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코

from 그림 2007/01/23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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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23 18:50 2007/01/23 18:50

외롭긴 해

from 그림일기 2007/01/23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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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23 18:15 2007/01/23 18:15

개토

from 그림일기 2007/01/23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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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23 17:14 2007/01/23 17:14

자리

from 그림일기 2007/01/23 16:59

어떤 자리에 가면 누구나 그 자리에 맞게 행동하게 되게 마련이다.

그 모든 행동들이 너무 불편해서

나는 혼자 있기로 했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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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23 16:59 2007/01/23 16:59

까칠하기

from 우울 2007/01/23 16:28

최근 나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평가는 "까칠하다"는 것.

그냥 내 스타일의 대화방식이다.

나는 내 까칠함 뒤에 숨겨진 무언가를 읽는 사람하고만 말하고 싶어한다.

 

까칠하지만 그럭 저럭 지낼만 한 인간이야, 라고 평가해주는 사람들에게 사실 감사하고 있다.

해야할 일이 많은데 잊기 위해서 책을 들어다가 이리저리 넘겨보았다.

 

김 현의 글은 재미있지만, 아무래도 '선생님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 단점이다.

 

 

야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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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23 16:28 2007/01/23 16:28

행복한 책읽기

from 책에 대해 2007/01/23 16:13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만이 교과서적인 것은 아니다. 익명의 권위가 집단화될때 그것이 가르치는 것은 다 교과서적이다. - 그것에 맞는 소재를 찾는 노력 외에는 그가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해석의 틀은 준비되어 있으니까 소재만 있으면 된다.

 

p117

 

타자의 철학 : 공포는 동일자가 갑자기 타자가 되는 데서 생겨난다. 타자가 동일자가 될때 사랑이 싹튼다. 타자의 변모는 경이이며 공포다. 타자가 언제나 타자일 때 그것은 돌이나 풀과 같다.

 

p 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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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23 16:13 2007/01/23 16:13

시칠리아의 암소

from 책에 대해 2007/01/23 15:56

카이유와가 자신의 의견을 가미하여 전개시킨 그의 의견을 따르면, 인간은 노동을 통해 이성의 세계를 건설하지만, 인간의 내부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폭력이 도사리고 있다. 자연은 본래부터 난폭하다. 그 폭력을 다스리기 위해 원시인들은 이성적 시간과 신적인 시간을 나눈다. 이성적 시간, 다시 말해 세속적 시간은 일상의 시간으로 금기를 준수하는 시간이다. 신성의 시간이란 축제의 시간으로 금기를 위반하는 시간이다. 성적인 측면에서 볼때, 신적 시간이란 성적인 방종의 시간이며, 종교적인 차원에서는 살해금기를 위반하는 시간이다. 현대사회에서는 그 신성한 시간이 점점 없어져가고 있다. 신성의 시간이 없어지면, 남는 것은 이성적 시간뿐이며, 이성적 시간만이 남게 되면, 폭력을 다스릴 방법이 없게 된다. 이성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폭력이다. 바타이유는 카이유와의 이론을 받아들여, 현대 사회의 소회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금기 위반의 이론을 내세운다. 금기 위반의 시간이 많아지지 않으면, 폭력은 더욱 난폭해진다.........바타이유의 철학은 금기위반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가는 철학이다. 그가 사드에 대해 계속 관심을 표명하고 포르노 소설을 계속 쓰는 것은 그런 이론적 성찰때문이다. 그는 가능성의 극단, 극단적 삶, 철학적 극단, 쉽게 말해 위반의 철학을 수용하지 못하는 철학은 결국 실패하고 말 것이라고 말한다. 위반이야 말로 인간 내부에 있는 폭력을 잠들게 하는, 아니 바르트의 말을 빌면, 폭력을 속이고 피해가는 한 방법이다.

 

p 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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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23 15:56 2007/01/23 15:56

시칠리아의 암소

from 책에 대해 2007/01/23 15:41

그 문학은 사드, 아르토, 루셀, 초현실주의, 카프카, 바타이유, 블랑쇼로 이어지는 체험의 자리이다. 거기에서 인간은 육제적 죽음과 언어의 죽음을 동시에 맛본다. 그는 죽어가고 있다. 남아있는 것은 글쓰기의 모험뿐이다.

p 151

 

자기 소모적인 글에서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은 네르발은 계속 글을 썼으나 완성된 작품을 남기지 못했으며, 그것이 그의 존재 이유라는 것이다.

 

p 152

 

사유하는 주체 대신 사유의 사유를 대상으로 삼으면, 진/위와 관계 없는 사유, 통일성이 없는 사유, 그러면서도 사유라는 점에서는 통일성이 있는 사유가 살아남을 수 있다. 그 사유라는 주제 체계 속에서는 누가 말하든 관계없다(베케트), 혹은 무엇을 말하든 관계없다. 사유란 "모든 체계 내에서 그것을 벗어나는 움직임" 자체이다. ............그 사유야말로 자신의 본질을 찾아 ?g황하는 시대의 문학, 자신의 본모습을 찾기 위해 항상 다시 시작하는 시대의 문학이라는 블랑쇼적 문학, 아니 문학적 체험의 본질 그 자체이다................................. 문학도 "글쓰는 주체로서 자신에게 말을 하여, 자신을 태어나게 한 움직임 속에서 온갖 문학의 본질을 다시 파악하려 애쓰는" 문학만이 그의 주의를 끌며, 철학도 "무한한 지평 위에 놓인 끝없는 작업"으로서의 철학만이 그의 주의를 끈다. 자신의 본질에 대해 사유하는 사유야말로 모든 전도. 전복의 기본 원리이다.

 

체계에서의 벗어남은 지배적 규칙, 법칙에서의 벗어남이며, 그런 의미에서 지배적 권력에서의 벗어남이다. 사유의 사유는 체계에서의 벗어남이며, 권력에서의 벗어남이다. 그것은 역으로 모든 사유는 체계에 의해 권력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을 뜻한다.

 

 

 

 

권력이 담론을 조정하는 것은, 그것이 권력을 행사할 위험을 제거하고 그것 때문에 뜻하지 아니한 사건들이 생기는 것을 막고, 그것이 오래 지속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권력이 담론을 규제하는 절차는 대개 세 부류로 나뉠 수 있다.........세번째 부류는 말을 하는 주체에 대한 제한이다. 담론의 보존, 생산, 분배의 법칙을 고수하는 담화회(한국의 예를 들자면, 판소리 전수회), 말하는 주체를 예속시키고 그들을 모아 집단을 이루게 하는 주의, 주장(계속 한국의 예를 들자면, 운동권의 주의, 주장), 교육 등이 그 예들이다.

 

p154~155

 

 

 

"오늘날의 글쓰기는 표현의 주제를 뛰어넘었다." 그것은 내용에 따라서라기보다는 시니피앙의 본질에 따라 놓여진 기호의 놀이이다. 그것은 언어의 한계를 자꾸 위반하고 넘으려 한다. 다시 말해 글쓰기는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행위의 과시가 아니라, 저자 대신에 시니피앙들이 솟아오르는 공간의 획득이다. 저자는 사라져가고 기호들의 놀이는 심해진다. 그러니 글쓰기는 당연히 저자의 죽음과 연결된다.

 

 

그런데 현대에서 작가의 삶은 작품 속에 들어가 불멸성의 근거가 되는 대신, 작품을 쓰면서 희생해야 할 어떤 것이 된다. 글쓰기에는 개인성이 제외되고, 개인은 노동하다 죽는 누군가가 된다.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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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23 15:41 2007/01/23 15:41

결론

from 우울 2007/01/23 14:41

학식 있는 자가 예술에 대한 사랑으로 행하는 순전히 유아론적인 행위가 시라고

 

폴 발레리는 규정했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나는 시를 쓰려고 한다.

자신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좋은 시를 쓰고 싶다.

나에게 시라는 것은, 그림이고 글이고 소설이거나 삶이다.

 

누군가 나에게 비열한 인간이라고 비판한다면 나는 변명하지 않고 부끄러워하겠다.

나는 그런 비판을 받을 만한 비열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폭력과 고통에 대해 모르는 척하기도 하고

알더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로써

나는 비열하다.

 

그리고 무책임하다.

나는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고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시를 쓰는 것 뿐이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 아주 오랫동안 고민해 왔고

그 고민조차도 비난받아 마땅한 시에 불과하였다.

용서를 바라지 않겠고 비겁하게 속이지도 않겠다.

 

시를 쓰는자, 그것이 나다.

 

 

 

지겨워 죽겠다. 알겠으니 이제 그만 좀 하삼.

 

하지만, 누구나 자기 이야기를 반복해서 해야만, 정체성을 잃지 않잖아.

다들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나는 자꾸 하면 안돼?

 

응, 안돼. 쿨해지란 말이다. 바보갯호. 라기 보다는 소재를 좀 다양화 시켜봐.

세련되게.

그게 낫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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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23 14:41 2007/01/23 14:41

내이름은 빨강

from 그림일기 2007/01/22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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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22 21:35 2007/01/22 21: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