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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 우습게 보일 각오를 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진정한 혁명가는 열렬한 사랑의 감정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없는 진정한 혁명가란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진정한 혁명가는 극단으로 빠지지 않기 위해, 차가운 지성주의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
대중으로부터 고립되지 않기 위해, 엄청난 양의 인간애와 엄청난 양의 정의감,
그리고 진실성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매일 이처럼 생생한 인간애의 사랑을 현실로 바꾸기 위해,
본보기가 되는 행동으로 만들기 위해
투쟁해야 합니다. "
- 체 게바라.
'헬렌 킴'이 단체 컨설팅 왔을 때,
그녀 강의노트 맨 앞에 적혀 있길래 졸음을 쫓으려고 마구 옮겨 적음.
Women's Studies/ Anthropology/ South America
Ruth Beher. 1993 Translated woman: crossing the boder with Esperanza’s story. Beacon press.
>> 번역은 반역이다
오래전 이탈리아 사람들은 “번역은 반역이다”이라는 말로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바꾸어 옮기는 일의 난감함을 토로했다. (권용선2003:5) 이 난감함은 언어들 간의 변환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문자로 쓰여진 텍스트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일, 오감을 통해 감각되는 것을 지각하는 일, 대화를 나누고 정서를 교감하는 일 또한 번역(translation)에 포함된다.(Ibid., 5) 하나의 문장을 읽어내는 데에 무수한 각주와 해석과 설명이 동원되는 것처럼, 인간은 누구나 외부와 만날 때 그 나름의 경험과 지식과 취향을 개입시킨다. 공통감각은 상상의 산물일 뿐이다. 그래서 번역은, 서로 다른 것들 사이에서 빚어지는 불통과 불화의 선 뿐만 아니라 소통과 화해의 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반역’의 작업이다. (Ibid., 5)
이 책은 에스페란자와 베하가 나누었던 대화, 번역, 그리고 반역에 대한 글이다.
I. 에스페란자 이야기, 그녀의 구술사
내가 동네 아줌마들에게 처음 들었던 에스페란자는 남편의 눈을 멀게 할 만큼 독하고 사납고 거칠고, 몰염치의 아성으로 굳어져 있는 그런 아줌마였다. 동네 사람들은 그녀를 '마녀'라고 불렀다.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의 그림 속에 나온 그 인디언 여자를 떠올렸다.
우리는 1985년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의 작고 허름한 집에서 나는 민트향의 냄새를 맡으며 역시 작고 허름한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말이다. 때로는 지겹고 잠이 쏟아지고 황당해서 ‘후딱 깨기도’하면서 수많은 밤을, 몇 년간 지속되었던(1990년 초까지) 그 무수한 밤을 그렇게 지새웠다. 에스페란자는 내가 얼마나 열심히 귀 기울이고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
귀를 기울인다고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진짜로’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인 것이다.
에스페란자의 이야기는, 말들은 끊어지고 반복된다. 처음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컬러퍼플』(The Color Purple)의 주인공 씰리를 떠올렸다.
나는 마마가 겪었던 삶을 기억해, 그것은 바로 인디언 여자들의 깜깜한 삶이었어. (black life)"
에스페란자 역시 인디언 여자들의 깜깜한 삶을 살게 된다.
"나는 울 엄마처럼 남편한테 마체테로 머리를 맞았어. 그 놈은 취해서 울 엄마를 남편도 버리고 도망간 창녀 같은 년, 너도 니 엄마랑 똑 같은 년이라고 했어. 맞는 순간 핫, 했어. 피가 바닥으로 흘렀어. 아이를 꼭 안고 있었어. 그 때 나는 울었어. 그 때 맞은 곳이 여전히 뜨거워. 아직도 코라제(coraje, 화)를 느끼면 그 곳이 불 붙는 것처럼 아파, 너무 아파." 나는 에스페란자의 머리와 이마에 여전히 남아있는 흉터를 기억한다.
II. Literary Wetback (미국에 ‘불법’ 입국하는 멕시코 인을 경멸적으로 칭하는 용어)
II-1. 실제세계
“재현은 재현되는 주체에 대한 폭력을 포함하는 작업이다.”
사이드(Said)
“사람들은 행상 다니면서 이것 저것 얻어먹고 남긴 음식 받아오는 나를 보고 ‘거지’라고 해. 하지만 자기, 내가 너한테서 뭘 빼앗았어?"
그녀의 행상을 따라 나선 날 아침, 에스페란자는 내게 이렇게 물었다. 그 날 거리를 나란히 걷는 우리들만큼 기묘하게 보이는 것도 없었다. 레이밴 선글라스에 카메라 가방을 들고 스웨터를 입은 미국여성과 인디언 복장에 앞치마를 두르고 어깨에 넝마 같은 바구니를 이고 가는 에스페란자. 사람들은 우리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우리가 에스페란자네 식탁에서 백 만번의 대화를 하고 그 시간을 공유한다고 해도 여기는 ‘실제’ 세계였다. 인종적, 계급적 경계가 우리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우리는 단지 함께 나란히 걷는 것만으로도 그 거리에서 조용히 경계를 넘나들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환상일 것이다. 그녀의 이야기는 나를 타고 ‘여기’와 ‘저기’의 경계를 넘겠지만 실제의 그녀는 국경선에서 저지당할 것이다. 혹은 고작 해야 미국의 미등록 ‘불법’ 가내 노동자로 비참하게 국경을 넘어야 할 것이다. 에스페란자는 책을 통해 자신(self)이 고스란히 드러나게 될 ‘저기’에서 멕시코 사람들이 얼마나 혹독하게 취급당하고 또 얼마나 비참하게 삶을 살고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었던 수많은 밤, 아직도 가물가물해지지 않는 기억 속의 그 밤들을 통해 경계를 넘었다고 믿었다면, 에스페란자, 그것은 기만일까?
II-2. 여기, 그리고 저기
“동네 여자들한테는 말하지마” 에스페란자가 간곡히 이야기했다.
“저 곳 (over there)에서만 영어로 출판될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저 곳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 것 같아요?” 얼떨결에 에스페란자의 의견을 묻는다.
“재미없을 거야, 별로 와 닿는 이야기가 아니야 … 그런 말이 있잖아.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심장이 있어도 못 느끼는 거 (eyes that don’t see, heart that doesn’t feel)”
“왜 동네 아줌마들한테 그렇게 비밀로 해야 해요?”
“나는 멕시코 사람들이 미국에 건너가 몸을 팔아 먹고 사는 것처럼, 여기서 말을 판 거야. 여기서는 어디서도 쓸데 없는 말들을 풀어서, 이런 이야기 거기서는 못 구하는 거잖아. 그런 말들을 판 거야.”
III-3. 진실 혹은 거짓
에스페란자가 있는 사실 그대로를 이야기 했는지는 나도 모르고 며느리도 모른다. 아마 극적인 사건을 더 강조했을 것이고 자신의 섹슈얼리티 같은 민감한 문제는 두루뭉술하게 넘어갔으며 어떤 사건은 부풀렸을 수도 있다. 그녀는 자신의 섹슈얼리티, 관계, 욕망 보다는 그녀의 고통, 그녀가 당한 물리적 폭력, 그리고 그녀의 분노, 종교적 관념이나 의례 등이 더 말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이야기는 이미 그녀에 의해 한 꺼풀 걸러진 삶에 관한 것이다.
에스페란자의 이야기는 생애사(life history) 인가 그저 이야기(life story) 인가? 논픽션인가 아니며 픽션에 해당하는가?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스페인어를 그대로 사용해 historia 라고 칭할 것이다. Historia는 히스토리와 스토리의 경계를 유동적으로 넘나드는 단어이다.
III-4. 보이는 대상, 보는 주체 (타자화)
페미니즘의 이론화는 분명히 민족지적 기술을 재고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의의가 있다. 그것은 정체성이나 자기/타자 관계의 역사적, 정치적인 구축을 문제로 삼는다. (마커스)
아더 문비 (Arthur Munby)라는 빅토리아 시대의 사람은 자신의 하녀였던 한나쿨윅 (Hannah Cullwick)이 ‘천한’ 일들을 하는 것을 지켜보고 그녀의 사진을 찍고 그녀의 일기를 읽어보는 것을 즐겼다. 그녀는 일기장에 자신의 이야기를 적었는데 이는 그의 주인의 뜻에 따라 쓰기 시작한 것이었다.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문자가 없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구술사라는 이름으로 정리해갔지만 그들이 우리 시선(gaze)의 대상으로 전락했다는 것, 그들이 기꺼이 보여지는 ‘주체’로서 역할 했다는 사실은 많이 간과된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아더 문비의 작업을 도돌이표하고 있는 것일까?
로잘도는(Renato Rosaldo) 인류학자들은 생애사를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것으로 상정하는 경향이 있다고 비판했다. 나는 그의 말을 곱씹으며, ‘문자’ 없는 여성들 앞에 녹음기를 들이대면서 그들의 삶에 대해서 ‘진짜 이야기’를 해 달라고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지를 물었다. 인간이 고통을 느끼고 표현하고 인정하고 공감하는 행위는 그 사회의 권력관계로부터 자유롭지 않다.(정희진 2002:54) 고통을 보는 작업, 그들의 고통을 느끼는 작업, 그리고 자기와 타자 관계의 구축하는 작업은 보이는 대상과 보는 주체 사이의 정치학을 포함한다.
더 사랑하는 사람처럼 ‘보여지는’ 사람이 더 상처받는다.
그래서 타자화되는 존재들은 상처 받기 쉬운 위치에 놓이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주체는 견고한 위치에서 그들을 재단한다. 나는 바라보는 민족지 학자이고 에스페란자는 나의 시선에 의해서 타자화되는 존재이다. 나는 내 콤마드레, 에스페란자의 historia를 내게 반사해 내 자신의 삶으로 돌아오는 통로를 만들었다.
이야기를 통해 다른 여성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 자아와 타아와 섞인다는 것은, 말만큼 멋진 작업은 아니다. 특히 다른 세계에 속한 여성들이 함께 작업하는 것은 그만큼의 불협화음을 포함하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인류학은 이제 온전히 이러한 불협화음을 껴안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이름없는 페미니즘과 너무 이름을 가진 나의 페미니즘 사이에서, 나는 이제 에스페란자가 아니라 나를 번역(translating)한다.
III. 에스페란자, 희망
그 시절, 온갖 매체에서 베를린 장면이 무너지고 있었다.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건너와 자료를 정리하고 있을 때, 사회주의 국가에 살던 사람들이 ‘서구’의 자동차와 아파트를 사탕 가게에서 알록달록한 사탕들을 쳐다보는 아이들처럼 바라보는 사진이 뉴욕타임즈를 장식했다. 하지만 멕시코에서는 국경을 넘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미국에서 사용된 일회용 기저귀가 시장에서 새 기저귀로 팔리고, 사람들은 쉬쉬하면서 ‘저기’에서 온 산업페기물이 싸인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살아있는 시체’ (living dead)라고 불렀다. 멕시코와 미국의 국경선이 전쟁터처럼 되어가고 있었고, 불법으로 미국에 침입한 외부인(illegal aliens)에 대한 기사가 넘쳐 났다고, 나는 그 시절을 그렇게 기억한다.
당시 남편과 나는 현지조사를 위해 국경을 넘을 때 달러를 건네면서 ‘관광객’이라고 말했다. 멕시코로 들어갈 때 솔직하게 신원을 드러내는 것이 얼마나 많은 일들을 요구하는지 알게 되면서 체득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우리가 사실은 관광객이 아닐까 의심한다. 학계적인 관광객, 말이다. (academic tourist)
이 책은 1991년 5월에서 8월 사이에 쓰였다. 엉덩이에 땀띠가 날만큼 책상 앞에 앉아있는 동안 얼마나 에스페란자네 식탁을 그리워했는지 모른다. 그 해 9월 출판을 준비했고, 11월 에스페란자에게서 한 장의 편지를 받았다.
“콤마드레, 멕시코에서 나와 보냈던 시간이 헛되지 않기를 바래요. 당신이 멕시코에 다시 올 수 있을 만큼의 돈을 벌게 그 책이 팔렸으면 해요. 내 이야기를 번역할 수 있는 권한은 당신에게 있습니다.”
이 책에 나온 이름은 모두 가명이며, 에스페란자는 그녀 스스로 만든 가명이다. 에스페란자는 스페인어로 희망을 뜻한다.
권용선. 2003 『이성은 신화다. 계몽의 변증법』그린비
정희진. 2002『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또 하나의 문화
레이첼 카슨 Carson, Rachel
2002 『침묵의 봄』김은령 옮김, 에코리브로.
한참 거실에서 디브이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을 보고 있는데 방귀 냄새 킁킁!!
마치 우당탕탕 괴짜 가족의 ‘똥 국회의원’이 뒷마당에 들어와 그 막대한 똥을 싼 것 같았다.
아니 ‘미녀는 괴로워’에 나오는 ‘뚱녀’가 변기에 산처럼 쌓인 자신의 똥을
젖가락으로 끊어서 물을 흘려보내는 장면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뒷마당에는 ‘뚱녀’ 도 ‘똥 국회의원’도 아닌
스컹크가 들어와 방귀를 뿡, 뀌고 간거라고 엄이 설명해줬다.
시멘트만 들어찬 서울에서 스컹크는 커녕
비둘기와 고양이 이외의 동물도 보기 힘들고 흙을 밟아보기도 어렵다.
시멘트로 둘러쌓인 아파트 안에는 바퀴벌레와 모기를 쫓는 그 거시기들과,
물먹는 하마, 뽀드득 아주 야무지게도 닦이는 세정제 뭐 그런 것들이 마구 차 있다.
스컹크가 뒷마당에 와서 방귀 끼고 가는 이 캐나다에 들어앉아 침묵의 봄을 읽으면서,
스컹크 방귀 냄새보다도 독하고 심한 날마다의 생활에 야리꾸리한 감상에 젖었다.
이런 기분은 티벳의 라마승들이
살아있는 작은 모든 것들을 나도 모르는 새에 밟을까봐 봄철에는 발걸음을 되도록 자제한다는 다큐먼터리를 봤을 때 느꼈던 그런 것이랑도 비슷했다.
나는 한번도 바퀴벌레를 죽이는 ‘살충제’를 쓰면서 죄책감을 느껴본 적 없고 살충제 성분이 무엇인지 궁금해 한 적도 없었다.
아주 추상적으로,
너무 많이 쓰고 많이 가지고 많이 탐내고 그러는 새 나도 모르게 환경을 파괴하고
그래도 이 도시생활에서는 어쩔 수 없고,
그러다가 대안 생리대를 쓰거나 텀블러를 들고다니거나 재활용을 똑소리나게 하는 것으로
자기를 위로하고,
또 그러다가 이 쓸데없는 인생을 위해서 이렇게 많은 것들이 쓰여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죄책감이 들고는 그랬다.
존재가 참을 수 없을 만큼 무거웠다.
읽을 때는 그 방만한 증거 자료들에 조금 질리기도 해서 (도대체 살충제는 왜 그렇게 끝이 없이 많고 해악도 그렇게 끝이 없이 많은지)
카슨이 왜 방사능 효능을 들먹이면서 살충제의 해악을 이야기하는지 몰랐는데
후기를 보니 카슨이 비밀 핵실험과 핵비축이라는 장막에 대항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는 말이 나온다.
그러니까 그녀는 미국 육군이 비키니 섬에서 실시한 원자폭탄 실험의 세부적인 내용을 감추려 할 때 연구를 시작해서
쿠바 미사일 위기로 인해 핵전쟁이 일어나려는 찰라에 연구내용을 발표했다. (p 337)
(>///< 언니 최고로 멋져!!)
그녀는 박사학위를 갖지 않았다는 점과
어떤 단체나 기관에도 가입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거의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살충제만큼 독한 화학살충제 기업들과 그에 연루된 ‘박사 학위’를 가진 과학자들의 공격에 많이도 당했다.
그녀에게 가장 불리하게 작용했던 사실은 ‘대중을 위해 글을 쓴 과학자’라는 점과 ‘여성’이라는 점이었다. (p339)
과학자들과 저널리스트들과 평론가들은 카슨을 ‘감정을 호소하는 단어’를 사용하는 ‘히스테릭한 여성’이며 지나치게 섬세한 본성의 소유자이고 그녀가 쓴 책은 ‘자신이 저주하는 살충제보다 더 독하다’고 말했다.(p 339)
의학전문 평론가인 빈은(William B.Bean)은
“<<침묵의 봄>>을 읽으면 여성과 논쟁을 벌여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라고 말했다. 전 농무부 장관은 공식적으로 “왜 아이도 없는 독신녀가 유전학에 그렇게 관심이 많은가”라는 의문을 표현하기도 했다.(p340)
이런 놈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너무 받아서 때
이른 나이에 암에 걸리고 회복하지 못한 것이 아닌라는 생각에 분노 게이지 부르르.
"목축업자에게는 초원을 찾아다닐 권리가 있고
나무꾼에게는 벌목을 할 권리가 있듯이
누군가에게 야생들꽃을 즐기는 것이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권리이기도 하다. (p94)"
책을 보는 내내 한 가지 걸렸던 점은
“인간은 도자기 진열장에 들어간 코끼리처럼 자연을 짓밟고 있다’는 사실에 민감했던
그녀의 책에 동물 실험의 결과들이 너무 태연자약하게 나와 있었다는 점이다.
실험동물들에 대해서 ‘죽음에도 자비를’ 라는 입장과 ‘실험동물’ 자체에 대한 의문이 켜져가고 있는 시점에서 살충제 해악을 설명하기 위해 동원된 그 많은 실험동물들을 생각하니
‘짚신벌레 몇 단 계 위에 있는’ 인간이 과연 이래도 되는 것인지
또 존재가 한없이 무거워져버렸다.
(물론 카슨이 동물실험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대해서는 책에 나와있지 않다.
그녀는 그저 동물실험 결과들을 들이대면서 살충제의 해악을 설명했다.)
제인 구달처럼 늙고 싶다
도덕적으로 사는 것이 ‘7박 8일 반납’ 비디오를 보는 것과 같은 기분이나
고리짝 장롱 냄새를 주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도덕적으로 산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누리는 가장 매력적인 일, 이라는 것,
그래서 나는 올 해 크리스마스 케익을 보며 제인 구달처럼 늙기를 빌었다.
읽는 동안 마음에 찌르르, 하는 느낌이 든다.
진보넷 블로그에서 ‘동지들, 내일 시위에 따숩게 입고 나오세요” 의 문구를 봤을 때 들었던 그런 마음.
그러니까 나는 그런 마음들과 그런 책들이 너무 좋은데, 이 책도 그렇다.
이 책의 인세와 판매수익금 전액은 ‘기적의 도서관’ 건립 기금으로 쓰이므로,
이 책을 사서 보는 것도 제인 구달처럼 ‘착하게’ 늙어가는데 보탬이 되겠습니다. ^0^
<책 속>
‘고상한 유인원’ 침팬지는 ‘고상한’ 미개인 만큼이나 신화에 불과하다.
잔인한 집단간 공격과 새끼 살해의 사례들, 귀염둥이 침팬지들이 보여준 동족 잡아먹기, 공격 당한 침팬지의 흐르는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를 받아 마시는 모습 등등,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느낌표 선정 도서에 이 정도 씬은 나와줘야지’ 의 찐한 장면들을 보여준다.
그런 장면들은 <이기적인 유전자>를 쓴 리처드 도킨스조차
“심한 고통에 처하여 울고 있는 누군가를 본다면 대부분은 가서 그들을 부축하고 위로할 겁니다. …
그래서 우리는 다윈 식의 과거를 넘어설 수 있다는 것 역시 알고 있습니다”
고 말하게 만든다.
제인 구달은
‘나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안겨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사랑과 연민과 자기 희생의 자질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잔인하고 악해질 수 있다. 누구도 이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행동 뿐만 아니라 말을 통해서도 서로를 고문하고 싸우고 죽인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가장 고결하고 관대하며 영웅적인 행동들을 할 수 있는 능력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더 이상의 발췌는 금물, 그저 '착한 동화책'처럼만 보이므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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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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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거 너무 슬프다.. ㅠ.ㅠ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