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금은 나잇살도 있고 알 수 없는 맹신으로 몸 관리를 하지 않아 조금만 뛰어도 숨이 차고 땀이 나지만. 그래도 한 때는 이것저것 못하는 운동이 없었던 때가 있었지요. 초등학교 때까진 얼굴이 새카맣게 되도록 성수교 아래에서 야구도 하고. 중학교, 고등학교 땐 일요일 아침마다, 또 수업이 끝나자마자 농구장으로 달려갔고. 대학에 다닐 땐. 큭. 운동이 운동이긴 한데. 뭐, 따지고 보면 달리고 던지고 휘두르고 하니. 뭐, 운동이네요. 하여튼 그랬구요. 대충 이래저래 생각나는 것만 적어도 이만하니. 몸치라는 소리는 듣지 않았던 거죠.
 
한데 지금은. 밭에 가는 길에 그리고 집으로 오면서 왕복 1시간 남짓 자전거를 타는 거 외엔. 딱히 운동이란 걸 하지 않으니. 열심히 밭일해야 할 봄과 여름, 가을은 그래도 몸이 가뿐하고 뱃살도 나오지 않는데. 슬슬 찬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는 계절이 오면. 나름 탄력 있던 몸매가 급격히. 게다가 어느 때부턴가 몸을 움직이는 것보단 눈으로 보는 걸 더 즐기기 시작하니. 처음엔 월드컵이니 WBC만 보던 것이. 지금은 어쩔 땐 새벽 2시, 3시에도 하는 EPL 경기까지 챙겨볼 정도니.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는지.
 
암튼. 예전에도 그랬는데 하도 가끔 보는 거라 인식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건지. 그 많은 운동 경기 중계를 보는데. 이거. 조금 심하다, 싶을 데가 한 두 번이 아니더라구요. 잘 몰라 그런 건데. 원래 운동 경기 중계는 이렇게 하는 건가 싶기도 하지만. 운동 경기가 뭐 이기려고 하는 거긴 하지만. 그리고 응원하는 팀이나 선수가 이기면, 그리고 잘 하면 왠지 기분이 좋기는 하지만. 좀 과장해서 말하면. 운동 경기를 중계하는 게 아니라. 
 
최전방으로 이어지는 패스 하나로 상대방 방어망을 허물어 뜨렸어요”
대포알 슛으로 선취점을 올렸습니다”
“현란한 드리블로 적진 깊숙이 파고들어”
“좌, 우 쌍포를 앞세워 상대편 골망을 초토화시켜합니다”
 
거리낌 없이 군사용어가 튀어나오고, 핏대를 세우며 흥분하는 모습들이. 좀 과장해서 말하면. 마치 전쟁이라도 난 것처럼 난리도 아니더라구요. 그런데 말이지요. 이 정도 멘트는 애교로 봐줄만 하더라구요. 중요한 경기일 경우엔 조금 더 표현이 과격해지는데요. 
 
“팀 홈런 1위 롯데, 쉴 틈 없는 핵폭탄 타선 자랑”
“남자배구, 일본 격파 선봉
“중심타선 맹폭에 미국 무릎!”
“16강 절박, 융단폭격 나선다”
숙적 일본을 상대로 도쿄대첩을 거둔 바 있는 대표팀”
배수진을 치고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싸워야
 
이거야 원. 명량에서 사투를 벌이던 조선 수군이 따로 없고. 황산벌에서 몰살당한 백제 군사들이 따로 없네요. 이 정도면. 그야말로 죽기살기이구요. 선수들은 전쟁터에 나간 병사들입니다.
 
원샷 원킬’. ‘스나이퍼’ ‘산소탱크
‘전차군단’ ‘오렌지군단’ ‘무적함대’ ‘태극전사
 
 
2.
어찌된 일인지 올 해엔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드라마나 영화가 유달리 많이 나오고 있는 듯합니다. 표면적인 이유는 60주년이라서 그런다고들 하는데. 뭐. 운동얘기 하는데서 전쟁하지 못해 안달난 이들까지 들먹일 필요는 없지만. 우연이라고 하기엔 이상하리만치 묘한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뭐, 그거야 다 생각하기 나름이겠지만.
 
김동춘 샘은 한국전쟁 이후 우리 사회가 ‘전쟁이 사회 운영원리로 내재화되고 냉전적 정치경제 질서가 가장 철저하게 착근된 사회’가 됐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전쟁’ 중인 사회에서 힘없는 민중들은 끊임없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피난’ 행렬에 나설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피난사회’가 된 것이지요(이전 서평: ‘피난사회’에서 살아남기-<전쟁과 사회>, 김동춘 참고).
 
그리고 조희연 샘은 한국전쟁 이후 철저한 반공이데올로기가 내면화된, 그리고 그것이 정치, 사회 체제를 지배하는 반공규율사회가 됐다고 합니다. 즉 냉전과 내전의 특수한 결합으로 인해 반공이데올로기가 ‘의사합의(pseudo-consensus)’로 내재화된 특유한 우익적 사회라는 겁니다. 이 사회에서 개인 및 집단 간의 사회적 관계와 행위는 철저하게 우익적으로 규정되고, 민중들은 반공의식에 기초한 자기통제 메커니즘이 장착된 일종의 ‘군기(軍紀)’잡힌 병사가 되는 것이지요(<한국의 국가.민주주의.정치변동>, 조희연 참고>.  
 
조금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두 샘 모두 한국전쟁 이후 우리 사회가 북녘과의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은, 준전시체제 속에서 정치, 사회, 문화, 경제가 질식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두 샘이 이렇게 조금은 낯선 말들을 써가며 분석한 책들을 굳이 읽어보지 않았다 해도 말이지요. 지난 60년 간 우리 사회를 지배했던 ‘빨갱이’, ‘반공’ 이데올로기가 결국 이 이상하리만치 호전적인 기질을 만들어 냈다고 하면 비약이 조금 심한 건가요. 그리고 또, 그것이 며칠 전 별 생각 없이 시간이나 때울까 하고 봤던. 학도병을 소재로 한 영화와 겹치면서 이런 질문을 하게 만든다면. 억지 춘향일까요?  
 
“운동선수는 군인인가, 군인이 아닌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0/09/23 21:59 2010/09/23 21:59

메주콩 순지르기

from 10년 만천리 2010/09/20 15:19

메주콩 순지르기 - 첫째 날(9월 14일/맑음 22-28도)

 
당체 그칠 것 같지 않게 몇날 며칠을 비가 내리더니. 비가 그치자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갑작스레 아침, 저녁으로 찬바람이 부니 좀 어리둥절하기도 하고. 하지만 낮엔 30도까지 기온이 오르니. 가을인지 아직 여름인지는 헷갈리지만. 여기저기 햇볕에 말리러 내놓은 고추가 보이고. 덥다, 덥다 해도 한여름 불볕더위만치는 않으니. 가을이 오긴 왔나보다.
 
메주콩 순지르기 - 둘째 날(9월 15일/맑음 15-30도)
 
어제, 오늘 선선한 아침나절에 메주콩 순지르기를 한다. 짬짬이 고추도 따고. 땅콩, 고구마 심은 곳 풀도 매고는 하지만. 주 작업은 순 쳐내는 일이다.
 
메주콩 순지르기 - 셋째 날(9월 16일/맑음 15-30도)
 
요 며칠 같은 날씨만 계속된다면 원이 없겠다. 아침, 저녁으론 선선한 바람에 기온도 낮고. 낮엔 30도에 육박하지만 바람이 잘 불어 되레 뭐든 말리기에 딱이니. 지긋지긋한 장마가 끝나고 나니 하늘에서 상이라도 내려주나 보다. 그동안 비 때문에 고생들 많았지, 하고. 
 
지난주엔 나흘에 걸쳐 서리태 순지르기를 했는데. 메주콩도 내일까지만 하면 다 끝낼 수 있을 것 같다. 아직 물이 빠지지 않아 물컹물컹 발이 빠지는 곳은 아무래도 추석 지나고야 손을 봐야 할 듯한데. 그쪽은 콩을 얼마 심지 않아 한 시간이면 끝낼 수 있으니 말이다.
 
고추말리기(9월 17일/맑음 16-29도)
 
메주콩 순 치기도 오늘 아침 두 시간 남짓한 작업으로 끝났고. 예전 같았으면 고추 말리느라 손도 많이 가고 시간도 꽤나 잡아먹었을 터인데. 오랜 장마 덕에 고추가 대부분 죽어버려 말릴 고추도 많지 않아, 겨우 쌀 포대로 한 포대나 될는지. 그러니 뭐. 너는데도 별로 시간도 안 걸리고. 이래저래 고구마 캐기 전까지는 널널하겠다. 그래 내일은 오랜만에 걷기여행을 가기로 했으니, 높게 뜬 구름만큼이나 마음도 한껏 들뜬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0/09/20 15:19 2010/09/20 15:19
Tag //

 

사용자 삽입 이미지1.

언제 어느 때고 ‘혁명’을 얘기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수업까지 빼먹고 참석한 학회 세미나에서도. ‘가투’가 끝난 술자리에서도. 심지어 단체 미팅을 나가서도 머릿속엔 온통 딴 생각이었지요. 그러니 영화며, 소설도 ‘혁명’을 얘기하지 않으면 취급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였던가요. <어머니, 당신의 아들>이라는 영화 한편을 보기 위해. 반나절이 넘는 치열한 ‘전투’도 마다하지 않았고. 선배들이 건네주는 두툼한 복사본, ‘정치경제학’을 두고는 순번까지 정하기도 했지요. 그리고 생각지도 않았던 책들이 번역돼 나오면. 전공 책은 선배들한테 떼써서 물려받을지언정 꼭 사보았습니다.  

  

여기 니콜라이 알렉세비치 오스트로프스키Nikolai Alekseevich Ostrovskii가 쓴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처럼 말이지요.

  

2.

두 눈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몸마저 점점 마비가 되는 상황에서도 불굴의 의지로 《폭풍 속에 태어나는 자》라는 소설을 써낸 코르차긴은 글쓴이 오스트로프스키 자신이겠지요.

  

자구(字句)가 겹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가로로 여러 행의 홈을 만들어 놓은 판지로 된 깔개를 이용한 글쓰기. 오스트로프스키 스스로가 만든 이 방법으로 코르차긴은 글을 써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스트로프스키(1904-1936)는 소설 속 주인공 파웰이 한 번은 분실했던, 자신이 전에 코토프스키 사단에 보냈던 전시(戰時) 중 추억을 다룬 ‘폭풍 속에서 태어나는 사람들’을 두 번째 작품으로 써 내려가던 중, 32세라는 짧은 나이로 생을 마치고 맙니다.

 

코르차긴의 어머니 마리야 야코브레브나가 아들들에게

“그런데, 얘들아, 너희들 이제부터 어떻게 할 작정이냐?”

라고 묻자,

“다시 제자리로 들어앉는 거지요 뭐, 어머니”

하고 말하는 형 아르촘과 달리 일이 기다리고 있는 키에프로 돌아가는 파웰과도 같이, 모스크바로 향하던 도중에 말입니다.

 

3.

글을 옮긴이는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숄로호프Michail Aleksandrovich Sholokhov가 쓴 <고요한 돈강>,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Lev Nikolayevich Tolstoy의 <고뇌 속에 가다>와 함께 이 책을 러시아 혁명을 무대로 한, 진정한 혁명의 서사시라고 추켜세웁니다.

 

물론 뒤의 두 책들이, ‘혁명을 만나서 사상적 동요와 회의(懷疑)의 포로가 된 인간의 심리를 그려낸 것으로써, 소비에트 문학에 새로운 한 장(章)을 추가한 것’(p.8)이 분명하다면.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는 그야말로 정통적인 혁명 소설임이 틀림없다고 단언하지요.

 

철저한 노동자 출신으로 러시아 혁명에 뛰어든 가난한 소년공 파프카. 그리고 오스트로프스키. 그들이야말로 무수한 난관을 뚫고 강철로 거듭난, 진정한 혁명가라는 것이지요. 

 

 4.

‘민주주의’만 얘기해도 ‘빨갱이’라 몰리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니 ‘혁명’을 말한다는 건. 그래요. “쉬운 일이 아니었지.” 하지만. 그렇게만 말하기엔. 시간이 많이 흐르긴 했지만, 그건 너무 낭만적으로만 회상하는 것일지 모릅니다. 

 

그리고 또. 지금은 다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지만. 그저 ‘혁명’을 술안주로 올리기엔. 이 순간. 이 시대. 그리 녹녹치만은 않으니. 20년이나 지난 어제, 다시 이 책을 읽어 내려가는데. 가슴 속에 뭔가가 꿈틀꿈틀.

 

아직 늦지 않았지요?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0/09/14 21:54 2010/09/14 21:54

서리태 순지르기

from 10년 만천리 2010/09/13 00:31

서리태 순지르기 - 첫째 날(9월 6일/가끔 비 22-28도)

 
태풍이 지나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태풍이란다. 올 여름은 정말 ‘징하다, 징허’라 할 만큼 비가 많다. 건달 농사짓는 사람이야 뭐 대수겠냐, 마는 이래가지고는 농부님들, 참 농사짓기 힘들겠다.
 
비가 이리 많이 오니 밭에 나갈 시간도 많지 않고. 잠깐 해가 나올 때 일한다 해도 겨우. 급한 것들만 처리하고 오는 정도니 밭 상태가 꽤나 심각하다. 세찬 바람에 쓰러져 버린 옥수수들도 미처 다 세우지 못했고. 콩은 한참을 웃자라 잎과 줄기가 무성하다. 이것저것 손 봐야 할 게 많지만 아무래도 이번 주는 콩 순지르기가 우선일 듯.
 
태풍이 온다고는 하는데 다행히 오후가 되자 비가 그치고 해가 나온다. 아직은 무더운 날씨니 급하다고 땡볕에 나갈 수는 없고. 그래 네 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나와 일을 하니. 겨우 두 이랑 남짓 풀 뽑고 순 지르고. 이거 속도가 너무 더디다. 하지만 어쩌겠나. 급하다고 바늘허리에 매어 쓰지 못하니.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서리태 순지르기 - 둘째 날(9월 7일/맑음 20-29도)
 
다행히 ‘말로’만 태풍이 춘천까진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덕분에 이틀은 더 일할 수 있을 것 같고. 주말에 또 비소식이 있긴 하지만. 잘만하면 이번 주 안에 서리태를 심은 곳은 정리를 마칠 수 있을 듯. 또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다 이미 빨갛게 된 지 한참이 지난 고추도 수확한다. 오늘같이 햇볕 좋고 바람만 잘 불어준다면 다음 비가 올 때까진 어느 정도는 말릴 수 있겠지, 하는 생각으로. 하지만 따낸 고추 절반 이상이 이미 썩거나 물러져 있어 말리기 어려우니. 쾌히 마음이 좋지는 않다. 
 
서리태 순지르기 - 셋째 날(9월 8일/흐림 17-24도)
 
정신없이 풀 뽑고 순지르다 보니 해 지는 줄도 모른다. 어둑어둑해서야 자전거에 오르는데. 불과 며칠 사이 해 지는 시간이 많이 빨라진 듯하다.
 
서리태 순지르기 - 넷째 날(9월 9일/흐리고 비 19-21도)
 
오늘로 서리태 순지르기는 대충 마무리가 됐고. 오후에 비가 온다는 얘기가 있으니. 부식으로 할 감자도 조금 캐고. 다 죽어가는 고추에서 장아찌 담글 풋고추를 건져내고. 곁다리로 죽지 않고 살아남은 빨간 고추들도 따고. 한동안 손대지 못했던 땅콩 밭도 풀매고. 이것저것 꽤나 일을 했는데도 다행히 비가 오지 않았다.
 
장대비(9월 12일/비온 후 맑음 20-25도)
 
9일 낮부터 오늘 아침까지 춘천에 쏟아진 비가 무려 344.5mm다. 둘째 날이 가장 심했는데. 무려 195mm가 왔다. 그야말로 장대비였던 셈. 와도와도 너무 오는 것 같다. 이래가지고야 무신 농사가 될는지. 안 그래도 중곡동에서 안부 전화가 왔기에 그저. “어쩌겠어요. 그런가보다 해야지요. 하고 말았다. 하지만 갈수록 이상스러워지는 날씨가 걱정되지 않을 수밖에. 그런데도 무심한 건지, 애써 외면하는 건지. 누구 하나 뭔가 잘못됐다, 말하는 사람이 없으니. 유별나게 호들갑 떠는 것도 같고. 그냥 변화하는 날씨에 맞게 농사를 바꾸는 게 맞는 건지. 정말 잘 모르겠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0/09/13 00:31 2010/09/13 00:31
Tag //
첫째 날, 꼬마기차 타고 자개골 입구로(2007년 3월 1일)
 
증산에서, 지금은 아우라지역으로 불리는 여량까지 하루 두 차례 운행하는 꼬마열차를 타고 지난 번 걸었던 길을 되짚어 오르니 길을 걸을 때와는 또 다른 맛이다. 완연한 봄기운은 창안으로 쏟아지는 따뜻한 햇살에 담겨 있고, 정선에서부터 기찻길과 쭉 함께 하는 조양강의 풍경과 천 미터를 오르내리는 정선의 산들의 협곡들은 기차여행의 맛을 제대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또 ‘이별하는 골짜기’라는 이름답게 이제는 뭇사람들과 ‘이별’하는 별어곡역, 지난 1966년 12월 30일 준공된, 기차여행가들의 성지로 된 선평역, 지금은 철거가 중단된 몇 안 되는 목조역사인 나전역, 전에는 여량역으로 불리었으나 이웃한 아우라지의 명성으로 이름마저 바뀐 아우라지역 등 역무원조차 없는 간이역이 시간을 세워놓고 기다리니 쉬엄쉬엄 가야할 듯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꼬마열차에서 본 아우라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메밀을 속 껍질째 갈아 까뭇까뭇한 가루를 여러 번 치대며 반죽을 해 제물에 삶아 내는 데 국수발이 하도 쫄깃쫄깃해 들여 마실 때 국수꼬리가 콧등을 친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콧등치기 국수를 아우라지 역 앞 이름 모를 식당에서 한 그릇 씩 먹고 나니 금세 4시가 가깝다. 오늘은 자개골 입구까지만 걷기로 했으니 대략 2시간 내외면 될 터이지만 아직은 해 떠있는 시간이 짧기만 한데다 산골짜기 길이라 서두르지만 오만 군데 여행 정보지에 담긴 구절리 레일바이크 구경을 빼놓을 수는 없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하자개에 도착하니 시간은 5시밖에 되지 않았는데 어째, 날이 흐려서인지 아님 산골이라 해가 짧아서인지, 벌써 어둑어둑하다. 서둘러 쉬어 갈 곳을 정해야겠는데 전화를 돌려보는 곳마다 방이 없다는 둥, 겨울에는 민박을 하지 않는 다는 둥 마땅치가 않다. 여기서 더 가봐야 별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해서든 머물 곳을 찾아야 할 텐데,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전화를 돌린 동신하우스라는 민박집 아주머니께서 두말없이 일단 올라오란다. 빈방은 없지만 자기 자는 곳 한켠에서 잔다면야 돈 안 받아도 된다는 말과 함께. 어찌 마다할까.
 
민박 집 앞에서 아주머니를 부르니 집 뒤편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으로 아주머니가 내려오시는데, 아주머니를 따라 2층 거실에 들어서니 생각지도 못했던 강아지 새끼 네 마리가 우리를 반긴다. 고약한 발 냄새가 나는 발목을 번갈아 휘어 감으며 킁킁 냄새를 맡는데 대략 난감이다. 그래도 씩씩하게 우리 집인 양 번갈아 가며 따뜻한 물에 목욕까지 하고 나와 곧 다가올 정월 보름을 앞두고 몇 가지 나물을 했다며 내준 저녁밥을 두 그릇씩 얻어먹고는 아주머니 자식 자랑에, 남편 흉보기에, 우리들 여행이야기에, 밤이 깊어간다.
 
  
 
둘째 날, 악천고투, 빗속을 뚫고 봉산재를 넘어 진부로(2007년 3월 2일)
 
정선의 자개골과 평창의 신기를 이어주는 옛 길은 전에는 오솔길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가파른 길을 다소 돌아가거나 차가 다닐 수 있도록 길을 넓혔다고 한다. 하지만 정선쪽 자개골쪽이나 평창쪽 신기리쪽 어느 곳에서 길머리를 잡든 포장되지 않은 흙 길을 걸을 수 있는데다 마을 사람들 이외에는 인적을 찾아보기 어려우니 길을 걷는 맛만큼은 여느 길보다 좋다. 하지만 오지마을이라고 할 봉두곤리가 겨우 흔적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지난해 수해로 큰 피해를 입어, 구절양장 이어지는 산길을 걸어 올라가는 발걸음만큼이나 마음 또한 무겁기만 하다.
 
6시, 멀리 봉산재 위로 햇살이 퍼진다. 혹여 아주머니가 깨실까 조심조심 세면을 하고, 옷을 갈아입고, 문을 열고 나서니 햇살위로 먹구름이 하늘을 덮는다. 어제 저녁 뉴스에, 기상청 예보에, 비가 올 거라 들었고, 마침 비옷까지 준비를 해오기는 했지만 아주머니로부터 지난 해 수해 이야기를 들었던 차라 조심조심할 수밖에 없다. 일단 봉산재 아래 상자개와 봉산리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대광사까지 가보기로 한다. 물론 비 내리는 모양이 범상치 않다면 바로 발길을 되돌리기로 하고.
 
사용자 삽입 이미지하자개에서 상자개를 거쳐 대광사까지 이르는 동안 다행히 비는 내리지 않는다. 하지만 곳곳에 계곡 물로 길이 끊겨 있어 흔적을 겨우 찾을 수 있는 옛길을 걸어야 하고, 때로는 발목까지 차가운 계곡 물에 담가야만 길을 이어갈 수 있어 무척 힘이 든다. 급기야 대광사를 지나 봉산재 아래 하늘마을 봉산리에 이르러서는 흔적 없이 사라진 마을이 길을 막아 다리에 힘이 쭉 풀리고 만다. 준비해간 지도에는 다리며, 아무개 집이며, 휴양지관리사무소며, 봉산분교며 이것저것 표시도 많지만 대광사와 봉산분교터와 마을 표석과 봉산리 마을 입구 성황당만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허참.
 
봉산리에서 시작된 긴 오르막길에 접어들자 빗방울이 조금씩 굵어지기 시작한다. 비야 대광사 못 미쳐 한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해 아무렇지 않지만 모처럼 만난 흙길 때문에 되려 발걸음이 무겁다. 그래도 조금 쉬고 조금 오르고 또 조금 쉬고 조금 오르고 하며 한참을 오르니 어느새 고갯마루다. 올라온 길을 뒤로는 하얗게 눈 덮인 두루봉이 코앞이고 내려갈 길 앞으로는 역시 하얗게 눈 덮인 박지산이 코앞이다. 이제 서울에선 보기 힘든 눈 구경에 잠시 마음이 들뜨기도 하지만 잠시 숨만 고르고는 곧 길을 나선다.
 
봉산재 옛길에 대해 알려주는 여러 정보에 의하면 신기리까지는 대략 2시간 정도면 될 듯한데, 빗줄기는 더 굵어지지, 핸드폰은 터지지 않아 시간은 알 수 없지, 길은 갈수록 진흙탕 길이지, 오가는 사람 하나 볼 수 없지, 기온은 떨어지지, 준비해 온 간식은 다 떨어졌지, 막상 신기리에 도착하니 어째 하루 종일 걸은 듯하다. 그야말로 악천고투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구절양장 봉산재 옛길을 걷다>
 
가까운 곳에 청심대(淸心臺)가 있으나 둘러보지 못하고 신기리 마을 입구 버스정류장에서 쏟아지는 비만 잠시 피하고는 또 바삐 걸음을 옮긴다. 이젠 걷는 다기 보단 그저 발을 앞으로 내딛을 뿐이다. 멀리 진부가 손에 잡힐 듯 보이지만 막상 도착하고 나니 아까 쉬었던 곳에서 1시간을 넘게 또 걸어야 했다. 파김치 몸을 이끌고 체면도 없다. 처음 눈에 들어온 중국집에 들어서니 몸과 방바닥이 어느새 하나다. 그렇게 누워 한쪽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시계 바늘이 3과 12에 걸렸다. 자개골에서 7시에 출발했으니 꼬박 8시간을 쉬지 않고 빗속을 걸은 셈이다.
 
* 열여덟 번째 여행에서 걸은 길
- 첫째 날 : 아우라지에서 자개골 입구 하자개까지 약 4km. 걸은 시간 1시간 30분.
- 둘째 날 : 아우라지에서 봉산재를 넘는 옛길을 따라 신기리까지 여기서 다시 59번 국도를 따라 진부까지 약 30km. 걸은 시간 8시간.
 
* 가고, 오고
증산에서 아우라지를 왕복하는 꼬마열차는 오전 9시, 오후 2시 두 차례 정선에서 출발하는데, 청량리에서 오전 10시 출발하는 무궁화 열차를 이용하면 내린 곳에서 오후 2시에 출발하는 꼬마열차로 갈아 탈수 있으니 이편을 놓쳐서는 안 된다. 진부에선 대관령 너머에서 오는 시외버스가 잠시 들렀다 서울로 오는데 꽤 자주, 그리고 늦게까지 있다.
 
* 잠잘 곳
자개골 입구 하자개에는 산수갑산, 동신하우스, 자개골민박 등 민박이 몇 있으나 겨울철에는 민박을 하지 않으니 미리 사전에 확인을 해야 하며, 이곳을 지나 봉산재를 넘어 신기리까지는 민박은커녕 민가조차 없으니 단단히 준비해야 한다. 신기리쪽은 신기리에서 진부까지 1시간 거리니 진부쪽에서 숙박을 하면 편하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0/09/06 13:18 2010/09/06 1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