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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경 - 천연의 요새

 

1.

지리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남경에 와보면 절로 아 이곳은 정말 천연의 요새로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남경시는 중국 최대의 강인 양자강이 파양호 근처에서 북동으로 흘러 안휘성을 가로질러, 강소성으로 들어가, 동쪽으로 휘어지는 지점의 남동쪽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양자강과 접해있는 북쪽을 제외하고는 삼면이 구릉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초보자가 보아도 천연의 요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그 때문에 당연히 옛날부터 이 지방은 중요한 거점이 되어왔다.

 

2.

옛날에는 남경에서 양자강을 건너려면 양자강 연안에서 출발하는 연락선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는데 해방 뒤에 남경장강대교가 만들어진 덕분에 기차를 타면 눈 깜짝할 사이에 양자강을 넘어갈 수 있다. 남경에서 포진까지 철로와 고속도로로 된 이중 다리가 완성된 것이다. 철도가 놓인 다리의 전체 길이는 6700여미터이고, 고속도로가 뻗은 다리의 길이는 4500미터에 이른다. 남경장강대교는 중국이 스스로의 힘으로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본보기를 보여준 공사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특수강을 입수하는 것도 어려웠는데, 기술자와 노동자의 독창적인 생각으로 특수강 생산에 성공해 마침내 준공하게 되었다. 지금 이 다리는 남경의 새로운 상징이 되었다.

 

3.

1842년 8원 영국 함대는 양자강을 거술러올라가서 진강을 무너뜨렸다. 남경이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은 신세가 되자, 청조도 의지가 꺾여 굴욕적인 조약을 맺게 되었다. 이것이 아편전쟁의 서막을 알린 남경조약이다. 그 당시에는 강녕조약이라 했다. 홍콩을 할양할 것, 다섯개 항(광주, 복주, 하문, 영파, 상해)을 개항할 것, 아편 배상금을 지불할 것, 실질적인 치외법권을 인정할 것, 군사비용을 배상할 것 등 영국이 일방적인 요구를 내세운 것이 이 조약이었다. 그렇지만 이 조약은 그 때부터 계속해서 맺어지게 될 불평등조약의 시작일 뿐이다.

 

4.

이렇게 해서 열강의 중국 침략이 시작되었다. 청조는 부패하고, 인민은 도탄에 빠져 괴로워하고 있었다. 아편전쟁 뒤에 전국의 여러 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인민이 살아가기 위한 궐기였다. 수많은 반란군 속에서 가장 크고, 가장 확실한 혁명이념을 가지고 일어난것이 태평천국이었다. 1851년 금전촌에서 굴기한 태평천국군은 무창을 공격하고 성난파도와 같이 세력을 몰아 양자강을 남하했다. 태평천국군이 남경을 장악한것은 1853년 3월 19일이었다. 태평천국은 이곳에 수도를 정하고 유명한 천조전무제도를 간행해 건국의 이상을 분명하게 밝혔다. 국가의 원수는 천왕인 홍수전이었다. 그리고 남경은 천경이라 바뀌었다.

 

5.

태평천국은 11년동안 남경을 유지했다. 강남 일대에 병사를 배치하고 각지의 기점을 확보했지만 북벌은 실패로 돌아갔다. 증극번의 상군, 이홍장의 화군, 골든의 외인부대에게 격렬하게 공격당하면서도 태평천국군은 몇 번이나 적에게 타격을 주었다. 증극번이 한 번도 아니고 몇 번이나 태평천국운동 진압에 실패해서 너무나 절망한 나머지 자살을 기도했던 일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6.

남경은 강남의 아름다운 산수에 둘러싸여 있다. 고도 남경을 찾은 사람들은 역사 속으로 자연스럽게 끌려든다. 역사는 흐르고, 아편전쟁으로 맺은 남경조약에서 태평천국 운동의 비극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우화대에 서면 슬픔은 극치에 달하게 된다. 그래도 사람들은 남경장강대교가 상징하는 미래를 향한 희망으로 가슴이 부풀어오른다. 남경은 기복이 많은 지형처럼, 역사도 수없이 기복을 겪은 곳이다. 여행자들은 남경을 찾으면 많은 것을 느끼게 되고 다시 떠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 소주. 양주 - 물의도시, 정원의 도시

 

7.

소주는 오래 된 도시이며, 물의 도시라고 불리는 곳이기도 하다. 두보나 이백처럼 유명한 시인은 아니지만 당대에 시를 썼던 장계의 풍교야박이라는 시가 있다.

 

달은 지고 까마귀는 우는데 천지 가득 서리가 내리네

풍교에는 고깃배 등불 마주하여 시름 속에 졸고

고소성 바깥 한산사에

한밤중 종소리 울릴 제 객선이 닿았네

 

이 시에서 말하는 고소란 바로 소주를 가리키는 말이다.

당대에 이 지역의 장관을 지낸적이 있는 백거이는 이렇게 읊었다.

 

푸른 파도 동서남북의 물

묽은 난간 삼백 구십 개의 다리

 

8.

사람들이 지금 소주거리를 걷다보면 어쩐지 부드러운 인상을 받게 된다. 사람에 따라서는 소주를 여성적인 도시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19세기 초에 출판된 석계산인의 오문화방록은 청대의 명기전인데 소주는 미인의 고향이라는 말까지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주의 단면이고, 그 이면에는 격렬한 저항정신과 강인한 생명력의 전통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9.

양주는 운하의 기점이며, 종점이기도 한 곳이다. 내륙 수로가 가장 좋은 운송방법이었던 시대에 양주가 번영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수 양제는 대운하를 열고 이곳에 강도라는 지명을 붙였다. 수나라의 수도는 장안이었지만, 양제는 강도를 좋아해 이곳에 오랬동안 머물렀으며 반란이 일어나 우문화급에게 살해당한 곳도 양주였다.

 

 

* 상해 - 중국 근대사의 중심지

 

10.

당시 청조는 무역활동을 광주(광저우)에서만 하도록 제한했다. 청조의 중반까지는 그곳만으로도 괜찮았지만, 훨씬 전에 산업혁명의 세례를 받았던 영국은 이제까지의 비좁고 답답한 광주 무역에 만족할 수 없었다. 중국 전체를 상대로 장사하기에 광주는 너무 남쪽에 치우쳐 있었다. 영국은 만약 중국의 긴 해안선 중앙부에 좋은 항구가 있다면 그곳을 교역기지로 삼고 싶어했다. 1756년 영국 동인도 회사의 사원하나가 상해를 무역항으로 삼자고 제안했다. 회사는 상해를 조사해보고 그곳이 이상적인 항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렇지만 청조는 원칙적으로 쇄국주의를 내세웠기 때문에 상해를 외국무역에 개방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외국무역은 광주의 13행이라는 특허상사가 담당했으며, 국가는 전혀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 청조의 태도였다. 영국은 어떻게 해서든지 청조와 직접 교섭하고 싶어했다.

 

11.

영국인 제독 파커가 원정 함대를 이끌고 북상하기 위해 홍콩을 출발한 것이 1842년 6월 6일의 일이었다. 같은 달 16일 이른 아침에 영국의 함대는 오송의 청군기지를 공격했다. 오송의 입구를 지키던 청군은 강남의 제독 진화성의 지휘아래 있었다. 그러나 진화성은 이미 70세가 넘은 노장군이었다. 진화성은 열심히 싸웠으나 화력에서 너무 큰 차이가 났다. 마침내 노장군 전화성은 장렬히 전사했다. 당시 사람들은 전사한 진화성 제독을 깊이 애도했다. 진제독의 영정을 안치하지 않은 집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영국군은 상해에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입성했다. 그들은 부호들의 정원이나 사당을 병사들의 기지로 사용하고, 목상들을 때려부수어 취사용 연료로 썼다고 한다. 상해를 나온 영국 함대는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가 진강을 점령하여 포학의 극치에 달했다.

 

12.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날때 상해에서는 소도회가 궐기했다. 소도회란 일조으이 비밀결사 조직으로 삼합회이 한 분파였다. 회원은 단검을 차고, 붉은 천을 둘렀다. 1853년 9월 7일 상해의 소도회는 봉기를 일으켜 눈 깜짝할 사이에 현성을 점령했다. 회원 중에는 뱃사람, 상인, 직인이 많았으며 멸청복명, 탐관초멸을 표어로 내세웠다. 이 시대의 청조의 관리들이 얼마나 심하게 부패했는지를 보여주는 한 예라 할 수 있으며, 소도회는 그것에 대한 반항이었다.

 

13.

상해의 예원안에는 점춘당이라는 건물이 있다. 소도회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진아람이 지휘한 사령부가 있는 곳이다. 상해 특별시 안에 있는 가정현은 당시의 격전지로 회룡담이라는 연못의 물이 피로 붉게 물들 정도였다고 한다. 그 연못 주변에 소도회의 혁명투쟁을 기린 혁명열사기념비가 서 있다. 상해 소도회의 싸움은 열강이 무력 간섭으로 청조를 도와주자 가까스로 진압되었다. 소도회사건을 계기로 열강은 조계를 독립국가로 만들었지만, 중국인민은 그것에 대항해서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 저항의 전통이 상해를 지극히 혁명적인 땅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상해 전체가 혁명의 커다란 유적지라고 할 수 있다.

 

14.

소보사건은 20세기 들어와 일어났던 일이다. 상해에서 발행된 소보에는 반청적인 혁명문구가 자주 실렸다. 1903년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추용이 혁명군이라는 혁명사상 선전 문장을 소보에 발표했고, 민족주의적 혁명지도자인 장태염이 그 서문을 썼다. 청조가 조계에서 이와 같은 반청적인 활동을 두려워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조계 경찰에게 장태염과 추용을 체포해달라고 의뢰했다. 조계의 주인인 열강도 중국에 혁명이 일어나면 단물을 빨수 없게 된다. 조계 경찰은 두 사람을 체포해 재판에 회부했다. 장태염은 3년, 추용은 2년 금고형을 받았다. 추용은 옥사했지만 독살되었다는 설도 있다. 1905년 4월 3일에 죽은 그의 나이는 겨우 21세였다. 장태염음 금고 3년뒤에 조계로부터 추방한다는 처분을 받고 출옥하는 날 일본으로 탈출했다. 그는 일본에서 쑨원의 동맹조직에 들어가 그 기관지 민보편집을 맡았다.

 

15.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상해에서 일어난 혁명적인 사건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외국인이 경영하는 공장이 늘어나 그런 곳에서 자주 쟁의가 발생했다. 가장 유명한 것이 1925년 5월 30일에 일어났던 이른바 오주운동일 것이다. 이 운동에는 노동자 뿐만 아니라 학생 지식인도 참가했다. 남경로를 피로 물들였던 오주운동은 중국의 근대사에서 5.4운동과 같이 중대한 사건이었다. 그것은 반제국주의 애국운동이었지만, 운동이 일어나자마자 중국공산당이 앞에서 지도했다.

 

16.

중국공산당의 탄생지는 바로 상해였다. 중국의 노동자와 마르크스.레닌주의가 결합된 데는 역시 5.4운동의 힘이 가장 컸을 것이다. 5.4운동은 1919년에 일어나 계속 이어져 중국 곳곳에 작은 공산주이자 집단을 탄생시켰다. 그리하여 마침내 1921년 7월 1일 중국 전역의 공산주의자들이 대표12명을 파견해 상해에서 중국공산당 제1차 대표회의를 열었다. 각지 대표 중에는 마오쩌둥, 동필무, 진담추의 이름도 들어 있었다. 그들은 여기서 중국공산당 강령을 통과시키고 중국공산당이 성립되었음을 선포했다. 그 장소는 상해의 흥업로76호로 현재는 혁명기념유적이 되었다.

 

17.

상해에는 문필의 힘으로 혁명을 추진했던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 중에서도 루쉰은 불멸의 빛을 발한다. 1936년 루쉰은 상해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묘지는 현재 홍구공원에 있다. 상해를 찾는 사람이라면 홍구공원 안에 있는 루쉰의 묘에 참배하리라. 그곳에선 느긋하게 허리를 굽힌 루쉰의 동상이 마치 부드러운 눈길로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듯하다. 묘 앞에는 헌화가 끊이질 않는다.

 

 

 

* 항주 - 세상에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도시

 

14.

소동파는 30대 중반이었을때 항주의 통판(부지사)으로 부임했고 50대 중반에 지사로 근무한 것까지 합하면 이곳에 두 번이나 온 것이 된다. 백거이보다 항주에 더욱 정이 든 사람이다. 소동파가 쌓은 제방이 길게 보인다. 아치모양 다리를 몇개나 건너야 한다. 서호의 중심에 호심정이 있고 남쪽에는 삼담인월이 있는데 이곳은 여행자가 반드시 찾아오는 곳이기도 하다. 삼담인월은 물이 병탑 세 개가 서 있어 달 그림자가 달 세 개로 비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소동파가 호수의 진흙을 캐낼 때 표시 삼아 세워놓은 곳이라고 한다.

 

15.

뇌봉탑은 1924년 9월 25일에 무너졌다. 뇌봉탑은 오월국의 왕비 황씨가 세웠다고 전해지기 때문에 넘어지기까지 약 1000년 동안 서호의 남쪽에 있었던 셈이다. 뇌봉탑이 쓰러진 데 대해서 루쉰은 글 두편을 발표했다. 팔각 5층짜리 뇌봉탑은 확실히 노후해서 위험한 상태에 있었지만, 탑의 기와를 집에 두면 집안이 평안하고 모든 소원을 이룰 수 있다는 미신이 있어서 사람들이 기와를 몰래 가져갔기 때문에 균형을 잃어 쓰러졌다고도 한다.

 

와력의 들판에 있는 것이 슬픈 일만은 아니다.

와력의 들판에서 옛날 관습을 고치는 것이야말로 슬픈일이다.

우리들은 혁신적인 파괴자를 원한다.

그의 마음에는 이상의 빛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뇌봉탑이 넘어졌을 때 루쉰이 적었던 문장의 한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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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23 23:35 2005/01/23 23:35

 

* 낙양 - 중국역사의 축소판

 

1.

낙양을 도읍으로 삼은 북위는 선비족의 탁발부족이 세운 왕조로 그들이 한족의 고향과 같은 중원으로 몰려들었으니 어떻게 해서든지 민족간의 융화를 이루어야만 했다. 성도 한인식으로 바꾸고, 한족과 결혼하는 것을 장려했으며, 호인의 옷차림과 말을 금지하는 과감한 정책을 취했다. 민족간의 융화를 꾀하기 위해서는 그 정신적인 지도원리로 불교에 의지하는 것이 가장 효과가 컸다. 북위가 낙양에 불교사원을 1367개나 지었다는 건 그만큼 불교장려에 힘써 노력했다는 증거다. 북위가 용문에 국가적인 사업으로 석굴사원을 지으려고 했던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2.

소림사가 불교사원이라는 점은 새삼 설명할 필요 없는 사실이다. 인도에서 온 달마대사가 이곳에서 9년동안이나 면벽수행했다는 이야기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소림사라는 절 이름은 소실산의 기슭인 소림에 세워졌기 때문에 붙어졌다. 말하자면 이곳은 선종의 발상지인 셈이다. 소림사는 495년에 효문제가 인도의 승려 발타를 위해 세운 절이다. 그곳으로 남조의 양에게 실망한 인도의 승려 달마가 찾아온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소림사의 가람은 1928년 군벌항쟁기에 석우삼이라는 군벌에게 파괴되어 불타버리고 옛 모습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 서안 - 2천년 황릉의 비밀을 간직한 곳

 

3.

봄추위를 녹이기 위한 화청지

온천수로 매끈매끈하게 지방 덩어리를 씻는다

 

백거이의 이 시로 온천이 더욱 유명해져 여산 기슭의 온천을 화청지라 부르게 되었다. 양귀비를 총애했던 현종은 여산에 모란을 심고, 마음에 드는 가신들에게 별장을 만들어주는 등 사치스러운 궁전이나 누각을 여기저기에 지었다. 어느새 여산은 육문, 십전, 사루, 삼각, 오탕이 있는 규모가 큰 별궁지대가 되었다. 현종은 화청지에서 정무를 보는 일이 잦아졌다. 호화로운 생활을 좋아했던 현종다운 행동이었다. 이윽고 정치는 부패하고 재능도 없는 양귀비 일가가 관직에 올라 정치싸움도 많이 일어났다. 결국 안녹산의 난이 일어나고 현종은 서안에서 탈출해야 했다.

 

4.

만주사변 뒤 전중국에서 일본의 침략에 항의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그런데 장제스는 항일운동을 탄압하고 공산당과 대결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중국 공산당 쪽에서는 말할 필요도 없이 그와는 반대로 항일민족통일전선 정책을 햇다. 장세스는 장쉐량을 서북사령관으로 임명해 계속 공산당과 싸우도록 했다. 장쉐량의 군대는 동북군으로 지난날 일본군과 싸웠던, 항일의식이 굉장히 높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연안의 공산군과 대치해 있는 동안 그 영향을 받게 되었다. 장쉐량은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에 의문을 품고 자신들이 싸워야 할 대상은 같은 동포가 아닌 일본군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공산당의 항일민족통일전선에 공감하게 되었다. 장쉐량은 장제스에게 내전을 중지하고 항일구국을 위해 활동하라고 충고했다. 장제스는 물론 귀를 기울이지 않았으며, 대 공산군 작전이 진행되지 않은 것에 화가 나 스스로 서안에 들어와버렸다.

 

5.

서안에 도착한 장제스는 1936년 12월 12일 화청지의 숙소에서 머물렀다. 장쉐량 일행은 장제스를 감금하고 내전 중지와 항일구국을 요구했다. 장제스도 드디어 장쉐량의 요구를 받아들여 12월 25일에 풀려났다. 이 일을 계기로 이른바 제2차 국공합작이 맺어졌다. 다음해인 1937년 항일통일전선에 의해 중국공산군은 국민혁명국 제팔로군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국공합작으로 당시 국민당이 지배하던 서안 시에도 중국공산당이 사무실을 차리게 되엇다. 그곳에는 국민혁명군 제18집단군 주섬서병사처라는 간판이 내걸렸다. 합작이라지만 국민당은 엄중하게 공산당을 감시했으며, 사무소 가까이에 있는 인력거군들도 사실은 국민당에서 임무를 맡은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 감숙 - 실크로드의 시발점

 

6.

실크로드라는 말은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호펜이 19세기 말에 만들어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 말이 널리 보급되어 중국에서도 그대로 번역해 사주지로라고 부르기도 했다. 고대에 동쪽에는 중국이, 서쪽에는 로마 문명권이 있었다. 동서 대문명국의 수도를 이어주는 교역로, 장안에서 로마에 이르는 길을 넓은 의미에서 실크로드라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실크로드라 하면 동서 두 문명권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지역의 교역로를 가리킨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지금의 신강 위구르 자치구에서 내륙 아시아 지방을 통해서 유럽으로 돌어가기까지의 사이다. 그러면 황하의 서쪽, 즉 하서 지방이 중국쪽에서 보면 실크로드의 입구에 해당된다.

 

7.

옛날부터 백년 하청을 기다린다는 말이 있었다. 이 말은 황하는 탁하기 때문에 백년을 기다려도 맑은 물이 될 리 없다는 뜻으로 가능성이 없는 일을 기다릴 때 하는 말이다. 황하가 탁한것은 토사가 흘러들기 때문인데 그 흐름을 막으면 황하도 맑아질 것이다. 유가협댐은 황하를 막기위해 만든 것이다. 댐 높이가 147미터, 제방의 길이가 840미터로 지하발전소에는 발전기가 여러 대 설치되어 있다. 댐으로 인해 생긴 인공호수 비파호는 장소에 따라서 폭이 다르지만, 길이가 65키로나 되기 때문에 거의 바다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수심도 계절에 따라 다르지만 평균 100미터에 이른다고 한다. 돈황 막고굴은 오랜 역사와 미술의 보물창고와 같은 곳이지만 유가협댐은 새로운 중국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 신강 - 동서양을 연결하는 통로

 

8.

신강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은 우루무치다. 당대는 정주의 관할 아래 윤태현에 속해 있었지만 아직까지 서역의 중심이 될 정도는 아니었다. 그보다 오래전 한대에는 차사국에 속했지만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우루무치를 홍묘자라고 부른 적이 있었는데, 홍산이라는 언덕에 붉은 울타리를 친 묘가 있었던 데서 유래한다. 전설에 따르면 아주 오랜 옛날에 서왕모가 이 지방의 물을 천지로 끌어올렸는데도 머리가 셋인 용이 다시 바다로 갔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용을 잠재우기 위해 탑을 세웠다고 한다. 이 전설은 우루무치 강이 옛날부터 자주 범람해 주민들이 끊임없이 재해와 싸웠던 사실을 반영한다. 당대에 세워진 탑은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9.

서유기에는 화염산이라는 가공의 산이 등장하는데, 손오공이 파초선으로 이 산의 불을 끄는 장면이 나온다. 투루판분지에는 실제로 화염산이 있는데 산의 표면이 붉고 침식의 흔적이 세로로 나란히 나 있어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면 불이 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 화염산 안을 헤치고 들어가면 유명한 베제크리크의 천불동이 나온다. 베제크리크라는 말은 그림으로 장식된 장소를 뜻한다. 그곳에는 석굴이 모두 57개 있으며 그 중에서 석굴 20개에 벽화가 그려져 있다.

 

10.

서역은 무엇보다도 실크로드라는 이름으로 익숙하다. 그러나 허텐 지방 사람들은 실크로드보다 실크타운이라 부르기를 좋아했다. 그곳은 단지 비단이 지나갔던 길만은 아니었다. 이 지방에서는 옛날부터 비단을 생산해왔다. 지금 허텐에는 굉장히 커다란 견직물 공장이 있다. 이곳은 자치구에 유일한 비단 생산지이기도 하다. 옛날 한나라 땅에서 이곳으로 시집왔던 여와잉 모자 안에 누에를 숨겨서 비단 생산 기술을 전해주었다는 전설도 있다. 이 주변에 있는 유적지에 그러한 사실을 이야기 해 주는 유명한 벽화가 남아 있었는데 지금은 영국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사천 - 제갈공명을 말한다

 

11.

전란으로 인해 중원이 살기 힘들어지자 사람들은 풍요로운 땅 사천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삼국시대에 이르자 이 지방은 북방의 위나라, 남방의 오나라와 더불어 천하를 다스린 3대 세력의 한 거점이 되었다. 천하가 중국의 솥처럼 세 발로 서 있게 되자, 그 가운데 한쪽 다리 구실을 하던 사천은 당연히 중요해 질 수 밖에 없었다. 천하를 세 부분으로 나눌 계획을 세웠던 것은 제갈공명이었다고 한다. 유비는 그 계획에 따라 211년에 촉으로 들어갔다. 제갈공명은 유비가 촉으로 들어간뒤에도 얼마 동안은 형주에 있다가, 214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성도에 들어갔다. 그리고 나서 20년동안 제갈공명은 촉한의 황제가 된 유비와 그의 아들 유선곁에서 사천 경영에 노력을 다했다.

 

12.

삼국이 서로 대립한 시기라고 하지만, 위나 오에 비하면 촉한은 작은 나라였다. 두 나리에 대항하기 위해 영내를 정비하고, 부국강병을 꾀해야 했다. 영내에 살던 서남이란 소수민족은 자주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의 수장은 맹획이라는 인물로 제갈공명은 그를 포로로 잡았는데, 일곱 번 잡았다가 일곱 번 풀어주었다고 전한다. 이것은 제갈공명이 강경책을 취하지 않고, 소수민족을 감동시켜 그들의 협력을 얻으려고 했음을 말해준다.

 

13.

그때까지 두보는 애수의 시인이었지만, 사천에 와서부터 너그러움이 생기게 되었다. 사천의 풍토를 닮아 여유가 생겼을 지도 모른다. 두부초당에서 그는 문학 활동의 절정에 이르렀다. 다음시는 한가로운 강촌의 풍경을 그린 강촌이다.

 

긴 여름의 대낮

강물에 안기어 마을을 조는 듯 한가롭다

제비는 멋대로 처마를 나들고

갈매기는 가까이 가도 날아갈 줄 모른다

할멈은 종이에 바둑판을 그리고

애놈은 바늘을 두들겨서 낚시를 만들고 있다

나는 우두커니 앉아 아무 바라는 바 없다

그저 약이나 좀 먹었으면 할 뿐

 

14.

사천분지의 또 다른 중심지인 중경은 근대적인 공업도시다. 똑같은 역사라고 해도 고대보다는 근대의 것들이 풍부한 곳이다. 중경은 성도에서 690키로, 장강과 가릉강이 한데 만나는 곳에 있다. 하천만 합류하는 것이 아니라 성투철도도 이곳에서 만난다. 중국은 1876년에 맺어진 지부조약에 따라 개항이 되었다. 강강과 기릉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튀어나온 반도처럼 바위산을 깎아 세운 도시다. 중경이 깎아지른 벼랑위에 있는 도시라 자주 산성이라 불리기도 했다.

 

15.

중경 근교에 있는 화룡교의 홍암촌에는 항일전쟁 중에 중국공산당 중앙의 남방국과 팔로군 주재 사무소가 있었다. 현재는 혁명유적으로 거의 원상태로 보존되어 일반인이 참관하고 있다. 아무리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이 합작했던 시대였다고는 해도, 이 홍암촌을 휘감은 산 곳곳에는 국민당의 특수요원이 숨어 있던 집이 있어 끊임없이 중국공산당을 감시했다고 한다. 시가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중미 합작소라는 기괸이 있었다. 이름처럼 중국과 미국이 협력하기 위한 기관이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국민당정부가 반정부적인 지식인을 체포하고 감금하던 장소였다. 전쟁이 끝난 뒤에 마오쩌둥이 연안에서 중경으로 와서 장제스와 이른바 쌍십협정을 맺었다. 장소는 중경 시의 규원이라는 곳이었다. 이곳도 지금은 근대사의 유적으로 보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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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22 19:39 2005/01/22 19:39

 

 

* 북경 - 고동치는 중국의 심장부

 

1.

1279년 남송이 멸망하면서 마침내 원나라가 전중국을 지배하게 되고, 비로소 북경은 처음으로 중국 전체의 도읍으로서 중국의 중심이 된다. 당시 북경은 대도라고 불렀다.

 

2.

북경을 찾는 사람들은 반드시 고궁을 보러 가게 된다. 고궁은 봉건왕조의 지배자들이 살앗던 궁전을 의미한다. 북경의 내성안에 황성이라는 구역이 있는데, 그곳도 과거에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황제가 사는 자금성은 바로 그 황성안에 만들어졌다. 옛날 전제황제는 3중으로 둘러싸인 땅에 궁전을 지었다. 그들의 화려한 생활이나 어마어마한 권위는 일반 백성들을 착취해 이룩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백성들이 반기를 들고 봉기를 일으킬까 봐 이처럼 조심조심 몸을 사리며 자신을 지켰다.

 

3.

1900년에 일어났던 의화단운동때에는 천안문 앞에서 싸움의 불꽃과 연기가 피어올랐다. 1919년의 5.4운동때에는 이곳에서 북경의 학생과 지식인들이 일본이 내민 21개 조항의 요구에 굴복한 군벌정부에 항의하는 행동을 시작했다.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알린것도 천안문광장에서 였다. 천안문은 옛날 위정자가 일반 사람들에게 알리는 조서를 발표하는 무대이기도 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그곳은 봉기를 일으킨 사람들이 자신들의 혁명적인 사상을 전국에 호소하는 장소로 쓰였다. 천안문은 그런 의미에서 중국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힘차게 고동치는 중국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4.

겨울이 되면 북해는 얼어붙는다. 18세기 청대의 기록에 따르면 사람들이 쇠이빨이 붙은 구두를 신고 얼음 위를 달렸다는데, 아마도 지금의 스케이트와 비슷한 것이었나 보다. 이를 보면 중국의 스케이트 역사가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알 수 있다. 그렇지만 북해가 고궁바깥에 있었다고 해도 황성안이엇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출입할 수 없었다. 아무리 오랜 역사를 지녔다고 해도 북해의 스케이트는 일부 특권 계급만이 누릴 수 있는 스포츠였다.

 

5.

경산 혹은 북해의 백탑산에서 북경 시가지를 바라보면 지금은 고층 건물이 가득 들어차 있지만, 옛날에는 그처럼 높은 건물이 하나도 없었다. 지역에 따라서 2층 이상의 건물의 짓지 못하도록 금지해 놓은곳도 있었다. 봉건왕조의 지배자들은 자신들의 궁전이나 관청따위를 크게 짓고는 이들 건물이 더 커 보이도록 주변에 민간인이 커다란 건축물을 짓지 못하도록 금지했다. 주변이 낮고 작아야 그들이 세운 건축물이 가장 거대해 보인다는 사고방식 때문이었다.  

 

 

* 만리장성 - 중국인의 마음을 이어주는 장성

 

6.

장성이 거대한 구축물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산맥이 갈기처럼 길게 이어져있는 장성은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마치 역사의 한가운데 우뚝 서 잇는 듯한 착각에 바져들게 한다. 장성을 만든 것은 전국의 군주들이었고 진시황이었으며 한무제였지만, 실제로 흙을 나르고 쌓아올리는 공사는 이름도 없는 가난한 백성들이 맡아 했다. 누구도 좋아서 그 일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라에서 내린 엄명에 따라 부모형제나 처자와 헤어져 삭풍이 몰아치는 장성의 공사장으로 끌려왔던 것이다. 강제노동이었기 때문에 공사를 감독하는 관리가 그들을 노예처럼 부렸으리라는 것도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만리장성의 그늘에는 백성의 피와 눈물과 땀이 서려 있으며, 많은 사람의 목숨이 묻혔을 것이다. 그것은 갖가지 비극을 낳았다.

 

7.

임조에서 시작해 요동에 이르는 원망과 한탄의 만여 리,

이곳을 흐르는 황하를 건너 양산을 거쳐 꼬불꼬불 구부러져 북으로 향한다.

 

8.

진시황의 대공사는 만리장성뿐만이 아니었다. 국도로 정한 함양 축조, 아방궁, 그리고 자신의 묘지로 쓸 여산능 이 있었다. 아방궁과 여산 공사에는 70만명 남짓한 죄수를 동원했다고 사기는 적었다.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어마어마한 죄수가 있을 수 있었을까? 당시 진의 법률이 너무나 엄해,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사람이 없듯이 누구라도 갖다 붙이면 죄수가 될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대공사중에는 원하는 만큼 인원수를 채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죄수라고는 해도 그 대부분은 지금 우리들이 생각하는 범죄자가 아니었다. 군대, 징용인부, 범죄자가 아닌 죄수들이 관리의 채찍 아래에서 신음하며 쌓은 것이 바로 만리장성이다.

 

 

* 산동 - 바다와 녹음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땅

 

9.

태산은 오악의 으뜸이라고 하여 역대의 황제드은 이곳에서 국가적인 행사 가운데 가장 장엄한 의식이었던 봉선을 올렸다. 봉선은 황제가 태평세계의 실현을 신에게 보고하는 의식이었다. 황제라고 누구든지 태산에서 봉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진정으로 덕이 있는 황제만이 이를 허락받았다. 여러가지 설이 있기는 하지만, 태산의 정상에서 흙을 돋우어 단을 만들고 그곳에서 하는에 제사를 올리는 것이 봉이고 태산의 기슭인 소산에서 땅을 물리친 산천을 모시는 곳이 선이라 한다. 태산은 대산이라고도 쓰며, 그 산 아래에 옛날 봉선 의식을 거행하던 대묘라는 곳이 있다. 대묘의 문물들은 잘 보존되어 있는데 이것은 문화혁명에 처했을때 묘 담당자들이 냉정하고 현명한 조치를 취했기 때문일 것이다.

 

10.

언제부터인지 태산의 신은 여자를 지켜주는 신이라고 해서 낭낭묘라고도 불리게 되었다. 그런 탓인지 나이 든 부인들이 이 산을 많이 찾아간다. 확실히 태산에 오르면 건강에는 좋을 것이다. 어쩌다 전족을 한 노부인이 지팡이를 짚고 비틀비틀 돌계단을 오르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조마조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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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22 18:47 2005/01/22 18:47

1.

나를 황학루에 남기고

안개 낀 삼월, 친구는 배에 올라 양주로 떠나고

이윽고, 돛대마저 시야에서 사라져

뵈는 것, 아득히 하늘에 닿은 장강의 물 뿐이어라

- 이백 [황학루에서]

 

2.

이 글은 일본역사학자인 진순신의 [시와 사진으로 보는 중국기행]의 나름대로 의미있는 구절을 정리한 것이다. 1924년 일본 고베에서 출생한 진순신은 [중국의 역사][태평천국][제갈공명][영웅의 역사]등 지금까지 주로 중국역사를 소재로 하는 150여편의 작품을 썼다. 이 책을 여행배낭에 넣을까 말까 망설였다. 가장 무거운 종이질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중국여행을 마무리하는 지금 이 선택을 아주 잘 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도시별로 발기발기 찢어져 있다. 도시마다 그 부분을 작은 가방에 넣었기 때문이다. 며칠 후 이 책은 항공소포로 서울로 보내질 것이다.

 

3.

사람도 인연이고 책도 인연이다.

책에서 사람을 만나고 역사를 체험하고 미래를 꿈꾼다.

앞으로의 여행중에 또 어떤 책을 만날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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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22 18:39 2005/01/22 18:39

1.

아침에 일어나 바로 은행으로 걸어갔다. 50달러자리 달러를 꺼내려 몸에 차는 지갑을 꺼내는데 거기에 100원이 있다. 이게 왠 헤프닝인가. 그냥 어제 깔끔하게 돈을 줄 수도 있었는데 나의 산만함이 나를 그르쳤다. 돈과 신분증 카드들을 4군데로 분산해서 가지고 다니는 것이 또 이런 문제를 낳기도 한다. 50달러를 바꾸었다. 곱하기 8남짓의 금액이다. 400원 남짓을 가지고 은행을 나왔다. 300불 가지고 간 미달러가 180달러 남았다. 여행자수표 1000달러는 아직 한번도 쓰지 않았다. 중국은 은행이 잘되어 있지만 인도를 예상해서 아껴두었다. 미달러는 여행에게 급하게 통용되는 돈인거 같다. 

 

2.

어제 봐두었던 시장의 두부 백반집에 들어갔다. 두부국에 밥이 나온다. 파오차이(중국김치)를 달라했다. 두부는 언제 먹어도 물리지가 않는다. 나와서 티벳식 둥그런 구운빵에 양념넣은 것을 샀다. 빵이 차서 맛이 없다. 숙소로 돌아왔다. 주인이 아침식사를 하고 있다. 어제 차 빌린 돈과 숙소 비용을 지불했다. 주인이 아이와 티벳식 식사를 하고 있다. 같이 티벳 버터차와 만두 그리고 감자볶음을 먹었다. 아이에게 너가 뛰어노는 곳이 어디니하고 물었는데 이해를 못시켰다.

 

3.

숙소를 나왔다. 우선 숙소가 있는 구시가지 주변을 돌아보자. 구시가지 골목에 드문드문 보이는 카페들은 거의 사람이 없을것 같다. 뒷 산이 가까워진다. 한 아줌마가 산을 올라가려면 저쪽 골목으로 가란다. 중국에 와서 메이요우(없어요)쪽 사람보다는 친절한 중국인을 훨씬 더 많이 만났던것 같다. 산 중턱에 이름모를 묘들이 있고 정상에는 티벳사원이 있다. 사원을 빙둘러 색색의 소원쪽지들이 주변 풍경과 잘 어울린다. 저멀리 장족 마을들이 보인다. 그 배경으로는 험산산들이 어께동무를 하고 있다.

 

4.

산을 내려와 다시 3번버스를 타고 티벳사원인 숭잔린쓰로 갔다. 내려서 매표소쪽으로 가지않고 옆 동네로 좀 돌아보니 쉽게 사원들어가는 길이 나온다. 동네 길로 올라갈때 티벳 장족 아줌마두분과 인사를 했다. 장족 인사말을 외워두었더라면 짧은 시간이나마 더 통했을텐데 아쉽다. 숭잔린쓰안에 가장 큰 법당안으로 들어갔다. 정문은 잠겨있고 옆문으로 들어갔다. 스님 세분이 함께 불경을 외우고 있다. 그때와 같이 10미터 떨어져서 앉았다. 또 다른 맛이 있다.

 

5.

티벳 불교는 한국의 절에서 들었던 점잖은 불경보다는 약간 마교라고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소위 신들의 전쟁에서 메이저 신들은 신성한 신으로 살아남았다. 티벳 불교는 아마 중간파 격일 것이다. 소수파 신들은 보통 악마나 귀신 사이비로 배척당한다. 종교의 세계 역시 냉혹한 권력 투쟁의 장이다. 티벳불교는 어떤 경계에 있는 느낌이다. 특히 불경의 후렴 마무리 부분이 인상적인데 마치 한때 서태지와 아이들 테입을 꺼꾸로 들으면 피가 모자라라는 말이 들린다고 했는데 마치 그 느낌이다. 인도의 고대경전 우파니샤드에 나오는 옴이라는 후렴구가 가장 완전한 발음이라 해서 일본에서 한때 사건을 일으킨 옴 진리교가 그 발음을 체택했는데 그것보다는 이 티벳불경의 후렴구가 더 걸죽하고 진한 맛이 있다.

 

6.

숭잔린쓰를 뒤로하고 다시 버스를 탔다. 시간은 아직 2시정도다. 내친김에 터미널로 갔다. 한 두 시간거리의 볼 만한 곳을 가볼까? 지도로는 감이 잘 안온다. 정보창구의 직원에게 질문했다. 당연히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문제는 그 직원의 태도인데 성의를 보이기 보다 화를 낸다. 자긴 모른단다. 그럼 왜 인포메이션 창구에 앉아있나. 그래 관두자. 다시 중심가로 가서 인터넷 카페에 들어갔다. 3시간 정도하고 왕빠주인과 인사했다. 이제 내려간다고 그동안 고마왔다고... . 이 주인 차 시간을 알아봐준다. 그 성의가 느껴진다.

 

7.

저녁은 마지막으로 한국식당으로 갔다. 해물순두부를 시켰다. 아까 왕빠에서 중국여행동호회싸이트를 검색하다 이곳에 치커주가 있고 그 맛에 매료된 사람이 있음을 확인했다. 한국식당에 일하는 친구에게 치커주 얘기를 하니 같이 가잔다. 바로 옆 상점 큰 항아리에 치켜주가 있다. 500미리 물통 하나에 3원이란다. 치커주는 수수로 만든 술이라는데 사와서 먹으니 도수가 상당하다. 식당에 미안해서 부추전을 하나 시켰는데 너무 맛이없다. 치커주 두잔과 일하는 친구가 한 잔 따라준 중국술 한잔을 먹으니 취기가 오른다. 그만 먹고 내일 일찍 출발하자.

 

8.

숙소에 들어가 주인에게 내일 아침 출발한다고 말했다. 그 친구 나에게 깨워줄까하고 물어본다. 그러라고 했다. 여행은 상품소비자로 규정되느냐 국가의 벽을 넘어 관계를 확장하느냐의 싸움이기도 하다. 이 싸움은 분명히 구분되지 않는다. 아직 이곳이 때묻지 않은 도시라고 기대해서 였을까? 그동안 수 많은 장사꾼들 틈에서 별 타격이 없던 내가 이 상그릴라에서 우울한 기분을 갖게 되었다.  

 

9.

세상에는 두 부류가 있다. 일처리가 깔끔한데 그것이 도리어 숨을 막히게 하는 스타일과 일처리가 너무 두리뭉실해 사람을 힘들게 만드는 스타일이 그것이다. 아마 세상사람의 다수는 두리뭉실한 스타일일 것이다. 이 친구는 두리뭉실의 표본이다. 이건 나의 모습이기도 하다. 내가 이 친구에게 힘들었다는 건 나의 과거의 모습, 다듬어지곤 있지만 현재 나를 이 친구를 통해 확인했다는 의미로도 생각해 보게된다. 다음에 다시 상그릴라에 올때 이 친구를 찾을까? 모를 일이다. 하지만 피하지는 않을 것이다.

 

 

* 050117 (월) 여행 53일차

 

(잠) 3900원 (30원)

(식사) 아침 520원 (4원)

          저녁 4160원 (32원)

(이동) 버스 4번 520원 (4원)

(간식) 치커주 390원 (3원)

         장족 호떡 130원 (1원)

(기타) 절 잔돈 시주 70원 (0.5원)

         인터넷 780원 (6원)

 

............................................... 총 10,37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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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22 16:11 2005/01/22 16:11
  1. 사막은
    2005/01/23 15:48 Delete Reply Permalink

    메일이 없다고 나오네요. 정확히 메일이 어찌 되시나요. 글고 덧글에 답은 왜 안 하시는지. 이건 해 주시겠죠?

  2. aibi
    2005/01/23 22:47 Delete Reply Permalink

    조금전 사막은님 매일 잘 확인했습니다. 그쪽으로 답장을 드리지요. 덧글에 답하는 건 저의 인터넷 조건이 불안정하고 지금 홀로여행 중인지라 조금 떨어져서 서로를 지켜보자는 생각에 수다를 떨고 싶음에도 참고 있는중이랍니다. 짧은 덧글을 읽으며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며칠만에 인터넷이 되는 곳을 찾아 앉으면 제일 먼저 확인하는 것이 바로 이 덧글입니다.


1.

9시에 일어나 세면을 하고 방에 않아 있는데 차가 왔단다. 내려갔다. 마티스 크기의 봉고차다. 차는 깨끗하다. 활달해보이는 운전사와 왠 여자가 같이 왔는데 그의 여자친구같다. 차를 타고 나갔다. 중국공상은행앞에서 잠깐 서자고 했다. 은행에 들어가 달러를 내미니 오늘은 안되고 내일된단다. 아마 오늘이 일요일이기 때문인거 같다. 여행을 하다보면 요일감각이 필요가 없어진다. 지금 중국돈의 차 대여료 줄 돈만 간신히 있다. 좀 불안하다.

 

2.  

그 운전사 커플과 국수와 만두를 먹었다. 그리고 출발했다. 수두후라는 근처 호수와 탠싱사라는 사원을 도는 코스란다. 내가 몇시 몇시 일정이냐고 종이에 쓰니 수두후는 차로 한시간거리고 탠싱사는 그 중간에 있단다. 내가 세군데 아니냐 했더니 그가 두군데란다. 날씨는 더할 나위없이 좋다. 차는 완만한 도로를 유유히 가로질러 나간다. 운전사와 유쾌하게 웃으면서 대화를 했다. 차는 비포장도로로 들어서 한 매표소 입구에 선다. 아니나 다를까 입장료가 30원이다. 두 지역주민은 무료이고 나만 내는것이다. 돈이 모자르다. 운전사에게 달러를 보여주며 오늘 안되었고 내일 주겠다고 한다. 운전사 알았다고 한다. 기분이 찜찜하다.

 

수두후 사진. 호수에 비친 하늘같은 걸 기대했는데 그냥 얼음만 보고 왔다

 

3.

걸어서 호수쪽으로 걸어갔다. 호수에 다다랐다. 음 호수가 빙판이다. 내가 기대했던건 푸른하늘이 비치는 맑은 호수였는데 그저 평범한 호수가 되버렸다. 중국어 발음으로도 얼음은 빙이다. 어쨌든 호수를 따라 죽 혼자 걷다가 돌아왔다. 운전사 커플이 저쪽에서 기다리고 있다. 약간 급해지는 느낌이다.

 

4.

얼음이 얼어 호수를 제대로 감상하지 못했다고 운전사에게 말하고 다른 곳을 가보자고 했다. 20키로 거리의 다른 호수 지명을 손으로 짚었더니 거긴 말을 타고 들어가야 한단다. 그래서 중덴 도심에서 7키로 떨어진 조류서식지인 나파하이로 가자고 했다. 그가 좋다고 한다. 돌아오는길 중간의 탠싱사에 들렀다. 여기는 노천온천이다. 여기 절은 어디있는지 모르겠다. 오른쪽 계단으로 내려가니 숙소들이 있고 한 단체관광객들이 불판에 고기를 굽고 있다. 그 밑은 수영장이다. 한 커플이 수영복을 입고 주부를 타며 장난을 치고 있다. 이 경치와 수영복은 정말이지 안 어울린다. 숙소 주인이 온천 목욕을 하고 오라는게 이거였구나. 탠싱사하면 절 이름이라 생각했는데 이런 광경일줄은 생각도 못했다.

 

탠싱사 입장권. 사진은 노천 수영장이고 산 건너편에 장족들의 노천 온천이 있다

 

5.

한바뀌돌고 다시 올라왔다. 내가 중간 산길과 왼쪽 강뚝길로 가겠다고 하자 자긴 차에서 기다리겠단다. 불편하다. 내 마음대로 시간을 조정할 수가 없다. 돈을 오늘 주지 못해 더더욱 그렇다. 중간 산길을 한 바뀌돌고 왼쪽 강둑길로 들어섰다. 이쪽은 장족마을이다. 아이들이 나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본다. 내가 한 아이에게 니하오하니 이 아이 헬로우 헬로우 하면서 놀린다. 저쪽 사람들이 모여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거의 다다르는데 한 할머니가 목욕을 하고 옷을 입는지 가슴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민망해서 주춤거리고 고개를 돌리고 가고 있는데 이 할머니 전혀 상관없는 눈치다.

 

6.

고개를 저쪽으로 돌리고 할머니 옆 계단을 내려 강쪽 난간으로 갔다. 빨래터 이겠거니한 모여있는 사람들은 노천온천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다. 탕은 남탕 여탕 두개가 있었는데 약간의 담이 있을 뿐 일어서면 서로 얼굴이 보일 높이였다. 아줌마들은 전부 빨간 티벳식 터번모자를 쓰고 있었다. 한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장난을 치며 걸어온다. 남탕 입구에 다다라서 안에 있는 아저씨들과 인사를 한다. 난 빤히 쳐다보기는 그렇고 강을 바라보면서 몇번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여길 못들어가면 후회하는데... . 준비한게 없다. 그리고 이 운전사 기다리고 있다. 뭐가 아귀가 잘 안맞는다. 내일 이곳으로 짐싸서올까도 생각했지만 그것도 번거로운 일이다. 아쉽게 발걸음을 돌렸다. 티벳장족들과 같이 노천목욕할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

 

7.

기다렸던 차는 나를 태우고 다시 출발한다. 나보고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다. 아마 속으론 자기는 두 군데로 들었다는 눈치다. 아직 세시간도 안 지났는데 150원은 아니다. 나파하이로 가자고 했다. 서로의 대화횟수가 줄어들었다. 나파하이에 도착했다. 여기도 좀 더 얇긴 하지만 얼음이 얼어있다. 철새들이 호수가의 먹이를 먹고 있다. 이곳이 수두후보다 훨씬 시원한 느낌이다.

 

8.

중덴으로 돌아오니 2시가 되어간다. 숙소 주인이 길가에 있다. 차에 올라탔다. 더이상 다른데 가자고는 말할 수가 없다. 숙소 주인이 점심을 먹자한다. 그래 일단 먹자. 그런데 운전사는 잠깐 차를 세워놓아야 한다는 눈치로 어딜 가고 그 여자친구, 여관주인, 나 이렇게 셋이서

안 매운 훠궈 비슷한 요리를 시켜먹었다. 여자친구는 끝에 말도 없이 가버리고 내가 계산을했다.

 

9.

식당을 나와 걷다가 숙소 주인은 들어가고 난 왕빠에 간다했다. 칭다오 맥주 한 캔과 물 휴지를 사고 왕빠에 들어갔다. 오늘 뭔가 일이 꼬여서 뒤틀려있는 느낌이다. 맑은 날씨이지만 기분은 흐려진다. 숙소에 들어가니 이 친구 저녁을 먹으러 나가자 한다. 난로에 물이 끓고 있다. 내가 사발면을 사올테니 같이 먹자하니 자긴 배가 너무 부르단다. 한편 천진스럽기도 하고 개념없어 보이기도 하고 참 그렇다. 나가서 사발면과 빵을 사서 돌아와 그 친구에게 빵을 주었다. 사발면은 역시 맛이 없다. 그 운전사 친구에게 전화가 온 거 같다. 이 숙소 주인 전화하다 슬그머니 나간다.

 

10.

어떤 사람은 좀 아쉽기는 해도 그대로의 모습이 좋을때가 많다. 이 숙소 주인이 바로 그 사람이다. 어쩔 수가 없다. 그나마 전기 장판의 따뜻함이 위안이 된다.

 

 

* 050116 (일) 여행52일차

 

(잠) 중텐 포탈라 캐빈 욕실없는 트윈 3900원 (30원)

(식사) 점심 고기야체탕 4160원 (32원)

         저녁 사발면 빵   850원(6.5원)

(이동) 봉고차 반나절 대여 운전사 기름 포함 19500원 (150원)

(입장) 수두호 3900원 (30원)

          탠싱사 1300원 (10원)

(간식) 맥주 460원 (3.5원)

         과자 130원 (1원)

(기타) 물휴지 290원 (2.2원)

          인터넷 780원 (6원)

 

................................................... 총 35,27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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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22 14:52 2005/01/22 14:52
  1. 이슬이
    2005/01/22 15:24 Delete Reply Permalink

    또다시 기관지 제작이 돌아와 찬찬히 여행기를 갈무리하고 있습죠. 한국은 동중정입니다. 한편으론 정일 형의 어제-오늘-내일이 부럽지만 나 또한 어제-오늘을 어서 갈무리하고 내일을 예비하렵니다. 티벳으로 가기 전에 큰 맘 먹고 정통 중화요리 한 번 잡숫는 건 어떨런지


1.

현금이 거의 없어져 간다. 은행에서 환전을 해야한다. 중국에서 지천에 깔려있던 중국은행이 안보인다. 현금이 없으니 좀 불안하다. 일단 터미널쪽으로 가서 거기서 부터 은행을 찾아봐야겠다. 터미널 근처에서 만두한판을 사먹었다. 다른 이름의 은행들은 환전안한다고 저기로 가란다. 어디로 가란 말인가? 다시 중심가로 가서 한 은행에 가니 중국공상은행에서 환전해준단다. 이제 어딘지는 알았다. 중국공상은행으로 갔다. 문이 닫혀있고 셔터가 내려가있다. 벽에 무슨 공지가 붙어있다. 그걸 보고있는 중국인에게 물으니 하여튼 내일 문을 연단다.

 

2.

장족 옷차림이 대부분인 시장에 들어갔다. 몇가지 먹을 만한 곳을 봐두었다. 점심은 옆쪽의 뚝배기 밥집에서 먹엇다. 여기는 밥안에 기름을 두루고 밤과 완두콩을 듬뿍 넣은 밥이다.밥위에는 찐계란 하나를 4등분해 이쁘게 올려놓았다. 베이컨 몇 점도 함께... . 함께 나온 중국식간단김치인 파오차이와 함께 먹었다. 좀 느끼하다. 중국음식엔 기름을 빼놓을 수 없다. 한국의 담백한 나물반찬들이 생각난다.

 

3.

중국 피씨방 맞은편에 유료 화장실이 있다. 한번 입장하는데 0.2원이다. 다른데로 갈까하다 웬지 끌려서 돈을 내고 입장을 했다. 3명이 앉을 수 있게 되어있는데 두명이 나란히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다. 앞의 문은 없고 옆의 벽도 나지막하다. 잠시 뒤로 물러서서 벽 옆에서 생각을 했다. 그동안 여러번 이 화장실문화를 목격한 적은 있어도 함께 동참한적은 없다. 나도 이제 중국여행 50일이 넘었다. 중국에 가면 중국의 법을 따르자. 그래 앉자. 들어가서 왼쪽 자리에 앉았다. 이 느낌은 구정이나 추석전날 사촌 형님들과 조카랑 목욕탕 들어가서 큰 욕조에 같이 몸 뿔리던 그런 느낌이다. 그 중국인 둘은 먼저 떠났다. 나 혼자 조금더 일을 보다가 나도 그곳을 나왔다.

 

4.

왕빠에 들어갔다. 한 어린 친구가 한글 쓰기가 되는 컴에서 오락을 하고 있다. 주인이 나를 알아 보고 어린 친구에게 다른 자리로 가라한다. 어린 친구에게 고맙다고 했다. 오늘은 밀린 일기를 거의 채워놓으리라. 느릿느릿 이생각 저생각하며 웹 서핑도 좀 하며 시간을 보냈다. 어느덧 밤이 되었다.

 

5.

숙소로 돌아왔다. 주인에게 내일 차를 대여하겠다고 말했다. 150원에. 9시 좀 넘어 오라고 했다. 내일은 상그릴라 일대를 드라이브한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 050115 (토) 여행 51일차

 

(잠) 중덴 트윈 3900원 (30원)

(식사) 아침  만두한판 390원 (3원)

         점심  뚝배기 밥 910원 (7원)

(간식) 사과주스 과자 620원 (4.7원)

(기타) 화장실 2번 60원 (0.4원)

         휴지 70원 (0.5원)

         인터넷 2210원 (17원)

 

.................................................. 총 8,16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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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21 21:03 2005/01/21 21:03
  1. catwoman
    2005/01/21 23:15 Delete Reply Permalink

    What's wrong with you? I hope you're safe.

  2. samakeun
    2005/01/21 23:44 Delete Reply Permalink

    1월31일부터 2월5일까지 뜻하지 않은 네팔 방문기회가 생겼습니다.여행이 아니라 무슨 회의에 가게 되었는데 공식일정 다음부터 설연휴라 아이비님처럼 여행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데.. 잘 될런가 모르겠네요.


1.

여행 50일차 아침이다. 머리 바로 옆에 둔 컵에도 얼음이 얼고 저쪽 세수대야의 물도 두껍게 얼었다. 그런데 그렇게 추운 느낌은 없다. 보통 여행자들이 숙소의 더운바람 나오는 에어 컨디셔너때문에 감기에 많이 걸리는데 기침도 이젠 없다. 초기의 의혹들, 일주일 만에 돌아와도 얼굴보기, 빨리 돌아오면 어디좀 숨어있어 등등을 조금은 불식시키는 숫자 50이다. 처음이 어렵고 길게 느껴지지 100, 200, 300은 금방일거 같다.

 

2.

주인아저씨에게 샤워를 하고 싶다고 했다. 아저씨 장작을 가져와서 때기 시작한다. 이 또한 흐믓한 대접이다. 그냥 이 집에 더 머물러야 겠다. 방에 있는데 물이 되었단다. 한 양동이다. 다행히 샤워실은 물은 얼어있지만 온열전구가 있다. 평소 같았으면 금새 흘려버렸겠지만 한 양동이로 이 닦고, 면도하고, 머리감고, 샤워하고, 물이 조금 남아서 머리를 한 번 더 행구었다. 오늘 날씨는 춥지만 몸은 상쾌하다.

 

3

티벳의 초입부에 왔으니 티벳음식을 먹어보자. 티벳카페에 갔다. 통창 바로 옆에는 혁명열사공원이 있다. 좀 비싸지만 티벳식 아침 세트 메뉴를 시켰다. 버터차, 미수가루, 두툼한 치즈 한 접시, 갓 구운 밀가루 빵, 계란 2개가 나온다. 썩 입에 달라붙지는 않았지만 먹을 만하다.

치즈가 많이 남아 비닐 봉지에 넣어 나왔다.

 

4.

오늘은 집과 친구에게 전화를 해야겠다. 콜랙트 콜 전화가 잘 안된다. 중국에는 전화방이 널려 있다. 한국의 전화방이 아니라 그냥 전화를 몇 대 설치하고 거리 나라에 따라 전화요금을 받는 상점이다. 어머니와 통화가 되었다. 그동안 여러명이 함께 다닌다고 말해두었었다. 같이 다니는 사람 한국 집 전화번호를 대란다. 약간 시간을 끌면서 그냥 넘어가고 성경 시편 잠언 읽느냐고 해서 조금씩 읽고 있다고 명쾌하게 또 거짓말했다. 하지만 청두에서 목사님 만난 일과 전화번호 적어두었다는 사실은 강조해서 말했다. 절대 사고난 지역으로 가지마라. 알았다. 하고 전화를 끊었다.

 

5.

어제 갔던 인터넷 왕빠에 들어갔다. 입구에 바로 있는 어제 자리에 앉았다. 다음 여행카페들어가서 보는데 베트남에 조류독감으로 2명이 죽었단다. 그래서 내가 있는 원난성에서 국경 30키로에 방역팬스를 설치하고 축산농민들에게 주의경보를 내렸다한다. 여기 원난성이 문제가 아니라 베트남 북부가 문제다. 원래 계획으로 하노이로 바로 가지않고 국경 시골마을을 먼저 돌려고 했는데 이 시골마을들이 사스지대인거 같다.

 

6.

그냥 여기서 티벳으로 넘어가는 건 어떨까하는 생각도 잠깐 들었다. 현재 외국인에게 티벳 육로 통과는 금지되어있다. 한 4~5십만원돈을 순전히 이동비와 허가비로 지출해야 갈 수 있다. 한가지 편법은 여기 중덴에서 한 7시간 버스 거리인 더친으로가 중국인 여행자들과 끼어서 가는 방법이 있단다. 이 날씨에 티벳루트는 완전 써바이벌이고 중국인 여행자들이 있을지도 모를일이다. 중국 티벳 루트는 지금 2006년을 목표로 해발 4천 5천 미터대의 세계에서 가장 높은 철로가 놓여지고 있다. 이른바 중자(중국과 자본이)합작해서 티벳을 완전 손아귀에 움쿼지는 작전이다. 그 전초기지격인 도시가 여기 중덴이다. 그전에 티벳을 한번 가봐야 할텐데... . 원난성에서 비자를 연장하는 방법도 있고 지금부터 그리 걱정할 일이 못된다고 결론을 내렸다.

 

7.

왕빠를 나와 한국식당으로 갔다. 김치찌게를 시키고 테이블에 앉아 있는데 저쪽에 맥주 한 병 붙잡고 앉아있는 한 남성이 다가와 인사를 한다. 일본인이였다. 이쪽으로 오라 해서 합석을 했다. 일본 북쪽 지방의 젊은 농사꾼이다. 겨울에는 시간이 나서 베트남 중국을 3개월정도 돌아다닐 계획이란다. 김치찌게가 나왔다. 먹을 만 하다. 그 일본인은 안주로 지지미하며 한국식 부침게를 시켰다. 내가 김치를 함께 먹으라 했더니. 기무치 맜있단다. 내가 첫날같던 티벳호텔 도미토리에 묵는단다. 다른 여행자도 있단다. 계속 그 일을 할 거냐 했더니 돈을 많이 벌어서 다른 직업을 가지고 싶단다. 내가 그건 드림이다고 하니 웃으면서 그렇단다. 청두로 간다해서 청두 정보를 주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혜어졌다.

 

8.

숙소로 오니 주인 아저씨가 화로불을 쬐고 있다. 오늘 여기저기 갔었다며 떠듬떠듬 대화를 하다 양숴에서 중국인과 피주좀 마셨다 하니 나가잔다. 좋다 하고 나가는데 한국식당 옆 집 2층이다. 이 술집이 동네 사랑방인가 보다. 주인과 인사를 하는데 내 숙소 아저씨의 형이라다. 영어도 하고 세련된 스타일이다. 한국 중국보다 훌륭하고 한국사람 베리리치(부자)하단다. 이 형과 달리 이 동생은 통념상 어수룩한 스타일이다. 형은 글로벌이고 동생은 로컬이다.

써빙보는 여자에게 여기 술하나 추천해달라해서 하나 시켰는데 12원짜리 버드와이저 작은병이 나온다. 중국맥주 큰 병이 5원인데. 또 한번 그 상술에 기막혀했다.

 

9.

이 친구에게 띠를 물어보는데 결국 나이를 확인하니 29살이다. 생각보다 어리다. 이 친구의 동네 친구들이 계속 우리자리에 하나씩 온다. 태어나기도 이 곳 상그릴라에서 태어났고 30년 가까이 살아 온 친구들이다. 그들은 앞으로 급속히 변화하는 상그릴라에서 어떻게 살아나갈까? 내 숙소 주인이 나에게 차 대절해서 수두호 탠칭사 좋다면 거기 도는데 200원이라고 장사를 한다. 물론 선의에 의한 제안이겠지만 이 로컬 친구에게서는 듣고 싶지 않았는데 할 수 없다. 내가 비싸다하니 150원이란다. 생각해보겠다고 했다.

 

 

* 050114 (금) 여행 50일차

 

(잠) 중덴 포탈라 케빈 3900원 (30원)

(식사) 아침 티벳아침식사세트  3640원 (28원)

          저녁 한국식당 김치찌게 2600원 (20원)

(간식) 술집 맥주2병 안주하나 티하나 3900원 (30원)

(기타) 인터넷 1300원 (10원)

          전화 1040원 (8원)

 

...................................총 16,38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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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16 18:20 2005/01/16 18:20
  1. 사막
    2005/01/16 23:19 Delete Reply Permalink

    살아돌아 올 수 있나? 사스 무서운데.. 조심하시고.

  2. 자일리톨
    2005/01/21 23:44 Delete Reply Permalink

    왠지 현지주민들의 사랑방같은 공간에서 술도 마시고 하는 모습이 친근하게 느껴집니다. 저도 여행을 간다면 꼭 그렇게 해보고 싶네요.


티벳 사원 숭잔린쓰

 

1.

일어나서 문을여니 햇살이 따사롭게 비춘다. 하지만 수도는 얼어있다. 창밖의 한 가족은 도끼로 나무를 쪼개고 있다. 끊인 식수물로 세면을 했다. 체크아웃을 하고 나왔다. 한시간에 3원한다는 스노우카페 컴은 안쓴지 오래되었나 보다. 안된단다. 일단 밥을 먹자. 한국식당에 들어갔다. 찌게 밥류가 20원이다. 싼건 아니지만 홍콩의 66달러짜리 찌게 3번을 먹을 수 있다. 된장찌게를 시켰다. 김치와 함께 된장찌게가 나온다. 주인아줌마는 다리의 한국여관인 NO3에서 요리를 하다가 여기에 음식점을 차렸다고 방명록에 나온다. 방명록에 한국인들의 메모가 가장 많다. 한국에서 먹던 된장찌게와 별 다르지 않다. 김치를 아껴서 먹고 있는데 중국인 종업원이 더 준다한다. 두 접시째 김치는 땀을 뻘뻘 흘리며 먹었다. 방명록에서 빈관정보를 발견했다. 바로 골목길 안쪽에 포탈라 케빈이 좋단다. 처음 사람은 50원에 트윈에 머물렀는데 좋았다고 하고 그 옆에 누가 40원에 흥정가능이라고 써 놓았다. 난 30원이면 되겠군.

 

2.

포탈라 케빈에 들어갔다. 아담한 ㅁ자구조의 2층집이다. 부엌에 가족들이 식사를 하고 있다. 한 아저씨가 나온다. 빈관이냐 물으니 2층으로 올라오란다. 트윈방인데 아담하고 깨끗하다. 전기장판도 있다. 그런데 전기 히터는 없다. 하루 묵어보고 추우면 다른 데로 옮기자. 주인아저씨얼굴은 아주 순박해보인다. 나하고 비슷한 나이 또래인거 같다. 내가 왕빠를 찾는다하니 같이 가잔다. 가까운 티벳카페는 한시간에 8원이라 포기하고 중국인 왕빠 두 군데를 갔는데 윈 98이다. 저번에서 한글서체를 다운받는데 실패해서 좀 해보다 나왔다. 나중에 생각하자.

 

3.

3번버스를 타고 숭잔린스에 갔다. 간덴 쑴쩰링 콤파라고도 불리우는 이곳에 수도승 600명이 있단다. 티벳 라사의 포탈라궁과 함게 작은 포탈라궁으로 불리우는 중국 남서부의 중요한 절이란다. 이 절 안에서 티벳의 내음을 확인하리라. 숭잔린스는 버스 종점에 있었다. 절앞 수도가에 티벳 옷차림의 소녀들이 보인다. 티벳 소녀들의 얼굴은 중국 장예모우 감독의 집으로 가는길에 나온 풋풋한 장쯔이의 얼굴들이다. 호기심 많고 야몰찬 느낌이다. 입장료 10원을 내고 올라갔다. 스님들은 친절한 인상이다. 먼저 나에게 니하오하고 인사를 한다.

 

4.

숭잔린스는 그 안에 수십개의 크고 작은 절과 수도공간이 있어 보인다. 계단을 올라 가장 큰 절 두개가 있고 옆으로 또 여러개의 독립된 공간이 있다. 적당한 크기의 사원안으로 들어갔다. 벽에보이는 티벳의 불교미술은 애써 온화하려 하지 않는다. 무섭게 내려보는 사천왕상인가 부터 꺼꾸로 매달린 얼굴과 해골이 이어지는 그림등 나로서는 더 가슴에 다가오는 그림들이다. 저 앞에 달라이라마의 젊었을적 사진이 있다. 태어나기 전부터인가 태어나서 부터인가 달라이라마로 점지(?)되었다는데 어린시절 그걸 감당하기 위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그는 그 벽을 넘어섰다.

 

5.

이렇게 달라이라마와 눈을 맞추고 있는데 한 10대 수도승이 나에게 인사를 한다. 머라 하면서 이리로 와보라 한다. 가보니 절입구 안쪽에 목걸이들이 걸려있다. 이거 봤느냐는 말이다. 약간 김이 샌다. 이 상품이 왜 절 안까지 들어와있나. 그 어린수도승은 아주 천진한 얼굴이다. 부디 그에게 깨달음이 있기를... . 건물 뒤쪽으로 치수어(화장실)이 있다. 여기서도 돈을 받는다. 입장료 10원 받는것도 모자라나. 또 김이 좀 샌다. 뒤쪽에 있는 수도원안으로 들어갔다. 한 수도승이 작은 종을 치며 불경을 읊고 있다. 조심스럽게 한 7미터 쯤 떨어진 거리에 앉았다. 눈을 감았다.

 

6.

이 순간만이라도 저 불경소리에 흠뻑 빠지게 해 주세요. 그동안 나를 부여잡고 있었던 무언가를 슬며시 옆에 놓아두고요. 불경 소리가 점점 빨라진다. 아직은 그냥 홍콩에서의 색소폰 솔로와 같이 하나의 애드립으로 들어온다. 3명의 젊은 남녀가 들어온다. 돈을 넣고 삼보일배식의 절을 한다. 그리고 흰 천을 하나씩 들고 저쪽 구석의 유리앞에서 눈을 부빈다. 아마 눈에서 본 세상의 더러운 것들을 씻는 의식으로 보인다. 그리고 달라이라마 앞으로 가서 기도를 하고 돈을 내려놓고 저쪽으로 가서 손을 씻는다. 그들은 진정 정화된것일까? 상품하나를 산 것일까? 가장 큰 절은 뒤쪽 문으로 들어가게 되어있었다. 큰 스님으로 보이는데 아주 조용히 불경을 외우고 있다. 방해가 될까봐 조심스럽다. 아직 이 절에는 많은 것이 남아있다.

 

7.

여기는 한 번 더 오자. 매표소로 내려오는데 떠들썩하다. 페키지 여행자들이 티벳 복장의 목소리큰 인솔자 뒤로 모여있다. 입구의 늘어선 종들을 한번씩 만져보며 계단으로 올라간다. 적당한 시간에 잘 내려왔다. 저들과 나의 차이는 크지 않다. 한 번 와보았다는 데서 오는 소유적 만족감은 공통이다. 내가 좀 더 분위기를 따지는 것일뿐이다. 나는 거기서 조금이라도 더 나아가고 있는가? 아직은 여행 초입부다. 인생도 전반부다. 기회는 널려있다. 상그릴라를 찾아서... .

 

8.

다시 버스로 시내로 들어왔다. 여기는 작은 시장이다. 네군데의 과일노점이 나란히 있다. 오늘은 어디서 살까? 그동안 과일의 빛깔도 보지만 사람을 보고 더 샀었다. 아줌마, 젊은 여자, 아줌마, 아이 안은 아줌마다. 맨 끝에 아이 안은 아줌마 쪽으로 가서 샀다. 숙소쪽으로 걸어가는데 깔끔한 왕빠 간판이 3층에 보인다. 들어가서 한궈랜이라하니 한 대있는 XP컴으로 안내한다. 제어판으로가 언어 추가 설정을 하고 10일 정도 밀린 일기를 써 내려갔다.

 

9.

밤이 되었다. 왕빠를 나와 중국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여긴 매뉴판이 없어 헤메고 있는데 젊은 여주인이 손님 만났다는 듯, 이저저거 해 줄까 한다. 내가 얼마냐 하니 40몇원이란다. 결국 돼지고기 볶음과 해서 16원 짜리를 시켰다. 맛이 없다. 단지 음식맛 때문만은 아니다. 화장지를 하나사서 숙소에 들어와 주인아저씨가 더운물 떠주는 것으로 세면을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10.

어제 난 잠깐 고산병을 앓은거야. 이젠 나은거 같다. 추운 것도 어릴때 강원도 철원 외갓집에 방학마다 갔을때 윗목에는 얼음이 얼지만 할머니 할아버지가 나를 아랫목에 자게 하던 그때가 떠오르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다. 훨씬 춥지 않다.

 

 

* 050113 (목) 여행 49일차

 

(잠) 중덴 포탈라 케빈 욕실없는 트윈 3900윈 (30원)

(식사) 점심 된장찌게 2600원 (20원)

          저녁 돼지고기볶음, 밥 2080 (16원)

(이동) 사원 버스 왕복 260원 (2원)

(입장) 숭잔린쓰 1300원 (10원)

(간식) 포테토칩 130원 (1원)

          귤3개 260원 (2원)

(기타) 인터넷3시간남짓 850원 (6.5원)

          두루마리휴지하나 200원 (1.5원)

 

..................................................총 11,58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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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16 16:51 2005/01/16 16:51

1.

체크아웃을 하고 물레방아 쪽으로 걸어 한 식당에서 중국식 아침식사를 했다. 길다란 튀김 빵, 죽, 만두를 먹고 신용카드로 돈을 뽑기 위해 택시를 타고 중국은행으로 가자고 했다. 택시운전사는 여기가 맞다며 걸어가도 될 만한 거리에 내려준다. 은행으로 들어가보니 현금서비스는 안되고 환전은 된단다. 일단 홍콩달러 280원을 중국돈으로 환전했다. 바로 옆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한 40분 정도 기다려 11시 20분 중덴가는 버스에 올랐다.

 

2.

힐튼이라는 한 작가가 1933년에 잃어버린 지평선이란 베스트셀러를 썼단다. 난 읽어보지 못했다. 그 소설에서 어떤 이상향 유토피아를 말하는데 사람들이 그곳이 실제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단다. 1997년에 중국정부가 이를 받아 이 곳 중덴지역이 소설속의 상그릴라와 일치한다며 중덴의 이름을 상그릴라로 바꾸어 버렸단다. 내가 쿤밍에서 중덴가는 표를 달라하자 상그릴라가 표에 찍여나왔었다. 상그릴라는 중국 장족의 뜻으로 마음속의 해와 달이란다. 이 마음속의 해와 달을 중국정부가 밖으로 끄집어냈다. 

 

3.

중국 버스는 좌석이 지켜지기도 하지만 안 지켜지는 경우가 더 많다. 나도 대충 좋은 자리에 앉았다. 한 여자가 올가서더니 한 아줌마에게 내 자리라며 신경질을 낸다. 난 좀 뜨끔했지만 그냥 앉았다. 차는 출발한다. 차는 게곡길로 올라간다. 차 두대가 지나기 힘든 아주 좁은 길이다. 그래 뭔가 험한 곳으로 가는구나. 이거야. 웬걸 길이 점점 좋아진다. 번듯한 2차선 아스팔트 산 도로로 바뀐다. 한 할아버지가 염소를 몰고 가는데 이 아스팔트 색깔과 안 어울린다. 차는 어느덧 넓은 고지대를 지난다.

 

4.

프린트한 정보에서는 3000미터가 넘어가면 고산증이 시작된다고 한다. 두통 어지러움 현기증이 동반된다고 한다. 사실 약간 걱정을 했었다. 난 약한 심장을 가지고 태어났었다. 국민학교 2학년 때 한 학기를 병원에 입원했었다. 시험날만 가서 시험시고. 그렇다 해서 심장병은 아니고 의사는 크면 낮는 수준이라고 했다. 그 아픈 페니실린 주사를 한달에 한 번씩 맞았었다. 내가 차분하고 젊잖은 스타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간혹있는데 그건 인간성 때문이 아니라 폐활량이 낮기 때문에 그런것이다. 여하튼 아직까지 별 이상이 없다. 이곳에서도... .

 

5.

길이 더 넓어졌다. 4차선이다. 저멀리 설산들이 보인다. 중국에서 제일 높은 공가산은 무려 7556미터란다. 히말라야만 산이 아니다. 이길로 계속 올라가면 공가산 부근으로 갈수 있다.

뿔이 그대로 달려있는 소들이 길 양쪽에서 한가롭게 풀을 띁고 있다. 어 저앞에서 소들이 무더기로 지난다. 버스가 서거나 피해야 한다. 이런 일이 여러번 있었다. 소들도 안다. 버스가 빵빵거리자 한 소가 눈을 껌벅이며 기다린다. 이 길은 인위적인 도로다. 이 소들의 아버지 소나 엄마 소들은 아마 이 길을 의식하지 않고 편하게 풀을 뜯었을 것이다.

 

6.

저 앞에 중국 공안 몇 명이 서 있다. 한 공안이 손을 펼치며 서란다. 버스가 서고 한 공안이 올라온다. 운전사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다. 이건 괜한 트집잡기 식이다. 앞쪽에 있는 가방을 열어보란다. 그리고 뒤쪽으로 가서 만만한 할아버지 가방을 열어보란다. 소뼈인지가 몇 개 나온다. 하나를 집어 가지고 내린다. 할아버지들 다 내려 먼가 항의한다. 소뼈를 돌려받는다.

베이징에서 난로를 걷어차던 공안이 생각난다. 비슷한 실력행사다. 이유없이 복종해야한다.

 

7.

공안들을 뒤로 하고 버스는 달린다. 얼마안가 도로에 한 문이 세워져있다. 저게 티벳 글씨인가보다. 중국어도 함께 쓰여져 있다. 드디어 원래 티벳마을이었던 중덴이 가까워 오나 보다.

상점들이 보인다. 대부분 티벳글씨와 중국어를 함께 표기한다. 티벳 복장의 사람들과 붉은 수도승들이 많이 눈에 띈다. 한족에게 점점 점령당하는 티벳족들의 터전인 중덴에 도착했다.

 

8.

택시를 타고 가장 유명하다는 티벳호텔로 갔다. ㅁ자구조의 아주 큰 호텔이다. 그런데 사람이 없고 황량해 보인다. 안쪽 레스토랑도 문을 닫았다. 한 남자가 나온다. 도미토리 달라해서 돈을 내가 방으로 들어갔다. 이건 좀 잘 분위기가 아니다. 2층 방이 있냐고 물으니 트윈이라 하면서 30원에 해주겠다 한다. 방 창문을 여니 한 가정집 앞 마당이 나온다. 그래 여기서 하루보내자. 앞뒤 창문으로 바람이 숭숭 들어온다. 다행이 전기 장판은 있다.

 

9.

시계는 5시가 가까워온다. 밥도 먹고 내일 숙소도 미리 알아보자. 한 식당에서 밥을 먹고 큰 길에 있는 숙소들을 알아보았다. 방에 난방이 되는 곳은 80에서 100원, 난방은 없지만 이중창이고 온수가 가능한 곳이 50원이다. 내일 아침에 결정하자. 숙소로 돌아와 씻을려고 세면장에가니 수도는 얼어있고 샤워기에서는 찬물만 나온다. 그 직원이 한 실내의 샤워실로 안내안다. 다 쓰고 문 잠그고 나가란다. 이 큰 호텔에 불빛이 단 두개다. 이쪽의 나와 저쪽의 불빛하나. 이곳은 지금 공포영화의 세트장같다. 물론 사람없는 겨울에만 그럴 것이다. 어제 꾸었던 꿈이 생각난다. 계속 문이 조금씩 열린다. 나가보니 한 어린 괴물이 움크리고 있다. 그리 위협적으로 보이진 않지만 괴물은 괴물이다. 내가 길다란 싸리 빗자루로 괴물을 때린다. 그 괴물은 피투성이가 되어 날라가버린다. 성장해가는 나의 자아를 보여주는 좋은 꿈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오늘은 이런 꿈은 꾸지말자.

 

 

* 050112 (수) 여행 48일차

 

(잠) 중덴 티벳 호텔 욕실없는 트윈 3900원 (30원)

(식사) 아침 죽 1원 만두 0.6원 긴도너츠 0.6원  290원 (2.2원)

          저녁 마파두부,감자볶음 밥 1560원 (12원)

(이동) 리장-중덴 4940원 (38원)

         리장 택시 910원 (7원)

          중덴 택시 780원 (6원)

 

............................................총 12,38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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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15 21:12 2005/01/15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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