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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1/26
    [펌]김규항의 예수이야기
    자일리톨

[펌]김규항의 예수이야기

*출처:김규항씨블로그(gyuhang.net)

예수 이야기 1

예수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사람이다. 그리고 동시에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잘못 알려진 사람이기도 하다. 누구나 예수를 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예수가 누구인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건 무엇보다 예수와 (예수를 창시자로 하는 종교인) 기독교의 거리에서 나온다. 사실 예수는 새로운 종교를 만들려 한 적은 없다. 그가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과 ‘하느님의 뜻’을 놓고 사사건건 갈등을 빚고 그 때문에 죽임까지 당했지만, 바로 그 점에서 보듯 그의 활동은 ‘유대교 갱신운동’의 하나였다. 그는 새로운 종교를 만들려 한 게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종교를 허물어 다시 세우려 했다.

 

그러나 그의 뜻이 무엇이었든 그가 죽은 후 그를 창시자로 하는 종교인 기독교가 생겼다. 처음에 기독교는 예수가 그랬듯 하층계급 인민들을 위한 종교였고 그런 계급성에 걸맞게 가혹한 탄압도 받았지만 조금씩 성장해가면서 그 정체성을 잃어갔다. 기독교는 예수를 처형했던 로마의 국교가 되고부터 지배계급의 종교가 되어 세계를 점령해갔다. 점령은 예수가 죽은 지 2천년이 지난 지금도 진행 중이다. 이라크 침략전쟁에서 보듯, 인류가 겪는 가장 악랄한 사건들이 기독교의 이름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저질러진다.

 

한국에서 사정도 그리 나을 게 없다. 근래 몇몇 대형교회의 불거진 행태가 말썽을 빚고 있지만 그런 경향은 한국 교회의 일반적인 신앙관이기도 하다. 정말이지 한국엔 교회가 많다. 밤이면 온 세상이 붉은 네온 십자가들로 넘쳐 난다. 한국에 이렇게 교회가 많아진 건 박정희 군사 파시즘 이후의 일이다. 물론 그건 시간상의 우연한 일치가 아니다. 한국교회는 군사 파시즘의 홍위병이자 가장 충직한 선교사였으며 인민들의 사회의식을 배설하는 공간이었다.

 

“믿으면 받는다” 라는 한국 교회의 신앙관은 “하면 된다” 라는 군사 파시즘의 구호에 봉사했다. 한국 교회의 철저한 빨갱이 콤플렉스는 군사 파시즘의 존립 기반이던 반공주의에 봉사했다. 그리고 한국 교회는 관제 행사가 아니라면 여럿이 모이는 일조차 불편하던 시절, 인민들(특히 파시즘과 전근대적 가부장제의 이중적 억압에 시달리던 여성들)이 마음껏 소리치고 교제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이른바 ‘한국 교회의 놀라운 부흥사’는 그렇게 이루어졌다. 결국 한국 교회는 세계에서 가장 저급한 신앙관을 자랑하게 되었고 그 저급한 신앙관은 다시 가장 반동적인 사회의식으로 작동한다. 오늘 한국 인민들의 반동적인 사회의식을 생산하는 가장 결정적인 도구는 ‘수구신문’이 아니라 교회다. 오늘 한국에서 교회 문제는 더 이상 ‘종교 문제’가 아니다. 한국사회의 진지한 변화를 모색하는 사람에게 교회문제는 ‘운동과 별개의, 교회에 안 나가는 자식을 염려하는 어머니와의 문제’가 아니다. 교회 문제는 한국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다.

 

단지 ‘교회문제를 비판하는 것’으로는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런 비판은 결국 교회 체제의 내부에 기생하게 마련이다. 해결은 “성전을 허물고 다시 짓겠다”던 예수의 선언처럼 좀 더 근본적인 방식으로만 가능하다. 그건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그 질문만이 오늘 대개의 한국 교회가 교회가 아니라는 것, 교회를 빙자한 상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드러낼 수 있다.

(노동자의 힘 기관지 연재. 이 글은 예수전은 아닙니다.)

 
예수이야기 2

 

당연한 말이지만, “예수는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선 예수가 어떻게 살았는가를 알아야 한다. 이건 예수를 종교적으로 받아들이는가 아닌가와 무관하다. 예수를 그리스도라 떠받드는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예수가 어떻게 살았는가에 대해선 무관심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예수가 어떻게 살았는가를 알고 나서 그리스도로서 예수가 있는 것이지 어떻게 살았는지 누구인지조차 모르면서 무작정 예수를 ‘내 죄를 대속한 그리스도’라 떠받는 건 우스꽝스런 일이다. ‘사람의 아들’ 예수가 없다면 ‘신의 아들’ 예수도 없다.

 

예수가 어떻게 살았는가에 대한 가장 유력한 자료는 역시 신약성서의 맨 앞에 실린 네 개의 복음서들(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이다. 그 가운데 마태, 마가, 누가복음 셋을 ‘비슷한 관점’에서 씌어졌다고 해서 ‘공관(共觀)복음’이라 부른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보다 훨씬 더 종교적으로 채색된 것이다. 공관복음 가운데 가장 일찍 씌어진 건 마가복음이다. 마가복음은 70년경에 씌어졌다. 마태와 누가복음은 마가복음보다 늦게, 마가복음을 기본 자료로 씌어진 것이다. 마태, 마가, 누가 복음이 ‘공관’을 갖게 된 것도 마가복음이 먼저 씌어지고 나머지 둘이 그것을 기본 자료로 해서 씌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같은 관점을 가진 복음서가 세 개나 존재하는 걸까? 그것은 복음서가 씌어진 목적 때문이다. 복음서는 역사적 사실을 서술하려는 것보다는 그것을 쓴 작가가 소속된 교회공동체의 ‘신앙 고백’의 차원에서 씌어졌다. 각각의 교회공동체들은 저마다 조금씩 처지와 사명이 달랐고 그에 걸맞게 신앙관도 조금씩 달랐다. 그래서 ‘같은 관점이지만 조금씩 다른’ 자신들의 복음서가 필요했던 것이다.

 

복음서의 그런 성격을 둘러싸고 신학자들 사이에서 이런저런 논쟁이 있어왔다. 아예 복음서를 통해 ‘예수의 생애’를 파악하려는 게 잘못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복음서가 역사적 사실을 서술하려고 씌어진 게 아니라고 해서 곧 그 내용이 전적으로 역사적 허구라고 말하는 건 어리석은 생각이다. 복음서는 예수에 대한 각 교회공동체의 신앙고백이며 그것은 무엇보다 예수의 생애를 근거로 한다. 복음서는 ‘예수가 어떻게 살았는가’를 서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지만, ‘예수가 어떻게 살았는가’를 증언하는 가장 진솔한 기록인 것이다.

복음서, 특히 공관복음서의 배경이나 맥락을 함께 읽는다면 우리는 2천 년 전 집도 절도 없이 팔레스타인 땅을 유랑하다 초라하게 죽어간 한 사내의 모습을 생생하게 파악할 수 있다. ‘일자무오설’이니 ‘축자영감설’이니 해서 성서에 씌어진 한자 한자 그대로가 하느님의 영감에 의한 것이니 사람이 그것을 분석하려 드는 건 위험한 일이라는 주장도 있다. 얼핏 경건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그런 주장은 실은 ‘하느님의 영감’을 ‘인간의 영감’으로 재단하려는 태도일 뿐이다.

 

생각해보라. 한낱 사적인 대화에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상대의 말과 그 말이 갖는 배경이나 맥락을 동시에 들으려 노력한다. 그런 노력은 우리에게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의식조차 못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렇게 해야만 상대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성서처럼 함축적이고 상징적인, 가장 최근에 씌어진 부분이 2천여 년 전에 씌어진 텍스트를 ‘글자 그대로’만 읽는다는 건 그 안에 담긴 뜻을 읽지 않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노동자의힘 기관지, 계속)

 

예수이야기 3

 

연대를 표기하는 방법은 한 사회 집단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이를테면 북한은 김일성이 태어난 해를 기원으로 하며 남한에서도 민족애가 강한 사람들은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새운 해를 기원으로 하는 ‘단기’를 쓴다. 올해는 주체 94년이자 단기 4338년이다. 그러나 오늘 일반적으로 쓰는 연대표기 방법은 서력기원, 즉 ‘서기’다. 서기는 예수가 태어난 해를 기원으로 한다. 재미있는 건 예수가 태어난 해는 서기 1년이 아니라 기원전 4년 경이라는 것이다. 525년 교황의 명을 받아 서기를 계산해낸 수도사(디오니시우스엑시구스라는 긴 이름을 가진)의 실수로 그렇게 되었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인 성과를 얻기 시작한 건 현대에 들어와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예수에 대한 주목할 만한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이해가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별 진척이 없었던 첫번째 이유는 기독교를 국제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바울이 역사적 예수보다는 그리스도 예수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그 자신도 죽음을 당할 만큼 험악했던 당시의 사회적 정황에서 정치범으로 죽은 예수를 ‘탈현실화’하는 그의 방식은 이해할 만한 것이지만 그 덕에 기독교(카톨릭이든 개신교든)는 역사적 예수를 소홀히 하는 전통을 갖게 되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로다.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가 신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니다.

좋든 싫든 이 글을 읽는 상당수의 동지들이 외울 수 있을 ‘사도신경’의 전문(개신교판)이다. 여기엔 예수가 성령으로 잉태해서 동정녀에게서 태어났다는 이야기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이야기는 있지만 정작 예수의 삶에 대해선 아무 언급이 없다. 예수는 시종일관 머리 뒤편에 둥그런 불이 켜진 신인 것이다. 노동자의 자식으로 태어나 일찍 죽은 아버지를 대신하여 대식구를 건사해야 했던 평범한 팔레스타인 청년의 30여 년은 흔적조차 없다.

 

만일 바울이 좀 더 역사적 예수에 집중했다면 역사적 예수에 대한 이해가 충분했을까? 꼭 그랬을 것 같진 않다. 예수는 2천년 전, 우리로 말하면 바야흐로 고구려 백제 신라가 생겨나던 무렵의 사람이다. 그러나 예수의 말이나 행적에서 나타나는 예수의 사고방식은 그런 고대사회의 사람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것이다. 예수의 사상과 행적엔 사회주의, 페미니즘, 아동인권, 생태주의 같은 인류가 이룬 가장 최근의 정신적 진척들이 이미 가장 조화로운 형태로 들어 있다. 그를 직접 보았다 해도 그런 개념의 씨앗조차 없던 사람들이 그를 이해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예수와 같은 경우는 역사 속의 모든 위대한 인물들을 통틀어 봐도 찾기 어렵다. 사람이란 자기가 속한 사회의 지배적인 정신을 근본적으로 거스를 수 없다. 어느 한 부분에 매우 급진적인 사람이라 해도 다른 부분에서는 여전히 지배적인 정신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사상과 행적의 면에서 예수와 비교해서 말할 만한 수운 최제우가 1824년생이라는 걸 생각한다면(수운은 예수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예수는 참 놀라운 사람이다. 이제 하나씩 짚어보기로 하자. (노동자의힘 기관지, 계속)

 

예수이야기 4

 

‘주일성수’(主日聖守)라는 말이 있다. 한번이라도 교회에 나가본 사람들은 들어본 말일 게다.(하긴, 이 극성스런 기독교 국가에 살면서 교회에 한 번도 안 나간 사람이 있을까만.)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일요일에 다른 일 말고 꼭 교회에 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주일성수는 특히 보수적인 교회에서 매우 강조한다. 그런 교회에선 일요일에 교회에 나오는가 안 나오는가를 신앙의 척도로 삼는다. 교회에 나오면 구원받은 사람이고 안 나오면 지옥불에 떨어질 죄인인 것이다.

 

주일성수는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인 생활규범이라 할 십계명 가운데 네 번째 계명인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을 근거로 한다. 십계명은 기독교에서 만든 게 아니라 예수 이전, 즉 구약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탈출한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느님과 계약을 맺고 십계명을 받는다. 그 후 유대인들은 십계명을 자신들의 사회와 일상생활에 적용해가면서 세세하게 발전시켰다. 예수 당시에 이르러 율법(십계명)은 어떤 법이나 윤리와도 견줄 수 없는 유대 사회의 유일한 생활규범이 되었다.

 

율법을 지키며 사회에 적용하는 일을 맡은 사람들이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었다. ‘바리새’는 ‘분리하다’는 뜻이다. 말 그대로 그들은 율법을 엄격하게 지켜서 자신들을 거룩하게 분리시키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율법을 세분화하여 6백여 개의 세부 조항을 만들었는데 그 조항들은 대부분 ‘금지하는 것’이었다. 안식일에 대한 조항만도 39개나 되었다. 율법에 따르면 안식일엔 노동을 하거나 농사도 짓는 건 물론 여행을 하거나 짐을 운반할 수도 없었다. 안식일엔 심지어 의료 행위도 할 수 없었다.

 

39개의 조항엔 다시 수백 가지의 ‘사례집’이 달렸다. 이를테면 안식일에 사람이 무너진 담벼락에 깔렸을 경우에 대한 답은 이렇다. “1. 그 사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를 알아 볼 만큼만 무너진 담을 헤쳐 본다. 2. 그 사람이 살아있다면 구할 수 있으나 죽었다면 안식일이 지난 다음 시체를 꺼낼 수 있다.” 우리로선 웃음이 나올 만하지만 당시 유대인들은 이런 조항을 목숨처럼 진지하게 지키며 살았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걸핏하면 안식일을 어기곤 했다. 예수의 제자들은 안식일에 밀밭을 지나면서 예사롭게 밀 이삭을 따먹었다. 그것은 율법적으로 추수, 타작, 키질, 음식 장만의 네 가지 조항을 한꺼번에 어기는 행동이었다. 예수의 제자들이 다 노동하던 청년들인데 고작 밀 이삭으로 배를 채울 수 있었겠는가. 그건 거룩한 사람들을 엿 먹이는 시위였다. 그들의 스승 예수는 한 술 더 떴다. 예수는 안식일에 버젓이 환자를 치료했다. 그 환자들은 당장 목숨이 위급한 환자들이 아니라 수십 년 동안 앓아온 만성병환자들이었다.

 

불한당 같은(예수의 별명 가운데 하나는 ‘먹고 마시길 즐겨하는 자’였다.), 그러나 매우 빠른 속도로 인민들의 호감을 얻어가는 예수에게서 뭔가 꼬투리 잡을 기회만을 노리던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그들은 예수에게 “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느냐” 따졌다. 예수는 그들에게 대꾸한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생겼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생기지 않았습니다.”(마가 2:27) 예수는 자신의 목숨을 위태롭게 만들 사회적 스캔들에 대해 설명하거나 타협하기는커녕 ‘할 테면 해봐라’ 식의 태도를 보인다. 예나 지금이나 사회 비판이란 체제가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만 안전한 것이다. 물론 예수도 예외는 아니었다. (노동자의힘 기관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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