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미쳐 돌아가는 꼴을 보고 있자니 화가 날만도 한데 어찌된 게 점점 더 무섭기만 해지네요. 뭐, 민간인을 향해 포탄을 날린 쪽을 두둔하거나 옹호하는 건 아니지만. 또 이런 짓거리는 결코 용서받지 못할 일이다,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때는 이때다, 마치 전쟁이라도 하려는 듯 온갖 과격한 말을 다 동원해 난리 법석을 떠는 모양새가. 그래요 처음엔 화가 났지요. 민간인이 죽어나갔는데도 최신형 포만 더 갖다 놓을 생각만 하고. 결국 목숨을 담보로 해야만 하는 이들을 고작 찜질방에 몰아놓고는 전투기를 동원해 폭격해야 한단 말만 늘어놓고. 이럴 때일수록 ‘응징’을 외기기 보단 ‘대화’를 하자고 해야 할 터인데, 또 미국을 등에 업고 무력시위를 하기보단 얼굴을 마주하고 얘길 해야 할 터인데 말이지요. 결국 국방부장관에 임명된 사람이나 뭔 일이 터질 때마다 지하로 내려가는 사람이나 연일 무서운 말만 쏟아내더니. 두려움에 떨던 날이 엊그제 같은 데 무슨 또 사격훈련을 한다고 합니다. 이러니 이거 정말 ‘전쟁’ 나는 건 아닌지 두렵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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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란트는 부모님, 누나 유디트, 여동생 게스틴과 함께 들뜬 마음으로 여름 휴가를 떠납니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가 살고 계시는 세벤보른으로 말이지요. 하지만 롤란트 가족은 외갓집을 코앞에 두고 그 전에는 상상조차 못했던 일을 당하고 맙니다. “그것은 부모들이나 어른들이 상상하고 있었던 대로 되어가지 않았다. 예를 들어 거듭 반복되는 경고문이나 선전포고도 없었다. 알프스 산속이나 지중해의 섬으로 피난갈 수 있을 만한 충분한 시간 여유도 주어지지 않았다”(p.9)는 말처럼 말이지요. 그리고 그것은 “당신들 때문에 핵폭탄이 떨어진 거야! 아이들이야 어떻게 되든 아무런 관심도 없었겠지. 자기들만 좋으면 상관없다는 거겠지. 우리가 이렇게 비참한 상태가 되어도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아. 그러면 우리들은 어떻게 하란 말이야?”(pp.128-129)라고 말하는 양쪽 다리를 잃은 소년의 말처럼. 일은 벌어졌으나 책임을 지는 사람은 없는, 그런 일이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그 일은 그처럼 쉽게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는 말로 다하기 어려운, 너무나 무시무시한, 사람으로써는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일들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걸 의미합니다. 폭발과 함께 녹아버린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폭풍이 지나간 후 발병한 전염병에 죽어간 여동생. 방사능 오염으로 온 머리카락이 듬벙듬벙 빠지고 온 몸에 반점이 돋은 채 숨을 거둔 누나. 눈과 양팔이 없는 아이를 낳고는 아이와 함께 하늘나라로 올라간 어머니와 막내 동생처럼 말이지요. 그리고 이런 일들은 롤란트 가족들만 겪은 참상이 아니었습니다. 독일 전역에서 아니 전 유럽에 걸쳐서 일어났던  것이지요. 
 
3 
한나라당 대표라는 사람은 전쟁나면 입대해 싸우겠다고 했다지요. 또 한나라당 모 의원은 연평 포격 사건 때 대통령에게 확전되지 않게 하라고 건의했던 청와대와 정부 내 사람들에게 욕설을 했다고 하구요. ‘망둥이가 뛰면 꼴뚜기도 뛴다’고. 재협상은 없다고, 글자 하나 고치지 않겠다고 강변하던 통상교섭본부장마저 FTA협상이 잘못됐다면 해병대에 지원하겠다고 말했답니다. 뭐, 너도나도 입대하겠다는 사람들 굳이 말릴 생각은 없지만요. 이번 기회에 무기 만들어 돈 버는 기업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동네 상권부터 나라를 상대로 한 상권까지 깡그리 틀어쥐고 있는 재벌들에게 또 막대한 돈다발을 안겨주려고 안달이 났거나, 아니지요. 이번 기회에 아예 한반도를 요새화하려고 맘먹은 사람들. 연평도 말고도 사람들 마음속에도 연일 폭탄을 떨어뜨리는데 광분한 이 사람들에게 꼭 한 번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핵폭발이 있은 지 3년이나 지난 뒤에야 겨우 세워진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롤란트의 아버지에게 어느 여자 아이가 했던 질문입니다.
 
“선생님은 평화를 위해 무엇을 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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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18 19:06 2010/12/18 19:06

1.

국회에서 또 몸싸움이 났습니다. 뒤엉켜 멱살잡이에, 치고받고,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 던지는 꼬락서니(심지어 모 남성 의원은 여성 당직자 머리까지 잡아 끌더군요)들이 참 가관입니다. 이러려면 애초부터 힘 좋은 의원 뽑기를 하던지 아님 과반 의석 차지하면 그냥 맘대로 다 할 수 있게 하던지. 막고 있는 이들이나 들어가려고 하는 이들이나 별반 차이가 없는 게. 엊그제는 여기에 있던 자들이 오늘은 저기에, 어제는 저쪽에서 들어가려는 자들이 오늘은 막는 이들로 서 있으니. 이놈들 욕하자니 저 놈들 한 짓이 생각나고, 괘씸한 저 놈들 보고 있으려니 이놈들도 똑같고. 그렇다고 양비론으로 둘 다를 욕하자는 건 절대 아닙니다. 다 같은 놈들이라고 해도 그때그때마다 또 이번 일처럼 분명 잘잘못은 있는 거니까요. 덮어놓고 싸잡아 욕하진 말자는 얘깁니다. 예컨대 막무가내 4대강 삽질에 올인 한, 3년째 예산안을 날치기로 통과시킨 한나라당이 이번 사태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얘길 반드시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또.
 
2.
우리 사회는 민주주의를 매우 협소한 개념으로 사고하는 듯합니다. 표결과 과반, 그것이 민주주의의 전부인양 생각하고 행동하니 그렇습니다. 아니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매년 난장판이 돼 버리고 마는 국회를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과반수 의석만 차지하고 나면 무조건 밀어붙이기로 일관하는 정치권(여, 야 가릴 것 없이, 아니 어떻게 보면 둘이 공모한 작품일지도 모르지요. 한 순간에 야당에서 여당으로 또 여당에서 야당으로 바뀌기도 하지만 누가 여당이 됐든 늘 그런 식이었잖아요)이 장단을 넣고 여기에 어울려 춤추는 언론. 이번 예산안 처리만 봐도 그렇지요. 과반 의석을 차지하고 있다고, 토론이나 심의과정은 대충대충. 그저 머릿수로 어찌해보려고만 하는 한나라당이나.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몸싸움과 고성, 온갖 던지기 등을 ‘폭력’에만 초점을 맞춰 보도하는 언론들(이런 모습들은 민주당이 과반을 차지하고 있던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뭐, 이미 예견된 거 아니었겠습니까.  
 
3.
민주주의는 결코 표결로 완성되는 게 아닙니다. 더구나 과반을 넘겼다고 해서 모든 것에 정당성이 부여되는 것도 아닙니다. 표결보다는 대화와 토론을 통한 합의를, 또 설령 과반, 아니 2/3가 넘더라도 소수 의견은 끝까지 존중하는 것, 그것이 민주주의인데 말이지요. “타협을 해도 성과가 없을 것”이라는 말이나 “고질적인 발목잡기”라고 비난을 한다 해도, 민주주의를 잘 못 알고 있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인 것처럼. ‘막장국회’니 ‘난장판국회’니 하며 선정적인 제목과 사진을 쏟아내면서도 정작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 건가,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 건가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는 언론도 결국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국회와 언론이 민주주의를 왜곡하고 애써 외면만 하니. 마치 모든 것을 표결에 붙이고 또 표결에서 과반이 넘으면 되지 않느냐, 아니 이도저도 안되면 쪽수로 밀어붙이자, 라고 생각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마치 민주주의를 잘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처럼 매우 당당해합니다. ‘승자독식’이란 말은 ‘과반’과 동의어란 것. ‘표결’은 민주주의의 마지막 수단이란 것. 다시 생각하게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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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10 22:11 2010/12/10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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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자크 갈로로부터 고야, 도미에, 콜비츠, 루오, 리베라, 피카소, 샤갈을 거쳐 20세기 달리, 마그네트, 뷔페, 에로에 이르기까지 전쟁의 참상을 고발한 반전그림들을 작가별로 두루 살펴보고 있는 <총칼을 거두고 평화를 그려라: 반전과 평화의 미술>이라는 책의 책장을 넘기고 있자면. 참 오랜만에 눈이 호강을 합니다.
 
물론 소개된 그림들이 하나의 주제, ‘반전과 평화’여서 보기에는 다소 암울하고 칙칙한, 어둡고 절망적일 수 있겠지만. 또 미술관이나  화집에서는 대게 구경하기 어려운 색체와 구도로 그려져 있기는 하지만 말이지요. ‘언제나 잠들지 않는 정신으로 전쟁이라는 지옥의 심연을 표현하고 평화를 갈구(p.278)’한 화가들의 노력은 그야말로 ‘진실한 민중예술, 참된 민주예술’인 것이 틀림없습니다.     
 
2.
클래식이라고 얘기하는, 모차르트나 바하, 비발디, 브람스와 같은 이들이 만든 음악은 여전히 우아함, 품격, 귀족 등과 연결돼 쉽게 범접할 수 없는 것으로 치부됩니다. 더불어 인상주의니 야수파니, 입체파, 표현주의와 같이, 고갱, 피카소, 클림튼, 마네, 르느와르가 그린 그림들 역시 화려하고 웅장하게 꾸며진 미술관에나 가야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미술관, 오페라하우스는 결코 노동자들이 사는 곳, 민중들이 가까이 할 수 있는 곳과 가까이 있지 않은 것과 같지요.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부르디외가 <재생산 (La)Reprouduction : elements pour une theorie du systeme d'enseignemen>이란 책에서 문화자본으로 개념화한 것은 일상생활에서의 ‘구별짓기’를 사회학적 개념으로 탁월하게 분석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뭐, 중언부언하자면 많은 시간과 함께 거금의 돈이 있어야만 누릴 수 있는 이런 류(類)의 예술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을 나누는 경계선 상에서만 존재할 수 있을 거란 얘깁니다.  
 
3.
책을 낸 이가 전에 썼던 글들에서 심심치 않게 풍겼던, ‘일반 독자들에게 친숙한 서양화가를 중심으로(p.8)’란 말에서 그 냄새의 정체가 의심되는 계몽주의 혹은 ‘세계미술사에서 이미 그 작품의 예술성이 충분히 인정된 화가들의 작품만 엄선(p.8)’했다는 말 속에 숨은 또 다른 서구중심주의, 그도 저도 아니면 여기저기서 발견되는 친절하지 못한 개념들에 대한 나열들에 자칫 지적유희에 빠지게 될 위험을 갖고 있어 조금은 거북스럽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약점들이 있다고 해도 박홍규 교수가 하고자 하는 말들이, ‘아무리 전쟁이 정당하더라도 그것은 부당한 평화보다 못하다(p.278)’라는 외침은 묻히지 않습니다. 아니 지금과 같이 여기저기서 ‘전쟁불사’를 외치는 때엔 되레 그 울림이 더 크게 퍼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두고두고 읽어볼만한, 두고두고 감상할만한 책이지요. 더군다나 피카소, 고야, 샤갈, 달리와 같이 주류 미술계에서도 거장으로 추앙받는 이들이 그린, 그러나 결코 주목받지 못하거나 외면당하고 있는 그림들의 진면목을 알 수 있다는 데에서는 오히려 새로운 눈을 뜨게 하니. 부족함이 없습니다.   
 
4.
책에서 볼 수 있는 그림들 가운데 멕시코 혁명을 벽화로 작업한 이들의 작품이야 말로 켜켜이 마음에 남는 그림들입니다. 아니요. 꼭 한 번은 직접 눈으로 보고 싶은 것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건 아마도
 
“우리는 일하는 사람들과 무관하고, 그림을 보려고 일부러 찾아올 수 있는 사람들만을 위한 미술을 거부한다. 민중이 미술관에서 전시회를 볼 수 없다면 전시회를 도로에서 열자. 작업장에서 술집에서 열자. 거리의 벽에 그림을 그리자. 노동조합의 벽에 그림을 그리자. 일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에 그림을 그리자.” (p.205. 리베라, 오로스코, 시케이로스: 멕시코혁명과 반전화가)
 
는 목소리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뭔가 부족하단 느낌이 드는데요. 그건 아마도.
 
예술이 예술가에 의해서만, 일하는 사람들은 그저 예술을 감상하는 관객으로만 남는 다는 것 때문일까요. 일하는 사람들이 쓴 글, 그림, 음악들이 미술관에 오페라하우스에 책에 담겨져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리고 그럴 때야만 오롯한 반전평화의 예술이 완성되는 것 아닌가 싶은데..... 맞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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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06 22:02 2010/12/06 22:02

서리태 털기

from 10년 만천리 2010/11/29 20:29
서리태 털기(11월 25일/맑음 영하 2-9도)
 
9일에 베어 널었으니 근 열흘 보름 가까이 말린 셈인데. 솔직히 말하면 말렸다기보다는 노느라 방치했다고 하는 게 옳을 게다. 뭐 팥을 수확한다고 왔다 갔다 하긴 했어도 베어 놓은 그대로 쭉 있었으니 그렇다. 서리태 수확하고 지주만 정리하면 올 농사도 끝인데. 어찌된 게 그게 그렇게 하기 싫으니, 일이 그렇게 된 게다.
 
엊그제 비도 오고 오늘은 서리도 내려 다음 주에나 일을 할까 했지만. 갑자기 추워진다는 날씨 예보에, 달력을 보니 낼 모래면 이제 12월이라 더 밍기적 거릴 수 없어 아침나절부터 밭에 나와 점심도 거르고 타작을 했다. 맘 같아선 밭에 나온 김에 지주도 싹 정리하고 싶은데. 뱃속이 하도 요동을 쳐 거기까진 못하고 콩만 다 털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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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29 20:29 2010/11/29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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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숨이 턱 막히더군요. 원체 수학을 싫어해 문과를 선택했던 터라. 그래도 전공이 경제학이니 수학이 전혀 없진 않겠지, 생각했는데. 1학년 첫 전공과목 수업부터 수요, 공급 곡선을 미적분으로 그려내더니. 2학년이 되자 과목 자체가 아예 경제수학에 경제통계더군요. 게다가 전공 교수들은 부전공으로 계량경제니 경제통계 같은 것들을 해놔서인지. 아, 정말 숨이 턱턱 막히더라구요. 평생 안 보고 넘어갈 줄 알았던 정석 2-2를 펼쳐놓고 확률, 통계에 4×4 행렬까지 하려니.
 
하지만 그것까진 어느 정도 참을만했습니다. 안 되는 머리지만 어찌어찌 수학공부(?)는 따라 갈만 했는데. 헌데 그 전공 교수들 말입니다. 나중에 들어온 한 사람 빼곤 모조리 미국물을 먹어서인가요. 아니 정확히 말하면 끽해야 케인즈학파 언저리 정도가 한 명, 나머진 죄다 고전경제학들을 전공 했더군요. 이러니 교과과정은 싹 다 주류경제학으로만 채워졌고, 언감생심 정치경제학 혹은 맑스주의 경제학은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나마 기대했던 한 과목, 경제사마저 그 나중에 들어온. 식민지근대화론을 얘기하는 사람이 강의를 차지하고 들어왔으니. 컥.
 
그러던 어느 날,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2학년 1학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지요. 몇 명의 선배들과 동기들이 강의실에 모였더랬습니다. 돌이켜보면 거창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나름 창립취지문도 대자보로 여기저기 붙이고, 회원도 미리 받고 했으니 조촐하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열 댓 명이 모여 소위 주류경제학이 판치는 학과 분위기를 쇄신하고 대안 경제학을 학과에, 학내에 보급하자며, ‘정치경제학연구학회’ 발족식을 했습니다. 아름아름 맑스주의를 공부하던 선배들이 몇 있긴 했지만 이끌어주는 교수 한 명 없이.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듯 비주류경제학을 공부해보자며 나선 것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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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이 턱 막히더군요. 두꺼운 책 두께도 그렇거니와. 한번쯤은 들어봤을 만한 그 많은 ‘사건’들-하지만 이도 웬만한 역사학자가 아니구서야 어찌 다 알 수 있을까요-에 대한 깊고 풍부한 이해. 그리고 그것에 바탕을 둔 저자만의 독특한 시각-물론 이 때문에 단숨에 책을 읽어 내려가기가 쉽진 않지만-에 책장을 넘길 때마다 숨이 턱턱 막히더라구요.
 
하지만 무심코 지나쳤을 법한 ‘혁명’에 관한 새로운 발견, 비주류에서도 다시 비주류적 해석으로 나아가는 사고의 전환, ‘자유의지’로 뭉친 민중에 대한 믿음을 올곧게 느낄 수 있는데 이르러서는. 기억으론 다 담나내기 조차 많은 ‘역사적 사건’들을 다시 천천히 음미해야겠다는 생각이 슬쩍 고개를 내밉니다. 한마디로 두 번, 세 번을 읽어야겠다는 다짐이지요.
 
3.
첫 1년은 처참했습니다. 그나마 있었던 선배들은 졸업 학년이 되면서 활동 폭이 좁아졌고,  회원은 절반 이상 떨어져나갔습니다. 그리고 후배들은 통 학회에 관심을 두질 않았지요. 뭔가 돌파구가 필요했습니다. 처음 학회를 제안했던 선배들 가운데 그래도 끝까지 해보자며 두 명의 선배가 나섰습니다. 그리고 동기들 가운데 광주에서 올라온 늦깎이 형을 중심으로 학생회 일을 맡고 있던 몇 명이 의기투합했습니다. 그리고 곧 주 1회 세미나와 월 1회 토론회를 시작했습니다. 요란하게 말잔치만 하지 말고 내실을 기하자는 의미였지요.
 
그 해 여름, 후배들과 함께 지리산엘 올랐습니다. 천왕봉 아래 장터목산장에 두 동의 텐트를 치고는 대접에 소주를 가득 부어 마시며 학회 정회원 승격식도 하고. 다음 날은 광주 망월동에도 갔지요. 그때까지만 해도. 지리산도 그렇고, 망월동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차편도 변변치 않아 꽤나 긴 길을 걸어야 했지만. 지리산 자락을 걷는 동안에도 묘역을 둘러보는 동안에도 내내 모두들 말이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천왕봉에 올라 굽이굽이 피어린 산자락들을 굽어보며. 또 구묘역에 늘어선 묘비 하나, 하나, 한 글자, 한 글자 가슴에 새기는 내내. 눈물을 흘리지 않은 회원들은 한 명도 없었더랬습니다.
 
하지만, 그 눈물들은 그리 오래 흐리지 않았습니다. 계엄군에 갇힌 광주의 민중들은 죽음을 앞둔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도. 기어이 ‘자율공동체’를 만들어냈음을 보았기 때문이었지요. 그래 이내 눈물은 환희와 용솟음, ‘격정’으로 바뀌었답니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지리산 산행과 광주 망월동 묘역 참배는 ‘정경연’ 정회원이 되는 통과의례가 됐지요. 물론 15년도 넘게 지난 지금도 후배들은 여전히 지리산엘 또 광주엘 가고 있구요. 아픈 역사 속에서 건져낸 ‘격정’이 여전히 주류경제학만을 유일경제학으로 치부하는 학풍 속에서도 꿋꿋이 학회를 이끌어 오고 있는 힘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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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26 01:14 2010/11/26 0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