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근만근 진부령 고갯길에서 멈추다(2008년 9월 27일)
정말 천근만근이란 말이 이럴 때 딱 맞는 말이지 싶다. 영동과 영서지방을 연결하는 고갯길 가운데 제일 낮다는 진부령 길을 오르는데 이렇게 몸이 무거워서야. 아무리 갑자기 추워진 날씨 탓에 감기 기운이 있었다고 해도 그렇지 이건 좀 너무한다 싶다. 암만 생각해도 몸도 몸이지만 오늘 걸어온 길이 최악의 길이어서 그런 듯싶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이냐 말이다.
가을 가뭄이 오래 지속되다 겨우 이틀 그것도 아주 쬐끔 비가 왔는데 가뭄 해결은 고사하고 날씨만 갑작스레 추워졌다. 한낮엔 20도 가까이 오른다고는 하지만 산간지방에선 첫 서리가 내린다고 하고 춘천만 하더라도 10도 아래로 기온이 떨어져 쌀쌀함이 이만저만 하지 않다. 물론 아침, 저녁 이외엔 맑은 하늘에 선선한 바람이 딱 가을 날씨를 보여주긴 하지만 밤과 낮 기온차가 심해 감기 걸리기엔 딱인 날씨다. 그래서인지 느닷없이 여행가자 마음먹긴 했지만 출발부터 걱정이 앞선다. 안 그래도 어제 저녁부터 재채기가 슬슬 나오는 게 아무래도 수상하다.
어둑어둑한 새벽녘에 출발한 덕에 한계삼거리에 일찍 도착했다. 원래는 중간에 한 번 군내버스로 갈아타야하지만 운전기사 아저씨께 부탁해 정류장도 아닌 곳에서 내릴 수 있어 더 빨리 도착한 게다. 그래봐야 20여분이지만 이 추운 날 표 다시 사고 버스 기다리지 않은 게 어디냐 싶고, 정말 그런 게 버스 바깥은 생각보다 더 춥기만 하다. 서둘러 휴게소로 들어가 인삼차에 생강차를 마셔보지만 잠깐뿐이다. 아무래도 좀 걸어야 몸에서 열이 나려나.
헌데, 출발부터 고약하다. 날씨 좋은 주말이라 그런지 웬 차가 이리도 많은지. 것도 순 관광버스다. 거기에 걸으면서 안 거긴 하지만 곳곳에 길을 내느라, 혹은 넓히느라 공사장이 널려 있어 거기서 오고가는 웬 트럭들이 그렇게도 많은지. 것도 순 츄레라에 덤프트럭이다. 또 길은 어찌나 좁은지. 갓길마저 거의 없다시피한 길이라 양쪽으로 트럭이나 버스가 지나칠라면 걷기를 멈추고 길 바깥으로 저만치 물러서야한다. 며칠 전 달리기 하던 이가 여기 이곳 진부령을 넘다 차에 치었다고 하던데 남 일 같지 않다. 신경이 곤두선다.
결국 한 시간도 채 걷지도 못하고 가드레일을 넘어 강가 소나무 숲으로 피신하고는 주섬주섬 아침과 점심때 먹을 요량으로 어제 밤 준비해 둔 감자며 김밥을 하나씩 꺼내든다. 날씨는 무쟈게 좋은데 길은 엉망이고, 코스모스에 이름 모를 꽃들이 여기저기서 손을 흔드는데 눈은 함부로 돌릴 수는 없고. 아무리 봐도 미시령과 진부령이 갈라지는 곳까지는 가야 한 숨 돌릴 수 있을 듯하다.


등 뒤로 햇볕이 따가워질 무렵까지는 그렇게 질주하는 차들을 피하느라 어기적어기적 걷는데 그 와중에도 길 위에 떨어져 있는 도토리 줍기에, 길가에 피어 있는 해바라기 씨 털기에 할 짓은 다 한다. 또 학교 안에 자그마한 공원까지 갖고 있는 용대초등학교에선 뒤늦은 밤 줍기에 시간가는 줄 모르니 이 재미라도 없었으면 무신 재미로 걸었을까.
솔직히 백담사는 그닥 둘러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다른 이들은 어떤 이유에서 백담사를 찾을지 모르겠지만. 광주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하고는 되레 그 대가로 대통령까지 지낸데다 아직도 국가원로라고 무슨 일 있을 때마다 신문이며 티비에서 난리를 치는 그 잘난 대머리를 덥석 받아준, 그걸로 마치 이승에서의 죄를 다 속죄 받은 양 고개를 뻗뻗이 쳐들 수 있게 만든, 그놈의 절이 대체 모하는 절이고 어떤 절인가 궁금하긴 했었지만 말이다.
백담사로 들어가는 길부터 꼬였다. 입구에서 확인했을 땐 분명 칠백 미터만 가면 셔틀버스를 탈 수 있다고 했는데 한참을 가도 보이질 않는데, 겨우겨우 도착해보니 여기저기 임시 주차장마다 관광버스가 그득그득. 걸어서는 2시간이고 차로는 10분이라는데 버스 값은 1,800원, 또 버스타려는 줄은 끝이 보이질 않네. 이럴 줄 알았다. 아까 입구에 길 물어보고 난 후 별 생각 없이 걸어 들어온 게 잘못이지. 애당초 별 구경할 맘 없다는 걸 이심전심으로 알았다면 여까지 오지도 않았을 텐데. 괜스레 시간만 버리고 배만 잔뜩 고프다. 에라. 배나 채우자.
순두부와 콩비지로 맛나게 점심을 먹고 나니 아침에 그렇게 쌀쌀했던 날씨가 언제 그랬냐는 듯 후텁하다. 이제 뭐가 그리 바빠 멀쩡한 길 나두고 산허리를 뚫어내고 또 길을 낸 미시령터널길과 갈라지는 곳까지만 가면 한 시름 놓을 것이니 쉬엄쉬엄 따가운 가을 햇살을 피해 걷는다. 계곡가 바위에서 잠시 쉬기도 하나 누가 버리고 간 것인지 음식물 쓰레기 냄새에 금방 자리를 털고 일어나기도 하고 길 이쪽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리면 길 저쪽으로 넘어갔다가 다시 길 이쪽에서 ‘컹컹’ 소리가 나면 또 길 저쪽으로 뛰어갔다 하기도 하고, 맑은 가을 하늘을 한참이나 올려다보며 한참을 쉬기도 하고, 그렇게 다문다문 걸으니 어느새 진부령 꼭대기다.
출발할 땐 내처 걸어 하룻밤 잔 뒤 간성까지 걷자 했는데 막상 진부령에 오르고 나니 아침 내내 그리고 백담사에서의 헛걸음에 오후엔 덩치가 산만한 개들 때문에 녹초가 됐다. 그야말로 몸과 마음이 천근만근이다. 해서 때 마치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서 있는 원통행 버스에 오른다. 더 걷다가는 제대로 감기에 걸릴 것 같기에. 오늘 하루 종일 씨름하며 걸었던 길이 휙휙 순식간에 차창 밖으로 지나쳐간다. 아, 힘들다.
* 스물세 번째 여행에서 걸은 길
한계삼거리에서 진부령까지 44번 국도를 따라 약 23km, 걸은 시간 약 8시간 30분.
* 가고, 오고
춘천터미널에서 원통을 거쳐 속초로 가는 시외버스는 한계삼거리에서 정차하지 않지만 맘 좋은 기사분만 만난다면 내릴 수 있으니 시도할 만하다. 아님 원통에서 군내버스로 한 번 갈아타야 하는데 춘천에서 첫차를 타면 곧 한계삼거리를 거쳐 진부령까지 운행하는 군내버스를 탈 수 있다. 시간상으로는 전자가 후자보다 20여분 빨리 도착한다. 진부령에서는 반대로 군내버스를 타고 원통에 와서 다시 춘천으로 가는 시외버스로 갈아타야 한다. 거진에서 춘천으로 운행하는 시외버스가 있긴 한데 진부령에서 정차를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3.
사실 은비령 길이 아니라면 한참 전에 대간을 넘어 동해 바다 쪽을 걷고 있을 테다. 오대산 구룡령 쪽도 그렇고, 또 오대산 진고개 쪽도 그렇다. 어느 쪽으로 걸었어도 산을 넘어도 진즉에 넘었을 거란 얘기다. 또 그렇게 산길을 걸었다면 이 걷기여행도 모르긴 몰라도 지난 번 혹은 지지난 번 걷기로 끝을 봤을 게다. 마음 한구석엔 점점 가까워지는 종착지에 왠지 모를 서운함에 에둘러 대간을 목전에 두고 숲길과 옛길들을 걸어보자는 핑계 아닌 핑계를 댔는지도 모른다. 이유야 어쨌든 덕분에 좋은 길을 둘러, 둘러 걸을 수 있으니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게 아닌 가 싶고, 이번 은비령 길 역시 이런 핑계엔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에 그리 걷기로 했다.
애당초 은비령이란 이름은 없었다 한다. 지금이야 은비령이란 이름이 더 알려졌지만. 그저 오색령의 저쪽을 가리키는 것뿐이었기도 하고. 약수 이름을 따 필례령이라 불리기도 하고. 그게 필례령이고 오색령이지 은비령인건 아니었단 얘기다. 글쓴이는 그렇게 예쁜 이름을 붙였지만 글을 쓴 후에나 그 곳엘 가보았다 한다. 별의 시간을 기다리고 기다린 후에야 만나게 되는 길을 그는 그렇게 글을 다 풀어 낸 후에야 만난 것이다.

은비령과 한계령을 휘감았던 비구름은 내리막길에 접어들자 곧 벗어났지만. 호랑이 혼인하는 날 온다는 마른 비는 장수대를 지나서야 겨우 피할 수 있다. 혹여나 비가 더 거세질까 급한 데로 옷가지를 싸두었던 비닐들을 다 끄집어내 여차하면 머리에 뒤집어쓸까 했는데. 다행히도 그런 일까진 벌어지지 않았다. 이제 한계리까진 쉬엄쉬엄 가도 해 지기 전에 도착할 것이고, 해서 설악의 산세 구경에 자주자주 쉬어 가는데. 비구름 속으로 굽이굽이 돌아가는 한계령 고갯길 그리고 저 편 은비령 길을. 다시 2천 5백만 년 후, 이렇게 또 걷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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