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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4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개인사와 별도로, 올해는 아이러니의 해였다.
자기 꼬임에 빠져 자멸(?)한 딴나라당, 민주당의 탄핵쇼.
재산세 비싸서 못 살겠다는 강남 부자들의 처절한 하소연.
숭고한 믿음으로 개망나니 부시를 재선시킨 선량한 미국인들.
야음을 틈타 파병된 최정예 자이툰 부대의 놀랄만한 호떡 신공.
하지만 가장 웃지못할 아이러니는 작금 민주노동당의 뻘짓이 아닐까 싶다.
내 얼굴에 침뱉기 같아 다른 사람 붙잡고 흉을 볼 수도 없고... 이역 만리에 앉아 시일야방송대곡을 쓸 수도 없고, 혹시나 해서 소환 규정을 알아보니 것도 어찌나 까다로운지.. 천상 다음 최고위원회 선거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겠다라는 생각은 하면서도... 그 전에 당원들 모두 탈당해버리고 민중들로부터 완전 버림받는 건 아닐까 두려운 마음이 드는데....
국회의원들에게 상임위 활동까지 접고 국보법 철폐투쟁에 동참하라 했다는 소식에, 민주노총에서 당으로 (국보법 철폐투쟁 올인에 반대하는) 정책실장의 발언을 문제삼는 공문을 보냈다는 소식에, 오마이뉴스에 실린 사무총장의 "의원단에게 섭섭하다"는 인터뷰 기사에, 중앙당 홈피를 장식하고 있는 국보법 철폐 배너와 각종 게시글들에서 나는 심한 정체성 혼란을 경험했다. 아니 내가 국보법 철폐투쟁을 맘에 들어하지 않다니....우째 이런 일이?
설마 내가 국보법을 옹호????
나는 민주"노동"당이 비정규직 철폐를 위해 사무총장부터 최고위원들까지 나서 철야단식농성했다는 소리를 들어본적이 없다. 비정규직 투쟁은 기존의 당내 대책위를 통해 진행하면 된다는 사무총장의 발언은 참으로 시의적절(!!!)했다. 나는 최근 발생한 어린이의 안타까운 죽음(그것이 아사이건 병사이건)이나 비정규직 노동자 고 김춘봉씨의 죽음이 자본과 정권의 탓이라고만 생각치는 않는다. 당은 뭐하고 있었나. "일하는 사람들의 희망"은 뭐하고 있었나? 빈곤의 문제, 노동의 문제는 이제 자본으로부터, 주류사회로부터, 언론으로부터.. 그리고 이제는 "일하는 사람들의 희망"으로부터도 푸대접을 받고 있다. 이보다 더 어이 없는 아이러니가 있으랴.
* 이 글은 뻐꾸기님의 [잘가라, 2004년] 에 관련된 글입니다.
도대체 연말 기분이 나지 않던 차에, 뻐꾸기 언니의 글을 보고 잠시 나의 1년을 돌아보다. 올해는 정말 사건이 하나도 없었네... 하면서 입을 삐죽거리다 아참, 미국에 연수 왔지? 하는 생각이 번뜩 떠올랐다. 이쯤 되면 무심함이 입신의 경지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도저히 10대 사건을 만들어낼 수가 없네. 7대 불가사의도 아니고, 7대 사건이라니 무슨 소년과학잡지 제목도 아니고 ㅜ.ㅜ 그나마 6대사건, 9대사건 아닌게 다행인가?
1. 태백산 일출 산행
난생 처음으로 엄동설한, 야간산행 도전.. 기다렸다는 듯 마침 그날은 수십년만에 처음으로 찾아온 강추위 때문에 전국이 꽁꽁 얼어붙었더랬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엄청난 추위 땜시 일행들의 랜턴이 모두 방전되어 버리고, 오빠에게 빌려간 좋은 헤드랜턴 덕분에 무리들 사이에 "앞장서는" 황당한 일까지 경험했다. 얼어죽는다는게 어떤건지 정말 실감했다. 흰눈덮힌 태백산 어스름과 일출은 대 장관이었다. 허나 그렇게 얻은 호연지기는 영하 18도의 추위에 꽁꽁 얼어붙어 약발이 별로 오래가지 못했다. 한국에 돌아가면 꼭한번 다시 가고픈 산행... 지리산 백무동 계곡으로 일출보러 올러가는 건 나한테 좀 무리겠지?
2. 고속도로에서 퍼진 차
대전에서 서울 올라가던 중(2월, 미국 출장가기 전날) 어이없게도 냉각수 뚜껑이 날아가 버려 차가 오버히트 되는 불상사 발생... 고속도로 한 복판에서 자욱한 연기 휘날리며 달리는 위험천만한 상황을 연출했다. 갓길로 겨우 빠져나와 비상등 켜놓고 있자니, 날은 춥고, 차들은 쌩쌩 달리고... 출근길 청계고가 한복판에서 엔진 꺼졌던 사건만큼이나 처량하게 느껴졌다.
3. 남아프리카 공화국 방문
제 3회 국제건강형평성 학회 참석 차, 난생 첨으로 아프리카 대륙을 밟아보았다. 발표 때문에 좀 후달리기는 했지만... 낯선 곳, 새로운 환경에서 형평에 관심을 가진 여러 나라의 의욕적인 연구자들을 만나보고, 수박 겉핥기 식이나마 남아공 사람들 사는 모습, 활동가들의 모습도 직접 보고... 짧게 표현하기 힘든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 여행이었음
4. 내 귀에 도청장치.. 가 아니고 진주종...그리고 수술
역시 평생 처음으로(여러가지가 다 처음이로군) 전신마취와 수술... 수술 전에 밀린 일들 마무리하느라 며칠 동안 잠을 설쳤더니만 막상 병원에 가서는 정신 못차리고 푹 잘 수 있었다. 수술 당일 아침에도 늦잠을 자서, 문병온 친구가 아연실색했다. 마취에서 아련히 깨어날 무렵, 머리속에 번뜩였던 것은 술후 합병증... 귀 수술 후에는 안면신경 마비가 흔한 합병증 중 하나다. 그 졸린 와중에 눈을 깜빡이고 얼굴을 찡그리며 신경을 자가 테스트해본후 아무일 없음을 깨닫고 다시 자버렸다. 수술은 했는데... 귀는 여전히 잘 안들리고... 환장할 노릇이다.. 평생 이렇게 살아갈 걸 생각하면 좀 우울하기는 하다. 그러고보니 올해 있었던 일들 중 가장 슬픈 사건이로군... (어쩜 평생에?)
5. 사랑니 뽑다
작년까지 뵈지도 않던 한쪽 사랑니가 올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더니만 피곤할 때마다 조금씩 아프기 시작했다. 그것도 귀와 같은 오른쪽.... 미국 가기전에 이걸 해결해야 한다는 필사의 신념으로 출국 막판 그 바쁜 와중에 이를 뽑았다. 가은씨한테 야매로...치료비는 책선물로 대신 ㅎㅎㅎ. 이빨 뽑은지 두 시간 만에 김 모 샘의 강권에 의해 짜장면 먹고, 그 날 저녁에는 가족 외식한다고 유황오리 먹으러 갔다. 정말 괴로웠다.
6. 가족 나들이
초등학교 이후 처음으로.. 온 가족이 함께 물놀이를 갔다. 부모님, 나, 오빠네 식구들... 그래봤자 한나절 북한산 계곡에 가서 백숙, 매운탕 뭐 이런거 시켜먹고 물장구 친게 전부지만... 정말 감회가 새로왔다. 이것도 내가 연수를 가는것 때문에 특별히 기획된 가족행사였다. 안 그랬으면 아마 불가능했었겠지... 나는 귀에 물이라도 들어갈까봐 평상에 하루 종일 누워서 그늘 따라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이게 얼마만의 가족 나들이인가.. 부모님께 정말 죄송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7. 미국 연수
여차저차하여 미국 땅을 밟게 되었다. 이제 네 달째에 접어드는데, 뭘 많이 배우긴 한건지 잘 모르겠다. 시간이 정말 빨리 가기는 한다.
그 밖에 또 뭐가 있을까... 감동을 주었던 책들, 영화들, 좋은 사람들과의 여행.... 개인적인 일은 아니지만 민노당의 의회진출... (그 때 목이 메었던 걸 생각하면서 지금 최저위원들 하는 꼬라지 보면 화가 두 배로 난다)..
아... 잘 가라.. 2004년...
내년은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과연 일신우일신할 수 있을까나...
어제 펠로우 몇명이 모여 컨퍼런스 룸에서 훌륭한 빔프로젝터와 DVD player, sound system을 이용해 영화 감상을 했다. 제목은 Judge at Nuremberg Trial... 굉장히 유명한 영화다. 아카데미 상도 받았고 어쩌구... 점심시간에 수다를 떨다가 이 영화에 대해서 말을 꺼낸 것은 나였지만, 막상 영화를 보자는 Kavi의 제안에는 떨떠름 했었다. 미국 영화가 다 그렇지 뭐...
그러나 생각과 달리 영화는 많은 것을 고민하게 했다. 일반론을 알고 있는 것과는 별도로 구체적인 상황과 생생한 실례들은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어차피 영화에 감동하고 공명하는 것은 그것을 수용하는 시청자의 개인적 경험과 관계 있는 터... 재연되고 있는 상황이 우리의 근대사, 그리고 지금까지의 현대사랑 결코 무관한 것이 아니기에 무려 3시간 짜리 영화를 집중(!!!)하면서 볼 수 있었다.
영화의 핵심, 그리고 본래 이 재판의 핵심 논쟁거리는 시스템의 일부로 복무했던 개인들에게 과연 얼마나 책임이 있나 하는 것이다. 수백만명의 유대인 학살을 승인하고 지시한 관료들 (이 영화에서는 법관들)은 결코 성격파탄자나 괴물같은 일탈자들이 아니라 선량하고 이성적인, 그리고 누구보다도 나라를 사랑하는 지식인들이었으며 그들의 업무를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이행했다. 변론의 핵심은..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거라는 것이다. 이들이 유죄라면 전체 독일인, 그리고 그러한 상황을 방조한 러시아, 영국, 미국.. 누구도 결코 이러한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고 항변한다.... 그리고 그들은 주장했다. 그것이 얼마나 파국적인 결과를 가져올 줄을 몰랐다. 수백만명이 죽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
우리사회 문제에 대한 고차원적 담론은 관두고...
불과 3-4년 전만해도 너무나 명확하던 상황, 도대체 말이 되느냐... 이들은 당근(!) 범죄자들이다 단언했을텐데... 지금은 모든게 그렇게 분명한건 아니라는 걸 절실히 깨닫고 있다. 물론 그들이 범죄를 저질렀다는 이성적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 달라진 것은... 과거에는 가진것 없이 온전히 비판자의 입장에 서 있었던 반면, 이제는 작은 부분이나마 사회 시스템의 일부, 지식이라는 무기, 대학이라는 사회적 권위를 가진 주체로서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불의를 생산하는데 충분히(?) 기여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는 점이다. 전공의 수련을 마치고 대학에 자리를 얻은 후... 기득권 계층(? 진짜 기득권 계층이 본다면 코웃음치겠는걸)으로서 사회의 부조리에 얼마나 쉽게 가담할 수 있는지 새삼새삼... 뼈저리게 깨달았다. 항상 눈을 부릅뜨고, 깨어있지 않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 하하호호 웃는 사이에 "관행"의 이름으로 얼마든지 부조리에 가담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과연 내가 잠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깨어있었던가에 대해서는 장담을 못 하겠다. 사람이 어떻게 24시간 긴장을 늦추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나치관료들도, 친일지식인들도.. 부역을 통해 영달을 추구하려는 야심이 특별했거나 본래 파렴치한들만 있었던건 아닐 것이다. 아마도 상당수가 자신의 전문분야에서 성실하게 임무를 수행했고(그 임무가 무엇이건 관계없이!!!), 특별히 튀지 않게 남들이 하는 대로 관행을 쫓았을 것이다.......
"그럼 너 같으면 어떻게 했겠냐?" .. 레지스탕스가 되었거나 최소한 그 자리를 사임했겠지 ...
"정말?" 당근이지...
"정말?" 그러지 않았을까?
"정말?" "..."
눈 크게 뜨고 사방을 경계할지어다. 진보에 복무는 못할망정, 나도 모르는 사이 사회를 갉아먹는 일에 버젓이 동참하는 수가 있나니...
3천번째 방문객을 위한 이벤트가 썰렁함 속에 실패로 돌아가고.... 5천번째 방문객을 목전에 둔 지금.. 방문 이벤트를 다시 해야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이런거에 집착하는 걸 보면, 아무렇지 않은거 같아도 타향살이가 외롭긴 한가보다 ㅜ.ㅜ
(정말 그럴까???)
음.. 어쨌든... 5천번째 방문객에게는 자그마한 선물(내가 번역한 책)이라도 전달해볼까... 이미 그 책을 가진 사람이면? 할 수없지.... 팔자려니...ㅎㅎ
구체적 방침은 정해지지 않았고, 어쨌든 5천번째 방문객이 메일이든, 덧글이든 흔적을 남겨준다면 자그마한 성의 표시는 해야겠다는게 오늘의 결정사항....
밤새 눈보라가 휘날리기 시작하더니 영하 8도, 체감기온은 무려 영하 15도란다. 일찌감치 퇴근하여 무언가 따끈한 것을 떠올리다가 오뎅국을 끓였다. 솜씨에 스스로 감탄하기까지 했다.
그러고보니 지지난 주 손님맞이 대작전을 치루면서 기록을 안 남겼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서 잊기 전에 정리.... (별 시덥잖은 걸 다 정리하려고 하다니.. 성격이 왜 이렇게 변했을까?)
1. 랍스터 찜과 클램 차우더, 그리고 치즈 케익
회심의 역작.. 랍스터라니....한국에서라면 언감생심 꿈도 못 꾸었을 요리 아닌가. 후배가 불원천리 찾아왔길래 그에 상응하는 이곳의 전통(?) 요리를 대접하려고 맘 먹었다. 마트에서 살아있는 바닷가재 세 마리(한 사람당 한 마리)를 불과 25불(진짜 싸다!!!)에 구입하여 찜통 바닥에 물을 조금만 붓고 다음 랍스터를 넣은 후 화이트 와인 약간 뿌리고 뚜껑 닫고 15분 가열하면 끝. 웹사이트를 찾아보니 비린내를 없애기 위해 월계수(허거덕..) 잎을 넣으라고 되어 있지만, 어데 가서 이걸 구한단 말인가. 설령 구한다 한들, 이파리 열 장.. 이렇게 팔것 같지는 않았다. 물이 끓기 시작하자 바닷가재들이 요동을 쳤는데(그 때까지 살아 있었다), 마음이 조금 아프기는 했지만(^^) 그냥 뚜껑을 꾹 누르고 있다가 15분 지나 뚜껑을 열었다. 오... 진홍색으로 변신한 먹음직스런 랍스터~~ (사진이 없는게 안타깝네). 이 전에 뉴잉글랜드 특산이라는 냉동 클램차우더를 끓는 물에 중탕해서 내놓았더니 이거에도 손님들 감동했다. 이어 대부분 평생 첫 경험인 "가재 한 마리씩 들고 뜯기"를 경험하고 황홀경에 빠져 있을 무렵(실제로는 한 마리 해체하는데 불과 10분도 안 걸렸다.. 하이에나가 울고 갈 지경...), 마트에서 사온 냉동치즈 케익을 전자레인지에 살짝 해동시켜 대접했더니만 손님들이 감격에 겨워 쓰러져버렸다. 한국에서 이렇게 먹어본 적은 없지만 짐작컨데 1인당 최소 5만원 이상은 들거란다. 손님들의 감동을 흐뭇한 맘으로 지켜보면서, 앞으로 한국에서 온 방문객은 무조건 이 메뉴로 통일해야겠다고 결심했다.
2. 비빔밥과 두부 부침
펠로우들 저녁 모임에 비빔밥을 준비했다. 참으로 현명했던 선택이다. 무나물, 당근, 버섯, 버섯, 호박을 볶고, 달걀 지단과 상추를 준비하고, 다진 쇠고기를 불고기 양념장에 볶았다. 베지테리안들에게는 상추까지만, 옴니보어 에게는 불고기까지 얹은 후 고추장과 참기름.... 그리고 된장국은 향이 강해서 부담스러워할 수도 있을 것 갈아 두부와 미역이 들어간 일본식 미소된장국을 끓히고 반찬으로 김치와 두부 부침(+양념장)을 내놓았다.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다음 날 영어 과외 선생인 캐리(이 여인네도 역시 베지테리언)에게도 똑같은 메뉴를 준비했었는데 좋아했다. 사실 비빔밥이라면 신선한 산채가 필수인데, 이 놈의 미국 땅에는 "나물"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전에 밥상을 들여다보고 "저푸른 초원"입네, "녹색혁명"이네 하면서 엄마한테 투정부렸던 일이 후회된다. 그 때 풀떼기를 더 많이 먹어둘걸.... 하여간 비빔밥은 여러 사람의 입맛을 다양하게 충족시킬 수 있는 현명한 조합형 음식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야채를 썰어서 볶는데 시간이 너무 걸린다. 아니, 볶는거 말고.. 써는데 시간이 너무 걸린다. 어깨 아파 죽을 뻔했다.
앞으로 튀김 요리에 한 번 도전해봐야겠다. 엊그제 송년 모임에 가서 깐풍기로 추정되는 닭튀김 요리를 먹었는데.. 그러고보니 튀김 - 고구마 튀김, 깻잎 튀김 같은거 먹어본지가 너무 오래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밤낮없이 앉아서 공부는 안 하고 먹을거 생각만 하는 거 같네... 아.. 한심해라....
* 이 글은 최용준님의 [BMJ, Health and Politics] 에 관련된 글입니다.
Health & Politics 라는 거창한 제목으로 BMJ에 일련의 논문들이 발표되었다. 그 중 서두에 실린 Franco 등의 것을 읽어보았는데....
1. 결과변수 : 기대여명, 영아사망률, 모성사망률
2. 폭로변수 : 민주주의 수준 (자유 수준으로 대신 측정)
3. 혼란변수 : 국민총생산, 소득불평등(지니계수), 공공지출
4. 분석방법 : 170여개 국가를 대상으로 한 회귀분석(생태학적 연구)
5. 결론 : 여타 요인들을 보정한 후에도 민주주의 수준이 높을수록 건강수준이 높더라 (심지어 소득불평등보다도 이게 더 중요한 요인이었고, 저소득 국가들에서는 반대 결과가 나왔는데 표본 크기의 문제란다).
모든 것을 의심하라는 M 선생님의 지론에 따라 과연 이 심오한 "민주주의" 가 어찌 정의되었는지 살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민주주의를 딱히 정의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저자들은 Freedom House 라는 국제 비영리 기구에서 구분한 free, partially free, not free 라는 3단계 구분 지표를 사용했다. 이 기관은 전세계국가들을 대상으로 정치적 권리(political right : Elected rule, Competitive parties or political groupings, Opposition with actual power, Self government of minority groups or their participation in the government), 시민 자유권(civil liberty : Freedom of expression, assembly, association, education, and religion, System of rule of law, Free economic activity, Equality of opportunity) 을 평가해서 1~7점까지 점수를 내고 이에 따라 3단계로 국가 등급을 매긴다.
몇몇 국가들의 등급을 살펴보면, 쿠바 7*7점(최하등급), 북한 역시 7*7점, 한국 2*2점(free), 미국 당연 1*1점(free)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아랍국가들의 순위가 낮은 것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좀 찜찜한 느낌이 들어 이 단체 소개 페이지에 들어갔다. 오호 통재라...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미국의 정치 지도자들, 학자, 언론인 등등이 주도해서 단체를 결성했고, 그동안 중남미의 독재 철폐와 쿠바, 이라크 등에서의 인권 침해를 근절하는데 큰 노력을 기울여왔단다 (http://www.freedomhouse.org/aboutfh/index.htm)
저자는 건강의 근본적 결정요인으로서 정치를 다루는 political epidemiology를 제안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이건 political epi 가 아니라 politicized epi 라고 봐야할 것 같다.
미국에 온지 넉 달 동안 참으로 기이한 경험들을 많이 했다.
집에 있는 텔레비젼의 떨림 현상이 너무나 심각해져서 하나 장만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내가 유일하게 즐겨보는 프로그램이 [심슨]인데, 지난 주 그거 보려고 앉아 있다가 결국 화면이 안 나와서 못 본게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벼룩시장 같은데 들어가보니 삼성 25인치 칼라TV가 20불이라고 해서 얼른 메일을 보내 찜하고 오늘 아침에 찾으러 갔다. 갔더니 이게 웬말인가. 이 아저씨가 나 말고 다른 사람들한테도 오케이라고 답을 해놨고 자기 나름대로는 먼저 오는 사람에게 주겠다는 방침을 세워놓고 우리(?)한테는 말을 안 했던 것이다. 그런 사실도 전혀 모른채 지하실에 있는 TV를 꺼내와서 잘 나오는지 시험을 하는 중에 웬 여자가 들어오더니만 TV 찾으러 왔다면서 20불을 획 던지고 들고나가려 했다. 어안이 벙벙하여. 이게 뭔 일이냐 했더니만.. 아저씨 주저리주저리 사람들이 온다 해놓고 안 오는 경우가 많아서 어쩌구저쩌구... 짧은 영어로, 나는 이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신경질을 좀 냈더니만, 기껏 내놓은 안이 동전을 던져서 임자를 결정하잖다. 기가 막혀서.. 이 주말 꼭두새벽(9시 반), 차도 없어서 김** 선생님한테 부탁해서 찾아갔는데(샘 부부는 아침도 안드시고 오셨단다 ㅜ.ㅜ), 이 띨띨한 아저씨 땜에 10년도 더 된 텔레비전을 놓고 저 싸기지 없게 생긴 여자애랑 동전 던지기를 해야 하다니..... 기가 막혔지만 동전은 던져졌고 내가 이겼다. 정말 기분 더럽더라. 그나마 여기서 졌으면 얼마나 더 황당했을까.... 미국 생활 4개월만에 별 해괴한 경험을 다 한다 싶었다.
아침에 그렇게 설쳐대고 집안 청소를 하고 나니 정말 피곤했다. 오후에 깜빡 잠이 들었는데, 전화벨 소리 우렁차게 ..때르릉.... 전화를 받아보니 미국질병관리본부(CDC)에서 온 것이다. 아동 예방접종에 관한 설문조사 중이란다. 다행이 우리 집에는 3살 이하의 어린이가 없었기 때문에 전화 통화는 1-2분만에 끝냈 수 있었다. 전화설문은 벌써 세 번째다. 첫 번째는 Mass 주 정부에서 하는 건강 조사(특히 의료보험)에 대한 것이었고, 나는 외국인이고 여기 임시로 살고 있다고 둘러대서 겨우 피해갔었다. 여기 산지 채 한 달도 안 되었을 때 벌어진 일이다. 두 번째 설문조사는 CDC의 BRFSS 라는 유명한 건강행동 조사였다. 영어 못하고 나 외국인이라서 못하겠다고 했는데도 설문 아줌마 막무가내였다. 아마도 할당이 있었을 것이다. 결국 20분 넘게 흡연, 음주, 식이, 운동, 예방접종, 질병 과거력, 의료 이용 등 두루두루 답변을 해야만 했다. 성 정체성을 묻는 문항도 있어서 적잖이 당황했다. 사실 한번도 나의 성정체성에 대해 의심해본적 없었고, 여태껏 살아오면서 누구도 그런걸 물어본 적이 없었는데 전화로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물어보니까 그냥 당황.... 몆 주 후에는 설문 협조에 감사하는 편지까지 받았다.
미국에 산 지 이제 겨우 네 달 째... 마치 10년은 산 거 같다.
이번 주에 있었던 허접 시리즈 발표는 오늘로 끝이 났다. 인내심을 갖고 경청해준 국내외 연구자들에게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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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입학했다. 우리 때는 입시가 전기/후기로 나뉘어졌 있었는데 어찌어찌 하다 나는 후기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3년 동안은 우리 집이 심하게 안 좋을 때였다. 아빠가 많이 편찮으셨고, 그래서 오빠는 진학을 포기하고 회사에 다니다가 내가 3학년 되던 해에 입대를 했다. 전기에 불합격 되고 일단 가만히 있기도 뭐해서 후기에 응시했고 운좋게 합격을 했다. 당시 유명한 모 입시학원에서 내가 무시험 합격자(ㅎㅎㅎ)에 해당한다고 전화가 오기는 했는데, 학원 등록금도 무지하니 비싸서 일단은 학교에 다니면서 알바를 해서 재수를 하자.. 이런 깜찍한 생각을 했었다.
그리하여 알바가 시작되었는데.... 합격자 발표가 난 그 다음 주부터 바로 일은 시작되었다. 고등학교 때 한 공부 했었기 때문에(호호).. 여기 저기 과외 자리가 줄을 이었다. 대학 입학식도 하기 전에 시작된 과외는 본과 4학년 국가고시를 치르기 두 달 전까지 7년 동안 거의 한 달도 쉬임 없이 지속되었다. 어찌 보면 여지껏 내가 가졌던 일자리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동네는 주로 우리 고등학교 인근 지역을 커버했다. 홍제동, 홍은동으로부터 시작하여 녹번동, 불광동, 세검정, 부암동, 평창동, 정릉.. 등등... 그리고 서클 사람들의 소개로 멀리 여의도, 반포동까지 진출하기도 했었다. 한창 때에는 두 개, 방학 시즌에는 세 군데를 뛰기도 했는데, 끼니도 거른 채 땡볕에 돌아다니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다른 일들에 비하면 과외라는게 심하게 (!) 편한 일이기는 하지만, 스트레스는 정말 컸다. 학생 부모나 학생에 대한 스트레스도 있었지만, 학교에서 하는 각종 활동이나 시험 등에 일정을 맞추는 것이 무엇보다 어려운 일이었고 주변에서 이런 상황을 잘 이해해주려 하지 않았다. 내 용돈을 벌려고 하는게 아니라 그게 중요한 생계였는데, 그게 없으면 학교에 다닐 수 없었는데, 의대에 다니는 사람들, 심지어 운동을 한다는 선배들도 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한번은 세미나 일정을 잡는데 "제가 과외 때문에 그 때는 좀.... ㅜ.ㅜ" 했더니만 대뜸 그거 꼭 해야 하는 거냐고 신경질을 낸 선배도 있었다. 사실 나만큼 세미나 시간을 잘 지킨 사람도 없었건만....본과에 들어가서는 수업과 시험 때문에 좀 힘들기는 했었다. 본 3때.. 화요일 마지막 교시가 성형외과 였는데 교수가 시간 개념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 슬라이드를 몇 박스씩 가지고 들어와서는 저녁 여덟 시나 되어야 수업을 끝내주고는 것으로 유명했다. 결국 한 학기 동안 그 수업을 한 번도 못 들었다. 다섯 시가 넘으면 살금살금 빠져나가 일터로 달려갔다. 그 시간이 엽기적이고 황당한 사진 많이 보여주기로 유명했는데.. 좀 안타까운 일 ㅎㅎㅎ
내가 접해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경험했다. 한번은 예고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한 여학생에게 수학을 가르친 적이 있는데 (반짝 과외.. 거의 문제집 암기 수준), 그 집은 평창동 고급 빌라촌에 위치하고 있었다. 빌라 두 채를 터서 개조한 집이라 무지무지 넓었다. 내 기억에는 현관에서 저쪽 마루 끝이 운동장만큼 멀었던 것 같다 ㅎㅎㅎ. 하여간 학생 방에 들어가면 어머니가 에어컨을 조절해주시면서 생과일 쥬스를 내오시고.. 끝나면 (다른 레슨 때문에 내 과에는 밤 12시에 끝났다) 승용차로 우리 집까지 데려다 주셨다. 방에는 책상과 피아노, 탁자 등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이런 부잣집 아이가 침대를 안 쓰나보네 하고 의아했었는데, 나중에 보니 이건 공부 겸 레슨 방이고 침실은 따로 있었다. 반포 아파트에서 내가 맡은 역할은 새끼 선생이었다. 당시 모 학원에서 잘 나가던 수학 강사가 본 선생이고, 그 사람의 수업을 준비할 수 있도록 돕는게 아마추어 강사인 나의 일이었다 (당시에 세미나를 했던 쿠바 혁명사에 보면 혁명전 쿠바의 부패와 빈부격차를 이야기하면서 새끼 과외선생에 대하 이야기가 나와 깜짝 놀랐었다). 이 집 엄마의 극성은 정말 대단해서... 암기과목 시험보는 날이면 엄마가 고등학생 딸과 같이 앉아서 책을 외우고 그걸 퀴즈로 내주기까지 했다. 나로서는 상상 못할 일이었다. 허나... 홍제동 인근에서 했던 과외들 중의 일부는 차마 돈을 받기가 미안한 형편인 경우도 꽤 있었다. 내가 보기에 과외를 할 상황이 아닌거 같은데 부모님들이 무리해서 자식들을 공부시키는 경우였다. 다행히 내가 가르쳤던 학생들은 그런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었고, 본인들 스스로도 열심히 해서 비교적 짧은 기간이 지나면 자신감을 갖고 혼자 공부하기를 원했다. 덕분에 나는 일자리를 잃기는 했지만 그래도 심리적으로는 다행감을 느꼈었다.
중간에 휴학했을 때에는 잠깐 학원에 나간 적도 있다. 월급은 별로 안 많았던 거 같았는데 난생 처음으로 중학생도 갈쳐보고 나름대로 재미도 있었다. 멀쩡하게 생긴 범생이 여중생들이 담배 피우는거 보고 화들짝 놀랐던 기억도 난다 ㅎㅎㅎ
이렇게 모은 돈은 참으로 요긴하게 쓰였다. 학비와 각종 부대비용(책값이 정말 비쌌다 흑.), 활동비(?)... 다행히 장학금을 받을 수 있어서 졸업할 때까지 4백만원 정도 저축도 할 수 있었다. 내가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던 건 공부를 잘 해서 이기도 하지만(음하하.. 자만심..) 장학재단에서 기준으로 제시하는 가정형편에 해당하는 사람이 의대 내에 거의 없었기 때문에 경쟁이 없었다는 점이 큰 역할을 했다. 참 잘들 살더라....어쨌든 그 코묻은 돈은 오빠 결혼 때 전세값으로 모두 기부당했다.
이후.. 인턴, 레지던트 하면서 정식으로 월급을 받고... 나 개인의 경제적 곤란은 상당부분 해결되었지만, 그 와중에 집안은 하나도 나아지지 않았다. 나이드신 부모님이 할 수 있는 일들은 점점 줄어들었으니까....
오만가지 다른 잡다한 일들이 많았던거 같은데 짧게 했던 일들은 잘 기억이 안 난다. 하지만 최근의 두 가지 일은 아주 생생하게 떠오른다.
5. 부적 다듬기
이게 뭔 황당한 일인가... 궁금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도 처음에 그것들을 보고 어안이 벙벙했다. 대전에서 지내다가 주말에 모처럼 집에 갔더니 마루에 금박 문양이 찍힌 새빨간 부적들이 널부러져 있다. 울 부모님 두분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 (ㅜ.ㅜ). 진상 파악에 나서본 즉.. 당시에 우리 동네에서 잘 나가는 부업 중 하나란다. 금박 찍힌 빨간 천이 테이프처럼 길게 말려서 나오면 그걸 일정한 길이로 잘라서 반을 접어 (인쇄한 쪽이 나오게) 투명한 비닐 커버 안에 끼우는 작업이었다. 울 엄마의 설명으로는 그게 외국으로 수출되는 거라는데, 여태까지 집에서 한 일 치고 외국에 수출한다는 설명이 없는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우리 집도 당당한 수출 역군이었던 것이다. 이 일은 가위질, 그리고 자연히 날리는 섬유먼지들이 좀 고달프기는 했지만 커버에 끼우는 일은 비교적 쉬웠다. 크기가 꼭맞는 플라스틱 자를 찾아내서 이 작업 할 때 엄마의 수고를 반으로 줄이는 기특한 일을 하기도 했다. 하나 끼우는데 십원 정도 했으니까 단가도 아주 나쁘지는 않은 편이었다. 그 당시에 집에 귀신이라도 찾아왔으면 혼비백산해서 도망갔을 거다. 집에 수 천개의 부적이 그득이... 쌓여 있었으니...
6. 딱지 다듬기?
다듬기.. 라는 표현말고 뭐가 적합할지 모르겠다. 이것도 최근, 내가 미국에 오기 거의 직전까지 엄마가 드문드문 하시던 일이다. 여기서 딱지라 함은 우리가 어렸을 때 달력 종이나 신문지, 공책 표지 등으로 접어서 가지고 놀던 사각형의 그 딱지를 말한다. 처음에는 나도 이 품목을 보고 도대체 뭐에 쓰는 물건인고 의아했는데, 그것이 딱지 재료라는 것을 알고 더욱 놀랐다. 요즘 아이들은 남는 종이를 가지고 딱지를 만드는게 아니라 포켓몬이나 디지몬이 그려진 이런 "고급" 재료를 이용하는구나..... 각종 만화캐릭터가 접이면마다 인쇄된 딱지 재료(ㅎㅎ)가 여러개 줄줄이 붙어있는 형태로 배달이 되는데, 이걸 뜯어서 반을 접고, 그걸 10장씩 묶어서 얇은 종이봉투에 담으면 끝나는 일이다. 종이를 뜯다보니 먼지가 좀 난다는 단점은 있지만 정말 아무 생각없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주로 주말에 서울에 가다보니, 이 딱지 생각을 하면 자연스럽게 토욜 밤에 일을 하면서 보던 "느낌표" 와 일욜 아침 "서프라이즈"가 떠오른다. 그러나 암 생각 없이 TV 보면서 일을 하다가 나중에 일어날 때면 어깨, 허리, 무릎 안 아픈 데가 없었다. 울 엄마도 아파 죽겠다고 했다. 후딱 해치우려는 욕심에 자세도 바꾸지 않고 열중한 탓이다. 이거는 단가가 기억이 안 나네...
밖에 나가면 의과대학에서 일하는 교원이요, 집안에서는 딱지 접기를 돕는 무급가족봉사자...어떻게 나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ㅎㅎㅎ
또하나..심증은 가나 물증이 없는 가설... 표준직업 분류 상 "주부"로 표기되는 우리 어머니들의 이런 비공식 노동이 건강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내용도 허접하고 영어는 더욱 허접했던 오늘의 발표. 아... 좌절이다. 내일 또다른 제 2, 제 3의 허접 발표가 또 기다리고 있으니 이번 주 좌절 연속이다. 듣는 사람들도 괴로웠을 거다. 어찌 보면 고마운 사람들 (ㅜ.ㅜ)...
이 와중에 짬을 내어 글을 쓴다. 망중한이라 했던가.. 나의 방어기제는 급한 일들이 많아지면 역치가 상상초월 수준으로 높아져서 마음이 오히려 안정된다는 것. 아마도 무의식 세계는 지금 난리굿이 벌어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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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갑 만들기
이건 아마도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했던 일 같다. 연대기는 주로 살고 있었던 집에 근거해서 파악할 수 있다. 전세방을 옮겨다녔기 때문에 기억나는 집의 구조를 통해 시대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장갑이라 함은 털장갑이 아니라 (가짜) 가죽 장갑(진짜였을지도 모르겠으나 어린 시절이라 구분이 불가능), 결혼식 등의 예식에 사용하는 레이스 장갑, 체육대회나 각종 테이프커팅 행사에 사용하는 흰색 장갑을 말한다. 나이 드신 아저씨 한 분이 재단된 보따리를 우리집에 풀어놓고 가면 재봉틀로 바느질하고, 마무리해서 뒤집는 것이 일이었다. 엄마는 재봉틀에 앉아서 재단된 감을 두장 겹쳐 손가락 모양을 따라 박음질을 하셨고, 내가 주로 했던 일은 감을 재봉틀에 올려주기, 경쾌한 소리와 함께 줄줄줄 꽈배기처럼 내려오는 장갑들을 쪽가위로 잘라서 하나씩 떼어놓기, 모양을 내기 위해 2차 박음질이 필요한 장갑들을 다시 재봉틀에 올려놓기, 그리고 마지막에 뒤집기 등이었다. 글을 쓰면서 생각해보니까 오빠는 일을 별로 거들지 않았던거 같다. 이미 그 때 학생이어서 그랬나? 그래봤자 초등학생인데? 하여간 장갑이 재봉틀에서 뚝딱 만들어져 내려오는 모습은 무척이나 신기하고 재밌었다. 새로운 장갑이 오면 꼭 끼어보고는 했다. 그렇게 많은 레이스 장갑이 필요하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우리 집 말고 이 일을 하는 곳이 또 있었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난다. 엄마 없을 때 재봉틀에 올라가서 전등 켜놓고 장난치다가 감전되어 화들짝 놀랬던 기억은 난다. 너무 어린 시절이라 우리 엄마가 받았던 임금이 얼마였는지는 도저히 모르겠다. 그러나 실밥이 많이 날렸고, 엄마가 하루종일 백열전구 밑에서 일을 하면서 몹시도 힘들어했었다는 건 기억이 난다.
2. 라디오 부속품?
그 때도 몰랐고 지금도 여전히 그 용도가 무엇인지 짐작이 안 가는 품목이다. 길이 1~2센티미터 되는 플라스틱 사출물 ("ㄷ" 모양)의 홈에 여러 개의 철심을 끼우고 자그마한 프레스 같은 것으로 꾹 눌러주는 것인데, 사람들 말로는 이것이 라디오의 부속품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이 일은 우리 동네 전체에서 아주 인기(?)있는 일이었다. 사람들이 좋아해서 한 거 같지는 않고, 인근 공장에서 물량이 딸려 온 동네에 이 일을 뿌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도 기억나는 건, 단가가 무지하니 싸서 천 개를 조립해야 겨우 백원 정도 받았던 거 같다. 그 때도 힘든 것에 비해 가격이 형편없이 싸다고 온동네 사람들(울 엄마, 아줌마들, 그리고 동네 아이들)이 욕했었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 길이도 안 하는 철심 대여섯 개를 하루 종일 박고 있다보면 손가락 허물이 벗겨지고 시커멓게 색도 변하고, 어깨도 아프고, 무엇보다 쇳가루 플라스틱 가루가 많이 날렸다. 그래서 이 일은 주로 마당, 골목길에 옹기종기 모여앉아서 하고는 했다. 겨울에는 일이 없었나?
3. 신발 주머니
울 엄마가 처녀 적에 익힌 재봉 기술은 두고두고 우리 집 살림에 큰 (아니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중학교 동안에는 신발주머니 만드는 일을 하셨다. 근데 이게 이쁜 만화 그림 그려진 신발주머니가 아니라 시커먼 합성섬유로 만들어진 그야말로 가장 싸구려 품목이었고 울 엄마는 남는 천을 이용해서 우리 신발주머니랑 도시락 가방 같은 것도 만들어주셨다. 정말 뽀다구 안 나는 품목이었다. 이것도 장갑 만드는 것과 비슷하다. 엄마한테 재단된 감 올려주고, 줄줄이 내려오는 신발주머니 받아서 쪽가위로 자르고, 실밥 정리해서 다시 올리고, 그리고 마지막 뒤집기.. 먼지는 장갑보다 덜했던거 같은데, 천에서 나는 화학약품 냄새가 싫었고, 무엇보다 감이 뻣뻣해서 뒤집기를 할 때 손의 피부가 많이 상했던거 같다. 임금은 역시 형편없이 낮았던 걸로 기억되고 심각했던 것은 물량 공급과 기한이 일정치 않아서 아주 늦은 밤까지 일을 해야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이 무렵 다른 집들에서는 또다른 일감들이 있었다. 이를테면 레이스 자르기. 이게 뭐냐 하면, 레이스는 보통 넓은 폭으로 한꺼번에 여러 칼럼(?)이 직조되는데, 그걸 가위로 잘라 분리하여 여러 개의 레이스를 만드는 것이다. 이 일도 먼지가 굉장히 많이 날리고, 하루 종일 가위질을 해야하는 데다가, 집중(!!!)이 필요한 작업이기 때문에 힘들다고 정평이 나 있었다. 또 기억나는 일은 구슬 만드는 일인데.. 목걸이 알처럼 가운데 구멍이 뚤린 구슬의 양쪽을 실로 왔다갔다하면서 겉을 감싸는 일이다. 장식용 비드처럼 쓰였던거 같은데, 나중에 고정을 시키는 본드 냄새가 문제였다.
4. 내가 학업도 작파하고 이런 일에만 매달렸다는 것은 아니다. 울 엄마한테는 이게 생업이었지만 나에게는 어디까지나 효도의 한 품목이었다. 하지만 엄마가 그렇게 일하는데 옆에 디비져 누워서 텔레비전이나 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어려서는 싸가지가 있는 편이었다). 친구들이 놀러오면 같이 신발주머니를 뒤집으면서 수다를 떨었던 기억도 난다.
울 아빠가 실업자도 아니었고, 빚보증을 잘못 서서 가정 경제가 파탄난 것도 아니었는데, 항상 그렇게 아둥바둥 일해야 먹고 살 수 있었다는게 새삼 놀랍다. 울 엄마의 (생업에 가까운 부업) 행렬은 최근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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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가입을 홍실이한테 강력히 추천받고 이제 당 활동 1년이 돼 가는데, 여전히 여기서도 당에 대한 활동도 제한 받게 되고, 기껏 뜻이 비슷한 사람들만 모여서 넋두리만 하는게 요즘일이지.탈당하고 싶다는 굴뚝같은 생각과 그래서는 안된다는 책임감속에 자못 갈등하고 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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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뭔가를 하긴 해야하긴 하는데...근데 어찌보면 개업의로써 환자수 늘리기에 고심하면서, 이런 활동을 할려고 보면 어떻게 보면 내스스로도 아이러니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아뭏든 금년은 내 스스로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해인것 같애..며칠 남지는 않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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