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토의 상상, 개토가 쓴 글, 그리고 찍은 그림들.'에 해당되는 글 262건

  1. 활기 2007/01/03
  2. 옹알이 2007/01/03
  3. 긍정 (2) 2007/01/03
  4. 글쓰기 2007/01/03
  5. 희귀종 앵무새의 광기없는 혁명 2007/01/01
  6. 달콤한 인생 2006/12/28
  7. 죽음과 그녀와 나 (7) 2006/12/27
  8. 오해 (3) 2006/12/26
  9. 내 생각 2006/12/26
  10. 문화적 저항 (3) 2006/12/26

활기

from 책에 대해 2007/01/03 12:46

내가 만약 즐거움에 따라 텍스트를 평가하기로 한다면, 이 책은 좋고 저 책은 나쁘다라는 말은 할 수 없다. 거기에는 수상자 목록도 <비평>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비평은 항상 전략적인 목적, 사회적인 효용성, 또 대개는 상상적인 포장만을 연루시키기 때문이다. 나는 텍스트가 이것은 지나치고 저것은 충분치 않다는 식의, 그런 규범적인 술어의 유희에 가담할 만큼 완벽해질 수 있다고는 측정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다. 텍스트(이것은 노래를 부르는 목소리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는 내게 있어 전혀 형용사적인 것이 아닌 바로 이거야! 혹은 내게는 바로 이거야! 라는 판단만을 나타내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내게는>이라는 말은, 주관적인 것도 실존적인 것도 아닌 니체적인 것이다(...[결국 그것은 항상 똑같은 질문이다. 이 내게는이란 것이 과연 무엇일까라는...?] )

 

텍스트의 활기는(그것 없이는 요컨대 텍스트가 존재하지 않을), 그 즐김에의 의지일 것이다.

텍스트가 요구를 초과하고, 옹알이를 극복하며, 이데올로기와 상상계가 물밀듯이 들이닥치는 언어의 문들인 형용사들의 사슬을 쳐부수고 넘쳐흐르는 바로 거기에서.

 

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 중 '활기' 중(볼딕은 저자)

 

 

 

누구나 뭔가를 좋아하거나 사랑할 때, 그렇게 말한다. 내게는 이라고.

보르헤스는 [불한당들의 세계사]를 S.D에게 헌정하며,

 

.... 나는 여하튼 잃고 있지 않은 내 자신의 핵 - 언어로 다루어질 수 없고, 꿈과 교환될 수 없고,

그리고 시간과, 환희와, 불행에 범접당하지 않은 가슴 깊은 곳 - 을 그녀에게 바친다.

 

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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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03 12:46 2007/01/03 12:46

옹알이

from 책에 대해 2007/01/03 12:37

그러므로 모든 작가는 이렇게 말하리라. 미치광이는 될 수 없으며, 감히 건강하다고 말하지는 못하며, 그래서 신경증에 걸린 것이라고.

당신이 쓰고 있는 텍스트는 그것이 나를 욕망하고 잇다는 증거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 증거는 존재한다. 그것은 글쓰기이다. 글쓰기는 언어즐김의 학문이며, 그것의 카마수트라이다(이 학문에는 다만 글쓰기라는 개론서만이 존재한다).

 

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 중 '옹알이'  중

 

 

 

 

바르트의 글 속에 새로운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새롭게 자극하여,

나는 그의 글쓰기를 통해 아주 천천히 오르가즘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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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03 12:37 2007/01/03 12:37

긍정

from 책에 대해 2007/01/03 12:29

텍스트의 즐거움

 

내 삶의 유일한 열정은 공포였다 - 홉스

 

긍정(Affirmation)

텍스트의 즐거움, 그것은 베이컨의 가상장치처럼 결코 변명하지 않으며, 결코 설명하지 않는 것 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그것은 결코 아무것도 부정하지 않는다. [나는 내 시선을 돌릴 것이다. 이것이 이제부터는 내 유일한 부정이 될 것이다.]

 

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 맨 첫페이지(볼딕은 저자에 의한 것)

 

 

 

 

훗, 웃음이 나왔다. 97년에 샀던 이 책에,

며칠전 내가 이를 앙다물고 썼던 문장이 그대로 들어있다.

 

정치적이거나, 문학적이거나 둘 중 하나만 가능하다.

아무것도 부정하지 않는 나는 문학적 시선을 견지하는 수밖에.

 

진보블로그에서의 내 정체성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아이러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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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03 12:29 2007/01/03 12:29

글쓰기

from 책에 대해 2007/01/03 12:14

글쓰기란 반대로 언어행위를 넘어서 뿌리내리고 있다. 글쓰기는 하나의 선(line)이 아니라 씨앗처럼 전개되는 것이다. 글쓰기는 본질을 나타내며, 몰래 위협받고 있다. 글쓰기는 반(anti) 의사소통적이며 내성적이다. ...... 글쓰기 안에는 언어행위에 낯선 '상황'이 있다. 글쓰기에는 이미 더 이상 언어행위의 시선이 아닌 의도의 시선이 있다. 이 시선은 물론 언어행위에 대한 하나의 열정일 수 있다. 문학적 글쓰기에서처럼 말이다. 이시선은 또한 처벌의 위협일 수도 있다. 정치적 글쓰기에서처럼 말이다.....

 

바르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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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03 12:14 2007/01/03 12:14

나는 어렸을 때 내가 예수라고 생각했다.

내 몸에는 세개의 못자국이 있다.

손과 발은 아니고, 오른쪽 다리에만 세 개다.

깁스를 고정하기 위해 박았던 못들이다.

 

나는 길거리에서 강간을 당하기도 하고

아버지에게 죽기 전까지 두들겨 맞아보기도 하고

내가 지지 않은 빚을 갚기 위해 학업을 중단했다.

나는 온갖 시험에 놓였다.

 

그러고도 모두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두를 위해 내가 이 모든 것을 겪는 거야.

 

 

그런데, 나는 완벽한 신의 아들이 아니다.

나는 항상 뭔가가 부족한 인간들의 딸이다.

 

서른을 넘긴 뒤로는 정체성의 혼란을 한동안 느꼈다.

예수가 서른을 넘긴 뒤 곧 죽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더 나이가 들었다면 아마도 스스로가 예수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시달렸을 것이다.

 

지저스인지, 예수스인지, 예수인지

어쨌든 나는 그와는 전혀 상관없는 평범한 사람이다.

 

나는 평범한 남들처럼 살짝 미쳐있다.

내 블로그에 누군가 덧글을 남겼다.

"미친년, 밤길 조심해."

훗, "미친색희, 올테면 와보라지. 자지를 물어뜯어주겠어.'

미친 색희는 결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미친 색희.

 

대략 10년 전쯤에,

나는 서울에 있었다.

서울에서 희귀종 앵무새들을 쫒아다니고 있었다.

 

밤이면 잠이 오지 않았다.

희귀종 앵무새들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가까스로 잠이 들어 아침이면 기분나쁜 상태로 깨어 또 생각했다.

 

나는 그들을 10년째 쫒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한때는 먼곳으로 도망을 가보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은 돌아오고 말았다.

 

그들은 희귀종의 멸종위기 앵무새들이다.

얼핏, 다른 앵무새들보다 수가 너무나 적고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 속기 쉽지만,

결국 그들도 앵무새들이다.

 

나는 "닮은 것"들을 혐오한다. 그들은, 서로 매우 닮았다.

 

사실은, 그들은 희귀종이고 멸종위기이고 아름답다.

닮은 게 뭐 대수인가.

나도 될 수만 있다면 그들 중 하나가 되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앵무새가 아니다.

될 수 없는 것은 될 수 없는 것이다.

 

"참 멋지구나. 나는 부끄러워..."

 

앵무새가 되어보려 했던 적도 많았다.

아니, 사실 매일처럼 그들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정말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점잖고 잘 날지도 않는다.

조용조용 서로의 말을 옮긴다.

싸움이 날 일도 없다.

어쩌다 잘못 만나 싸움이 날 듯도 하지만

그들은 언제나 처럼 조용하게 문제를 해결한다.

 

내가 10년동안 관찰한 바에 의하면

그들은 완전히 미쳐있다.

그런데도 어찌나 자신들을 잘 포장하는지

남들도 다 그들이 이성적 존재라고 믿게 생겼다.

누구보다 미쳐서 살면서도, 안그런 척 하는데 도가 텄다.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내가 만든 감옥에 갇혀

앵무새들을 지켜보고 있다.

 

감옥은 탈출을 위해 존재하는 것.

탈출 계획을 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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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01 13:11 2007/01/01 13:11

달콤한 인생

from 영화에 대해 2006/12/28 12:04

내 안에 느와르가 있다.

 

완전히 미친 것들, 나는 그런 것들의 질서를 좋아한다.

 

[달콤한 인생]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감독은 김지운, 주연은 이병헌.

내가 이병헌을 좋아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병헌이 그렇게 다양한 표정을 가졌을 줄은 정말 몰랐는데

이병헌이 느와르에 어울릴 줄은 정말 정말 몰랐었다.

 

느와르에 대화란 없다.

미친 것들만 있을 뿐이다.

미치는 데는 이유도 없다.

느와르의 주인공은 햄릿처럼 무기력하게 주어진 세계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선택은 없다.

대화와 소통을 통한 문제해결도 없다.

한번 미치면 끝까지 가는 수 밖에 없다.

 

처절하고 폭력적이고 끔찍할 수록 아름답다.

내 안에 은밀한 그 욕망.

 

마지막 장면까지,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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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28 12:04 2006/12/28 12:04

죽음과 그녀와 나

from 책에 대해 2006/12/27 01:18

카와구치씨는 정말 멋지구나...하고 후기를 읽으면서 생각한다.

 

예전에,

새벽에 술먹고

길거리에서 늘어놓고 파는 만화책들 틈에서

우연히 발견해가지고 지갑을 탈탈 털어 샀던 [죽음과 그녀와 나]

 

있는 돈 다 털었더니 16권쯤 살 수 있어서

죽음과 그녀와 나 10권이랑 같이 6권의 다른 책도 구입해서,

16권을 들고 낑낑대며 히죽거리며 완전 취해서 집에 들어왔더랬다.

 

쿡쿡...6권은 집에 있던 책이었다지...그나마 완결도 되지 않은...

 

이런 느낌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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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27 01:18 2006/12/27 01:18

오해

from 책에 대해 2006/12/26 22:09

부르디외에 대해서 오해가 있는 것 같아,

결국 그렇게 써버린 내가 문제라서...

그게 계속 걸린다.

 

 

"즉 패러디, 광대극, 희화처럼 대상을 깎아 내리거나, 혹은 속어에서처럼 질을 저하시키는

전략으로 승화의 전략에 대응하고,

지배집단이 그들의 숭고성을 투사하고 인식하는 모든 '가치관'을

뒤죽박죽 뒤섞어 놓으려고 외설과 분뇨담을 사용하면서,

민중의 상상력은 차이를 철저하게 부정하고 구별짓기를 비웃으며

카니발의 놀이처럼 타자와의 구별을 낳는 영혼의 쾌락을,

누구에게나 공통된 식욕과 성욕의 만족으로 환원시킨다."

 

-구별짓기 중에서 -

 

 

본질적으로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믿음,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읽었다.

정말로 개인적인 반성이었다.

 

한 바퀴를 빙 돌아서 기껏...

 

이렇게 말이 꼬이고 안나올 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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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26 22:09 2006/12/26 22:09

내 생각

from 책에 대해 2006/12/26 18:56

개토님의 [문화적 저항] 에 관련된 글.

사실은,

아주 개인적인 의미에서 구별짓기를 다시 읽어야 했을 뿐이었다.

해묵은 습관이 어디선가 고개를 쳐들어

처음 쓰려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쓰고 말았다.

다시 원래 쓰려던걸 쓰려다가

먼저 덧글들을 읽어버렸는데, 생각의 가지가 가지를 쳐서

그리고는 길을 잃었다.

 

생각보다 블로깅은 어렵다.

 

블로그를 사용한다는 것은 소통을 원한다는 적극적 표현일텐데,

소통이라는 것을 믿는다는 증거와도 같은 것일텐데

 

습관적으로 극단적 해석을 해버리게 된다...

 

내가 옳다는 믿음에 대한 반성,

어쨌든 그걸 위해 구별짓기를 읽었던 거라는 점을 기억해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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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26 18:56 2006/12/26 18:56

문화적 저항

from 책에 대해 2006/12/26 17:53

개토님의 [구별짓기] 에 관련된 글.

 

이 책의 연구에서 요구하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음을 의미한다.

즉 의도적 건망증이라고도 말해지는 것에 의하여 문화에 관한 온갖 교양화된 담론 전체를

기꺼이 포기하는 것이고, 그것에 의해서, 단순히 (기성질서에의) 승인이라는

과시적 기호에 의해 확보되는 이익을 포기하는 것만이 아니라

교양에 따른 즐거움이라는 보다 내밀한 이익의 포기도 함축한다.

 

부르디외, 구별짓기 중에서

 

 

 

참으로 무서운 문장이다.

[구별짓기]를 읽으면, 문화적 저항의 한계를 보게 된다.

문화적 저항은 자본주의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는 슬픈 이야기.

 

경제자본은 없지만 문화자본을 풍족하게 맛보고 자라난 '문화귀족'으로서

그러한 자신을 자각하고 있는 '문화귀족'으로서,

 

페미니즘이 '문화귀족'들 사이에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으면서

자본주의에 무기력하게 이용당하는 모습,

저항의 음악이 가장 잘 팔리는 음반이 되어 부르주아지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내고

'~이즘'들이 그저 멋지구리한 아이콘들로 자리잡은 것을 볼때

몇몇 지식인들만이 전유하는 생활양식으로서의 저항을 볼때

 

나 스스로의 저항이 아주 개인적이고 부르주아적인 욕망의 발현에 불과했다는 것을

마주보게 될때

'본질적인 예술인'인 양 아무것도 책임지려 하지 않고

30년동안 읽어오고 보아온 문화들에 의해 만들어진 에토스를 내 것인양 표현할 때

 

나는 부르디외의 구별짓기를 생각한다.

 

 

뼈속까지 절어버렸다.

부르디외의 '구별짓기'는 해독하기 어려운 사회학저서이고

나는 그런 글을 읽으면서 '구별된' 나를 바라보고

그저 슬퍼할 뿐이다.

 

저항은, 어떤 문화로 존재해야 하나요? 부르디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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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26 17:53 2006/12/26 17: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