듣고 있는 중이지만

루시드 폴은 점점 약한 존재들에게 끌리는 것 같다.

뭐 나로서는 좋다. 이토록 아름다운 멜로디와 가사로

세상의 슬픔, 분노를 노래하는 가수가 있다는 게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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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수리나무 아래

상수리나무 아래                       -나희덕

 

 

누군가 맵찬 손으로

귀싸대기를 후려쳐주었으면 싶은

 

잘 마른 싸릿대를 꺾어

어깨를 내리쳐주었으면 싶은

 

가을날 오후

 

언덕의 상수리나무 아래

하염없이 서 있었다

 

저물녘 바람이 한바탕 지나며

잘 여문 상수리들을

머리에, 얼굴에, 어깨에, 발등에 퍼부어주었다

 

무슨 회초리처럼, 무슨 위로처럼

 

 

 

갑자기 날이 추워진다. 바람이 차가워진다. 차가워진 바람이 몸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다. 가슴이 휑하다. 허전하다. 갑자기 실감하게 된 어떤 감정처럼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대체로 이럴때 친구 만나서 술마시면 잠깐동안은 괜찮아 진다. 잠깐동안은. 결국 지나갈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그래도 이 허전함, 휑한 기분이 내 몸에 머무는 동안이라도 함께 잘지내보려고 비오는 토요일 김치전도 해먹어보고 했지만 역부족이다.

 

시인의 마음과는 살짝 다르겠지만, 그래서 나도 누군가 맵찬 손으로 귀싸대기를 후려쳐주었으면 좋겠다. 그래봤자 잠깐동안 얼큰할 뿐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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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두에 울다

연두에 울다                     -나희덕

 

 

떨리는 손으로 풀죽은 김밥을

입에 쑤셔넣고 있는 동안에도

기차는 여름 들판을 내 눈에 밀어넣었다.

연둣빛 벼들이 눈동자를 찔렀다.

들판은 왜 저리도 푸른가.

아니다. 푸르다는 말은 적당치 않다.

초록은 동색이라지만

연두는 내게 좀 다른 종족으로 여겨진다.

거기엔 아직 고개 숙이지 않은

출렁거림, 또는 수런거림 같은 게 남아 있다.

저 순연한 벼포기들.

그런데 내 안은 왜 이리 어두운가.

나를 빛바래게 하려고 쏟아지는 저 햇빛도

결국 어두워지면 빛바랠 거라고 중얼거리며

김밥을 네 개째 삼키는 순간

갑자기 울음이 터져나왔다. 그것이 마치

감정이 몸에 돌기 위한 최소조건이라도 되는 듯.

눈에 즙처럼 괴는 연두.

그래, 저 빛에 나도 두고 온 게 있지.

기차는 여름 들판 사이도 오후를 달린다.

 

 

나희덕의 시집 <사라진 손바닥>을 산 거는 '풍장의 습관'이라는 시에 끌려서였다.

감옥에 갔을 때, 나희덕 시가 읽고 싶어서 엄마한테 보내달라고 했더니

아무리 찾아도 나희덕 시집이 없다고 했다.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아마 대추리에서 가방을 잃어버렸을 때, 그 가방안에 엠피3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시집 한 권이 있었는데, 그게 나희덕 시집이었나보다.

결국 출소하고 나서 <사라진 손바닥>을 다시 사게 되었다.

 

'연두에 울다'에 대한 소감을 듣게 되었다.

소감을 들으면서 시의 장면 장면들이 떠올랐다.

이 시를 처음 읽을 때는 느끼지 못한 감정이 솟구쳤다.

소감을 얘기해준 사람에게 공감한 걸까? 아니면 나도 이 시가 가슴에 다가올만큼 나이를 먹은걸까?

문득 나이먹는 것에 대해 생각해본다.

이제 더 이상 나는 수런거리는 연둣빛이 아니라는 걸 안다.

어쩌면 울창한 초록빛도 열정적인 붉은빛도 아닐거다.

그렇다고 강렬함이 마모되어 부드러워진 어떤 빛깔도 아니다.

나는 아직 연두이고 싶고 초록이고 싶고 붉디 붉은 빛깔이고 싶지만

또 그렇지 않더라도 크게 괘념치는 않는다.

갑자기 인생이 애매해진 기분이 든다.

 

시를 계속 읽어본다.

갑자기 기차를 타고 훌쩍 떠나고 싶은 생각이 든다.

김밥을 우적 우적 먹으며, 창 밖은 연두빛 계절은 아니지만,

시와의 '기차를 타고'를 듣고 있으면 더 좋겠다.

청량리역에서 탄 기차는 원주에서 나를 내려주고 아무일 없는 듯이 바퀴를 굴려간다.

나와 같은 생일을 가진 둘째 아기를 돌보고 있을 내 친구의 집을 찾아간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버린 그 친구는 나이먹는 것을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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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상실

기억상실 -오소영



내가 누구냐고, 나도 몰라
그런 게 어딨냐고, 이럴 수도 있지 뭐
왜 비틀거리냐고, 배가 너무 고파
왜 굶고 있냐고, 돈이 없으니까

아무리 걸어도 보이는 것이 없어
난 이렇게 배고프고 더러운데
쉴 곳이 필요해 어디로 가야할까
도대체 내가 있는 여기는
어딘거야 어딘거야 어딘거야 도대체 여긴
어딘거야 어딘거야 어딘거야 도대체 여긴

어디사냐고, 나도 몰라
그런 게 어딨냐고, 여기 있지 뭐
잘 곳은 있냐고, 물론 없지
어떻게 할꺼냐고, 될 대로 되라지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나는 것이 없어
난 이렇게 지치고 외로운데
머물 곳이 필요해 어디로 가야할까
도대체 내가 있는 여기는
어딘거야 어딘거야 어딘거야 도대체 여긴
어딘거야 어딘거야 어딘거야 도대체 여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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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우연히 만난 노래가, 그 가사가 하도 내 얘기 같아서 가슴에 와 박히는 경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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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농사는

내게 농사는                                                     박형진

 

 

양파를 캔다

한나절에 네고랑

캐고 나니 열두 시다

허리는 끊어지게 아프지만

점심 먹고 쉬기에는 이른 시간이라

한 고랑만 더 해 보기로

마음먹고 나아가는데

남은 반 고랑이 네 고랑보다 더 힘이 든다

 

이렇게는 하지 말자고

몸 아플때는 다짐했지만

농사일이란 항상

붙잡으면 암지나 반듯해져야만

손을 놓을 수 있는 포승,

숨이 다할 때까지 스스로

치달아 매는 올가미,

머릿속이 점점 하얘져서

밭둑에 와를르 무너져 내려야만

자유를, 얻는다

 

뼈에 박힌 가난한 버릇에서 비롯한

 

그러나 늘 마음은

중심에 던져 자그자글 녹아 버리거나

아주 멀리

오래떠나고 싶은......

 

 

변산에서 저녁먹고 쉬는시간에 읽을거리들을 뒤적이다가 발견한 시.

박형진 시인은 내가 변산에 머무는 동안에도 몇번 왔다 갔지만

부끄러워서 나대는 거 같아서 아는척은 안하고 먼 발치서 보기만 했다.

평생 농사일 하는 사람들도 밭일 할때는 힘들구나 하고 위안삼았던 시

 

망가진 기분이 좀처럼 풀리지 않는다.

 

노래듣기는 쬐금 눈치보이고 시나 찾아보고있는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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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루시드폴 새벽녘 내 시린 귀를 스치듯 그렇게 나에게로 날아왔던 그대 하지만 내 잦은 한숨소리 지친듯 나에게서 멀어질테니 난 단지 약했을뿐 널 멀리하려 했던건 아니었는데 난 아무래도 좋아 하지만 너무 멀리 가진마 어쩔 수 없다 해도 난 단지 약했을뿐 널 멀리하려 했던건 아니었는데 난 아무래도 좋아 하지만 너무 멀리 가진마 어쩔 수 없다 해도 난 단지 약했을뿐 널 멀리하려 했던건 아니었는데 난 아무래도 좋아 하지만 너무 멀리 가진마 어쩔 수 없다 해도 새라는 제목의 노래들을 좋아했다. 김지하의 시에 곡을 붙인, '저 청한 하늘 저 흰구름'으로 시작하는 옛날의 민중가요 '새'는 비록 노래로 바꾸면서 시어들을 싹뚝싹뚝 잘라내어 말이 잘 연결이 되지는 않지만, 그 섬뜻한 서러움을 잘 표현해 낸 가사들. 그리고 가사를 담백하게 읊어내는 낮은 목소리가 가슴에 오래도록 남았다. 고등학교 때는 전람회 2집에 있는 '새'를 많이 들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워크맨에 카세트 테이프로 노래를 듣던 시절, 전람회 2집 첫번째 곡이었던 '새'는 전람회가 가지는 특유의 고전적인 느낌의 무게감이 가장 잘 드러나 있었다. 너무 무겁지도 않지만, 통통튀지 않고 묵직하게 중심을 잡고 있는 그런 무게감. 마치 바퀴가 얇은 사이클이나 하이브리드 자전거를 타다가 정식 엠티비를 탈 때 느껴지는 무게 중심 같은 거. 하지만 그 무게감은 정 반대의 속도감과 두바퀴를 통해 만나는 것처럼, 전람회의 가볍지 않은 멜로디와 가사들이 새의 날개에 실려 훨훨 그렇지만 외로운 날개짓을 하는 느낌을 전해주는 곡이었다. 대학교 입학하고 나서 한 동안 이상은에 푹 빠져 있었다. 철거촌에서 밤에 규찰을 설 때도 분위기에 걸맞지 않게 이상은의 노래들을 읊조리곤 했다. 삼도천, 어기여디여라, 너무오래 등등... 그 중에서도 심하게 감정이입이 된 노래는 '새'였다. 시적인 비유들의 가사들에 푹 빠졌고, 무엇보다도 이 좁고 우스운 땅위에 내려온 새가 내 모습이라는 착각에 하루하루를 살았다. 어쩌면 나도 구름의 숲과, 노을의 냄새, 바다건너 피는 꽃의 이름을 알고 싶었는지도, 돈을 세는 사람들을 아무 의미 없이 바라볼 수 있는 날아오를 하늘이 있기를 바랬는지도 모르겠다. 오늘 갑자기 루시드 폴의 새가 가슴에 박혔다. '난 단지 약했을뿐 / 널 멀리하려 했던건 아니었는데' 가늘고 섬세하게 떨리는 루시드 폴의 목소리가 귀에서 떠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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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삽의 흙 -나희덕

한 삽의 흙 -나희덕 밭에 가서 한 삽 깊이 떠놓고 우두커니 앉아 있다 삽날에 발굴된 낯선 흙빛, 오래 묻혀 있던 돌멩이들이 깨어나고 놀라 흩어지는 벌레들과 사금파리와 마른 뿌리들로 이루어진 말의 지층 빛에 마악 깨어난 세계가 하늘을 향해 봉긋하게 엎드려 있다 묵정밭 같은 내 정수리를 누가 저렇게 한 삽 깊이 떠놓고 가버렸으면 그러면 처음 죄 지은 사람처럼 화들짝 놀란 가슴으로 엎드려 있을 텐데 물기 머금은 말들을 마구 토해낼 텐데 가슴에 오글거리던 벌레들 다 놓아줄 텐데 내 속의 사금파리에 내가 찔러 피 를릴 텐데 마른 뿌리에 새순을 돋게 할 수는 없어도 한 번도 만져보지 못한 말을 웅얼거릴 수 있을 텐데 오늘의 경작은 깊이 떠놓은 한 삽의 흙 속으로 들어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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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끝

"몇 날이 지났는지 모른다. 고층빌딩조차 도시에서 흔적을 감췄다. 아니, 그대로 남아있지만 우리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맑은 하늘을 기억하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처음과는 다르게 더 이상 사람들은 짜증을 부리지 않는다. 다만 우울증에 걸리지 않은 사람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았다." 아마도 지구의 종말에 대한 소설을 쓰게 된다면 이렇게 시작할 거 같다. 지구의 종말을 상상할 때면 나는 운석의 충돌이나 거대한 자연재해처럼 한순간에 사라져버릴 미래보다는, 어두침침하고 읍습한 안개가 세상을 뒤덮은 채로 지속되는 미래가 상상된다. 즉 종말은 단절보다는, 빠져나올 수 없는 심연같은거 혹은 끝나지 않는 악몽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며칠동안 서울 하늘은 뿌연 기운으로 앞이 내다보이지 않는다. 한강대교를 건너는데 바로 옆 여의도의 63빌딩이 희미하거나 때때로 보이지 않을 정도다. 언제부턴가 이런 날씨가 익숙해져만 간다. 두려운 것은 앞으로 서울의 하늘은 이렇게 고정되어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는 것이다. 만화같은 상상력일 수도 있겠지만, 그리 된다해도 그다지 놀라울것 같지 않다. 어쩌면 정말로 마지막으로 맑은 하늘을 본 것이 2009년 1월의 일이 될 수도 있다. 내가 느끼는 인간 세상의 종말. 사람들은 답답함 마음에 짜증 늘어가다가 짜증조차 내지 않을 것이다. 아니 모두가 짜증을 내고 살아가니가 익숙해질 따름이다. 그런 세상에서는 짜증을 내지 않는 사람들이 정신병자 취급을 받을 지도 모른다. 이 하늘을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이 헛된 망상이기를. 요새 기분이 견디기 힘들었던건 어쩌면 이 하늘을 바라보며 숨쉬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그래서 기분좀 바꿔 보려고 이장혁2집도 안듣고 있었는데, 서울 하늘을 볼 때 마다 이장혁 2집의 '그날'이 떠오른다. 물론 이 노래의 가사는 내가 생각하는 방식의 세상의 끝과는 살짝 다르지만, 아무튼 이 노래의 느낌이 지금 서울하늘과 너무 잘어울려 불안하다. 그날 지독히도 쓰디쓴 이 세상의 끝물 이미 쓰여진 대로 그렇게 알고 있어 지난 밤 꿈처럼 사라져갈 인간들의 시간 남아있을 동안만이라도 한 번 더 날 안아줘 한 번 더 날 안아줘 안녕이란 인사도 나눌 사이도 없이 도둑같이 오고 말 그날 알고 있어 정해진 것처럼 불타버릴 인간들의 흔적 할 수 있을 동안 만이라도 한 번 더 입맞춰 줘 한 번 더 입맞춰 줘 알고 있어 정해진 것처럼 불타버릴 인간들의 흔적 할 수 있을 동안 만이라도 한 번 더 날 안아줘 한 번 더 입맞춰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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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쉬카

렛미인을 보고 극장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이엘리가 너무 가슴에 와서 박혀버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휘루의 요쉬카를 듣게 되었다.

아니 휘루의 요쉬카는 그 이전에 들어봤지만

별다른 느낌을 남기지 못했었는데,

렛미인을 보고 나서 그 가사가 도통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다가와서 내목을 물어뜯은 아이가'로 시작하는

요쉬카를 들으면서 렛미인의 이엘리를 생각했다.

 

이엘리. 요쉬카(아마도 소녀일거라는 느낌을 지울수 없다).

이상하게도 그녀들에게서 거부할 수 없는 동질감을 느낀다.

나는 목구멍으로 액채상태의 피를 먹는 것은 아니지만

누군가의 피를 빨아먹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확실하니까.

 

그리고 그들의 고독이, 피냄새 나는 외로움이 낯설지 않다.

 

생각해보니 프란체스카 같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흡혈귀들은 항상 혼자인거 같다.

 

단단한 발톱을 세우고 있는 요쉬카처럼

나도 항상 가시돋힌 말들로 날을 세우고 두꺼운 방어벽 뒤에 숨어서

내가 상처받지 않기 위해 남에게 상처입히고 살고 있다.

 

호수에서 태어난 작은 흡혈귀 요쉬카에게

여긴 살아갈 만한 곳이 아니듯.

나에게도 그다지 살아갈 만한 세상은 아닌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서일까

하긴 돈있고 권력있는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그다지 살아갈만한 세상은 아닐듯 싶다.

 

요쉬카라는 이름도 너무 매혹적이다.

나 이름을 요쉬카로 확 바꿔 버릴까 심각하게 고민중이다.

 

 

 

요쉬카                   

 

다가와서
내목을 물어뜯은 아이가
내게 다가왔어 내게 다가와
내게 하는 말이
나무를 찾고 있다고
내가 태어난
나무를 찾고 있다고

단단한 발톱을 하고 다가온
내 이름은
요쉬카
어디에서 길을 잃고 헤메니

요쉬카-
여긴 네가 살 곳이 아니란다
호수에서 태어난 작은 흡혈귀
그 이름은 그 이름은
요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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