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삽입 이미지1.

언제 어느 때고 ‘혁명’을 얘기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수업까지 빼먹고 참석한 학회 세미나에서도. ‘가투’가 끝난 술자리에서도. 심지어 단체 미팅을 나가서도 머릿속엔 온통 딴 생각이었지요. 그러니 영화며, 소설도 ‘혁명’을 얘기하지 않으면 취급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였던가요. <어머니, 당신의 아들>이라는 영화 한편을 보기 위해. 반나절이 넘는 치열한 ‘전투’도 마다하지 않았고. 선배들이 건네주는 두툼한 복사본, ‘정치경제학’을 두고는 순번까지 정하기도 했지요. 그리고 생각지도 않았던 책들이 번역돼 나오면. 전공 책은 선배들한테 떼써서 물려받을지언정 꼭 사보았습니다.  

  

여기 니콜라이 알렉세비치 오스트로프스키Nikolai Alekseevich Ostrovskii가 쓴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처럼 말이지요.

  

2.

두 눈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몸마저 점점 마비가 되는 상황에서도 불굴의 의지로 《폭풍 속에 태어나는 자》라는 소설을 써낸 코르차긴은 글쓴이 오스트로프스키 자신이겠지요.

  

자구(字句)가 겹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가로로 여러 행의 홈을 만들어 놓은 판지로 된 깔개를 이용한 글쓰기. 오스트로프스키 스스로가 만든 이 방법으로 코르차긴은 글을 써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스트로프스키(1904-1936)는 소설 속 주인공 파웰이 한 번은 분실했던, 자신이 전에 코토프스키 사단에 보냈던 전시(戰時) 중 추억을 다룬 ‘폭풍 속에서 태어나는 사람들’을 두 번째 작품으로 써 내려가던 중, 32세라는 짧은 나이로 생을 마치고 맙니다.

 

코르차긴의 어머니 마리야 야코브레브나가 아들들에게

“그런데, 얘들아, 너희들 이제부터 어떻게 할 작정이냐?”

라고 묻자,

“다시 제자리로 들어앉는 거지요 뭐, 어머니”

하고 말하는 형 아르촘과 달리 일이 기다리고 있는 키에프로 돌아가는 파웰과도 같이, 모스크바로 향하던 도중에 말입니다.

 

3.

글을 옮긴이는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숄로호프Michail Aleksandrovich Sholokhov가 쓴 <고요한 돈강>,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Lev Nikolayevich Tolstoy의 <고뇌 속에 가다>와 함께 이 책을 러시아 혁명을 무대로 한, 진정한 혁명의 서사시라고 추켜세웁니다.

 

물론 뒤의 두 책들이, ‘혁명을 만나서 사상적 동요와 회의(懷疑)의 포로가 된 인간의 심리를 그려낸 것으로써, 소비에트 문학에 새로운 한 장(章)을 추가한 것’(p.8)이 분명하다면.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는 그야말로 정통적인 혁명 소설임이 틀림없다고 단언하지요.

 

철저한 노동자 출신으로 러시아 혁명에 뛰어든 가난한 소년공 파프카. 그리고 오스트로프스키. 그들이야말로 무수한 난관을 뚫고 강철로 거듭난, 진정한 혁명가라는 것이지요. 

 

 4.

‘민주주의’만 얘기해도 ‘빨갱이’라 몰리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니 ‘혁명’을 말한다는 건. 그래요. “쉬운 일이 아니었지.” 하지만. 그렇게만 말하기엔. 시간이 많이 흐르긴 했지만, 그건 너무 낭만적으로만 회상하는 것일지 모릅니다. 

 

그리고 또. 지금은 다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지만. 그저 ‘혁명’을 술안주로 올리기엔. 이 순간. 이 시대. 그리 녹녹치만은 않으니. 20년이나 지난 어제, 다시 이 책을 읽어 내려가는데. 가슴 속에 뭔가가 꿈틀꿈틀.

 

아직 늦지 않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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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4 21:54 2010/09/14 21:54

서리태 순지르기

from 10년 만천리 2010/09/13 00:31

서리태 순지르기 - 첫째 날(9월 6일/가끔 비 22-28도)

 
태풍이 지나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태풍이란다. 올 여름은 정말 ‘징하다, 징허’라 할 만큼 비가 많다. 건달 농사짓는 사람이야 뭐 대수겠냐, 마는 이래가지고는 농부님들, 참 농사짓기 힘들겠다.
 
비가 이리 많이 오니 밭에 나갈 시간도 많지 않고. 잠깐 해가 나올 때 일한다 해도 겨우. 급한 것들만 처리하고 오는 정도니 밭 상태가 꽤나 심각하다. 세찬 바람에 쓰러져 버린 옥수수들도 미처 다 세우지 못했고. 콩은 한참을 웃자라 잎과 줄기가 무성하다. 이것저것 손 봐야 할 게 많지만 아무래도 이번 주는 콩 순지르기가 우선일 듯.
 
태풍이 온다고는 하는데 다행히 오후가 되자 비가 그치고 해가 나온다. 아직은 무더운 날씨니 급하다고 땡볕에 나갈 수는 없고. 그래 네 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나와 일을 하니. 겨우 두 이랑 남짓 풀 뽑고 순 지르고. 이거 속도가 너무 더디다. 하지만 어쩌겠나. 급하다고 바늘허리에 매어 쓰지 못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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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태 순지르기 - 둘째 날(9월 7일/맑음 20-29도)
 
다행히 ‘말로’만 태풍이 춘천까진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덕분에 이틀은 더 일할 수 있을 것 같고. 주말에 또 비소식이 있긴 하지만. 잘만하면 이번 주 안에 서리태를 심은 곳은 정리를 마칠 수 있을 듯. 또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다 이미 빨갛게 된 지 한참이 지난 고추도 수확한다. 오늘같이 햇볕 좋고 바람만 잘 불어준다면 다음 비가 올 때까진 어느 정도는 말릴 수 있겠지, 하는 생각으로. 하지만 따낸 고추 절반 이상이 이미 썩거나 물러져 있어 말리기 어려우니. 쾌히 마음이 좋지는 않다. 
 
서리태 순지르기 - 셋째 날(9월 8일/흐림 17-24도)
 
정신없이 풀 뽑고 순지르다 보니 해 지는 줄도 모른다. 어둑어둑해서야 자전거에 오르는데. 불과 며칠 사이 해 지는 시간이 많이 빨라진 듯하다.
 
서리태 순지르기 - 넷째 날(9월 9일/흐리고 비 19-21도)
 
오늘로 서리태 순지르기는 대충 마무리가 됐고. 오후에 비가 온다는 얘기가 있으니. 부식으로 할 감자도 조금 캐고. 다 죽어가는 고추에서 장아찌 담글 풋고추를 건져내고. 곁다리로 죽지 않고 살아남은 빨간 고추들도 따고. 한동안 손대지 못했던 땅콩 밭도 풀매고. 이것저것 꽤나 일을 했는데도 다행히 비가 오지 않았다.
 
장대비(9월 12일/비온 후 맑음 20-25도)
 
9일 낮부터 오늘 아침까지 춘천에 쏟아진 비가 무려 344.5mm다. 둘째 날이 가장 심했는데. 무려 195mm가 왔다. 그야말로 장대비였던 셈. 와도와도 너무 오는 것 같다. 이래가지고야 무신 농사가 될는지. 안 그래도 중곡동에서 안부 전화가 왔기에 그저. “어쩌겠어요. 그런가보다 해야지요. 하고 말았다. 하지만 갈수록 이상스러워지는 날씨가 걱정되지 않을 수밖에. 그런데도 무심한 건지, 애써 외면하는 건지. 누구 하나 뭔가 잘못됐다, 말하는 사람이 없으니. 유별나게 호들갑 떠는 것도 같고. 그냥 변화하는 날씨에 맞게 농사를 바꾸는 게 맞는 건지. 정말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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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3 00:31 2010/09/13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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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날, 꼬마기차 타고 자개골 입구로(2007년 3월 1일)
 
증산에서, 지금은 아우라지역으로 불리는 여량까지 하루 두 차례 운행하는 꼬마열차를 타고 지난 번 걸었던 길을 되짚어 오르니 길을 걸을 때와는 또 다른 맛이다. 완연한 봄기운은 창안으로 쏟아지는 따뜻한 햇살에 담겨 있고, 정선에서부터 기찻길과 쭉 함께 하는 조양강의 풍경과 천 미터를 오르내리는 정선의 산들의 협곡들은 기차여행의 맛을 제대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또 ‘이별하는 골짜기’라는 이름답게 이제는 뭇사람들과 ‘이별’하는 별어곡역, 지난 1966년 12월 30일 준공된, 기차여행가들의 성지로 된 선평역, 지금은 철거가 중단된 몇 안 되는 목조역사인 나전역, 전에는 여량역으로 불리었으나 이웃한 아우라지의 명성으로 이름마저 바뀐 아우라지역 등 역무원조차 없는 간이역이 시간을 세워놓고 기다리니 쉬엄쉬엄 가야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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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열차에서 본 아우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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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밀을 속 껍질째 갈아 까뭇까뭇한 가루를 여러 번 치대며 반죽을 해 제물에 삶아 내는 데 국수발이 하도 쫄깃쫄깃해 들여 마실 때 국수꼬리가 콧등을 친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콧등치기 국수를 아우라지 역 앞 이름 모를 식당에서 한 그릇 씩 먹고 나니 금세 4시가 가깝다. 오늘은 자개골 입구까지만 걷기로 했으니 대략 2시간 내외면 될 터이지만 아직은 해 떠있는 시간이 짧기만 한데다 산골짜기 길이라 서두르지만 오만 군데 여행 정보지에 담긴 구절리 레일바이크 구경을 빼놓을 수는 없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하자개에 도착하니 시간은 5시밖에 되지 않았는데 어째, 날이 흐려서인지 아님 산골이라 해가 짧아서인지, 벌써 어둑어둑하다. 서둘러 쉬어 갈 곳을 정해야겠는데 전화를 돌려보는 곳마다 방이 없다는 둥, 겨울에는 민박을 하지 않는 다는 둥 마땅치가 않다. 여기서 더 가봐야 별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해서든 머물 곳을 찾아야 할 텐데,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전화를 돌린 동신하우스라는 민박집 아주머니께서 두말없이 일단 올라오란다. 빈방은 없지만 자기 자는 곳 한켠에서 잔다면야 돈 안 받아도 된다는 말과 함께. 어찌 마다할까.
 
민박 집 앞에서 아주머니를 부르니 집 뒤편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으로 아주머니가 내려오시는데, 아주머니를 따라 2층 거실에 들어서니 생각지도 못했던 강아지 새끼 네 마리가 우리를 반긴다. 고약한 발 냄새가 나는 발목을 번갈아 휘어 감으며 킁킁 냄새를 맡는데 대략 난감이다. 그래도 씩씩하게 우리 집인 양 번갈아 가며 따뜻한 물에 목욕까지 하고 나와 곧 다가올 정월 보름을 앞두고 몇 가지 나물을 했다며 내준 저녁밥을 두 그릇씩 얻어먹고는 아주머니 자식 자랑에, 남편 흉보기에, 우리들 여행이야기에, 밤이 깊어간다.
 
  
 
둘째 날, 악천고투, 빗속을 뚫고 봉산재를 넘어 진부로(2007년 3월 2일)
 
정선의 자개골과 평창의 신기를 이어주는 옛 길은 전에는 오솔길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가파른 길을 다소 돌아가거나 차가 다닐 수 있도록 길을 넓혔다고 한다. 하지만 정선쪽 자개골쪽이나 평창쪽 신기리쪽 어느 곳에서 길머리를 잡든 포장되지 않은 흙 길을 걸을 수 있는데다 마을 사람들 이외에는 인적을 찾아보기 어려우니 길을 걷는 맛만큼은 여느 길보다 좋다. 하지만 오지마을이라고 할 봉두곤리가 겨우 흔적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지난해 수해로 큰 피해를 입어, 구절양장 이어지는 산길을 걸어 올라가는 발걸음만큼이나 마음 또한 무겁기만 하다.
 
6시, 멀리 봉산재 위로 햇살이 퍼진다. 혹여 아주머니가 깨실까 조심조심 세면을 하고, 옷을 갈아입고, 문을 열고 나서니 햇살위로 먹구름이 하늘을 덮는다. 어제 저녁 뉴스에, 기상청 예보에, 비가 올 거라 들었고, 마침 비옷까지 준비를 해오기는 했지만 아주머니로부터 지난 해 수해 이야기를 들었던 차라 조심조심할 수밖에 없다. 일단 봉산재 아래 상자개와 봉산리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대광사까지 가보기로 한다. 물론 비 내리는 모양이 범상치 않다면 바로 발길을 되돌리기로 하고.
 
사용자 삽입 이미지하자개에서 상자개를 거쳐 대광사까지 이르는 동안 다행히 비는 내리지 않는다. 하지만 곳곳에 계곡 물로 길이 끊겨 있어 흔적을 겨우 찾을 수 있는 옛길을 걸어야 하고, 때로는 발목까지 차가운 계곡 물에 담가야만 길을 이어갈 수 있어 무척 힘이 든다. 급기야 대광사를 지나 봉산재 아래 하늘마을 봉산리에 이르러서는 흔적 없이 사라진 마을이 길을 막아 다리에 힘이 쭉 풀리고 만다. 준비해간 지도에는 다리며, 아무개 집이며, 휴양지관리사무소며, 봉산분교며 이것저것 표시도 많지만 대광사와 봉산분교터와 마을 표석과 봉산리 마을 입구 성황당만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허참.
 
봉산리에서 시작된 긴 오르막길에 접어들자 빗방울이 조금씩 굵어지기 시작한다. 비야 대광사 못 미쳐 한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해 아무렇지 않지만 모처럼 만난 흙길 때문에 되려 발걸음이 무겁다. 그래도 조금 쉬고 조금 오르고 또 조금 쉬고 조금 오르고 하며 한참을 오르니 어느새 고갯마루다. 올라온 길을 뒤로는 하얗게 눈 덮인 두루봉이 코앞이고 내려갈 길 앞으로는 역시 하얗게 눈 덮인 박지산이 코앞이다. 이제 서울에선 보기 힘든 눈 구경에 잠시 마음이 들뜨기도 하지만 잠시 숨만 고르고는 곧 길을 나선다.
 
봉산재 옛길에 대해 알려주는 여러 정보에 의하면 신기리까지는 대략 2시간 정도면 될 듯한데, 빗줄기는 더 굵어지지, 핸드폰은 터지지 않아 시간은 알 수 없지, 길은 갈수록 진흙탕 길이지, 오가는 사람 하나 볼 수 없지, 기온은 떨어지지, 준비해 온 간식은 다 떨어졌지, 막상 신기리에 도착하니 어째 하루 종일 걸은 듯하다. 그야말로 악천고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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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절양장 봉산재 옛길을 걷다>
 
가까운 곳에 청심대(淸心臺)가 있으나 둘러보지 못하고 신기리 마을 입구 버스정류장에서 쏟아지는 비만 잠시 피하고는 또 바삐 걸음을 옮긴다. 이젠 걷는 다기 보단 그저 발을 앞으로 내딛을 뿐이다. 멀리 진부가 손에 잡힐 듯 보이지만 막상 도착하고 나니 아까 쉬었던 곳에서 1시간을 넘게 또 걸어야 했다. 파김치 몸을 이끌고 체면도 없다. 처음 눈에 들어온 중국집에 들어서니 몸과 방바닥이 어느새 하나다. 그렇게 누워 한쪽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시계 바늘이 3과 12에 걸렸다. 자개골에서 7시에 출발했으니 꼬박 8시간을 쉬지 않고 빗속을 걸은 셈이다.
 
* 열여덟 번째 여행에서 걸은 길
- 첫째 날 : 아우라지에서 자개골 입구 하자개까지 약 4km. 걸은 시간 1시간 30분.
- 둘째 날 : 아우라지에서 봉산재를 넘는 옛길을 따라 신기리까지 여기서 다시 59번 국도를 따라 진부까지 약 30km. 걸은 시간 8시간.
 
* 가고, 오고
증산에서 아우라지를 왕복하는 꼬마열차는 오전 9시, 오후 2시 두 차례 정선에서 출발하는데, 청량리에서 오전 10시 출발하는 무궁화 열차를 이용하면 내린 곳에서 오후 2시에 출발하는 꼬마열차로 갈아 탈수 있으니 이편을 놓쳐서는 안 된다. 진부에선 대관령 너머에서 오는 시외버스가 잠시 들렀다 서울로 오는데 꽤 자주, 그리고 늦게까지 있다.
 
* 잠잘 곳
자개골 입구 하자개에는 산수갑산, 동신하우스, 자개골민박 등 민박이 몇 있으나 겨울철에는 민박을 하지 않으니 미리 사전에 확인을 해야 하며, 이곳을 지나 봉산재를 넘어 신기리까지는 민박은커녕 민가조차 없으니 단단히 준비해야 한다. 신기리쪽은 신기리에서 진부까지 1시간 거리니 진부쪽에서 숙박을 하면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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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6 13:18 2010/09/06 13:18

곤파스

from 10년 만천리 2010/09/05 22:14

북상중인 태풍(9월 1일/무더움 26-32도)

 
엎친 데 덮친 격, 그야말로 설상가상이다. 지금부터라도 해가 나와야 뭐든 할 수 있을 터인데. 태풍이 올라온다고 하니. 그것도 강한 세력을 동반해 중부지방을 통과한다고 하니. 대체 뭘 어찌해야 할 지 모르겠다.
 
고추들은 진즉에 빨갛게 되기 시작했건만. 건조기가 없는 이상 말릴 수 없으니. 비가 그치면 따자, 한 게 벌써 보름이 넘었다. 그러니 하나, 둘 죽어나가는 것도 있고, 빨간 고추는 짓물러 터지고. 옥수수도 이미 다 땄어야 하는데. 오늘에서야 겨우 다 쓰러져가는 것들에서 몇 개를 따니.
 
다행인지 고구마와 땅콩은 그 와중에도 잘 자라고 있고. 팥은 아직 아니지만 메주콩과 서리태가 꼬투리를 튼실히 만들고 있으니. 그걸로 위안은 삼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바로 옆에 있는 토마토며 호박들이 시들시들해지니 그것도 잠깐이다.
 
그래도 어쩌겠나. 하는 데까진 해보자, 며 아침나절부터 밭에 나와 지주도 손봐주고, 물고랑도 다시 파고. 며칠 새 또 열린 가지며, 오이를 따내고. 옥수수도 첫 수확을 하고 땅콩 밭도 풀 매주고 나니 마음이 조금 놓인다. 하지만 태풍이 이만저만 큰 게 아니어서 걱정이 다 놓이는 건 아니다.
 
곤파스 - 첫째 날(9월 2일/흐림 22-26도)
 
태풍이 지나간 자리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다. 오이, 토마토, 호박 지주는 한편으로 쓰러졌고. 고추는 절반이 넘게 쓰러졌다. 옥수수도 모조리 넘어갔고, 사이사이 심은 콩도 덩달아 쓰러졌으니. 밭으로 가기 전 마음을 다 잡았지만 막상 보고 나니 심란하다. 그래도 어쩌겠나. 일단 하는 데까진 해봐야지. 다
 
행히 바람과 비는 잦아들었어도 해는 보이지 않으니 일하기엔 좀 낫다. 결국 반나절 가까이 일하고 나니. 고추는 다 일으켜 세웠고. 콩밭도 세 이랑은 정리를 했고. 그제야 마음이 조금은 놓이는데. 그래도 여기저기 쓰러진 옥수수며, 콩들을 보고 있자니. 이거 어찌해야 하나. 걱정이 태산이다.
 
곤파스 - 둘째 날(9월 3일/흐리고 비 22-28도)
 
이틀째 피해복구다. 헌데 진도가 나질 않는다. 오후에 또 소나기가 예보돼 있어 아침나절 밭에 나갔는데. 겨우 두 시간 남짓 일하고 나니 후두둑. 내일은 또 의정부엘 가야 하니 아무래도 오늘은 손을 많이 봐야 할 터인데. 비가 오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얼마나 일을 했나 돌아보니 달랑 콩 밭 세 이랑, 쓰러진 콩 일으켜 세우면서 순 지르고 풀 뽑은 거 밖에 없다. 이런. 이대로 돌아가선 안 될 듯 해 비를 맞으며 일하는데. 괜히 날 더울 때 일하는 거보단 되레 시원하니 좋다. 해서 세 시간을 다 채우고 쏟아지는 비를 철철 맞으며 자전거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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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5 22:14 2010/09/05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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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월산대군, 양녕대군과 효령대군, 하원군과 하릉군, 임해군, 이재면.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바로 조선시대 왕의 형으로 살았던 이들입니다. 월산대군은 성종의 형으로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은 세종, 하원군과 하릉군은 선조, 임해군은 광해군, 마지막 이재면은 고종의 형이었던 겁니다.
  
봉건왕조시대에 태어나 왕으로 오르지 못한 채 상왕 또는 대군으로 살아야했던 이들은 타의든 자의든 늘 권력투쟁의 중심에 있었지요. 그 때문에 어떤 이는 궁을 떠나 은둔의 삶을 살아야 했고, 또 어떤 이는 권력의 허망함을 탓하며 주색잡기에 빠지기도 했지요. 물론 밤이 깊도록 왕과 국사를 논할 수 있었던 운 좋은 이도 있었지만. 하루하루 목숨을 부지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던 것이 이들의 운명이었다면. 너무 가혹한 것인가요.
 
 
2.
전기환. 노건평. 대통령의 형이라는 이들. 모두 감방에 가야했습니다. 물론 동생들이 대통령에서 물러난 이후에요. 전기환은 노량신수산시장 강제 강탈 건으로. 노건평은 세종증권(현 NH증권) 매각비리로 말입니다.
  
요즘 어떤 한 사람이 자주 신문에 오르내립니다. 하긴 일본으로 리비아로 그리고 또 볼리비아로 하도 왔다 갔다 하니 기사거리도 많겠지요. 게다가 이 사람 동생이 지금 대통령을 하고 있으니 오죽하겠습니까.
 
헌데. 이 형이란 사람 말이지요. 일본인들을 만나서 한 일이란 게. 한일강제병합 100주년 사과 담화에 앞서 ‘전향적 담화가 나올 경우 역사인식 문제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라는 입장을 전달한 거랍니다.
 
또 리비아에서는 당초 ‘자원외교’를 하기 위해 갔다고 했으나. 간첩 혐의로 추방된 주리비아 대사관 정보담당 직원 문제 해결을 위해 특사로 방문한 거였다는데. 가서는 ‘몸이 아픈 데도 직접 왔다고 팔의 주삿바늘을 보여’주는 눈물겨운 일을 하고 왔답니다.
 
하하. 이러니 일부에서는 ‘만사兄통’이니 ‘영포대군’이니 하는 말들이 나도는 것인가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3.
볼리비아는 300여 년 동안 스페인의 통치 밑에 있다가 1825년에야 겨우 독립을 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독립 이후 최근까지 무려 150-200여회에 이르는 쿠데타가 있었구요. 심지어 1960년대 중반부터 80년대 말까지 19명의 대통령 가운데 13명이 군인이었다고 하는데. 당시 중남미에서 친미반공정권을 세우기 위해 혈안이었던 미국으로부터 결코 볼리비아 역시 자유롭지 못했음을 보여주지요.          
 
헌데 볼리비아가 이처럼 극심한 정치적 혼란을 겪게 된 데에는 볼리비아가 갖고 있는 풍부한 지하자원. 1545년 볼리비아 북서지방 포토시(Potosi)에 도착한 스페인 침략자들이 처음 발견한 세계 최대 은(銀) 탄광에서부터 석유, 가스, 석탄, 철광, 주석에 이르는 다양하면서도 많은 매장량을 갖고 있는 자연자원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제국주의 세력을 등에 업은 군부, 자본가들의 야욕이. 토착 원주민을 자원개발의 노예로 전락시켜 만들어 낸 막대한 부를 서로 독점하려는 이전투구가. 무수한 군부 쿠데타로 이어진 것입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볼리비아 민중들이 겪은 수난과 고난은 이루 말로 다 표현 할 수 없을 지경이구요. 바로 도미틸라 바리오스 데 츙가라가 구술하고 모에바 비처가 기록한. <어머니들>은 이런 볼리비아의 아픈 역사를, 아픈 민중들의 삶을 담담히 이야기한. 그러면서도 미래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투쟁하며 전진하는 민중들의 모습을 힘 있게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4.
2006년 1월 21일. 이날은 볼리비아 대통령 취임식 하루 전날이었습니다. 수도 라 파즈(La Paz)에서는 보기 드문 축하 예식이 진행됐는데요. 에보 모랄레스(Juan Evo Morales Ayma) 대통령 당선자는 인디언 전통을 상징하는 붉은 겉을 걸치고, 또 맨발로 단상에 올랐구요. 인디언 부족인 Aymara족의 지도자는 이 맨발의 대통령에게 토착원주민의 상징인 은과 금으로 장식된 지휘봉을 증정했답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또 하나의 새로운 사회주의정부가 출범하는 데 대한 축하 행사가 토착 원주민의 전통 풍속으로 거행된 것이지요.
 
그리고 다음날 대통령에 공식 취임한 모랄레스는 과거 스페인의 침략과 착취, 그리고 근래에 이르러서는 신자유주의 광풍이라는 불안한 볼리비아의 현실 속에 굴하지 않고 사회주의 혁명을 향한 힘찬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뚜빠흐 까따리, 뚜팍 아마루 등 잉카의 지도자들에 대한 묵념에서. “체 게바라의 못다 이룬 혁명을 이어가겠다”는 목소리에서. “볼리비아의 모든 천연자원은 볼리비아인들의 것”이라는 외침에서. 인종차별(인디오에 대한 차별정책) 철폐, 신자유주의 모델 폐기, 전연가스 등 국내 자연자원에 대한 통제 강화라는 볼리비아 민중들의 염원은 현실이 되기 시작한 것이지요.
 
 
5.
우리나라와 볼리비아가 리튬개발에 손을 잡았다고 호들갑들을 떨고 있습니다. ‘한편의 역전 드라마’니 ‘자원외교의 성과’니 하면서 말이지요. 그리고 이런 얘기들 속에, 곁다리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대통령의 형이란 인물도 간간이 나옵니다. ‘특사역할을 한몫했다’라는 말과 함께 말입니다.
 
하지만. 그 먼 볼리비아까지 세 번이나 갔다 왔다던 ‘대군’. 리튬개발에 열광하는 언론들. 볼리비아의 아픈 역사에 대해, 볼리비아가 갖고 있는 저 자연자원으로 인해 생겼던 그 아픈 역사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하기야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고. 안에서도 제 나라 국민들이 겪는 고초를 나몰라 하는 사람들이 밖에 나가서는 얼마나, 알은체라도 했을까요.
 
‘자원외교의 쾌거’ 뒤에 숨겨진 그늘. 여러분들이라도 이 책과 함께 조금씩, 조금씩 알아가는 것, 어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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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2 18:22 2010/09/02 1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