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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키운다는 것

         

         진보넷 블로그 글들을 보니 엄마가 되는 것, 아이를 키우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읽으면 좀 가슴이 아프다. 나는 아직 아이도 없고 아이를 낳을 생각도 없으니 애송이들아라는 말을 듣겠지만 (아 노래방 가고 잡다)  재작년에 여섯날 난 성현이랑 싱글맘 오정이랑 함께 살면서 한 아이를 기른다는 것을 곁눈으로 지켜보았다. 그리고 나는 알게 되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인간이 있다는 것을.

 

          자기 손으로 자기 똥꼬를 닦을 수 있는 인간과 남이 똥꼬를 닦아줘야 하는 인간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 당시 여섯살에 접어든 성현이는 거의 내 몸무게의 절반이 나가는 다 커부렀네는 느낌을 주는 아이였는데도 불구하고 똥 싸고 나서 화장실에서 엄마, 엄마를 불렀다. 나는 부모가, 특히 엄마가 내 기저귀를 빨며 날 키운지는 알았지만 저렇게 덜컥 클 때까지 똥꼬를 닦아주면서 키운지는 몰랐다.

         

          사람을 키운다는 것의 의미, 한 사람이 된다는 의미가 그렇게 절절할 수가 없었다.

 

          박민규의 말대로 다음 세기에는 이 세계를 찾아온 모든 인간들을 따뜻하게 대해 줘야지라는 경건한 마음이 들어드랬다. 모두들 똥꼬를 제 손으로 닦을 때까지 그 무수한 시간들을 누군가의 헌신으로 채운 존재들이니까 말이다. 누군가는 많이 힘들었을 테니까, too much work에 힘들었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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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 친구들이 밤늦도록 술을 마시더니 단숨에 아이들을 키우는 화제로 슥슥 이동하였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자식, 뭐 이런 식으로 아이들을 대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자기 새끼들을 대하는 자세는 어쩔 때 내게 유치하게도 질투심을 유발할 정도였는데 (나도 사랑해줘!) 그런 그들이 이젠 지쳤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Too much work,라고 영어로 이야기했는데 그네들 아이들은 고등학생, 대학생이라서 별로 손이 갈 것이 없고 상대적으로 한국보다 상황이 좋은 캐나다 사람들임에도 그랬다. 글렌 역시 막내 딸이 19살에 접어들었지만 대학을 멀리 가서 집에 자주 오지 말라고 딸에게 말했다고, 아직도 돈들고 신경 쓰는 일이 너무 많이 남아서 힘들다, 라고 말했다. 그냥 이 사람들이 내가 아는 그 사람들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드는 밤이었고,

그리고, 좀 짠, 했다.

          내 하우스메이트였던 휴지는 논문을 써야함에도 불구하고, 또 휴지통과의 끈끈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캐나다에 있는 아달과 1년을 보내기 위해서 올 6월에 한국을 떴다. 지난번 하우스메이트였던 오정은 물론 자기 욕심도 있었겠지만 아달 성현이에게 자기가 겪은 고생을 안 하게 해주고 싶다며 8살난 그 놈 손을 잡고 뉴질랜드로 어학연수를 갔다. 나랑 함께 살 때 오정은 그런 말을 했었다. 아무리 다 잡으려 해도 이혼한 것 때문에 성현이에게 상처준 것 같아 늘 마음에 걸린다고 말이다. 아마 영어를 솰라솰라 하면서 얻을 수 있는 기회들을 성현이에게 주는 것으로서 좀 위로받고 싶었는지 모른다. (쳇, 돈도 없음시롱 방값 보증금 빼서 가면 어쩌란거야??) 

          언젠가 내 친구, 씨앗이 잡지사에서 편집일을 하다가 아이를 낳고 일을 잠시 쉬고 있는 선배를 찾아갔던 이야기를 했다. 나름 평등 결혼이런 것을 하고 나름 의식있는 부부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낳고 나서 그 언니를 공적인 자리에서 찾을 수가 없어졌다. 씨앗이 그 집으로 찾아갔던 날,  언니는 씨앗을 배웅하면서 유모차에 아이를 태워 데리고 나왔다. 그리고서는  집 밖에 나온 것이 오늘 처음이야, 라고 했다. 씨앗과 헤어지는 순간, 이야기를 하는 순간, 서로 눈을 마주치며 웃는 순간, 순간순간 그녀는 유모차의 손잡이를 잡고 앞 뒤로 천천히 흔들고 있었다.

 

          진보넷 블로그 글들을 보니 엄마가 되는 것, 아이를 키우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읽으면 좀 가슴이 아프다. 나는 아직 아이도 없고 아이를 낳을 생각도 없으니 애송이들아라는 말을 듣겠지만 재작년에 성현이랑 오정이랑 함께 살면서 한 아이를 기른다는 것을 곁눈으로 지켜보았다. 그리고 나는 알게 되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인간이 있다는 것을.

 

          자기 손으로 자기 똥꼬를 닦을 수 있는 인간과 남이 똥꼬를 닦아줘야 하는 인간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 당시 여섯살에 접어든 성현이는 거의 내 몸무게의 절반이 나가는 다 커부렀네는 느낌을 주는 아이였는데도 불구하고 똥 싸고 나서 화장실에서 엄마, 엄마를 불렀다. 나는 부모가, 특히 엄마가 내 기저귀를 빨며 날 키운지는 알았지만 저렇게 덜컥 클 때까지 똥꼬를 닦아주면서 키운지는 몰랐다.

         

          사람을 키운다는 것의 의미, 한 사람이 된다는 의미가 너무 무거웠다.

 

          박민규의 말대로 다음 세기에는 이 세계를 찾아온 모든 인간들을 따뜻하게 대해 줘야지라는 경건한 마음이 들어드랬다. 모두들 똥꼬를 제 손으로 닦을 때까지 그 무수한 시간들을 누군가의 헌신으로 채운 존재들이니까 말이다. 누군가는 많이 힘들었을 테니까, too much work에 힘들었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 노동이 한 사람의 여성이나 한 쌍의 핵가족 부부에게만 전가되는 한 사람들은 존재들을 키워가는 것에 진절머리를 치게 된다. 그건 ‘4인용 식탁에 나오는 장면처럼 젖 달라고 기어오는 아이들이 그악스럽게 느껴지면서 자기 새끼를 베란다 아래로 떨어뜨릴만한 고통일지 모른다. 그 뭐신긴가의 말처럼 (아프리카 속담에서 왔다고 했던가, 암튼 고들리에 책에서 봤으)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한 마을이 필요하다’.

 

 

(이렇게 알았으면서도  함께 살때 성현이 구박하고 혼내고 그랬던 것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네 그랴 -_-;;;; 뉴질랜드에서 잘 지내라옹, 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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