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새 10년이나 지났지만. 그때만 해도 담 없는 대학, 지역주민에게 도서관을 개방한 대학은 드물었지요. 김동춘 샘이니 조희연 샘, 신영복 샘이 있었고 또 여기저기 단체나 노동조합에 힘을 보태고 있는 샘들이 꽤나 많았으니 그럴 만도 했겠지만. 아, 그렇다고 그 학교가 운영면에서나 자치면에서 민주적이었다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한 달에 한 번 생일을 맞은 학생들을 위해 학생식당 테이블마다 케이크를 사다놓고. 또 한 달에 한 번 자취나 하숙을 하는 학생들을 위해 식당을 개방하기도 했지만(이 비용은 총창이 사비를 털어 댔답니다. ^^). 주먹구구식 학사행정, 열악한 교육환경, 학교 당국의 권위주의는 여느 학교나 마찬가지였단 말이지요. 또 요 근래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청소, 경비 등 학내 비정규직 문제도 밖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가을 축제 땐 ‘윤밴’을 보러 온 가족이 놀러오기도 하고, 날 좋은 주말엔 샘들과 공을 차기도 하고.
 
2.
애당초 논문엔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해서 학기를 마치자마자 곧 노동조합에서 활동을 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는 춘천으로 이사하기까진 그야말로 정신없이 살았으니. 더는 학교에 가는 일이 없겠다, 싶었습니다. 하지만 대학원을 다녀야 한다는 핑계로 학교 근처에 집을 얻었던 게. 어찌어찌 동네에 정도 들고 또 그만한 돈으로 어디 또 다른 데를 찾기가 쉽지 않아 몇 년을 그대로 더 있었더니. 곧잘 학교 도서관엘 가게 되더라구요(지역주민회원제도 있었지만 수료라도 했다고 졸업생회원 자격을 주더군요). 암튼 햇볕 좋은 날엔 도서관 창가에 자리를 잡고 이 책 저 책 뒤적거리고. 추적추적 비가 오는 날엔 DVD를 빌려 와 하루종일 영화를 보기도 하고. 또 그땐 집에서까지 인터넷을 하지 않았던 터라 인터넷도 하고. 물론 척 보기에도 동네 주민으로 보이는 분들도 꽤나 많았었구요. 그 사람들 틈에 끼어 학교를 떠난 지 5, 6년이 지나도록 그렇게 도서관을 맴돌았답니다. 그러니요. 참 이만치도 열린 학교가 또 어디 있을까, 얼마나 자랑하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3. 
홍익대가 자주 언론에 오르내리네요. 얼마 전엔 동국대가 그러더니 이번엔 홍익대가 문젠데, 아마도 총학생회 때문에 더 요란한 듯합니다. 보기엔 총학생회도 총학생회지만 학교법인 홍익학원이 벌이는 짓거리가 손가락질 받을 일인데. 어찌된 게 총학으로 시선이 집중되고 있으니. 물론 홍대 총학이 저지른 일들 때문에 일이 더 커지고 있으니 문제 해결을 위해선 되레 잘됐다고 해야 하겠지요. 하지만 이런데도 홍대 총학생회가 여전히 ‘외부단체’라는 말을 쓰는 걸 보니. 왜 자신들이 욕을 먹고 있는지 잘 모르고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초, 중, 고 12년 그리고 대학 4년을 배우는 동안 노동권에 대해, 노동조합에 대해 제대로 배우질 못했단 점을 고려하면 상처가 조금은 깊지 않다, 생각할 수 있을까요. 아, 물론 그렇다고 홍익대학교 총학생회를 두둔하잔 건 아닙니다. 정규교육과정에서 가르치지 않았다고, 학교교육에서 배우지 않았다고 해서 잘못이 덮어지는 건 아니니까요. 아무리 대학이 취업준비기관으로 전락했다하더라도 스스로 시민으로서의 권리, 노동자로서의 권리마저 내팽개칠 순 없단 말이지요. 
 
4.
춘천으로 오고서도 한동안은 학교란 데를 갈일이 없었습니다. 간혹 책을 빌려봐야 할 일이 있으면 시립도서관엘 갔고 또 거기 열람실에서 공부를 했거든요. 요즘은 어느 도서관이든 책을 빌리면 언제 반납을 해야 하는지도 문자로 알려주고. 여름엔 시원하게 에어컨을, 겨울엔 따뜻하게 난방을 해주니 어떨 땐 집보다 낫기도 하단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이름만 시립일 뿐 책이 많지 않더군요. 그리고 그래서이겠지요. 그나마 있는 책들도 다양하지 않아 많이 아쉬웠습니다. 게다가 요즘 들어 부쩍 들여다보고 있는 환경, 생태, 농업 관련 책들은 그야말로 가물에 콩 나듯 있으니. 그렇게 자주 찾아가게 되진 않더라구요. 헌데 지금 살고 있는 동네로 이사를 하고 나니. 그나마 시립도서관은 더 멀어지게 됐고, 그나마 동내도서관이 있긴 한데 시립보다도 더 작으니. 보고 싶은 책을 찾는 게 더 어려워졌습니다.
 
5. 
작년 가을쯤인 걸로 기억합니다. 춘천엔 큰 대학이 3개가 있지요. 국립대인 교육대와 강원대 그리고 사립인 한림대 이렇게 말이지요. 지금 살고 있는 곳은 이 세 대학 중 두 곳과 매우 가깝습니다. 걸어서 10여분 내외면 정문이니 말이지요. 해서 처음 이쪽으로 오고나선, 마음먹기에 따라 내 집 드나들듯 대학시설을 이용할 수 있겠지, 생각했습니다. 도서관이니 학교식당이니, 박물관, 운동장 등등을 말이죠. 헌데 말이죠. 교대는 담이 없어 비교적 학교 출입에 대한 거부감이 없긴 한데 도서관은 개방을 하지 않더라구요. 물론 첨부터 그런 건 아니었는데 작년 가을쯤부턴 학생증이 없으면 출입 자체를 못하게 만들더군요. 그리고 지역주민회원제 같은 건 아예 없구요. 
 
6. 
강원대는 워낙 학교가 넓어서 그런지 여기저기 담을 두르고 정문이나 후문도 그럴듯하게 세워놨습니다. 하지만 도서관은 지역주민들에게 개방을 한다는 얘길 어디서 들은 것 같아. 작년 가을쯤인가 도서관에 문의를 했지요. 지역주민회원 가입은 어떻게 하는 겁니까, 하구요. 헌데, 나 원. 제한된 수에 한해 회원을 받는데 지금은 다 찼다고 하더라구요. 거기까진 뭐 그럴 수 있겠다, 싶었는데. 그럼 언제 회원에 가입할 수 있겠느냐 물었는데. 글쎄, 무조건 안 한다고, 학생들 도서관 이용에 불편이 많아 당분간은 안 받을 거라고 하더라구요. 아, 스팀. 한 마디 안할 수가 없었습니다. 도서관 홈페이지엔 지역주민회원제라는 게 분명 명시돼 있고, 어차피 회원은 열람실 이용이 제한돼 있으니 학생들에게 피해가 얼마나 가는지 모르겠지만 장서실 이용하는데 그렇게 불편을 초래하느냐, 국립대면 도서관만큼은 지역주민들에게 되도록 제한 없이 개방해야 하는 거 아니냐, 했더니. 돌아온 대답은. 너, 어디 사느냐, 는 말로 시작해 끝내는 욕설이 나오더군요. 참 어이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과 더 말을 해봐야 도통 먹히질 않을 것 같아 대학본부로 연락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는 말, 그 문제 때문에 지금 학교 규정을 바꾸려고 한다, 규정을 개정하면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을 테니 조금만 기다려 달랍디다.  
 
7.
올 겨울은 강원대 도서관 5층 장서실에서 보내고 있습니다. 규정을 개정했는지 어쨌는지 모르겠지만 다행히도 얼마 전 지역주민회원으로 가입을 할 수 있었거든요. 해서 가끔 책도 빌려보기도 하다, 4월에 있을 시험 준비도 할 겸 아침부터 도서관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지요. 헌데 말입니다. 가끔은 온종일 돌아가는 난방 때문에 골이 아프기도 하지만요. 넓은 책상에, 국립대라는 이름에 걸맞게 서고마다 책이 잔뜩 꽂혀있어 바로바로 딱 맞는 책들을 찾아 볼 수 있으니. 이보다 더 공부하기에 좋을 순 없겠더군요. 게다가 단돈 2천원이면 3가지 반찬에 김치와 국까지 따라 나오는 식당에서 밥도 먹을 수 있고(후식으로 200원짜리 커피도 마실 수 있답니다). 얼마 전에 갔을 땐 청소하느라 못 봤지만 박물관도 곧 구경할 수 있을 테고, 날이 풀리면 푹신푹신한 운동장 트랙에서 운동도 할 수 있을 테니. 집에 있는 시간보다 학교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아질 것 같은데. 이거, 이래도 되는 될까, 괜한 걱정도 해봅니다. 어차피 3월, 학기가 시작되면 아무리 5층 장서실이라도 지금 같은 호사는 눈치 때문에 쉽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8.
대학이 ‘지성의 요람’이었던 시대는 끝났습니다. 더구나 ‘민주주의의 보루’였던 시대는, 대체 그런 때가 있었던가 싶을 만큼 아득합니다. 그러니 대학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노동자들과 함께 보다 나은 내일을 얘기했던 68을 기대하는 건 택도 없는 일이지요. 도서관 열람실은 미어터지다 못해 좌석예약제까지 생기는데, 장서실 서고엔 면접요령이니 취업전략이니 하는 책들만 인기를 끌고. 이런저런 자격증도 모자라 문과계열 학생이 CPA를, 이과계열 학생은 고시를. 자신만은 10%에 들 수 있을 거라는 헛된 희망에, 아니 자신만은 나머지 절반의 정규직이 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에 두 눈 다 감고, 두 귀 다 닫고 어학연수, 유학으로 보내는 4년. 경제단체로부터, 재벌기업으로부터 장학금 타 쓰는 총학생회, 동아리, 학회. 지금 우리 대학은 취업학원, 고시학원일 뿐인 것이지요. 아니 많게는 수백억 원에 달하는 적립금을 가져다주는 황금알 낳는 대기업일 뿐인 겝니다. 상황이 이러니 노동조합을 ‘외부단체’라 스스럼없이 말하는 것일 터이고. 동네 사람들이 도서관에서 책 좀 본다고, 열람실에 공부 좀 한다면 그걸 불편해하고 성가셔하는 것이겠지요. 누구나 편하게, 시립도서관만큼이나 열린 도서관. 길이 참 멀단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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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13 22:44 2011/01/13 22:44

사용자 삽입 이미지1. 

네스또 파즈(Nastor Paz)는 스물다섯 번째 생일 하루 전날이자 체 게바라가 죽은 지 꼭 3년이 되는 날인 1970년 10월 8일에 숨을 거둡니다. ELN(볼리비아 민족해방군: Ejercito de Liberacin Nacional)의 멤버로 떼오폰떼(Teoponte) 지역 게릴라 운동에 참가해 약 석 달간 투쟁을 하다 마리아포(Mariapo) 강둑 위에서 굶어 죽은 겁니다. “모든 진정한 혁명가들은 무장 투쟁이야말로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까밀로 또레즈(콜롬비아인 사제, 사회학자, 대학 교목인 또레즈는 콜롬비아 민족 해방군이었으며 정부군에 의해 사살됐습니다. 파즈는 까밀로 또레즈의 모범과 글로부터 깊은 충격을 받았지요.)의 말을 새기며 길을 떠난 파즈는 조그맣고 까만 노트를 가지고 다니며 떼오폰떼 전투 기간 내내 일지를 썼는데요. 다음은 프란치스꼬가 쓴 전투일지 중 하나입니다.
 
8월 1일
오늘이 바로 ‘그 날’1)이 아닌가요. 공주여, 또 다시 맞는 이 기쁜 날, 특별한 사랑으로 당신을 생각하게 되오. 당신을 사랑하오.
이틀 전까지는 아주 어려운 날이 두 번 있었소. 적군과 두 번의 유리한 접전을 벌였소. 그러나 나의 전반적인 사고방식을 바꾸어야만 했소. 아마 그것은 폭력, 임무 수행, 투쟁의 의미, 희생의 가치, 우리 부대의 효율성 등,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의 근저에 맴돌고 있는 당신의 부재에 관계된 것일 거요.
그것을 생각하면 내 마음은 비통에 잠기게 되오. 그렇지만 나는 성장했소. ‘옛 사람’의 모델을 버리고 그것을 ‘새로운 인간’의 모델로 전환시킨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웠소. 모든 성장은 고통을 의미하오. 이것이 내가 느꼈던 바이오. 이 일들이 주님의 길이라고 해도 성장은 역시 확실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오. 그리고 오늘은 더 평화롭고 평온한 상태이오. 그리고 내가 지켜야 할 결의를 다짐해 보았소.
첫째, 나는 승리 아니면 죽을 때까지 이 싸움을 계속 할 것이오.
둘째, 이 길이야말로 역사가 진전하는 길이며, 지금 다른 길은 없소.
셋째, 그렇다면, 특히 까밀로 또레즈의 예언자적 역할을 기억한다면 이것이 바로 크리스챤의 길이오.
넷째, 여기에 있음으로써 나는 보다 더 온전히 당신과 함께 하는 것이오. 왜냐하면 우리 삶의 이상을 실현하고 있기 때문이오.
나는 다시 한 번 당신을 생각하면서, 무다 가르시아(Muda Garcia)에서의 파티들, 모터사이클, 일요일 아침들, 우리의 첫 키스, 함께 지낸 모든 행복한 순간들-그리고 슬펐던 일들도 떠올려 보오. 이 모든 일들에 대해 계속 생각하지 않는 게 좋겠소. 왜냐하면 그 생각이 나로 하여금 당신 곁에 있고 싶도록 만들기 때문이오. 그러나 어쩔 수 없소.
모든 일은 잘 되어 가고 있소. 가장 어려운 고비는 이미 지나갔소. 전망은 밝소. 그리고 단지 우리의 결점과 나약함만이 극복된다면 그 전망은 계속될 것이오. 이 첫 석 달이 결정적인 시기요. 앞으로 모든 일이 보다 잘 되리라 생각하오. 충만함과 믿음으로 기도하기 시작했소.
자, 이제 당신을 떠나야 하오. 사랑하오. 아, 그런데 십자가가 달린 모자와 “모든 것 그리고 언제나”라는 말이 새겨진 손수건을 잃어버렸소. 새 것을 만들어 주지 않겠소?
 
2. 
손병휘의 3번째 앨범 ‘촛불의 바다’는 ‘전쟁과 평화’라는 부제를 갖고 있습니다. 이라크, 체첸, 보스니아 등 지구촌 분쟁 지역의 참상을 고발하고, 인디언 수우족의 추장, 인도의 시성 타고르 등의 입을 빌어 평화를 노래하고 있지요. 이 앨범에는 첫 곡으로 <모든 것, 그리고>이 있는데요. 네스또 파즈의 동지이자 연인인 쎄시2)가 떠나는 파즈에게 수놓아 준 손수건에 써 있는 글귀에서 제목을 따온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요. 8월 1일 전투일지에 바로 그 얘기가 있습니다. 
 
<모든 것, 그리고>
조금 오래 전 어느 저녁 공원벤치에 앉아있을 때
그 위로 빛나던 하늘의 별빛 그 보다 더 빛나던
너의 눈동자 그 입술만큼 지금도 널 사랑할 수 있을까
모든 것, 그리고 언제나
모든 것, 그리고 언제나
모든 것, 그리고 언제나
모든 것, 그리고 언제나
그 만큼 오래 전 어느 한 낮 종로거리에 서 있었을 때
그 아스팔트 뜨겁던 태양 그 보다 더 빛나던
너의 그 눈동자 억센 두 팔 만큼
지금도 그렇게 달려갈 수 있을까
모든 것, 그리고 언제나
모든 것, 그리고 언제나
모든 것, 그리고 언제나
모든 것, 그리고 언제나
모든 것, 그리고 언제나
조금 오래 전 어느 새벽 가슴 벅찬 가슴 나누었을 때
동트는 여명 한줄기 햇살 그 보다 더 빛나던
너의 그 눈동자 굳센 미소만큼
지금도 그렇게 당당할 수 있을까
모든 것, 그리고 언제나
모든 것, 그리고 언제나
모든 것, 그리고 언제나
모든 것, 그리고 언제나
모든 것, 그리고 언제나
 
3.
네스또 파즈의 일지는 87일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그것도 언제 맞닥뜨릴지 모르는 ‘고릴라’부대3)와 대적하기 위해 항상 긴장을 해야만 하기에 그다지 길지 않습니다. 그래서 책도 무척 얇고 또 그만큼 가볍지요. 하지만 파즈의 일지를 한 장, 한 장 읽어 내려가다 보면 결코 가볍지만은 않다는 걸 느끼게 될 겁니다. 그리고 “사랑이란 동지를 위해 죽는 것”이라는 파즈의 마지막 시구에서, 인간 존재의 가치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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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라 파즈의 Universidad de San Andres에서 네스또와 쎄시가 처음 만난 날인 8월 1일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네스또는 거기에서 의학을 그리고 쎄시는 생화학을 공부하고 있었지요.
 

2) 쎄실리아는 뒤에 반제르(Banzer) 체제 하에서 학생 전투원과 광부들이 탄압받고 있을 때 ELN의 지하 집회장에서 사람들을 보호하려고 노력하다 볼리비아 정부군의 포격으로 인해 죽게 됩니다

 

3) ‘고릴라 Gorilla’는 진압군인 정부군대를 가리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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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07 17:52 2011/01/07 17:52
첫째 날, 지나온 흔적도 남기지 않아야..... 월둔마을에서 아침가리로(2008년 6월 19일)
 
밤새 또 가니, 못 가니 하다, 오랜만에 김밥 싸고 계란 삶고 벼락 준비에 정신없다. 그러다 혹여나 하는 마음에 버스 편 확인하다 울고불고 아주 난리도 아니다. 두도령을 넘어 달둔마을까지 왔던 게 작년 5월이니 그새 1년이 지났고, 그 동안 아주 잠깐이라도 걷기를 했었다면 이러진 않았을 거다. 농사짓겠다, 아이들과 함께 지내겠다, 마음먹고 춘천으로 오기까지 남들 눈엔 번갯불에 콩 볶아 먹을 시간이었겠지만 그만큼 긴 시간이었던 거고 몸도 마음도 알게 모르게 물갈이 중이었나 보다.
 
같은 강원도면서도 버스를 세 번이나 갈아타고 세 시간이나 걸려야 달둔마을에 올 수 있으니 그만큼 외지긴 외진 듯하다. 그래도 군내버스 한 칸 가득 맑은 목소리를 가진 아이들의 모둠 노래자랑에 지루하지 않다. 또 차창 너머로 굽이굽이 돌아가는 계곡이며 푸른 나무들이 눈을 즐겁게 해 덩달아 콧노래다. 올망졸망 아이들을 내려놓은 차는 그새 달둔마을에 다다라 잠시 멈춘 후 굽이굽이 구룡령 넘어 바다로 향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정감록에 나온다는 삼둔사가리 가운데 삼둔 중 하나인 월둔마을에서 시작해 사가리 중 하나인 아침가리로 이어지는 이름 없는 이 숲길은 지나온 흔적마저 남기지 않아야 한다. 때론 거친 길을 질주하고픈 욕망도 어쩌면 저 끊어진 다리 위에 멈춰 세워야 할 것이고, 하룻밤 별을 헤며 세상사를 나누고 싶다 해도 길 위에 멈춰서는 안 될 것이다. 사람 사는 곳이라곤 월둔마을과 조경분교 근처 젊디젊은 부부 한 쌍 외엔 찾아볼 수 없는 곳이니, 부디 이 한 곳만이라도 조용히 그렇게 남겨둬야 마땅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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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덕봉 바로 아래 명지가리까지는 그래도 뒷산 산책하듯 오른다. 지천에 널린 야생화 구경에 문득문득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파란 하늘과 눈부신 햇빛이 발걸음을 가볍게 하기에. 또 조경동까지 이어진 긴 내리막길은 내내 이름 모를 새소리와 계곡 물 소리에 지친 몸과 마음이 맑아지기에. 헌데 다 내려왔나 싶은 그 순간, 길은 다시 끝없는 오르막으로 구절양장 돌고 도는데,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은 맛보기다. 마치 꿈속을 걷는 듯한데, 그러다, 어느 순간 아찔 하기만한 아스팔트 내리막길에 이르면 천근만근, 무거운 몸, 누일 곳을 찾는다.

 
장마가 시작된다는 말에 당일치기로 다녀올 것인지, 미뤄뒀던 남은 길을 모두 걸을 것인지 선뜻 결정하지 못했더니 해는 지는데, 차 시간은 간당간당한데, 어찌할지 몰라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외지긴 외진 데라 그런지 버스마저 일찍 끊기고 오가는 차는 찾아볼래야 볼 수가 없다. 일기예보로는 주말에나 되어야 장맛비가 내린다고 하니 하루 정도 여유가 있긴 한데, 몸이 너무나 무겁다.
 
하룻밤 묵어가는데 이틀 치 방값을 내라는 그럴듯한 펜션을 뒤로하고 때마침 읍내로 나가는 듯한 택시를 집어타고 현리로 나오니 이런, 홍천이고 인제고 버스 끊긴지가 이미 오래다. 사실 어제 밤 느닷없이 준비를 한 탓도 있었지만 혹여 하는 마음에 차 시간을 확인했기에 망정이지 갑자기 바뀌어버린 버스 시간에 하루를 그냥 길에서 보내거나 아예 떠날 생각도 못할 뻔 했었는데 결국엔 예상치도 못한 현리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꼼짝없이 하룻밤을 보내야 할 상황이다. 
 
허탈한 마음을 뒤로하고 어찌어찌 잠잘 만한 곳을 찾아 발걸음을 옮기지만 가뜩이나 찜찜한 마음인데다 제법 괜찮다고 보여 들어간 첫 번째 모텔에서 방이 없단 얘기를 듣자 차라리 다시 택시를 타고 방동리로 돌아가자며 터미널로 나온다. 헌데, 천운인지 다행인지 진동리까지 운행하는 통학버스 한 대가 이번엔 교복 입은 학생들을 한차 가득 싣고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망설일 이유가 없다. 다시 돌아가는 수밖에.  
 
다음부턴 50원을 더 내야 한다는 말을 남기고 떠난 버스 뒤로 어둠이 조금씩 내려앉는다. 정류장 바로 앞 민박집에 1만원을 깎아 방을 정하고는 라면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나니 그제서야 방동계곡의 물소리가 들린다. 아주 잠깐 물소리를 듣기 위해 방을 나온 것 빼곤 숟가락을 놓자마자 곯아떨어지는데, 몸 피곤한 것과 달리 밤새 가위에 눌려 버둥버둥 대느라 제대로 잠을 못 이룬다.   
 
둘째 날, 천근만근 지친 몸을 이끌고 현리로(2008년 6월 20일)
 
이렇게 몸을 일으키기가 힘들다니, 어젠 정말 무리했나보다. 어찌어찌 눈을 떠 겨우 얼굴에 물만 묻히고는 썬 크림만 잔뜩 바른다. 뭐에 홀렸는지 모자는 잃어버리고 여덟시도 채 안됐는데 햇빛은 장난 아니고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다. 더구나 아침도 거른 채 걸으려니 이거야 걷기도 전에 죽을 맛이다. 그래도 어쩌겠나. 대충 머리에 수건만 두르고는 해가 머리위에 뜨기 전에 현리에 도착하길 빌며 길을 나선다. 현리까지야 두 시간이면 충분할 테고 어제 택시며 버스로 왔다 갔다 하면서 눈여겨보니 군데군데 민박집이며 밥집이 있는 듯 해 일단 아침은 건너뛴다. 하기사 어제 아침도 라면, 저녁도 라면으로 때웠기에 오늘 아침까지 라면을 먹긴 좀 그렇긴 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어제 저녁엔 그리도 많아 보이던 가게들이 어째 조롱고개를 넘기 전까지 한군데도 보이지 않는 걸까. 도중에 제법 큰 슈퍼가 한 군데 있긴 했는데 조금만 가면 뭐가 나오려니 하며  참고 걸었는데 시간 반이 넘게 걸어도 당체 요기할 만한 곳이 나오지 않는다. 지친 몸도 몸이지만 뭐라도 채워야 할 텐데. ‘도채동 옛길’로 빠져 길을 걸어보기도 하지만 당체 힘이 나질 않는다. 
 
결국 현리 가까이에 당도해서야 아침 먹을 곳이 나타난다. 오가는 이들이라면 무조건 불러들이고는 이른 아침부터 해장술을 기울이는 나이 드신 농부님들 이야기를 반찬삼아 꿀맛 같은 아침을 먹고는 다시 길을 나선다. 그래도 밥이 들어가서인지 힘이 조금 나는 것 같긴 한데 팔월 한낮에 뜨거운 햇빛이 벌써부터 등 뒤에 내리쬔다. 이거야 말로 땡볕에 뭔 고생인지. 
 
겨우겨우 기다시피 현리에 들어가니 이젠 이것저것 생각하기도 싫고 그저 집에 가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렇지만 한 시간 가까이 더 기다려야 홍천으로 나가는 버스에 오를 수 있다. 한 바퀴 도는 데 20분이면 너무 많고 그렇다고 10분이면 너무 짧은 동네 산책도 잠깐이고 결국 터미널 의자에 기대 꾸벅꾸벅 잠에 빠진다. 그렇게 삼십분을 졸다 홍천행 시외버스를 타고 다시 졸고, 홍천에서 춘천으로 나가는 시외버스 타고 또 졸고, 무거운 눈꺼풀이 자꾸만 내려앉는다.
 
* 스물한 번째 여행에서 걸은 길
- 첫째 날 : 홍천군 내면 달둔마을에서 방동약수까지 약 30km. 걸은 9시간.
- 둘째 날 : 방동약수에서 인제군 현리까지 약 8km, 걸은 시간 2시간.
 
* 가고, 오고
춘천터미널에서 홍천을 가는 시외버스가 첫차 6시 5분을 시작으로 20여분 간격으로 있으나 홍천에서 내면까지 운행하는 시외버스 시간이 6시 45분이고, 다시 내면에서 달둔마을을 거쳐 양양까지 운행하는 군내버스가 9시 05분이니 반드시 6시 5분 첫차를 타야 한다. 다만 첫차보단 6시 15분에 출발하는 버스가 고속도로로 달려 오히려 첫차보다 조금 빨리 도착하니 이 차를 이용하는 것이 나을 듯하다. 하지만 둘 다 6시 45분 언저리에 도착하니 자칫하면 하루를 차 기다리며 보낼 수 있으니 마음을 편히 가져야한다. 또 현리에서 홍천으로 나오는 차편도 올 6월 1일부터 바뀌었으니 이 역시 전화로 꼭 확인해야 한다. 달둔마을이나 방동약수나 어느 쪽도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란 수월치가 않다. 반드시 확인, 또 확인해야 한다. 
 
* 잠잘 곳
월둔마을에서 명지가리를 거쳐 조경동, 조경령, 방동약수까진 숙박은커녕 매점하나 없다. 계곡물이 워낙 맑아 식수는 따로 준비하진 않더라도 반드시 먹거리만은 준비해야 한다. 방동약수 인근엔 민박이며 펜션이며 숙박할 곳은 꽤 있다. 하지만 여름 휴가철 외에는 밥 먹을 만한 곳이 딱히 없으니 하룻밤 묵어가는 곳에서 해결해야 한다. 방동약수에서 현리까진 두 시간이니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나 방동분교 앞 매점을 지나치게 되면 조롱고개를 넘기까지 아침을 해결할 만한 곳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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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23 01:34 2010/12/23 01:34

1.

미쳐 돌아가는 꼴을 보고 있자니 화가 날만도 한데 어찌된 게 점점 더 무섭기만 해지네요. 뭐, 민간인을 향해 포탄을 날린 쪽을 두둔하거나 옹호하는 건 아니지만. 또 이런 짓거리는 결코 용서받지 못할 일이다,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때는 이때다, 마치 전쟁이라도 하려는 듯 온갖 과격한 말을 다 동원해 난리 법석을 떠는 모양새가. 그래요 처음엔 화가 났지요. 민간인이 죽어나갔는데도 최신형 포만 더 갖다 놓을 생각만 하고. 결국 목숨을 담보로 해야만 하는 이들을 고작 찜질방에 몰아놓고는 전투기를 동원해 폭격해야 한단 말만 늘어놓고. 이럴 때일수록 ‘응징’을 외기기 보단 ‘대화’를 하자고 해야 할 터인데, 또 미국을 등에 업고 무력시위를 하기보단 얼굴을 마주하고 얘길 해야 할 터인데 말이지요. 결국 국방부장관에 임명된 사람이나 뭔 일이 터질 때마다 지하로 내려가는 사람이나 연일 무서운 말만 쏟아내더니. 두려움에 떨던 날이 엊그제 같은 데 무슨 또 사격훈련을 한다고 합니다. 이러니 이거 정말 ‘전쟁’ 나는 건 아닌지 두렵기만 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2.
롤란트는 부모님, 누나 유디트, 여동생 게스틴과 함께 들뜬 마음으로 여름 휴가를 떠납니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가 살고 계시는 세벤보른으로 말이지요. 하지만 롤란트 가족은 외갓집을 코앞에 두고 그 전에는 상상조차 못했던 일을 당하고 맙니다. “그것은 부모들이나 어른들이 상상하고 있었던 대로 되어가지 않았다. 예를 들어 거듭 반복되는 경고문이나 선전포고도 없었다. 알프스 산속이나 지중해의 섬으로 피난갈 수 있을 만한 충분한 시간 여유도 주어지지 않았다”(p.9)는 말처럼 말이지요. 그리고 그것은 “당신들 때문에 핵폭탄이 떨어진 거야! 아이들이야 어떻게 되든 아무런 관심도 없었겠지. 자기들만 좋으면 상관없다는 거겠지. 우리가 이렇게 비참한 상태가 되어도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아. 그러면 우리들은 어떻게 하란 말이야?”(pp.128-129)라고 말하는 양쪽 다리를 잃은 소년의 말처럼. 일은 벌어졌으나 책임을 지는 사람은 없는, 그런 일이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그 일은 그처럼 쉽게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는 말로 다하기 어려운, 너무나 무시무시한, 사람으로써는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일들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걸 의미합니다. 폭발과 함께 녹아버린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폭풍이 지나간 후 발병한 전염병에 죽어간 여동생. 방사능 오염으로 온 머리카락이 듬벙듬벙 빠지고 온 몸에 반점이 돋은 채 숨을 거둔 누나. 눈과 양팔이 없는 아이를 낳고는 아이와 함께 하늘나라로 올라간 어머니와 막내 동생처럼 말이지요. 그리고 이런 일들은 롤란트 가족들만 겪은 참상이 아니었습니다. 독일 전역에서 아니 전 유럽에 걸쳐서 일어났던  것이지요. 
 
3 
한나라당 대표라는 사람은 전쟁나면 입대해 싸우겠다고 했다지요. 또 한나라당 모 의원은 연평 포격 사건 때 대통령에게 확전되지 않게 하라고 건의했던 청와대와 정부 내 사람들에게 욕설을 했다고 하구요. ‘망둥이가 뛰면 꼴뚜기도 뛴다’고. 재협상은 없다고, 글자 하나 고치지 않겠다고 강변하던 통상교섭본부장마저 FTA협상이 잘못됐다면 해병대에 지원하겠다고 말했답니다. 뭐, 너도나도 입대하겠다는 사람들 굳이 말릴 생각은 없지만요. 이번 기회에 무기 만들어 돈 버는 기업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동네 상권부터 나라를 상대로 한 상권까지 깡그리 틀어쥐고 있는 재벌들에게 또 막대한 돈다발을 안겨주려고 안달이 났거나, 아니지요. 이번 기회에 아예 한반도를 요새화하려고 맘먹은 사람들. 연평도 말고도 사람들 마음속에도 연일 폭탄을 떨어뜨리는데 광분한 이 사람들에게 꼭 한 번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핵폭발이 있은 지 3년이나 지난 뒤에야 겨우 세워진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롤란트의 아버지에게 어느 여자 아이가 했던 질문입니다.
 
“선생님은 평화를 위해 무엇을 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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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18 19:06 2010/12/18 19:06

1.

국회에서 또 몸싸움이 났습니다. 뒤엉켜 멱살잡이에, 치고받고,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 던지는 꼬락서니(심지어 모 남성 의원은 여성 당직자 머리까지 잡아 끌더군요)들이 참 가관입니다. 이러려면 애초부터 힘 좋은 의원 뽑기를 하던지 아님 과반 의석 차지하면 그냥 맘대로 다 할 수 있게 하던지. 막고 있는 이들이나 들어가려고 하는 이들이나 별반 차이가 없는 게. 엊그제는 여기에 있던 자들이 오늘은 저기에, 어제는 저쪽에서 들어가려는 자들이 오늘은 막는 이들로 서 있으니. 이놈들 욕하자니 저 놈들 한 짓이 생각나고, 괘씸한 저 놈들 보고 있으려니 이놈들도 똑같고. 그렇다고 양비론으로 둘 다를 욕하자는 건 절대 아닙니다. 다 같은 놈들이라고 해도 그때그때마다 또 이번 일처럼 분명 잘잘못은 있는 거니까요. 덮어놓고 싸잡아 욕하진 말자는 얘깁니다. 예컨대 막무가내 4대강 삽질에 올인 한, 3년째 예산안을 날치기로 통과시킨 한나라당이 이번 사태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얘길 반드시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또.
 
2.
우리 사회는 민주주의를 매우 협소한 개념으로 사고하는 듯합니다. 표결과 과반, 그것이 민주주의의 전부인양 생각하고 행동하니 그렇습니다. 아니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매년 난장판이 돼 버리고 마는 국회를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과반수 의석만 차지하고 나면 무조건 밀어붙이기로 일관하는 정치권(여, 야 가릴 것 없이, 아니 어떻게 보면 둘이 공모한 작품일지도 모르지요. 한 순간에 야당에서 여당으로 또 여당에서 야당으로 바뀌기도 하지만 누가 여당이 됐든 늘 그런 식이었잖아요)이 장단을 넣고 여기에 어울려 춤추는 언론. 이번 예산안 처리만 봐도 그렇지요. 과반 의석을 차지하고 있다고, 토론이나 심의과정은 대충대충. 그저 머릿수로 어찌해보려고만 하는 한나라당이나.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몸싸움과 고성, 온갖 던지기 등을 ‘폭력’에만 초점을 맞춰 보도하는 언론들(이런 모습들은 민주당이 과반을 차지하고 있던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뭐, 이미 예견된 거 아니었겠습니까.  
 
3.
민주주의는 결코 표결로 완성되는 게 아닙니다. 더구나 과반을 넘겼다고 해서 모든 것에 정당성이 부여되는 것도 아닙니다. 표결보다는 대화와 토론을 통한 합의를, 또 설령 과반, 아니 2/3가 넘더라도 소수 의견은 끝까지 존중하는 것, 그것이 민주주의인데 말이지요. “타협을 해도 성과가 없을 것”이라는 말이나 “고질적인 발목잡기”라고 비난을 한다 해도, 민주주의를 잘 못 알고 있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인 것처럼. ‘막장국회’니 ‘난장판국회’니 하며 선정적인 제목과 사진을 쏟아내면서도 정작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 건가,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 건가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는 언론도 결국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국회와 언론이 민주주의를 왜곡하고 애써 외면만 하니. 마치 모든 것을 표결에 붙이고 또 표결에서 과반이 넘으면 되지 않느냐, 아니 이도저도 안되면 쪽수로 밀어붙이자, 라고 생각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마치 민주주의를 잘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처럼 매우 당당해합니다. ‘승자독식’이란 말은 ‘과반’과 동의어란 것. ‘표결’은 민주주의의 마지막 수단이란 것. 다시 생각하게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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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10 22:11 2010/12/10 2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