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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naslated woman


 

Women's Studies/ Anthropology/ South America

 

Ruth Beher. 1993 Translated woman: crossing the boder with Esperanza’s story. Beacon press.

 

 >> 번역은 반역이다

   오래전 이탈리아 사람들은 번역은 반역이다”이라는 말로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바꾸어 옮기는 일의 난감함을 토로했다. (권용선2003:5) 이 난감함은 언어들 간의 변환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문자로 쓰여진 텍스트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일, 오감을 통해 감각되는 것을 지각하는 일, 대화를 나누고 정서를 교감하는 일 또한 번역(translation)에 포함된다.(Ibid., 5) 하나의 문장을 읽어내는 데에 무수한 각주와 해석과 설명이 동원되는 것처럼, 인간은 누구나 외부와 만날 때 그 나름의 경험과 지식과 취향을 개입시킨다. 공통감각은 상상의 산물일 뿐이다. 그래서 번역은, 서로 다른 것들 사이에서 빚어지는 불통과 불화의 선 뿐만 아니라 소통과 화해의 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반역의 작업이다. (Ibid., 5) 

 

이 책은 에스페란자와 베하가 나누었던 대화, 번역, 그리고 반역에 대한 글이다.



   I. 에스페란자 이야기, 그녀의 구술사

 

   내가 동네 아줌마들에게 처음 들었던 에스페란자는 남편의 눈을 멀게 할 만큼 독하고 사납고 거칠고, 몰염치의 아성으로 굳어져 있는 그런 아줌마였다. 동네 사람들은 그녀를 '마녀'라고 불렀다.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의 그림 속에 나온 그 인디언 여자를 떠올렸다.

   우리는 1985년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의 작고 허름한 집에서 나는 민트향의 냄새를 맡으며 역시 작고 허름한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말이다. 때로는 지겹고 잠이 쏟아지고 황당해서 후딱 깨기도하면서 수많은 밤을, 몇 년간 지속되었던(1990년 초까지) 그 무수한 밤을 그렇게 지새웠다. 에스페란자는 내가 얼마나 열심히 귀 기울이고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

 

   귀를 기울인다고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진짜로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인 것이다.

 

   에스페란자의 이야기는, 말들은 끊어지고 반복된다. 처음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컬러퍼플(The Color Purple)의 주인공 씰리를 떠올렸다.

   "아빠는 엄마를 마구 팼어. 다섯 살 땐가 여섯 살 땐가의 기억인데 우리들 보는 앞에서 엄마 머리채를 끌고나와 마구 발로 찼어. 엄마를 마체테(machete)로 패고 나서 마마가 널 부러지면 우리들을 팼어. 아빠가 때리고 나서 집을 나가면 마마는 우리들에게 이야기를 늘어놓았어.

나는 마마가 겪었던 삶을 기억해, 그것은 바로 인디언 여자들의 깜깜한 삶이었어. (black life)"

 

   에스페란자 역시 인디언 여자들의 깜깜한 삶을 살게 된다.

 "나는 울 엄마처럼 남편한테 마체테로 머리를 맞았어. 그 놈은 취해서 울 엄마를 남편도 버리고 도망간 창녀 같은 년, 너도 니 엄마랑 똑 같은 년이라고 했어맞는 순간 핫, 했어. 피가 바닥으로 흘렀어. 아이를 꼭 안고 있었어. 그 때 나는 울었어. 그 때 맞은 곳이 여전히 뜨거워. 아직도 코라제(coraje, 화)를 느끼면 그 곳이 불 붙는 것처럼 아파, 너무 아파."  나는 에스페란자의 머리와 이마에 여전히 남아있는 흉터를 기억한다.

 

   II. Literary Wetback (미국에 불법입국하는 멕시코 인을 경멸적으로 칭하는 용어)

 

    II-1. 실제세계 

   

   “재현은 재현되는 주체에 대한 폭력을 포함하는 작업이다.” 

    사이드(Said)

   

   멕시코의 작은 집에서 풍기는 민트 향의 냄새를 맡으며 식탁 넘어 손을 꼽을 수 없을 만큼의 밤을 보냈지만, 우리는 알고 있었다. 자본주의의 신식민주의가 만들어 낸 국제적 노동 분업 안에서, 그 정치적 자장 안에서 우리는 한치도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 에스페란자도,나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문화를 번역하는 작업은 세 살난 내 아들 가브리엘이 멕시코의 다섯 살 배기 동네 애들보다 더 발육상태가 좋다는 현실에서 미끄러질 수 없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행상 다니면서 이것 저것 얻어먹고 남긴 음식 받아오는 나를 보고 거지라고 해. 하지만 자기, 내가 너한테서 뭘 빼앗았어?"

   그녀의 행상을 따라 나선 날 아침, 에스페란자는 내게 이렇게 물었다. 그 날 거리를 나란히 걷는 우리들만큼 기묘하게 보이는 것도 없었다. 레이밴 선글라스에 카메라 가방을 들고 스웨터를 입은 미국여성과 인디언 복장에 앞치마를 두르고 어깨에 넝마 같은 바구니를 이고 가는 에스페란자. 사람들은 우리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우리가 에스페란자네 식탁에서 백 만번의 대화를 하고 그 시간을 공유한다고 해도 여기는 실제세계였다. 인종적, 계급적 경계가 우리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우리는 단지 함께 나란히 걷는 것만으로도 그 거리에서 조용히 경계를 넘나들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환상일 것이다. 그녀의 이야기는 나를 타고 여기저기의 경계를 넘겠지만 실제의 그녀는 국경선에서 저지당할 것이다. 혹은 고작 해야 미국의 미등록 불법가내 노동자로 비참하게 국경을 넘어야 할 것이다. 에스페란자는 책을 통해 자신(self)이 고스란히 드러나게 될 저기에서 멕시코 사람들이 얼마나 혹독하게 취급당하고 또 얼마나 비참하게 삶을 살고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었던 수많은 밤, 아직도 가물가물해지지 않는 기억 속의 그 밤들을 통해 경계를 넘었다고 믿었다면, 에스페란자, 그것은 기만일까?

 

   II-2. 여기, 그리고 저기

 

   “동네 여자들한테는 말하지마에스페란자가 간곡히 이야기했다.

   “저 곳 (over there)에서만 영어로 출판될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저 곳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 것 같아요?”  얼떨결에 에스페란자의 의견을 묻는다.

   “재미없을 거야, 별로 와 닿는 이야기가 아니야 그런 말이 있잖아.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심장이 있어도 못 느끼는 거 (eyes that don’t see, heart that doesn’t feel)”

   “왜 동네 아줌마들한테 그렇게 비밀로 해야 해요?”

  “나는 멕시코 사람들이 미국에 건너가 몸을 팔아 먹고 사는 것처럼, 여기서 말을 판 거야. 여기서는 어디서도 쓸데 없는 말들을 풀어서, 이런 이야기 거기서는 못 구하는 거잖아. 그런 말들을 판 거야.”

 

   III-3. 진실 혹은 거짓

 

   에스페란자가 있는 사실 그대로를 이야기 했는지는 나도 모르고 며느리도 모른다. 아마 극적인 사건을 더 강조했을 것이고 자신의 섹슈얼리티 같은 민감한 문제는 두루뭉술하게 넘어갔으며 어떤 사건은 부풀렸을 수도 있다. 그녀는 자신의 섹슈얼리티, 관계, 욕망 보다는 그녀의 고통, 그녀가 당한 물리적 폭력, 그리고 그녀의 분노, 종교적 관념이나 의례 등이 더 말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이야기는 이미 그녀에  의해 한 꺼풀 걸러진 삶에 관한 것이다.

   에누리없이 말하자면, 삶에 진실된버전 같은 것은 없다. (there is no true verstion of a life, after all) 그저 삶에 대해서, 삶의 주변을 서성이는 이야기만이 존재할 뿐이다.(There are only stories told about and around a life)

    내가 에스페란자 이야기를 믿느냐고? 내 교육적 배경을 업고서 책이 출간된다면 그녀의 이야기는 진짜가 되겠지. 하지만 이 이야기는 그녀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에서는 묻혀질 것이다. 에스페란자와 나는 동네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 사람들이 잠든 후 그녀의 작은 식탁에 모였었다. 그렇다면 그녀가 나에게 해 준 이야기는 다른세상의 사람들에게 보여지기위한 버전의 이야기일 뿐인가?

   에스페란자의 이야기는 생애사(life history) 인가 그저 이야기(life story) 인가? 논픽션인가 아니며 픽션에 해당하는가?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스페인어를 그대로 사용해 historia 라고 칭할 것이다. Historia는 히스토리와 스토리의 경계를 유동적으로 넘나드는 단어이다.

 

   III-4. 보이는 대상, 보는 주체 (타자화)

 

   페미니즘의 이론화는 분명히 민족지적 기술을 재고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의의가 있다. 그것은 정체성이나 자기/타자 관계의 역사적, 정치적인 구축을 문제로 삼는다. (마커스)

 

   아더 문비 (Arthur Munby)라는 빅토리아 시대의 사람은 자신의 하녀였던 한나쿨윅 (Hannah Cullwick)천한일들을 하는 것을 지켜보고 그녀의 사진을 찍고 그녀의 일기를 읽어보는 것을 즐겼다. 그녀는 일기장에 자신의 이야기를 적었는데 이는 그의 주인의 뜻에 따라 쓰기 시작한 것이었다.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문자가 없는여성들의 이야기를 구술사라는 이름으로 정리해갔지만 그들이 우리 시선(gaze)의 대상으로 전락했다는 것, 그들이 기꺼이 보여지는 주체로서 역할 했다는 사실은 많이 간과된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아더 문비의 작업을 도돌이표하고 있는 것일까?

  로잘도는(Renato Rosaldo) 인류학자들은 생애사를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것으로 상정하는 경향이 있다고 비판했다. 나는 그의 말을 곱씹으며, ‘문자없는 여성들 앞에 녹음기를 들이대면서 그들의 삶에 대해서 진짜 이야기를 해 달라고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지를 물었다. 인간이 고통을 느끼고 표현하고 인정하고 공감하는 행위는 그 사회의 권력관계로부터 자유롭지 않다.(정희진 2002:54) 고통을 보는 작업, 그들의 고통을 느끼는 작업, 그리고 자기와 타자 관계의 구축하는 작업은 보이는 대상과 보는 주체 사이의 정치학을 포함한다.

 

   더 사랑하는 사람처럼 보여지는사람이 더 상처받는다.

   그래서 타자화되는 존재들은 상처 받기 쉬운 위치에 놓이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주체는 견고한 위치에서 그들을 재단한다. 나는 바라보는 민족지 학자이고 에스페란자는 나의 시선에 의해서 타자화되는 존재이다. 나는 내 콤마드레, 에스페란자의 historia를 내게 반사해 내 자신의 삶으로 돌아오는 통로를 만들었다.

   이야기를 통해 다른 여성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 자아와 타아와 섞인다는 것은, 말만큼 멋진 작업은 아니다. 특히 다른 세계에 속한 여성들이 함께 작업하는 것은 그만큼의 불협화음을 포함하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인류학은 이제 온전히 이러한 불협화음을 껴안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이름없는 페미니즘과 너무 이름을 가진 나의 페미니즘 사이에서, 나는 이제 에스페란자가 아니라 나를 번역(translating)한다.

 

   III. 에스페란자, 희망

  

    그 시절, 온갖 매체에서 베를린 장면이 무너지고 있었다.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건너와 자료를 정리하고 있을 때, 사회주의 국가에 살던 사람들이 서구의 자동차와 아파트를 사탕 가게에서 알록달록한 사탕들을 쳐다보는 아이들처럼 바라보는 사진이 뉴욕타임즈를 장식했다. 하지만 멕시코에서는 국경을 넘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미국에서 사용된 일회용 기저귀가 시장에서 새 기저귀로 팔리고, 사람들은 쉬쉬하면서 저기에서 온 산업페기물이 싸인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살아있는 시체’ (living dead)라고 불렀다. 멕시코와 미국의 국경선이 전쟁터처럼 되어가고 있었고, 불법으로 미국에 침입한 외부인(illegal aliens)에 대한 기사가 넘쳐 났다고, 나는 그 시절을 그렇게 기억한다.

   당시 남편과 나는 현지조사를 위해 국경을 넘을 때 달러를 건네면서 관광객이라고 말했다. 멕시코로 들어갈 때 솔직하게 신원을 드러내는 것이 얼마나 많은 일들을 요구하는지 알게 되면서 체득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우리가 사실은 관광객이 아닐까 의심한다. 학계적인 관광객, 말이다. (academic tourist)

 

   이 책은 1991 5월에서 8월 사이에 쓰였다. 엉덩이에 땀띠가 날만큼 책상 앞에 앉아있는 동안 얼마나 에스페란자네 식탁을 그리워했는지 모른다. 그 해 9월 출판을 준비했고, 11월 에스페란자에게서 한 장의 편지를 받았다.

콤마드레, 멕시코에서 나와 보냈던 시간이 헛되지 않기를 바래요. 당신이 멕시코에 다시 올 수 있을 만큼의 돈을 벌게 그 책이 팔렸으면 해요. 내 이야기를 번역할 수 있는 권한은 당신에게 있습니다.”

 

   부디 이 이야기가 불법 외부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의 목소리로 읽혀지길 바란다. 또한 멕시코 남성들의 '원초적 가부장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그녀의 삶이 읽히지 않기를 바란다. 에스페란자가 스스로 말하고 있듯이, 자신보다 더 약한 존재인 여성과 아이들 이외에는 어떤 것도 손에 쥘 수 없었던, 절망적인 멕시코 하층 계급 남성들의 '더 약한 자를 향한 폭력'이 구조적인 폭력 속에서 이해될 수 있기를 바란다. 비록 멕시코 남성들의 폭력이 정당화될 수는 없지만 말이다.

 

이 책에 나온 이름은 모두 가명이며, 에스페란자는 그녀 스스로 만든 가명이다. 에스페란자는 스페인어로 희망을 뜻한다.

 

권용선. 2003 이성은 신화다. 계몽의 변증법』그린비

정희진. 2002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또 하나의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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