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사람이 문제인가요. 책을 쓴 이는 단호히 말합니다.

 

인간의 문제가 간과된다면, 인간은 자신의 분신인 문명을 희생양으로 삼아서 면죄부를 얻으려는 위선적 장치를 마련하고 있다는 비판을 외면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p.196

 

그리고 

 

문명비판론자들이 우리 시대가 직면한 위기의 근원을 문명으로 지목하는 과정의 영악성과 이기성을 지적 p.200

 

하고자 글을 썼다고 합니다. 예컨대 글쓴이가 말하듯이 ‘수질오염’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난 ‘생태위기’의 주범을 가정용세제로 몰아가는 것은 “자본논리의 시녀노릇을 수행하기 위해서 만만한 가정주부들을 속죄양으로 삼고”있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이를 위해 글쓴이는 <숲속에 사는 사람, 숲밖에 사는 사람>(pp.96-119), <씨를 말리는 화학무기>(pp.165-183>와 같은 글들을 통해.

 

또, <문명론과 문명비판론의 반생태학: 에필로그>(pp.184-205)라는 글에서는 세 가지 중요한 사건(북미 동남부의 행여비둘기(passenger pigeon), 북극권의 雪車革命, 사회주의혁명과 아랄海)들을 살펴봅니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편리함을 추구하는 인간의지가 우리 시대의 생태학적 위기의 근원이라는 결론이 가능하다. 편리함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삶을 부수는 작업을 해왔다. 편리함의 부산물로 생성된 쓰레기는 편리함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파괴된 다른 種과 다른 사람을 適所(niche)를 대체함으로써 돌이키기 어려운 “適所置換”(niche displacement)의 현상을 보이고 있다. 파괴된 다른 종과 다른 사람의 삶을 밑거름으로 삼아서 피어난 편리함의 꽃을 우리는 문명이라고 불러왔고, 그러한 논리를 정당화하려는 노력으로서 인간은 문명론과 문화이론을 구축해왔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사람이라는 종의 편리함을 구축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생태권이 시달림을 당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생태위기의 본질임을 알 수 있다. p.203

 

고 일갈합니다.

 

이런 문제의식은 글쓴이가 말하는 문명을 구성하는 세 요소, 즉 기술과 이념, 이 양자가 함께 생산한 조직 가운데 ‘본질적으로 중립적인’ 기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데요. 즉,

 

어떤 기술이 “좋다, 아니다”하는 가치판단의 기준 속에 들어가는 것은 그 기술이 적용된 상황과 적용방법에 의해서 결정될 수 있을 뿐이다. 즉 그 기술이 적용되는 과정에 개입하는 인간의 의지에 의해서 기술의 의미는 선악의 가면을 쓰게 되는 것 p.187

 

이라고 합니다. 어때요. 이만하면 글쓴이가 매우 일관되게 ‘무엇’이 문제다, 라고 말하고 있지 않나요.  

 

헌데, ‘인류학자의 환경론’이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 왜 제목이 ‘똥이 자원이다’ 일까요. 도올 김용옥씨가 쓴 추천하는 글을 보니 이렇습니다.

 

애초에 전경수 선생이 이 책의 좋은 제목을 하나 생각해 달라고 하기에 “문명을 어떻게 운영하나?”로 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랬더니 몇일 후에 전경수 선생은 “똥은 자원이다”로 가자고 하였다. 나는 역시 그의 등치다웁게 과감한 판단에 대해 찬탄을 금할 수 없었다. 나의 제목은 매우 소극적 제안이나 질문에 지나지 않은 것에 불과한데 반하여 전경수 선생은 그 핵심적 해답을 이미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똥이 밥이다! 문명의 똥을 다시 문명의 밥으로 삼아야 한다는 그의 논의야말로 노동의 결실로서 성스러운 “밥”이라는 기존의 논의를 한차원 뛰어넘는 것이다. 밥과 똥은 지나가는 엘리멘타리 트랙(the alimentary tract)이라고 하는 소화기계의 캐널에 의하여 연결된 개념이며 그것은 一心二門과도 같은, 一體二用의 개념인 것이다. 밥과 똥은 天地自然의 에코체인에 있어서 연기론적(화엄실상론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총체적 일환의 두 측면인 것이다. pp.32-33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애당초 쓰레기라는 말이 없었던. 순환만이 존재하는 자연계에서 일탈한 인간이 이제는 이 순환의 고리로 되돌아가야만 한다는. 역시 문제는 사람인 셈이다, 는 그 말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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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6 11:51 2010/08/16 11:51

계속되는 비

from 10년 만천리 2010/08/15 21:58
계속되는 비(8월 9일/무더움 24-34)
 
연일 무더위에 비다. 그냥 덥기만 하면 그래도 참을만한데. 습하기까지 하니 불쾌지수가 높을 수밖에. 낮 동안 시원한 동네 도서관으로 피했다가 저녁에나 밭에 가려고 하는데. 방금까지도 화창하던 날씨가 순식간에 어둑어둑해지고. 폭우가 쏟아지기도 하고. 내렸다 그쳤다 가를 반복하기도 하고. 통 밭에 나가기가 어렵다. 해서 오늘은 새벽나절에 움직여 사흘 만에 풀도 베어 주고. 이것저것 따오기도 하고. 쓰러진 고추며 콩도 일으켜 세우는데. 9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간에도 땀이 주르륵. 풀로 뒤덮인 밭이 마음에 걸리지만 더 일하다가는 사람 잡을 듯. 어서 가서 시원하게 목욕이나 해야지.
 
태풍(8월 10일/흐리고 무더움 23-28)
 
점입가경이다. 하루걸러 비 오는 날이 계속되더니 이젠 태풍이라니. 이러다 밭이 정글이 되지는 않을까 걱정이다. 내리는 비에 풀이 잘도 자라는데. 흠뻑 젖은 풀밭에 들어가면 10분도 채 되지 않아 무릎까지 다 젖고. 후덥지근한 날씨에 윗도리도 다 젖고. 비가 오지 않는 날이라도 밭에 나가야 하겠지만.  
 
새벽같이 나와 일을 해봐도. 밤새 내린 이슬로 젖는 건 매한가지. 새벽이라 해도 덥기는 또 매한가지. 그나마 해라도 없으니 다행이지. 8시만 되면 해까지 머리위에 뜨니 겨우 두 시간 남짓 일하는 셈. 그래도 이렇게라도 나와야 땅콩 심은 곳 풀도 잡아주고. 고추밭, 고구마밭 낫질도 할 수 있다. 아직 콩하고 팥 심은 곳은 손도 못 대고 있지만.
 
또 오는 비(8월 14일/흐리고 비 24-30)
 
웬 비가 이리 자주도 오는지. 태풍도 태풍이지만 우기(雨氣)인가 싶게 하루걸러 아니 이번 주는 월요일 빼고 쭉 비다. 덕분에 푹 쉬고는 있지만 이건. 몸만 쉬는 거지 마음은 타들어간다. 작물들이 잘 버티고 있으려나.
 
오늘도 하루 종일 비가 온다지만 잠깐 그친 사이 밭에 나왔는데. 아니나 다를까. 고추 몇 개는 쓰러져 있고 또 몇 개는 고추들이 다 물러 터져 있다. 토마토 역시 채 익지도 않은 것들이 죄다 물러 터졌고. 방울토마토는 맛이 영 시원찮고. 물을 좋아하는 오이만은 주렁주렁 열렸지만. 고구마 밭에 무릎까지 올라온 풀이며. 콩, 팥 심은 곳에도 풀이 쑥쑥 올라온 게. 심란하다.
 
서둘러 고추며 오이를 따고 고구마 밭 풀 뽑는데. 또 비가 쏟아진다. 이번 비는 내일까지 꽤 많은 양이 온다고 하던데. 고추가 큰 걱정이다. 아무래도 잠깐잠깐 비가 그친 사이라도 밭에 나와 이것저것 손을 봐야할 듯하다. 
 
모처럼 해가 쨍(8월 15일/무더움 25-31)
 
8월 들어 보름이 지난 지금까지 비가 온 날이 무려 12일이다. 일지를 보면 하루걸러 간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비가 잠시 그친 때, 부랴부랴 밭에 나간 것이니. 그래도 그렇지. 기상청 홈페이지에서 확인을 하고 하니, 새삼 심하단 생각이 든다. 지금부터라도 비가 살살 와야 할 터인데.
 
오늘은 모처럼 해가 쨍하고 떴다. 아침까지만 해도 잔뜩 흐린 하늘에 해가 나올 것 같아 보이지 않았는데. 점심 먹고 한 잠 자려는데, 창밖으로 밀려들어오는 햇살에 퍼뜩 정신이 든다. 이게 얼마 만에 뜬 해이던가.
 
해가 나니 밭일을 나가야겠는데. 밀린 일로 마음은 급하지만, 곧 땀으로 범벅이 될 걸 생각하니, 몸이 쉽게 움직이질 않는다. 이래 마음이 간사해가지고 어찌 농사를 지으려는지. 비 온다는 핑계로 내심 잘 쉬다, 이제 일 하려니 밍기적거리는 게다. 이리저리 괜히 시원한 물이 없네, 벌써부터 덥네 하며 시간을 끌었더니. 결국 두 시간도 채 일을 하지도 못하고. 쩝. 비 덕분에 많이 나태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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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5 21:58 2010/08/15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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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는 ‘합리주의’ 또는 ‘합리성’이라는 말을 쓸 때 아주 당연하다는 듯 ‘서구’, ‘서구적’, ‘서양’과 연관 짓습니다. 그리고 이와는 반대로 ‘동양’, ‘동양적’이라는 말을 쓸 때는 ‘지혜’이니 ‘정신’이니, ‘도덕주의’를 떠올리는데요. 이런 생각들은 한편으론 ‘합리성’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과 그에 대한 비판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고, 또 다른 한편으론 ‘합리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되는 측면이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동양’이니 ‘서양’이니 하는 말이 갖는 이분법도 그렇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을 이런 방식으로 나눈 다는 것이 정말 맞기는 한 건가요. 
 
그럼에도 학문적, 지적 세계에서나 전통, 혹은 문화의 측면에서나. 이 동.서양을 가로지르는  이분법 또는 서양의 ‘합리주의’에 대응한 동양의 ‘지혜’ 혹은 ‘도덕주의’는, 생각보다 꽤나 깊게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는 환경위기를 보는 시각에서도 드러나고 있으니 말이지요. 물론 이런 생각들이 우연치 않게 드러난 것인지 아니면 진짜 속마음이 이런 ‘정신’들로 나타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기 환경위기를 바라보는 두 시각. 참 많이도 다르면서 같다는 걸 보여줍니다.
 
2.
<원은 닫혀야 한다: 자연과 인간과 기술 The Closing Circle: Nature, Man, and Techonlogy>을 쓴 카머너 B.Commoner 는 생물학을 전공했습니다. 그리고 <자연과 더불어 지구를 부수지 않고 사는 방법 CHIKYU WO KOWASANAI IKIKATANO HON>를 쓴 쓰치다 다카시槌田劭 는 공학부를 나왔구요. 전공 분야는 생물학과 금속물리학으로 다르지만 둘 다 현대 과학기술이 발전하는 데 가장 큰 밑바탕이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한 사람이 ‘시험관 속에 격리된 분자를 연구해서 현대생물학의 방대하고도 상세한 문헌들을 축적해 왔다. 그러나 이런 분리된 자료로는, 예컨대 호수의 생태나 그 취약성을 설명할 어떤 종합적 결과를 얻을 수 없었다.’(<원은 닫혀야 한다> p.24), 또 한 사람은 ‘지하자원에 빌붙어 움직이는 문명이라는 게 한마디로 자신의 어머니를 해치고 그 체내에서 피를 훑어 내가며 사는 듯한 일’(<자연과 더불어 지구를 부수지 않고 사는 방법> p.129)이라며 현대 과학을 날카롭게 비판합니다. 그리고는 끊긴 생명의 ‘원’을 다시 닫자, ‘순환’의 삶을 살자, 합니다. 어째, 이만하면 과학계에 이단아들 같지 않나요.
 
하지만 이 두 사람. 카머너가 이리호, 일리노이주, 로스앤젤리스를 돌며 생태계를 파괴하는 원인, 본질을 파헤치듯. 다카시 역시 아시오足尾 동(銅)광산, 도쿄, 말레이시아 사라와그나 사바주를 얘기하며 푸른 지구를 위협하는 문제들을 살펴보는 데에서는 과학자임에 틀림없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다카시가
 
주스를 마시면 빈 깡통이 남지요. 슛 - 하고 쓰레기통에 던집니다. 이 쓰레기가 어디에서 어떻게 처분될지 모르면서도. 우리가 학교에서, 집에서, 거리에서 내놓는 쓰레기는 누군가가 어딘가로 가져가 줍니다.
p.41
 
와 같이 쉽게 읽을 수 있게 글을 쓰는 데 반해 카머너는 좀 딱딱하지요.
 
생태학의 제2법칙:
모든 것은 어디엔가로 가야 한다
이 법칙은 물론 물질은 파괴될 수 없다는 물리학의 기본법칙을 딱딱하지 않게 다시 써 본 것이다. 이 법칙은 생태학에 적용하면 자연에는 <쓰레기>라는 것은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p.42
 
또 카머너가 ‘환경위기에서 살아남으려면 공업화된 나라들의 사람들이 <풍요한> 생활방식을 포기할 필요가 있으리라는 것을 반드시 뜻하지 않는다.’(p.293)고도 말하고, ‘다분히 인간 개인의 사실상의 복지보다는 생태학적으로 잘못되고 사회적으로 낭비적인 생산유형을 반영한다.’(같은 쪽)고도 하며, ‘기술의 목적이 어떤 외견상 접근하기 쉬운 부분에로가 아니라 생태계 전체로 방향지어진다면 적절한 과학지식으로 잘 인도될 때 기술은 생태계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음’(p.188)을 얘기합니다.
 
반면 다카시는 ‘공해문제의 기본은 오염원 대책(汚染源 對策)입니다. 쓰레기 공해문제의 오염원을 끊어버리기 위해서는 상품생산을 규제하는 수밖에는 없습니다.’(p.48), ‘그러므로 용기와 지성을 가지고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하여야 합니다. 이기주의와 찰나주의, 눈앞의 것과 자기의 일밖에는 생각하지 못하고 그저 달리기만 하는 것은 이제 멈추어야 합니다.’(p.85)라고 말하지요.
 
3.
중세 서양, 신으로부터 해방된 인간 ‘정신’은 베버((Max Weber)가 말한 “근대 서양의 독특한 합리주의라는 세계사적 현상”으로 자본주의를 만들어내는 원동력이 됩니다. 그리고 이 원동력은 자연에 대한 지배 질서까지도 창조해내지요. 결국 인간 ‘정신’은 ‘진보’라는 외피를 뒤집어쓴 채 지구별을 망가뜨리고 있는 셈입니다.  
 
한편 동양의 ‘정신’은 ‘이성’과는 매우 다른 내용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나 합리화를 넘어서려는, 적극적이고도 창조적인 활동보다는 전통 속에, 과거로 돌아가고자 하는 성질이 많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근본주의’가 갖는 한계 역시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이 두 책, 그리 꼭 들어맞지는 않겠지만. 어울리며 대화를 하다보면 길이 보일 수도 있겠다, 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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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0 21:21 2010/08/10 21:21

물놀이(8월 1일/무더움, 박무 26-32)

 

낮에 하도 더워 물놀이를 다녀왔다. 조그만 집에 장정 다섯에 일곱 살 먹은 얘까지 있으려니 쉽지가 않다. 에어컨이라도 있으면 좀 나을 텐데. 조그만 선풍기 하나로 버티려니 도저히 숨을 쉴 수가 없다. 해서 가까운 지암리 계곡엘 다녀온 것이다. 그리고는 모두다 밭으로 출동. 며칠 나오다 말다 하느라 수확하지 못한 오이며, 방울토마토, 참외, 수박 등을 따낸다. 모기에 발이며 팔뚝을 뜯기며. 물놀이 차림으로 밭에 들어간 게 모기밥이 된 셈인데. 그래도 좋다고 여기저기 기웃기웃. 재미난 모양이다.

 

걸어서 가는 밭(8월 3일/무더움, 박무 23-30)

 

오늘부터는 아침나절에 걸어서 밭에 가기로 했다. 운동 삼아 걷는 것인데 한편으론 밭일을 아침에 하고자 함이다. 아무래도 저녁나절에 밭에 가면 모기떼들에게 뜯기가 십상인데. 아침엔 좀 덜할까 싶어서다. 또 혼자 밭일을 하는 게 아니라 둘이서 하는 재미가 더 크니 아침잠을 좀 줄이더라도 걷기로 한 것이다. 다행히 걷는 길이 대학 교정을 통과하기도 하고. 새벽시장을 구경할 수도 있고. 좀 멀다 싶긴 하지만 운동 삼아 걷기에 적당한 거리다. 하지만 그렇게 걷고 밭일하고 집에 와 좀 쉬었다 도서관에 다녀오니. 완전 녹초다. 이러다 내일 아침엔 제시간에 일어날 수나 있으려나.

 

장마가 아직 안 끝났나?(8월 5일/무덥고 소낙비 26-34)

 

재작년인가, 기억은 잘 나지 않는데. 장마예보를 하지 않는다는 뉴스가 있었다. 장마라고 해도 비가 오지 않는 날이 많고. 적장 장마가 끝났다고 예보해도 집중호우에 비 오는 날이 많고. 지구온난화 탓에 이래저래 강한 비가 수시로 내리는 등 여름철 강수 특성이 변해 장마를 예측한다는 것이 무의미하기 때문이라고 했던데. 아니나 다를까.

 

요 며칠 찜통더위가 지속되는 게 장마가 끝난 것처럼 보였다. 헌데 지난 주말부터 하루걸러 비가 오고. 비가 오지 않는 날은 박무가 생기고. 장마철처럼 내리 비가 오진 않아도 눅눅한 날씨가 계속되는 게 꼭 그때처럼 느껴지더니.

 

마른하늘에 이런 비도 처음이다. 밭에 도착해 한참 낫질을 시작한 10분전만 해도 멀쩡했는데. 순식간에 먹구름이 몰려들고. 한두 방울 떨어지던 빗방울이 순식간에 폭우가 되는데. 속옷까지 젖는 데 딱 5분도 채 걸리지 않은 듯하다. 겨우겨우 자전거를 끌고 버스정류장으로 피했지만 이미 물에 빠진 생쥐 꼴. 빗줄기가 가늘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헌데 하늘은 여전히 어둑어둑.

 

10분만 더 참았다 출발할 걸 그랬다. 어차피 젖은 몸. 빨리 집에 가서 씻어야겠다는 생각에 쏟아지는 비를 철철 맞으며 자전거 폐달을 밟는데. 어느새 조금씩 가늘어지는 빗방울이 금세 멈추더니 곧 구름 사이로 해가 보인다. 이런. 갑작스레 내린 비 때문에 더위는 조금 가시긴 했지만. 그래도 속옷까지 다 젖고 나니 찝찝한 게. 영 시원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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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09 21:54 2010/08/09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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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롭게 살기

from 말을 걸다 2010/08/04 23:42

1.

‘천안함 침몰’ 사건으로 발생한 한반도 긴장상태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의장성명 채택으로 한 숨 돌리는 모양새입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성명에서 제기한 것처럼 “직접대화와 협상을 가급적 조속히 재개하기 위해 평화적 수단으로 한반도의 현안들을 해결”할지, ‘사건’ 초기부터 일관되게 이번 기회에 ‘손을 봐줘야 한다’는 식으로 분위기를 만들어간 보수 세력들의 주장에 더욱 힘이 실릴지는, 장담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대화와 협상’, ‘평화와 우애’를 더욱 힘주어 이야기해야 함에도. 덮어놓고 ‘빨간색’을 칠해대니 말입니다.

 

2.

벌써 한 달이 넘었네요. 밭에 다녀오는 길. 골목길에서 자동차를 미처 피하지 못하고 들이받고 말았습니다. 평소에도 앞, 뒤 가리지 않고 자동차들이 불쑥불쑥 나오는 골목길인지라 그날도 조심조심 속도를 줄였지만. 느닷없이 튀어나온 탓에 ‘어, 어’ 하는 외마디만 지른 채 그대로 차문을 자전거로 받았지요. 다행히 왼손 검지가 까진 것 외에는 다친 데가 없었지만. 자전거든 사람이든. 가리지 않고 무섭게 돌진해대는 차들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터라. 요번엔 봐주지 말아야겠다, 마음먹고 있는데. 일단 병원으로 가자, 자전거도 수리하자, 거듭 죄송하다며 안절부절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자. ‘머, 크게 다친 것도 아니고. 실수했다는 걸 인정하니…….’ 그래, 웃으며. ‘괜찮으니 틀어진 자전거나 고쳐봅시다’하고는 말았지요.

 

그리고는 다음 날 저녁. 또 밭에 다녀오는 길에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어제 사고 낸 사람인데. 괜찮으냐. 죄송한 마음에 전화했다. 내일 저녁을 대접하고 싶다’, 뭐 그런 내용이었지요. 그런데, 사고가 난 날도 그랬지만. 전화를 받았던 그날도. 꽤나 기분이 좋았답니다. 비록 그 전화가 있고 난 며칠 후. 사고 때문인지는 정확치는 않지만. 왼쪽 어깨며, 목 부근이 자고나면 뻐근한 게. 그 좋은 기분이 오래가진 못했지만요.      

 

3. 

성격상 웬만한 일은 그냥 ‘허, 허’ 웃고 잘 넘어갑니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욱’하고 치밀어 오르는 성질을 참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횡단보도를 무시하고 달려드는 차들을 볼 때, 관공서에 마주친 어깨에 ‘빡’ 힘들어간 공무원을 볼 때, 일당 받고 파업 현장에 들어와 깽판 치는 ‘어깨’들과 마주쳤을 때, 2MB이 하는 일이라면 덮어놓고 찬성하는 이들과 얘기할 때가 그렇습니다. 자칭 ‘평화’를 옹호한다고 블로그 이름도 ‘자연은 평화다’라고 해놓고는. 작정하듯 달려들어 싸울 태세인 모습을 누가 보기라도 할라치면. 이거야 원. 남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할 지경입니다.    

 

4.

장마철로 접어들면 온통 밭은 풀천지입니다. 그나마 많은 사람들이 대체 뭘 심은 거냐며 물어오던 호밀이 무섭게 크다 한 풀 꺾여 좀 나아 보이긴 하지만. 오백 평, 천 평 밭농사 짓는 농부님들이 보면 참 우스운 지경이지요. 하지만 농사란 것이 원래 인간이 먹을거리를 기르기 위해 다른 풀들을 강제로 땅에서 몰아내는. 극히 ‘폭력’적인 방식으로 하는 것이긴 하지만. 석유로 만든 비닐이며, 비료며, 기계를 써가며 까지 농사를 지으면서 풀이 조금 자랐다고 농약까지 친다면야. 남들이 들으면 어디 그래가지고 시골에서 손가락질 안당하며 살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하겠습니다.     

 

5. 

역시 한 달 전쯤 이라고 기억합니다. 대낮 남춘천역 앞에서 대판 말싸움을 했지요. 의정부에서 오신 어머님도 계셨고 해서. 웬만하면 그냥 지나치려 했는데. 아마 고 며칠 전 사고 기억이 겹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뻐근한 목이며, 어깨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 졌을지도 모르지요. 아무튼. 역 앞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속도를 줄이지도 않은 채 득달같이 좌회전해 들어오는 차를 보고는 삿대질에 쌍욕을 했던 겁니다. 젊디젊은 우리야 그렇다 쳐도. 나이 드신 어머님이 채 횡단보도를 건너지도 않았는데 무섭게 질주를 해대니. 순간, 도저히 참질 못하겠더라구요. 그래. 한바탕 욕을 한 겁니다.

 

헌데 이 운전자. 욕 들어 먹은 게 분했던 가요. 짐작컨대 꽤나 한참이나 길을 돌렸을 터인데도. 차를 돌려 세우더니 왜 욕을 하느냐, 며 말을 거는데. 달려드는 차에 두려움을 느낀 사람 생각은 통 하질 않는 것 같더군요. 해서 속된말로 맞장을 떴습니다. 또 치고받고만 하지 않았다, 뿐이지. 지나가는 사람들이 봤다면. 정말 재미난 싸움 구경이었을 겁니다. 그래, 그렇게 10여분이 넘게 말다툼을 하다 어찌어찌 겨우 다시 집으로 갈 수 있었는데. 말할 수 없는 찝찝함이란 게 얼마나 오래 가던지. 그게 그 운전자에 대한 분노인지, 불같은 성질을 낸 것에 대한 자책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6. 

예상했던 대로 지방선거가 끝나고, 유엔에서 성명도 나오고 나니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천안함’은 더 이상 뉴스거리도 되지 않네요. 호들갑스럽게 ‘응징’, ‘단호한 대처’를 주문했던 보수 언론들도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으니 말입니다. 그래도 아직은 ‘대화’나 ‘협상’을 얘기하는 분위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무수한 ‘침몰’ 의혹들에 대해서는 여전히 요리조리 잘도 빠져나가면서도. 동북아 안보를 핑계로 일본 자위대까지 참관한. 항공모함을 동원한 대규모 한미 합동군사훈련까지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야말로 ‘불굴의 의지’입니다.    

 

일주일이 넘게 고구마를 심은 이랑 사이를 기다시피해가며 풀을 뽑으니. 훤하니 보기는 좋습니다. 그리고 이제 고구마가 줄기를 마음껏 뻗을 수 있겠거니, 싶으니 마음이 조금 놓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 손에 뽑혀져 나간. 이름 모를 풀들이며 꽃들이 밭 한쪽 귀퉁이에 쌓여 있는 걸 보니. 그리고 또 이 풀, 꽃들을 터전으로 살았던 벌레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생각하니. 영 개운치만은 않은데. 그것도 잠깐. 옥수수 사이로 콩 사이로 삐죽삐죽 올라온 풀들을 향해 아무 생각 없이 무지막지하게 낫을 휘둘러대고 있습니다.  

 

요즘은 목이 아파 자주 밭엘 나가지 못합니다. 또 가더라도 자전거보단 버스를 타고 가지요. 그리고 고구마 밭 김매기도 끝난지라 딱히 급하게 할 일도 없었기에. 어제도 느긋이 집을 나섰습니다. 헌데 첫 번째 신호등에서 한 번. 타고 가는 버스가 또 한 번. 신호등에 횡단보도까지 무시하고 달려드는 승용차에, 버스에. 어찌나 열불이 터지던 지요. 이번에도 쌍욕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데.

 

이것 참, 이래저래 ‘평화롭게 살기’. 쉽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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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04 23:42 2010/08/04 23: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