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끝에서 고성까지 걷기] 스무 번째 여행 - “5월, 내면엔 나물이 지천이랑께”, 상원사에서 오대산 두도령을 넘어 달둔마을 앞머리까지
from 땅끝에서 마차진까지 2010/11/10 23:40“5월, 내면엔 나물이 지천이랑께”, 상원사에서 오대산 두도령을 넘어 달둔마을 앞머리까지(2007년 5월 26일)
진부에서 월정사를 지나 상원사까지 운행하는 군내버스에 오르니 우통수(于筒水)에서부터 시작된 한강 물줄기가 전나무 숲 사이로 시원스레 흐르는데 걸으면서 느끼는 맛과는 또 다르다. 하지만 차를 이용하게 되면 월정사 전나무 숲길을 맛볼 수 없으니 필히 차를 두고서 두 발로 걸어야 한다.
높이가 1,310m로 비로봉(1,563m)과는 불과 250여m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두도령에 오르니 12시 40분이다. 상원사에서 10시 35분에 출발했으니 2시간이 걸렸는데, 북대사에서 15분 정도 김밥 먹으며 시간 보낸 걸 빼고 나면, 1시간 40분 걸린 셈이다. 오대산의 자랑인 전나무며, 소나무를 맘껏 볼 수 있어 시간이 언제 이렇게 된 줄 모른다.
쩝. 하지만 어쩌랴. 애당초 시골로 내려가 살게 되면 ‘공산품 고기는 그만 먹어야지’ 하고 맘먹고 있었던 차라. 아예 잘 됐다 싶어 이번 기회에 끊기로 했다. 그리고는 제사상에 빠지지 않고 올라왔으나 이제껏 관심 밖에 머물러 있던 나물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때맞춰 봄나물까지 쏟아져 나오고 있으니 맛을 들이기에는 제격인 듯싶었고, 된장에, 고추장에, 초장에, 들기름에, 이렇게 저렇게 맛을 내니 어느새 나물 맛에 흠뻑 빠지게 됐다. 그런데 여기 이 깊은 산골마을에 들어서 봄나물을 한가득 보니 어찌 입안에 침이 가득 고이지 않을 수 있을까.서리태와 팥이 수상하다(11월 1일/맑음 4-18도)
지난 주, 갑작스레 추워진 날씨 탓에 결국 서리태와 팥이 매우 수상하다. 한참 여물어야 할 시기에 새벽엔 영하로 떨어진 기온에 얼었다, 한낮엔 10도가 넘는 따가운 가을 햇살에 녹았다 했으니. 여물기는커녕 잎이 다 떨어지고 꼬투리가 어는 바람에 영 조짐이 이상스레 진 것이다. 아무래도 남은 팥은 반도 건지기가 어려울 듯하고. 서리태는 일단 베고 널어놔봐야 대충이라도 짐작하겠지만. 팥만큼도 못 건질 듯. 일이 이렇게 되니 이거 참, 심란하기 이를 데 없다.
메주콩 타작 - 첫째 날(11월 2일/바람 셈 영하 1-11도)
지난달 13일에 콩을 베어 널었으니 벌써 보름이 훌쩍 지났다. 그 동안 비나 눈, 서리도 오지 않았으니 햇볕에 잘 말린 셈이다. 더 날이 추워지기 전에 거두어야겠는데. 때마침 오늘, 내일은 바람이 좀 분다고 하니 제때인 것 같다. 하지만 작년 경험에 비춰보면 이틀 반짝 한다고 다 하긴 어림도 없고. 아무래도 이번 주는 내내 콩 타작하다 끝날 듯.
메주콩 타작 - 둘째 날(11월 3일/맑음 영하 5-13도)
메주콩 타작 - 셋째 날(11월 4일/맑음 0-16도)
메주콩 타작 - 넷째 날(11월 5일/안개 후 맑음 2-14도)
메주콩 타작 - 다섯째 날(11월 6일/안개 후 맑음 5-15도)
월요일 팥꼬투리 따고 그 후론 쭉 메주콩만 털었으니. 꼬박 6일이 걸린 셈이다. 농사일지를 보니 작년엔 많이 심기도 했지만 요령이 없어서였는지. 근 열흘 가까이 콩만 털어냈다. 게다가 무신 일 욕심인지. 털어온 콩을 그날로 바로 밤늦게까지 돌, 쭉정이 골라내느라. 기억이 새록새록 하다. 반면 올해엔 메주콩 대신 팥과 서리태를 절반 넘게 심었는데. 느닷없이 불어 닥친 한파에 서리태며 팥 수확이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고. 그나마 메주콩만 털어내느라 딱 작년에 비해 절반만 일을 했다. 물론 이제부터 털어온 콩을 골라내는 일이 남았긴 하지만. 이제 얼어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검은콩과 팥만 잘 걷어오고. 마지막으로 지주만 챙겨놓으면 올 농사도 마무리다.
지금도 모임이 이어지고 있는지 모르겠지만(혹 춘천으로 이사를 한 후로 혼자만 빠지게 된 건 아닌지도 모르겠네요). 한때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한 번씩은 만나던 대학 동기들이 있습니다. 학교를 다닐 때도 그랬지만 졸업 후에도 그렇게 얼굴을 보던 친구들이 있었던 게지요. 한 번 모이면 겨우 두 자리 숫자를 채우기가 어려웠으니. 많아야 여섯, 일곱쯤 될까요. 그래도 서로 서로 연락들을 했고, 만나서는 삼겹살에 소주도 걸치고, 밤늦도록 PC방에서 게임도 했었습니다. 또 지난 흔적들을 떠올리며 함박웃음을 짓기도 하고, 하나, 둘 늘어가는 자식 자랑에 말소리를 높이기도 하고, 엊그제 누가 또 홈런을 쳤네, 주인공 누가 죽었네 하며 시답잖은 얘기들도 간혹 하곤 했지요. 그리고 툭하면 하는 푸념들, 자고 일어나면 뛰는 집 값 얘기, 얼마 전 새로 산 자동차 자랑,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사고팔고 하는 주식 소식들을 듣기만 했지,
‘노동자가 골리앗 크레인에 올라가 100일 넘게 고독과 싸우며 농성하고, 10년이나 묵은 해고 때문에 노동자들이 굴뚝에 올라가 목숨을 건 농성을 두 달이나 하다가 그 굴뚝에서 새해를 맞아야 하는 일’(“노사가 동등하다고?” p.34)
‘휠체어를 타고 다니면서 악세사리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던 장애인이 서울시장 앞으로 “서울 시내 거리의 턱을 없애주십시오”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함부로 충고할지 말지어다” p.42)
과 같은 얘기들은 통 화제(話題)가 되질 못했습니다. 명색이 노동조합에서 활동을 한다고 하는 놈이 있으면 무얼 하겠습니까. 뭐, 변명 아닌 변명이겠지만. 지금도 그렇고 그때는 더 그랬지만. 어디서고 들려오는 소리들이란 게. ‘집단이기주의’니 ‘노동귀족’이니 하는, 가진 자들과 족벌 언론사가 죽이자, 덤벼들고 만들어낸 되도 않는 비난들뿐이었으니까(다들 알만한 대기업에 다녔던 것 때문일까요. 이마저도 술안주로 올라오지 못했네요). 선뜻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았던 탓도 있었지만. 그리고 또 내로라하는 기업에, 중앙정부 공무원들을 하고 있어서 인지. 노동조합 조합원인 친구들이 한 명도 없었라구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함께 공부했을 땐 파이를 들기도 했고. 지랄탄이 날라드는 종로 한복판을 함께 휘젓고 다니고 했던, 그 동기들과도 제대로 이야기 한 번 하지 못했으니. 쥐구멍이라도 찾아야겠지요. 헌데 가만 생각해보면, 그래도 한 번은 얘기한 적이 있었으니. 그것마저 연봉 1억원이 넘는 조종사들이 파업을 한다고(“조종사파업, 당신은 지지했습니까”, “맞아 죽을 각오로 하는 ‘친조종사파업’ 선언” pp.87-98) 침 튀기며 목소리를 높이던 것이었으니(물론 굉장히 수세적으로, 또 혼자서 맞받아치느라 힘이 들었지만). 가만이나 있을 걸. 괜스레 말을 꺼냈나 싶었습니다.
이제 곧 연말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곧 하루에도 몇 개씩 핸드폰 문자들이 오겠지요. 대게는 집단문자라고 하나요. 딱 틀에 맞춰진 안부인사와 덕담들이기에. 한 번 쓱 보고는 곧 삭제하기만 했는데. 그래요. 그런 문자들, 울 동기들도 매년 그렇듯이 또 보내겠지요. 하지만 올 해엔 또 왔네, 하고 흘겨 보내지 말고 답 문자 하나씩은 보내야겠습니다. 아니 이번엔 먼저 문자를 보내는 것도 좋겠지요. ‘다들 잘 살고 있는가, 언제 한 번 얼굴이나 보고 사는 얘기 하세, 라구요. 그리고 올 해가 가기 전에, 바쁘더라도 책 한권씩은 읽어보자, 해야겠습니다. <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과 같은 책들을 얘기하면서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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