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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12/02
    1등도 사람, 꼴등도 사람(4)
    레이-1
  2. 2005/12/02
    아빠‘만’ 금연 하시죠?
    레이-1

1등도 사람, 꼴등도 사람

** 월간 [사람] 6호, '이것도 인권이에요' 꼭지 글. ** 이 글만으로 [사람]의 질적 수준을 판단한다면 경기도 오산입니다. (요즘 쾌변작가 메가쇼킹의 만화에 버닝중;;) ** 황우석 스캔들과 관련해서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좋은 글들이 와르르 쏟아져서 사실 굳이 내가 말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그렇게 좋은글들을 쓰는 사람이 주류(혹은 다수)가 아니라는 사실이 참 서글프다. -_ㅜ


1인자가 되어야만 살아남는다.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늘상 묻는 질문이 있다. ‘너 커서 뭐 되고 싶어?’ 정말 실속 없는 질문이기도 하지만 사회의 분위기를 가장 잘 읽어낼 수 있는 질문이기도 하다. 아이들의 답변은 그 시대의 경쟁력있는 직업이 무엇인지를 대략 파악할 수 있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대통령이라는 답변이 많이 나왔을 때는 유신을 지나 땡전뉴스(9시가 울리는 ‘땡’소리 직후 ‘전두환 대통령은~’하고 방송되던 그 시대의 뉴스)가 방송되던, 대통령이 최고의 권력과 권위를 표상하는 상징으로 읽히던 시대였다. ‘과학자’라는 답변은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차츰 마무리되고 ‘우리가 가진 자원은 인적 자원뿐’이라는 선전과 함께 실용적인 응용학문들에 많은 투자지원을 하던 때였다. 한류다 뭐다 해서 문화산업이 각광받고 있는 요즘 아이들의 대답이 ‘연예인’으로 바뀐 것은 그들이 가벼워서가 아니라 시대의 요구에 충실히 따르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아이들이 연예인을 꿈꾸고, 과학자를 꿈꾼다고 해서 모두 동방신기나 황우석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성공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남들과 다른 성과를 거두어야만 하고, 1인자를 만들기 위한 부모들의 노력은 오늘도 계속된다. 박세리 선수의 LPGA 우승 이후에 박세리 선수 아버지의 지도법이 세간의 화제가 되자, 너도나도 아이에게 골프를 시키겠다는 부모들 때문에 골프학원이 특수를 맞기도 했었다. 노벨상 수상자의 15%를 배출했다는 유대인들의 천재교육 십계명 1조는 ‘남과 다르게 되라’는 것이라고 한다. 남과 다르게 되기 위해 부모들은 아이들을 사교육 시장에 보내고, 경쟁에 살아남는 법을 가르치며, ‘이기는 것이 살길’이라는 것을 머리에 각인시킨다. 출발선이 다른 시작 살아남기 위해서는 1인자가 되어야 하지만, 그 경쟁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개천에서 용난다’는 말은 이제 어디에 써먹어야 할지 모르겠다. 학교 수업만 열심히 한다고 해서 좋은 대학에 갈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경쟁력 있는 인적자원을 만들기 위해 한글도 떼기 전에 영어부터 배우는 아이들이나, 잠자는 시간 외에는 학원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아이들을 생각해보면 돈 없이는 경쟁할 수 있는 조건조차 갖추지 못할 것이다. 최근 인하대 수시전형에 합격한 송유근 군의 경우는 이 신동을 위해 과학기술부의 지원계획이 잡혀져 있다(과학기술부에서는 송군의 교육을 담당하기 위해서 전문가 4~5명으로 구성된 전담지원부를 개설할 예정이다.). 이 경우는 확연히 다른 출발선으로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음악에 재능이 있더라도, 국내의 음악 교육의 상황을 생각해본다면 저소득층의 사람들은 음악 공부를 할 엄두도 못 낼 것이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천재들이 한명씩 등장할 때마다 그 천재의 학습법을 담은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어도, 그 학습법을 그대로 따라하려면 부모가 아이의 교육에만 신경을 쏟거나, ‘남들과 다른 교육’을 받기 위해 어마어마한 사교육비를 지출해야만 한다. ‘1인자’와 나머지들 또한 사람에 대한 평가 기준이 ‘성과 중심’이 되면서, 노력이 가지는 가치는 그 빛을 잃었다. ‘너도 노력하면 잘 할 수 있어’라는 말은 ‘노력하면’보다는 ‘잘 할 수 있어’가 핵심이다. 영화 [말아톤]의 실제 주인공인 배형진씨가 빛나는 것은, 그가 정신지체 장애인들의 희망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비장애인들과 비슷한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에 대한 축하이다. 배형진씨가 달리기를 잘하고, 비장애인들처럼 직장을 다니며 일상생활을 잘 영위할 수 있다고 해서 다른 장애인들에 대한 시각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며, 여전히 장애인에 대한 차별은 사회 곳곳에 만연해 있다. 스티븐 호킹이 위대한 물리학적 성과를 이루었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많은 장애인들이 밖을 자유롭게 나다닐 수 있는 이동권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기회만 얻으면 스티븐 호킹 말고도 더 멋진 학문적 성취를 이룰 수 있는 장애인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그냥 가능성일 뿐이다. 장애인들의 가능성은 펼쳐보기도 전에 차단되고, 그 속에서 삶을 위한 개개인의 노력들은 자취도 없이 사라진다. 배형진씨의 성공기는 헌신하는 어머니가 없는 장애인들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경쟁만을 강요하고 1인자가 되기만을 요구하는 사회에서, 확실한 결과물 없이는 존재 가치마저도 인정받을 수 없는 것이다. 1인자가 아니라 ‘사람’을 보고 싶다. SF영화에서 종종 등장하는 ‘미친 과학자’ 캐릭터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이용해 세계를 지배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다. 자신의 뛰어난 능력을 통해 치명적인 화학무기를 만들어내기도 하고, 누구도 저항할 수 없는 가공할 힘을 가진 로봇 따위를 만들어내 세계를 위험에 빠뜨리기도 한다. 이 상황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아무리 똑똑해도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 세계를 재패할만한 힘이 있어도 그를 올바른 일에 써야 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할지는 못할 망정 피해는 주지 말아야 할 터인데, 지금의 1인자들 주변에는 온통 피해자들 밖에 없다. 수많은 신동의 부모들은 아이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을 것이고, 황우석 교수의 실험을 위해 난자를 제공한 연구원들은 과배란 유도제의 부작용을 걱정해야 했을 것이며, 자신의 노력을 인정받지 못한 채 경쟁에서 밀려난 수많은 패배자들은 아무것도 보상받지 못할 것이다. 경쟁의 의미가 자신의 능력을 계발 할 수 있는 자극제의 역할이 아닌 ‘1등’이라는 성과를 얻기 위한 것으로 변질된 지금, ‘페어 플레이’정신은 사전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말이 된 것 같다. 여러 색깔의 조각천들을 모아 만든 퀼트처럼 세상에는 여러 재능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할텐데, 그 많은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가고 1인자만 살아 남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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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만’ 금연 하시죠?

** 월간 [사람] 5호 '이것도 인권이에요'글. ** 사실 [사람]잡지에서 이 꼭지가 제일 허접한데..이래서 잡지 광고가 될까? -_-;; ------------------------------------------------------------------------------


이 꼭지에 ‘길거리에서의 흡연권’을 쓴다니 열광적인 반응이 되돌아왔다. 물론 여성들에게서. 대체 그동안 여성이라는 이유로 길에서 흡연할 때 얼마나 두려움과 모멸감에 시달렸으면 그런 반응이 되돌아올까..싶어 씁쓸하기도 했다. 물론 나 역시 예외는 아니지만. “아빠의 금연, 가족의 행복” 예전에는 아주 많이 붙어있었지만 지금은 별로 안 보이는 저 구호가 요즘은 가끔 고맙게도 느껴진다. 아빠‘만’ 금연하면 된다는 얘기 아닌가! ^^이제 담배피우는 사람이 ‘아빠’만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저 구호는 정말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하지만 문제는 누구나 알고 있을 뿐, 인정하지는 않는다는 것. 재작년쯤인가. 어떤 건물 앞에서 남자선배들과 같이 계단에 앉아서 수다를 떨다가 담배를 피워물었다. 그때는 사실 주변시선을 별로 의식하지 않았다. 왜? 남자 선배들과 있으니까! 누군가가 시비를 걸어도 막아줄 방패들이 있으니 안심도 되고. (사실 ‘계집애가~’운운하는 소리 듣고 싸우면서까지 담배를 피워야 한다는 게 얼마나 짜증스럽나) 그런데 길 가던 아저씨가 대뜸 내게 다가와 ‘불 좀 빌릴 수 있을까요?’하고 물었다. 입에 담배를 물고 있으니 굳이 말로 대답할 필요도 없었고, 그냥 아무 대꾸도 않고 담배에 불을 붙여드렸다. 뒤에 앉아있던 남자 선배 중 한 명 왈‘ 와~ 세상 정말 살만해졌다. 여자한테도 담뱃불 빌리는 아저씨가 다 있네..’ 영문을 아는 다른 선배들은 모두 자지러졌다. 왜? 그 아저씨는 내가 여자인줄 몰랐던게다. 웃자고 한 소리지만 아직도 단신으로 가끔 실리는 기사들 중 잊을만 하면 나타나는 소재거리가 바로 이 ‘여성 흡연’문제다. 길거리에서 젊은 여성이 담배를 피웠다고 얻어맞고, 심지어는 학교 캠퍼스 안에서도 학교에 놀러온 동네 주민들에게 뺨 맞기 일쑤다. 상황이 이러하니 여성들이 ‘길거리 흡연권도 인권이에요’라고 얘기한다는 내 말에 얼마나 열광할 수밖에 없었는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오죽하면 ‘여성이 지붕이 없는 곳에서 흡연을 하면 경범죄다’라는 유언비어까지 퍼졌었을까. (실제로 90년대 말 이런 소문이 있었다.) 지금은 ‘건강을 해치는 담배 그래도 피우시겠습니까?’로 바뀌었지만, 예전 경고 문구는 좀 더 노골적으로 여성의 흡연권을 무시했었다. ‘흡연은 폐암 등 각종 질병의 원인이 되며, 특히 임신부와 청소년의 건강에 해롭습니다.’ 마치 임신과 출산이 모두 여성이 책임인양 떠넘기고자 하는 수작에 발끈할 수밖에 없었다. 담배가 백해무익하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성의 건강을 위해’따위의 말로 운운하며 여성의 흡연을 제지하려는 것은 사실 논리적 근거가 되지 못한다. 겨우 오십보 백보 차이인 것을. 어떻든 간에 현재 스코아, 여성에게 길거리에서의 흡연은 정말 심호흡 단단히 하고 저질러야 하는 사고이다. 그런데 이 길거리 흡연, 사실 정말 권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담배를 둘러싼 권리가 ‘맘 놓고 흡연할 수 있는 권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담배연기가 끔찍하게 싫은 혐연자들에게도 권리는 있다. 간접흡연하지 않을 권리. 흡연량으로 따지면 평균 이상은 되는 나 같은 애연가 여성이라면 당연히 길에서도 맘 놓고 흡연할 수 있는 권리가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걸어다니며 담배피우는 사람들을 옹호해주고 싶은 생각은 절대 없다. 혐연자/비흡연자들에게는 감사하게도(!) 최근엔 금연석이 엄청나게 늘어났고 심지어 아예 금연구역으로 설정한 곳도 많아졌지만(개인적으로 실내에서나 맘 놓고 흡연할 수 있는 여성들에게는 금연구역만 있는 장소가 늘어가는 것은 정말 반인권적인 상활이라고 생각한다.) 길거리에서만큼은 워킹 스모커들을 피해갈 여지가 없다. 대체 걸어다니는 굴뚝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대체 뭐란 말인가? 더구나 하나도 아닌데. 앞에서 성큼성큼 걸어가며 담배피우는 사람들. 걸음이 느리다면 그를 앞질러가기도 어렵다. 게다가 길거리에는 또 왜 그리 침은 뱉어대는지. 담배연기에 질식할 것 같은 상황도 모자라 지뢰(!)를 피하기 위해 조심조심 걸어야 하는 이중고를 겪으면서도 피해자들은 말 한마디 하지 못한다. 흩날리는 담뱃재가 검은 옷에 붙으면 허연 흔적을 남겨 짜증나고, 튕겨내는 담뱃불에 옷이 탈까 훌쩍 피해야 하며, 담배를 들고 있는 손이 내 옷이나 피부에 스칠까봐 팔짱을 끼고 옷 매무새를 정리해야 하는건 생각보다 무척 귀찮고 짜증나는 일이다. 뒤따르는 자여, 그대에게 ‘간접흡연하지 않을 권리’란 없다! 그렇게 흡연권이 절대 침해해서는 안되는 절대적 권리라면 왜 여성의 흡연에는 그렇게 관대하지 못한걸까? 최근 일본에서는 걸으면서 흡연하는 것을 금지하는 캠페인이 진행중이라고 한다. 2003년에 일본의 치바현에서 어떤 흡연자가 횡단보도를 건너며 담배를 피우다가 손에 들고 있던 담뱃불이 뒤따라오던 아이의 눈에 닿아 아이가 실명한 사고가 있었는데 그 후 뉴스나 공익광고등을 시작으로 캠페인이 확산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길거리를 모두 금연공간으로 만들자고 하는 얘기는 절대로 아니다. 다만, 한군데 서서 얌전히 피워줬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나날이 설 자리를 잃어가는 애연가들에게 길거리마저 차단한다는 것도 역시 인권침해다. 다만, 흡연권만이 권리가 아니라는 걸 좀 이해해줬음 한다. 대체 흡연이 뭐 그렇게 자랑할만한 일이더냐. 길거리에 보이는 공공 휴지통에 재떨이가 붙어있는건 장식이 아니다. 재떨이 있는 곳이 곧 흡연 공간이라는 얘기다. 건물에서도 그럴진데, 왜 길거리에서만큼은 사방팔방 흩어지는 재들을 내가 고스란히 참아줘야 한단 말인가. 더구나 제대로 피우지도 못하게 만들면서 말이지. ** 일본의 환경 과학자이자 환경, 평화운동가인 토다 키요시의 [환경학과 평화학](김원식 옮김, 녹색평론사, 2003)이라는 책에는 담배의 유해성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다고 한다. 나는 도저히 그 책을 볼 자신이 없다. 부끄럽게도, 아직 스스로의 ‘완전한 시민권 - 동등하게 흡연할 권리’을 누리는 것이 내게 더 선결과제라고 생각되기 때문일까. 커피와 마찬가지로 담배 역시 그 재배과정에서 제 3세계 여성과 아동 노동의 착취가 심각한 상황이라고 하고, 담배를 재배하는데 필요한 비료에는 다량의 우라늄이 들어 있다는 얘기를 얼핏 들으면서도 그 내용들을 아직 자세하게 알고 싶지가 않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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