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

from 책에 대해 2006/12/26 18:56

개토님의 [문화적 저항] 에 관련된 글.

사실은,

아주 개인적인 의미에서 구별짓기를 다시 읽어야 했을 뿐이었다.

해묵은 습관이 어디선가 고개를 쳐들어

처음 쓰려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쓰고 말았다.

다시 원래 쓰려던걸 쓰려다가

먼저 덧글들을 읽어버렸는데, 생각의 가지가 가지를 쳐서

그리고는 길을 잃었다.

 

생각보다 블로깅은 어렵다.

 

블로그를 사용한다는 것은 소통을 원한다는 적극적 표현일텐데,

소통이라는 것을 믿는다는 증거와도 같은 것일텐데

 

습관적으로 극단적 해석을 해버리게 된다...

 

내가 옳다는 믿음에 대한 반성,

어쨌든 그걸 위해 구별짓기를 읽었던 거라는 점을 기억해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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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26 18:56 2006/12/26 18:56

문화적 저항

from 책에 대해 2006/12/26 17:53

개토님의 [구별짓기] 에 관련된 글.

 

이 책의 연구에서 요구하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음을 의미한다.

즉 의도적 건망증이라고도 말해지는 것에 의하여 문화에 관한 온갖 교양화된 담론 전체를

기꺼이 포기하는 것이고, 그것에 의해서, 단순히 (기성질서에의) 승인이라는

과시적 기호에 의해 확보되는 이익을 포기하는 것만이 아니라

교양에 따른 즐거움이라는 보다 내밀한 이익의 포기도 함축한다.

 

부르디외, 구별짓기 중에서

 

 

 

참으로 무서운 문장이다.

[구별짓기]를 읽으면, 문화적 저항의 한계를 보게 된다.

문화적 저항은 자본주의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는 슬픈 이야기.

 

경제자본은 없지만 문화자본을 풍족하게 맛보고 자라난 '문화귀족'으로서

그러한 자신을 자각하고 있는 '문화귀족'으로서,

 

페미니즘이 '문화귀족'들 사이에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으면서

자본주의에 무기력하게 이용당하는 모습,

저항의 음악이 가장 잘 팔리는 음반이 되어 부르주아지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내고

'~이즘'들이 그저 멋지구리한 아이콘들로 자리잡은 것을 볼때

몇몇 지식인들만이 전유하는 생활양식으로서의 저항을 볼때

 

나 스스로의 저항이 아주 개인적이고 부르주아적인 욕망의 발현에 불과했다는 것을

마주보게 될때

'본질적인 예술인'인 양 아무것도 책임지려 하지 않고

30년동안 읽어오고 보아온 문화들에 의해 만들어진 에토스를 내 것인양 표현할 때

 

나는 부르디외의 구별짓기를 생각한다.

 

 

뼈속까지 절어버렸다.

부르디외의 '구별짓기'는 해독하기 어려운 사회학저서이고

나는 그런 글을 읽으면서 '구별된' 나를 바라보고

그저 슬퍼할 뿐이다.

 

저항은, 어떤 문화로 존재해야 하나요? 부르디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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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26 17:53 2006/12/26 17:53

구별짓기

from 책에 대해 2006/12/26 17:02

예술과 문화 소비가 애초부터 사람들이 의식하건 그렇지 않건

또는 원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전혀 상관없이 사회적 차이를 정당화하는

사회적 기능을 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예술가의 생활양식은 언제나 부르주아적 생활양식에는 도전으로 비칠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이들은 부르주아적 생활양식이 추구하는 가치나 권력들이 전혀 공허함을

실제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그러한 생활양식이 전혀 현실적이지 않고 터무니없다고 비난하기 때문이다.

미적성향을 규정하고 있는 세계와 중성적 관계를 맺으려면

잠재적으로 부르주아적 자기투입의 자세가 요구하는 진지함의 정신을 전복해야한다.

예술을 생활양식의 토대로 만들 수 있으며, 따라서 문학에 대한 기억이나 회화에 대한

이러저러한 언급을 통해 세계나 타인을 바라볼 수 있는 수단을 결여하고 있는

사람들이 내리는 지나치게 윤리적인 평가와 마찬가지로 예술가와 심미주의자들이 내리는

'순수하고', 순전히 미적인 평가는

나름대로 독특한 논리를 갖춘 에토스의 여러성향에서 유래한다.

하지만 문화자본은 풍부하지만 경제자본은 빈약한 특정집단에

특유한 성향이나 이해관심과의 관계를 간파하지 못하는 한

예술가들이나 심미주의자들은 계속 정통성을 요구하기 때문에

서로 상대화하는 여러 취미들이 끊임없이 유희를 하는 과정에서 자신들도 모르게

일종의 절대적인 참조사항을 제공하게 된다.

이리하여

이들은 역설적이지만 본인들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타고 태어난 성향'을 절대적 차이로 만들려고 하는

부르주아지의 요구를 정당화시켜주게 된다.

 

 

 

정통 문화에 대한 규정을 둘러 싸고 예술가들과 지식인들이 벌이는 논쟁은

단지 지배계급의 다양한 분파들이

사회적 투쟁의 정통적인 투쟁목표와 무기에 대한 정의를 부과하기 위해,

다시 말해 경제자본과 학력자본, 또는 사회자본과 사회적 권력(각 권력의 구체적인 효율성은 특히 상징적 효율성, 즉 집단적 신념에 의해 공인되고 위임된 권위 때문에 배가된다)의 정통적인 지배원리를 규정하기 위해 벌이는 끝없는 투쟁의 한 측면일 뿐이다.

지배분파와 피지배분파들(이들 자체가 지배계급 전체의 장과 상동적인 구조속에서 조직되는 여러 장을 구성하고 있다) 간의 투쟁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재번역해보면

-그리고 여기서는 피지배분파들이 주도권과 통제권을 갖고 있다 -

그것은 지배적인 견해가 지배계급과 피지배 계급들 간에 설정하는 대립항들로

그대로 이항가능한 대립항에 의해 조직되는 경향이 있다.

한편으로 자유, 무사무욕, 승화된 취향의 '순수성', 내세에서의 구원,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필요, 이해관심, 물질적 만족의 비속함, 현세에서의 구원이 대립된다.

이로부터 '부르주아지'에 맞서 예술가와 지식인들이 생산해내는 모든 전략은 필연적으로

아무런 명백한 의도 없이도 이들이 생성되는 공간의 구조덕분에 이중적 효과를 가져오는 행동의 도구가 되는 경향이 있다.

즉, 민중적, 물질적 이해와 부르주아적 이해 양자에 대한 어떠한 형태의 종속도

무차별적으로 거부하는 도구가 된다 .....[중략].....

부르지아지들이 피지배계급들과 비교해 자신들은 '무사무욕', '자유', '순수성', '영혼' 쪽에

서 있음을 표시함으로써 다른 계급들이 자신들을 겨냥하고 만든 무기들을

다른 계급들에게 되돌리려 할 때마다 자신들에게 적대적으로 생산된 예술을

그토록 손쉽게 자신들의 탁월함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플라톤이 요구한 대로 즐거운 진지함, 즉 '진지함의 없는 정신'이 없는 진지함,

항상 진지할 것을 전제로 하는 유희를 통해 진지함을 즐기려는 문화게임을 진행해나가려면

반드시 예술가들처럼 존재 전체를 일종의 어린아이들의 게임처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질 필요는 없지만 최소한 오랫동안, 때로는 평생동안 세계에 대해 어린아이와 똑같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모든 어린아이는 부르주아로서 삶을

시작하며 타인에 대해 마술적 관계를 맺으며, 타인을 통해 세계에 대해 마술적 관계를 맺지만 조만간 그러한 세계로부터 벗어나온다).

 

 

이 책의 연구에서 요구하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음을 의미한다.

즉 의도적 건망증이라고도 말해지는 것에 의하여 문화에 관한 온갖 교양화된 담론 전체를

기꺼이 포기하는 것이고, 그것에 의해서, 단순히 (기성질서에의) 승인이라는

과시적 기호에 의해 확보되는 이익을 포기하는 것만이 아니라,

교양에 따른 즐거움이라는 보다 내밀한 이익의 포기도 함축한다.

 

 

부르디외, 구별짓기 중에서

 

 

"예술가의 삶의 발명" 이라는 책을 읽고 싶은데, 번역이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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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26 17:02 2006/12/26 17:02

블로그 지키기

from 우울 2006/12/21 19:51

원래는 술자리에 갈지도 몰랐는데,

멍하게 친정같은 사무실에 와서 그냥 앉아있다.

갑작스레 너무 많은 사람들 만나기가 좀 무섭기도 하고...

아마도 진보블로그 들어오는 사람들 중 꽤 다수가 그 술자리에 가있을듯...

그래서인지 진짜 도배가 되는 듯...

 

블로그는 내가 지킨다.

 

친구가 네이버같이 아무나 밟고 다니는 너무 열린 블로그 말고

좀 작고 조용한 블로그 동네에 방을 개설하고 싶다기에

진보블로그를 소개했더니

이름이 너무 부담스럽다는 대답이었다.

"그런 곳에 가면...괜히 미안해지고...그렇잖아..."

 

뭐라 할말이 없어서

그냥 밥만 열심히 먹었다.

 

 

술먹으로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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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21 19:51 2006/12/21 19:51

사람과 바다

from 우울 2006/12/21 19:28

예전에 학교에,

날적이라고 흔히 통칭되던 노트가 방마다 굴러다니곤 했는데

내가 살던 방에는 [디오니소스 연가]라는 제목이 매직으로 대충 쓰인 허접한 노트가 있었다.

매번 바뀌는 데도 매번 굳이 그렇게 허접한 노트만 고집해야 했던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그게 우리 방의 분위기였다.

 

사람들을 보고 싶어 왔는데, 와보니

그 노트에 한 여자 선배가 적었던 글이 생각이 났다.

 

구절 구절 기억할 수는 없지만...

 

사람은 바다와 같다.

멀리 있으면 가슴저미게 보고 싶고 그리운데

막상 곁에 가보면 손에 잡을 수 없고 더 멀게 느껴지기만 한다.

 

는 내용이었다.

그래도 나는 바다를 보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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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21 19:28 2006/12/21 19:28

블로그 할매

from 우울 2006/12/21 19:21

그녀야 워낙 인생이 다채롭고 쓸모가 많아 보이는데다가

데려다 일 안시키고 그냥 두기만 해도 사람을 기쁘게 해주는 재주가 있으니

데려갈만한 이유가 있겠지만

 

개토는 데려가면

대략 난감X10000 일터이니

나는 두려운 게 없다.

 

그래! 도배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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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21 19:21 2006/12/21 19:21

고래

from 책에 대해 2006/12/21 19:18

'고래'라는 책을 읽었던 곳에 다시 놀러와서

결국 그 책을 끝까지 모두 읽어버렸다.

나는 그 책을 쓴 작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기억에 남지 않는 흑백의 사진과 '천명관'이라는 이름.

 

참 같은 시대를 살고 있구나...하는 느낌이 드는 사람이었다.

그가 읽는 책과 보는 영화와 만나는 사람들이

나와 많이 다르지 않겠구나...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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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21 19:18 2006/12/21 19:18

There was A dark chocolate cake with lots of layers...

 

누군가의 블로그에 가니 이런 문장이 놓여있었다.

상상만으로도 몸이 녹는 느낌.

 

There was A dark chocolate cake with lots of layers...

There was A dark chocolate cake with lots of layers...

There was A dark chocolate cake with lots of layers...

There was A dark chocolate cake with lots of layers...

There was A dark chocolate cake with lots of layers...

 

dark chocolate 에 묻혀 잠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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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21 10:36 2006/12/21 10:36

엉망이야

from 우울 2006/12/20 20:02

오랫만에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했다.

긴시간도 아니었는데, 녹초가 되어서는 집에 돌아와 낮잠을 자고

말도 안되는 상상을 했는데

글로 옮기니 대체 적합하지가 않아

속이 상했다.

 

모든 게 엉망이라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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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20 20:02 2006/12/20 20:02

케이

from 2006/12/20 19:58

아침에 케이가 사라졌다.

불의 제단 위에 스스로 올라가 태양을 향해 날아갔다.

나의 열여섯살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 앞에서

알몸으로 불속으로 걸어들어갔다.

나는 이제 완전하지 않은 존재가 되었다.

그녀는 불 속에서 웃고 있었다.

 

 

 

케이는 나의 여자다.

그녀는 나와 한날 한시에 태어났다.

나를 위해 태어난 여자다.

나를 완전하게 하기 위해.

나는 신과 같은 존재로서 여성과 남성이 하나인 존재이고

그녀는 나의 여성인 것이다.

그녀는 나를 위해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가 나를 잉태하기 위한 밤을 보낼 때

다른 6명의 아이들과 함께 잉태되었다.

주술사는 그의 스승인 주술사로부터

한 남자가 한번에 7명의 여자를 임신시킬 수 있게 하는 마술을 배운다.

그리고 평생에 단 한번, 혹은 두번 그 마술을 사용한다.

 

그 때 만들어진 아이들 중 남자아이들은 모두 죽었다.

어떤 남자아이도 나와 함께 태어날 수는 없다.

여자아이들 중에서도 케이만이 살아남았다.

그녀는 운 좋게 나와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조금 일찍 태어나거나 너무 늦게 태어나

나온 자리에서 물 속으로 집어넣어졌다. 나온 곳으로 돌아가 버리게 하는 것이다.

케이를 낳은 여자는 아마도 말이나 소에게 사용하는 약초다린 물을 마셨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그녀 역시 죽었다.

왕이 내린, 인간을 가장 행복하게 해주는 약을 먹고 죽었다.

 

케이에게 연결된 사람은 이 세상에 나뿐이다.

그녀를 돌보는 유모는 눈도 보이지 않고 말도 하지 못한다.

나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늙어 케이에게 옷을 입히고 있는지

나무토막에게 옷을 입히고 있는지조차 구분할 수 없는 그녀는

케이를 처음 돌보기 시작할 때부터 그렇게 늙어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녀가 세상에 없는 것처럼 그녀를 대했다.

 

케이는 아주 작다.

나는 자주 그녀의 빵이나 고기조각을 빼앗아 먹곤 했는데

그녀는 그냥 빼앗기기만 했다.

다른 아이들처럼 울거나 떼쓰지 않고

눈을 가늘게 뜨고는 무언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남은 야채와 빵부스러기를 먹고나면

나같은 것은 관심도 없다는 듯 어디론가 사라지곤 했다.

 

성안에는 방이 아주 많아서 나는 그녀를 찾아 온 방을 헤집고 다녔다.

할머니가 계셨다는 어두운 방의 녹색커튼 뒤에서

도자기로 만든 커다란 화덕 안에서,

그녀 방에 있는 오래된 옷장 속에서 나는 그녀를 찾아냈다.

그러면 그녀는 그 서늘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자신만의 세상속에서

성안으로 갑자기 내동댕이쳐진 것이 못내 야속하다는 듯 내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었다.

 

그녀는 작고 까맣고 단단하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그녀를 발견하면 그녀 곁에 가만히 있기 시작했다.

그녀의 어깨 옆에 앉아 그녀의 목덜미를 바라보며

작은 숨소리를 숨죽여 들었다.

 

그녀는 옷을 벗어 잘 펼치고 모아 그 안에 편안하게 들어가 앉는다.

자신의 몸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만지기 시작한다.

왼손 두번째 손가락끝을 오른손 새끼 손가락에서 손목으로 움직여 잠시 멈춘 다음

다시 손목에서 엄지손가락끝으로 움직인다.

손가락은 나비처럼 가볍게 앉아있다가 다시 둥글게 날기 시작한다.

손가락 하나 하나를 건드리며 날아서는 손바닥 가운데를 거쳐

손목의 돌출된 부분위에 가 앉는다.

손바닥과 손가락 전체를 이용해서 팔전체를 빠르게 흝는다.

그리고 두번째 손가락과 엄지손가락으로 팔안에 든 굵은 뼈들과 힘줄들을 음미한다.

양팔을 다 끝낸 후에는 머리채를 틀어올리며 머릿속을 헤집기도 한다.

눈뼈와 콧날, 귓볼, 살짝 열린 입술과 그 사이의 이까지 손가락들로 잘근잘근 씹고나면

양손의 두 손가락으로 목 뒤의 파인 곳을 거쳐 어깨와 가슴골, 가슴 아래의 흉골을

신중하게 더듬는다.

잃어버린 뼈조각이라도 찾듯, 그녀는 매우 심각하게 보인다.

흉골에서부터는 조금 빠르게

허리와 엉덩이를 지나 종아리까지를 스치듯, 그러나 빠뜨리지 않고 지나간다.

그녀의 손은 모든 순간을 아쉬워 하는 듯 하면서도 단호해서 나는 숨이 멎는다.

그리고 나면,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발이 등장한다.

그녀는 손가락 전체를 이용해서 발가락들과 손가락들을 만나게도 하고

작은 뼈들을 조곤조곤 쓰다듬는다.

 

그 의식은 언제나 그녀의 가장 보이지 않는 곳에서 끝이 난다.

가늘게 열린 눈꺼풀 사이로 드러난 눈동자는 그 어느 곳도 바라보지 않고

그녀 내면으로만 열려있다.

입술과 이와 혀를 통해 새어나오는 작은 숨소리 역시 그녀만을 위한 것이다.

가슴이 하늘을 향해 휘어진다.

 

단 한번, 나는 그녀의 팔을 만진 적이 있다.

그녀의 손가락들이 너무나 즐거워보여서, 나도 모르게 손이 움직여진 것일 뿐이었는데

그녀는 나에게 눈길한 번 주지않고 옷을 입은 뒤 옷장 밖으로 나가버렸다.

커튼이나, 옷장, 화덕 밖의 그녀는 벽난로위의 유리인형같다.

투명하고 무겁고 위태롭다.

 

 

 

나는 이제 불완전하다.

두려움에 떨고 있다.

내 안에서 차가운 불꽃이 일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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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20 19:58 2006/12/20 19:58