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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05 13:16 2007/01/05 13:16

스캐너 고장

from 우울 2007/01/05 12:55

여차 저차 하여

안팎으로 대대적인 변화를 줄 마음으로

블로그 이름도 바꾸고 블로그 이미지도 바꾸고 설명글도 바꾸고

기타 등등 바꾸려고 했는데,

 

스캐너가 고장났다.

 

사실 스캐너는 고장난지 이주일이 넘었다.

언제 산건지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대략 6살은 넘은 것 같은데

스캐너 나이 6살이면 늙은건가?

 

고치는 비용보다 사는게 쌀거라는 조언을 AS센터 아저씨한테 듣기는 했는데,

잠시 인터넷을 뒤져보니 무난한 스캐너 하나 사려면 10만원쯤 필요한 것 같다.

현 시점의 개토에게는 10만원이 무지 무지 큰 돈이다.

다음주부터 잘 하면 돈을 벌지도 모르지만, 아직 확정된 것도 아니고...

 

흠......

 

일단 디카로 어떻게든 개겨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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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05 12:55 2007/01/05 12:55

조금 지쳐서...

from 책에 대해 2007/01/03 16:49

하나의 불안을 가라앉히기 위하여

한없이 다른 불안들을 무릅쓰기까지 하려는 것이 나의 운명이다.

 

루이 알튀세,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첫 페이지 마지막 문장

 

 

진정으로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삶에서 단지 하나의 인위적 존재였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으며, 또 내가 그들을 유혹함으로써 사랑하고자 했고 또 동시에 그들의 사랑을 받고자 한 사람들, 그들로부터 차용한 인위적 수단과 사기라는 우회적 방법을 통해서만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을 수 있는 하나의 죽은 자였다.

그리하여 나는 사실 자신의 근육을 움직이고 사용하는 데 의식적으로 능숙할 뿐만 아니라, 특히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극단적으로 다른 사람들, 즉 내가 그들의 사랑을 받고자 하는 그 사람들을 유혹하고 조종하는 데 능숙한 한 존재에 불과했던 것이다. 나는 그러한 조작된 사랑을 통해 그들로부터 내 존재에 대한 확인을 기대했던 것이다. 내가 시도한 유혹이 실패했을 때에만 내 의식 속으로 파고드는 그 막연한 불안 속에서 내가 끊임없이 그리고 끔찍하게 회의를 품게 되는 그러한 존재에 대한 확인을.

 

루이 알튀세,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10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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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03 16:49 2007/01/03 16:49

그래...

from 우울 2007/01/03 15:46

그래, 결국 나혼자 심각한거다.

맨날 잠도 잘 못자고 밥도 잘 못먹고

뒤척여 가며 낑낑댈 적에

 

차라리

무언가를 하지 그랬니...

 

라고 이야기해봤자 나라는 인간은 시간이 아까운 줄도 모르고 시간에는 관심도 없으니

맨날 이지경인 것이다.

 

너무 무거운 것은 너무 가볍다. 가벼워서 훅 불면 날아가 버린다.

지저분한 흔적만 남기고.

 

실수로 블로그 홈에 글을 게시해 버렸다.

괴롭다...ㅠ_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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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03 15:46 2007/01/03 15:46

문제는 무엇인가

 

그들이 나를 인정하는가

내가 그들을 인정하는가

 

너는 아주 넓은 의미에서 좌파인가

좌파가 아니라면 이곳에 있을 수 없는 건가

 

명확하게 적으로 판명되지는 않지만 거북한 '너'라는 존재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나는 그들의 저항을 지지하지만, 나 스스로가 그들의 적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어

 

나는 좌파이고 동시에 좌파가 아니며

아나키스트이기 때문에 아나키스트가 아니다.

 

그들은 결코 나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나역시 결코 그들중 하나가 될 수 없을 것인데

 

 

 

 

 

몇년이라는 시간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시간은 숫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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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03 15:12 2007/01/03 15:12

좌파

from 우울 2007/01/03 14:15

좌파라고 스스로를 이름짓는 사람들이 누구보다 텍스트에 빠져있다는 것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다.

진보블로그에 올라온 글들만 봐도 그들이 얼마나 텍스트를 맹신하는가 혹은

남들이 다 읽은 텍스트를 읽지 못할까봐 안달인가, 혹은 텍스트에서 답을 발견하게 되지 않을까

에 대해 강박증적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사실 그들이 은밀하게 '텍스트의 즐거움'을 즐기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순수한' 텍스트의 즐거움은 우파의 것이어서

(그들은 세상의 모든 것을 두가지로 나눌 수 있다. 옳은 것과 옳지않은 것, 좌파와 우파)

그들은 모든 텍스트에서 '좌파적 상상력'이라는 불가능한 장치로

(좌파적 상상력이란 불가능하다. 좌파적인 것은 언제나 정치적인 것이어서

그 어떤 상상도 좌파적 강령에 의거하므로 그것든 결코 상상력일 수가 없다.)

텍스트에서 도덕적 근거들을 걸러내려는 시도를 한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여송연을 피웠듯이,

그들은 그런 텍스트의 여과과정에서 나오는 불순물들을

오히려 즐기고 있으며

어쩌면 그들 대다수는 민중들보다 더 많이 즐길 기회를 가지고 있다.

 

한편, 과연 '순수한' 텍스트의 즐거움은 우파의 것인가?

결코 그럴 수는 없다.

좌파가 '중성적인 것'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우파의 손에 들어가버렸을 뿐이다.

[즐거움은 오성과 감성의 논리에 종속되지 않는다. 그것은 표류이자 동시에 혁명적이며 비사회적인 그 무엇으로 어떤 집단이나 심적 상태, 개인어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중성적인 그 무엇? 텍스트의 즐거움이 파렴치한 것으로 간주된다는 것은 명백하다. - 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 중 우파 중에서 -]

 

최근 좌파들은 그 즐거움의 거대한 힘을 발견하고

그 즐거움을 자기식대로 해석해서 권력을 가지기 위한 도구로 사용해보려 애쓰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는 말하고 싶다.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고.

문학적인 어떤 텍스트도 정치적일 수 없다.

정치적이게 되는 순간 문학적일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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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03 14:15 2007/01/03 14:15

용기

from 우울 2007/01/03 13:25

용기를 얻기 위해 바르트를 읽다.

 

글쓰기를 통해 내가 설 자리는 어디일까?

 

결국은 어떤 나를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이고

남들이 보기에는 우스웠을지 모르나 나 자신에게는 굉장한 싸움이었다.

그 싸움은 너무나 지지부진 하여 나는 그 싸움의 중간에 끼어 아무것도 하지 못한채

몇년씩이나 넋놓고 있어야 했다.

나는 차라리 몇번씩이나 나를 없애버리고 싶었다.

 

93년 이후에 10년이 넘게 스스로 확신해 왔던 많은 것들을 외면해야 한다.

손에 닿고 만질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

그들과 함께 살고 노래하고 밥을 먹고 만져주고 울고 싸우는 것.

나는 그것이 가장 올바른 삶이라는 것을 알지만

 

 

내게는 이 삶이다.

나는 막연하지만 확실하게, 두가지 삶을 동시에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가치관과 도덕이 처음부터 없었던 곳으로 간다.

 

나는 이제 누구를 위해서도 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제 나 외에는 아무도 없는 허공에서 춤을 추기 위해 한 발을 내딛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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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03 13:25 2007/01/03 13:25

활기

from 책에 대해 2007/01/03 12:46

내가 만약 즐거움에 따라 텍스트를 평가하기로 한다면, 이 책은 좋고 저 책은 나쁘다라는 말은 할 수 없다. 거기에는 수상자 목록도 <비평>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비평은 항상 전략적인 목적, 사회적인 효용성, 또 대개는 상상적인 포장만을 연루시키기 때문이다. 나는 텍스트가 이것은 지나치고 저것은 충분치 않다는 식의, 그런 규범적인 술어의 유희에 가담할 만큼 완벽해질 수 있다고는 측정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다. 텍스트(이것은 노래를 부르는 목소리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는 내게 있어 전혀 형용사적인 것이 아닌 바로 이거야! 혹은 내게는 바로 이거야! 라는 판단만을 나타내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내게는>이라는 말은, 주관적인 것도 실존적인 것도 아닌 니체적인 것이다(...[결국 그것은 항상 똑같은 질문이다. 이 내게는이란 것이 과연 무엇일까라는...?] )

 

텍스트의 활기는(그것 없이는 요컨대 텍스트가 존재하지 않을), 그 즐김에의 의지일 것이다.

텍스트가 요구를 초과하고, 옹알이를 극복하며, 이데올로기와 상상계가 물밀듯이 들이닥치는 언어의 문들인 형용사들의 사슬을 쳐부수고 넘쳐흐르는 바로 거기에서.

 

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 중 '활기' 중(볼딕은 저자)

 

 

 

누구나 뭔가를 좋아하거나 사랑할 때, 그렇게 말한다. 내게는 이라고.

보르헤스는 [불한당들의 세계사]를 S.D에게 헌정하며,

 

.... 나는 여하튼 잃고 있지 않은 내 자신의 핵 - 언어로 다루어질 수 없고, 꿈과 교환될 수 없고,

그리고 시간과, 환희와, 불행에 범접당하지 않은 가슴 깊은 곳 - 을 그녀에게 바친다.

 

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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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03 12:46 2007/01/03 12:46

옹알이

from 책에 대해 2007/01/03 12:37

그러므로 모든 작가는 이렇게 말하리라. 미치광이는 될 수 없으며, 감히 건강하다고 말하지는 못하며, 그래서 신경증에 걸린 것이라고.

당신이 쓰고 있는 텍스트는 그것이 나를 욕망하고 잇다는 증거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 증거는 존재한다. 그것은 글쓰기이다. 글쓰기는 언어즐김의 학문이며, 그것의 카마수트라이다(이 학문에는 다만 글쓰기라는 개론서만이 존재한다).

 

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 중 '옹알이'  중

 

 

 

 

바르트의 글 속에 새로운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새롭게 자극하여,

나는 그의 글쓰기를 통해 아주 천천히 오르가즘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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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03 12:37 2007/01/03 12:37

긍정

from 책에 대해 2007/01/03 12:29

텍스트의 즐거움

 

내 삶의 유일한 열정은 공포였다 - 홉스

 

긍정(Affirmation)

텍스트의 즐거움, 그것은 베이컨의 가상장치처럼 결코 변명하지 않으며, 결코 설명하지 않는 것 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그것은 결코 아무것도 부정하지 않는다. [나는 내 시선을 돌릴 것이다. 이것이 이제부터는 내 유일한 부정이 될 것이다.]

 

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 맨 첫페이지(볼딕은 저자에 의한 것)

 

 

 

 

훗, 웃음이 나왔다. 97년에 샀던 이 책에,

며칠전 내가 이를 앙다물고 썼던 문장이 그대로 들어있다.

 

정치적이거나, 문학적이거나 둘 중 하나만 가능하다.

아무것도 부정하지 않는 나는 문학적 시선을 견지하는 수밖에.

 

진보블로그에서의 내 정체성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아이러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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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03 12:29 2007/01/03 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